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실격
다자이 오사무 지음, 전미옥.김윤희 옮김 / 느낌이있는책 / 201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다자이 오사무, 의 이름은 정말 많이 들어보았지만, 실제로 그의 작품을 읽게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늘 하던대로 서점에서 이곳 저곳을 둘러보다가 책을 한 권 집어들었는데, 공교롭게도 그 책이 바로 이 인간실격, 이라는 책이었지요. 더군다나 한 번은 접해봐야지, 라고 생각했었던 다자이 오사무의 책이라니. 바로 챙겨서 서점을 나갔었습니다. 하지만 책을 느긋히 즐길 기회는 쉽게 찾아오지 않았고, 이런 저런 일들 중간에 틈틈히 읽어나가는 수 밖에 없었습니다. 원래 한 번에 이야기를 읽어나가는 것을 선호하던 저로서는 고역이었지요. 하지만 틈틈히 읽어나가는 것에 장점은 있었습니다. 그 장점이란 중간에 장면을 머리에 떠올리면서 이 장면은 왜 주인공이 이런 일을 하는 것일까, 그런 것들을 고민을 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이 글은 그런 고민들을 일부나마 풀어놓는 그런 장이 될 것입니다.

 

먼저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하여 나름대로 키워드를 잡아보겠습니다. 저는 감히 세 개의 키워드를 선택하겠습니다. 먼저 익살, 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책의 주인공인 요조, 는 어쩌면 다자이 오사무, 그 자신의 생애를 그대로 그린듯한 삶을 살아가는데, 이 요조가 택하는 사회적 생존방식이 바로 익살, 입니다. 좀 더 부연한다면 이런 것입니다. 요조는 작중에서 이야기합니다. 자신은 사람이 두렵다고, 도대체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대해야 할 지 모른다고. 그렇기에 스스로 이렇게 평가합니다.

 

나는 무다, 바람이다, 허공이다. 

 

하지만 사회에 속해진 이상 (우리는 사회와 연관을 맺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 연관이 어떠한 방식일지라도.) 그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과 어떻게든지 교류를 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약간 말을 바꾸자면, 나는 다른 사람과 어떻게든지 사회적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게 된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철학자 샤르트르의 말을 조금 빌려오도록 하겠습니다. 샤르트르는 사람이 다른 사람과 맺는 관계를 크게 세 가지로 구분을 했는데, 그 첫째는 가학적인 관계, 그 둘째는 피학적인 관계라고 하였으며 마지막은 무관심이라고 나누어 놓았지요. 그러나 샤르트르는 여기에 덧붙이기를 이 세 가지 관계 중 그 어느 것도 결과적으로는 모두 실패할 것이다, 고 이야기합니다. 즉, 어떤 관계든 그 관계가 나와 다른 사람을 이어주는 관계 중 하나라면, 그 관계는 결과적으로는 실패로 끝날 것이라는 무서운 예언이지요.

 

 저 말에 따른다면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과 제대로 된 관계를 맺지 못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맺은 모든 관계는 이윽고 실패할 것이고, 그 관계를 맺고자 발버둥치는 몸부림조차 모두 헛된 짓이 될테니깐요. 그렇기에 실제로는 다르다, 라고 주장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허나 여기서 말하는 관계, 는 상대방과 나와의 피상적인 관계를 뜻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상대방과 나의 진정한 상호이해를 통한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샤르트르가 저렇게 부정적인 발언을 했던 것도 알만합니다. 어떤 사람도 다른 사람을 진실로 이해할 수는 없을테니깐 말입니다. 결국 대개는 원활한 관계를 위해 서로가 일정 부분 양보해가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혹자는 자신을 희생해가며 살아가게 되겠지요.

 

위의 샤르트르의 말을 따른다면 이 인간실격, 의 주인공 자신의 경우도 그 결말은 실패로 끝이 날 것입니다. 주인공인 요조, 가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을때 쓰는 기본 전략은 익살, 입니다. 그러니깐 자신이 광대가 되어 다른 사람을 웃기는 것입니다. 요조, 는 자신을 이상하게 꾸미거나, 잘 할 수 있는 것을 일부러 잘 못한다던가, 혹은 장난을 치는 등의 전략을 통하여 다른 사람에게 다가갑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런 요조, 를 보면서 웃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적어도 요조, 가 생각하기에는) 요조, 에 대해서 이렇게 판단할 것입니다. 아, 요조, 라는 인물은 무해한 인물이구나, 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이런 전략은 결국 피학적인 인간관계에 속한다고 볼 수 있으며 결국 실패가 예견됩니다. 그리고 소설이 진행되면서 그 예견은 그대로 맞아떨어지지요.

