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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배신 - '긍정의 배신'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워킹 푸어 생존기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배신 시리즈
바버라 에런라이크 지음, 최희봉 옮김 / 부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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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배신.

 

 

 

 

 

 

  많은 사람들이 즐겨 읽었고, 대학수학능력시험에서 언어 영역의 지문으로 출제되기까지 했었던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은 여러 작품을 하나로 묶은 일종의 연작소설입니다. 이 책은 프롤로그인 뫼비우스의 띠, 에서부터 시작해 에필로그, 에서 이야기는 끝이 나는데 각각의 이야기들은 얼핏 읽기에는 주인공들도 이 주인공이 나왔다가 저 주인공이 나왔다가, 하는 등 약간 혼란스러운 느낌을 주지만, 다 읽고 나면 하나의 거대한 주제 아래에서 정말 이야기들이 유기적으로 잘 짜여있구나,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지요. 그런데 이 책에 나오는 상징들을 살펴보면, 수학 분야에서 이용되는 도형들을 그 상징으로 사용한 경우가 등장합니다. 프롤로그의 제목인 뫼비우스의 띠, 는 저 유명한 뫼비우스의 띠, 그러니깐 하나의 띠를 잘라서 안과 밖의 구분이 없게 한 번 꼬아 만든 띠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물론 정작 저 이야기에서는 뫼비우스의 띠에 관한 이야기는 수학교사만 잠깐 언급하는 선에서 끝이 나지만, 책 전체의 프롤로그 격인 이야기에서 이런 이야기가 등장한다는 것은 이후의 이야기들과 주제의식에 어느 정도 관련이 있다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겠지요.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책을 계속 읽어가다보면, 다시금 뫼비우스의 띠, 처럼 비슷한 위상을 가지는 수학적인 상징이 등장합니다. 뫼비우스의 띠, 와 마찬가지로 한 이야기의 제목을 당당히 차지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클라인 씨의 병입니다.

 

클라인 씨의 병, 이야기는 근처 교회의 학생들이 나무껍질을 벗겨서 생활하는 한 애꾸눈 노인을 찾아오면서 시작합니다. 학생들은 애꾸눈 노인에게 설문조사를 하는데, 그 중에서 이런 질문을 합니다. 앞으로의 생활은 어떻게 변할거라고 생각하냐고 말이지요. 그러자 애꾸눈 노인은 모두가 예상하지 못했던 대답을 합니다. 자신의 삶은 앞으로 아주 좋아질 거라고 말입니다. 의아해하는 학생들에게 노인은 말을 덧붙이지요.

 

 

난 곧 죽을 거야.

 

 

애런라이크의 책 노동의 배신, 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 시작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가난한 사람들은 아무런 희망이 없고, 그 삶에서 무언가 이루겠다는 목표마저도 상실한 채 위의 노인과 마찬가지로 그저 하루하루를 죽지 못해 살아가는 상황이었고, 당시의 그런 상황에 대해서 저자는 누군가가 직접 잠입 취재를 해서 그 실태를 밝혀야 한다는 생각을 어느 편집장과 만나서 이야기하다가, 본인이 직접 그 상황에 뛰어들게 됩니다. 처음에는 막연한 상상만 하던 그녀였지만 직접 본인이 뛰어들어 일을 시작해보니 생각보다 더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게 웨이트리스 일과 요양원 일, 청소 용역 일과 월마트 일을 체험한 그녀는 그 경험들을 살려서 분석을 내립니다. 먼저,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이 그래도 죽지 않고 살아간다는 점에서, 혹시 가난한 사람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어떤 절약 방법이 않을까, 생각을 가지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책에서 저자는 그런 절약 방법은 전혀 존재하지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그저 목숨만 하루하루 연명해 간다는 것을 재확인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3요소를 의, 식, 주라고 부르지요. 의복은 회사에서 입도록 지정된 색깔의, 혹은 아예 형식이 제한된 의복을 입게 되고, 그나마도 단벌이라서 그것을 입고 식사를 하다가 그 위에 음식물을 흘리면 세탁비, 거기에 더 나아가 여차하면 새 옷을 구입해야만 했습니다. 주거 환경은 더욱 더 좋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대부분이 트레일러에서 잠을 자거나, 장기 모텔 투숙을 하는 현황이었고, 돈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여러 명이서 한 곳에서 밤을 보내는 경우도 허다했었습니다. 심지어 어느 곳에서는 한 방에서 이 위치는 누구의 것, 이 소파에서 잠을 잘 수 있는 사람은 누구, 등 이렇게 제한되어 있는 경우도 많았었지요. 저자인 애런라이크의 눈에 특히 더 불합리하게 보였던 것은, 이런 상황이라면 좀 주거환경에 드는 비용이라도 적어야 될 텐데, 주거환경을 구하는데 드는 비용도 만만치 않았던 것이지요. 그녀가 직접 집을 여러 곳에서 구해보면서 느낀 것은, 정말 가격과 그 가격으로 얻을 수 있는 효용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가격은 지나치게 그 효용에 비해서 높았고, 상대적으로 적절한 곳으로 보이는 곳도 일자리를 구한 곳과의 거리 및 교통비를 생각해보면 또 제외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이유들은 저자에게 왜 가난한 사람들이 비싼 돈을 주고 모텔에서 장기 숙박하는지, 혹은 불합리한 선택을 고르고 있는지 그 이유를 밝혀줍니다. 그들은 '선택'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지요. 그저 울며 겨자 먹기로 '강요'당하였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과연 가난한 사람들이 고를 수 있었던 식사는 다른 의, 주에 비해서 좀 더 상황이 나았었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부유한 사람들은, 그리고 심지어 중산층에 이르는 사람들마저 이렇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뚱뚱한 이유는 그들이 자기 관리를 안했기 때문이며, 그렇게 자기 관리를 안하는 사람들은 도태되어도 마땅하다고 말이지요.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이 구할 수 있는 음식물들은 그들의 예산 범위 안에서는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들, 즉석조리식품들, 패스트 푸드 뿐입니다. 요즘 슬로우 푸드가 몸에 좋다는 이야기들을 많이 합니다만,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일할 시간을 조금이라도 뺏는 슬로우 푸드는 사치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고열량의 음식들을 먹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느긋하게 먹을 수가 없다보니 자연스레 급하게 허겁지겁 음식을 먹게 되고, 여유가 있을때 한 번에 음식을 많이 먹는 등 건강에 좋지 않은 습관을 되풀이하게 됩니다. 악순환이 절대 끊이지 않는 것이지요.

 

 

다시 클라인 씨의 병, 의 이야기로 돌아가면, 난쏘공, 의 큰아들 영수가 이 병을 보게 된 것은 그에게 영향을 준 과학자의 공장 내 그의 방이었습니다. 거기서 영수는 ‘긴 대롱에 구멍을 뚫어 한 쪽 끝을 그 대롱에 넣어 만든 이상한’ 병을 보게 됩니다. 이 병이 바로 클라인 씨의 병, 인데, 이 병은 내부와 외부, 안과 밖을 구분할 수 없습니다. 앞서 보았던 뫼비우스의 띠와 마찬가지이지요. 처음에는 영수는 이 병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깨닫지 못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알게 됩니다. 클라인 씨의 병에서는 안이 곧 밖이고 밖이 곧 안이라는 것을. 닫힌 공간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병의 벽만 따라가면 밖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클라인 씨의 병의 세계에서는 갇혔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지요. 여기에서의 깨달음은 이윽고 영수가 은강 공단의 회장을 살해하려고 시도하는 것에 영향을 줍니다. 이 상징들, 뫼비우스의 띠와 클라인 씨의 병은 단순히 가난한 자가 부유한 자가 되고, 부유한 자가 가난한 자가 되는, 그리고 그런 차이마저도 사라지는 그런 의미를 넘어서, 가해자(은강공단의 총수)가 피해자가 되고, 피해자(은강공단의 노동자)가 가해자가 되는(이후 영수는 은강공단의 총수를 살해하려고 합니다.) 그런 아이러니한 상황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첫 번째 의미를 받아들여,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의 차이가 없는 공간이라면, 왜 이 공간은 이렇게나 부조리가 만연할까요? 그렇기에 여기서 더 나아가서, 클라인 씨의 병은 닫힌 공간처럼 보이는 곳에서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최소한 길잡이인 벽이라도 붙잡아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완전히 외부에서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클라인 씨의 병이 어디로 향하는지 쉽게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자체로 하나의 완결된, 외부와 내부 모두를 아우르는 클라인 씨의 병, 의 공간에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자신이 도대체 이 공간의 어디쯤 있는지조차 알 수 없지요. 그렇기에 영수는 벽이라도 붙잡기 위해서, 조그마한 변화라도 일으키기 위해서 총수를 살해하려고 나선 것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 노동의 배신, 은 인상적인 글귀로 마무리 됩니다. 언젠가는 노동자들이 자신들이 받아 마땅한 임금을 요구할 것이고, 엄청난 분노와 파업과 혼란이 만연할 것이지만, 그 날이 오더라도 하늘은 무너지지 않을 것이며 마침내 모두가 더불어 잘 살 거라고 말입니다. 이 노동의 배신, 에 나오는 노동자들 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워킹 푸어들에게 해당되는 말이겠지요. 지금은 ‘곧 죽기에 앞으로 더 좋아질’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하더라도 언젠가는 자신의 몫을 정당하게 평가받으며 받을 수 있는 그런 사회가 올지 모릅니다. 그런 사회를 위해서는 저 영수가 은강 공단의 총수를 살해하려고 했던 것처럼, 어떤 혼란이 선행되어야 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물론 살인은 정당화되기 어렵지만, 파업과 분노가 횡행하는 단계를 거칠 가능성이 높겠지요. 사실은 우리 모두 밖과 안이 구분되지 않는 그런 클라인 씨의 병에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지금의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의 격차가 생기는 것은 이 병의 공간의 어느 구석에 각각 서로 모여서 군집을 이루고 있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이는 일시적인 상황입니다. 어떤 부가 끝까지 계속될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그야말로 착각이지요. 노동자들이 병의 벽을 붙잡고 걸어온다면 언젠가 충분히 우리가 있는 곳으로 찾아올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뛰어난 철학자 데이비드 흄이 한 말을 조금 가져오겠습니다. 데이비드 흄은 회의주의를 극한까지 몰고 간 철학자로, 그의 논문은 아인슈타인에게 지적 영감을 주기도 했었다지요.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단지 이성만으로 결코 어떤 행위를 산출할 수도, 의지를 일으킬 수도 없으므로, 나는 동일한 능력이 의지를 방해할 수도, 감정의 선호를 반대할 수도 없다고 추론한다.’ 복잡한 문장이지만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그의 다른 말, ‘이성은 단지 열정의 노예이고, 노예이어야 한다.’ 와 그 의미하는 바가 일맥상통합니다. 이성은 그 자체로 사실 그 자체를 의미하며, 이성만으로는 우리의 소망을 현실화시킬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기에 이성은 열정이 그 자신을 이끌어주어야 하며, 그런 의미에서 노예입니다. 동시에 이성만으로는 무엇인가를 이룰 수 없기에 그 자신이 한 계에서 보탬이 되기 위해서는 노예이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결론을 시사해줍니다. 우리는 워킹 푸어들, 그리고 노동자들의 삶을 보면서 최저임금 등을 냉철히 따져보고 이성적으로 판단을 내립니다. 노동자들이 불합리한 대접을 받으며 살고 있구나, 등과 같은 판단들 말입니다. 하지만 그 판단이 판단만으로 그친다면 그것은 그 어떤 행위도 산출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열정입니다.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겠다, 는 열정 말입니다. 이는 단순히 힘든 생활을 하는 워킹 푸어들, 노동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앞서 노동자들이 병의 벽을 붙잡고 걸어올 수 있다면, 우리도 마찬가지로 병의 벽을 붙잡는 등의 행위를 통해서 노동자들이 있던 위치로 걸어갈 수 있습니다. 상황은 언제나 바뀔 수 있습니다. 우리도 그들과 마찬가지라는 것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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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opuha 2012-08-27 18:34   좋아요 0 | URL
정말 잘 읽었습니다. 가연님 글은 항상 쏙쏙 들어오고, 끝까지 읽게 되네요. 저도 어제 쓰고서는 오늘 조금 더 보충하고 다듬어 보았습니다. 즐거운 오후 되세요 :)

