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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순례 - 옛 그림과 글씨를 보는 눈 유홍준의 미를 보는 눈 2
유홍준 지음 / 눌와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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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년 전 바람의 화원, 이라는 드라마가 방영된 적 있다. 해원 신윤복이 만약에 여자였다면? 이라는 가정으로부터 시작한 그 드라마는 단원 김홍도와 신윤복이 만나는 장면과, 신윤복이 어떻게 조선의 뛰어난 화가로 우뚝 서게 되는지를 세밀하게 그려내었다. 물론 배우들의 열연도 빼놓을 수가 없을 것이다. 김홍도의 경우에는 파리의 연인, 쩐의 전쟁 등과 같은 드라마로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던 박신양이 맡았고, 해원 신윤복의 경우 당시만 해도 국민 여동생, 이라는 말이 전혀 부끄럽지 않던 문근영이 맡았다. 박신양은 (개인적인 평이지만) 비록 이전의 자신의 캐릭터 - 버럭 소리 지르며 윽박지르는 모습이 강한 - 에서 크게 벗어난 모습은 보이지 못했지만, 자유로운 김홍도를 그려내는데 성공했으며 문근영은 문채영과의 소위 말하는 ‘닷냥 커플’ 에피소드를 통하여 실제로 배우자신이 미소년이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남장여인의 모습을 잘 그려내었다. 그 이후로 문근영이 남장이 너무 어울려 버리는 바람에 도리어 캐릭터가 굳어져버린 감이 있다는 것은 논외로 하고서 말이다. (실제로 ‘불의 여신 정이’ 와 같은 드라마에서도 남장을 했다.)

 

물론 아쉽게도 드라마 자체는 그 당시 비슷한 시간대에 방영했었던 베토벤 바이러스, 라는 강풍을 만나서 조금 휘청거렸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으리라. 베토벤 바이러스의 김명민은 그야말로 본인이 강마에 자신이 된 것처럼 누구나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연기력으로 사람들을 끌어당겼다. 나 또한 TV에서 베토벤 바이러스를 보면서 ‘똥덩어리’ 라는 욕을 먹은 첼로연주자가 그런 곤욕에서 벗어나 리베라탱고를 첼로로 연주하는 모습을 보고 가슴이 두근거렸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나는 베토벤 바이러스만큼이나 바람의 화원에 관심이 많았다. 베토벤 바이러스에 강마에가 있었다면 바람의 화원에는 버럭 김홍도와 닷냥 커플이 있었다. 아까 베토벤 바이러스에서 기억에 남는 장면을 이야기했었으니 바람의 화원에서도 기억에 남는 장면을 이야기하여야 공평할 듯싶다. 사실 지금도 그 드라마에서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극 말미에 두 화가, 혜원과 단원은 그림을 통하여 승패를 가르게 된다. 자세한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마 계략에 빠져 생겼던 것 같다. 그 ‘결투장’에서 혜원은 두 여인의 검무를 담은 ‘쌍검대무’ 라는 그림을 그린다. 그림을 검색해서 보면 알겠지만 역동적 모습과 뛰어난 색감은 가히 일절이라고 불릴만하다. 여기에 대응하여 단원이 그린 작품은 ‘씨름’ 이다. 마찬가지로 주변의 생동감 넘치는 분위기를 그대로 화폭에 담은 그림이다. 금방이라도 한쪽으로 넘어갈 것 같지만 넘어가지 않고, 씨름을 하는 당사자들만 초조한 것이 아니라 지켜보는 구경꾼들도 점차 초조해지고 계속 손에 땀을 쥐게 된다. 이런 작품들이 서로 맞붙었으니 승패를 가를 수가 없었다. 그래도 승패를 가리기 위하여 판정하는 사람들이 각각의 더 나은 점을 찾아내려고 하고, 김홍도의 작품인 씨름, 에서의 실수를 찾아내고 (이 부분은 드라마적인 허구가 아니라 실제로 있는 부분이다. 물론 관점에 따라 의견이 다르지만 말이다. 혹시나 흥미가 생긴다면 직접 찾아보기를 바란다.) 결국에는 화려한 혜원의 그림에 손을 들어주려고 했지만 김홍도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아직 기다려보라고, 끝난 것이 아니라고.

 

실제로 총칼을 휘두른 대결은 아니었지만, 정신적 혈투는 그 이상이었으리라. 판정하는 동안 시간은 점심을 지나 저녁으로 지나갔다. 이윽고 저녁이 되어 해가 뉘엿뉘엿 서쪽하늘로 건너갈 때, 갑자기 김홍도는 자신의 그림에 햇살을 비추어보라고 권한다. 과연 그랬다! 김홍도의 씨름, 은 햇살에 따라 그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지는 그림이었던 것이다. 저녁놀에 따라 황토색으로 화폭은 타오르고 이윽고 씨름의 역동성이 더욱 살아 숨쉬게 되었다. 주변의 사람들은 그 광경을 보고 찬탄을 금치 못하고 이윽고 다시 승부는 원점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아니, 그들은 어쩌면 자신들의 비평 능력의 한계를 느꼈으리라. 결국 그 승부는 무승부가 되었다.

 

사실은 이랬다. 신윤복과 김홍도는 수많은 수수께끼들을 자신들의 그림에 숨겨 결국에는 서로의 대결을 무승부로 만들 생각이었다. 비록 서로 약속하지는 않았지만, 두 사람은 서로가 그렇게 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왜? 그들은 화원이었기 때문이었다. 예술을 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그들은 누구보다도 서로의 능력에 대하여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으리라. 그들은 서로를 인정했고, 그만큼이나 예술에 있어서 고하를 가르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잘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들과 달리 또다른 ‘원’을 가진 오원 장승업은 생각이 좀 달랐던 모양이다. 장승업은 이렇게 말한다. ‘단원, 혜원만 원園이냐? 나도 원이다(吾園)’ 그리하여 오원이라는 호를 가지게 되었다. 장승업은 위의 단원과 혜원과는 달리 호승심이 좀 있었던 모양이다. 물론 위의 단원과 혜원의 대결은 실제로는 없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그렇거나 말거나 그들의 그림에서는 일종의 여유가 느껴진다. 하지만 오원의 작품들, 특히나 책 명작 순례, 에 실린 쏘가리, 를 보면 이 책의 저자 유홍준은 ‘화면에 신선한 멋과 유머를’ 느낄 수 있다, 고 이야기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에라 모르겠다, 빨리 그려주자, 라는 느낌을 준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말하자면 시간에 쫓겨 그린 것 같다, 라는 느낌이랄까. 비록 장승업의 모든 작품들이 다 이렇지는 않고, 실제로 그의 명작은 따로 있다고 하나, 그에게서 기행을 빼고 자유분방함을 제외한다면 단원이나 혜원과 같이 ‘원’이라는 호칭을 붙여주기에는 조금 부족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물론 앞서 말했든 예술에 고하를 가르는 것은 무의미하다. 아마 단원이나 혜원이 내가 멋대로 내린 결론인 ‘오원은 원이라고 붙이기에는 조금 부족하지 않을까?’ 를 들으면 손사래를 칠지도 모르겠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며 말이다. 하지만 나처럼 눈이 뜨이지 않고, 마음으로 즐기지 못하여 여유가 없는 사람들은 늘 서열을 매기며 감정을 무두질한다. 그리고 누구나 인정한다고 알려진, 소위 평판이 좋은 작품을 보면서 멋진 감정을 느낀 척, 만들어진 감탄사를 내뱉는다. 머리로는 고하를 가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마음으로까지 와 닿지는 않는다는 이야기이다. 물론 변명을 하자면 나만 그런 것이 아니다. 이 책 유홍준의 명작 순례, 를 읽어보면 중간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남태응이라는 조선 시대의 문인이 비평을 남겼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김명국은 신품이며 태어나면서 아는 자, 윤두서는 배워서 아는 자이며 묘품이고, 이징은 노력해서 아는 자로 법품이다’ 여기에 뒤의 견해 (남태응은 말한다, 세 사람이 먼지를 일으키며 달리자고 한다면 이징은 맨 뒤를 달리리라고.) 를 종합하여 세 명의 예술적 경지를 따지자면 그의 생각으로는 쉽게 말해서 김명국>윤두서>(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이징이라는 이야기이다.

 

김명국의 달마도는 누구나 한 번쯤 본 적 있을 터이고, 윤두서의 자화상 또한 마찬가지이리라. 이징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이징의 작품은 바로 떠오르는 작품이 없다.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이징이 최고일지도 모른다. 이는 자신의 안목에 달린 일이다. 바꿔서 이야기하자면, 아직 눈이 뜨이기 전에는 비평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겠지만, 일단 그림을 보는 눈을 가지게 되면 그 이후에는 본인이 기준이 되어 그림을 살피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위의 의견에 반하여 이징이 가장 뛰어나다, 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를 두고 유한준이라는 조선 시대의 사람은 말한다. 그림에는 그것을 아는 자, 사랑하는 자, 보는 자, 모으는 자, 가 있는데 이윽고 경지에 이르러 그림의 법도와 형태, 조화를 잘 ‘알게 되면’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그렇게 사랑하게 되면 참되게 보게 되며, 참되게 보게 되면 모으게 된다고 말이다. 이 말만큼 이 책 ‘명작 순례’ 의 목적을 잘 드러내는 말은 없으리라.

 

무엇보다도 책에서 가장 눈에 들어온 글귀는 능호관 이인상, 에 대하여 저자인 유홍준이 적은 부제목이다. 능호관 이인상은 몇 명의 벗들과 함께 수많은 시회를 가졌고, 그 시회에서는 글과 그림이 춤을 추었다. 만약에 그런 시회가 없었더라면, 그런 모임들이 없었더라면 아마 지금껏 명작이라고 일컫는 '수하한담도' 가 탄생하지 못했으리라. 수하한담도는 저자 유홍준의 말을 빌리자면 '계곡은 그윽하고 나뭇잎은 무성하여 시원스러운 그늘을 보이며 그리하여 그 서정이 자못 그윽한' 그림이다. 하지만 나는 그림의 기법을 보면서 평가를 내릴 입장은 못되고, 다만 능호관이 이 그림에 적은 연유로 이 그림이 걸작이라고 판단할 따름이다. 능호관은 자신의 그림에 이렇게 적는다.

 

이번에는 남이 그림을 가져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이를 쓴다.

 

능호관에게는 임매라는 친구가 있었으나, 그 친구는 성품이 너그러워 그림을 주변에 다 나누어주고만다. 그게 능호관에게는 조금 불만이었던 모양이다. 그리하여 자신의 그림을 억지로라도 그에게 주기 위하여 그림의 한쪽에 저렇게 적어놓는다. 즉, 다음과 같은 말이다. 이 책의 저자인 유홍준이 이 주제에 붙인 부제처럼 '이 그림은 그대를 위해 그린다고 미리 적어놓노라', 라고. 어찌 보면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일수도 있고, 어린 아이들처럼 치기 어린 이야기일수도 있다. 자신이 원하는 상대에게 주기 위하여 일종의 '찜'을 해놓는 것과 다를 바 없으니 말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만큼 순수했던 능호관과 임매의 관계를 떠올리게 만든다. 이렇게 '찜'해놓지라도 않으면 주변에 다 나누어줄 친구를 그렸으니 말이다.

 

마찬가지로 이 책은 일종의 '찜'이다. 저자 유홍준은 이야기한다. 왜 책을 펴내느냐면, 그게 스스로가 세상에 진 빚이라고 생각한 것을 갚아나가는 과정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라고. 이 책은 문화재와 우리 미술사에 무관심했던 우리를 위한 책이다. 미술사적인 지식을 통하여 우리의 안목은 넓어질 수 있을 것이고, 높아질 것이라고 여기기에 쓴 책이다. 마치 위의 임매와 능호관의 관계와 흡사하지 않는가? 이번에는 그대가 꼭 알기를 바라기 때문에 이 책을 썼노라, 라고. 그리고 이런 과정을 거쳐 참되게 알게 되면 우리는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게 되면 참되게 보게 되고, 이윽고 모으고 관심을 가지게 될테며, 우리의 기준을 세워 고전 그림을 살펴보게 될 것이다. 아무쪼록 저자의 기대대로 이 책이 우리미술사에 관심을 환기시키기를 바랄 따름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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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4-01-21 01:02   좋아요 0 | URL
바람의 화원, 저는 책도 드라마도 못 봤습니다 그런데 라디오 방송에서 읽어줄 때 조금 들었습니다 다는 아니지만 대충 알게 되었습니다 띄엄띄엄 안다고 할 수 있군요 언젠가 책을 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우리나라 미술에 관심을 갖고 잘 아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겠죠 그래서 다른 나라에 빼앗기기도 하고, 누군가는 몰래 팔기도 했을 테죠 이런 것이 생각나다니... 처음에는 잘 몰라도 보다보면 조금은 알지도 모르죠 이 책이 그런 도움을 주겠군요^^


희선

가연 2014-01-30 00:09   좋아요 0 | URL
저도 요즘은 거의 안봐서ㅎㅎㅎ 이 책은 생각보다 괜찮은 것 같아요ㅎㅎ 우리 나라 관련하여서 다룬 책이 글쎄.. 잘 모르겠네요

2014-01-21 02: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1-30 00: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플루토 크라트]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플루토크라트 - 모든 것을 가진 사람과 그 나머지
크리스티아 프릴랜드 지음, 박세연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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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뭐 했어요?"

 

"마그나 카르타를 샀어."

 

사모펀드의 거물 데이비드 루벤스타인은 짐짓 덤덤한 체 표정을 굳히고 있었지만, 실제 그의 내면은 떨리고 있었다. 마치 초등학생으로 돌아가 숙제를 보여주는 기분이랄까. 지금껏 자신은 아내의 저런 일상적인 질문에 일상적인 답변으로 일관해왔었다. 예를 들자면 '오늘은 김-치, 라는 음식을 먹었어.' 라던가, 혹은 '알잖아, 내 직장. 사모펀드에서 투자자 모집하였다구.' 정도로 응대해왔었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마그나카르타, 라니. 자신이 지금 발을 딛고 있는 이 미국, 미국 자체의 근간을 이루는 문서나 다름없는 그 마그나카르타, 를 자신이 구입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것을 꺼내 자신의 아내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위의 짧은 일화는 내가 이 책, 플루토크라트, 를 읽으면서 가장 인상깊었던 이야기에 적당히 살을 붙여 만들어낸 창작이다. 실제로 루벤스타인이 김치를 먹었을지는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위 일화의 주인공 데이비드 루벤스타인은 2012년 기준으로 포브스 추정 28억 달러의 재산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의 인맥도 대단한데, 그가 공동으로 설립한 그룹에서 전 대통령인 조지 H. W. 부시가 선임 고문으로 활동하기까지도 했었다. 모르긴 몰라도 이정도로 부와 권력이 많은 사람이라면 김치정도는 먹어보지 않았을까? 크리스티아 프릴랜드가 지은 플루토크라트, 에서는 스스로의 제목이기도 한 플루토크라트, 를 이렇게 정의한다. 플루토 - 부유함, 크라트 - 권력. 부유함과 권력을 모조리 갖춘 계층이라고 말이다. 위의 루벤스타인이라면 분명 이 책에서 말하는 것 처럼 '진정한 플루토크라트' 라고 불릴 수 있으리라.