 

둘째로 제가 내세우는 키워드는 여성입니다. 어떤 상징 체계에서의 여성을 살펴볼 경우 여성은 다음과 같은 역할을 수행합니다. 대지, 생산력, 재생 등 같은 역할들 말입니다. 보통 대지, 의 상징을 가지는 경우가 많지요. 그리스 신화의 지옥의 여왕 (하데스의 아내가 된) 페르세포네와 대지의 신 데메테르 숭배 신앙과 거기에 따르는 엘레우시스 비의가 그랬고, 그 이전 메소포타미아 신화에서의 지옥의 여왕이었던 에레쉬키갈이 그러했었던 것 처럼 (물론 특이하게도 이집트 신화에서는 천공을 다스리는 신이 여신이었습니다.) 그러한 이미지를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이 대지라는 이미지는 방금 전 예로 든 여신들을 살펴보아도 알 수 있든 죽음과 자애, 두 가지의 모습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런 이미지는 인간 실격, 에 나오는 여성들과도 어느 정도 일치합니다. 주인공이 처음 겪게 된 여자들은 일종의 창녀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주인공은 그 창녀들에게 안기면서 다음과 같이 독백합니다. 그녀들에게 안길 때 만큼 포근했었던 적은 없었다고. 주인공은 정말 많은 여성들의 호의를 얻습니다. 하숙집 딸들이라던가 같은 서클서 활동을 하던 선배 그리고 여러 술집의 마담 등과 같은 사람들 말입니다. 주인공이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데 익살, 을 떨었고 결국 그 익살로 맺어진 관계는 실패하리라, 라고 앞서 언급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실패한 관계는 무엇으로 보상받아야만 할까요? 바로 여기서 여성이 그 해답이 됩니다. 자애로서의, 무한히 끌어안아주는 그런 상대로서의 여성. 주인공 본인은 여성들에게 호의를 받는 자신에 대하여 이는 일종의 저주와 같다, 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이 저주마저도 없었다면 주인공 자신은 이미 소설의 초반부에서 인간이 아니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여성들 중에서 특히 살펴보아야 할 인물이 둘 있는데, 한 명은 카페에서 우연히 만난 여급이었던 쓰네코, 라고 하는 인물이고 다른 한 명은 뒤에 다룰 요시코, 라는 인물입니다. 쓰네코는 주인공 요조, 보다는 연상이었는데 카페에서 여급으로 있다가 우연히 만나게 됩니다. 마치 온 몸에 쓸쓸함, 이라는 기류를 감고 있는 듯했던 그녀는 그 기류에 끌려온 주인공과 마음이 맞게 되고 결국 하룻밤을 같이 보내게 되지요. 하지만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늘 피학적이었고, 그렇기에 결국 실패해왔던 주인공은 무서워져서 도망치게 됩니다. 우연스럽게 서로는 다시 재회하고 이윽고 현실에 지친 나머지 둘 다 죽음을 결심하게 되지요. 결국 쓰네코는 죽습니다. 하지만 주인공은 끝끝내 살아남고 맙니다. 이 과정을 드러내는 부분은 이 소설 전체를 통틀어서 손에 꼽힐만한 장면이라고 여겨집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와 쓸쓸함, 그리고 죽음의 이미지, 마지막으로 사랑 (쓰네코가 죽은 뒤 주인공은 쓰네코에 대하여 내가 그녀를 사랑했구나, 라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으로 변주되는 장면이기에 더욱 그렇지요. 여기서 이 이미지는 앞서 여성에게 주어진 두 상징성들과 합치됩니다.

 

셋째로 신뢰입니다. 이 신뢰라는 개념은 인간에게서 두려움을 느낀 주인공이 마지막으로 모든 기대를 걸었던 개념입니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익살을 부리다 결국 도망만 쳤던 주인공은 결국 깊은 절망에 빠지게 되고, 어느 누구도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고 느끼게 됩니다. 바로 그때 다가온 사람이 앞서 언급한 요시코, 입니다. 요시코는 무조건적인 신뢰를 주인공에게 베풀며 주인공이 새 지평을 바라 볼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부연하자면 구원의 실마리를 발견했었던 겁니다.

 

우리는 종교를 언제 진심으로 믿게 될까요? 저는 모든 절망을 다 겪고 바닥까지 떨어진 사람만이 진정으로 종교를 믿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종교라는 것은 믿음입니다. 사람은 이성의 힘으로 세상을 살아가지만, 이 세상에서는 아직도 이성의 힘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있기도 합니다.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는가? 내가 지금 행동하는 것이 내 자신의 자유의지로 행하는 일인가? 왜 이 세상에는 부조리가 존재하는가, 등등의 담론들 말입니다. 이성은 이러한 영역에서 점차 그 영향력을 넓혀가고는 있지만 아직도 완전한 답을 내리기에는 부족합니다. 결국 왜? 라는 질문에는 제대로 답변을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지요. 이렇게 잘 모르는 것은 두려움을 낳습니다. 바로 이럴때 사람은 이성을 잠깐 제쳐두고 믿음, 에 귀의합니다. 대개의 경우 여기서 자신을 이끌어주는 무엇인가가 있었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는 종교에 대한 믿음을 낳습니다.