가연 2012-08-29 02:07   좋아요 0 | URL
아, 감사합니다. koopuha님 글도 자주 들러서 읽고 있습니다. 어제 쓰신 글이랑 이번에 보충하신 글도 보았습니다. 벌써 밤이라.. 좋은 밤 되세요, 라고 말씀드리면 되려나요..ㅎㅎ
 
[뱀파이어, 끝나지 않는 이야기]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뱀파이어, 끝나지 않는 이야기
요아힘 나겔 지음, 정지인 옮김 / 예경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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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파이어, 끝나지 않는 이야기.

 

 

 

 

 

1.

 

 

 

  트와일라잇, 언더월드, 블레이드, 블러드 더 라스트 뱀파이어. 흥행에는 모두 차이가 있고, 이 중에는 속편이 제작된 영화도 있지만 속편이 제작되지 않은 영화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공통점이 하나 있으니, 그것은 바로 흡혈귀, 뱀파이어에 관한 영화라는 것이지요. 흡혈귀라는 모티프만 가져온 등장인물이 있는가 하면, 나름의 원칙을 따라서 흡혈을 하는 그런 등장인물들도 있습니다. 위의 영화들 중에서는 트와일라잇의 에드워드가 그런 역할을 맡고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의 컬렌가는 일종의 채식뱀파이어들로 구성되어있는데, 인간의 피를 빨지 않고 동물의 피로 그 욕구를 대신하지요. 블레이드의 주인공은 일종의 데이워커입니다. 이는 대낮을 걸을 수 있는 자, 라는 뜻인데, 원래 전승상에서 뱀파이어는 태양을 두려워하고 밤에 자신의 길을 걷는다고 합니다만, 이 영화의 주인공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낮이든 밤이든 검을 휘둘러 뱀파이어의 비명을 쏟아내지요. 뱀파이어를 다룬 영화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각종 장르소설들, 판타지소설들에서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수많은 뱀파이어들이 나옵니다. 한 때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퇴마록, 이라는 소설에서는 결말 부분에서 흡혈귀들의 시조로 설정된 노스페라투를 부활시켜 주인공들과 적대시킵니다. 장르소설로 월야환담, 이라는 소설은 아예 흡혈귀 사냥꾼이 주인공이고, 나오는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흡혈귀들입니다. 흡혈귀의 불사성은 이런 소설들에서도 유지되어, 월야환담에서는 오랜 세월을 살아오느라 지쳐 자신의 인격을 아예 바꿔서 로맨티스트로 살아가는 흡혈귀도 나오지요. 만화책에서도 우리는 흡혈귀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헬싱, 이라는 만화에서 주인공은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 에서 그 모티프를 따왔으며 (주인공 흡혈귀인 아카드Alucard는 드라큘라Dracula를 거꾸로 뒤집은 것이지요) 흡혈귀이고, 그것도 매우 강력하면서도 오래된 흡혈귀입니다. 이 만화에서의 아카드는 재로 태워도 부활하고, 심장을 부수어도 부활하며, 햇빛 아래에서도 당당히 걸어나갑니다. 기존의 흡혈귀 전승들과는 큰 차이를 보이지요. 이렇게 영화, 소설, 만화 등 다양한 방면에서 흡혈귀에 관한 이야기들이 재구성되고 있습니다. 어떤 매체는 기존의 전승을 파괴하기도 하고, 어떤 매체에서는 기존의 전승을 너무 엄격하게 지키기도 하지요. 하지만 이들 모두 하나의 공통점은 가집니다. 그것은 바로 피, 기본적으로 피를 마셔서 자신의 생명을 유지한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지요.

 

 

 

2.

 

 

 

  피가 생명의 근원으로 자리잡은 데에는 그 이면에 수많은 신화와 전설들이 깔려있습니다. 기념비적인 저작인 황금가지, 를 살펴보면 고대 그리스나 로마 신화에서의 각종 제전들에서 피의 이미지가 선명함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중 주목할 만한 것이 아티스 제의인데, 식물신인 아티스는 매해 죽음을 맞이하고 매해 생명을 부여받아 살아납니다. 그의 전승에 따르면, 어머니이자 애인인 대지모신 키벨레는 아티스가 다른 사람들에게 그 사랑을 베풀까봐 미쳐버리게 만들고, 그 결과 아티스는 자신의 성기를 자르고 물푸레나무에 매달려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 후에 다시 부활하는데, 그에 따라 제의를 주관하는 대제사장은 매해 그의 제전에서 팔을 그어 피를 내고, 주위의 사제들과 함께 자신의 성기를 잘라 주위에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던집니다. 피는 광란을 가져오고 그 결과 수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자해를 하고 성기를 잘라서 들고 거리를 뛰어다니며 어느 집에든 그것을 마구 던집니다. 이 제의에서 우리가 살펴볼 것은 피를 바쳤다는 점이고, 전승에 따라서 성기를 잘랐다는 것입니다. 성기는 생명력을 상징합니다. 생명을 이어가는데 필요한 것이 바로 생식행위이기 때문이지요. 그 성기와 피의 이미지가 결합되어 아티스를 매해 부활시킵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우리는 이 제의에서 현대 뱀파이어 영화의 특징인 '성적 긴장과 공포' 의 이미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기는 그야말로 욕망의 상징이지요. 피로 물든 잘려진 성기 이상으로 욕망과 공포를 잘 드러내는 상징물은 찾기 어려울 것입니다.

또 우리는 요즘도 종종 원시부족을 여행할 때, 인육을 먹는다는 흉흉한 소문을 들으며 두려워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고대부족들은 인육을 먹고 상대의 피를 마셨습니다. 그들이 흡혈귀였기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의 생각으로는 상대의 피를 마시고 심장을 뜯어먹음으로서 상대의 강력한 힘이 본인들에게 흘러들어온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 이미지는 북유럽 신화의 지크프리트와 파프니르와 관계에서도 변주됩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부족은 희생 제물로 매년 한 명을 선택하여 제의의 날이 되면 그의 사지를 찢고 목을 벤 다음, 그 피를 짜내어 밭에 뿌리고, 그의 사체를 하나씩 떼어 집으로 가져가는 행위를 하기도 합니다. 남은 부분은 갈아서 밭에다가 심기도 하지요. 이런 잔인한 의식은 그 다음해의 풍년을 기원하는 것으로, 여기서도 피와 육체는 생명력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것이지요. 이 피를 대가로 소모된 힘을 회복하여 (젊음을 회복하여) 다음해에도 우리에게 풍년을 베풀어달라, 라는 사고 방식입니다. 이런 희생과 생명의 이미지들은 현대 종교에서도 남아있는데, 우리는 크리스트교에서 성찬식을 거행할 때,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피요, 축성한 빵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지요. 이에 대해서는 마태복음에 나와 있는데, 물론 가톨릭과 개신교가 받아들이는 의미가 다르지만 일단 기본적으로는 전승으로 볼 때, 일종의 희생제의의 상징이 그 속에 내재되어있다고 보아도 무방하겠습니다. 또한 요한복음을 참조하면 육체의 생명과 영적인 생명이라는 이미지를 피가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지요.

 

 

 

3.

 

 

 

  이렇게 피는 고대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생명력, 영혼원리를 의미합니다. 또한 피를 통하여 젊음을 회복한다는 관념도 오랫동안 유지되어왔었습니다. 그렇기에 이 피를 강탈하는 괴물이 나타나게 된 것도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고대인들은 (물론 현대인들도 마찬가지이겠지만) 모르는 것들이 정말 많았으며, 잘 모른다는 것은 우리의 인지가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이고, 인지가 도달하지 못하는 곳에서 우리는 괴물을 만들어냅니다. 고대인들의 사고를 추적해보면, 사람에게서 피가 흘러나가면 죽는다, 라는 사실에서 피가 생명력을 상징한다고 여기게 되고, 그렇다면 이 피를 다른 곳에도 적용할 수 있겠구나, 와 같은 과정을 밟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서, 피만 있으면 어떻게든 목숨을 연명할 수 있겠구나, 라고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고, 그 결과 피로 자신의 목숨을 이어가는 괴물, 뱀파이어가 등장하게 된 것이지요. 하지만 고대인들의 전승에서는 사실 피만 엄밀히 분리되어 나오지는 않았습니다. 괴물은 피와 살을 동시에 뜯어먹는 존재들이었고 (그 편이 훨씬 그로테스크하기에 공포감을 많이 주기도 합니다만) 이는 페르시아 전설에서의 시체를 뜯어먹는 괴물인 굴(Ghoul), 그리스의 반인반수인 라미아(Lamia)의 이미지로 드러납니다. 한동안 피와 살을 동시에 뜯어먹으려 무덤에서 부활해온 괴물들은 중세에 이르러 크리스트교의 전래와 함께 십자가를 들이밀면 무덤으로 사라진다, 심장에 말뚝을 박고 시체를 태워 재로 만들어야 된다, 등의 퇴치방법이 연구되어왔으며, 각 지역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과 그 당시의 사회적 상황의 결합에 의하여 극적인 변화를 맞게 됩니다. 바로 살점을 먹기보다는 피만 빨아먹게 된 것이지요. 이는 중세에 유행한 흑사병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흑사병에 걸려 죽은 사람들은 당시로서는 악마의 소행이다, 등의 가설을 세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신체부위가 어디 절단되거나 한 것도 아닌데 죽음을 맞이하다니 말이지요. 그렇기에 살과 피를 동시에 물어뜯던 괴물에서부터 피만 흡혈하는 괴물의 존재를 상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물론 살과 피를 동시에 뜯어먹든, 피만 빨아먹든 어느 쪽이든 희생자가 죽음에 이르는 것은 당연했지요. 이는 다른 수많은 괴담들과 연관되어 밤거리를 걷는 사악한 괴물, 뱀파이어를 만들어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 짚고 갈 것이 있습니다. 그들, 고대의 주민들이 만약에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을 획득했었다면 괴물이 생겨났을까요? 앞서도 말했지만 괴물은 결국에는 두려움과 무지의 산물입니다. 만약에 고대인들이 우리와 비슷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면 아마도 라미아나 서큐버스, 굴과 같은 괴물들은 자리를 잡기 어려웠으리라 여겨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에 이르러 이들 괴물들은 그 생명력을 거의 잃은 것이지요. 물론 이 말이 현대에는 괴물이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인간의 지식이 쌓이면 쌓일수록 그 무지는 만천하에 드러날 것이고, 고대의 괴물들은 사라질지 모르지만 그 자리를 새로운 괴물들이 채울 것입니다. 그리고 그 괴물들은 (앞서서 존재했던 괴물들과 비슷한 과정을 거치며) 다시금 소멸되고, 다시금 생성되는 과정을 반복할 것입니다.  