 

그런데 이런 일화에서 루벤스타인의 아내가 어떤 표정을 지엇을런지는 쉽게 상상하기 어렵다. 만약에 아내가 마그나카르타가 어떤 것인지 모른다면 그 판본을 보고도 그저 덤덤하게 '뭐에요, 당신. 고작 그런 문서나 사려고 돈을 2130만 달러나 썼어요?' 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고, 또는 위의 일화에서 루벤스타인이 기대했던 반응인 '어머나, Oh, My, God, 정말 말도 안돼, 지금 내 눈 앞의 이 문서가 마그나카르타라구요?' 라고 반응했었을런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떤 반응을 보였을런지는 당장 확인할 수 없다. 하지만 아예 정보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 책에 따르면 플루토크라트들은 비슷한 계층의 사람들과 결혼할 가능성이 높다. 이 말은 루벤스타인이 마그나카르타를 알 정도로 교육을 받았다면, 자신의 아내도 그 정도 교육은 받았으리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루벤스타인이 처음 경매에서 마그나카르타를 보고 느꼈던 감정을 그의 아내도 받았을 가능성이 높으리라. 그런 점에서 볼때 아마도 후자의 반응인 'Oh, My, God'을 외쳤을 가능성이 매우 높으리라.

 

이 뿐만이 아니다. 이런 플루토크라트라고 불리는 계층의 높은 교육 수준은 단순히 남편과 아내 서로간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의 결론부에서 예시로 드는 루스 시먼스 - 아이비 리그 대학인 브라운 대학의 총장 - 와의 대화에서는 이런 말이 나온다. '손녀가 남았거든요,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무슨 때가 아니라는 이야기인가? 동문들의 자녀들에게 특혜를 주는 입학 시스템의 폐지에 대하여 질문을 했을 때 나온 말이다. 즉, 아직 특혜를 주는 시스템을 폐지할 수는 없다는 이야기이며, 이 말은 곧 자신의 손녀도 브라운 대학에서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게 하겠다는 이야기이다. 아들이나 딸로도 모자라서 손녀까지 해당된다. 이런 교육을 받은 손녀는 자라서 자신 또한 비슷한 위치에서 비슷한 일을 할 것이다. 글자 그대로 '세습'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플루토크라트들이 세습을 받으며 자신의 계층을 유지하지는 못할 것이다. 사람도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그 선조가 있듯, 플루토크라트들도 처음부터 부와 권력을 모두 가지며 생활을 하던 사람은 아니었으리라. 그렇다면 그런 플루토크라트들은 어떤 배경에서,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을까, 라는 궁금증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다. 혹시나 우리가 - 내일을 걱정하고 모레를 걱정하는 - 플루토크라트처럼 돈과 권력, 아니 적어도 둘 중 하나라도 가질 수 있는 그런 방법이 있다변 귀가 솔깃해지지 않겠는가. 바로 그 지점을 이 책의 저자 크리스티아 프릴랜드는 돋보기로 들여다본다. 물론 저자는 단순히 '플루토크라트가 되는 가장 쉬운 방법' 따위의 책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이 책의 시작지점에서 이런 말을 한다. 이 책은 '부자와 유명인의 라이프스타일' 이라는 프로그램도 아니며, '누구의 죄인가' 의 리메이크버전도 아니라고. 다만 새로운 현실을 직시하겠다는 의미에서 책을 쓰는 것이라고 말이다.

 

플루토크라트가 생겨난 배경은 도금시대다. 특히 현대의 도금시대는 쌍둥이 도금시대라고 일컫어지는데, 신흥 개발도상국들이 자신의 도금시대에 이르게 되었을 때, 선진국들도 자신들의 도금시대에 도달하게 된 오늘날의 시대를 뜻한다. 신흥 시장의 경우 첫 번째로 겪는 것이고, 서구의 경우 두 번째로 겪는 것이다. 도금시대라는 말이 잘 입에 와닿지 않을텐데, 간단히 이야기하면 부의 축적이 폭발적으로 일어나는 시대라고 생각하면 얼추 들어맞을 것이다. 그런데 이 쌍둥이 도금시대는 어떻게 생겨났는가? 그것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요인때문이라고 이 책에서는 이야기하고 있다. 기술 혁명, 세계화, 워싱턴 컨센서스(중남미 국가들에 대한 미국식 발전 모델)의 등장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요인들은 도금 시대를 부채질시키고 세계를 불안정하게 만든다. 하지만 위기는 항상 기회와 함께 온다고 하던가, 방금 전 부의 축적이 폭발적으로 일어나는 시대가 도금시대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렇게 축적된 부들은 어디로 가겠는가? 그것은 운과 재능으로 기회를 붙잡은 사람들의 몫이 된다.

 

단순히 운으로만 플루토크라트들의 위치를 설명할 수는 없다. 그리고 운만으로 그들의 모든 요소가 설명된다면 그보다 더 불합리하면서, 동시에 언급할 필요조차도 없는 설명은 존재하지 않으리라. 플루토크라트들을 형성하는데 있어 운의 요소를 빼놓을 수는 없지만, 그만큼이나 그들의 특질에 대하여 언급을 하지 않을 수는 없다. 이 책의 저자가 플루토크라트들을 관찰하면서 확인하게 된 그들의 성향은 다음과 같다. 먼저 그들은 일하는 부자, 라는 점이다. 그들은 불로소득에는 의존하지 않는다. 또한 이들은 혁신가이다. 시대가 변하더라도 그 격랑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으로 대응한다. 초기의 플루토크라트들은 자수성가한 사람들이 많았다. 이 자수성가, 라는 부분을 자세히 살펴보면, 자신의 힘만으로 아득바득 올라왔다는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신'만' 신경쓰면 된다는 이야기이도 하다. 동업을 하거나, 어떤 조직에 속해 있는 사람이라면 전체를 신경써야만 하겠지만, 첫 번째 도금시대라는 파도를 타던 플루토크라트들은 그저 자신의 주머니만 벌릴만큼의 스스로의 혁신에만 힘을 쓰면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러니깐 첫 번째 도금시대가 지나고 두 번째 쌍둥이 도금시대가 찾아왔을때에는 자수성가만으로는 한계가 생기게 되었다. 두 개의 도금시대가 서로 공명하면서 더욱 더 큰 파랑을 일으키기 때문이었다. 이때 플루토크라트가 가지는 특징이 하나 더 드러난다. 이들은 '냄새' 를 잘 맡는다. 책에 소개된 다음과 같은 일화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기술 업계의 거물인 엘리엇 슈라지는 아이들에게 앞으로 어떤 분야를 택하게 해야 할지 질문을 받았을 때 주저없이 통계학을 꼽았다. 위 일화가 2009년에 있었던 일임을 감안하면 2013년인 현재, 슈라지가 얼마나 혜안이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정보량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그것을 처리하는 통계가 더욱 중요하게 된 것이다. 저자 또한 플루토크라트들의 저런 '냄새' 를 잘 맡는 능력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하면서 언급을 보탠다. '노벨상 수상에 있어서 얼마나 연구를 깊게 하느냐 뿐만 아니라 어떤 주제를 택하느냐도 매우 중요하다.' 라고. 수상자들을 플루토크라트에 비유하자면, 그들은 어떤 주제를 연구하면 노벨상을 탈 수 있을지 일종의 감각이 있었던 것이리라.

 

이런 상황은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성격을 부여한다. 먼저 그들에게 자본주의를 일종의 해방신학으로 여기게 만든다. 그들에게 있어서 공산주의는 나쁘다. 오랜 실험에 거쳐 결국 자본주의에게 공산주의는 패배한 것이다. 만약에 공산주의가 계속 유지되었다면 러시아의 올리가르히 - 플루토크라트 - 들은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공산주의의 붕괴와 함께 찾아온 기회를 그들은 놓치지 않았다. 그런 그들에게 자본주의는 일종의 해방신학이다. 이런 성격만 부여받은 것이 아니다. 저런 변화에서 한 몫을 잡을 수 있었으니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성격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플루토크라트들은 저런 해방신학의 바람을 타고 자신들을 선하다, 라고 여기게 된다. 이 관념은 그들에게 있어서 거의 강박관념에 가까운데, 결국 박애 자본주의, 라는 신조어까지 만들게 된다. 이들 '새로운 박애주의자들은 오늘날 급변하는 세상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도움을 제공함으로써 자선 활동을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고 확신한다.' 또한 이들은 열성적으로 '그들 자신의 재단과 연구소를 설립'하고 자신들을 '가장 필요로 하는 곳에 초점' 을 맞추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이들을 뒷받침하는 것이 바로 마셜효과, 로젠효과, 마틴효과, 마태효과 등의 네 개의 효과다. 마셜효과는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일종의 부의 낙수효과다. 한 명의 부자가 생겼다. 그런데 이 사람은 어려서부터 아침마다 된장찌개를 끓여먹는다. 부자가 된 뒤에도 이 사람이 아침마다 된장찌개를 여전히 찾는다면? 맛있는 된장찌개를 먹기 위해서 어느 정도의 돈을 지출하는 것에 대해서 전혀 부담을 느끼지는 않으리라. 맛있는 된장찌개를 사먹는 것에서 시작해서 조리장을 직접 자신의 집으로 - 웃돈을 주고서라도 - 부르는 것도 주저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조리장입장에서는 부자의 돈이 자신에게 흘러들어오는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부의 낙수효과가 일어나는 것이다. 단순히 음식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노래를 듣고 싶다면? 6개월만에 완벽한 조각근육을 만들고 싶다면? 부자의 욕구와 그가 원하는 서비스에 따라 흐름이 생기게 된다. 이런 부의 흐름은 부자들, 특히 최상위 플루토크라트들이 자신들이 도움을 준다, 그러므로 자신들은 선하다, 라는 그런 확신을 부채질한다.

 

로젠효과는 이런 것이다. 당신이 1800년대를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가정해보자. 어느 날 당신의 머리에 영감이 떠올라 후대에 컴퓨터라고 불리는 것을 개발해내었다. 그런데 당신의 아내는 당신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아니 이따위 고철덩위가 무슨 쓸모가 있어요? 당장 가서 돈을 벌어와요' 그래서 당신은 이 획기적인 물건을 팔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 경우 당신은 이 물건을 얼마나 팔 수 있을 것인가? 모르긴 몰라도 거의 팔지 못할 것이다. 왜 그런가? 아직 시대 수준이 충분히 무르익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한 1800년의 시대상으로 미루어볼때 컴퓨터를 멀리 운반을 못할텐데 기껏해야 이웃에 팔려고 노력하는 수 밖에 없었으리라. 그리고 컴퓨터가 얼마나 효용이 있는지 알려지지도 않았다. 이를 2013년인 오늘날과 비교해본다면, 오늘날에는 저런 문제점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충분히 시기도 무르익었고, 적어도 컴퓨터가 무거워서 판매를 못한다, 라는 이야기는 하지 못하리라. 거칠게 말해서 당신이 어느 곳에 있다고 하더라도 구매할 방법이 있으리라. 이를 바꿔서 이야기하자면, 오늘날의 시장은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한다. 더 팔 기회가 많아진 것이다. 특히나 이런 경향은 최상위에서 더 강해지는데 플루토크라트들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자신의 사업을 펼친다.

 

마틴효과는 컨설턴트이자 경영대학원 학장인 로저 마틴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진 효과이다. 능력과 자본이 서로 경쟁할 때 그 중심점이 인재, 플루토크라트 쪽으로 기울어진다는 이야기이다. 이것은 어떤 뜻인가? 우리는 여기서 어느 시장을 상상해볼 수 있다. 이 시장에는 자본이 흘러다니며, 그 자본과 인재가 경쟁을 서로 벌이게 된다. 이들 경쟁에 따라 상황은 변하며, 저 긴장상태에서 탈산업화의 자본주의가 꽃을 피우게 된다. 쉽게 이야기하면 인재가 중요하다는 이야기이다. 인재가 중요하다는 이야기는 지적인 능력이 중요하다는 이야기와 일맥상통한다. 이를 플루토크라트에 적용해보자. 플루토크라트들은 대부분 높은 학력을 가지고 있다. 소위 말하는 HYPMC에 학적을 두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H : Havard, Y : Yale, P : Princeton, M : MIT, C : Caltech) 이들은 가장 빨리 변화가 일어나는 최첨단에 서서, 이론의 중심에서 좋은 환경을 바탕으로 교육을 받는다. 물론 미국의 대학교는 우리 나라와 달라서, 학부에 따라서 뛰어난 대학이 있을 수 있다. (의학의 존스 홉킨스 대학이 바로 그 예시다.) 하지만 저들 대학이 세계적으로 이론과 변화의 중심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으리라. 이들 대학에서 고등 교육을 받고, 자격증을 획득하는 과정을 통하여 플루토크라트들은 남들보다 한걸음 앞서서 변화를 극복할 수 있게 된다. 이런 기업인들은 서로가 서로의 인맥이 되며, 앞선 지식에 힘입어 결국 더 좋은 거래 조건을 형성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마태효과다. 아마 저 네가지 효과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효과가 바로 마태효과이리라. 지그문트 바우만, 의 우리는 왜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에도 핵심적으로 인용되는 효과이기도 한데,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요약된다. '있는 자는 받아서 더욱 풍족해지지만,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마저 빼앗기게 된다.' 너무나 명징한 문장이라서 더 덧붙일 이야기는 없지만, 그래도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 수 있다. 우리는 미국의 맨하탄 계획을 떠올릴때면 가장 먼저 오펜하이머를 생각하지만, 실제로 저 맨하탄 계획은 수많은 과학자들이 집결된 프로젝트였다. 하지만 인지도에서 총책임자였던 오펜하이머만 이름이 오르내리는 경우가 많다. 이 책에서는 다음과 같은 예를 든다. '주요' 대학에서 연구하고 발표를 하는 과학자들이, 동일 수준의 연구 성과를 보여주고 있지만 그보다 '덜주요' 한 대학에서 일하는 사람들보다 더 높은 인정을 받는다고 말이다. 이런 일들이 플루토크라트와 우리들 사이의 간극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플루토크라트들은 돈이 있기 때문에 그 돈을 통하여 인지도를 쌓고 다시금 돈을 벌어들인다. 단적인 예로 패리스 힐튼을 보라. 그녀는 자신의 인지도를 바탕으로 자서전까지 쓰지 않았던가.

 

이런 효과들을 후광으로 업은 플루토크라트들이지만 그런 그들에게도 주의할 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불행한 성장 패러독스' 이다. 불행한 성장 패러독스, 는 에두아르도 로라 - 행복 지수에 대하여 연구를 한 연구원 - 와 캐럴 그레이엄 - 브루킹스 연구소 행복연구원 - 이 사용한 용어인데, 이 용어를 이해하기 위하여 이 책에서 든 예를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 '농부들이 도시로 넘어가면서 더 잘 살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농촌에 살 때보다 소득에 대하여 불만을 더 많이 느끼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누구도 여기에 대해서 뚜렷한 대답은 내놓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다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런 현상이 모든 계층에 걸쳐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플루토크라트와 그 밑의 계층에서도 예외가 아닌데, 플루토크라트들을 억만장자라고 편의상 부르고, 그 밑의 계층을 편의상 백만장자라고 부르도록 하자. 둘다 일반적으로 소득을 버는 사람들의 범주에 속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이 둘 사이에서도 미묘한 긴장관계가 형성이 되는데, 그것은 백만장자의 억만장자에 대한 질투에 기인한다. 소득 수준 10퍼센트의 백만장자는 하위 90퍼센트보다 더 '금전적으로 잘 산다.' 하지만 이 10퍼센트들은 위의 1퍼센트의 억만장자들을 보면서 자신들의 재산에 대하여 불만을 가지게 된다. 백만장자들은 스스로에게 늘 이렇게 되물을 것이다. 저들과 내가 어떤 차이가 있기에 이렇게 소득 차이가 크게 되었을까?