 

스콜라 철학의 이야기를 잠깐 빌리자면, 토마스 아퀴나스를 위시한 스콜라 철학에서는 크리스트교의 세 가지 교의인 믿음, 소망, 사랑은 멀리 떨어진 것이 아닌 하나의 뿌리를 가지며 각각에서 서로가 나온다, 라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이는 후대에 단테의 신곡에 영향을 미치기까지 했었었지요. 신곡의 천국편에서 단테는 '믿음에서부터 소망이 나오고, 거기서 사랑이 나온다.' 라는 말을 언급합니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믿음은 '그리스도가 올 것이라는 믿음' 이지요. 그리스도는 어떨 때 올까요? 인간이 절망에 빠져서 구원을 요청할 때에 바로 그 요청을 받아들이면서 등장합니다. 결국 어떠한 어려움에 빠져도 나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라는 의미를 가지는 것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인간실격의 주인공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대상이 그리스도가 아닌 요시코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절망 속에서 그는 자신을 누군가가 구원해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요시코는 그런 그를 구원해줄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를 향한 무한한 긍정과 신뢰를 가지고 있기에. 그 믿음은 소망, 요시코와 함께 행복하게 살고 싶다, 을 낳게 되고 결국 주인공과 요시코들은 사랑을 가지고 결혼하게 됩니다. 하지만 방금 말했다시피 요시코는 (이중적인 의미로) 그리스도가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주인공은 요시코에게 보고 싶은 것만 보았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그 신뢰자체가 독이 되어 주인공을 파국으로 몰아넣어버리지요.

 

어느날 잠깐 밖에 나갔다온 주인공 요조, 의 눈에 비친 광경은 요시코가 어느 장사꾼에게 능욕당하는 광경이었습니다. 요시코는 그런 일을 당한 뒤 주인공에게 말합니다. '아무 짓도 안한다고 했는데' 다른 사람을 의심할 줄 모르는 신뢰는 그런 식으로 배반당합니다. 요시코는 현실에 고정된, 피와 살을 가진 여성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이미 정신적인 존재가 되어 만인의 구원을 보장하는 그리스도와 달랐습니다. 그녀가 줄 수 있는 구원은 얇은 유리막 위에 지어진 집과 같았던 것이지요. 그녀의 의심할 줄 모르는 마음을 통해서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했찌만, 그것은 주인공 뿐이었고, 그런 무조건적인 신뢰가 다른 인간들마저 구원해주지는 못했던 것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충격을 받은 주인공은 절대자에게 묻습니다.

 

신뢰는 죄인가요?

 

이제 제목인 인간실격, 에 대하여 한 번 생각해봅시다. 이 인간실격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첫째는 일종의 반항적 의미가 담겨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체념적 의미가 담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 의미를 살피면 주인공 요조, 는 소설 초반부터 계속해서 이야기합니다. 인간이 두렵다. 인간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모른다. 인간이 얼마나 위선적 존재인지 모른다. 인간은 자신의 아버지의 연설을 들으며 뒤에서 욕하고 앞에서 칭찬을 하는 그런 위선적 존재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자신의 본모습을 드러내어서 마구 화를 내는 그런 무서운 존재입니다. 인간은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속에는 무시무시한 분노와 악의로 가득찬 그런 괴물들입니다. 주인공으로써는 그런 존재가 인간이라면 나는 차라리 인간이 되지 않겠다, 라는 그런 마음으로 인간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지요. 그렇기에 인간실격입니다. 이렇게 해석한다면 주인공의 속마음은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겠지요.

 