 

 

 

4.

 

 

 

  그런데 만약에 우리가 지식을 획득함으로써 고대의 괴물들이 인지에서 사라진다면 (현대에 이르러 몽마인 서큐버스나 인큐버스와 같은 괴물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거의 없겠지요) 왜 아직까지 흡혈귀는 그 생명력을 유지하며, 더 나아가 스크린을 장악하게 되었을까요? 이 책 '뱀파이어, 끝나지 않는 이야기' 는 바로 이런 의문에서 시작합니다. 뱀파이어를 낳는데 중심역할을 맡았던, 그리고 그렇게 생겨난 뱀파이어와 한동안 공존의 길을 걷던 괴물들은 현대에 이르러서는 그 영향력을 거의 소실합니다. 물론 뱀파이어라고 해서 현대인들이 진지하게 받아들인다고는 볼 수 어렵겠습니다. 하지만 다른 괴물들과는 달리 뱀파이어는 여러 매체에서 주역을 맡거나 중심 캐릭터를 맡아서 활약해오고 있으며, 대중들의 관심에 호응하듯 여전히 자신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당장 위의 몽마, 서큐버스나 인큐버스와 비교해도 몽마가 중심되는 영화나 소설은 그리 많지 않고, 대중의 관심에서도 상당히 떨어져 있습니다. 인간형 악마인 몽마가 이러할진데, 인간과는 동떨어진 외모를 가진 키메라, 히드라와 같은 환상종들은 더 나쁜 상황에 놓여있겠지요. 이 책의 저자는 저 의문에 답하기 위해서 고대에서부터 뱀파이어의 연원을 조사해옵니다. 앞서 언급했다시피 바빌로니아의 릴리트와 굴, 라미아, 그리고 하피와 같은 여성형 악령들에서부터 그 기원을 확인하며, 중세를 거쳐서 문학작품에서 어떻게 흡혈귀들이 생명력을 가지게 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수많은 흡혈귀 문학이 있었지만 (투르게네프와 톨스토이, 괴테와 같은 대문호들도 흡혈귀에 관련된 소재를 바탕으로 흡혈귀에 관한 글을 썼지요) 그 중 흡혈귀에게 불멸의 생명을 안겨준 작품이 있습니다. 바로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 입니다. 철저한 사전조사와 세세한 설정들, 그리고 당시의 탐정 소설의 영향과 심리, 정신병리학등의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7년이라는 산고 끝에 세상에 나온 이 책은 아직까지도 뱀파이어 문학의 고전이자 필수 참고서로 여겨지고 있으며, 현대 대중문화에서의 흡혈귀들의 대부분의 설정은 이 드라큘라를 따르거나 혹은 이 드라큘라를 뒤집는데서 발전되어왔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드라큘라의 줄거리는 너무 잘 알려져 있겠지만 굳이 조금 언급하자면, 왈라키아 공작 블라드 체페슈 3세, 드라큘라가 이제 영국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집을 마련하려고 조너선 하커를 불러들이는 것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조너선 하커는 그의 끔찍한 사실을 알게 되고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겨우 성에서 탈출하고, 자신의 약혼자 미나 하커가 드라큘라에게 물려 흡혈귀가 될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게 되자 반 헬싱 박사와 힘을 합쳐 결국 그를 물리치지요. 하지만 아무리 잘 쓴 문학작품이라고 할지라도 그 문학작품의 캐릭터가 독자적인 생생한 생명력을 획득하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아무리 역사적 배경에 편입되고 (블라드 체페슈 3세는 실존인물이지요) 고대로부터의 전설에서 이끌어져나왔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여기서 뱀파이어에게는 다행스럽게도 기술의 발달이 작용합니다. 이 책 '뱀파이어, 끝나지 않는 이야기' 의 흐름 순서를 보면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 에 대한 설명 뒤에 이 드라큘라가 어떻게 영화화가 되었는가, 를 설명합니다. 만약에 최초의 뱀파이어 영화인 '노스페라투 - 공포의 교향곡' 이 없었다면 뱀파이어가 지금 이렇게 스크린을 장악하고 있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비록 이 영화 자체는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지만, 이는 수많은 다른 제작자들에게 영감을 주어 '낡은 전설에서 늙어가던 뱀파이어에게 신선한 피를' 공급합니다.

 

 

 

5.

 

 

  그렇다면 이렇게 깨어난 뱀파이어는 과연 어디로 향하게 될까요? 사실 능력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뱀파이어는 우리가 감히 상대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보통 인간이 뱀파이어에게 승리할 수 있을까요? 둘 다 동등한 조건에서 싸움을 벌인다면 설령 아브라함 반 헬싱 박사라도 그를 이겨내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을 초월한 근력과 정신력이 있으니 당연한 말이겠지요. 하지만 뱀파이어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간을 초월한 괴물이지만 인간의 상상력 속에서 그 생명을 획득합니다. 이런 아이러니한 상황은 결국 뱀파이어에 유머를 섞는 결과를 낳게 되고 더 나아가 희화화를 가져옵니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사람의 심리적 방어 기제를 설명하는데, 그 중 성숙한 방어기제로 유머와 승화를 이야기합니다. 특히 유머는 본인의 기분과 남의 기분을 동시에 배려하면서 자신이 할 말을 하는 그런 유형의 기제인데, 이를 좀 더 확대시켜서 살펴보면 이 뱀파이어의 경우에도 그런 일종의 정신적 방어 기제로 유머가 사용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져볼 수 있습니다. 반복하자면 인간을 초월했다는 사실과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두 사실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은 결국 뱀파이어를 다루는 이야기에 웃음을 섞게 만들게 되고, 이는 뱀파이어 자체의 희화화를 낳게 되지요. 뱀파이어는 원래 없어, 라는 안도감과 함께 말입니다.

그러나 뱀파이어와 관련된 긴장은 저것뿐만이 아닙니다. 좀 더 근원적이고 직접적인 긴장이 그와 우리들 사이에 존재합니다. 그것은 바로 욕망과 공포 사이의 긴장입니다. 뱀파이어를 다룬 매체들은 그들에게 있어서 피를 빠는 것은 일종의 성적인 욕구와 마찬가지이다, 라는 설정을 부여함으로써 성적욕망과 흡혈욕망을 동일시합니다. 그러고 보면 둘 다 생명을 유지시킨다는 측면에서 볼 때 동일한 부분이 존재합니다. 우리는 화면에서 뱀파이어가 흡혈하는 장면을 보면서 화면 구도와 소품들을 통해 에로틱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대부분 흡혈은 중세의 문학작품들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성간에 일어나며, 주로 일어나는 장소는 침대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에로틱함에 취할 수는 없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조금이라도 더 피가 많이 빨리게 된다면 우리는 죽음에 이르게 될 테니 말입니다. 여기에 현대인들의 불안 심리와 맞물려 더욱더 뱀파이어를 다룬 매체들은 불티나게 팔려나가게 되는 것이지요. 이런 점에서 본다면 아마도 한동안 뱀파이어의 생명력은 꺼지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좀 더 매력적이고 다의적인 뱀파이어의 이야기들이 기대된다는 말과 함께 끝맺은 이 책 '뱀파이어, 끝나지 않는 이야기' 의 결론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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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2-08-02 22:25   좋아요 0 | URL
참 이상하죠. 물론 뱀파이어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데도 뱀파이어에 대한 흥미를 멈출수가 없으니 말예요.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이 들어요.

정말...정말 없다고 확신할 수 있어?


어쩌면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존재하는게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도 들고 말이지요. 하핫. 뱀파이어는 제게 참 흥미로운 존재에요.

가연 2012-08-03 05:22   좋아요 0 | URL
ㅎㅎ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존재한다면 없는 것과 큰 차이 없지 않을까요 ㅎㅎ 이렇게 적고 보니 마치 외계인같네요, 풋. 음.. 만약에 이들이 정말 숨어서 살기를 원해서ㅋㅋ 각종 매체에 나온 것 처럼 일반인들을 세뇌시키고 있는 중이라면 그걸 존중해서.. 없다고 믿어주는것도.. 푸하하.

드림모노로그 2012-08-06 18:01   좋아요 0 | URL
아 저 이거 읽어야 하는데 뱀파이어라 잼 날 것 같았는데 ㅎㅎㅎ 의외로 안 읽혀지대요 푸하하 ~ 반 쯤 읽고 덮었는데 ㅎㅎ 어서 읽고 리뷰 올려야겠어요 ^^

가연 2012-08-09 22:09   좋아요 0 | URL
ㅎㅎ 방금 리뷰보았어요, 풋. 좋은 글 감사합니다.

2012-08-26 22: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8-26 22: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어쩌다사회학자가되어]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어쩌다 사회학자가 되어 - 피터 버거의 지적 모험담
피터 L. 버거 지음, 노상미 옮김 / 책세상 / 2012년 5월
평점 :
절판


어쩌다 사회학자가 되어.

   

 

   

  1994년도에 나온 영화 레옹의 OST로 쓰인 Shape of my heart를 부른 것으로 유명한 스팅은 그 외에도 숱한 히트곡들을 불렀는데, 그 중에 유명한 곡이 바로 Englishman in New York입니다. 뉴욕에 따로 떨어져 입에 맞지 않는 뉴욕음식을 먹고, 눈에 익지 않은 뉴욕풍경을 보며 그 거리를 걸어가는 영국신사의 모습을 서정적인 음률로 잘 그려낸 수작이라고 할 수 있는 곡이지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만약에 뉴욕이 아니라 다른 도시였다면 그 영국신사가 그만큼이나 헤맸을까요? 뉴욕이 그만큼이나 다양한 사람이 섞이고, 발전이 빠른 도시였기에 더욱 대비효과를 준 것은 아니었을까요?

