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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범들의 도시 - 한국적 범죄의 탄생에서 집단 진실 은폐까지 가려진 공모자들
표창원.지승호 지음 / 김영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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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에 이 책을 받았을때 한국형 범죄에 관한 이야기인줄 알았다. 그 브라이언 이니스의 프로파일링, 과 같은 책 있지 않은가. 게다가 표창원씨의 전작 중 하나는 한국의 연쇄살인, 이다. 그래서 사실 개인적으로는 이 책도 그런 범죄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어주었으면, 하였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첫 장을 넘기자마자 물거품처럼 터져버렸다. 프롤로그에서부터 이 책이 쓰여진 동기를 잘 설명해주고 있었다. 다음과 같은 문장 '결론부터 말하자면 범죄와 사회의 관계에 대한 확고한 견해를 가지고 있고, 나름의 해법을 제시하고, 제안하고 있다' 을 보면 말이다. 그러니 이 책은 범죄를 사회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혹은 사회와 범죄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에 대한 표창원 박사 나름의 답변이 될 것이다. 표창원 박사가 우리나라 최초의 프로파일러라는 것을 생각할 때, 이 책은 어쩌면 사회 자체에 대한 일종의 프로파일링이 아닐까.

 

프로파일링은 범죄사건의 정황이나 단서들을 분석하여 범죄자의 행동패턴이라던가, 경향을 특정짓고는, 그걸 바탕으로 범죄자를 그려내는 것이다. 셜록 홈즈가 늘 하는 일이 바로 프로파일링이다. 정말 미세한 부분만 가지고도 범죄자는 어떠한 사람일테고, 어떠한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리라, 라고 파악하지 않는가. 물론 대상은 범죄자로 국한된다. 그러니 사회 자체를 프로파일링한다, 라는 말은 애초에 대상이 틀렸을 수도 있다. 사회를 범죄자의 위치에 끌어내리기는 힘든 일이니 말이다. 다시 질문하겠다. 사회를 범죄자처럼 취급할 수 있는가?

 

그런데 막상 저렇게 사회를 범죄자로 취급가능한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보니 의구심이 드는게 사실이다. 정말 사회를 범죄자로 취급할 수 없는가? 예를 들어 우리는 이런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잘 알려진 사례일테지만, 굳이 우리나라의 사례뿐만 아니라 외국의 사례들까지 생각해보면, 어느 여자가 거리에서 찔려 죽어가면서 살려달라고 부르짖는데도, 근처 사람들이 모두 외면하였다는 일화라던가, 충분히 잡을 수 있는 범인인데도 절차를 밟다가 놓쳐버리는 경우라던가, 은폐가능한 조그만 조직에서 일어난 불화로 인한 살인사건이라던가, 하는 것들을 보면, 어쩌면 사회 자체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을런지도 모르겠다.

 

프로파일링의 기초는 라포rapport형성이라고 한다. 이제 사회를 범죄자의 위치에 끌어내려서 표창원 박사가 이끄는 대로 프로파일링을 해보자. 라포는 친밀감, 유대감이다. 범죄자에게 윽박지른다고 해서 자신이 알고 있는 내용을 털어놓지도 않는다. 어느 정도 상대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자신의 내용을 털어놓는다. 그렇다면 사회는 어떻게 하면 유대관계를 맺을 수 있을까? 사회에 대한 엄밀한 정의는 잠시 제쳐두고 표창원 박사를 살펴보자. 표창원 박사는 원래 경찰대 교수다. 우리나라에서 경찰대라고 한다면 명문대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명문대의 교수로 활동하다가 어느 순간 박차고 나왔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국정원 여론 조작 의혹, 에 대하여 자신의 의견을 말하기 위해서였다. 자신의 정치적 발언이 자신이 속한 조직에 영향을 미칠까, 저어되었던 것 같다.

 

사실 그 전까지는 표창원 박사를 떠올리면 사회에 속한 사람들은 그의 연쇄살인범들에 대한 언급만 생각하였으리라. 나 또한 예외가 아니었기에 그의 이름을 사건에서나 보았던 것 같다.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미루어볼때 경찰대에 남아있었다면 그에게는 프로파일러, 그리고 연쇄살인범추적, 이라는 단어들이 꼬리표처럼 붙어다녔겠지. 그러나 그가 과감히 경찰대 교수직을 박차고 나오면서 사회에 대한 라포가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전까지는 연쇄살인범에 대한 프로파일링을 하던 사람이, 갑자기 사회에 대하여 이야기한다니, 어느 사람은 과연 정의의 사나이 - 이 책에 쓰이는 표현대로라면 - 라고 볼 것이고, 어느 사람은 범죄학이나 연구할 것이지, 처럼 비관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부정적 반응이든, 긍정적 반응이든 반응이라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이다. 라포를 위해서라면 긍정적 반응이 훨씬 좋겠지만, 도리어 그런 긍정적 반응이 일종의 방어기제처럼 여겨질 수도 있기에 부정적 반응도 충분히 도움이 될 것이다. 결국 자극이 가해져야만 반응이 온다. 이는 라포에서도 마찬가지라서 만약에 자신의 자리에 그대로 기다렸다면 사회 자체와 라포의 형성은 영영 불가능하였으리라. 그런 점으로 미루어보았을때, 표창원 박사는 사회에 대한 프로파일링의 첫 단추 자체를 잘 끼운 것 같다.

 

프로파일링의 절차는 보통 여섯 단계를 거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제 라포도 형성했겠다, 본격적으로 단계를 밟아보면, 가장 첫 단계는 현장의 증거 수집 단계이다. 시체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가? 시체는 어떠한 흉기로 찔렸는가? 그런데 우리가, 그리고 표창원 박사가 이 책에서 프로파일링 하고자 하는 사회, 는 단순히 저런 질문으로는 답변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사회로 인하여 발생한 범죄자들부터 먼저 확인하여야 할 것이다. 사회를 범죄자로 둔다면, 그 사회로 인하여 발생한 범죄자들은 사회- 범죄자 - 의 범죄에 희생된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을터이니 말이다. 이 책에서는 한국형 범죄라는 이름을 들며 존속살해범들을 사회의 범죄에 희생된 사람들로 두고 있다. 이들뿐만이 아니다. 그에 따르면 탈주범으로 유명한 신창원도 그런 부류에 들어간다. 500만원을 훔쳤던 지강헌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사람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어떤 것인가? 저자는 말한다. 이들은 어떻게보면 가장 경미한 악을 저지르고 무거운 형벌을 살고 있다고 말이다. 이를 바꾸어 이야기하자면 사회라는 범죄자는 경미한 악은 처벌을 무겁게하고, 정말로 큰 악들은 그대로 활개치게 내버려둔다는 이야기이다. 사회가 사용하는 흉기는? 이 책에 따르면 너무나 다양하다. 관료제 하에서의 보신주의라던가, 자본주의의 폐단이라던가, 부모의 자식에 대한 너무 깊은 의존이라던가.

 

그 다음 단계는 증거의 조직 및 배열 단계이다. 1단계에서 우리는 증거를 발견하였다. 그런데 이런 증거는 그 단독으로는 활동하기 어렵고, 그 증거가 발생한 시간적, 공간적 상태 자체와 가능한 요인을 모두 살펴보아야 한다. 사회라는 범죄자는 어떻게 범죄를 저질렀는가? 그것은 사회를 분석함으로서 파악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를 보자. 우리 사회는 좌와 우가 첨예하게 대립되어있다. 그리고 경찰이 과감한 행동을 취할 수 있는 법적 근거도 마련되어있지도 않다. 당사자주의, 기소 이후에 적용이 되는, 채택하고 있다. 공소시효가 정해져있고 발견된 증거물들을 따로 보관해놓는 그런 곳도 없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일제강점기를 겪었다는 것이다. 만약에 일제강점기를 겪지 않았다면 국민들끼리 합의를 통하여 발전을 할 수 있었을텐데 해방이후의 정국에서는 그저 무분별하게 받아들이기만 하였다. 이런 사례가 바로 사회가 범죄를 저지르게 만드는 요인들이었던 것 이리라. 이 책의 저자는 역설한다.

 

그것도 일본 것을 베낀 거예요. 식민 형법입니다.

 

세 번째 단계는 범죄 발생 동기를 파악하는 것이다. 사회 전반적으로 교육이 부족하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한 지적은 실패학, 실패를 한 뒤 그 사례서 배우는 일이 없다. 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불이익과 위험을 피하려 하는 그런 세력들이 존재하며,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잘해도 신뢰자체가 생기지 않는다고 표창원 박사는 강하게 말한다. 무엇보다도 전반적 체계의 문제점을 지적하는데, 여기서 김연아의 예를 가져온다. 김연아 자신은 매우 뛰어난 피겨 스케이터이지만, 우리나라의 수준이 매우 뛰어난 수준에 이르렀냐면 그런 것은 또 아니다, 라고. 그리고 실질적 예방을 어떻게 하여야 할 지 사회적 합의도 이루어져있지 않다. 그리고 어떤 범죄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고 하여 이 책에서 나오는 것 처럼 '연구비를 주는 것도 아니고, 연구 용역을 주는 것도 아니다.' 이런 것들이 사회 자체를 범죄자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런 실패학만 동기가 아니다. 전반적 교육의 문제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교육과 사회적 합의를 통하여, 예를 들어 공소시효의 경우 몇 년으로 하자, 라는 식으로 우리가 직접 나서서 정하여야 할텐데, 그런 것들이 없다보니 시민들에게는 계속 불안정감만을 주고, 그런 불안정감들은 결국엔 사회적 범죄로 향한다, 라는 말이다. 연쇄살인만 범죄는 아니다. 귀찮게 이런 걸 왜하냐, 라는 조그만 마음가짐들이 사회 전체 시점에서는 범죄가 될 수가 있다는 것을 이해하여야만 하리라. 

 

범죄에 대하여 두 가지 견해가 대립을 하고 있다고 한다. 첫 번째로 보수적 입장은 범인이 실질적으로 나쁜 사람이었다고 하는 것이고 반대로 진보적 입장은 사회가 범인을 만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두 입장보다는 두 입장을 절충할 때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릴 수 있다. 그런데 사회가 범죄자의 입장에 있다면? 그렇다면 국제 사회,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사회들끼리의 입장, 가 범죄자를 만드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나라 사회 자체가 나쁜 것일까? 여기에 대한 답은 사실 쉽게 도출될 수 있다. 우리 나라의 사회에서 발생하는 문제점들을 미국 탓으로 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중국 탓도 아니다. 현대 일본 사회가 - 강점기가 아닌 - 우리 나라의 문제를 야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론 외국인 범죄도 있을 수 있지만, 그 수를 따지면 사회 내에서 일어난 문제들보다는 적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사회 자체에 문제가 있다, 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이런 관점에서 볼 때에 표창원 박사는 그가 말하는대로 보수주의자다, 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네 번째 단계는 유형을 분류하고 범죄자의 사회 인구학적 배경 정보와 범죄 전후의 행동을 파악하는 것이다. 과연 사회에 대한 프로파일링에서는 어떤 식의 유형을 분석할 수 있을까? 가장 먼저 은폐범죄다. 사회의 구성이 복잡해지면서 개인이 모든 것들을 파악하기가 어려워졌다. 인터넷의 발달로 우리는 많은 것을 알 수 있게 되었지만, 동시에 많은 것을 모르게 되었다. 학술적인 지식의 공유는 더 발달하였을지도 모르지만, 역정보에도 그만큼 취약해졌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역정보에만 취약해졌는가? 그렇지 않다. 이전의 사회는 각 구성원들에게 직접 발로 뛰어 자료를 찾게 만드는 그런 동기를 부여해주었지만, 지금의 사회는 앉아서 천리를 보지만, 내가 보고 있는 것이 정말로 옳은 것인지는 쉽게 확인하기가 어렵다. 또한 사회 자체가 고도로 발달하면서, 행정 체계는 갈수록 정치에서보다는 경영으로 기울어지고 있다. 이는 필연적으로 효율의 증가를 요구하고, 효율의 증가는 고도의 전문화를 요구한다. 결과적으로 같은 조직에 속하더라도 서로를 모르는 경우가 생긴다. 같은 일을 하더라도 잘 모르는 경우가 생길 수 있는데, 하물며 일반 시민이라면 그런 경향은 더욱 심할 것이다.

 

은폐범죄뿐만이 아니다. 체제범죄도 있다. 경직된 사회 체제가 범죄를 만드는 것이다. 앞서 일본의 체계를 그대로 가져왔다고 책에서 주장한다고 하였다. 잠시 해방정국으로 돌아가보자. 급하게 우리는 체계를 세워야만 하였다. 그런데 일본제국주의가 남기고 간 것들이 보인다. 급한대로 이것을 쓴 뒤에, 나중에 고쳐나가도록 하자, 라고 생각하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수정은 일어나지 않았고, 같은 체제에서 자리는 그대로 있을 뿐, 그저 사람만 바뀌게 되었다. 그런데 사람만 바뀌게 되다보니, 자리에 있던 사람으로서는 이런 생각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이 자리를 어떻게해서든 지켜야겠다.' 라고 말이다. 그러다보니 집단 전체는 보수적인 경향을 가지게 된다. 사람과 자리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된다면 함부로 인사를 발령하는 것이 어렵겠지만, 사람과 자리가 분리되어있는 이상, 사람의 목숨은 파리목숨에 가깝다. 효율을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하여 아래의 사람은 언제든 내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 인사관계의 유연성을 확보하는 것은 좋다. 하지만 이 유연성은 합의를 통하여 발전되어져야 한다. 오늘날처럼 일제강점기에서부터 그대로 유지된 유연성이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인사관계의 유연성은 조직의 유연성을 담보하지는 않는다. 아니, 반비례관계에 있다. 갈수록 행정체계는 딱딱해져가는 것이다. 이런 체계에서 연쇄살인범과 같은 범죄를 검거하기는 쉽지 않게 된다. 바로 이런 쉽지 않음, 은 사회의 시민들에게 불안감을 안겨준다. 그 뒤의 결말은 뻔하다. 불안감 조성 자체가 이 사회의 범죄가 되는 것이다.