 

이런 현상은 플루토크라트들에게 하나의 시사점을 던져준다. 현명한 플루토크라트들이라면 알 것이다. 피라미드 형태가 계속 유지되려면 아래 계층 - 특히 받침 부분 - 이 잘 살아야 된다. 그렇지 않다면 피라미드는 무너져버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플루토크라트들은 강박적으로 자신들을 선한 쪽으로 포장하면서 사회적 환원을 시도하는 것이다. 그 결과 이 책에 따르면 '20세기는 포용적인 사회의 시대가 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 말은 아래 계층들이 듣기에는 기분이 나빠질 수도 있을 것이다. 아래 계층이 플루토크라트들이 던져주는 떡이나 받아먹어야 하는 처지로 전락해버렸다는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좀 더 생각을 진행시킨다면 앞서 말한 백만장자의 억만장자에 대한 질투는 결국 질투로 그칠 수 밖에 없다. 억만장자들은 자신들의 이미지까지 자선 사업을 통하여 바꾸려 노력할 수 있지만, 백만장자들은 억눌린 아래 계층의 '불행한 성장 효과' 에 따른 감정을 고스란히 받아야 할테니 말이다.

 

플루토크라트들이 꾸준히 사회적 환원이라던가, 포용력을 길러 아래 계층의 성장을 돕는다고 하지만, 쌍둥이 도금시대인 현대를 돌이켜보면, 사실 그 사회적 환원이 꼭 자국의 환원으로 돌아간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세계 시민에 가깝고, 자신이 영향력을 가장 크게 미칠 수 있는 곳에 자신의 자본을 사용하겠다는 그들의 생각으로 볼때, 그런 자선 행위들마저도 자신의 자본을 극대화시키는 결과를 낳을지도 모른다. 앞서도 말했다시피 쌍둥이 도금시대는 신흥시장과 서구시장으로 이루어진 시대이다. 그렇다면 좀 더 발전가능성이 높아보이는 신흥시장에 자본을 투입하는 것이 자신의 자산을 증진시키는데도 훨씬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그런 상황이 반복됨에 따라 점차 백만장자들은 사라지고, 세계 곳곳의 중산층 계급의 대두로 결론이 날 가능성이 높게 된다. 이렇게 되어 플루토크라트의 아성에 도전하는 백만장자들은 분쇄된다. (드물게 운좋은, 혹은 재능이 뛰어난 몇 몇 백만장자들은 이런 흐름에서 자본을 재빠르게 흡수하여 억만장자로 뛰어 오를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세계는 앞으로도 여전히 플루토크라트들이 자신들의 계층을 지키며 유지될 것인가? 이미 상류층인 사람들은 영원히 상류층으로 남고, 하류층이었던 사람들은 영원히 하류층으로 남을 것인가? 이런 플루토크라트에 대한 가호는 어디까지 지속될까? 그들의 운은? 그들의 재능은 어디까지 지속될 것인가?

 

 이 책의 저자는 자본주의 자체를 긍정하는 관점에서 쓰고 있기에 그로 인하여 도출되는 결론 자체는 온건한 편이다. 그 결론은 플루토크라트들이 자신의 주변을 돌아보아야 한다, 정도가 될 것이다. 그들은 항상 자신들에게 번영을 안겨준 사회 자체를 무너뜨릴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의 운명을 저들 플루토크라트의 손에 맡겨야 한다니 기분이 좋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한 이야기는 결국은 그들의 자비로 세계가 유지될지도 모른다, 는 이야기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워렌 버핏을 필두로 한 슈퍼 리치들이 모여 지진 구호활동에 나서는 소설이 있다. 워렌 버핏의 전기인 스노볼, 에 소개되는 일화인데, 저 소설을 보고 워렌 버핏은 미소를 지었다고 한다. 물론 워렌 버핏이라면 '착한 부자'에 속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상대방이 착하든 말든 실제 현실이 저 소설과 다를 바 없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은 우리에게 씁쓸한 맛을 안겨준다.

 

하지만 풀리지 않는 문제는 없고 열리지 않는 문은 없다. 그리고 플루토크라트들 자신들도 깨닫고 있겠지만 끝나지 않는 운은 없으며 영원한 축복은 없는 것이다. 앞으로의 세계는 이미 상류층인 사람들이 자신들의 계층에 다른 사람이 진입하는 것을 막을 것이기에 사회적 유동성이 한쪽으로만 커져만 갈 것이며, 이렇게 유동성이 큰 사회에서 아래로 추락한다는 것은 다시는 위로 올라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한쪽으로만 작용하는 유동성이기에 아래로 추락하는 계층만 존재할 뿐, 위로 올라갈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잡는 사람은 거의 등장하지를 못한다. 이런 과정이 무한히 반복된다고 가정하자. 그렇다면 결국 위의 계층은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는 플루토크라트들 자신들도 바라는 결과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어떤 방안을 세울 것인가? 하지만 플루토크라트들도, 우리들도 마땅한 방안을 바로 내놓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만은 짐작할 수 있다. 이 방안을 구상하기 위해서는 모두가 힘을 모아야 한다는 것을. 자본주의가 '지금까지 인류가 개발한 최고의 시스템' 이라는 저자의 말에서 조금만 벗어난다면 단순히 그들의 자비에만 기대는 것이 아닌, 지금 플루토크라트들이 휩쓸고 있는 소설같은 현실을 극복할 방안을 어떻게든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대로 한 방향으로만 작용하는 사회적 유동성을 막을 궁리를 할 수 있을테고, 플루토크라트들은 플루토크라트대로 유동성을 양방향으로 만들려 노력할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그것을 위해서 플루토크라트들과 플루토크라트들이 아닌 '우리'들이 머리를 맞대어 궁리할 때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p. s. 임재범의 다시 사랑할 수 있는데, 를 들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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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3-12-25 00:01   좋아요 0 | URL
얼마전에 도서관에서 이 책 봤습니다 글을 보니 플루토크라트야말로 저와 상관없는 세상 사람들이군요^^ 그런데 부자들이 자선사업을 하는 것이 결국 자신을 위해서였군요 하긴 보통 사람이 자원봉사를 하는 것도 결국은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그런 일을 해서 얻는 기쁨이 있으니까요 그래도 보통 사람은 그저 기쁨을 얻기 위한 것이라는 게 조금 다르군요 아니, 엄청난 부자들도 누군가를 도와주는 일로 기쁨을 느끼겠지요 꼭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 하는 것만은 아닐 거예요 이런 생각을...^^

사실 평소에는 플라토크라트 같은 사람 생각하지 않는데, 이 글을 보니 플라토크라트인 사람과 아닌 사람이 잘 살기 위해서는 함께 힘을 합쳐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그리고 지금만 이렇게 말하는 것일지도...

멋진 성탄절이기를 바랍니다^^


희선

가연 2014-01-03 22:13   좋아요 0 | URL
ㅎㅎ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플루토크라트가 상관이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희선님 말씀대로 누군가를 돕는 일로 기뻐하는 사람들도 존재하겠지만.. 여기서 조금만 생각을 돌려본다면 그렇게 기쁜 일로 자신에게도 도움이 된다면 그거야말로 일석 이조가 아니겠습니까, 풋.

희선 2014-01-01 00:01   좋아요 0 | URL
저는 언제나 하루가 지나가고 다음날을 빨리 맞이합니다 하지만 오늘은 많은 사람이 저와 같지 않을까요 아쉽게 한해를 보내고 기쁘게 새해를 맞이했겠지요 가연 님은 어떠신가요

아쉬움 남기지 않게 보내야 할 텐데 언제나 아쉽군요 올해는 아쉬움이 덜하도록 보내야겠습니다 가연 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리고 늘 건강하게 지내세요 건강해야 뭐든 하죠^^


희선

가연 2014-01-03 22:14   좋아요 0 | URL
크리스마스 인사도, 새해 인사도 모두 이제야 합니다. 정말 감사드리고, 앞으로도 좋은 서재 이웃이 되어주셨으면 합니다, 풋.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014-01-23 13: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1-26 22: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일베의 사상]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일베의 사상 - 새로운 젊은 우파의 탄생 대한민국을 생각한다 13
박가분 지음 / 오월의봄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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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가지 이야기를 먼저 꺼내야겠다. 신간 평가단을 하게 되면 처음에는 누구나 책을 추천하면서 자신이 추천한 책이 되기를 바라게 되지만, 어느 정도 흐른 뒤에는 자신이 추천한 책이 꼭 선정되리라는 법은 없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런 자각을 겪게 된 뒤에는 책들을 훑어보면서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된다. '아, 제발 이번에는 이 책만은 되지 않았으면.' 라고. 그러나 세상에는 머피의 법칙, 이라는 것이 있다. 그러다보면 원치않게 자신이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책을 맞닥뜨리게 된다. 그런 경우에는 평가단 리뷰어는 두 가지 과정을 밟게 된다. 하나는 자신의 기존의 편견 - 책의 소개말로 미루어 짐작했을때의 - 을 깨고 이 책은 좋은 책이다, 라고 판단하게 되거나, 혹은 자신의 원래 인상이 맞았어, 라고 끝까지 자신의 생각을 관철하게 되거나. 이번의 이 책, 일베의 사상, 이 나에게는 바로 그랬다. 책의 소개글, 아니 제목을 보자마자, 이 책만은 선정되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게 되었다. 일베에 사상이 있다고? 저자는 일베에 들어가본적은 있는 건가? 고작 몇 개월 일베에 있었던 것 가지고 사상을 찾겠다고 하는 것은 아니겠지?

 

하지만 머피의 법칙, 처럼 이 책은 선정되었고, 나는 체념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체념하고 있을수는 없는 법, 이 책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았고, 인터뷰 기사까지도 읽어보았다. 그러면서 조금씩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내가 이 책에 대하여 불필요한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라고. 사실 애초에 선정되지 않았으면, 이라고 생각하는 것부터 편견이었다. 그걸 자각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면서 나는 이 책에 대하여 조금씩 중립적 인상을 가지기 위하여 노력했다. 그리고 그 노력은 헛되지 않아서, 이 책을 배송받았을 무렵에는 도리어 호감을 가질 정도가 되었달까. 그 호감은 책을 한 번 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저자가 상당히 아는 것도 많은 것 같고, 자신의 주장을 강화하기 위하여 적재적소에 잘 사상가들을 배치하는 것 같다. 생각보다 글이 그럴 듯 하다, 가 첫 번째 읽을 때의 내 생각이었고,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읽어나갔다.

 

만약 저 시점에서 리뷰를 썼다면 이 책에 대하여 상당한 호평을 하면서 써내려갔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너무 생각할 것들이 많아서, 잠깐 이 책을 내버려둘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완전히 잊어버린 뒤에 다시 넘겨본 이 책은 오류가 너무나 많았다. 결국 처음의 나의 첫인상으로 돌아가버린 것이다. 이를 두고 다시 편견으로 돌아갔다고도 이야기할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처음의 편견과 지금의 생각은 분명히 다르다. 처음 읽을때에는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읽어나갔었는데, 내가 분명 같은 책을 보고 있는 것일까, 생각이 들 정도로. 연필을 들고 줄을 그어나가면서 읽어나가기 시작하자 책 여백에는 여러 노트들이 쌓이기 시작했다. 이건 말이 안되지 않을까, 앞 뒤가 맞지 않다, 근거가 없다, 라는 식으로 말이다. 물론 내가 지적하는 사항이 모두 옳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나는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수많은 사상가들에 대하여 전혀 정통하지 않다. (단 한명, 루소에 대해서는 조금 말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정통하지 않은 것을 떠나서, 다시 이 책을 읽어나가면서 연필을 든 나는 도대체 이 책에서 왜 그렇게 수많은 사상가들이 나와야 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 책의 내용을 이 책에 나오는 사상가들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책에 등장한 순서대로 나열된 이들 사상가들의 말들은 대부분 이 책에서 사용한 설명을 그대로 가져왔다. (이 부분은 중요하다. 실제로 이 사상가들이 인용된 개념을 책에서 쓰인 뜻으로 이야기했는지는 알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마르셀 모스, 의 경우 조금 자의적으로 문장을 합쳤다. 헤겔, 의 경우에는 실제로 이 책에 헤겔, 이라는 이름은 거의 나오지 않지만, 생사를 건 인정투쟁, 이라는 용어를 볼때 앞의 인정, 도 헤겔의 용어라고 판단을 내렸다. 따라서 인정투쟁, 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문장의 뜻을 좀 더 명료하게 만들었다. 하버마스의 경우에는 다 쓰는 것 보다 인용한 책을 쓰는게 나을 것 같다고 여겼다. 그 외에는 이 책에 쓰인 문장을 그대로 가져오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사상가들로 정리한다는 취지에 맞게 자연스럽게 읽어나갈수 있도록 앞부분에 접속사를 넣었다.

 

 

 

조지 레이코프 : 사람들에게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라고 해도 여전히 코끼리가 생각나는 것 처럼 일베는 생각하지 마, 라고 해도 여전히 일베가 생각이 나기 마련이다.

마르셀 모스 : 원시 사회는 증여와 답례, 라는 호수성을 가지고 있는데, 이런 교환양식은 수평적 사회질서의 유지에 도움을 준다. 권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자신의 권위를 나누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책의 저자는 북아메리카 서해안의 인디언의 예를 가져온다.) 이런 양상을 우리는 인터넷 짤방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 사람이 인터넷 짤방을 제작한다. 이는 일종의 증여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는 곧이어 몰려오는 수많은 2차 짤방에 의하여 답례를 받는다. 이런 식으로 수많은 1차 제작자의 권위는 사라지고 수평적 질서가 유지된다.

헤겔 1 : (이 책에는 헤겔, 이라는 직접적 이름은 단 한번 등장하지만 인정투쟁, 은 헤겔의 용어다.) 과거에는 인터넷 바깥 사회에서 자신의 목소리와 존재의의를 인정받고자 하는 인정욕구가 기반이 되었는데, 일베의 인정투쟁은 인터넷 바깥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인터넷 내부로 향한다. 자신의 존재의의를 인터넷 안에서 인정받는 것이 유일한 관건이 된 것이다. 일베에서는 인터넷 고유의 상호인정의 방식을 끝까지 밀고나간다.

헤겔 2 : 오늘날 북한이 상상적인 인정투쟁의 상대가 되어버린다. 무슨 말인가 하니, 정상국가, 의 도래가 일어나면, 그 국가에서는 나 자신이 인정받을 것이고, 나 자신의 욕망이 실현될 것이다, 라는 이야기이다. 이런 정상국가는 여러 가지 모습을 가질 수 있는데, 오늘날의 경우에는 연평도 포격, 등을 겪으면서 '북한에 큰 소리치는 나라' 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

논리실증주의자 : 위의 환경을 바탕으로 하여, 오늘날 네티즌들은 일종의 아마추어 논리실증주의자처럼 행동한다. 수많은 정보들이 있어도 반드시 자신의 눈으로 검증한 뒤에 받아들인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경향은 특히 상대방과 논쟁을 벌일 때 두드러지는데, 상대방의 과거를 뒤져서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렇게 확인한 뒤 사실 관계가 어긋나는 것들을 보면 일종의 '감성팔이' 에 가깝다고 본다. 여기서 일베의 사상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몰이상의 이상이라는 것이다. 다시는 속지 않겠다, 라는.

바움가르텐 : 저런 몰이상의 이상은 바움가르텐이 말한 이성에 대한 감성의 우위, 라는 미학으로 뒷받침 된다. 직관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는 대로 존재하지 않는다'

미시마 유키오, 알베르트 카뮈 : 여기서 낭만적 아이러니가 존재한다. 부연하자면 자신이 생각한 이상과 전혀 다르게 행동하고 마는, 자신을 메타레벨 위에서 내려다보는 또 하나의 초월론적인 의식을 불러온다. 일베를 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인터넷에서는 병맛스럽게 행동하더라도 인생은 실전, 이라는 의식을 가지고 그런 병맛스러운 자신을 냉정히 내려다보는 것이다.