 

이 책 ‘어쩌다 사회학자가 되어’ 를 읽으면서 가장 먼저 머릿속에 그릴 수 있었던 것은 저 스팅의 노래와 마찬가지로 뉴욕에서 방황하는 한 젊은이의 모습이었습니다. 책의 서두는 갓 열여덟이 된 저자, 피터 버거가 오스트리아에서 (스팅의 노래와는 다르게 영국신사는 아니었지만) ‘뉴욕’ 으로 건너오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갓 열여덟이 된 피터 버거는 ‘종교적 열정에 불타고’ 있었기에 목사를 하고 싶었지만 돈이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야간에 학업을 진행할 수 있는 곳을 골라야만 했었고, 결국 사회 조사 뉴스쿨, 이라는 곳에 등록하여 강의를 듣게 되지요. 그때부터 그의 좌충우돌 사회탐방기가 시작됩니다. 그는 나중에 자신이 ‘미국 사회학’ 을 배우는 줄 알았다고 푸념하는데, 사실 그의 푸념이 완전히 틀린 것이 아닌 것이, 뉴욕은 당시에 미국은 미국이었지만 (다양한 사람들이 어우러진) 매우 ‘독특한 세계시민주의’ 를 습득할 수 있는 장소였고 일종의 근대화의 성소와 같은 곳이었기 때문이었지요. 그의 초기 지적 여정에서 이 ‘뉴욕’ 과 ‘뉴욕식 교육’ 이 미친 영향은 그의 반생을 걸쳐 지속됩니다.

 

이 뉴욕, 이라는 도시와 함께 피터 버거에게 영향을 미친 것은 뉴스쿨에서 배운 강의였습니다. 당시 뉴스쿨에서는 일종의 삼총사, 라고 불릴만한 세 명의 교수가 있었는데, 알베르트 잘로몬, 알프레트 쉬츠, 카를 마이어가 바로 그들이었지요. 그들로부터 그가 영향을 특히 받은 것은 ‘일상생활에서 지식으로 통하는 모든 것을 다루어야 지식사회학이다’ 와 같은 명제와, ‘일상생활이라는 일차적 현실에서 다른 현실로 넘어가는 복수 현실’ 의 개념과 같은 것이었고, 무엇보다도 깊게 영향을 받은 것은 ‘막스 베버’ 적 관점으로 사회를 관찰하는 것이었지요. 그가 베버의 향기를 맡을 수 있었던 사람은 위의 세 교수들 중에서도 특히 카를 마이어였는데, 카를 마이어는 전적으로 ‘베버의 관점’에서 종교를 분석하며 현재에도 잘 알려진 카리스마의 일상화와 같은 개념을 그에게 알려줍니다.

 

뉴욕과 막스 베버. 자서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사회학자로서의 이력의 궤적을 쫓아가는 이 책의 근원에는 위의 두 존재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그런데 여기서 피터 버거의 지적 이력에 마지막으로 영향을 끼친 존재가 나타납니다. 그것은 바로 ‘종교’ 이지요. 앞서 피터 버거는 미국으로 건너올 때 ‘종교적 열정에 불타있었다’ 고 했었지요. 원래 그는 루터교 목사를 하고 싶었고 신학대학원까지 진학하기도 했었지만 결국 그만두고 사회학자가 되고 말았지요. 그렇다고 해서 그가 사회학자가 된 것을 후회하거나 하는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글 곳곳에서는 종교에 대한 깊은 관심이 잘 드러납니다. 당장 이 책의 원제에 쓰인 Accidental Sociologist라는 단어만 보아도 그가 사회학자와 목사에 대해서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 느낄 수 있지요. Accidental, 곧 어쩌다가 사회학자가 되었다는 말은 사회학자가 되지 않았다면, 혹은 삶의 정상적인 궤도를 밟아나갔다면 자신은 신학에 종사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것을 의미할테니 말입니다.

 

 

 

결국 그의 지적 이력은 위의 그림과 같이 세 부분의 교집합들로 표현되어질 수 있겠습니다. 한 사람의 생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요소를 알아낸다면, 그 사람이 지금껏 거쳐 온 여정과 앞으로의 행로는 그 기본적인 요소들의 응축이거나 분리로 구성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지요. 물론 한사람의 삶이 꼭 그렇게 수학적으로 딱딱 맞아 떨어지지는 않습니다. 이 책에서도 몇 번이고 ‘갑자기 어떤 일이 생겼다’ 혹은 ‘미국이라서 생길 수 있는 일이었다’ 와 같은 언급을 통하여 자신의 생의 불확정요소들을 털어놓지요. 그러나 그런 불확정적인 요소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한 사람이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은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아무리 삶의 풍랑이 거치더라도 등대의 불빛을 목표로 하는 (나아갈 곳이 있는) 배는 항상 희망을 품고 원하는 바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이 책의 저자, 피터 버거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라서, 위의 세 개의 구성요소들로 인하여 발생한 목표들, 그의 사회학적인 관심이 그의 지적 여로를 이끌게 됩니다. 위의 다이어그램을 봅시다. A에는 어떤 말이 적절할까요? 종교와 뉴욕의 교집합을 살펴보면, 뉴욕의 다양한 종교들, 오순절파나 루터교 등에 대한 관심을 들 수 있겠습니다. 이는 더 나아가 뉴욕이라는 도시의 다원성과 맞물려 뒤에 피터 버거가 ‘다원주의’를 주장하는 것의 기초를 제공합니다. 그의 종교에 대한 관심은 (그 뉴욕이라는 도시의 다원성 때문에) 크리스트교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이슬람교 등 셈족 계통의 종교에 대한 연구도 진행하게 되었지요. 이는 이후 상대주의와 근본주의의 이분법의 폐해를 살피게 된 것에 뿌리를 내리게 됩니다. B는 막스 베버의 관점에서 종교를 분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는 앞서도 말했다시피 카를 마이어, 의 관점에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그가 다양한 종교를 접할 때 항상 기본적으로 자신의 비판 준거로 삼는 것은 바로 막스 베버였습니다. 막스 베버 본인도 종교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었는데, 여기에서 더 나아가 종파와 교회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였지요. 그 뿐만 아니라 ‘종교는 우연성을 필연성으로 전환시킨다’ 라는 명제 아래에 종교가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것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남은 C에는 뉴욕의 다원성과 막스 베버와의 공통점에 어울릴만한 내용이 들어갈 것입니다. 저자는 이 책에서 거듭해서 주장하듯이, 뉴욕 한 곳에만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멕시코에서부터 남아프리카 공화국까지, 그리고 중국과 유럽 여러 나라들, 그리고 다시 미국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나라들을 여행하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지요. 물론 그의 여행에 한계점이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여행을 갈 때는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진 곳을 들르는 경우가 많지요. 결국 다녀본 곳만 가게 되는 경우가 많고, 정말 내밀한 곳을 들르기란 쉽지 않지요. 하지만 사회학자란 책에서도 언급하듯이 ‘가장 가까운 유곽을 찾아가는 데 백만 달러 기부금이 필요한 사람’ 이기에 (이 말은 곧, 기부금이 있다면 소홀히 넘길만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평소라면 사회적 체면 때문에 들르지 못했을 유곽까지도 찾아간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구석구석까지는 훑지 못했더라도 대략적 그림을 잡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었으리라 생각이 됩니다. 그렇기에 그런 다원적인 모습을 막스 베버와 통합시켜서 근대화에 대한 이론을 체계화시킵니다. 그는 수많은 나라들의 정치체제와 사회적 구조를 살펴본 결과 민주주의적 자본주의가 그나마 적합한, 그리고 지속적으로 발전 가능한 모델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지요. 그렇다면 그의 궁극적인 목표, 세 개의 원이 동시에 만나는 가장 한 가운데의 빈칸에는 어떤 것이 들어가게 될까요?

 

그것은 바로 인간에 대한 사랑입니다. 책의 말미에서 그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인간의 존엄성은 불가침’ 이라고 말이지요. 사회학은 기본적으로 사람에 대한 사랑에서 시작하며, 다른 사람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그가 어린 시절 선물로 받은 장난감 기차에서 가상의 승객들과 잡담을 나누었듯이 말이지요. 거기엔 사람들이 없잖아, 라고 생각하고 눈을 감아버린다면 우리는 우리 주위의 수많은 문제들과 부조리들에 대해서도 동시에 눈을 감게 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다른 사람의 존재를 인지하고, 함부로 눈감지 않고 그들을 지켜보는 것, 그들의 소리를 듣는 것. 존엄성을 지키는 것은 바로 그런 것에서부터 시작하며, 그 결과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귀결되는 것이지요. 책 군데군데 드러난 유머러스한 문체는 이것에 대한 반증이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읽기를 방해하는 부분들도 분명 존재합니다. 저자 스스로가 불필요하다고 여겨지는 부분은 모두 잘라내고, 자신이 어떤 대학을 다녔고, 어떤 기관에서 연구를 했느냐, 와 같은 딱딱하게 들릴 수 있는 부분만을 쫓아갑니다. 독자들이 궁금해할만한 사항을 ‘언급하기에는 적절하지 않다’ 라는 말과 함께 그대로 생략해버리는 일도 종종 저지르는 것이지요. 특히나, 그가 왜 사회학자를 택했는가, 에 대한 이유는 자세하게 드러나 있지 않습니다. 예의 여기에서 언급하기에 적절하지 않다, 같은 말과 함께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누다보면 갑자기 다른 곳으로 대화주제가 옮겨지듯, 이 책도 마찬가지라서 군데군데 자신의 지적 이력과는 크게 상관없는 부분으로 옮겨가는 경우도 있지요. 그러고는 다시금 적절하지 않다는 말과 함께 끊어버립니다. 지적 모험담, 이라는 부제가 붙듯 자신의 연구 결과를 이야기하기에 딱딱한 부분은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충분히 독자들이 흥미를 느낄만한 부분마저 (그것도 앞서 언급해두고) 생략한다는 것은 몰입에 방해를 줄 수도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이런 부분뿐만이 아니라, 지식을 전달하는데 있어 좀 불친절한 면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의 연구결과를 모두 다 알고 이 책을 읽을 수는 없습니다. 이 책에서 자신의 책들을 정말 많이 언급하지만 그 내용에 대해서는 맛만 보는 수준으로 끝나고 말지요. 그러고는 그 내용을 적용한 사회 현상을 언급합니다. 지적 여력을 되돌아보는 책으로는 맛만 보는 수준에서 책 내용을 언급하는 것이 옳지만, 그 바로 뒤에 그 내용을 적용하는 모습이 보인다면, 적어도 독자가 그 내용을 따라갈 정도로는 설명을 했어야 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요. 저자 피터 버거는 사회학으로의 초대, 성스러운 천개, 신앙의 문제, 자본주의 혁명, 의심에 대한 옹호 등 수많은 책을 썼지만, 그 책들을 다 읽어본 독자는 사회학을 깊이 전공하거나, 개인적인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드물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리고 막스 베버의 이론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모습을 책 전반적으로 보여주는데, 정작 그 막스 베버의 이론과 개념들, ‘카리스마의 일상화’ 등과 같은 개념이 어떤 의미인지 적절하게 언급이 되어있지 않다는 점을 단점으로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자의 이념에의 편향, ‘민주주의적 자본주의’ 에 대한 주장도 문제점으로 볼 수 있습니다. 책 중반부부터 나오는 자본주의에 대한 그의 옹호는 (그의 입장에서는 당연할지도 모르겠지만) 따라 읽어가는 입장에서는 충분한 설명이 없이 제시되어 갑작스럽지요. 그는 이렇게 주장합니다. ‘비행기를 타는데 조종사가 아프리카의 시간 개념으로 비행기를 조종한다면 비행기가 추락할 것이다.’ 이 말은 아프리카의 시간개념과 서구의 시간개념을 비교하면서, 아프리카의 시간개념이 훨씬 느슨하고 덜 정밀하다는 주장을 하면서 도출된 말인데, 책에서는 여기에 대해 뒷받침할만한 근거는 제시되어있지 않습니다. 저자는 이 책에서는 저런 형태의 주장을 바탕으로 근대화 논리를 이끌어내고, 그 근대화 논리를 바탕으로 자본주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끌어내지만, 이는 근본 명제가 엄밀하지 않다는 약점을 가집니다. 실제로 저자가 자본주의에 대한 편향을 가지게 된 원인은 다르게 존재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 책만으로 볼 때에는 그 이상 다른 원인을 이끌어내기는 힘들지요.