 

다섯 번째 단계는 이를 범죄 수사에 이용하는 것이다. 범죄의 증거와 유형을 바탕으로 이 책에서는 날카롭게 사회의 모순을 지적한다. 수사 구조의 개혁, 파업 진압에 있어서 경찰과 검찰의 정치적 판단의 문제점 등을 말이다. 이 부분은 저자 표창원에게 있어서 현재진행형이다.

 

여섯 번째 단계는 프로파일의 타당성 검토인데, 이 책을 프로파일의 결과로 볼 때 아쉬운 점이 눈에 종종 보인다. 예를 들어 앞서 언급한 지강헌 사건인데, 지강헌 사건이 어떤 사건인지는 이 책에서 그다지 설명을 하고 있지 않다. 이 뿐만이 아니다. 잘 알려진 범죄들이야 워낙 신문에 많이 나왔었지만, 김광석, 김성재 변사 사건이 어떤 것인지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사건들을 언급하는 것은 좋은데,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주석을 달아서 어떤 사건들인지는 알려주는게 옳을 것 같다. 이 책에서 언급하는 정도로는 파악하기가 어렵다. 책에서 예시로 쓰인 사례를 제대로 설명하여야 이 프로파일이 직접적으로 효과를 발휘하리라고 본다. 이 뿐만이 아니다. 표창원 박사는 보수주의자, 라고 스스로 자처하고 있는데 분명 위에서 언급한 논리대로라면 분명 그는 보수주의자이다. 그러나 사회가 아닌, 사회 내부의 개개인으로 볼때 그가 어떤 보수주의자의 입장에 있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면, 사실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이는 위의 프로파일링의 가장 처음 단계, 라포rapport형성에 언젠가는 부메랑처럼 영향을 다시 줄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몇 번이고 사회계약론을 강조하는데, 사회계약론으로 사회를 설명할 수 있지만 이게 전부는 아니다. 사회계약론이 아니더라도 사회를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은 많다. 당장 데이비드 흄만 하여도 사회를 경향성으로 보고 있지 않은가. 이런 이론적 근거 자체도 언젠가는 프로파일링에 영향을 주리라 본다. 그러나 이런 프로파일링을 통하여, 우리가 사회를 어떻게든 바꿔나갈 수 있다면, 적어도 우리의 눈에 들어오지가 않았던 부분 '우리 스스로도 공범이 될 수 있다' 와 같은 것들이 나타날 경우, 성공한 프로파일링이 아닐까.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여담인데 어제는 빼빼로 데이다. 그래서 빼빼로를 사먹었다..

솔직히 기분나쁘다. 왜 이런 날이 있는거지?

물론 반 농담인데.. 반은 진담이다ㅠㅠㅠㅠㅠㅠㅠ

 

매일이 멘탈붕괴중이다.

 

그래도 오늘은 좀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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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3-11-12 22:44   좋아요 0 | URL
쉽고 머리에 잘 들어오는 리뷰입니다. '사회'를 범죄자 또는 범죄혐의자로 놓고, 그에 대한 프로파일링을 해나간다..맞는 말씀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프로파일링을 했으니 이제 그 범죄자를 잡아야하는데, 결국 그 프로파일링이 가리키고 있는 무엇인가가 각각의 우리 자신이라는데 어찌해야할지...(갑자기 아주 쓸데없지만, 자신을 범죄자로 예견하게 되는 프로파일러(미래범죄분석가)의 이야기 <마이너리티 리포트> 같은 게 생각나는군요.)

가연 2013-11-13 08:42   좋아요 0 | URL
맥거핀님의 댓글을 보니, 제가 그 생각을 못했네요. 확실히 마이너리티 리포트, 같은 기분인데요. 그러고보면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결말은...

쉬운 리뷰라고 말씀하시니 괜스레 기분이 좋은데요. 쉬운 글, 이라는 말만큼 최고의 칭찬은 없는 것 같습니다, 풋. 감사합니다.

드림모노로그 2013-11-13 15:20   좋아요 0 | URL
캬~ 가연님은 역쉬 ~~~ 서평 참으로 멋져부립니다 ~ ㅎㅎ
너무 오랜만에 들렸죠 ^^ 간만에 가연님 서평 읽으면서 안구정화도 하고요 ㅎㅎ
저도 이 책 참 잼나게 읽었네요 ㅎㅎ 저도 가연님처럼 책을 프로파일링 하고 싶습니다. (전 수준이 아니되서 ㅋㅋ)
근데요, 빼빼로 사주는 여친을 만드셔야죠, 사먹으면 어떻해요 ㅎ
그러니 기분이 나쁘죠 ㅎㅎ
갑작스럽게 추워진 날씨에 감기 조심하시고, 행복하게 ~ ^^

가연 2013-11-15 17:37   좋아요 0 | URL
어허허.. 저도 거의 서재에 잘 안와서 이제 댓글을 보네유ㅠㅠㅠ

...
...
...

맞습니다, 드림모노로그님ㅠㅠㅠ 여친이 생겼으면 좋겠어유.......... 빼빼로데이날 기분이 참... 그렇더군요ㅋㅋㅋㅋㅋㅋㅋ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희선 2013-11-15 02:27   좋아요 0 | URL
사회 자체에 대한 프로파일링, 사회를 만들고 있는 것은 개인이니 모든 사람이 다 들어가기도 하겠군요 아직도 남아 있는 일제의 찌꺼기, 말은 많이 하지만 쉽게 사라지지 않는 듯합니다 진짜 없애야 하는 것은 없애지 않고 다른 것을 없애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도 잠깐 드는군요

사회는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이니 어떻게 하면 좋을지 잘 생각해야겠군요 이렇게 말해도 제가 하는 것은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다시 생각하니 아무것도 안 하면 공범이 될 수도 있겠군요 우연이라도 공범은 되고 싶지 않아요^^


희선

가연 2013-11-15 17:38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날카로운 말씀을 해주셨네요ㅎㅎ

마지막 문장은 참 시적이다, 풋. 그렇게 생각안하시나요ㅎ
 
[우리는 왜 불평등을 감수하는가]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 가진 것마저 빼앗기는 나에게 던지는 질문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안규남 옮김 / 동녘 / 201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괴테가 쓴 책은 많지만, 나는 그다지 그의 저작을 접하지 못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이 일단 널리 알려져 있지만 나는 일부분만 읽고 끝까지 읽지는 못했다. 정말 읽고 싶었던 책은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 인데, 이 책도 일부만 읽다가 그만두고 말았다. 그러고보면 읽고 싶다, 라는 감정과 읽을 수 있다, 라는 행위 자체에는 상당히 큰 괴리가 존재하는 것 같다. 읽고 싶은 책일지라도 결국은 읽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하지만, 별다른 그런 감정이 없는데도 쉽게 읽히는 경우가 있다. 전자의 경우에는 평을 내릴 수 없고, 후자의 경우에는 적어도 책이라는 것은 읽히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라 보기에, 나로선 높게 평가할 수 밖에 없다. 이런 사례들 사이에서 읽고 싶은 책이고, 마지막장까지 넘길 수 있는 작품을 만난다면 정말 행운이라고 할 수 밖에 없으리라. 그리고 괴테의 수많은 작품들 중 나에겐 파우스트, 가 그랬다. 

 

파우스트의 얼개는 일목요연하다. 지상의 모든 지식을 얻은 파우스트는 절망한다. 그 지식을 얻으면 지금껏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가 될 수 있을 거라고 파우스트는 여겼었던 것 같다. 하지만 결국 지식을 얻은 후에도 그는 그 전과 동일하게 파우스트였다. 정령들은 그를 거부하고, 결국 그에게 눈독을 들인 것은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였다. 여기서 이 악마는 계약을 제시한다. '이 세상 모든 쾌락을 그대가 만족할만큼 안겨주마, 그 대가로 그대는 그대의 영혼을 바쳐라.' 파우스트는 코웃음친다. 흥, 너같은 악마가 나의 무한한 갈망을 채울 수 있을 것 같은가, 라고. 하지만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법, 밑져야 본전이라고 여기고 피의 계약을 맺는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순간이여 멈추어라, 정말 아름답구나, 라고 말할 정도로 현실에 만족한다면 내 영혼을 멋대로 하여도 좋다.' 그렇게 이 장대한 서사시는 막을 올린다. 이후의 전개에서 인간의 욕구를 대비시켜보면 파우스트의 행적이 명확해지는데, 성욕 - 파우스트는 난봉꾼처럼 순진한 처녀를 유혹하기도 하고, 헬레네를 자신의 아내로 맞아서 아이를 낳기도 한다. 권력욕 - 황제의 신하가 되어 높은 위치에 오른다. 재물욕 - 해안에 자신의 영지를 가진다. 등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런 생각을 가질 수도 있다. 우리는 욕구가 무한한지 무한하지 않은지는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쉽게 허무해지는 것은 사실이다. 마치 오래 쓰면 닳는 것과 같아서, 누구나 서있으면 앉고 싶고, 앉아있으면 눕고 싶을 것이다. 더 편해지기를 바라고, 상처를 받지 않기를 바란다. 따스한 것들에 안겨서 손하나 까닥하지 않고 살아가고 싶을 것이다. 나태함은 우리가 죽을때까지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죽지 않는다면 영원히 나태함을 추구할 것이고, 영원히 편하게 살고 싶어할 것이다. 그러니 어떤 쾌락의 역치에 다다른다면 결국 생물학에서의 실무율처럼 모두 반응하거나, 혹은 모두 반응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를 파우스트에 적용시키면, 과연 메피스토펠레스와 파우스트가 맺은 계약이 공정계약이었는지 의심스러워진다. 과연 메피스토펠레스가 이길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을까? 어떤 지고의 쾌락을 주더라도 반복된 쾌락은 결국 허무함을 낳게 될 것이고, 또다른 나태의 길로 접어들 것이니 말이다. 그런데 이런 허무함과 나태는 현실에 만족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저 싫증이 났을 뿐이다.

 

하지만 정말 낮은 확률을 뚫고 메피스토펠레스는 적어도 파우스트의 입에서 '순간이여, 멈추어라. 그대 정말 아름답구나.' 라고 말을 꺼내게 만들었다. (물론 신의 개입으로 영혼을 뺏기긴 했지만) 물론 그 수단은 메피스토펠레스 본인도 이해가 가지 않는 방법이었지만, 아무려면 어떤가. 목적만 이루면 끝이 아닌가? 하지만 우리는 저런 악마가 아니기 때문에 이 부분을 조금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파우스트는 어떤 순간에 만족한 감정을 느꼈나? 아니, 엄밀하게 말해서 어떤 순간에 만족할 거라고 장담했는가? 그것은 간척지 사업이었다. 그 사업이 끝나면 백성들이 모두 도움을 받고 더이상 자연의 변덕스러움에 피해를 입지 않아도 될 것이었다. 적어도 파우스트는 그렇게 생각하였다. 모두가 함께 행복을 누리며 즐기고 있는 순간, 그 순간을 꿈꾸며 파우스트는 멈추어라고 외친 것이다. 괴테는 왜 이런 순간을 지고의 행복과 쾌락이라고 설정했을까? 이유는 모른다. 하지만 나의 상상속에서도 어렴풋이 저 순간에 지고의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든다. 이런 지고의 행복 - 사람들 모두가 행복을 누리고 기뻐하는 순간 - 을 위해서 플라톤에서부터 마르크스까지 얼마나 많은 이상이 명멸했던가?

 

지그문트 바우만이 쓴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에서도 큰 얼개는 다르지 않다. 바우만이 쓴 이 조그만 소책자에서는 너무나 당연하고 이상적인 이야기들을 쓰고 있다. 누가 모르는가? 낙수 효과가 어떤 의미에서든 제대로 작용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누가 모르는가? 현대의 부의 격차는 그 옛날 전태일이 무전유죄를 외치던 때보다 몇 배는 심화되었다는 것을. 누가 모르는가? 사회에 깔려져 있는 전제들, 생명력을 획득하고는 사회를 똑같는 레일 위를 달리게 하는 그런 전제들을 배격하지 않는 한 방법이 없다는 것을. 바우만이 원하는 것은 이런 것이다. 지금의 불평등은 잘못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 그리고 바우만은 왜 지금 이렇게 이야기를 나서서 하고 있는가? 그건 바로 그가 인용한 이 문장에 집약적으로 정리되어있다. 끝났다. 내가 진짜 작가라면, 나는 전쟁을 막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바우만은 예견된 파국을 막기 위하여 비록 모두가 아는 주장이지만, 그 주장이 생명력을 가질 수 있도록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파국이 예견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일수도 있다. 마치 바우만이 우리가 너무 쉽게 사회 구조에 순응한다면서 그 원인으로 내세운 네 가지처럼 말이다. 경제 성장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인간들 사이의 불평등은 자연적인 것이다, 경쟁은 필요충분조건이다, 영구적으로 늘어나는 소비는 가장 효과적인 길이다, 처럼. 바우만은 방금 이야기한 네 가지가 너무나 쉽게 아무런 근거 없이 받아들여진다고 주장하며 분석하지만, 한편으로는 지식인들이 바라보는 '파국'은 지식인 스스로들에게는 아무런 증명도 없이 받아들여지는 경향도 있다. 바우만은 여기에 대하여 어떻게 이야기를 할까? 여기서 데카르트를 다시 가져온다. 데카르트의 영혼과 물질의 이원론이 여기서 적용되는 것이다. 영혼은 좋은 것이고 물질은 나쁜 것이다. 그렇기에 영혼을 가진 사람은 좋은 존재이고 물질로 이뤄진 동물은 나쁜 존재이다. 영혼을 가진 존재는 주체성을 가지고, 영혼이 없는 동물은 우리의 쓰임을 받는다. 이것이 확대되어서 주체성을 가진 존재에게는 모든 긍정적인 측면이 고착되게 되고, 주체성이 없는 존재에게는 모든 부정적 측면이 고착이 되버린다. 여기서 조금만 더 살펴보자. 오늘날 사회에서 주체성이 있는 존재는 어떤 존재인가?