자크 랑시에르 : 저게 미학이라고? 솔직히 일베는 방약무인하고 일탈행위를 일삼는 존재들 아닌가. 그래서 미학이라고 볼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래도 미학이다. 원래 미학은 불편한 것이기 때문이다. 미학이라는 것은 무엇이 이상이고 무엇이 몰이상인지 구별할 수 있는 식별 체제에서 발생한 혼란스러운 변동인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부터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는 더 이상 자명한 것이 아나게 된다. 예술적 자율성과 비예술적 공동성의 연결성 자체가 미학적, 이다.

하버마스 : 인터넷은 공론장인가? 그렇다면 하버마스의 이론을 비판적으로 수용할 수 밖에 없다. 공론장의 구조변동, 사실성과 타당성, 의사소통행위이론을 참조하라.

아즈마 히로키 : 근데 사실 인터넷은 하버마스의 공론장으로 여기는 것 보다는 데이터베이스에 가깝다. 이상적 공론장에서 담화로 형성된 숙의민주주의는 이상이다.

루소, 아즈마 히로키 : 일반의지를 아즈마 히로키는 오늘날 인터넷에서 본다. 그에게 있어서 일반의지는 한 인격이 아니라 데이터베이스를 통해 가시화된 집합적 무의식이다.

맑스, 헤겔 : 결국 아즈마 히로키의 주장도 완전하지는 않다. 여기서 낡은 개념을 가져온다. 인터넷에서의 화해 불가능한 갈등도 본연의 맑스적 의미에서의 계급투쟁이다. 이는 다양한 대중 분파와 지배세력 분파 사이의 갈등과 협력관계의 모습으로 진치되고 응축된다. 이러한 전치와 응축 과정에서 일어나는 생사를 건 인정투쟁 자체가 계급투쟁인 것이다.

 

 

대략 이정도가 이 책의 내용이다. 300페이지 남짓한 책이지만, 이 책은 사실 이런 사상가들에게서 인용하고, 거기에 본인의 생각을 개진한 부분을 제외하면 100페이지가 안될 것이다. 결국 저런 사상가들에게 빚지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위의 과정을 밟아가면서 세 줄 요약을 적는다.

 

 

1. 일베는 2002년부터 시작된 촛불의 사상을 계승한다.

2. 일베는 현실의 국가, 현실의 시민사회에 대한 요구를 단념하고 인터넷 내에서의 인정투쟁 방식을 현실로 끌고 오는 새로운 유형의 젊은 우파다.

3. 이러한 일베의 사상을 극복하기 위하여 광장, 인터넷에 모인 사람들이 이후에도 각자의 일상적 공간에서 자신의 이상을 작게나마 실현할 수 있어야 한다.

 

대략적으로 책 내용을 살펴보았다. 물론 이 책에서는 분명 옳은 분석도 존재한다. '주류 사회는 억압의 방식으로 작동한다' 와 같은 분석은 옳은 분석이다. 그러나 옳지 않은 부분들이 존재한다. 이제 저 사상가들이 맞게 쓰였는지 처음부터 차근차근 살펴보겠다. 가장 먼저 이 책을 읽으면서 눈에 보이는 것은 개념들을 굳이 사상가들의 이름을 들먹일 것도 없이 일차적인 차원에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다음 문제는 실제 인터넷 상황을 자신의 이론에 억지로 끼워맞추고 있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는 자신이 원하는 부분만 취사선택을 하고 있다는 것이 눈에 보인다.

 

조지 레이코프를 시작으로 이 책은 시작된다. 그렇다면 가장 먼저 조지 레이코프가 한 말을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조지 레이코프는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라고 말했다. 보수 프레임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은 도리어 그 프레임을 계속적으로 사회에 환기시키는 결과를 낳는다는 이야기이다. 코끼리에 대하여 생각하지 말라고 하더라도 계속 코끼리가 생각나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보수의 프레임에 대하여 진보는 아예 독자적 프레임을 개발하는 것이 훨씬 도움이 될 것이다. 바꿔 말하자면 보수의 프레임 자체에 대해서는 굳이 공격을 할 필요가 없다. 독자적 사상이 중요한 것이다. 저자는 말한다. '기본적으로 레이코프의 요점을 일간 베스트에라는 커뮤니티에도 적용할 수 있다' 고 말이다. 그렇다면 저자는 일베를 완전히 떠나서 새로운 커뮤니티의 지평을 보여주어야 한다. 하지만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오히려 일베는 생각하지 마, 라는 금기를 깨고 일베의 사상을 내재적으로 사고하여야 한다' 고 말이다. 레이코프의 요점을 적용한다면 차라리 일베는 생각하지 마, 라는 관점을 따르는 것이 훨씬 옳을텐데 말이다. 도리어 이런 접근은 일베에 대한 프레임만 더 지속적으로 환기하는데 관여할 것이다. 만약에 일베에 대한 내재적 접근을 책의 방향으로 삼았다면 조지 레이코프가 아닌 다른 사상가의 이야기를 가져오는게 낫지 않았을까?

 

마르셀 모스의 경우를 살펴보자. 마르셀 모스의 말을 가져오고, 그 모스의 이론을 인터넷에 적용시킨 논문을 가져왔지만, 근본적인 조건은 놓아둔 채, 증여와 답례, 그리고 호수성이라는 개념에만 너무 얽매여 있다. 마르셀 모스의 이론은 위에도 적어두었다시피 원시사회에서의 이론이다. 그렇다면 '인터넷이 원시사회란 말인가?' 책에서 개념을 사용하는데 별다른 제한을 두지 않는 것으로 보아 전제를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이거나, 혹은 무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전자라면 오류가 생기게 되고, 후자라면 굳이 마르셀 모스, 라는 이름을 가져올 필요도 없다. 그냥 증여와 답례, 라는 개념을 쓰면 된다. 또한 저런 분석틀을 이용하여 옳은 분석을 했는가? 거기에 대해서도 고개를 갸웃거릴수 밖에 없다. 저자는 짤방을 일종의 증여와 답례의 형식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그 결과 수평적 평등이 이루어진다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짤방의 일차저작자가 짤방을 만들어내었다고 그 권위가 소실되거나 사라지지는 않는다. 인터넷 커뮤니티를 가면 네임드Named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한 두명씩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 네임드들의 권위는 적어도 자신이 만들어낸 짤방에 있어서는 절대적이다. EXCF의 보노보노라던가, 고두익 등의 네임드를 보면 쉽게 판단할 수 있다.

 

이 책의 저자가 예를 든 엉덩국, 만 해도 그렇다. 엉덩국의 홍콩행 게이바, 라는 작품 이후, 수많은 패러디가 나왔지만, 그리고 수많은 짤방이 제작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엉덩국의 자신의 작품에 대한 권위가 줄어들거나 사라지지는 않았다. 누구나 저 홍콩행 게이바, 라는 작품의 패러디를 보면 가장 먼저 원작을 떠올릴 것이다. 아, 이것 재밌네, 라고 2차 패러디물 자체만으로 향유되지는 않는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상황에서 권위의 이동이 일어나겠는가? 증여와 답례라는 형식이 맞다고 가정한다고 할지라도 이 세계에서는 마르셀 모스가 이야기한 것 처럼 수평적인 권위의 이동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도리어 인터넷 세상에서의 짤방의 2차저작은 그 원작자에게 힘을 보태어준다. 마치 판타지소설에서 드라큘라가 자신의 일족을 늘리면 늘릴수록 본인의 힘이 더 커지는 것 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언제 1차저작자가 자신의 권위를 잃는가? 그것은 1차 저작자의 짤방이 아무런 변용없이 그대로 퍼질 경우다. 무제한적으로 복제가 잃어나게 되면 될수록 도리어 1차 저작자의 작품의 후광은 사라지게 된다. 그런데 이런 경우에는 증여와 답례틀로는 분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헤겔에 대해서는 본의아니게 인정투쟁, 생사를 건 인정투쟁 등의 단어를 헤겔사전을 통하여 알아보기는 했지만 사실 잘 아는 편은 아니다. 나로서는 앞서도 말했지만 생사를 건 인정투쟁, 이라는 용어로 미루어 판단할 때 인정투쟁을 헤겔의 용어로 판단했지만, 실제로 이 책에서 헤겔의 용어를 사용한 것인지조차 불확실하다. 하지만 건너뛰고는 자크 랑시에르에 관한 이야기는 조금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에서는 '미학은 원래 불편한 것이다' 라는 말을 하며 자크 랑시에르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지만, 사실 자크 랑시에를 이해함에 있어 필수적인 것은 그는 바로 '정치철학자' 라는 점이다. 책의 저자가 예시로 들고 있는 '미학안의 불편함' 의 소개글은 이렇게 시작한다. '랑시에르는 기본적으로 정치철학자다.' 결국 랑시에르를 이야기하면서 정치에 관한 그의 관점을 제외시키고 미학에 대한 관점만 취사선택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이야기이다. 당장 랑시에르의 기본 생각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예술에 있어서 창작자, 수용자로 나눠서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런 창작자와 수용자는 스승과 제자, 라는 관계로 변용되며 위계적 위치를 가지게 된다. 우리는 이런 구분을 지금까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랑시에르에 따르면 이런 감성적 영역에도 정치가 작용한다고 한다.  그의 논리는 다음과 같다. 정치, 라는 것은 '자원의 효율적 분배' 행위를 뜻하는데, 미학 또한 보고 말하는 것, 작가가 만든 예술품과 그것을 경험하는 관객을 분배하기에 정치 행위라고 볼 수 있다, 라는 이야기이다. 미학이 보고 말하는 것을 분배하는데 기여한다는 말에 의문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렇게 의문을 가질만한 것은 또 아니다. 회화, 연극 등의 예술 및 생산품들은 무엇이 지각될 수 있는가, 라는 문제와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미학은 이런 뜻에서 지극히 정치적이다.

 

이런 랑시에르의 관점을 따르면 민주주의를 거대한 불일치, 로 판단하게 된다. 합치라는 것은 숨막힐 듯한 개념이다. 불합치만이 민주주의를 오롯이 구현하는 개념이다. 앞서 말했던 스승과 제자, 창작자와 수용자, 를 가져오자. 미학은 이들 분리의 지점 '위'에 존재하게 된다. 당연한 이야기이다. 예를 들어 A와 B가 하나로 붙어있다고 하자. A와 B가 속한 지평에서는 이들을 분리할 방법이 없다. 더 높은 곳에서 이들을 내려볼때만 이들이 붙어있다고 판단할 수 있고, 이들을 분리시킬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미학 안의 불편함, 이라는 책은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미학의 불편함이 아니라는 것에 유의하라.

 

하지만 저자는 랑시에르의 저런 정치철학적 면모는 제외하고 오직 미학에 대한 이야기만 가져와서 적용시키고 있다. 미학이 무엇이 몰이상이며, 무엇이 이상인지 구별할 수 있는 식별체제의 혼란, 이라는 말은 미학은 본질적으로 정치적이다, 라는 랑시에르의 말에 비추어 보았을 때 옳은 분석이라고 하기 어렵다. 정치는 본질적으로 분배, 에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보다 더 큰 문제점은 랑시에르의 사상에서 미학, 이라는 부분만 취사선택하였기 때문에 뒤의 사상가와 상충되는 점이 생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앞서 말했다시피 랑시에르에게 있어서 민주주의란 불일치, 이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가 일베를 분석하면서 가져온 하버마스나 아즈마 히로키 등은 결과적으로 숙의민주주의에 대한 이야기를 전제로 두고 이야기하고 있다. 논의를 통하여 합의점을 찾는 숙의민주주의와 거대한 불일치 사이에는 크나큰 간극이 존재할 수 밖에 없다.

 

루소에 대한 이야기도 하지 않을 수 없는데, 아즈마 히로키는 루소의 일반의지, 개념을 인터넷 세상에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아즈마 히로키가 보는 일반의지는 일종의 경향성이다. 얼핏 난잡하게만 보이는 검색어들이지만, 그 검색어들을 하나로 모으면 흐름을 이루고 있다고 말이다. 여기서 아즈마 히로키는 프로이트를 가져온다. 프로이트의 무의식을 여기다가 적용시키는 것이다. 인터넷 기저에 깔려있는 그런 경향성, 혹은 흐름은 일종의 집단적 무의식이 되고, 그 무의식을 일반의지라고 일컫는 것이다. 이 일반의지는 아즈마 히로키에 따르면 일종의 '분위기' 가 되고, 이런 분위기는 어떤 논의를 시작하기 전의 조건으로 작용하여 논의의 합의에 훨씬 수월하게 이르게 된다.

 

아즈마 히로키의 착상 자체는 신선하다. 저런 집단적 무의식을 일종의 분위기로 판단하여 논의가 지나치게 넓어지지 않도록 하는 일종의 제동 장치, 혹은 통제 조건으로 판단하는 것은 분명 흥미로운 발상이다. 하지만 저런 집단적 무의식을 일반의지와 동일한 것으로 볼 수 있느냐는 것은 또 별개의 문제이다. 일반의지는 말 그대로 의지, 이지 경향성이 아니다. 아즈마 히로키의 저런 일반의지론은 경향성에 따라 결국에는 수많은 일반의지, 들로 나누어질 뿐이지만, 실제로 일반의지는 오직 하나로 존재한다. 일반의지는 개인의 자유로운 계약을 통하여 형성된 공적 인격의 의지라고들 알려져 있다. 연구서 투명성과 장애물, 이라는 책에 따르면 일반의지를 이해할 수 있는 구절은 신 엘로이즈, 에 있다. 신 엘로이즈에서 두 남자주인공과 여자주인공은 한 마을에서 한가로이 노래를 부르며 전원적인 모습을 연출한다. 한가로이 마을에서 음악이 연주되고 달콤하게 열린 과실을 주인공들은 맛본다. 그들은 어떻게 저런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일까? 이들이 사는 마을에서는 마을 축제가 열리는데, 저들 주인공들도 축제에 참가하기 위하여 준비를 하게 된다. 하나의 목표 - 축제, 라는 것에 대한 개개인들의 노력하는 모습 자체가 일종의 일반의지가 되는 것이다. 개인들이 저 축제, 라는 것에 대하여 사리사욕을 채우려 하는가? 자신들만의 특별한 이익을 취하려 하는가? 그런 특수의지는 저 축제의 장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시민사회의 총의는 집단적 경향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다. 집단적 경향은 무의식적인 데이터베이스에 '체현'(이 책의 말을 빌리자면)되어 있을 수 있지만, 총의는 인터넷의 무의식적 데이터베이스에 체현되어있지 않다. 일반의지는 인격도 아니지만 가시화된 집합적 무의식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앞서 살펴보았듯 일반의지는 하나의 목표와 그 목표를 이루려고 하는 구성원들이 동시에 '발생'할때 함께 발생한다. 순차적으로 무의식에서 사회를 거쳐 국가를 거쳐 발현된다고는 하기 어렵다는 이야기이다. 아즈마 히로키의 이론에는 이런 헛점이 존재하고, 그렇기 때문에 아즈마 히로키가 자신의 일반의지, 에 관한 책의 부제에 '프로이트' 를 넣은 것이리라. 하지만 이 책에서는 프로이트에 관한 이야기는 또 제외되어 있다. 프로이트에 대한 설명도 없이 무의식, 일반의지 등을 그대로 이용하려고 하니 분석에서 어딘가 고리가 빠진 것 같은 느낌을 줄 수 밖에 없다.