 

하지만 이런 문제점들을 제쳐두고라도, 그의 ‘지적’ 편력들에 대하여 한 쪽 눈을 감고 읽는다면, 그의 발자취를 훑어가는 일은 정말 흥미롭습니다. 인문학의 경계 안에 있는 어느 학문이나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사회과학은 인간을 살피는 학문이라고 무방할 테고, 사회현상을 살피고 분석하는 것에 앞서서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학문일 테니 말입니다. 조사를 하던 연구를 하던 그 기저에는 이 집단의 이 사람의 삶의 환경과 여정을 살피는 것이 깔려있으리라 여겨집니다. 그런 이야기들은 절대 항구적이지 않고, 도리어 변덕스러우며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그런 것들이지요. 저자는 그런 ‘인간 세상에 대한 매혹’을 느꼈고 우리에게 그 매혹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싶기에 이 책을 쓴 것이 아닐까요.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이 책 자체도 저자 자신의 사회학적인 조사를 바탕으로 내려진 결과물이라고 보아도 무방하겠습니다. 오스트리아에서 미국 뉴욕으로 건너와 낯설음을 뒤로 하고 연구에 뛰어든 이래 아직도 ‘팔팔한’ 그의 학문적 여정이, 그리고 거기에 더하여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한 시민으로서의 그의 삶이 어디로 향하여 어디에서 끝을 맺게 될지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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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개미 2012-07-24 21:48   좋아요 0 | URL
저 세개의 원이 이 책을 너무나 함축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가연 2012-07-24 22:13   좋아요 0 | URL
어이쿠..ㅠㅠ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하죠. 일개님의 리뷰도 잘 읽고 있습니다.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이야기는 괴테의 파우스트에서부터 시작한다. 이 세상의 모든 비의와 지식을 깨달은 파우스트는 인간의 지식으로는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이제 남은 것은 영적인 존재에 다다르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그의 영적인 존재와의 접촉은 무위로 돌아가게 되고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 다가오는 죽음에 비참해하며 슬픔에 빠져있는데, 그런 파우스트 앞에 악마 메피스토펠레스가 다가온다. 그들은 바로 계약을 맺게 되는데, 계약의 조건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다음과 같다. 메피스토펠레스는 파우스트에게 모든 조력을 아끼지 않는 대신, 파우스트가 세상에 대한 갈구를 멈추게 되면, 단 한 번이라도 현실에 만족하게 된다면 ‘시간아 멈추어라.’ 라고 외치게 되며, 동시에 그의 영혼을 받아가는 것이었다. 메피스토펠레스의 힘으로 다시 나이를 되돌리게 된 파우스트는 그레트헨과의 사랑을 거쳐서 헬레네와 결혼을 하는 등 향락에 젖어 살지만, 결국에는 어느 황제의 궁전에서 자신이 할 일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자신의 모든 지식을 사용하여 자신의 토지를 개척하여 사람들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나라를 만드는 것이었고, 결국 그 계획을 성취시키게 된 파우스트는 이렇게 말하고 만다.

 

멈추어라 순간아, 너는 진실로 아름답구나.

 

악마는 계약대로 파우스트가 현실의 삶에 만족했다고 생각하고는 그의 영혼을 뽑아가려고 하지만, 신은 그가 ‘현실의 삶’ 에 만족한 것이 아니다, 라는 생각을 자신의 행동에 함축하며 그의 영혼을 승천시킨다.

 

 

 

***

 

 

 

  독서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꺼내어야 할 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내가 어떻게 독서를 시작하게 되었는가, 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지, 아니면 독서란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라는 것부터 정의를 하고 이야기를 이끌어내어야 할 지 말이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다면, 항상 내가 독서를 시작할 때 느끼는 감정은 ‘광기’와 ‘죽음’ 에 대한 감정이다. 밤에 어떤 책이든, 그것이 문학이든 인문학 서적이든 그 어떤 서적이든, 펴놓고 읽고 있을 때 나는 과장 같지만 진실로 ‘광기’를 먼저 떠올리게 되고, 책을 다 읽은 순간 나는 ‘죽음’을 느끼게 된다. 이는 하이데거처럼 필멸자로서의 나의 죽음을 떠올리는 것은 아니고, 책 깊숙한 곳에서 인식의 한계와 무의식을 살펴보기 때문이다. 한계 너머는 오직 깜깜할 뿐이고, 인간 존재에 있어서 깜깜함은 오직 죽음뿐이다. 우리가 눈을 영원히 감고 있을 때 그 어떤 색채의 빛도 우리의 뇌에 도달하지 못한다. 죽음을 느끼지 못한다면 광기를 느낄 뿐이다. 어떠한 빛도 도달하지 못하는 곳에서 우리의 뇌는 수많은 이미지들을 망막에 투사한다. 당장 어떠한 언어도 입에 품지 말고 자신의 머릿속을 살펴보라.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 수많은 이미지들, 혹은 이미지조차도 되지 못한 형언할 수 없는 그 ‘무엇’. 그 ‘무엇’ 들이 과연 제대로 된 형상을 안고 있는가?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 형상들은 수많은 감정과, 그 감정을 근원으로 하는 욕망으로 투사되어 광기에 일그러져 도저히 알아볼 수 없는 것들이리라.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크든 작든 욕망을 안고 살아간다. 아무 감정 없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은 없을 테니 말이다. 애초에 아무런 욕심 없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삶을 살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오직 ‘죽음’ 뿐이다. 독서를 통해서 이런 양 극단, 욕망의 극단인 광기와 그 대척점으로서의 죽음을 항상 느끼는 나로서는 그렇기 때문에 도리어 다시금 책 읽기에 빠져들게 된다. 아무래도 죽음보다는 삶이 낫지 않겠는가. 적어도 책을 읽을 때에는 욕망의 극의로서의 광기를 느낄지라도 내가 살아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니 말이다. 여기서 이 책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이 빛을 발한다.

 

 

이 책은 상당히 특이한 책이다. 사상가가 쓴 책 치고는 상당히 쉬운 언어로 구성되어있다는 점도 눈여겨볼만한 점이지만, 그 쉬운 언어가 전하고자 하는 바가 상당히 깊은 생각을 요한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책은 닷새 동안의 밤에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는 마치 세라자드의 천일야화를 떠올리게 하는 구성이다. 물론 차이점이 더 많다. 하지만 한 가지 점에서 동일한데, 그것은 천일야화든 이 책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이든 하나의 주제를 몇 번이고 변주한다는 점이다. 천일야화가 알라는 위대하시다, 라는 내용을 기본적으로 모든 이야기에서 그 바탕에 연원으로 두고 있다면, 이 책은 기본적으로 ‘책을 읽는 것은 혁명을 한다는 것이다.’ 가 그 기원이다. 여기에서부터 수많은 논리들이 파생되어 나온다. 혁명은 쉽게 이루어지는가? 그렇지 않다. 혁명은 어렵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저자가 밝혔다시피, 그리고 내가 느끼다시피 책을,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은 그 책의 무의식에 접속한다는 것이고, 이는 그 무의식의 광기 때문에 ‘자칫하면 정신이 이상해질 정도의 일’ 이기 때문이다. 혁명을 이루기 전에 자신의 정신이 이상해진다면 그것이야말로 곤란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모든 책들은 본질적으로는 ‘그대로 읽을 수 없는’ 것이며, 우리는 그 읽을 수 없는 것을 ‘읽어나감으로써’ 혁명을 진행시킨다는 것이다. 책에서는 그 예로 루터와 무함마드를 들어서 설명을 진행하고 있다. 루터는 성서라는 텍스트를 그대로 읽어나감으로써 가톨릭에서 벗어나 하나의 종파를 설립하였고 (그 이면에 사회학적인 다른 이해관계가 없었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무함마드는 문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문맹이었기에 신의 언어를 이해하게 되고 이슬람교를 창시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살펴볼 것은 루터와 무함마드는 ‘정신이 이상해지지 않았다’ 라는 점이리라. 앞서는 책을 읽는다는 것은 정신이 이상해질 수 있는 일이라고 이야기를 해놓고 이들은 정신 이상의 증후를 보이지 않는다니. 여기서 몇 가지 가설을 세워보자면 이들이 읽은 책, 그러니깐 성서나 (초기의 신의 언어로서의) 코란은 그 텍스트를 그대로 접해도 광기에 집어삼켜지지 않는다, 라는 가설을 세울 수 있거나, 이들은 광기에 집어삼켜지기 전에 무엇인가 조치를 취하거나 취해졌었다, 라는 생각도 해볼 수 있겠다. 혹은 대담한 이야기이지만 둘 다 사실 광기에 이미 휩싸여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종교를 세운다는 것, 그것은 하나의 신념을 공유하는 집단을 형성한다는 것이고, 이는 니체가 말했다시피 ‘이미 광기에 젖어있는’ 행위이기에 말이다. 꿈에 취해있지 않다면,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가 현실이 아닌 꿈이라고 여기지 않는다면, 그리하여 광기에 잡혀있지 않다면 (뒤에서 다시 이야기하겠지만 꿈속에서 살아간다고 여긴다면 자신의 목숨이 위험해질 행동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다.) 어떻게 종교를 만들어 세상을 변혁하려고 하겠는가. 셋 중 어떤 가설이 옳을지는 당장 알 수 없다. 어쩌면 셋 다 복합적으로 작용하였을 수도 있고, 어느 것도 해답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한 가지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 이 책에서는 루터의 혁명을 이야기하면서 ‘나는 교황도 공의회도 믿지 않기 때문이다.’ 라고 루터가 이야기한 부분을 인용한다. 당시 루터가 살았던 현실은 교회서 배척당하면 수도사로서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이었는데, 루터는 당당하게 저렇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는 당시로서는 이단이라는 말을 듣지 않을 수가 없었으며, 결국 현실에서 배척당하고 만 것이다. 현실에서 배척당한 사람은 어디로 가는가? 바로 꿈으로 향할 뿐이다. 세상이 미친 것일까, 내가 미친 것일까? 내가 진정으로 꿈 속을 살고 있는 것일까? 그럼에도 루터는 이야기한다. ‘나, 여기에 선다. 나에게는 달리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책을 읽는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책을 읽는 것 외에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책은 광기의 유산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생의 광기의 유산이며, 이 독서의 끝남은 광기로 이루어진 하나의 세계의 붕괴이다. 그리고 이는 다시금 깜깜함으로 돌아간다는 것이고 꿈에서 깨어나는 것이며 삶에서 죽음으로의 전환이다. 그렇기 때문에 책을 읽는 도중에, 이 책이, 하나의 광기가 얼마나 남았는가, 를 몇 장 남았는지 살펴보는 것으로 헤아리며 몇 번이고 앞서 말한 파우스트처럼 되뇌는 것이다. ‘멈추어라 순간아, 너는 진실로 아름답구나.’ 라고. 파우스트는 수많은 사람들의 행복이 몇 번이고 중첩되어 생을 붙잡고 있기에 외친 것이지만, 나로서는 메피스토펠레스라는 조력자도 없을뿐더러, 파우스트처럼 모든 학문의 극의에 달하지도 못했고, 그처럼 모든 향락도 누리지 못했기에 결국에는 나 자신의 생이라도 붙잡기 위해서 외치는 것이다. 서로 다를 것 같지만 둘 다 생을 붙잡는 의미에서는 나와 파우스트 모두 동일하다. 무엇보다도 '현실의 삶' 에 만족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러하리라. 그가 높은 이상을 추구하였다면, 나 또한 책읽기를 통해 추구하는 이상은 그에 뒤지지않는다. 하지만 그 붙잡는 행위는 나에게는 이윽고 덧없이 끝나게 되고 (나에게는 파우스트의 ‘신’ 이 없다.) 결국 깜깜함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삶은 나에게 하나의 의문점을 던져준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 살아가는 여기, ‘현실’은 어떤 현실인가? 책 안에서 무의식과 욕망을, 그리고 더 나아가 생의 광기를 느낀다면, 책 밖의 현실은 나에게 도대체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것일까?