 

오늘날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것은 이러니저러니해도 경제관계이다. 경제관계라는 것은 무엇인가? 생산과 소비가 주를 이루는 관계라는 이야기이다. 논란이 되었던 갑과 을 관계 모두 이런 경제관계를 기반으로 한다. 절대 왕권이 없는 이상 경제적으로 우위를 차지하는 사람이 더 주체성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눈을 부릅뜨고 살펴야 할 것이 있다. 소비자와 생산자 사이에 어떤 우위가 생긴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소비자와 생산자는 사실상 동등한 존재이다. 방금전 경제적으로 우위를 차지하는 사람이 더 주체성을 가진다고 말을 하였었는데, 소비자가 더 경제적으로 우위를 차지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 오늘날의 세계는소비자와 생산자 대부분 사이좋게 경제 지층의 아래에서 꿈틀거리는 세계이다. 모든 부는 상층부에만 집중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디서 우위 관계가 생길 수 있는가? 소비자와 물건사이이다.

 

바우만의 말을 빌려오자. '고객과 소비자가 상품과 소비재에서 기대하는 것은 자신들의 필요와 욕구의 충족뿐' 이라고 한다. 바로 이부분에서 문제가 드러난다. 고객은 실제로 자신도 다른 존재의 필요와 욕구의 충족만 채울 수 있는 도구로 쓰이면서도 판매자를 소비재의 위치로 끌어내린다. 상대를 소비재의 위치로 끌어내리면 소비자의 입장에서는 이득이 생긴다. 먼저 주체성이 생긴다. 방금 언급한 확장된 데카르트적인 이분법을 따르면 모든 긍정적 면모가 주체성에 고착이 된다. 그리고 물건에 우리는 무관심하거나 무의미하게 대할 수 있다. 상대가 인간이라면 그렇게 할 수 없지만 상대가 물건이라면 그런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인간적 유대가 취약' 하게 되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유대에서 더 나아가 '사랑'도 힘들어지게 된다. 사랑은 가시밭길이다. 칼릴 지브란은 그의 저서 예언자, 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사랑은 그대에게 왕관도 씌우지만 십자가도 안겨주리라고.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왕관은 원하면서도 십자가는 피하려고한다. 결국 자신의 일방적 감정만 충족시킬 수 있는 소비자, 소비재 관계를 선호하게 된다. 상대를 물건의 위치로 내려앉혀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유대가 약해지고 '사랑'이 사랑이 아니게 된다면 이 사회에는 어쩔 수 없이 파국이 올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오늘날 사회는 위기에 빠져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앞서 말한 것 처럼 바우만이 진짜 사회학자라면 파국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예견된 파국을 막지 못하였다고 하여 그가 사회학자가 아니라고는 할 수는 없다. 단순한 논리학적인 말장난같지만 그것과는 다르다. 그가 진짜 사회학자가 되려면 우리의 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의 의견을 조금씩 따르는 사람들, 무비판적인 수용이 아니라 그의 의견을 합리적으로 받아들이는 그런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바로 우리가 될 것이다. 이런 힘이 모여서 바로 파국을 막을 수 있는 것이다. 파국의 원인을 알았으니까 그 해결책도 간단하다. 주체, 객체 관계 등의 이분법적인 사고를 탈피하여야 하는 것이다. 경제적으로 상층부에 있는 일퍼센트들에 대해서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 일퍼센트는 제외하고서라도 적어도 우리끼리는 사랑을 배우고 상대를 소비재로 격하시키지 말아야 할 것이다. 상대를 도구로 격하시키는 본인 스스로도 정작 다른 사람에 의하여 도구로 격하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가 좋아서 서로를 그렇게 객체화시키는가? 그렇지는 않다. 사회의 구조에 문제가 분명 있기 때문에 그렇다. 자본주의의 폐단, 특히 팔 수 없는 것을 팔게 된 현대 사회의 문제는 이미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 등을 통하여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구조탓으로 돌린다면 늦어지게 된다. 우리는 지금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을 하여야 한다. 이 책의 저자 바우만이 소리를 높이는 것 처럼 말이다.

 

가끔 나는 경제적으로 일퍼센트를 차지하는 그런 부유한 사람들을 생각해보곤 한다. 솔직히 부럽다는 생각이 들때가 많다. 내가 조금만 더 부유했다면 책을 주문할 때 굳이 오만원씩 끊어서 마일리지 조금이라도 더 받으려고 그렇게 고심할 필요가 없었을텐데, 와 같은 사소한 고민에서부터 조금만 더 자유롭게 돈을 쓸 수 있다면 좀 더 자유롭게 살 수 있을텐데, 와 같은 생각들까지도 한다. 그러다가 순간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한다. 더 자유롭게 돈을 쓸 수 있으면, 더 자유롭게 살 수 있다니. 수많은 옛날 경전에서 이야기하지 않는가, 재물은 스스로를 얽어맬 뿐이다, 라고. 하지만 오늘날 현대사회에서는 더 많은 돈을 가지면 더 자유롭게 살 수가 있으리라고 대부분 떠올리게 된다. 물론 어느 사람들은 이야기할 것이다. 이 돈을 벌고 또 벌게 하기 위하여 자신들이 얼마나 바쁘게 살고 있는지. 하지만 그런 계층을 넘어서 돈이 돈을 벌어다 줄 경제적으로 더 상위층을 보면 자유로울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해본다. 그리고 그들처럼 나도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가져보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생각다음에 따라오는 것은 마치 포도를 올려다보는 여우처럼 늘상 이런 질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행복할까? 사실 잘 모르겠다. 행복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파우스트, 에 따르면 그들은 지고의 행복은 맛보고 있지 못할 것이다. 이런 생각이 마치 신포도라고 합리화하는 여우와 비슷한 측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파우스트의 말을 빌려 이렇게 되뇌게 되는 것이다. 무한한 곳에 군림하는 그대들이여, 함께 모여 지내면서도 영원히 외로운 당신들이여.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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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3-10-21 01:57   좋아요 0 | URL
글 제목이 슬퍼요

돈이 아주 많은 사람은 더 갖기 위해 일을 할 것이고, 누가 이 돈을 가져가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을 늘 할 거예요 많으면 다른 사람한테 나눠주면 좋을 텐데, 그게 그렇게 쉽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어떻게 해서 갖게 된 것인데, 하는 생각이 들지도... 그러니까 돈은 적당히 있는 게 좋습니다 자신이 움켜쥐려는 사람도 있지만 사회에 다시 돌려주는 사람도 있어서 다행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같은 사람으로 대할 수 있어야겠군요 우리가 서로를 끌어내리지 않는다면 좋겠습니다


희선

가연 2013-10-22 12:49   좋아요 0 | URL
저는 붙이면서 멋있는 제목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닌가봐요? 하하하하하ㅠㅠㅠ 파우스트를 이번에 다시 읽어가면서 이 구절이 너무 맘에 들어서 써야지, 라고 생각을 하고는 이렇게 써버렸네요.

여담이지만 돈이 아주 많으면 누가 돈을 가져가든지 말든지.. 할 것 같네요, 풋. 사람을 목적으로 대하는 일은 정말 쉽지 않는 것 같아요

2013-10-21 01: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0-22 12: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3-10-22 09:06   좋아요 0 | URL
책 제목이 너무 딱딱하고 어렵게 느껴져서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이 리뷰에서 '소책자'란 단어가 보이지 뭐에요. 그래서 검색했더니 100쪽이 조금 더 넘는 책이네요. 그렇다면 한 번 읽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져요. 무엇보다 이 얇은책이 가연님에게 이토록 긴 리뷰를, 별 다섯을 불러냈군요.

상위1프로라면, 당연히 마일리지 때문에 5만원씩 끊어서 주문하지 않겠지만, 제가 곰곰 생각해보니, 상위 1프로라면 주문을 직접 할것 같지 않은데요. 비서 3이나 비서 4에게 시켜서 이책과 이 책 사다 서재 내 책상에 올려둬요, 라고 하지 않을까요? 하하하하. 저로서는 실현 불가한 얘기네요.

저는 감당이 안될것 같아서 상위1프로까지는 쳐다보지를 못하겠어요. 만약 애초에 그렇게 태어났다면, 아 이 돈이 그냥 다 내 돈인가보다 하겠지만 없었는데 생긴거라면 제가 그 돈을 감당할 수 있을까요? 어쩌면 이 역시 신포도를 쳐다보는 여우의 마음인지도 모르겠어요.

가연 2013-10-22 12:53   좋아요 0 | URL
네, 분량이 얼마 안되는데 빨리 읽혀지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물론 제가 그때 딴생각들을 하고 있어서 그랬었는지도ㅎㅎ 별 다섯개는 좀 많이 고민을 했는데, 네개는 아닌 것 같아서.. ㅋㅋㅋ 제가 또 별 다섯개는 잘 안주는 편이긴 한데ㅎㅎㅎ 네 개는 인플레가 심하지만요, 하하하하하하하하..

오, 다락방님의 말씀이 더 옳아요, 비서 3에게 시킬 듯 하네요ㅠㅠㅠ

맥거핀 2013-10-23 00:30   좋아요 0 | URL
이 다음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현재와 같은 자본주의는 거의 끄트머리에 다다른 것 같기도 합니다(다만 이 다음이 파국일지, 아니면 더 극심한 무엇일지는 모르겠지만요). 파국이 가까이 시작되는 때는 '차라리 파국이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그것을 원하지 않는 생각의 비율을 넘어설 때이겠지요. 오늘 다큐 하나를 봤는데, 그런 말이 나오더군요. 잃을 게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무엇이든지 한다...

그러고보면 파국이 오지 않기를, 그럼으로써 이 세계가 영원히 이렇게 지속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그 위의 1%의 사람들일텐데, 그들은 도리어 이 파국을 앞당기고 있으니..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연 2013-10-31 08:46   좋아요 0 | URL
요즘에 개도국에서의 다국적기업의 현황, 이랄까, 그런 류의 다큐멘터리 소식을 들은 적 있는데 많은 점을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 다국적기업이라는 게 자본주의의 진화의 정점에 다다른 그런 생물체 아닌 생물체라고 볼 수 있을것인데.. 예견된 파국은 언젠가 오기는 할 테지만.. 개도국들이 거의 전멸할때쯤 오지 않을까, 싶네요. 이들의 생명이 희생물로 바쳐져 유예되었다고나 할까..

다만 다국적기업도 다국적기업나름대로 희생자의 목숨을 살려두려고는 하겠죠. 그게 더 효율적일테니.. 바로 이 부분에서 말씀하신 1퍼센트의 아이러니가 발생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의미에서 볼때 파국보다 더 심한 무엇인가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합니다.