 

저자는 이야기한다. 사실 '2008년 촛불시위의 아젠다가 근본적으로 모호했다' 고 말이다. 물론 이 말이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분명 촛불시위를 분석하는데 있어 수많은 담론들이 쏟아져 나왔었고, 도리어 그렇게 분석이 많이 나왔다는 이야기는 어느 하나도 딱 떨어지는 분석은 없었다, 라는 말이 될 것이다. 저런 분석은 2002년의 촛불 시위에 오히려 들어맞다고 이야기하면서 두 번의 촛불시위를 명확히 구분짓는다. 여기서 저자는 발상의 전환을 해낸다. 일베는 2008년의 촛불 시위의 굴절된 모습이라고 말이다. 촛불 시위의 일종의 몰이상성 - 외치고 싶은 것을 외치는 - 은 일베 사이트에서 몰이상성으로 구현되었다. 그러나 나는 이 부분에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촛불 시위와 일베를 동일한 몰이상성은 다르다. 단순히 촛불 시위를 어디 일베따위와 비교하냐, 라는 그런 감정에서 쓰는 말이 아니다. (여담이지만 나는 다중multitude로 촛불 시위를 해석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고 본다) 촛불의 몰이상성은 현실에서 말해질 수 있는 몰이상성이다. 하지만 일베의 몰이상성은 현실에서는 말할 수 없는, 주류 사회에서는 억압할 수 밖에 없는 은밀한 몰이상성이다. 

 

왜 이런 차이가 있을까? 이는 인터넷 공간의 특징이다. 인터넷은 어떤 욕구가 즉물적으로 그리고 즉각적으로 구현되어지고 찾아지는 곳이다. 예를 들어 내가 리베라탱고, 라는 것이 무엇인가, 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하자. 이것을 언어로 구현시켜서 검색할 때 이 지점에서 인터넷이라는 곳이 이 욕구 '리베라탱고가 무엇이지?' 를 즉각적으로 구현시킨다. 그런데 이런 욕구충족이 바로 일어나지 않으면 짜증이 나게 된다. 거칠게 말하면 당장 인터넷을 하다가 검색이 너무 느리게 일어난다고 하자. 그러면 짜증이 나겠는가, 안나겠는가? 이런 경향은 검색에서만 일어나지는 않는다. 타인에 대한 판단, 감정, 생각도 마찬가지이고, 타인의 나에 대한 판단, 감정, 생각도 마찬가지이다. 바로 여기서 일베가 왜 저렇게 날선 비속어들을 사용하는지 떠올릴 수 있다. 그들은 상대에 대한 즉각적 반응을 이끌어내고 싶은 것이다. 욕을 하면 참을 수 없게 되어 대응을 하게 된다. 그 대응을 하게 되면 또 다른 비난이 따른다. 이는 또다른 논란을 부르고 더 크게 눈덩이처럼 쌓이게 된다. 결과적으로 이야기해서 일베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가장 먼저 조지 레이코프가 말한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들에게 관심을 주지 마, 라고 말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저자의 소개말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반 다크 홈과 마이 리틀 포니를 좋아함, 좌우명은 딥 다크 판타지와 프렌드십 이즈 매직. 일베에 전하고 싶은 말 : '일게이들아 이정도면 ㅍㅌㅊ?' 라는데 여기에 대해서 아마 잘 모르는 분들이 많으실 것 같아서 조금 주석을 단다. 반 다크 홈은 게이 포르노 배우다. 그가 인기를 끌게 된 것은 'Lords of the lockerroom'이라는 포르노 때문인데, 이 포르노에서 반 다크 홈은 명대사를 남긴다.

 

Xuckyou

 

저자의 말에서 딥 다크 판타지, 가 무슨 의미인지도 궁금할 것이다. 저 말은 반 다크 홈의 인터뷰에서 나왔다.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묻자 그는 자신은 욕망을 채워주는 일을 한다면서 덧붙인다.

 

Their Deep♂dark♂fantasies

 

포니는 이 책에도 친절히 주석까지도 달려있으니 넘어가겠다. 말그대로 만화영화다. 마이 리틀 포니, 라는.

 

사실 이런 것들은 개인 취향이기는 하다. 하지만 소개말에 이런 말들을 넣어야 했을까, 라는 것은 조금 의문이기는 하다. 구글 검색을 통하여 들어가 본 일베의 사상, 에 대한 일베에서의 반응은 이런 식이었다. 'ㅍㅌㅊ 라니, 저자가 일베를 오래하다가 일베인이 된듯.' '형형색색의 변들을 모아서 쥐어짜니깐 뭐가 제대로 나오던?ㅋㅋㅋ' 이런 반응을 볼 때 이런 식의 접근은 지나치게 자신의 책 전체를 희화화시키는 결과를 낳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일베라는 거대한 사이트에 대하여 이런식으로나마 분석을 시도한 것은 처음이기에 그 점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요즘 좀 정신이 너무 없어서... 겨우 힘겹게 글을 쓰네요...

 

댓글 달아주신분들께는 감사하지만 나중에 좀 정신이 들면 답글을 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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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3-12-17 00:57   좋아요 0 | URL
저는 아주 모르는 세상 이야기 같기도 하군요 일베, 가 무엇인지 몰랐거든요(제가 모르는 게 이것만은 아니겠습니다^^) 조금(정말 아주 조금, 다른 분이 쓴 글) 살펴보니, 짧은 기간 동안 있었던 것은 아닌 것 같더군요 잘 모르지만 가연 님이 말한 것처럼 그곳을 바라본 것은 좋다고 생각합니다

너무 많은 사상가들의 말을 빌려쓴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군요 제목이 사상이어서일까요

가연 님은 참 많이도 아시는군요


희선

가연 2014-01-03 22:16   좋아요 0 | URL
요즘 세상은 워낙 복잡하고 다양한 사건이 발생해서.. 사실 굳이 일베가 무엇인가를 아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하하하...

이 책 덕분에 저도 여러 사상가들을 뒤적거렸던 기억이 나네요, 풋.

2013-12-17 01: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1-03 22: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2-17 01: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1-03 22: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2-21 00: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1-03 22: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독서 공감, 사람을 읽다 - 다락방의 책장에서 만난 우리들의 이야기
이유경 지음 / 다시봄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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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기롭게 리뷰를 쓰겠다, 장담했지만, 정작 다읽고 나니 어떻게 리뷰를 써야 될지 잘 모르겠다. 이 서재를 둘러보면 알다시피 에세이에 관한 리뷰는 없다. 소설에 관한 리뷰도 몇 개 없다. 그러고보면 옛날에 신간평가단 담당자분이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왜 과학/인문 계열과 소설 계열에 동시에 지원을 못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는데, '과학/인문 계열 쪽에 쓰이는 리뷰와 소설을 쓸때의 리뷰는 다를 수 밖에 없지 않을까.' 는 것이 그 대답의 요지였었다. 그때는 그렇구나, 라고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넘겼지만, 시간이 지난 뒤 돌이켜보면 저 말이 근거가 있다고 생각이 드는게, 당장 지금도 이렇게 막상 원래 쓰던 분야의 리뷰가 아닌, 다른 분야의 리뷰를 쓰려고 하면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써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이런 막막함을 타파하고자, 컨닝이라도 한 번 해보려고 에세이에 대한 리뷰를 쓰는 분들의 글을 읽어보았다. 컨닝까지는 아니더라도 조금은 참조가 되겠지, 라고 생각하고는 신간평가단서재에서 찾아서 들어갔다. 신간평가단은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분야가 에세이/소설 등등으로 나누어져있다. 그렇기 때문에 제목조차도 잘 모르는 에세이들을 검색하는 것 보다는 분류에 따라서 들어가 읽어보면 나을 거라고 여겼다. 그런데 그렇게 글들을 조금씩 읽어보았지만, 더욱더 막막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 이 분들은 이런 책들에 대하여 어떻게 이렇게 리뷰를, 그것도 양질의 리뷰를 편하게 써내려가는걸까? 담담하게 자신의 이야기들을 풀어나가면서 말이다.

 

솔직한 심정으로 말하자면, 나는 저런 책들, 예를 들어 법륜스님의 인생수업, 과 같은 책들을 저렇게 리뷰를 쓰지 못할 것이다. 만약에 나에게 인생수업, 에 대한 리뷰를 쓰라고 한다면 나는 이런 식으로 쓸 것이다. 먼저 법륜 스님에 대한 정보를 조사한다. 당장 떠오르는 것을 들자면 예능 프로그램에 나왔던 것들, 즉문즉설강의를 했던 것들을 다시금 확인해본다. 그리고 법륜 스님의 말들이 지리멸렬하지는 않는지 혹은 이상적이지는 않는지 등을 검토해본다. 다음 단계는 그런 사전 정보와 이 책을 비교해나가면서 법륜 스님이 자신의 말에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는지 확인할 것이다. 만약에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지 않는다면 이 또한 지적할 점이 된다. 마찬가지로 멘토라 불리는 혜민스님을 법륜 스님에 비교하면서 어떤 차이가 있는지 확인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법륜 스님, 이라고 했을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즉문즉설, 에 대하여 예를 들어가며 의문을 제기할 것 같다. 이런 식으로 말이다 : 즉문즉설과 언어유희와는 어떤 차이가 있나요?

 

나한테는 우상도 없고, 멘토도 없다. 그리고 성역도 없고, (무엇보다도 당장은 여자친구도 없기 때문에) 당장 감정에 사로잡힐 일도 적다. 결국 어느 책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는데 그다지 거리낄 것이 없다. 물론 책의 저자를 생각할때면, 그리고 그 저자가 정말 낮은 확률을 뚫고 내 리뷰를 볼때를 생각하면 막무가내로 비판할 수는 없겠지만, (칼로 흥한자 꼭 칼로 망한다.) 적어도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는가, 상대방의 말이 지리멸렬하지는 않는가, 발화하고자 하는 내용이 작용하고자 하는 '현실'에 제대로 옳은가, 와 같은 기준 등을 꼭 적용해본다. 그러다보면 자연스레 어떤 식으로 글을 써야 할지 얼개가 잡혀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에세이 쪽은 좀 다른 것 같다. 이런 식으로 접근할 글들이 아닌 것 같달까.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는 나도 좋아하고 많이 읽어보았지만, 그런 글들에 대하여 리뷰를 쓰려고 생각해본적은 없다. 마찬가지로 이번 이 책, 다락방님의 책에 대한 리뷰도 만약에 리뷰를 쓰겠다, 라는 그런 이야기를 이전에 쓰지 않았었다면 영영 쓰여지지 않았을 글이리라. 그렇기에 이 글은 읽으며 느낀 점들을 정리해서 쓰는 글에 다름아니다.

 

책을 읽다보면 가장 먼저 느끼는 것이 내가 읽지 않은 책들이 이렇게 많다니, 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난 저 독서공감, 에 나오는 책의 90퍼센트는 읽지 않았다. 당장 첫머리를 장식하는 빅토르 위고, 의 웃는 남자는 들어보지도 못한 책이다. 두 번째는 다행히 어슐러 르 귄의 책이다. 오, 아는 책이야. 세 번째는 하트의 전쟁? 이건 무슨 책이지? 네 번째는 19세고 다섯 번째는 일반적이지 않은 독자, 라는데 다섯 책을 소개하는 중 겨우 한 권만 알고 있다. 이전에 다락방님의 서재를 들르며 독서 취향이 정말 많이 다르구나, 라고 여겼었지만 이렇게까지 다를 거라고는 사실 상상도 못했다. 알고 있는게 없으니 글을 읽을때 쓸만한 사전정보가 없다. 그렇다고 이 책들에 대해 다 검색을 시행하면서 내용을 파악하는 것도 웃긴 일인 것 같고, 결국에는 반쯤 체념하다시피 그저 글에 눈을 맡기게 된다.

 

두 번째 감상은 바로 위 지점에서 시작한다. 내용을 하나도 모르는데, 글을 읽는데 지장이 없다. 예를 들어 인문학적인 책을 한 권 본다고 가정하자. 내가 좋아하는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 를 가져와보면, 우리는 저 논고, 를 한 번 읽기 위해서 버트런드 러셀의 수학원리에 쓰이는 기호를 어느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하며, 당시의 철학 사조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저 책이 이후의 논리실증주의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그리고 그런 논리실증주의자들에 대하여 비트겐슈타인은 어떤 말을 하는가, 등을 살펴보아야한다. 그렇다고 바로 읽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안내서가 필요하다. 레이 몽크의 책들이 도움이 될 것이다. 그걸로 끝인가? 아니다. 번역본들도 여러가지가 있다. 원어를 읽지 못하는 이상 몇 권을 함께 보아야 한다.. 등등등. 한 권의 책을 읽기 위하여 정말 수많은 책들과 수많은 정보가 필요하다. 그런데 이 책은 그런 게 없다.

 

반대로 말하면 이 독서에세이는 다루고 있는 책의 내용에 그다지 무게를 두고 있지는 않다, 라는 이야기이다. 언젠가의 어느 날 썼을 이 책의 한 구절은 이렇게 시작된다.

 

삼겹살이 주메뉴인 을지로의 한 식당에서는 파절이 위에 계란 노른자를...

여담이지만 저 식당이 어디인지 알 것 같기도 하고 (나름 서울 시티즌이었다) 모를 것 같기도 한데, 갑자기 삼겹살이 먹고 싶다는 것은 놓아두고서라도, 삼겹살이 주제가 될만한 책은 그다지 떠오르지 않는다. 이제 다락방님이 여기에 대하여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확인하자.

 

나는 계란 두 개를 꺼내 프라이를 했다. 당연히 반숙으로 한다. 접시에 건져 내어 소금을 살살 뿌리고 포크를 들어 노른자를 톡 터뜨린다. 그리고는 접시를 턱에 대고 후루룩 계란을 마신다.

삽겹살에 대한 내용이 아니라 계란에 관한 이야기였다. 젠장, 방심했어! 삼겹살이라면 돈이 없다는 핑계를 대서라도 참을 수 있지만 계란 정도는 프라이해먹을 수 있지 않는가. 저런 묘사를 보면 그날 반드시 계란 프라이를 해먹어야만 할 것 같다. 그런데 독서 에세이 아니었던가? 책은 계란 프라이와 어떻게 연결되는 걸까?

 

글을 찬찬히 읽어보면 회색 영혼, 이라는 책에서 그 등장인물 중 한 명이 계란 반숙을 그렇게 좋아한단다. 책 내용에 대한 이야기도 조금 있지만 사실 그런 것들은 이 글에서는 부차적인 이야기이다. 정말 중요한 것은 계란 반숙이다. 계란 반숙 정도는 아무런 사전 지식이 없어도 그냥 떠올릴 수 있으니깐. 이 책의 글들은 이런 식이다. 등장인물의 조그만 습관들, 그 중에서도 우리 또한 일상적으로 가질 수 있는 그런 습관들이나 음식이 계기가 되어 우리를 이끈다. 책 내용도 제대로 말하지 않는데 이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고?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아마 나는 회색 영혼, 이라는 책을 (앞으로도 읽게 될런지는 솔직히 모르겠지만) 영영 잊지 못할 것이다. 일상적으로 계란 프라이를 하려고 계란을 깨는 순간, 나는 분명 저 책을 떠올리지 않을까. 그런 조그만 계기가 쌓이고 쌓여서 결국 책으로 나를 이끌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저자는 단호하게 이야기한다. 저자 소개에서도 적혀 있는데, 다음과 같은 문장이다.

 

한국의 독서율이 낮은 이유는 '책을 읽지 않기 때문'이라고 단호하게 말하는..