 

 

 

***

 

 

 

  그리고 이야기는 카우보이 비밥으로 마무리된다. 카우보이 비밥, 이라는 유명한 애니메이션이 있다. 들어본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신세기 에반게리온, 만큼이나 숱한 화제를 낳은 애니메이션인데, 우리 나라에서 유명해지게 된 결정적 계기는 박완규, 그렇다 나가수의 그 박완규, 가 자신의 대표곡이라면 대표곡이라고도 할 수 있는 천년의 사랑을 부를 때, 그 뮤직비디오로 이 애니메이션을 편집해 사용한 것 때문이다. 정말 오래 전에 나왔지만 아직도 인구에 회자되는 중이다. 간단히 내용을 이야기하자면 다음과 같다. 현상금 사냥꾼인 스파이크 슈피겔은 비밥호라는 우주선을 타고 제트나 페이와 같은 동료와 함께 현상범을 사냥한다. 하지만 그의 과거는 어두웠는데, 원래 어느 조직에 속해 있던 그는 마지막 임무를 마치고 같은 조직원인 사랑하는 여자와 함께 원래 도망치기로 했었다. 하지만 조직은 배신하려는 그를 순순히 보내주려고 하지 않았고, 도리어 조직원이라는 점을 이용하여 그가 사랑하는 여자에게 그를 죽일 것을 청부한다. 결국 그들은 엇갈리게 되고 후에 다시금 만나게 되지만, 결국 그들은 달아나지 못하고 여자는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사랑하는 여자와 헤어지고 현상금 사냥꾼으로 사는 동안 스파이크는 자신의 현실과 꿈을 구분하지 못한다. 꿈이라면 죽어도 좋으니 아무렇지도 않게 본인의 목숨을 내던지려고 든다. 하지만 결국 자신이 사랑했던 여자가 죽는 것을 보고는 현실과 꿈을 구분하게 된다. 이윽고 꿈에서 깨는 것이다. 그때 주인공은 이렇게 중얼거린다. ‘깨지 않는 꿈이라도 꾸고 싶었다. 그러나 어느 샌가 깨버렸다.’

 

나에게 있어서 당장의 독서는 이와 마찬가지이다. 책을 읽을 때 삶을 느끼는 나는, 그 세계에 침잠하면 침잠할수록 현실에서는 한편으로는 유리되는 기분을 벗어나지 못한다. 모두가 달리고 있는데 나는, 그렇다, 상투적인 이야기이지만, 혼자서 멈춰서 주저앉아있는 기분을 지울 수 없다. 도리어 책읽기를 중단한 현실은 나에게 깜깜한 이미지만을 비추고, 이는 항상 죽음을 떠올리게 만든다. 인간은 죽음과 언제나 가까이 있지만, 그 죽음을 도리어 외면하기 때문에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죽음을 항상 직면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그 상황을 꿈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살아가기 어려울 것이고, 꿈이라고 생각한다면 자신의 ‘현실’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게 될 것이며 이윽고 자신의 목숨을 건 행동도, 혹은 위험한 행동도 쉽게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꿈으로 여겨지니까. 이 책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에서는 독서를 일종의 혁명이라고 이야기한다. 혁명은 왜 일어나는가? 꿈을 꾸기 때문이다. 내가, 그리고 당신이 꿈을 꾸기 때문에 혁명이 일어나는 것이다. 꿈은 언제 나타나는가? 잠을 자고 있을 때 꿈을 꾸는 것이다. 하지만 꿈만 꿀 수는 없는 것이다. 꿈을 진행시키기 위해서는 별 수 없이 꿈에서 깨어야만 하고, 꿈의 단초를 붙잡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 일을 진행시키고 싶을 때 책을 읽는다. 잠에서 깨어 책을 읽고 혁명의 단초를 붙잡는다. 그렇기 때문에 다시금 책에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문학이든 사상이든 그 무엇이든 말이다. 그러고 나서는 다시금 잠에 들 것이다. 그렇기에

 

 

진실로 깨지 않는 꿈이라도 꾸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이 그리 녹록치는 않다. 꿈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 꿈처럼 현실을 살아가는 것은 일종의 도피다. 자신의 생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회피에 지나지 않는다. 회피하고 회피하다가 결국에는 현실을 꿈처럼 바꾸기 위해서 들고 일어나는 ‘혁명’ 을 일으킬 수 있겠지만 그런 사람은 드물다. 앞서 루터나 무함마드 정도가 그런 사람에 해당할 것이다. 책에서는 이야기한다. ‘아니, 380만년이나 남았는데 혁명은 그 긴 시간 동안 언제든지 일어나지 않겠느냐’ 라고. 그렇다, 분명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 루터나 무함마드, 니체 등 그들과 비등한, 그리고 그들보다 더 뛰어난 통찰력을 가진 사람이 태어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위의 저 말은 동시에 380만년을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함의한다. 독서는 광기와 함께 이런 것을 깨달을 만큼의 지혜를 동시에 나에게 부여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샌가 깨버렸다, 라고 혼잣말을 할 것이다, 380만년의 영원의 그 언젠가.

 

 

 

 

 

 

 

 

 

p. s. 아주 아방가르드한 글이 되어버렸네요, 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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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12-07-15 04:01   좋아요 0 | URL
저도 이 책 읽고 있어요. 첫째날, 읽고 잠시 덮어두었는데, 아주 생각할 것들이 많아요. 가연님의 리뷰는 책 다 보고 보려고 일단 서두만 읽고 스킵해뒀는데, 이 리뷰를 읽기 위해서라도 얼른 책을 마저 읽어야겠네요.

가연 2012-07-16 15:00   좋아요 0 | URL
ㅎㅎ 이 책은 자신의 독서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는 효과가 있는 것 같아요.. 그 결과물이 이런 요상한 글이 되어버렸지만 읽을때부터 하고 싶었던, 할말은 다 했으니 마음은 편하네요. 사실 엄밀하지 않다고 스스로 여겨지던 부분이 눈에 좀 걸리긴 했지만..ㅎㅎ 특히 넷째날, 풋. 다음에 다시 읽어볼 만한 책인 것 같네요.

꽃도둑 2012-07-21 11:00   좋아요 0 | URL
가연 대장님! 며칠 동안 심하게 아팠습니다.(쿨럭쿨럭~)
아직도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요..리뷰를 늦어도 월요일까지는 올릴게요,,,,^^

가연 2012-07-23 17:04   좋아요 0 | URL
지금은 좀 나으세요? 네, 혹시 힘드실 것 같으면 연장 메일이나 댓글 남겨주세요.

꽃도둑 2012-07-25 23:43   좋아요 0 | URL
낮자마자 여름휴가 여행다녀왔어요. 서재도 오늘에서야 들어왔네요.
리뷰가 늦었네요,,,,암튼 짧게라도 써서 올려놨습니다...고맙습니다^^

가연 2012-07-28 06:18   좋아요 0 | URL
네, 확인했습니다, 감사합니다.

희선 2013-08-10 01:41   좋아요 0 | URL
이 책 제목 조금 무섭기도 하네요^^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가끔 책을 읽고 나면 뭔가 덧없음을 느낍니다 그게 무엇인가 했더니 '죽음'이었나 보네요 가끔은 그 말을 떠올리지만, 그것은 책 속에 나오는 사람이 그렇게 되겠구나 한 거죠(어쩌면 꼭 그런 것은 아닌지도 모르겠군요) 광기는...

혁명은 꿈을 꾸기에 하는 것이다 그렇군요 이 낱말을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아마 거의 저하고는 상관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겠죠 무엇을 바꿔야 한다고 여긴 적이 없어서... 그냥 있는 그대로 살아간다고 할까

뭔가 더 말해야 할 것 같은데 떠오르지 않는군요^^


희선

가연 2013-08-11 20:40   좋아요 0 | URL
제목이 참 특이합니다. 저도 덧없다, 라는 감정을 정말 많이 느끼는데, 사실 죽음, 이라는 것이 항상 근처에 있다, 라고 책이 알려주는 것 같다, 라는 생각도 가끔씩 해봅니다만.. 그야말로 우스개소리같네요, 풋.
 
상실의 시대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유유정 옮김 / 문학사상사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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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상실의 시대를 고등학교때 읽었다.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대부분의 다른 고등학교들처럼 야간자습이 있었고, 어느 야간자습처럼 야간자습시간에는 딴 짓을 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나는 약간은 모범생이었으나, 모범생이라고 해서 딴 짓을 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아니, 도리어 모범생처럼 보이는 학생일수록 감독 교사의 눈초리를 쉽게 벗어나서 딴 짓을 하기가 편하다. 나도 일종의 그런 학생이었고, 몰래 판타지 소설을 책상 서랍에 숨겨서 읽거나 혹은 일본 소설책들을 읽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게 각종 소설을 섭렵하던 어느 날, 어느 학생이 쉬는 시간에 이 상실의 시대, 를 꺼내놓고 읽는 거지. 주워들은 지식으로 저 책의 저자인 무라카미 하루키, 와 그리고 책에 대해서 알고 있던 나는 깜짝 놀라면서 그 학생에게 다가가서는 말했다. 너도 하루키를 아냐고. 그 학생은 당연히 안다는 듯 자신의 책을 들어보이고는 말했다. 이 책 완전 야설이라고 말이지. 그때만 해도 그저 이야기만 들었을 뿐 제대로 읽지는 않았던 나는 야설이라는 말에 애매하게 동의를 표하면서 이 책을 혹시 빌릴 수 없냐고 물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책을 빌리게 되었고 그로부터 하루 동안 나는 이 상실의 시대, 의 세상 속으로 빠져들고야 말았다.