2013-11-01 01: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1-04 18: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인기없는 에세이]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인기 없는 에세이 - 지적 쓰레기들의 간략한 계보
버트런드 러셀 지음, 장성주 옮김 / 함께읽는책 / 2013년 8월
평점 :
절판


 

 

 

  버트런드 러셀의 책 중에서 가장 많이 읽혔다는 이 인기 없는 에세이, 의 목차를 읽어내려가면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런 생각이었다. '이 모든 게 러셀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지?' 러셀의 이 책은 정말 수많은 영역을 다루고 있다. 철학, 정치, 종교, 억압받는 자, 인류에게 해를 끼친 관념과 이득을 준 관념 등등으로 말이다. 그러나 사실 이 모든 것은 러셀과 그다지 관련없을런지도 모른다. 서양철학사, 로 먹고 살만한 수입을 가지게 된 러셀, 여러 여성과 염문을 뿌렸던 러셀, 수학과 논리학 분야에서 한 획을 그은 러셀. 결국 러셀이 살고 있는 경계는 그정도이다. 하지만 러셀에게 이런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비판받을 일일런지도 모르겠다. 이런 식으로 말이다. '아니, 그러면 이 모든 일에 대해서 우리는 입이나 다물고 가만히 있어야 한단 말이야?' 물론 가만히 있으면 안된다. 우리는 정치, 사회, 그리고 경제 등에 대해서 자유롭게 자신의 신념을 말할 권리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러셀 본인이 강조하듯이) 그 신념이 그릇된 근거를 바탕을 하고 있거나, 설령 제대로 된 근거(라고 짐작되는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절대 광신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놓아두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사실 이 책은 (러셀 자신은 부인하고 싶겠지만) 이미 러셀이 가지고 있는 이름에서부터 오는 후광, 그리고 그 자신의 활동과 업적에서 오는 권위 등으로 인하여 '여러 가지에 대하여 말하고 싶은 사람들' 에게 정말 적절한 '제대로 된 근거(라고 짐작되는 것)'를 제공해준다. 이런 제대로 된 근거를 제공받은 사람은 탄탄한 이론을 세우게 된다. 러셀은 이 책에서 지적한다 : 단단한 이론을 제공받은 사람은 자신의 믿음을 더욱 구체화시킨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헤겔 철학에 대한 러셀의 비판이다. 사실 나로서는 헤겔과 라캉에 대하여 좋은 감정이 없기에, 정확히 말하면 근거가 없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이 둘에게 철학적으로 빚을 지고 있는 지젝도 좋아하지는 않는다.) 헤겔 철학에 대한 러셀의 비판을 읽으면서 아주 좋은 비판이다, 라고 마음속으로 중얼거리기까지 했지만, 몇 몇 부분에 대하여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수가 없다. 헤겔의 저작인 행성궤도론에 대한 러셀의 비야냥거림은 아주 적절하다. 하늘에 행성은 7개밖에 존재하지 못한다는 헤겔의 행성궤도론에 대하여 러셀은 뒤에 아리스토텔레스까지 엮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여자의 치아의 개수와 남자의 치아 개수에 대하여 이론을 세웠다.) 이야기한다. 직접 눈을 뜨고 관찰했다면 그런 이론을 세우지는 못할텐데, 라고. 하지만 이 비야냥거림이 적절하다고 해서 헤겔 철학 전체를 비판하는 것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변증법에 대하여 너무나 명징한 문장을 가져와서 '자, 이게 헤겔철학의 정수임에 다름아니다' 라고 이야기하지만, 이는 허수아비를 만들어 공격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변증법이 왜 엉터리인가? 러셀은 변증법과 역사의 관계에 대한 제대로 된 근거를 헤겔이 설명하지 못했다, 고 이야기하지만 러셀 본인도 왜 그게 마르크스가 얻은 '가장 터무니 없는 부분' 인지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러셀은 헤겔의 철학을 읽으면서 '뭔가 있을런지도 모른다' 라고 여겼었다가 수학철학에 대하여 엉터리인 내용을 언급하였다는 것을 깨달았다면서 '헤겔 철학이라는 독' 에서 벗어났다고 한다. 하지만 한 사유를 말하는 사람이 일부가 거짓이라고 해서 전체를 두고 다 잘못된 거야, 라고 비판받아야 하는가? 나는 헤겔의 철학에 대하여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고, 러셀 처럼 '무언가 심오한 뜻이 있을런지도 모른다' 라고 생각조차도 해본적 없다. 하지만 이는 내가 어쩌면 충분히 깊게 헤겔 철학을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기는 일일지 모른다. 내가 시간을 들여 충분히 헤겔 철학을 공부한다면, 그리고 그의 모든 저서를 깊게 분석한다면 어쩌면 정말 심오한 뜻이 있을 지도 모른다. 적어도 나는 (만약에 내가 헤겔 철학을 접해야 할 일이 생긴다면) 그렇게 여기고 접근하고 싶다. 그리고 이런 태도가 경험론자이자 합리적인 존재가 되려고 노력하는 러셀이 취했어야 하는 태도일런지도 모르겠다.

 

칸트에 대한 러셀의 말도 당혹스러운데, 물론 대학에서 윤리학과 철학을 분명히 공부했기에 나보다 더 많이 러셀이 칸트 등에 대하여 사유를 했었을 것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문장은 보아넘기기 어렵다. '실천 이성에 따르면 의지는 자유로운 것이다. 이러저러한 행위를 할 능력이 내가 없다면 당신은 그런 행위를 해야 한다, 라는 명령이 그릇된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수학적으로 집합을 그려보자.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을 A집합이라고 하고, 그런 행위를 하는 사건을 B집합이라고 두자. 그리고 자유의지를 C집합이라고 두면, 위 문장에 따르면 A집합은 B집합을 포함한다. 그런데 이 A집합과 C집합의 관계는? 이를 생각해보면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된다.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만큼만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능력만큼만 자유로울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이 말 자체는 당연한 이야기지만 칸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런 것이 아니다. 칸트가 원하는 것은 정언 명령을 우리가 인식하는 것 자체가 자유의지의 표상이라고 우리가 깨닫는 것이다. 후회감, 등으로 말이다. 우리가 거짓말하면 후회를 느낀다,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우리가 그런 것을 느낀다는 것이 초월적 자유의 편린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초월적 자유에서 칸트는 신 등의 개념을 가져온다. 러셀의 저런 사고과정에서도 신이 결국에 등장하기는 하겠지만 두 신에 이르는 길은 전혀 다르다. 물론 나는 러셀이 칸트에 대해서 이해가 부족하다고 여기고 싶지는 않다.(인기작 러셀의 서양철학사, 를 보면 전혀 이해가 부족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반 독자를 대상으로 책을 쓰다보니 쉽게 풀어서 쓰게 되고 결국 오류가 생겼다고 믿고 싶다. 아니, 도리어 이게 러셀의 심정에 관한 더 정확한 문장일지도 모르겠다.'철학자들은 늘 서로 다른 관념을 가지고 싸운다. 그런 관념을 일반인들에게 적당히 끼워맞춰서 이야기한다고 해서 일반인들에게 무슨 영향이 생기겠는가?' 

 

이런 러셀의 태도가 한편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또 아니다. 이 책애서 러셀은 이야기한다. 거칠게 말하면 먹고 살기도 바쁘고, 우리가 사는 이런 문화 수준을 유지하기 위하여 좁은 영역의 전문가들을 많이 배출하여야만 하지만, 그런 좁은 영역의 전문가들과 일반인들을 위하여 전반적인 정도의 수준의 교양은 필요하다, 라고 말이다. 원 글은 교사의 중요성(저런 전반적 수준의 교양을 갖추기 위하여 교사의 역할이 크다)에 관한 글이었지만, 이렇게 잘라서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일반인들은 넓게 어느 정도만 알면 된다. 굳이 깊게 파고들어서 명사와 형용사, 부사의 미묘한 차이에 따른 철학의 변천사 등을 알 필요가 있는가? 라고 말이다. 실제로  그런 것을 안다고 하여 그다지 도움되지는 않는다. 굳이 채우는 거라면 지적 허영정도일까? 그리스 로마 신화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교환양식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보다 나을 것 같다. 서양철학사, 서문에서 러셀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철학은 No man's land, 과학과 종교 사이의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라고 말이다. 사실 그렇기 때문에 철학이 매우 애매하기도 하다. 러셀의 일대기를 그린 만화 로지 코믹스, 를 보면 러셀이 어떻게 논리학자의 길을 걷게 되었는지를 알려준다. 이 철학자는 이렇게 말하고, 저 철학자는 저렇게 말해. 철학도 수학처럼 계산해서 어떤게 답이다, 라고 알려주면 좋을텐데, 라는 마음을 품고 있던 러셀은 라이프니츠를 만나게 된다. 라이프니츠가 그런 방법을 고안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라이프니츠에 대하여 깊은 연구를 한 것 같다. 오죽하면 서양철학사, 서문에서 이렇게 이야기하겠는가 '라이프니츠를 제외하고는 다른 철학자들에 대하여 나보다 더 많이 아는 사람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렇다. 라이프니츠를 '제외' 하고는.

 

특히 헤겔에 대하여 공격적 태도를 취하는 것은 이론이 논리적 기반인 변증법을 활용을 하고 있다는 점때문이리라. 논리적 기반을 바탕을 하는 이론은 러셀이 책에서 지적하듯이 '마음뿐만이 아니라 머리까지 사로잡는다.' 그것의 결과는? 광신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그 중심이 되는 관념, 역사가 변증법적인 논리를 따라 발전해나간다, 를 받아들인 마르크스주의는 (이론적으로야 어떻든) 결국 소련을 낳았다. 그리고 소련이 어떤 국가였지는 굳이 여기서 더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런 건 러셀이 라이프니츠와 그의 제자 불Bull이 그들이 고안한 방식으로 옳고 그름을 계산했었다면 당장에 그르다, 라고 나왔을런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풍선에 김을 빼는 소식이겠지만, 그런 방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러셀의 저런 태도가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런 러셀의 공격이 그의 권위를 빌려 '헤겔은 모조리 엉터리야, 칸트도 초등학교때나 배우던 것 (사실 이 부분에 러셀은 유년기의 도덕률, 이라고 표현하는데 러셀의 표현에 동의하기는 한다. 진, 선, 미는 우리가 초등학교때 배우잖는가.) 을 이야기하려고 하네, 우린 초등학교 나왔거든?' 라는 식으로 또다른 광신을 낳게 된다면 정말 끔찍하지 않겠는가?

 

다른 분야에 대해서 러셀이 말한 것도 좀 당혹스러운 부분이 있다. 뭐, 러셀이야 미국이 지금 이런 나라가 되리라고는 몰랐을테니 -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쉽사리 자신의 시대를 초월하지는 못한다 - 어느 정도 감안을 한다고 하더라도, 지나치게 미국에 대하여 편향적 의견을 가지고 있는 것 처럼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국제 정부를 만들자니. 그것도 미국을 중심으로 소련을 밀어내면서.  러셀은 당시에 드러낸 칼날만 날카롭다고 여겼던 것 같다. 그만큼이나 무서운 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당하는 중독인데도 말이다. 오늘날 미국의 헤게모니를 보면서 러셀은 그때 내가 정말 잘못생각했구나, 라고 여기지 않을까? (뒤에 역자가 친절하게 러셀은 '평생 후회했다' 라고 적어주었지만 말이다.) 핵무기는 정말 잔인한 무기이지만, 동시에 일종의 억지력으로 작용한 것도 사실이다. 그 옛날 개틀링 박사가 개틀링 건을 만들면서 '이 무기를 만들면 모든 사람들이 손을 들고 떨거야, 그럼 이제 전쟁은 안녕이겠지?' 라고 여겼던 순진한 꿈을, 이 핵무기가 이뤄준 것이다. 쓰면 모두가 죽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억지력은 사람들을 이렇게 이끈다. 마치 핵무기가 없는 것 처럼 삶을 살아가도록 말이다. 그런 속담이 있지 않은가. 항상 가까이 있지만 모른체 하는 것은? 죽음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상실의 시대, 에서 이렇게 말한다. '죽음은 삶의 대극으로 항상 우리 곁에 존재한다.' 그런데 이렇게 삶을 살아가다보면 먹고 사는게 가장 큰 일이 된다. 그러면 이제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아, 먹고 사는 것을 무기로 하면 되겠구나, 라고. 그리고 이는 '자본' 의 이름으로 이를 무기화된다. 이것이 은밀한 독이 되는 것이다.

 

러셀의 경험주의적 태도는 배울만하다. 어떤 사례에 대하여 의견을 가진다고 하자. 그러면 우리는 그 의견에 대하여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이러한 근거가 있는 한 이 의견이 다른 의견에 비하여 더 옳다, 라고 여겨야 된다. 하지만 러셀 본인이 이런 경험주의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가? 에 이르면 사실 고개를 갸웃거릴수 밖에 없다. 이런 경험주의적 태도는 양비론과는 다르다. 그래서 비교적 명확한 입장을 취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명확한 입장이 다른 입장을 논박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항상 본인의 의견이 틀릴 가능성이 존재하는데 어떻게 다른 입장이 그르다, 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러이러한 일들로 인하여 이 부분이 더 옳다, 라고만 결론을 내릴 수 있을 뿐이다. 예를 들어 이 책에서 신에 대하여 러셀이 언급하는 부분들을 보자. 수녀들은 목욕을 할 때 옷을 입고 목욕을 한다고 한다. 러셀이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누가 본다고. 그러자 수녀들은 대답한다. 아니, 하나님이 보시잖아요? 그리고 러셀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수녀들은 신을 무슨 관음증 환자로 여기는 건가, 라고. 여기서 유추되는 결론은 다음과 같다. 당연히 신은 관음증 환자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수녀들은 왜 저렇게 목욕하는가? 이런 식으로 신이라는 관념을 인정하면 걸리는 관습이 너무 많다. 이러한 근거들을 종합해볼때, 신은 없을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여기까지를 유추해냈지만, 만약에 경험론자라면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신은 없다' 라고 결론을 내리지는 못할 것이다. 증거가 없으니 받아들이지못한다, 라는 말은 양날의 칼이다. 증거가 없으니 일축해버릴수도 없다.