처음에는 사실 이 문장을 보고 조금 실소를 머금었다. 문장을 보면 동어반복이다. 독서율이 낮다, 라는 말 안에 책을 안읽는다, 라는 말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A는 A다, 라고 하는 문장은 어떤 새로운 정보를 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런 동어반복적인 문장임에도 의미가 있을 수 있다. 독서율이 왜 낮은 걸까? 책을 읽지 않기 때문이다. 책을 왜 안 읽는걸까? 시간이 없다고? 물론 오늘날을 살아가다보면 정말 시간이 없다. 하지만 시간이 없다는 것보다도 더 큰 원인은 '우리를 책으로 이끄는 요인이 없기 때문이다.' 재미를 원하는가? TV를 틀어 예능프로그램들을 보라. 스릴을 원하는가? 영화관에서 영화를 봐도 좋고 게임을 하면서 느껴도 좋다. 삶의 어려움을 잊어버리고 싶은가? 소주에 맥주를 타서 마셔라. 급하게 교양이 필요한가? 인터넷으로 검색해라. 도무지 이 순환 속에서는 책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이 독서 공감, 사람을 읽다, 는 책을 읽고자 하는 요인을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줄만하다. 당장 앞서 예로 든 결코 잊지 못할 회색 영혼, 의 계란 프라이부터 소시지, 도넛 등 수많은 음식에서 저자는 책들을 떠올리고, 그 책들의 등장인물들을 떠올린다. 이는 일견 요네하라 마리가 자신의 에세이들에서 음식들을 소개하는 것에 비견할만하다. 음식에만 국한되는가? 아니다. 인터넷으로 만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부터 - 블로그를 하면서 알게 된 사람과 극장에서 만나자고 했던 에피소드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게 만들었다 - 지하철을 타고 내리고, 직장 상사와 동료에 얽힌 이야기까지.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에서 저자는 매듭을 만든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런 상황을 겪었을 때 자신의 글을 떠올리면서 그 매듭을 풀도록 한다. 이런 경우, 위에서 말한 저런 악순환 속에 책이 자연스럽게 섞여 들어가게 된다.

 

잠깐 이야기를 돌려서, 나는 판타지 소설을 정말 많이 읽었다. 물론 최근에 발매된 판타지들은 또 그다지 읽지 않았지만, 몇 년 전 판타지의 중흥기때, 수많은 인터넷 커뮤니티들이 자작소설을 올리는 공간으로 형성되어갈때, 나 또한 그 시류에 동참하면서 읽어나갔었다. 이영도의 책들은 그야말로 성전이었고, 이우혁의 책이 나올때마다 손에 땀을 쥐었다. 그런데 이런 판타지 작가들 사이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크게 드리우는 여류작가가 있었으니, 그녀의 이름은 전민희였다. 전민희는 그녀를 스타덤으로 올렸던 세월의 돌, 부터 시작해서 그 이후의 룬의 아이들 시리즈를 히트시켰다. 물론 한참 독서공감, 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판타지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이런 질문이 들어올 것이다. 응? 전민희와 이 독서공감, 이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읽은 사람은 알겠지만 세월의 돌, 은 슬픈 사랑이야기이다. 주인공인 파비안과 여주인공인 유리카는 수백년의 시간을 건너뛰어 서로 만나게 되어, 여행을 같이 다니게 되고, 사랑에 빠지게 된다. 물론 사랑이라는 것이 쉽게 이루어지는 것은 또 아닌지라, 저 둘은 그들을 적대하는 세력들에게 쫓겨 생사의 위기를 넘기도 하고, 때로는 납치당하기도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들을 힘들게 했던 것은 가장 마지막의 시련이었다. 저 둘은 어떤 의식을 완성해야만 했는데, 원래라면 아무런 일 없이 끝났을 의식이지만, 적대하는 세력으로 인하여 의식을 완성하려면 어쩔 수 없이 여주인공의 희생이 필요하게 되었던 것이다. 여러 사건으로 인하여 눈을 잃어버린 남주인공에게 그녀는 자신의 눈을 하나 주고는 의식을 마무리짓는다. 그런데 한 가지 다행, 혹은 불행이 있었다면 저들과 함께 여행하던 동료 중 한 명이 그 의식에서 여주인공을 어떻게든 영향을 받지 않도록 봉인시키는 방법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남주인공에게 말한다. 자신은 이 봉인을 푸는 방법은 모른다. 하지만 세상은 넓으니 언젠가는 이 봉인을 푸는 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이 나타날지도 모른다. 그때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나더라도, 그녀의 곁에 있을 자신이 있냐고. 어떤 일이 있어도 기다리겠냐고. 결국 여주인공은 봉인되고, 남주인공은 그 봉인석을 들고 세상을 방황한다.

 

하지만 여기서 이야기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어느 날 남주인공은 노래를 부르는 음유시인을 보게 된다. 그 음유시인 주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환호를 더욱 받게 된 음유시인은 새로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노래에서, 남주인공이 지금까지 여주인공과 함께 지내온 일들이 노래로 그대로 전해지는 것이 아닌가? 결국 그 예언시는 남주인공과 여주인공이 결국 영겁의 세월을 두고 헤어지게 되었다는 이야기로 끝이 난다. 바로 그때 남주인공은 목소리를 높여 이야기한다. 아니라고, 그들은 그렇게 헤어지게 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수많은 방황속에서 서로 함께 있게 되었다고. 비록 봉인이지만 그녀는 자신의 옆에 있고, 자신은 그녀를 봉인에서부터 풀겠다는 그런 마음이 담긴 한마디였다. 음유시인에서부터 다른 사람들까지, 낭랑한 목소리로 반론하는 그를 보면서 무슨 상황인지 파악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남주인공은 미소를 지으며 다시 목소리를 높인다.

 

그래서, 그 다음은 어떻게 되나요?

 

마치 마법같은 그 한마디에 다시금 음유시인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그 다음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은 아직 현실이 버틸만하다는 이야기이다. 남자주인공은 자신의 사랑을 봉인석 속에 차갑게 가둘 수 밖에 없었고, 어쩌면 자신의 평생을 바쳐도 그녀를 다시 밖으로 깨울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분명 알고 있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잃지 않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잃지 않을 것이다. 바로 이 지점, 설령 헛되게 보이는 희망일지라도 포기하지 않는 이런 마음에서 이 책은 독서 공감, 과 만난다. 우리는 앞으로도 힘들게 살아갈 것이고, 쉽게 변하지 않는 순환의 바퀴를 자신의 손으로 직접 돌려갈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삶 속에서라도 그 다음을 그릴 수 있다면, 아직은 현실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이다. 독서 공감, 에서는 그런 그 다음, 을 그리는 에세이들이 가득 차 있다. 자연스럽게 독서 편력을 삶에 끼워넣으면서 그런 독서를 통하여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 또한 마지막장을 넘기며 이 책의 저자에게 이렇게 묻게 되는 것이다. 이 다음은, 이 다음에 읽은 책은 무엇인가요? 그리고 그 책을 읽고 어떤 하루를 보내었나요,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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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3-12-06 01:37   좋아요 0 | URL
세월의 돌, 은 읽어본 적 없지만 <츠바사 크로니클>이 생각나기도 하는군요 사쿠라의 날개(이게 어떻게 나타났는지 다 잊어버렸지만, 깃털이라고 해야 할지도)에는, 지금까지 살아온 기억이 담겨 있었는데 그것이 어떤 일이 일어나서 여기저기 다른 세계로까지 모두 흩어져 버립니다 그렇게 돼서 사쿠라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것을 샤오랑과 사쿠라 그리고 다른 사람과 하나씩 찾으러 다녀요 그게 쉽지 않은 일이더군요

뒤가 더 있을지 모르겠지만, 제가 마지막으로 본 것에서 샤오랑이 둘이나 있었어요 지금까지 함께 깃털을 찾아다니던 샤오랑은 진짜가 아니고 복제된 샤오랑이었습니다 이럴 때는 진짜가 나타났으니 진짜와 다녀야 할지, 지금까지 함께 있어온 사람이 진짜라고 여겨야 할지... 그때 함께 다니던 샤오랑이 조금 이상해져서 어딘가로 가 버렸어요 그 뒤는 어떻게 됐을지 모르겠군요 진짜가 따로 있다고 해도 지금까지 본 사람한테 정이 들어버려서...

츠바사 크로니클에는 클램프에서 만든 만화에 나오는 사람이 많이 나오기도 합니다 아실지도 모르겠지만 여기에서 만드는 만화 자체가 세계는 하나가 아니고 같은 사람(얼굴이 같다고 해야겠군요)이 다른 세계에 산다고도 하죠 평행우주와 비슷할까요

별로 상관없는 이야기군요^^
그런데 카드캡터 사쿠라는 좋아하지 않았습니까 여기에 나오는 사쿠라와 샤오랑이 좀 큰 게 츠바사 크로니클에 나오는 것인데... 이것은 저도 나중에 알았습니다


생활과 책을 연결해서 생각할 수 있다면 더 오래 기억하고 그런 글을 보는 사람은 한번쯤 그 책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는 그렇게 못 쓰지만...^^


희선

가연 2014-01-03 22:21   좋아요 0 | URL
ㅋㅋㅋ 츠바사 크로니클.. 클램프가 그린 만화 아니었던가.. 카드캡터 사쿠라도 다 같은 세계관이었던 것 같은데, 하하하... 희선님께서도 담담히 글을 잘 쓰시던데요, 풋. 다들 글 쓰는 성격이 다르기도 하고..

희선 2013-12-06 01:42   좋아요 0 | URL
하나 더 생각났는데 예전에 라디오 방송에서 시를 어떻게 쓰면 좋을까 하는 말에, 어떤 시인(이름 잊어버렸습니다)이 자기 것이면서 모두의 것이어야 한다고 하더군요 이 말 맞습니다 그래야 많은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고 함께 웃기도 울기도 하지 않을지...

이 책에는 그런 점이 많이 있겠습니다


희선

가연 2014-01-03 22:22   좋아요 0 | URL
책을 받고 바로 읽어나갔었던 기억이 나네요.. 빌려줬다가 이제 받았습니다, 풋. 이 책은 자기 것이면서도 모두의 것이어야 될 책들을 많이 소개해주고 있었던 것 같네요.

2013-12-09 01: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1-03 22: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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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의 추락 - 프로이트, 비판적 평전
미셸 옹프레 지음, 전혜영 옮김 / 글항아리 / 2013년 9월
평점 :
절판


 

 

 

노파심에서 쓰는 말.

원래 글을 쓰면서 각주를 잘 달지 않는 편인데, 이번에는 각주를 조금 달아야 될 것 같다. 익숙하지 않은 일을 하려니 실수가 많을 것 같지만 너그러히 이해해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 글은 대상이 되는 책이 아닌 다른 책들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경우가 자주 있을 듯 하니 읽기 전에 먼저 이 글 http://blog.aladin.co.kr/760670127/6695179 을 참조하라.

 

 

 

  SF의 3대 거장을 손꼽아보라고 한다면 우리는 최근에 출간된 파운데이션의 저자인 아이작 아시모프를 필두로 로버트 A 하인라인, 아서 클라크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중 아서 클라크는 SF작가의 명성 뿐만 아니라, 과학에 대한 그의 예견, 다시 말해서 과학 3법칙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 과학 3법칙은 다음과 같다. (의역을 거쳤다.)

 

1. 평생을 연구하는데 바친 노과학자가 무엇인가가 가능하다고 말한 경우, 그의 말은 거의 분명히 옳다. 하지만 불가능하다고 말하였다면, 그 말은 높은 확률로 그른 말이다.

 

2. 가능성의 한계를 알아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가능성의 영역을 넘어, 불가능의 영역으로 조금 더 뛰어드는 것이다.

 

3. 고도로 발달한 과학은 마법과 구별할 수 없다.

 

이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법칙은 아마 3번이 될 것이다. 예를 들어 현대인이 배터리가 가득 충전된 휴대폰을 들고 과거로 이동하였다고 하자. 그렇다면 과거인들의 눈에는 휴대폰이 마치 신의 물건처럼 보일 것이고 - 멀리 있는 사람의 목소리를 듣게 만든다거나, 소리가 들려온다거나 - 그 신의 물건을 조종하는 우리는 일종의 신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혹은 마법사로 몰려 당장 처형당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어느쪽이든, 그만큼 고도로 발달한 과학의 힘은 중간과정을 생략한다면 그 지식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마법과 비슷한 모습으로 보여질 것이다. 이는 우리보다 과거의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우리보다 더 고도로 발달한 문명에서 양자전송장치라도 들고 온다면, 우리 또한 마법의 상자로 볼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런데 우습게도, 이 3번 법칙은 과학기술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인문학에서도 적용시킬 수 있다. 약간만 고친다면 말이다.

 

3. 고도로 조직된 몽상은 뛰어난 이론과 구별할 수 없다.

 

물론 이 말에 대하여 수많은 반론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애초에 과학과 마법의 근연관계에 비하여, 몽상과 이론의 근연관계가 훨씬 더 멀지 않는가, 라는 반론에서부터 몽상을 어떻게 이론과 비교하느냐, 그동안 쌓여온 수많은 철학 이론들을 몽상으로 치부해버리는 것인가, 등으로 말이다. 여기에 대하여 조금 설명하자면, 먼저 나는 모든 인문학적 이론을 몽상으로 치부할 생각은 없다. 정말 뛰어난 인문학적인 이론도 분명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레비 스트로스의 근친상간 금기는 매우 뛰어난 인문학적인 이론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뛰어난 인문학적인 이론 뿐만이 아니라, 몽상에서 그 연원을 두고 있는 이론도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당장 뛰어난 철학자 루소의 경우를 보자. 그의 저서 중 하나는 '고독한 몽상자의 산책' 이라는 말을 달고 있다. 그에게는 몽상이 - 본인이 책에서 밝히듯 - 창조의 원천이었다. 망상에 가까운 몽상으로 치부된 이론도 있다. 하루하루 힘들게 벌어먹고 사는 사람이 보기에는 (물론 굳이 힘들게 벌어먹고 사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헤겔의 이론은 무슨 말도 안되는 망상이냐고 되물을 것이다.

 

이 몽상 중 하나로 들 수 있는 것이 감히 말하건데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다. 정신분석학에 대하여 적절한 근거가 존재하는가? 아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이 정신분석학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 아니다. 적절한 근거도 존재하지 않고, 그렇기 때문에 보편성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정신분석학의 기틀을 세운 네 가지 기본 명제(주1)를 검토해보자. 첫 번째 명제는 무의식이 존재한다, 이다. 무의식에 대한 정의는 프로이트 본인도 확실히 정립하지를 못하였지만, 어느 정도의 경계는 설정해두었다. 바로 무의식은 쾌락 원칙을 따르며, 의식될 수 없는 가장 심층에 숨어있는 부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근거로 프로이트는 꿈을 가져온다. 프로이트의 임상적 근거에 의하면 꿈은 압축과 전치, 상징화를 통하여 무의식을 표출시키며, 결국 정신적으로 안정화를 찾는다, 라고 말한다.

 

그런데 무의식이 정말로 존재하는가? 단순히 나한테는 무의식이라는 게 있어, 너도 스스로 알잖아? 라는 질문으로 넘어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에 대하여 어떠한 근거가 존재하는가? 그리고 이를 다른 사람에게 우리가 어떻게 알릴 수 있을까? 프로이트는 자신에 대한 심오하고 '결코 되풀이 된 적은 없는' 통찰(주2)을 통하여 무의식의 존재를 발견하였고, 그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이론을 세웠다고 하지만, 그것은 사실 개인적인 것이다. 다른 사람이 같은 절차를 밟아서 재현되어져야만 우리는 그 결과를 받아들일 수 있는데 - 당장 이번의 CERN의 광속을 넘는 속도로 측정되었다던 중성미자, 연구를 보라 : 결국 재현되지 않아서 부정되었다 - 그런 재현성을 부정한다면 그가 무의식이라고 지칭하는 것이 우리가 무의식이라고 지칭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는 보장이 어디있겠는가. 특히 임상경험으로 정립되었다는 말에 대하여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존재한다.

 

두 번째 명제를 보자. 두 번째 명제는 정신현상에는 우연이 없다는 이야기이다. 인간이 취하는 어떤 정신적 과정에서는 반드시 무의식적인 동기가 존재한다. 예를 들어 이런 사례를 우리는 들 수 있을 것이다. 프로이트가 가장 즐겨 사용하였던 사례인데, 당시에 정족수가 충족되었으므로 폐회를 선언한다, 라고 오스트리아 하원 의장이 말한 적이 있었다. 이를 두고 프로이트는 이렇게 해석한다. 의장은 당시 안건을 보고, 어차피 제대로 된 결과가 나오지도 않을텐데 빨리 끝이 났으면 좋겠다, 라는 무의식적인 동기를 가지고 있었다고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저런 말실수를 하게 되었다고 말이다. 어떤 현상이든지, 심지어 단순한 말실수처럼 보이는 것일지라도 반드시 그 동기가 존재한다, 라는 것이 바로 정신분석학의 기본 명제 중 하나다.