 

그날 새벽을 기억한다.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아무래도 좋은 대학교에 가야 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에 다른 고등학생들처럼 야간 자습이 끝나도 집에 와서 조금은 공부를 하려고 책상 앞에 앉았었다. 물론 반은 일종의 강제성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겠다. 그렇게 앉아있는다고 해서 내가 공부를 그리 많이 하는 것은 아니었고 대부분의 시간은 꾸벅꾸벅 조는 것으로 보내다가 이불 속으로 들어갔었지만 그날 새벽에는 달랐다. 나에게는 그날의 야간자습시간을 지겹지 않게 보낼 수 있었던 책, 상실의 시대, 가 있었고 아직 뒷 부분은 덜 읽은 상태였다. 그래서 밤에 몰래 책가방에서 이 책을 몰래 꺼냈고, 뒷부분을 마저 읽기 시작했다. 결국 끝까지 다 읽고나서는 이상한 허무함에 사로잡혀서 잠이 들었고, 그리고 그 다음날 원 주인에게 가져다 주었다. 어때, 정말 야하지? 라고 묻는 그 학생에게 나는 와, 정말 야하더라, 라는 말로 대신하고 다시금 자리에 와서 앉았다. 확실히 성적인 묘사가 많기는 많은데.. 그리고 주인공의 여성편력이 부러운 수준을 넘어서 무슨 종마가 아닌가, 생각될 정도였기도 했는데... 그런데도 마음 어디선가는 그날 새벽에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기고는 느꼈던 허무함이 남아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대학교에 들어와서 생물 수업을 들을 때, 조별로 모여서 모형을 만들 일이 있었다. 그 모형을 만들기 위하여 모인 자리에서 어느 순간 하루키의 이야기가 나왔고, 나는 나도 모르게 하루키에 관한 이야기들을 말했다. 그때 나는 계속 처음 나에게 책을 빌려주었던 학생의 야설이다, 라는 평가에 신경쓰고 있었는지, 정작 하루키라면 별로 신경도 안 쓸 부분에 도리어 내가 변명을 하면서 하루키의 작품의 대단한 것은 분명 성애 묘사 부분이 많기는 하지만 그 부분들이 어느 하나도 빠질 부분이 없다는 점이다, 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했었다. 앞 뒤 문맥과 흐름을 따져보면 그 성에 관련된 부분이야말로 진실로 20대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는 그런 부분이라고 말이지. 그런데 사실 말하는 나도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그 당시에는 몰랐다. 갓 대학교에 들어온 내가 20대의 상처와 방황이 무엇인지 알게 뭔가. 게다가 그 방황의 끝에 어떤 성적인 것이 있을 거라니. 내가 말해놓고도 참 뻔뻔스러운 이야기들이었다.

 

하지만 내가 했던 말은 완전히 그르지는 않았다. 대학교에 진학하면 그 전까지의 자신을 쇄신하겠다는 듯이 술을 마시고 떠들썩하게 노는 부류가 있는가하면, 진학한다고 해서 무언가 달라지는 것이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부류도 있는 법이다. 대부분은 도리어 후자쪽에 더 가까웠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수업을 듣고 밥을 먹으며 지내게 된다. 그저 탐색해보는 것이다. 그러다가 몇 몇 그룹도 생기게 되고 동아리에도 들게 되고 그렇게 되지만 끝내 그룹이나 동아리에도 들지 않는 학생은 그야말로 뿌리 뽑힌 풀처럼 휘적 휘적 캠퍼스를 걸어다니게 되는 것이다. 전자라고 해서 딱히 스스로가 쇄신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최인훈의 광장, 을 읽으면 주인공인 이명준은 마지막에 자살을 택하게 되는데, 그는 깨달았던 것이다. 다른 세계, 그러니깐 남한도 북한도 아닌 곳에 간다고 해서 내가 나 아닌 그 무엇인가로 변할 수는 없는 것이라고. 어디를 가더라도 자신은 자신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는 대학교에서도 마찬가지라서, 대학교에 들어가서 새로운 환경에 처한다고 해도 결국에는 그 전에 살아갔던 것 처럼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비록 어느 정도의 변주가 있더라도.

 

나는 후자였고, 그렇다고 술을 마시지 않은 것은 아니었고, 하지만 결국에는 동아리든 뭐든 아무것에도 참여하지 않았고 멍하니 도서관 정문 계단에 앉아서 캠퍼스에서 지나가는 학생들을 보면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도서관에 있지 않으면 보통은 외국인들을 위한 공간이랍시고 만들어 둔 공간에서 드러누워서 잠을 자고 있었다. 내가 그렇게 하고 싶어서 그렇게 살았던 것은 아니다. 이런 나의 활동은 일종의 '어쩔 수 없음' 이었고, 그렇게 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나였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들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한편으로는 외로움에 시달려야했다. 사실 손만 뻗으면 바보취급을 받든 똑똑한 사람취급을 받든 어떻게든 다른 학생들 사이에 비집고 들어갈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일들이 나에게 이르게 되면 모두 무의미한 것 처럼 여겨졌고, 그래서 아무런 시도를 할 수 없었다. 적어도 인간관계에 이르면 그랬다. 하지만 무의미하다고 해서 그 사실이 나에게 어떤 위안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외로웠다.

 

어느 새 나는 저 상실의 시대에 나오는 와타나베를 닮아갔다. 적당히 냉소적이고 적당히 거리를 두는, 그리고 귀찮음을 못이겨 아무 책이나 펴고 다리를 꼬고 앉아있는 그런 학생 말이다. 성적인 부분만 제외하면 제법 많이 닮았을 것이다. 이상한 말투를 쓰는 것도 그렇고. 아, 그렇다. 이상한 말투는 책을 읽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문어체를 괜히 쓰게 되는 것이다. 어쨌든 와타나베가 마의 산, 위대한 개츠비, 를 들고 읽을 때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선, 을 펼쳐놓고 하늘을 쳐다보면서 지내고 있었다. 그리고는 점차 이런 생각이 든거야. 이런 게 20대의 방황인가, 하고. 음.. 20대의 상처나 방황이라고 하면 우리는 좀 더 구체적인 것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편의점에서 알바를 했는데 점장에게 돈을 제대로 못받았다거나, 돈이 없어서 휴학을 한다거나, 여자친구랑 사귀다가 결국에는 헤어지거나. 그런데 사실 이런 구체적인 것들만 20대의 상처는 아닐 것이다. 도리어 좀 더 포괄적으로, 그 어떤 상황이든지 외부의 어떤 상황과 본인의 생각의 엇갈림이 가장 주요한 상처로 작용할 것이다. 혹은 자신의 내재적인 성향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껴지는 근원적인 고독감.. 그 언저리를 엿보는 것도 상처로 작용할 수 있겠고. 이런 상처들이 실제로 상실의 시대, 에서 주인공이 느끼는 알 수 없는 조급함과 방황의 근원이 될 것이며 그 주인공인 와타나베가 어떤 자기 파괴적인 성애에 몰두하게 되는 원인일 것이며 나의 상처의 근원이었다. 두 사람이 하나가 될 때 적어도 순간적으로는 고독과 허무감에서 벗어날 수 있을테니까. 그때서야 왜 와타나베가 그렇게 성애에 몰두했을까, 이해가 갔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와타나베의 방식을 따른 것은 아니다. 애초에 와타나베와 같은 학생은 실제론 인기가 별로 없다, 풋. 설령 내가 인기가 좋았더라도 저런 방식을 따르지는 못했을 것이다. 나는 의외로 순정파거든, 하하. 어쨌든, 와타나베의 옆에는 나오코와 미도리가 등장하지만 내 옆에는 그녀들 중 어느 누구도 등장하지 않았고.. 그 후에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른 대학교로 떠나게 된 후에도 별로 달라진 모습을 보이지 못했고.. 그러다가 사랑에 빠지고, 사랑을 잃으며 살아갔다. 여전히 나는 허무함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가끔 카페에서 다리 꼬고 책을 펴고 읽으면서. 그런 공허감에 가끔은 다른 사람들이 이끌리기도 하지만, 알잖는가, 아무리 빛나는 별이라도 가까이 가서 보면 가스덩어리거나 혹은 울퉁불퉁한 표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러면서 나는 내 허무함을 가슴 한 구석에 안으며, 하지만 지나치게 의식하지는 않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게 내 삶의 방식이 되었다. 그러면서 이런 삶을 살아가기에 잃어버린 것들을 추억하는 것이다.

 

자신의 삶은 자신이 개척하는 것이다, 라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 보통 자수성가한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그런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아니 젊은 애가 벌써부터 이런 허무주의에 빠져서야 쓰겠냐, 라는 말을 할 지도 모르겠다. 외롭다고? 그럼 밖에 나가서 친구를 사귀어라. 술도 마시고 어울려 놀면 되지 않느냐. 너만 바뀌면 되는 거잖아. 애인을 사귀고 싶다고? 소개팅, 아니 헌팅이라도 하고 그런 말을 하는게 어때, 등과 같이 말이다. 하지만 이런 삶도 생각보다 나쁘지는 않다. 가끔은 사무치는 근원적인 고독에 몸부림치지만, 그런 고독이야말로 내 삶을 단련시켜주는, 그리고 마음 속 비원에 끊임없이 연료를 제공하는 불과 같은 것이기에. 너무 현실에 매몰되지 않게 나를 잡아주는 방향틀이기에 말이다. 사람들은 쉽게 너만 바뀌면 된다, 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나를 바꾸는 게 무엇보다도 어려운, 그리고 내키지 않는 사람도 있다. 릴케가 놀라운 통찰력으로 그의 말테의 수기, 에 적은 바에 따르면 지금의 내가 이전의 나와 다르다면 이전의 내가 알았던 사람들은 지금의 나와는 모르는 사람이 될 것이다. 나는 이미 바뀐 사람일테니까. 그렇다면 지금의 내가 모르는 사람들에게 굳이 말을 걸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앞으로도 내가 바뀔 거라면, 지금의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모르는 사람이 될 터인데, 뭐하러 수고스럽게 타인과 관계를 맺으려 들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은 미도리나 나오코가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

사회나 학교에서 만난 인간관계 모두를 포기할 정도로

소중한 누군가가 나에게 다가왔으면 좋겠다.

 

너무 늦지는 않게.

 

 

 

 

 

 

 

 

 

 

덧.