 

이렇게 문제점들이 생기는 이유는 러셀 본인의 생각과 태도가 불일치하는 부분도 있겠지만, 이 책 자체가 오랫동안 써왔던 글들을 묶어서 출판했다는 것에 기인할지도 모른다. 사람의 생각은 (근본적 심성이라던가, 신념, 사상은 바뀌지 않을지 모르나) 조금씩 깎여나간다. 어제는 신은 있다, 라고 외치던 사람이 오늘은 안 외치고, 그다음날은 신이 있을까?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다. 마찬가지로 어제는 신이 없다, 라고 말하던 사람이 오늘은 신이 있을까? 라고 이야기하고 그 다음날은 신은 있다, 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런 '깎여짐' 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얻어진 일종의 후천적 관념일 경우에 두드러진다. 갓 태어난 아이가 신에 관해서 무엇을 알겠는가? 정치에 대해서 무엇을 알겠는가? 자유에 대해서 무엇을 알겠는가? 그런 의견들은 항상 '깎여질 수 있다' 는 말이다. 러셀의 초기 글에 비하여 이후의 글들은 약간씩 생각이 바뀐 것이 있을지 모른다. 그런 글들을 한 권의 책으로 묶어놓았으니 오류가 생기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애초에 이 책이 생긴 이유가 상업적이니 말이다. 서문에 대략 이런 내용의 글이 있다. '러셀의 책을 간행하던 출판사는 사실상 러셀이 무슨 주제에 관하여 쓰든 비평과 판매에 성공을 거둔다는 것을 확인하고 아직 안 낸 글이 있다면 묶어서 책으로 만들자 하였다.' 그 결과물이 바로 이 '인기 없는 에세이' 인 것이다. 결국 우리는 이 책에서 다른 것을 주목할 것이 아니라 러셀의 핵심 그 자체를 노려야 한다. 그 외에는 모두 결국엔 깎일 이야기들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러셀의 핵심은 무엇인가? 러셀이 살아가면서 절대로 바뀌지 않을 그 신념, 사상, 심성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이 책이 아니라 다른 책들을 참조하여야 할 것인가? 아니다.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 그것은 명징하게도 이 책에 적혀있다. '눈 앞의 비교적 확실한 악을 내버려두고 미래의 비교적 불확실한 미덕을 택해서는 안된다.' 라는 말이다. 몇 번이고 재반복되며 이 책에 나타나는 저 주제가 바로 러셀 본인의 신념이자 절대로 깎여나가지 않을 심성이다. 그런데 어째서 러셀은 이런 신념을 품게 된 것일까? 그것은 러셀 본인의 심성과 관련이 있다. 어린 시절 자살을 하고 싶었던 러셀을 살게 해준 것은 유클리드 기하학을 더 알고 싶다, 라는 심정때문이었다. 논리적이고 완전한 세계, 그 세계를 수학은 이루어주었고, 그에 힘입어 그는 수학 원리를 쓰고, 논리학자가 되었다. 하지만 그런 수학의 세계는 결국엔 불완전한 세계였었고, 사실일지도 혹은 거짓일지도 모르는 추측을 바탕으로 위태롭게 세워진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 체계였었다. 바로 여기서 러셀은 그가 원하는 완전한 세계라는 것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겠지만, 그럼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 눈에 보이는 비교적 명확한 모순을 제거해나간다면 결국엔 무엇인가에 도착할거라고. 모든 것이 그와 '상관이 있게' 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 있어서 일종의 방향이 되어준 경구다. 생각해보면 러셀의 삶은 저 주제의 실천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이다. 전쟁이 위험하니 반전운동에 나선 것이다. 공산주의랍시고 사람을 굶겨죽이고 탄압하니까 반대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말만으로도 이 책은 읽을 가치가 있다. 

 

하지만 이것도 저것도 기억하기 싫은 사람이라면 러셀의 삶이 어떻고, 사상이 어떻고 다 잊어도 좋다. 그러나 러셀이 남긴 이 말만은 가슴에 품기를 바란다 : '인도주의를 기억하라,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무시하라.'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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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3-10-10 00:54   좋아요 0 | URL
지적 쓰레기들의 간략한 계보, 이런 말을 붙이다니... 본래 제목에는 없는 말을 붙인 것인 듯해서 찾아보니 책 목록에 나와 있네요 본래 제목은 쉬워서 영어를 잘 모르는 저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런 것이 생각나는군요 나중을 위해 지금 나쁜 일이 일어나도 눈감는 사람과 지금 바로 앞에 일어나는 나쁜 일을 없애려는 사람, 결국 처음 사람도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을 막아야 한다로 돌아섭니다

러셀은 완전한 세계가 없다고 절망하지 않았군요 절망하는 사람도 있잖아요


희선

가연 2013-10-10 20:43   좋아요 0 | URL
ㅎㅎ 러셀이 정말 완전한 세계를 목표로 살아갔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냥 제 추측에 지나지 않죠, 풋. 하지만 러셀이 논리학 그리고 수학을 정말 좋아하였던 것은 사실이니깐.. 뭐랄까, 수학의 체계를 완전히 반석 위에 올릴 수 없다, 는 것이 증명되었을 때 눈을 돌려서 수학에서는 실패했지만 세상에서라도 모순을 줄여보겠다, 라고 생각한다면 좀 앞뒤가 맞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는 합니다.

러셀의 현대적 후계자라고 볼 수 있는 촘스키의 경우엔 러셀과 아인슈타인을 놓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모두 반전운동에 뛰어들었지만 아인슈타인은 편지를 써놓고 다시 연구실 안에서 물리학 연구에 뛰어들었고 러셀은 거리로 걸어나갔다고. 그래서 아인슈타인이 그렇게 불멸의 명성을 가지게 된 것이다, 라고 이야기를 하기도 하던데.. 저야 물론 이 말에 동의하지않지만... 아하하하하하하하하

희선 2013-10-11 01:17   좋아요 0 | URL
수학은 딱 맞아 떨어지기 때문에 좋아한다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실제로는 꼭 그렇지도 않군요 수학을 왜 좋아하는지를 말한 사람도 더 깊이 공부를 해나간다면 그것을 알게 되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도 처음으로 알았습니다 수학 체계, 이런 것은 잘 모르지만... 러셀 조금 재미있는 사람 같기도 합니다

반전운동을 하기 위해 거리로 나가는 사람도 있어야 하지만, 아인슈타인처럼 자기가 할 일을 하는 사람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는 자기 자리를 잘 지키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제가 앞에 나서서 무엇인가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군요


희선

가연 2013-10-16 13:04   좋아요 0 | URL
ㅎㅎ 수학은 딱 맞아 떨어지지만 그 기반은 불안하다고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아인슈타인을 지지하기에... 하하하하하하

마립간 2013-11-02 13:01   좋아요 0 | URL
위 가연님의 글을 처음 게시 때 읽기는 읽었는데, 리뷰 당선작으로 선정되어 다시 읽게 되었습니다. 솔직히 제가 모르는 부분을 언급하셔서, 반론보다는 의문점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 떠오르네요. (몇 가지는 이미 고민하고 있던 것이구요.) 조금 더 생각해 보고 제 서재에 글을 올리겠습니다. 그 때 링크하려 해서 미리 양해의 말씀을 구합니다.

가연 2013-11-04 18:06   좋아요 0 | URL
저는 처음에 당선작이라고 해서 벌써 이달의 당선작이 발표되었나, 했더니.. 신간평가단 당선작이군요. 굳이 양해하실필요 없이 나중에 의문점 생기셨을때 댓글달고 링크하셔도 되는데.. 다만 제가 양해드려야 될 것 같은데요.. 요즘 제 서재도 잘 안들어오는 편이기도 하고... 요즘 마음이 좀 심란하기도 하고.. 제가 그렇게 많이 알고 있지도 않기에 답을 제대로 못해드릴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마립간 2013-11-08 08:15   좋아요 0 | URL
제 글을 이 글에 직접 먼댓글로 링크하지 않고 본문에 주소로 인용을 표시했습니다. 내용상 반론?이 아니기 때문에 시간 날 때 읽어주시고 내용상 오류가 있으면 면 지적해 주세요. 감사하겠습니다. (오늘 8일 글 말고 다음주에 2편 더 있습니다.)

가연 2013-11-11 19:34   좋아요 0 | URL
답변을 길게 썼습니다.. 졸지에 푸념이 섞여버렸네요.
 
[우리는 왜 자신을 속이도록 진화했을까]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우리는 왜 자신을 속이도록 진화했을까? - 진화생물학의 눈으로 본 속임수와 자기기만의 메커니즘
로버트 트리버스 지음, 이한음 옮김 / 살림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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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자신을 속이도록 진화했을까?

 

 

 

  한 때 난 황우석 박사를 매우 좋아했었다. 어쩌면 소위 말하는 황빠, 라는 범주에 조금이나마 발을 걸치고 있었던 것 같다. 모두가 알다시피 황우석 박사는 서울대 수의대의 교수였었고, 젖소 영롱이로 그의 커리어를 시작했다. 그렇게 체세포 복제를 통하여 영롱이를 만들어낸 황우석 박사는 인간 체세포를 이용한 배아줄기세포에 도전하며 우리나라의 과학계에 한줄기 빛을 던져주었다. 당시 침체된 우리나라의 분위기에서 세계 유수의 과학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과학자가 나왔다니, 그 당시 나는 정말 꿈을 꾸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드디어 과학 분야에서 노벨상을 타는 사람이 나올 수도 있겠구나, 라며. 황우석 박사가 그의 배아줄기세포 관련 논문을 실은 사이언스지는 매우 유명한 학술지이다. 굳이 더 말을 덧붙이지 않아도 될 정도로 말이다. 이런 사이언스지 등의 학술지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들은 노벨상을 탈 가능성도 그만큼 높아진다. 게다가 논문의 내용은 여간한 논문들과는 실용성 측면에서 차원을 달리하는 내용이었으니 (줄기세포의 복제는 정말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 삶에 도움을 줄 수 있다.) 나는 그를 지지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어쩌면 나는 그때 미쳐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대한민국이 그에게 모두 미쳐있었다.

 

하지만 보름달도 차면 기우는 법이다. 황우석 박사는 그의 절정에 있을 때 동시에 몰락을 준비했다. 2005년, PD수첩은 황우석 박사 연구팀의 난자 채취과정이 비윤리적이라는 내용의 방송을 내보내었다. 그 방송은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던 최고의 과학자의 연구를 방해했다는 죄목으로 욕을 매우 많이 먹었고, MBC당국에서조차 PD를 경질시키는 동시에 대국민사과를 방송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 또한 당시에는 PD수첩이 말도 안 된다고 여겼다. 말도 안 돼, 감히 황우석을 건드려? 그래, 꼭 이런 기분이었달까. 물론 지금 와서 판단해볼 때, 말도 안되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지금 내가 그때 일을 떠올려보면 정말 부끄러울 따름이다. 굳이 한 가지 다행이라면 어느 인터넷 사이트에도 황우석에 대한 옹호글을 올리지 않았다는 점 정도이려나. 황우석 박사의 쇼는 결국 미즈메디 노성일 원장의 폭탄발표로 끝이 나고야 말았다. 체세포 줄기세포는 존재하지 않는다, 라고.

 

그 다음에는 솔직히 기억이 제대로 나지 않는다. 아니, 잊어버리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PD수첩 2차 보도는 보는 둥 마는 둥했었고 서울대에서 자체 조사한 결과만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서울대에서 자체 조사한 결과는 더 충격이었다. 앞서 말한 영롱이마저도 아무런 증거가 없었던 것이다. 정말 복제를 통해서 만들어진 소인지, 아니면 어딘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인지. 정말 눈을 돌리고 싶었고 그리고 정말로 눈을 돌렸다. 다만 내 머릿속에 끝까지 남은 것은 그나마 황우석 박사의 줄기 세포 일부가 처녀생식으로 발생되었다고 추측된다는 것. 그래, 황우석 박사가 완전히 거짓말은 한 것은 아니야, 정말 아깝다, 처녀 생식도 정말 대단한 발견인데, 그걸 그대로 말하지 않고, 왜 이렇게 부담감에 시달려서 거짓 논문을 썼을까, 라고 나는 계속 되뇌었던 것 같다.

 

프레시안 북리뷰에 보면 당시에 진중권이 황우석 지지자들에게 공격을 받았던 사건에 대해서 (진중권은 황우석 지지자들 때문에 감금당했다) 이렇게 말했다. 일부를 인용해보겠다.

 

내가 진짜 상처를 받은 것은 그때가 아니라 훨씬 전이었다. 거의 모든 국민이 황우석을 신봉하고, MBC의 광고를 끊어버리고, 황우석 비판자들에게 집단적으로 언어적 폭력을 가하던 상황. 솔직히 그때 무서웠다...(중략)... 왠만한 욕에는 눈하나 깜짝하지 않는 나지만 그때 퍼부어진 욕은 내적으로 감당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진중권은 하나의 사례를 들며 이런 의문을 던진다.

 

우리 프로그램의 청취자 게시판에 올라온 욕설 중에는 나와 절친했던 학교 후배가 제 실명을 걸고 써놓은 것도 있었다. 도대체 사람들이 왜 갑자기 이상해진 것일까? 그때 나는 처음으로 내 주변의 사람들이 무섭다는 생각을 했다.

 

도대체 왜 사람들이 갑자기 이상해진 것일까? 이 질문에 나는 오랫동안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몇 년 전에야 겨우 대답을 조금씩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대답이 늦어진 이유는 간단하다. 나 또한 ‘이상한’ 사람들 속에 속해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경험은 나에게 어떠한 우상도 만들지 말라, 라는 교훈을 전해주었다. 결국 이런 말이다. 우리는 대부분의 경우 감정적으로 이미 결론을 내려놓고 있다. 예를 들어 내가 A라는 글에 대해서 읽었다고 하자. 그 후에 A에 대하여 찬성, 혹은 반대의 의견을 내놓으라고 요청받아서 의견을 내놓았다고 가정한다면, 나의 그 의견, 찬성이든 반대든 그 의견은 정말 그 글로만 판단되어진 의견일까? 아니다, 그런 게 아니다. A를 쓴 사람에 대한 편견이 먼저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A를 쓴 사람을 좋아한다면 설령 이상한 내용일지라도 이해해보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읽는 둥 마는 둥 하며 이 글은 이상한 글이다, 라고 단정 지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 그 어느 쪽도 옳은 것이 아니다. 편견이라는 말에 대하여 오해할 수 있는데, 편견은 단순히 그 사람의 첫인상 이런 것들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전혀 모르는 사람에 대해서 편견을 가질 수도 있다. 풍문으로 듣든, 이름으로 판단하든. 거짓말 같은가? 하지만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이미 결론을 내려놓고 있다. 그리고 이미 결론을 내린 사람들에게는 어떤 증거를 가져다주어도 그걸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의 의견만 더 강화하게 된다. (굳이 사족을 달자면 이를 확증 편향이라고 일컫는다.)