 

이 경우를 살펴보자. 이 부분에 대해서는 간단히 반론할 수 있다. 위의 사례를 살펴보면, 의장의 동기를 프로이트는 '추측하고 있다.' 정말 의장이 저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까? 만약에 의장이 '아니, 나는 그런 생각이 조금도 없다' 라고 부정한다면 저 명제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그리고 의장이 정말 아무런 의도가 없이 말실수를 하는 경우를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일까? 물론 그런 경우에서도 프로이트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본인은 깨닫지 못할 것이다.' , 혹은 '깨닫고 있어도 사회적 체면때문에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말을 꺼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런식으로 이야기한다면 프로이트의 해석은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작용하게 된다. 결국 미셸 옹프레가 우상의 추락, 에서 말한대로, '동전의 앞면이 나오면 내가 이기고 동전의 뒷면이 나오면 당신이 지는 것이다.'

 

세 번째 명제는 현재는 과거의 결과이다, 라는 것이다. 이를 풀어서 설명하자면, 현재 가지고 있는 병증은 어려서 겪은 경험때문에 생긴 것이다. 프로이트의 사례 중 하나를 들면 카타리나의 사례, 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카타리나는 종종 가슴이 답답하다고 이야기하는데, 프로이트는 거기에 대하여 이렇게 해석한다. 카타리나가 어렸을 때 그녀의 아버지가 몸 위로 올라갔었다. 당시에는 그게 어떠한 의미였는지 몰랐었지만, 나중에 그 의미를 알게 되고는 재생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외상적 경험이 인식되지도, 표현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세상에 드러나는 통로는 육체이다.'(주3) 그 어릴 적 상처가 현재의 답답함의 원인이라는 이야기이다.

 

이 명제도 반론의 여지가 있다. 환자의 병이 정말 심인성일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에 심인성이 아니라면 저런 진단은 위험할 수 있다. 답답하다Dyspnea는 여러가지 기질적 원인으로 생길 수 있다. 단순한 소화불량에서부터 협심증에 이르기까지 답답하다, 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는 수많은 병들이 존재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만약에 카타리나가 협심증이라도 앓고 있었다면, 저런 치료로 병이 나을 수는 없을 것이다. 여기서 프로이트학을 따르는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치료되었으니 저 사례가 옳은 것이 아니냐고. 하지만 정말로 치료되었는지, 그 후에 카타리나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어디에서도 알 수 없다. 이 뿐만이 아니다. 프로이트 사례 중 유명한 이르마의 꿈, 이라는 사례가 있다. 그 사례의 주인공으로 여겨지는 에마 에크슈타인은 과다출혈로 처음 프로이트를 찾았는데, 프로이트는 이 과다출혈이 정신적 요인때문에 생겼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 과다출혈은 자궁근종때문에 발생한 것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주4) 또한 이후에 정신적 요인을 바로잡기 위하여 받은 수술 이후에 썩은 냄새를 맡게 되었는데, 프로이트는 그것마저도 정신적 요인에 기인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실제로는 수술 이후에 거즈가 그대로 수술부위에 남아서 썩었기 때문에 냄새가 난 것이었다.

 

네 번째 명제는 인간은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고자 모든 노력을 한다, 는 것이다. 두 가지 길이 있다. 한쪽은 먹을 것이 넘치고, 온갖 오감을 충족시키는 그런 곳인데 비하여 다른 한 쪽은 도리어 수많은 방해요인들이 있다면, 어느 쪽을 택하겠는가? 그런데 이 문장은 단순히 이런 식으로만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향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인간의 정신은 자신의 정신에 걸리는 부담을 최대한 줄이는 쪽으로 그 행동원리가 정해진다, 라고 말이다. 이렇게 해석하고 보니 앞서의 의미보다 좀 더 심화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생리학에서는 Fight or Flight라고 한다.(주5) 어떤 장애물을 만난 경우 우리 몸에서는 교감신경이 작동할 것인지를 빠르게 결정하여야만 한다. 그리고 교감신경이 작동한 경우 싸울 것인지, 자리를 뜰 것인지를 결정하여야만 한다. 이 모든게 사실상 정신에 걸리는 부담이다. 부담이라는 말을 정신의학적으로 해석하기보다는 생물학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교감신경이 작동한 경우에는 저장된 에너지들이 소모되는 방향으로 우리 몸이 작동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애초에 그런 부담이 없는 쪽이라면 우리 정신은 한결 편안해질 것이다.

 

이 명제는 가장 그럴 듯 하다. 그런데 이런 예화를 하나 가져와보자. 칸트가 만든 것인데, 정말 아름다운 여성이 침대에서 기다리고 있다. 당신이 남자인데, 그 여성과 밤을 같이 보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그런데 그 기회를 소모하고 나면 당신은 바로 교수형에 처해진다. 과연 당신은 그 여성과 잠자리를 같이 할 것인가? 칸트는 절대 그럴리 없다고 한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목숨을 버리고 쾌락을 선택한다니. 삶과 죽음 중 어떤 것이 쾌락인가? 어떤 것이 고통인가? 삶이 쾌락이고 죽음이 고통이다. 그렇다면 삶이라는 쾌락과 여성과 하룻밤을 보내는 쾌락 중 어떤 쾌락이 더 클 것인가? 삶이라는 쾌락이 더 클 것이다. 그런데 누가 저 여성과 하룻밤을 보내겠는가?

 

여기서 프로이트로의 회귀를 주장했던 라캉의 이야기를 가져와보자. 라캉은 이야기한다. 여성과 보내는 쾌락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사람이 충분히 존재할 수 있다고 말이다. 이 말은 성적인 쾌락이 삶보다 훨씬 더 중요하게 작용할 수가 있다는 말이다. 이 경우 쾌락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네 번째 명제가 부정될 수도 있고, 유지될 수가 있다. 삶이라는 것이 훨씬 성적인 쾌락에 비하여 더 중요하다면 네 번째 명제는 부정될 수 있다. 쾌락을 추구하지도 않았고 고통을 피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성적인 에너지, 좁은 리비도 개념만 본다면 이 명제는 그대로 유지될 수 있다.

 

프로이트의 통찰 중 가장 핵심적이자 뛰어난 통찰이라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 바로 이 무의식, 개념의 발견이다. 물론 프로이트만 이런 무의식 개념을 발견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프로이트의 기본 전제들 전부가 모두 그 이전세대에서부터 예견되어진 것이다. 니체와 같은 사람은 그것Est 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무의식의 준비를 예견하였다. 니체 뿐만아니라 여러 사람들이 자신 안의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어떤 힘을 지칭하였다. 하지만 프로이트가 직접적으로 지칭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오늘날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 볼 때 '무언가 제어가 되지 않는 힘' 이라는 길고 긴 명칭을 읊어야만 했을런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는 그 힘에 대하여 두려움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이름을 준 결과 우리는 이를 다룰 수 있게 되었다. 이는 분명 프로이트의 공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의식의 개념을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있다. 위의 명제들을 모두 충족하는 무의식은 일종의 완전기억에 가깝다. 무의식은 절대로 잊지 않는다. 정말 짧은 시간 경험한 것이라도 모조리 우리 머릿속에 저장되어있고, 우리는 다만 그것을 꺼낼 방법을 모를 뿐이다, 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적어도 의식의 세계를 살아가는 우리의 눈으로 볼때는 우리의 기억은 조작되기도 쉽고 잊기도 쉽고, 잘못된 사실을 재구성하기도 쉽다. 무엇보다도 기억이 물질의 형태, 현대 의학에서는 기억을 측두엽과 해마와 연관이 있다고 본다(주6), 로 보존되는 한, 기질적으로 문제가 생겼을 경우 반드시 기억에도 혼란이 온다. 작화증confabulation, 이라는 병이 왜 존재하겠는가? 그리고 어떻게 환자가 자유연상으로 떠올린 기억들이 사실이라고 여기는 걸까? 상대방의 마음을 읽는 절대적인 방법이 없는 한, 그 기억들을 그대로 받아들일수 있다고 믿는 것은 사실 위험한 일이다. 이런 질문을 던질 수도 있다. 왜 트라우마로 기억되는 것들은 모두 성, 폭력 등에 연관된 것일까? 사랑, 과 같은 감정이 트라우마로 기억되는 일은 없을까? 누가 나에게 너무 사랑을 보였었는데, 예를 들어 할머니가 나에게 사랑을 무조건적으로 주었는데, 그 경험이 나에게 신경증을 가져와주었다거나 하는 일은 없을까?

 

큰 틀에서 볼때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대한 반론은 위와 같이 프로이트 본인의 주장과는 달리 충분히 과학적이지 않다, 라는 점과 창시자인 프로이트 본인에 대한 비판으로 나뉜다. 그리고 이 두 가지 반론을 집대성한 것이 바로 이 평전, 미셸 옹프레의 우상의 추락, 인 것이다. 미셸 옹프레는 책의 서문에서 자신을 구해준 세 책을 언급하면서, 그 중 하나를 이 프로이트의 '성욕에 관한 3가지 에세이' 로 들었다. 그 책이 자신을 미망에서부터 빠져나오게 만들어주었다면서 말이다. 그러나 호의적인 이야기도 잠시, 이제는 프로이트의 이론에서 그 실체를 명확히 알아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비판을 시작한다. 이런 태도는 얼핏보면 미셸 옹프레가 자신이 우상화하던 존재가 알고보니 그다지 존중받을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그때부터 입장을 선회하여 잘못을 논하는 모습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리고 우상의 추락, 이라는 제목에서 미루어볼때, 분명 미셸 옹프레의 심정 중 일부는 그런 부분도 있었으리라. 어느 누구든 자신이 우상화하던 존재가 알고보면 그다지 존중받을만한 사람이 아닌, 수많은 잘못으로 뒤덮힌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두 가지 입장을 취하게 된다. 첫 번째로는 부정이다. 아니야, 저 사람이 그렇게 행동할 리가 없어, 라고 자신이 본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의 입장은 비판 혹은 비난이다. 자신이 그때동안 옹호해온 것을 모조리 부정해버리고 우상화하던 존재에게 강하게 비난과 비판을 퍼붓는 것이다. 미셸 옹프레의 이 우상의 추락, 에서 드러나는 것은 바로 이 두 번째 입장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단편적으로만 해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비록 문체가 거칠고 자료를 지나치게 프로이트를 비판하는 쪽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지만, 어디까지나 미셸 옹프레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정신분석학 전체에 대한 부정이라기보다는 정신분석학은 과학이 아닌 프로이트 개인의 철학이다, 라는 것이다. 그것은 서문의 다음과 같은 문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프로이트의 이론은 스피노자, 니체, 플라톤, 데카르트, 아우구스티누스, 칸트의 이론등과 같이 개인적인 시각에서 전체를 바라보려고 하는 하나의 관점에 불과하다.' 미셸 옹프레의 목적이 결코 정신분석학이라는 학문 자체를 없애는 것에 있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보여주는 말이다. 그리고 이 책의 모든 내용은 정신분석학의 지나친 확대 및 프로이트의 우상화, 그리고 과학적으로 보이려는 수많은 시도를 논박하는데 집중된다.

 

먼저 과학적으로 보이려는 수많은 시도를 저자가 어떻게 해석하는지 알아보자. 정신분석학을 통하여 자신의 병이 나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적어도 분석을 받고 나서는 마음이 편해졌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분명 존재한다. 그렇다면 이들은 미셸 옹프레의 관점에서 볼때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미셸 옹프레는 프로이트의 사례를 분석하면서, 실제로 프로이트가 그들을 치료한 것이 아니다, 라고 주장한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안나 O의 경우에는 다른 자료에 의하면(주7) 치료가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아서 상태가 악화되었다고 발표되었으며 도라는 치료를 받은 후 평생을 불우하게 살았다고 이야기한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이들이 제대로 치료를 받고 심지어 치료가 실패한 도라마저도 자신의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라고 해석하지만, 그들의 실제 삶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미셸 옹프레는 말한다. 프로이트는 이상화된 자신의 이론에 억지로 환자들을 끼워맞추는 사람이었고, 그가 일시적으로라도 사람들을 낫게 한 것은 플라시보 효과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현대의학에서는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을까? 최근의 논문에 따르면(주8) 1998년에서부터 2007년에 이르기까지 정신요법Pschotherapy을 단독으로 시행하는 경우는 15.9%에서 10.5%로 줄어들었고, 약물만 단독으로 사용하는 경우는 44.1%에서 57.4%로 늘었다고 말한다. 현대의 정신요법이 정신분석 뿐만이 아니라 정신분석적 정신치료, 단기 역동정신치료 등을 모두 포함한다는 것을 감안할 경우,(주9) 정신분석 자체는 거의 줄어들었다고 보아도 무방하리라.

 

피터 게이는 자신의 프로이트 평전에서 왜 프로이트의 학문만이 그의 개인적 일들로 비판을 받아야 하는지 묻는다.(주10) 그가 역설한대로, 어느 누구도 뉴턴이나 다윈, 베토벤 등이 신경증을 앓고 있다고 해서 그들의 작업을 비난하지는 않을 것이다. 뉴턴은 사실 연금술사에 더 가까운 사람이었다. - 존 메이너드 케인스가 뉴턴의 물품을 구입한 뒤 검토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미적분과 물리학이 마술이라고 주장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 이야기이다. 왜 프로이트의 학문은 프로이트 개인적 일화를 바탕으로 비난과 비판을 받는가? 학문이라는 의미에서는 차이가 없지 않은가? 피터 게이의 그런 말은 분명 일리가 있는 말이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볼 수도 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뉴턴이나 다윈처럼 과학도 아니고, 베토벤처럼 예술도 아니었기 때문에 이렇게 비판을 받는 것이라고 말이다. 프로이트는 그 자신의 정신분석학적인 용어들을 생리학에서 가져왔다는 연구 결과(주11)처럼 평생 자신의 학문이 과학에서 출발하였고 과학으로 인정받기를 바랬었으며, 자신의 저서에서는 마치 다윈이 종의 기원에서 남긴 말처럼 언젠가 새로운 화학물질 등이 발견되면 자신의 이론이 완전히 변혁을 거칠 거라는 이야기도 남겼다. 하지만 2013년인 오늘이 될때까지도 아직 정신분석학은 과학이라고 보기에는 단단한 반석위에 오르지 못하고 있다. 실제로 논문을 검색해보면 예술 비평분야에나 쓰이고 있고, 임상적 치료를 알리는 논문은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무엇보다도 과학적으로 문제가 되는 부분이 종교의 기원, 부분에서 토템과 터부, 로 알려진 소논문인데, 여기서 프로이트는 폐기된 학설인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을 가져온다. 이는 다윈의 진화론과는 사실 상충되는 면이 있다. 용불용설은 획득형질의 유전을 옹호하는 이론인데, 실제로 획득형질은 유전되지 않는다. 즉, 수만년 전에 치른 선사시대의 의식이 그대로 유전을 통하여 우리의 무의식에 남아있을수는 없다는 이야기이다. 또한 프로이트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 같은 성을 미워하고 다른 성을 따르는 - 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컴플렉스를 실제로 실현하지는 않는다고 말했었는데, 그 선사시대에서 토템을 설명할때에는 아들들이 같은 성인 아버지를 실제로 '죽인다.' 프로이트의 주장대로라면 아들들이 죽이려는 마음을 품더라도 실제로 '죽여서는 안된다.' 이는 프로이트 스스로의 말과도 어긋나는 부분이며, 비단 미셸 옹프레 뿐만이 아니라 그의 평전을 쓴 피터 게이도 비판하는 부분이다.