 

실은 10000명 방문 기념으로 만 명이 모이면 마왕이 소환되지, 라는 제목의 페이퍼로 질의응답이나..[...] 해볼까, 아주 잠깐 고민했지만 아무런 질문도 안달리면 너무 부끄러울 것 같아서 그냥 포기해버렸다. 게다가 내가 무슨 질문이든 다 답할 수 있을 거라는 장담도 못하겠으니. 언제나 넷에서 글을 쓸때는 현실에서 내가 뭘하며 살고 있는지는 가리게 된다. 신비주의라면 신비주의겠지만 그렇다고 현실의 나와 여기 서재에서 끄적거리는 내가 다른 사람은 아니다. 어쨌든 만 명이다. 얼마나 오래 서재에 글을 올릴 수 있을지 사실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고맙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많이 찾아와주는 것은 썩 기분이 나쁘진 않다. 그래서 이 글로 이기적인 고마움을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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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6-24 19:55   좋아요 0 | URL
가연님. 마침 책을 사려고, 그리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한 편 읽어봐야겠다 마음 먹었지만 과연 나와 맞을까 생각하던 차에 가연님께서 <상실의 시대> 리뷰를 써주시니 저는 감사하며 장바구니에 이 책을 담겠습니다. 저는 야자 시간에 아주 당당하게 소설을 꺼내놓고 읽습니다. 책상에 다리를 올려놓는 수준은 아니지만 삐딱하게 읽고 있어도 아무 말도 안 하셔요. 감독 선생님께서 국어 선생님이어서 그런가. 야자를 많이 빼먹어서 그렇지, 야쟈시간에는 항상 책만 읽습니다. 심각합니다. 시험 한 주 전에도, 아니 하루 전에도 책만 읽습니다. 공부를 안하는 거예요. 이젠 <상실의 시대>를 대놓고 읽어야 겠네요. 개인적인 바램으로는 표지가 좀 더 세련되게 재출판(?) 되었으면 좋겠어요. 신경숙의 옛 소설들과 하루키의 옛 소설들은 표지가 마음에 안 들어서 계속 미루고 미루네요.

그런데... 가연님 남자이십니까? 와타나베... 하면 남자 이름일텐데요. 음.

가연 2012-06-24 20:10   좋아요 0 | URL
ㅎㅎ 리뷰가 아니라 일종의 이기적인 잡담이지요. 제가 좋아하는 책에 얽힌 저의 이야기랄까. 아무래도 그냥 잡담하는 것은 어색하니깐 이렇게 끄적거리고 있네요. 음..ㅎㅎ 지금 나이때에 읽으시면 괜찮을 것 같기도 하네요. 저는 이 책을 정말 많이 읽었답니다. 도리어 그렇기 때문에 작정하고 서평을 못쓰게 되는 그런 책이 되었네요. 하하, 시험 공부를 그렇게 안하시나요ㅎㅎ 음.. 어서 공부를 하세요, 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많을 듯 합니다만.. 저는 그런 말씀을 드릴 입장이 못되는 편이라..ㅎㅎㅠㅠ 저 스스로가 딱히 공부를 별로 안하는데 다른분보고 공부를 하라고 할 수는 없네요, 아하하. 지금도 이렇게 놀고 있는데ㅠㅠ 그래서 소이진님께 조언을 하는 것은 다른 분들의 역할로 맡기고, 풋. 저는 개인적으로는 표지가 저 상태 그대로였으면 좋겠네요.

저는 남자랍니다. 가연이라는 넷에서 쓰는 이름때문에 여자로 오해를 많이 받지만.. 몇 번이고 글들에서 밝혔던 것 같은데..ㅎㅎ 바로 아래에 썼었던 현대 물리학에 관한 책의 글에도 밝히기도 하였구.. 한 두번은 대놓고 밝히기도 하고... 혹시나 다른 분들이 오해하실까봐 성별은 꼭 밝히는 편이에요. 그런데 쓰다보니깐 본의아니게 소이진님께 낚시를 한 기분인데요, 풋. 죄송하네요.

이진 2012-06-24 20:16   좋아요 0 | URL
낚시까지는 아니고 말입니다.
글을 너무 잘 쓰셔서 남자라곤, 아 닉네임 때문이었나 ㅎㅎ
다락방님과도 스스럼 없이 대화하는 걸 보고는 여자라고 생각했나 봅니다.

흠. 밑에 노란띠만 없으면 괜찮을 거 같긴 한데 말입니다.
요새는 리뷰가 써지는 책을 만나질 못하고 있네요.
확실히 신간평가단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니 아예 리뷰를 안 써버리는 경향이 나타납니다. 후후. 알라딘에 리뷰 기능이 있던가요? ㅋㅋㅋㅋㅋ

다락방 2012-06-24 22:06   좋아요 0 | URL
소이진님, 저는 남자사람들과도 스스럼없이 대화하곤 합니다. 그걸 더 좋아하기도 하고....쿨럭.....( ") 소이진님과도 스스럼없이 대화하잖아요. 아하하하하하하하하

가연 2012-06-25 10:27   좋아요 0 | URL
소이진님//ㅋㅋㅋ 남자도 글잘쓰는데요, 뭐ㅎㅎ 소이진님도 남자 아니십니까, 풋. 닉네임때문에 아마 여자로 착각하셨을듯. 다락방님..은 아래에도 쓰셨듯 스스럼없이 대화많이하시는데요 뭐ㅎㅎ

노란띠는 벗겨낼 수 있을거에요ㅎ 즐겁게 읽으세요.


다락방님//ㅋㅋㅋ 왜요, 저는 제가 특별하여서 저랑 스스럼없이 대화한다고 은근히 좋아했는데, 풋. 전혀 특별한 게 아니었군요. 여, 역시 인기쟁이 다락방님[...] 아하하하하하하

프레이야 2012-06-25 10:24   좋아요 0 | URL
저도 저 책표지가 그런대로 좋다고 생각하는 한 명이에요^^
한참 세월지나 요즘 다시 읽으면 어떤 느낌일까, 저도 제 자신이 궁금해지네요.
아무튼 가연님께 너무 늦지는 않게 누군가가 나타나길 바랍니다^^

가연 2012-06-25 10:31   좋아요 0 | URL
ㅎㅎ언젠가 오겠죠? 풋.

저는 정말 많이 읽었는데.. 항상 같은 기분으로 마무리짓게 되더군요. 좀 더 지나서 읽으면 다른 기분일까요. 이건 여담인데 최근의 1Q84빼고는 가장 잘 쓴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다락방 2012-06-25 11:04   좋아요 0 | URL
1. 가연님 특별한거 맞아요.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2. 저도 아웃사이더 서재가 더 좋아요.

3. 배고프네요. ㅜㅡ

2012-06-26 00: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티티카카 2012-06-25 13:55   좋아요 0 | URL
아- 저는 닉네임이 아니라 문체 때문에 여성분이신 줄 알았어요..허허
제가 지금 안고 있는 고민과 비슷해서 덧글로 인사 남겨봅니다~
하루키 잡문집 보고 그의 작품이 궁금해졌는데 들어오길 잘했네요 후후

이진 2012-06-25 18:19   좋아요 0 | URL
티티카카님, 나두나두!
문체가 여성스럽잖아요.
왠지 이런 문체보면, 수다쟁이님도 그렇고, 여성스러워요.
뭐랄까 남성스런 투박함이 없는 세련된 문체랄까요. ㅎㅎㅎㅎㅎㅎ

가연 2012-06-26 00:49   좋아요 0 | URL
소이진님//아하하ㅋㅋ 사실 감사한 말씀이지만 저로서는 어째 성차별적인 말씀이 아닌가, 하고 지적을 하지 아니할 수가 없네요, 푸하하. 아, 농담이에요. 하지만 저로서는 글을 쓸 때 정말 작정하고.. 필요할 때에 사용할 경우가 아니면 기교를 여간하면 빼고 쓰고 싶어서..ㅎㅎㅎ 굳이 문체에 대한 평을 듣자면 담백하다는 말을 듣고 싶긴 한데.. 세련된 문체라는 말씀에 감사드리지만 한편으로는 온전히 기뻐할 수가 없구만요, 쿡.



티티카카님//제 문체가 그런 경향이 있나요ㅎㅎ 사실 저도 애써 부정하지만 좀 여성스러운 문체같다는 생각을 가끔은 해보긴 하는데, 문체가 좀 본인의 성향과 약간 닮는 부분도 좀 있으니.. ㅎㅎ 아무래도 이십대나 삼십대초반에는 이런 저런 고민이 생기게 되지요. 이렇게 찾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루키잡문집은 정말 빠심[..]을 모아서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2012-06-29 21:55   좋아요 0 | URL
너무 늦지는 않게.. 란 말이 와 닿네요.^^

가연 2012-06-30 04:48   좋아요 0 | URL
요즘 쫌 외롭나봅니다, 푸하하하하. 쓰는 글마다 마지막에는 애인있었으면, 이런 식으로 끄적거려놓으니, 지금 와서 읽으니 매우 부끄럽네요.

風流男兒 2012-07-02 23:34   좋아요 0 | URL
아흐, 이 글 좋아요. 흐흐.
연애는 언제나 옳은 건데, 아흑. 뭘 생각해도 다 상투적인 말이지만,
찌릿하고 짜릿했던 감정들이 막 떠올라요.

어서 하세요 ㅋㅋㅋ 길던 짧던. 푸핫 ;;;;;;;;;(가관인 결론을 용서하세요 ㅎㅎ)

가연 2012-07-03 10:44   좋아요 0 | URL
하하, 연애는 언제나 정의인가요? 풋. 감사합니다, 곧 하겠죠 푸하하.

희선 2013-02-22 01:20   좋아요 0 | URL
아무리 빛나는 별이라도 가까이 가서 보면 가스덩어리거나 혹은 울퉁불퉁한 표면을 가지고 있다

그래도 멀리서 보며 좋아하는 거 괜찮지 않을까요, 그 반짝임이 좋으니까


상실의 시대는 남자들이 더 좋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와타나베는 남자니까^^
저도 이 책을 읽었지만, 겨우 한번밖에 안 봤습니다(여러 번 읽은 책이 그렇게 많지도 않군요) 그걸로 다 알지도 못했고...
그래도 무라카미 하루키는 일본 작가 가운데 가장 처음 알았기 때문에
그냥 관심은 가지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책도 여러 권 사기도 했고...

다른 말을 더 쓰고 싶지만, 잘 떠오르지 않는군요
좋은 말은 없지만 여기까지입니다


희선

가연 2013-02-22 01:38   좋아요 0 | URL
아하하.. 저 문맥에서 스스로를 별에 지칭한 것 같기는 한데... 생각해보면 저는 가스덩어리라기보다 블랙홀이라... 푸핫. (사실은 블랙홀이 더 마음에 든다는게 함정)

옳은 말이세요, 와타나베는 남자니까ㅎㅎㅎ 저는 이번에도 또 봤어요. 읽을 수록 중반까지는 막 가슴졸여가며 읽는데 그 이후에 그냥 화악... 가라앉아버리는 기분이에요

여자입장에서는 이런 비슷한 분위기를 가진 책이 뭐가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