 

자, 이런 것들을 깨달았으니 나는 과연 완전히 저런 편향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까? 나는 내가 제법 객관적일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왜? 황우석 사건을 거치며 나는 어떠한 우상이라도 내 손으로 때려부수겠다고 마음먹었으며, 어떠한 주장도 객관적 근거가 없이는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그래서 어떠한 것이라도 내 머리로 직접 생각하면서 판단할거라고 마음먹었으니까. 하지만 이런 마음 자체 또한 일종의 편향, 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그러니까 자기를 과신하는 그런 기만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것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것은 나는 가수다, 라는 프로그램 때문이었다.

 

나는 가수다, 에 얽힌 논란도 황우석 사건만큼이나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나는 가수다, 에 얽힌 논란은 절대치로 비교하자면 황우석 사건에 비교하기는 어렵겠지만, 사람들이 집단으로 기만에 빠졌다, 라는 점에서는 인식에 거의 비슷한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나는 가수다, 는 MBC에서 여러 가수들, 특히나 재야에 묻혀 있지만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이 점이 정말 중요한 것 같다.) 정말로 노래를 잘 부르는 그런 가수들을 초빙해서 경연을 붙여서 한 명을 탈락시키는 그런 프로그램이었다. 나는 가수다, 는 정말 사람들의 환상을 꼭 채워주는 프로그램이었다. 어떤 환상인가? 방금 나는 재야에 묻힌, 에 강조점을 두었다. 바로 그 점이다. 재야에 묻혀있지만 실제로는 노래를 잘(한다고 생각)하는 가수들이 나온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보물을 가지고 있으면, 혹은 보물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가지고 있으면 남에게 은근슬쩍이나마 알리고 싶어한다. 하지만 동시에 나 혼자서만 갖고 있고 싶다. 나는 가수다, 는 바로 이 환상에 절묘하게 부합되었다. 예를 들어 임재범을 보자. 임재범은 나는 가수다, 출연 전에는 거의 방송출연이 많지 않았고, 그래서 가끔 노래방에서 제일 여자들이 싫어하는 노래 1위인 고해, 정도로 인구에 회자될 뿐이었다. 물론 나는, 그리고 여러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임재범이 노래를 잘 부른다는 것을. 박정현과 함께 부른 사랑보다 깊은 상처, 는 정말 말이 필요없는 노래였었다. 하지만 방송에 출현하지 않으면 그 어느 누구든 전설, 이라는 이름 아래 잊혀져 갈 뿐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나의 욕망과 나는 가수다, 의 욕망은 서로 만난다. 나는 임재범이 정말 노래를 잘 부르는 가수임을 알고 있고, 그의 노래 실력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려졌으면 좋겠다. 하지만 동시에 이대로 전설의 이름으로 더 이상 대중앞에 나타나지를 않았더라도 그 또한 아주 섭섭하게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과 혹시나 우리나라의 가수들 중 가창력 1위에 대한 잡담을 할 때 남들이 거의 다 잊어버린 임재범의 이름을 당당히 말할 것이다. ‘야, 니들은 모르지? 임재범이 얼마나 뛰어난 가창력을 가진 가수였는지를.’ 그리고 난 뿌듯함을 느꼈을 것이다. 바로 이런 심정을 공중파로 승화시킨 것이 바로 이 나는 가수다, 라는 프로그램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 임재범이 실제로 나는 가수다, 에 나와서 너를 위해, 그리고 여러분, 을 열창했을 때 그는 눈물을 흘렸고 나도 눈물을 흘렸다. 너무나 임재범이 좋았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가 너무 좋았다.

 

하지만 이런 감정은 임재범의 갑작스러운 하차 선언으로 인하여 갈 곳을 잃고 방황하고 만다. 그리고 임재범의 대타로 들어온 것은 옥주현이었다. 여기서 논란이 시작되었다. 옥주현이 과연 나는 가수다, 의 전설들 사이에 있을 자격이 있느냐, 에서부터 시작해서 여기에는 큰 음모가 있다, PD와 방송국 전체가 임재범을 몰아내려고 했다, 등의 음모론으로 발전해나갔다. 여기에 엎친데 덮친격으로 옥주현의 관객반응 중 일부를 다른 가수의 노래를 들을때의 관객반응을 가져와 편집한 것이 드러나면서 나는 가수다, 홈페이지의 게시판은 터져나갔다. 그 게시판만 터져나갔던 것이 아니라 모든 인터넷 게시판이 터져나갔던 것 같다. 나도 생전 들르지 않았던 방송 프로그램의 홈페이지를 새로고침하면서 사람들의 댓글을 읽었다. 그리고 조금이나마 스포일러, 그러니까 후기를 알기 위하여 (나는 가수다, 는 선행 녹화 후 방영이기에 노래를 들으러 갔었던 방청객들이 스포일러를 남길 수 있었다.) 인터넷을 밤새도록 새로고침하면서 뒤졌던 기억이 난다. 옥주현을 비판(혹은 비난)하는 글은 추천을 많이 받았다. 그리고 옥주현이 전조(곡의 코드를 변화시키는 것)를 했다는 기사가 뜨면 함께 출연하던 조관우를 언급하면서 옥주현이 한 번 전조를 하면 조관우는 전조를 자유자재로 한다, 고 글을 쓰던 사람도 있었다. 옥주현이 오케스트라를 요구했었다, 라는 말들도 널리 퍼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부끄러운 일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황우석 사건 때와 마찬가지로 어떤 인터넷 사이트에도 글을 올리지 않은 것 정도다.

 

바로 몇 년전에 황우석 사건을 겪었었는데 겨우 몇 년 지나지 않아서 나는 완전히 황우석 사건을 잊은 것처럼 행동했다. 사실 지금 와서 이성적으로 따져보면 옥주현 입장에서는 정말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것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황우석 사건을 겪고 나는 내 머리로 모든 것을 생각하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나는 가수다, 논란을 보면서 나는 수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부분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었다. 애초에 내 마음 속에선 결론이 나있었다. 임재범이 없는데 옥주현이 들어왔네? 감히 임재범의 자리에 옥주현이 들어와? 빨리 임재범 다시 데려와, 라고. 이미 이렇게 결론이 나있는 이상 옥주현이 무슨 행동을 하더라도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의견만 쫓아 글을 읽었을 것이다. 누가 어떠한 증거를 내밀더라도 나는 그것을 보고 전혀 다른 결론을 내렸을 것이다.

 

이렇게 두 번의 사건을 겪으니 나는 나 자신에 대해서 크게 신뢰를 가지기 어렵게 되었다. 결국 강렬한 감정에 휩쓸리면 또 비이성적인 결론을 내리게 되지 않을까?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일 텐데, 분명 기회가 다시 생긴다면 갑자기 돌변할 텐데. 결국 내가 스스로 객관적일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과신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거의 대부분의 논쟁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객관적 관점에서 사태를 보려고 노력하지만 언제나 객관적이기 어렵다. 나도 그렇지만 상대방도 마찬가지이다. 상대방 또한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쇠귀에 경 읽기가 되는 경우가 많으니 말이다. 그러다보니 나는 내 논지에 대해서 방어적으로 전개해나간다. 너를 공격은 안할 테니까, 나도 공격은 하지 말아줘, 라는 생각이라도 가진 것처럼. 결국 항상 사람은 이렇게 자기를 기만하고, 누구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늪에 빠지게 되는 게 아닐까? 그게 사람이 어쩔 수 없이 걷게 되는 길이 아닐까? 이런 길은 결국 절망만 남기게 된다. 어차피 이해 못할 거라면 그냥 내 의견과 비슷한 사람들로만 내 주위를 채우면 모두가 좋은 것이 아닐까? 그렇지 않다면 기어코 나의 지옥은 상대방 속에서 찾을 수밖에 없게 될 테니까.

 

그렇게 궁리하던 나에게 찾아온 것이 바로 이 책, ‘우리는 왜 자신을 속이도록 진화했을까?’ 이다. 책 내용은 지금까지 내가 말해온 저 사례들에서 쉽게 찾아낼 수 있다. 기만, 편향, 과신. 나는 황우석 박사의 연구에 대하여 스스로를 기만하였고, 황우석 지지자들의 집단을 일종의 내집단으로 판단하여, 거기에 비판을 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외집단으로 판단하면서 침묵으로 대응하였던 것 같다. 무슨 증거가 나오더라도 지지쪽으로 의견이 편향되었고, 그 사태가 모두 끝난뒤에는 쓸데없는 과신, 절대로 이런 일을 다시 겪지 않을것이라는 터무니없는 믿음마저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몇 년 지나지 않아서 그대로 나는 과정을 밟아나갔다. 이런 자기기만은 왜 생겼던 것일까? 결국 이야기는 간단하다. 이 책에 따르면 나는 진실을 믿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진실을 받아들이면 나의 인지에서는 부하가 걸리게 되고, 그런 부하를 생물학적으로 겪고 싶지 않아서 환상을 지어낸 것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리라.

 

내가 주목하고자 하는 부분은 특히 생물학적인 연구를 언급한 장인데, 여기에서 나는 이런 기만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실마리를 찾고자 한다. 의식과 무의식에 대한 연구인데, 최근 연구 결과에서 의식은 도리어 일종의 관찰자에 더 가까운 위치를 차지한다고 한다. 책에서 언급한 연구는 이런 것이다. 어떤 운동을 할 때 fMRI를 통하여 뇌의 부분의 활성화가 되는 것을 확인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놀라운 사실은 의식적인 부분이 활성화되기 이전부터, 그러니까 운동을 해야겠다, 라는 의식을 가지기 이전부터 이미 운동에 쓰이는 부분이 활성화가 되었다는 것이다. 풀어서 쓰면 이런 말이다. 내가 운동해야지, 하기 전부터 이미 몸은 운동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 현대 과학의 결론이다. 그런데 이게 말이 되는가? 내가 어떠한 의지를 가지기도 전인데 먼저 몸이 먼저 운동을 준비한다니. 보통 우리는 의식을 가진 뒤에야 운동이 발현되리라고 믿는다. 하지만 실제론 그게 아니라는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이미 그런 명령이 먼저 내려진 뒤에 의식은 그걸 지켜볼 뿐이라는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이는 필연적으로 이런 질문을 동반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 의지를 가질 수 없는가? 우리가 우리의 의지를 가지지 못한다면 저런 기만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영영 없을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더 선호하는 그런 표상들에게 휩쓸릴 것이다, 영원히.

 

하지만 현대 과학은 그런 부정적인 결론만 우리에게 안겨주지는 않는다. 의식은 비록 관찰자이지만, 우리가 그럴 의식만 있다면 절대적 권리를 가진 관찰자이다. 적어도 어떤 행동이 있기 10초 전부터 무의식적인 단초, 책의 말을 빌리자면 의식과 행동 자체를 빚어낼 신경 신호가 가 나타난다고 하면, 이 신호는 행동이 시작되기 10분의 1초 전까지 중단되어질 수 있다. 무엇을 통해서? 바로 우리의 의식이 그 역할을 한다. 즉 우리는 우리가 거부하고자 하는 의식만 있으면 언제든 거부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 부분을 좀 더 크게 확대해보자. 나를 어떤 집단으로 확대하고, 의식을 집단 내에서 중의를 모으는 것으로 말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는 자명하다. 반대하는 사람을, 반대하는 의견을 배척하지 말라, 다양한 의견을 허용하라. 물론 이런 집단은 인간과 달라서, 설령 집단의 일부가 그런 의견을 중지한다고 마치 의식처럼 닥터스톱, 을 내릴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을 배척하지만 않아도 큰 소득이 된다. 하지만 걱정이 되는 부분이 하나 있다. 글쎄, 이런게 또 다른 기만의 단초가 되면 어쩌지? 이런 이야기처럼 말이다 : 내가 잘못된 길을 가더라도 다른 몇 명은 제대로 길을 걷고 있겠지, 뭐 양심은 그 사람들에게 맡겨두자, 나는 일단 다수의 편에 있어보겠다, 잘 안되면 그 사람들 편으로 돌아서면 되는 것 아닐까?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p. s. 여담인데, 이 책은 상반기에 읽은 책 중에서 최고의 책이다.

p. s. 2 프라이머리의 입장정리, 를 들으며..

p. s. 3 사실 이 글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쓰여질 수도 있었다. 무한도전의 노홍철을 중심으로.. 내가 또 무한도전의 광팬이라서, 아니 글 내용을 좀 구상했었던 아이디어가 아까워 이렇게 몇 자 붙인다, 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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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3-09-26 01:27   좋아요 0 | URL
올해 읽은 것 가운데 최고의 책이군요

자기 자신도 믿을 게 못 되기도 합니다 그때그때 형편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또한 가연 님이 한 말처럼 자신은 벌써 결론을 내려놓고 있기도 하지요 그러니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한테도, 같은 길을 걸어가는 사람한테도 늘 자기 마음을 열어두어야 해요 이런 말을 하고 있지만 저도 잘 못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지금부터라도 하려고요^^

마음을 진정시키고 모두 내려놓기... 사실 이 말은 어떻게 하면 즐겁게 살아갈 수 있을까에 대해 말하면서 한 것입니다 그래도 황우석 박사 일이나 임재범이 나는 가수다에 나오지 않게 되었을 때도 그런 식으로 한다면 훨씬 낫지 않을까 싶기도 하네요 조금 억지가 있는 걸까요

마음을 진정시키면 제대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무엇이든...