 

그렇다면 인문학적인 요소를 가진 과학적 연구방법을 따르는 학문으로 볼 수 있을 것인가? 이 부분에 대해서도 사실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자기 자신을 언급하는 것들은 모순에 빠지기 마련이다. 인간이 인간을 언급하는 학문인 정신분석학에서 스스로 모순에 빠지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너무나 순진한 생각이다. 버트런드 러셀의 이발사의 역설(주12)의 핵심은 자기 자신에 대한 언급이다. 이는 적어도 논리학이라는 틀에서는 매우 강력한 도구다. 그리고 논리적으로 쌓아올려져야만 다른 사람을 납득시킬 수 있는 학문에서는 자기 언급은 치명적이다. 논리적인 부분을 모두 빼고 생각해보더라도 이 문제는 표현을 달리하여 그대로 남는다. 자기 언급을 하는 학문이라면 자기 자신의 일화를 그 전거로 삼을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자기 자신의 일화가 엉망이라면, (인간의 신경증을 다루는 학문인 정신분석학이 그 근거를 인간의 신경증에 두고 있다면 학문으로 성립할 수 있겠는가?) 그 일화들을 전거로 삼을 수 있겠는가? 이는 피터 게이의 질문과 상충한다. 그렇기 때문에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다른 학문과 달리 프로이트의 개인적 일화가 중요성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정신분석학을 예술이나 철학으로 볼 수 있을 것인가? 좀 더 넓은 의미에서 예술에 대한 비평에서 정신분석학이 활동할 수는 없을까? 이는 제법 적절한 것 같다. 김서영 교수는 자신의 연구에서 모세상에 대한 프로이트의 비평을 언급하면서 비록 브레머의 비판 - 프로이트가 조각이 나타내려고 하는 성경에서의 서사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였다 등 - 에도 불구하고 그의 정신분석이 의의가 있다고 주장한다. 브레머 본인부터가 프로이트의 방법을 차용하였다는 것이다.(주13) 그의 비판을 통하여 도리어 정답이 해체되고, 다시 한계를 넘어갈 수 있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런 점에서 미루어볼때, 예술 작품의 비평에 있어서 그 예술 작품에서 미처 드러나지 못한 깊은 무엇인가를 끄집어 낼 때 - 김서영 교수의 말을 빌리자면 '기존의 틀을 전복시키는 해체적 비평' - 정신분석학이라는 도구가 분명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대해서는 미셸 옹프레 본인도 자신의 저서에서는 브레머의 프로이트 모세상 해석에 대한 비판, 만 소개할 뿐 깊이 다루고 있지 않다. 결국 굳이 정신분석학이 어떤 정체성을 가질 수 있다면 예술 비평이나, 더 넓게 보아서 철학으로서의 정체성만 가질 수 있으리라고 본다. 이를 조금 뒤틀면 결국 칸트나 쇼펜하우어의 이론처럼 개인이 어떻게 세계를 해석하는가, 에 대한 의의만 가질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애초에 미셸 옹프레에 따르면 이런 관점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그가 볼때에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니체와 쇼펜하우어의 계보를 잇는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렇게 따져보면 미셸 옹프레의 프로이트에 대한 비판은 대부분 근거가 있어보인다. 프로이트의 이론은 과학적이지도 않고, 그저 개인이 세계를 해석하려는 몸부림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게다가 독창적이라는 말도 사실 옳지는 않다. 미셸 옹프레는 이 부분에도 칼날을 들이댄다. 프로이트의 무의식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으면, 무의식은 마치 앞서 말했듯 완전 기억을 가진 것 같다. 모든 것을 다 기억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런 완전 기억이라면 본인이 읽은 수많은 책들은 모두 무의식 속에 다 저장되어져 있을 것이다. 그리고 프로이트는 수많은 책들을 읽었다.(주14) 여기서 도출할 수 있는 결론은 하나다. 그 수많은 책들이 무의식에서 저장되어있다가 프로이트가 이론을 세울때 도움을 준 것이다. 그렇다면 프로이트의 이론은 독창적이라고 부르기는 어려울 것이다. 실제로 앞서 무의식에 대한 명제를 설명할 때, 니체 등이 이미 무의식이라는 이름만 붙이지 않았을 뿐, 그런 비슷한 개념을 설명한 적이 있었다고 언급하였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미셸 옹프레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미셸 옹프레의 말이 다 맞다고 치더라도 우리는 저 책을 마지막까지 읽어나가면 이런 말을 내뱉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 네 말이 다 맞는 것 같아. 그런데 왜 이렇게 재수없는 것 같지?"

 

왜 이런 말을 내뱉게 만들까? 추측이지만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을 것 같다. 첫 번째로는 미셸 옹프레가 이 책 전반적으로 현상학적인 접근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 될 것이다. 무의식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무의식의 역할을 최대한 축소하려고 하는 모습이 보인다. 애초에 접근 방식이 모든 가능성을 열어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눈으로 쳐다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미셸 옹프레가 스스로 주장하듯이 실체, 를 확인하려할때는 가장 적절한 연구방법이 현상학적인 연구방법일수도 있다. 의식의 작용을 긍정하고, 의식의 지향성을 중요시한다. 그리고 현상학적인 판단중지를 취한다. 이런 현상학적인 방법은 무의식을 굳이 필요로 하지 않는다. 진정한 인식을 목표로 하는 현상학, 이보다 더 실체를 꿰뚫어보기 좋은 방법이 어디있겠는가? 하지만 평전으로 쓰기에는 좋은 방법이 아니다. 이 책은 평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전에는 소홀해졌으며, 평도 비판에 집중한 나머지 성과에는 눈을 돌렸다. 결국 이런 형식은 현상학적인 방법을 빌려 미셸 옹프레의 프로이트에 대한 복수 - 자신을 실망시켰다는 것에 대한 - 를 정당화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 처럼 보인다.

 

두 번째는 좀 더 직접적인 이유인데, 미셸 옹프레의 태도는 이런 태도와 비슷하다. 거칠게 예를 들자면 A가 맞춤식 양복을 입고 있다. 그런데 B가 그 사람이 입은 옷이 그 사람 본인에게 딱 맞는다고 비판을 하고 있다. 헛웃음이 나오는 상황이다. 맞춤식 양복을 입었으니 당연히 양복이 A의 몸에 딱맞을 수 밖에 없다. 그런데 그걸 가지고 비판을 하다니, 말도 안되는 이야기이다. A를 프로이트라고 두고 B를 미셸 옹프레라고 두자. 미셸 옹프레는 서문에서부터 책의 끝에 이르기까지 정신분석학은 프로이트학이며, 개인의 철학이라고 주장한다. 심지어 니체의 말을 변용하면서 이런 문장을 적어둔다. 진정한 정신분석학자 - 프로이트주의자 - 는 한 명이었고, 지금은 없다고 말이다. (니체의 원문은 진정한 기독교인은 한 명 - 예수 - 이었고, 지금은 없다, 로 알고 있다.) 그런데 그런 개인의 철학이라면, 그 개인에게는 들어맞는게 당연하다. 그런데도 그 철학을 가지고 개인에게 들어맞으면 들어맞는다고 비판하는 것이 과연 옳은 비판의 자세일까? 아무리 몽상에 가깝더라도 창시자 본인에게는 타당할 수 밖에 없지 않은가. 게다가 그 창시자 본인이 미셀 옹프레가 말한대로 유일하고 진정한 존재라면 말이다. 이런 태도를 보면서 우리는 그래, 맞는 말이긴 한데 뭔가 부족하고 재수없다, 라는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다시 앞서 과학 제 3법칙으로 돌아가자. 조금 수정한 3법칙은 고도로 조직된 몽상은 뛰어난 이론과 구별할 수 없다, 이다. 지금까지 살펴보건데, 미셸 옹프레의 비판이 설령 '재수없더라도' 근거가 존재하기에, 프로이트의 이론이 몽상으로 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몽상이면 안될까? 우리는 몽상을 망상과 비슷한 부류로 취급하며,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처럼 여길 때가 있다. 대문호였던 빅토르 위고는 레 미제라블에서 사색은 정신의 노동이요, 몽상은 정신의 쾌락이다, 라고 이야기하면서 몽상에 빠지는 것을 경계해왔다. 하지만 정말 몽상은 무가치한 것일까? 여기서 바슐라르의 이론을 가져올 수 있다. 가스통 바슐라르는 몽상의 철학자, 라는 이름으로 많이 알려져 있는데, 그가 이런 이름이 붙게 된 이유가 있다. 원래 그는 과학철학에 관심이 많았다. 그런데 그가 과학사에서 살펴본 것은 과학의 진화가 아니라 과학의 오류였었다. 왜 사람들은 오류를 저지르고 거짓된 이론에 현혹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상상, 몽상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완전한 과학을 위하여 그런 몽상과 상상을 제거하려는 작업을 시도하였다. 하지만 그런 작업은 실패로 돌아가고, 자신의 실패를 돌아보면서 바슐라르는 자신의 생각을 바꾸게 된다. 도리어 이런 몽상이 중요한 것은 아닐까, 라고.

 

바슐라르에게 있어서 몽상은 퇴행을 의미하지 않는다. 도리어 상상력의 원천이자 주관성의 객관성에 대한 승리선언이다.(주15) 상상력은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우리의 활동의 근원에 존재한다. 무의식도 의식도 아닌 몽상의 의식, 이라는 개념을 가져옴으로서 무의식과 의식의 긴장은 해소되고 무의식의 작용이었던 꿈과 몽상의 의식에 바탕을 둔 몽상의 차이점이 확연히 드러난다. 바슐라르에 의하면 이런 몽상이 우리 삶을 이끌어나가는 것이다. 이를 받아들인다면 프로이트의 이론이 몽상이 아니어야 할 이유가 굳이 존재할까? 도리어 이런 몽상을 통하여 더 깊은 차원의 해석이 이루어질 수는 있지 않을까? 물론 무의식의 작용인 꿈을 해석하는 프로이트의 이론 전체를 하나의 몽상으로 취급하는 것은 마치 우로보로스의 뱀과 같을 것이다. 꿈과 몽상이 계속 맞물릴테니 말이다. 하지만 도리어 이런 해석이 정답이 없는 - 주관성의 세계에서는 정답이 있을 수 없다 - 전복적 비평에 더 가까울 것이라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설령 고도로 조직된 몽상이더라도, 결코 뛰어난 이론에 뒤지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비록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프로이트 본인이 원했던 것 처럼 과학으로 알려지기에는 아직도 요원해보이고, 어쩌면 영영 과학이 될 수 없을지라도, 과학이 아니라 창조성을 가질 수 있는 그런 철학으로서는 분명 의의를 가질 수 있으리라고 본다. 애초에 저 수정된 3법칙을 보라. 고도로 조직된 몽상과 뛰어난 이론을 구별할 수 없다는 이야기는 단순히 몽상으로 치부하여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론 자체가 몽상과 등가의 관계를 가질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다. 구별할 수 없는 것을 억지로 구별할 필요가 있겠는가? 사실 프로이트 본인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대한 비판은 정말 많이 제기되었다. 그런 비판들에 비하여 미셸 옹프레의 이 책은 본인의 우상을 비판한다는 점에서 훨씬 개인적이고, 대부분의 비판들을 집대성한다는 점에서 훨씬 종합적이다. 그러나 그 모든 비판은 다른 학문들에 대한 비판과 마찬가지로 프로이트학 또한 다른 철학들처럼 어떤 새로운 인식과 창조성의 바탕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중심에 두었을때 그 존재가치를 가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이 정신분석학이 창조성을 발휘하는데 밑거름이 되어주기를 바란다.

 

 

 

 

 


 

1. 기백석 외, 신경정신의학, 2nd ed., 중앙문화사, 2009, pp. 70-71. 

2. 피터 게이, 프로이트 I, 교양인, 2012, p. 206.

3. 김서영, 프로이트의 환자들, 프로네시스, 2012, p. 335.

4. http://www.answers.com/topic/eckstein-emma , 2013년 11월 17일 검색. 읽어보면 myoma적출술과 동시에 자궁적출술을 받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여기서 피터 게이의 평전과 미셸 옹프레의 말이 약간 다르다. 미셸 옹프레는 월경과다증과 위장장애를 보였다고 기술하지만, 피터 게이의 평전은 월경과다, 혹은 하혈이 심하다, 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김서영의 프로이트의 환자들 에서는 더욱 간략하게, 그녀가 코피가 심했다, 라는 내용만 적혀져 있다.) 만약에 전자라면 자궁근종이 애초에 그녀의 병인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으나, 후자의 경우에는 다른 원인일수가 있다. 설령 다른 원인이라고 할지라도 코피 등에 대한 기질적 원인을 먼저 찾아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5. Bruce M. Koeppen et al., 조양혁 외 역, Berne&Levi 생리학, 6th ed., 이퍼블릭, 2009, p. 214.

6. Bruce M. Keoppen et al., 위의 책, p. 210.

7. http://en.wikipedia.org/wiki/Anna_O. , http://www.answers.com/topic/anna-o , http://en.wikipedia.org/wiki/Henri_Ellenberger , 2013년 11월 17일 검색. 미셸 옹프레의 주장이 실제로 옳은 말인지 확인하기 위하여 검색해본 결과, 적어도 미셸 옹프레가 말한대로 앙리 엘랑베르제가 새롭게 연구결과를 발표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안나 O가 회복되지 못한 것도 사실으로 여겨진다. 현대적 해석으로는 위의 안나 O링크에서 이야기하듯 정신과적인 문제보다는 encephalitis 또는 temporal lobe epilepsy가 더 적합하다고 한다.

8. Brandon A. Gaudiano, Ivan W. Miller, The evidence-based practice of psychotherapy: Facing the challenges that lie ahead, Clinical Psychology Review, 2013, p. 814.

9. 기백석 외, 앞의 책, pp. 597-613.

10. 피터 게이, 앞의 책, p. 23.

11. Bettina Bock von Wulfingen, Freud’s “Core of our Being” Between Cytology and Psychoanalysis, Ber.Wissenschaftsgesch., 2013, pp. 226-244.

12. 스스로 면도하는 사람은 면도해주지 않고 스스로 면도하지 못하는 사람을 면도해주는 이발사는 누구에게 면도를 받아야 하는가?

13. 김서영, 정신분석학 연구방법론 일반의 학문적 의의, 해석학 연구 제23집, p.71.

14. 피터 게이, 앞의 책, p. 110.

15. 홍명희, 상상력과 가스통 바슐라르, 살림, pp. 48-51.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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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3-11-18 02:20   좋아요 0 | URL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저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무엇이라고 받아들였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말을 할 처지는 아니군요 이름만 알고 책은 읽어본 적이 없으니(다른 책에 아주 조금 나온 것밖에는)... 프로이트는 자신이 하는 것이 과학으로 받아들여지기를 바랐지만, 다른 사람은 그러지 않았군요 그리고 '프로이트에 따르면'과 같은 말은 예술 비평에 더 많이 쓰인 듯합니다 과학으로 증명할 수 없다 해도 그게 뜻이 없지는 않다고 봅니다

몽상은 사람한테 필요한 거죠

비판을 했다 해도 아주 싫어서 한 것은 아닌 것 같은 마음도 듭니다 비판하는 마음을 조금만 뒤집으면 다른 마음도 있을 테니까요 이런 생각을 하고 마는군요^^

바람이 아주 세게 불고 있습니다


희선

가연 2013-11-22 00:42   좋아요 0 | URL
여기도 바람이 아주 셉니다. 어허허.. 사실 이 책을 보면 저자는 정말 프로이트가 싫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긴 하네요, 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