이 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늘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희선

가연 2013-09-26 20:10   좋아요 0 | URL
네, 일단 오늘까지는 최고의 책인 것 같아요. 특히 생리학에 대해서 설명해놓은 부분을 읽는게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옛날에 배우던 기억도 갑자기 떠오르기도 하고... 배울땐 그렇게 지겨웠었는데 말이죠, 하하하하하.

마음을 열어둔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지요. 그리고 내려놓는것은 더 어려운 일이지요. 무엇보다도 정말 다 내려놓을 수 있다면 여기 인간세상에 살기 어렵지 않을까..

마립간 2013-09-26 12:38   좋아요 0 | URL
저는 우선 가연님을 제가 신뢰하는 그룹의 사람으로 분류하였습니다.

'의지'는 제가 인지과학에서 남겨둔 마지막? 퍼즐입니다.

가연 2013-09-26 20:12   좋아요 0 | URL
아하하.. 신뢰하는 그룹은... 감사합니다만 넷상은 위험하니까 좀더 지켜봐주심이...ㅠㅠㅠ

그렇죠. 사실 궁금한 점이 많은 부분입니다, 의지에 관한 문제는.

드림모노로그 2013-09-30 09:53   좋아요 0 | URL
하하하 ~ 가연님께서 말씀해주신 과거의 일과 묘하게 감정의 교집합이 생기네요 ㅎㅎ
황우석 사태는 정말 , 대단했죠...^^
그리고 임재범은... 저도 무척 좋아하는 가수라, 가연님의 생각하셨던 그 마음이 그대로 이해가 되네요 ㅎㅎ.....
집단주의, 우리나라에서 가장 문제시 되는 부분이라고 심리학자들이 대부분 지적하는 부분이죠..전 혼자 노는 것을 좋아라 하는 부류이기 때문에 하하~
비가 와서 처지던 기분에 가연님의 글을 읽으면서 괜시리 즐거워지네요 ^&^
즐겁게 읽고 갑니다.
오늘 하루도 행복하세요 ^^

가연 2013-10-03 20:57   좋아요 0 | URL
어허허.. 오랜만입니다. 답이 많이 늦었습니다. 곧 태풍이 올라온다던데, 비가 또 오겠죠?

2013-10-01 01: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0-03 20: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폭력의 자유]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폭력의 자유 - 해직기자 김종철의 젊은이를 위한 한국 현대언론사
김종철 지음 / 시사IN북 / 2013년 7월
평점 :
품절


폭력의 자유.

 

  글을 읽을 때 여러 가지 당혹스러운 경험을 겪을 때가 많지만, 특히 당혹스러울 때는 다음과 같은 경우입니다. 자기 자신의 글을 참고 자료로 사용하는 모습이 바로 그것인데, 예를 들자면 ‘나는 이것에 대해서 이러이러하게 생각한다. 그 이유는 내가 쓴 이 글을 보면 알 것이다.’ 와 같은 것 말입니다. 이전에 쓴 그 글은 그저 본인 스스로의 생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신의 글의 객관성을 자신이 어떻게 담보하겠습니까? 자신의 주장을 강화하기 위하여 과거의 자신의 글을 사용하는 것은 당혹스러운 일이지요. 객관적으로도 맞지 않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는 단순히 어떤 글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책도 마찬가지이고, 당연히 논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주장을 내세우는 글들은 그 글이 내세우는 근거가 객관적이지 않으면 안 되리라 봅니다. 그래서 이 책 ‘폭력의 자유’의 첫 장을 넘겼을 때 이런 부분에 대한 걱정이 사실 많이 들었습니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수십 년 동안 보고 들은 사실들을 개인적 시각으로 적었다.’ 라고. 그리고 동시에 이를 ‘자전적 에세이’ 로 여겨달라는 부연을 덧붙이지만 이는 책 자체의 관점을 하나로 한정시켜버리며 이런 모습으로도 여겨질 수 있습니다. ‘여기에 적은 사례는 내가 직접 발로 뛰면서 겪은 사례들이다. (직접 내 눈으로, 발로 확인한 일들이기에 잘못된 일은 없다.)’

 

물론 직접 겪은 사람의 관점이 하나의 사실을 보는데 가장 좋은 관점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주의해야만 합니다. 이는 자신의 관점만을 절대화하는 그런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 해방 전후부터 살아온 분이 있다고 합시다. 그분에게 우리는 당시의 상황을 정말 생생하게 들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분이 말하는 것들을 모두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뇌는 우리를 속일 수 있습니다. 겪은 일이지만 자신이 가지고 있는 틀에 맞춰서 바뀔 수 있고, 바뀌지 않더라도 그 틀의 영향에서는 벗어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생생하게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주변의 다른 자료와 비교하면서 검증하는 작업을 거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폭력의 자유, 라는 책은 이런 비판에서 자유롭기가 어려워 보입니다. 이 책의 저자인 김종철은 분명 한국 근현대사의 언론의 발전에 있어서 발로 뛰면서 사회 상황에 조금이라도 진보를 가져오려고 노력한 분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이 책은 그런 자신의 경험을 발전시켜서 생생한 그림을 그리며 한국 언론사를 조명해나가고 있습니다. 그런 생생함은 이 책 한 권만 읽어도 어느 정도는 한국 현대 언론사에 대하여 하나의 관점을 형성하도록 만들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하나의 관점, 이라는 것은 저자의 관점일 가능성이 높다는 겁니다. 저자는 보수 기득권 언론과 맞서서 싸워온 이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 그의 관점은 사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진보쪽이겠지요. 소위 말하는 보수적 스탠스를 가진 언론들, 조선, 중앙, 동아, 의 왜곡과 그에 대항하면서 자라온 한겨레, 경향과 같은 신문들의 발전사, 와 같은 것으로 말입니다. 하지만 이 관점을 우리는 어디까지 받아들여야 할까요? 처음부터 보수적인 관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 책이 아무리 조선, 중앙, 동아의 왜곡에 대하여 이야기하더라도 전혀 와닿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처음부터 이 책과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생각을 더 강화하는데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책의 구성을 조금 살펴보면 이 책의 저자가 대략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책을 읽지 않더라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차례에 보면 1부부터 9부까지 되어있는데, 저자가 특히 많은 부분을 할애한 부분이 눈에 쉽게 들어옵니다. 그 부분은 바로 3부와 9부인데, 3부는 박정희 시대 언론과 권력, 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으며 총 10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9부의 제목은 이명박 시대 보수 언론 공기인가, 흉기인가, 인데 이는 총 11장으로 구성되어 있지요. 이 3부와 9부는 쪽수로만 따져도 100쪽이 넘습니다. 다른 부분은 20쪽에서 50쪽 정도인 것에 비하면 정말 많은 부분을 할애했다는 이야기이지요. 그런데 이는 동시에 저자가 가장 한국 언론사에서 문제가 있었던 때라고 여기는 시대는 박정희 전 대통령 시대와 이명박 전 대통령 시대, 라는 말이 됩니다. 할 말이 없고, 사건이 없는데 뭐 하러 쪽수를 많이 배정하겠습니까? 아니 처음부터 쪽수를 배정하고 쓰지는 않았겠지요. 하고 싶은 말들을 하다 보니 자연스레 쪽수가 길어진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각 부의 장의 내용을 읽어보면 저자가 특히 중점을 두고 있는 부분을 쉽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각 부는 시대 순으로 배열되어있고, 해방 이후에서부터 이명박 전 대통령에 이르기까지의 언론사를 적어두었는데, 처음에는 각 장의 제목으로 자주 등장하던 단어가 뒤로 갈수록 등장하지 않는가 하면, 처음에는 별로 등장하지 않던 단어가 뒤로 갈수록 자주 등장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9부에 속한 장들의 일부를 적어보겠습니다. 5장 방송 연대파업, 6장 멀고도 험한 방송 민주화, 7장 연합뉴스의 파업, 8장 거대 교회 권력의 싸움, 9장 노조의 투쟁. 얼핏 읽어봐도 싸움, 투쟁, 파업이라는 단어가 눈에 보입니다. 그런데 이런 투쟁과 파업은 이전 장들에서는 그다지 눈에 띄는 단어는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이전 시대들에서 이 책의 저자가 뽑은 단어들은 재갈 물리다, 쫓겨나다, 등의 단어였지요. 여기서 우리는 처음 해방 전후 공간에서는 일제와 미군정에 대한 반발이 있었고, 독재 시대에서도 독재에 대한 반발이 있었지만 현대에 가까워질수록 언론사 자체에 대한 반발이 강해졌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정리하자면 이 책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언론은 그동안 정말 많은 부침을 겪었었지만, 특히 박정희 전 대통령 시대와 이명박 전 대통령 시대에 많은 위기를 겪었다. 박정희 시대에서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독재, 라는 구체적 외부의 적이 존재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 외부의 적에 가려졌었던 보수적 언론사 권력, 이 진정한 적으로 대두되었다. 그리고 이 권력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싸움, 투쟁, 파업과 같은 수단이 쓰인다. 가 되겠지요. 이에 대하여 저자는 직접 책에서 말합니다. ‘그동안 언론과 정치는 대등한 관계가 아니었지만, 이제는 단순한 유착을 넘어 밀월 관계에 이르렀다’ 고 말입니다. 박정희 시대에서의 언론을 떠올려보면 대등한 관계가 아니라는 것은 쉽게 파악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뒤의 유착을 넘어 밀월에 이르렀다, 라는 부분은 잘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유착이면 유착이지, 왜 밀월일까요? 이 책에서는 거기에 대한 설명을 독재가 해소된 뒤의 대통령들의 정책들에서 찾습니다. 독재 시대에서부터 유착과 굴종을 통하여 이미 자본과 자산을 축적한 언론은 자신이 가진 것을 잃기가 싫은 법, 자본을 가진 사람은 그 자본을 굴려서 더욱 더 큰 자본을 이루어냅니다. 이런 스노우볼링Snowballing은 때마침 찾아온 정부, 특히 이명박 전 대통령의 언론법 개정 등을 통하여 산사태처럼 부풀어집니다.

 

하지만 이는 이 책의 관점입니다. 그리고 이 관점은 소위 말하는 진보 세력을 결집시키고, 보수에 대한 어떤 감정을 증폭시키는 데는 역할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래서 이 언론이 정말로 객관적으로 모두를 위하여 봉사할 수 있는가, 에 대한 답은 도출해내기 어렵습니다. 쉽게 말해서, 상대방이 설령 극우나 극좌라도 포용해낼 수 있는 그런 관점이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저자 본인은 뒤에 루퍼트 머독이라던가, 위키리크스에 대한 이야기를 끝에 덧붙였지만, 그런 사례들에서 결론을 이끌어내더라도 사실 진정한 해답은 되지 못합니다. 대안언론? 사실 우리나라에는 소위 말하는 대안언론들이 정말 많습니다. 인터넷이 우리나라만큼 발전한 곳도 드물지요. 인터넷의 발달덕분에 수많은 언론이 생겨났습니다. 하지만 그들이라고 해서 언론 자체의 기능에 순수하게 충족시키는가, 에 대한 물음을 지울 수 없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관점으로 이런 진보, 보수 틀을 넘어서야만 할까요? 방금 상대방이 설령 극우나 극좌라도 포용하여야 한다고 말했는데 사실 이는 상식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요. 극단에 사로잡힌 사람을 어떻게 중간 쪽으로 데려오겠습니까? 하지만 우리나라의 특수한 상황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저는 여기에 대한 해답을 김기협이 쓴 해방일기, 에서 가져오고자 합니다. 해방일기에서 보면 저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분단의 원인을 우리 내부에서 찾으며, 역시 우리 민족은 이렇게 싸움을 좋아하는구나, 라고 좌절을 하는 경우가 많다’ 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덧붙입니다. ‘실제로 분단이 일어난 것은 외부의 원인이 분명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다’고. 마찬가지입니다. 이를 이렇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의 틀이 거대 보수화된 언론 권력, 그리고 정치 권력과 이에 대응이 되는 진보적 색채의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언론들의 대결 구도로 나타난다면, 이 틀이 우리를 데려다주는 곳은 변증법적인 결론일 뿐입니다. 하지만 언론 자체의 속성을 분석하여 그 속의 한계를 이끌어낸다면, 그리하여 이 틀에서 완전히 벗어난 담론을 가져온다면 책에서 드러난 진보, 보수 대결구도에서 언론 자체의 속성과 그 외의 것들의 구도로 바뀌게 됩니다. 이는 공통의 적이 생기면 뭉치게 되는 원리와 같습니다.

 

언론의 한계라는 말은 사실 당황스러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언론은 분명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발행되기 위해서는 사업체로 존재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사업체로 존재한다는 것은 자본주의적 질서에 어쩔 수 없이 편입한다는 이야기와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가 자유를 느끼는 공간들인 트위터, 페이스북, 이들 모두 사업체입니다. 결국 돈을 벌기 위해서 광고를 달고, 이용자들이 많이 찾아줄수록 수익이 되는 시스템입니다. 조정환이 쓴 인지자본주의, 에서는 ‘그런 공장의 컨테이너를 탈취하여 사용한다’ 는 개념이 나왔었지만 이는 그나마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인터넷에서나 가능한 일이며, 일방향으로 전파가 되는 신문과 방송에서는 힘든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사업체라면 수입을 내야 되는데, 광고수입을 포기할 수는 없겠지요. 그런데 그 광고는 기업체들이 싣습니다. 언론으로써는 이를 외면하기가 어렵겠지요. 게다가 사업체라면 혼자 운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것 또한 한계입니다. 현장에 나가있는 기자와 편집하는 사람의 의견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 자신도 욕망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진정으로 언론이 대중을 생각한다면 그들 자신을 철저히 비워야 하겠지요, 그러나 그럴 수 없다는 것은 너무 당연합니다.

 

그러면 인터넷에서 계속 대안언론을 해나가면 그런 한계를 없앨 수 있지 않은가, 라는 질문을 할 수 있지만, 이는 벽에 부딪히게 됩니다. ‘찻잔 속의 태풍’ 이라는 벽에 말입니다. 인터넷에서 정말 큰 이슈가 되더라도 그 이슈가 현실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일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아니죠, 오히려 반대입니다. 현실에서 일어난 일이 인터넷 실제 검색어에 오르내리는 겁니다. 실제 방송에서도 ‘오늘의 검색어’ 라면서 인터넷 검색어들을 소개하면서 네티즌 의견을 소개할 때도 있지만, 그건 그야말로 한계를 분명히 드러냅니다. 방송이나 신문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네티즌 의견을 뽑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 외에도 여러 가지 한계점을 언론은 분명 가지리라고 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이 한계를 없애기에는 사실 현재 언론 구조로서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니 이 책, 폭력의 자유, 의 첫머리, 해방 전후의 언론사에서도 드러나듯이 뿌리가 매우 깊기 때문입니다. 한 번 굽힌 사람은 두 번 굽히기 쉽습니다. 일제의 억압 속에서 이미 언론들은 심한 탄압을 받고 그들의 몸을 굽혔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싹튼 모순들은 지금에 이르러 도저히 메울 수 없을 정도로 커졌습니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파업, 투쟁, 싸움으로는 뿌리를 뽑기 어려울 정도로.

 

그렇다면 우리는 이에 대하여 어떻게 나아가야 할까요? 저는 그 대안으로 협동조합을 들고 싶습니다. 기존의 진보적 색채를 가진 언론이든, 보수적 색채를 가진 언론이든, 그런 언론들 모두를 옆으로 제쳐두고는 새롭게 협동조합으로 시작하는 언론을 만드는 것입니다. 진보, 보수의 간극은 깊고 넓지만, 서로의 편의 증대, 라는 협동조합의 목적 아래에서는 분명 같이 활동을 할 수 있는 길이 존재할 것입니다. 사업체라면, 그래서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할 수 밖에 없다면 어렵겠지만 말입니다. 물론 현재 언론 중 진보적 색채를 가진 매체인 프레시안의 경우에는 협동조합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혼자 협동조합으로 활동한다고 해서 특별히 언론의 문제점들이 해소되거나 하기는 어려우리라고 보며, 인터넷 기반과 진보적 색채 자체 또한 언론의 한계를 극복하기에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간의 대립에서 벗어나 협동조합으로 이뤄진 언론이 한 두 개가 아니라 여러 개가 동시에 발전할 수 있는 사회 분위기도 중요하겠지요. 지금 언론이 가지고 있는 여러 모순들이 어느 정도 해결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전망을 해봅니다.

 

처음 책을 받았을 때, 사실 책의 제목에 대해서 갸웃거렸습니다. 폭력의 자유, 라는 제목은 폭력과 자유, 도 아니며 폭력은 자유, 도 아닙니다. 두 명사가 전혀 맥락에 맞지 않게 위치되어있습니다. 폭력을 휘두르면서 자유를 얻는다, 라는 뜻은 아닐 것 같고, 한국 현대 언론사를 설명하는 두 가지 키워드인 폭력, 그리고 자유, 그러나 그 두 개를 합쳐놓으니 저자가 어떤 반어적 효과를 노린 것 같기는 한데 그게 무엇인지는 전혀 짐작이 가지 않는, 그런 제목이었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조금씩 이해가 갔습니다. 이는 반성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책엔 진보적 언론과 보수적 세력의 구도가 전체적으로 드러나지만, 거기에 앞서 언론 자체에 대한 자성이 깔려있습니다. 언론인들이 가지고 있는 펜은 무한히 날카롭습니다. 그 펜으로 누구를 사회적으로 말살할 수 있기도 하며, 어떤 후보를 밀어줄 수도 있습니다. 바로 그런 것이 폭력, 입니다. 그리고 그 폭력을 마음껏 휘두를 수 있는 자유, 를 언론인들은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자유는 허용되어서는 안됩니다. 언론인들은 자신의 펜을 움직일 때 항상 그 점을 유의해야만 할 것입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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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3-09-24 23:09   좋아요 0 | URL
역시 가연님 글이 좋습니다. 협동조합으로 언론사를 만든다는 건 생각을 못해봤네요. (아..프레시안도 그런 거였군요.) 확실히 언론도 경제구조하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군요. (하기는 예전에 누군가가 결국 자본주의 사회에서 중요한 건 돈이 나오는 구멍이다,라고 하더군요.)


가연 2013-09-25 09:40   좋아요 0 | URL
ㅠㅠㅠ 부끄럽습니다. 아직 다른 한 권 읽고 있는 중이라 다른 분들의 글은 구경도 못했네요. 맥거핀님께서는 다 읽으셨나요? 협동 조합은 여러 가능성이 있을 듯 하여 이렇게 언론쪽에도 붙여보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써놓고 뭔가 좀 부족한 느낌을 자꾸 받는 중입니다.

희선 2013-09-25 00:35   좋아요 0 | URL
진보와 보수의 틀을 넘고 언론의 한계를 넘어서, 제목이 좋군요 정말 이렇게 된다면 좋을 것 같습니다 어느 한쪽에 마음이 치우쳐 있다 할지라도 다른 것도 괜찮을 수 있다는 식으로 마음을 열어둔다면 좋을 텐데요 이것은 언론만 그런 것은 아니기도 하군요 사람이 살아가면서도 그렇게 해야 하죠

협동조합으로 시작하는 언론, 좋겠군요 어떤 식으로 해나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서로 달라도 말을 나누다 보면 좋은 것을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언론인들은 정말 펜을 마음껏 휘두르면 안 됩니다 언론인이 아니라 할지라도, 누군가를 공격하는 데 글을 이용하면 안 돼요


희선

가연 2013-09-25 09:43   좋아요 0 | URL
아하하.. 협동조합의 원리를 보고 나름 머리를 굴려 찾아본 것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쫌 찜찜하달까, 뭔가 부족하달까. 평가단 다른 한 권이 기만에 관한 책인데, 편향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더군요. 그리고 편향된 것을 고치기 정말 어렵다, 라고도 이야기하고... 그래서 더 찜찜한 것 같아요. 마지막 말씀에 일부 동의합니다만 분명 비판은 있어야 할 듯 합니다.

마립간 2013-09-25 08:29   좋아요 0 | URL
자기 자신의 글을 참고 자료로 사용하는 모습이 바로 그것인데, 예를 들자면 ‘나는 이것에 대해서 이러이러하게 생각한다. 그 이유는 내가 쓴 이 글을 보면 알 것이다.

위 글은 제게 해당되는 것 같아 곰곰히 생각해 봤는데요. 객관성을 담보하기 보다, 생각의 일관성 및 현재 생각이 있게 된 근거되는 과거 생각의 서술로 봐야하지 않을까요?

가연 2013-09-25 09:38   좋아요 0 | URL
음.. 오해를 살 것 같아서 해명을 합니다. 확실히 마립간님께서 여기 서재에서 댓글을 다실때 예전 글들을 같이 읽어보라고 보여주시는 경우가 있었었지요. 그런데 그런 예전 글들을 마립간님께서 참고 자료라고 생각하시고 쓰셨던 거라면.. 분명 객관성을 담보하지 못하리라고 여겨집니다. 하지만 제가 그런 댓글을 읽으면서 받아들였던 것은 참고자료라기 보다는 (사실 이런 블로그 등의 댓글에서 분명한 참고자료를 제시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요) 말씀하신대로 생각의 궤적이라고 받아들였습니다.

제가 서두에 저 글을 쓴 것은 첫 문단의 아래쪽에도 보듯, 적어도 책으로, 그리고 부제로 현대언론사, 라고 이름을 붙여놓았다면 그런 저자 자신의 시각은 어느 정도는 배제하여야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서 적어놓은 것입니다. 이 제가 쓴 글에는 빠져있지만 이 책에서는 저자가 쓴 신문기사도 일부분이지만 실려있지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저자 본인이 물론 현대언론사에서 한 역할을 맡았던 분이겠지만, 신문 기사는 사실 그 색채에 따라서 어조가 확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더욱 조심하여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이 부분은 언급을 하여야겠다고 여겼습니다. 혹시나 저 글이 본인을 겨냥해서 쓰인게 아닌가, 그런 느낌을 받으셨다면 죄송합니다.

마립간 2013-09-25 14:20   좋아요 0 | URL
가연님, 죄송하실 것 없습니다. 가연님의 글을 타산지석처럼 내게 적용해 볼 것은 없나 생각해 본 것입니다.

가연님이 쓰신 글은 위 책에 대해서 쓰신 것은 맞습니다만, (게다가 제가 책을 읽지 않아, 책의 뉴앙스를 알 수 없지만) 지적하신 바가 일반화가 될 수 있는지, 가연님의 가치판단이 맞는지 생각했는데, 아직 판단 보류입니다. 책(공개?), 부제, 언론이란 분야 등 특정화가 있으면 가치 잣대가 달라지나 해서요.

가연 2013-09-25 21:31   좋아요 0 | URL
아닙니다, 넷상에서는 쉽게 오해가 쌓일 수 있는 법이니.. 조심하는게 옳지요. 언짢게 여기지 않으셔서 다행입니다.

가치 판단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사실 잘 감이 오지 않지만.. 첫 문단의 내용을 간단하게 말하면 어떤 주장을 하려면 그 근거는 객관적이어야 한다, 입니다. 여기에 가치 잣대가 들어갈 부분이 있는지 좀 의아해집니다... 번거로우시겠지만 조금 더 부연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혹은 제가 저 명제를 너무 당연하게 여기는 걸까요?

마립간 2013-09-26 08:48   좋아요 0 | URL
가연님의 마지막 댓글을 읽으니, 저와 가연님과의 생각에 차이가 있었던 부분을 파악한 것 같습니다. ; 객관적.

제가 어떤 글을 쓸 때, 제 주장을 강력히 표현하지 않더라고 (통계숫자만을 나열하지 않는 한, 통계 숫자를 표현하더라도 나열하는 방식을 통해) 의견을 표출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모든 글에 약간의 주장을 포함하게 되죠. 그리고 그 주장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근거를 제시해야 합니다.

그 근거는 과학적, 객관적, 타당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저는 근거의 객관성의 판단은 독자의 몫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저의 경우는 생각의 궤적을 반복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줄이기 위해서 저의 글을 referece로 제시하지만, 같은 이유로 그리고 자기표절을 피하기 위해 (잘 아시겠지만) 의학논문의 인용에 (특히 연구배경에서) 자신의 연구가 포함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부정적인 감정보다는 긍정적인 감정이 많았습니다.

가치판단이란 단어는 제 글과 위 책의 글이 같은 수준의 글로 보아야 하느냐하는 것입니다. 중복게제 논쟁에서 독후감과 논문은 같은 창작글로 본 가치판단과 상품평과 같은 서평과 논문은 다른 수준으로 봐야 한다는 가치판단과 같은 의미입니다.

위 책의 글이 (그리고 내용이) 객관성이 필요한 글이라면 글쓴이 스스로 객관성을 확보하기 자신의 글보다는 다른 근거를 제시했어야 했지만, 과연 그런 글이었나 (다시 말씀드리지만 위 책을 읽지 않아서) 판단을 유보한 것입니다.

마립간 2013-09-26 08:49   좋아요 0 | URL
댓글을 쓰다보니, 이런 판단이 내려지네요. 위 책은 (가연님의 판단으로는) 내용상, 형식상 객관성이 필요한 글이었는데, 그 근거를 자신의 글로 삼아 객관성을 확보하지 못해 ; 결과적으로 더 좋은 글이 될 수 있는 것에 미치지 못했다.

가연 2013-09-26 20:07   좋아요 0 | URL
네, 마립간님의 두번째 말씀이 맞는 듯 합니다.

근거의 객관성의 판단을 독자의 몫으로 넘기는 것에는 여전히 저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여기가 마립간님과 저의 의견 차이겠지요.

가치판단은.. 사실 마립간님의 글을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궤적, 으로 여겼기 때문에 여기에 더 관련시키지 않아서 의미를 파악하기 어려웠습니다. 하긴 만약에 제가 비슷한 상황이었다면 제 글에 연관지어서 생각을 했을 것 같지만.. 본의아니게 무신경하게 넘어가버린 것 같네요, 넓은 마음으로 양해해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