그런 것이 인간이라면 인간이 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나는 인간이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개인적으로는 둘째 의미에 더 손을 들어주고 싶습니다. 체념적 의미로서의 인간실격말입니다. 설명하자면, 인간은 어떨때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스페인의 민담을 보면 인간은 수치심을 가지기에 인간이리라, 라는 말을 합니다. 맹자는 수오지심, 시비지심, 사양지심, 측은지심과 같은 사단, 이 인간이 본래 가지는 성향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저는 좀 더 단순히 접근하고 싶습니다. 인간은 믿음과 사랑이 있기 때문에 인간일 수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인간을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믿음이 없는, 상대방과 자신에 대한 신뢰가 없는 인간을 인간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극단적으로 말하여 이 세상에 인간이 나 혼자 남게 된다면 그때 나는 스스로 인간이라고 지칭할 수 있을까요? 내가 인간일 수 있는 것은 타인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불릴 수 있는 것이고 타인의 존재를 인정한다면 별 수 없이 그 타인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사랑과 신뢰의 존재를 인정해야만 할 것입니다. 사랑과 신뢰를 가진 존재, 바로 그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나 소설의 주인공은 사랑 - 쓰네코, 신뢰 - 요시코, 모두를 잃고 말았습니다. 이윽고 신뢰는, 무조건적인 신뢰는 죄인가? 라는 물음에 이르고 맙니다. 아닙니다. 감히 말하건데 신뢰는 죄가 아닙니다. 신뢰를 신뢰답지 못하게 만드는 환경에 그 죄를 물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사회와 그 환경은 너무나 크기에 죄를 제대로 묻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주인공은 체념에 빠지게 되고, 본인은 인간으로서 갖추어야할 사랑, 신뢰 모두를 잃었기에 인간이 아니다, 나는 인간이 아니고 그렇기에 인간실격이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러한 해석들보다도 오늘날 더 이 소설이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마 저 위에 잠깐 언급한 주인공의 독백부분때문일 것입니다. 나는 무다, 바람이다, 와 같은 부분말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현실을 살아가면서 스스로의 존재감이 희석되는 듯한 느낌을 종종 받기도 합니다. 사회 환경은 복잡해져가면서 다양한 생활방식을 낳으며 사람들은 그 환경을 살아가면서 정말로 다양한 생각을 가지며 살아갑니다. 옛날에서도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는데 현재는 더욱 더 그런 경향이 심화되어가기만 합니다. SNS와 같은 새로운 의사소통수단이 생기면서 개인과 개인의 거리는 가까워진듯하면서도 더 멀어져 가기만 합니다. 이 사람은 이러한 사람일거야, 라고 생각해보지만 실제로 만났을 경우 너무나 다른 사람인 경우도 비일비재합니다. 여기 있는 내가 인터넷의 군집지성으로서의 나인지, 아니면 개별적 의미로서의 나인지 아리송해져만 갑니다. 결국 옛날이나 지금이나 타인과의 관계를 맺는 것은 어려운 것이지요. 그러면서 마치 이 소설의 주인공처럼 혼잣말을 하는 겁니다. 나는 무다, 어쩌면 고독이다, 라고.

 

하지만 소설에서는 - 비록 소설에서는 실패했지만 조금이나마 해결책을 열어두고 있습니다. 결국 신뢰와 사랑의 문제가 되는 것이지요. 이 해결책은 이상적이기에 분명 몇 번이고 실패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만둘 수도 없습니다. 그만두는 순간 무에 사로잡힐테니깐요. 그렇다고 해서 실패가 두렵지 않은 것은 또 아니겠지요. 실패하게된다면 우리는 자조적으로 인간이 아니다, 와 같은 말을 하게 될지도 모르니깐요. 끝없는 고독과 무에 사로잡힐 것인지, 아니면 어떻게든지 저런 해결책을 발전시켜나갈 것인지, 이 딜레마는 계속될 것 입니다.

 

 

 

 

 

p.s.  오랜만입니다 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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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3-04-08 12:16   좋아요 0 | URL
오! 오랜만이에요, 가연님!

가연 2013-04-12 10:39   좋아요 0 | URL
오! 오랜만이에요, 다락방님! ㅎㅎ 방금 다락방님 서재에 들렀었는데 (물론 폰으로 접속을 하기는 하지만 덧글은 언제나 컴퓨터 접속시에만 남긴답니다) ㅎㅎㅎ

테레사 2013-04-08 12:20   좋아요 0 | URL
와우, 가연님은 남자셨군요!!

가연 2013-04-12 10:41   좋아요 0 | URL
아하하.. 음... 네, 전 남자랍니다.. 랄까, 이 글에서 제가 남자라는 것이 드러나나요?? 좀 궁금하네요, 쿡.

물론 다른 글 몇 개만 읽어보시면 제가 남자라는것이 아주 잘 드러나겠지만.. (이봐)

여하튼 테레사님께서 이렇게 댓글 남겨주신건 오랜만인것 같아요, 풋.

희선 2013-04-09 23:44   좋아요 0 | URL
인간실격에 나온 요조가 익살스러운가요
이것을 읽었는지 다른 것을 읽었는지 잘 생각나지 않는군요
그래도 다른 데서 보기는 했는데, 요조가 익살스러웠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거기에서는 어두웠던 것 같은데... 제대로 못 봤던 것인지도 모르죠
여자하고 죽으려고 했던 것은 생각나기도 하네요

요조가 사람을 잘 몰라서 괴로워했군요 이것은 누구나 다 그렇지 않나 싶습니다
정말 요즘은 더 알 수 없는 것 같기도 합니다, 본래부터 잘 몰랐지만...
신뢰와 사랑이라, 좋은 말이군요 그것을 믿어야 하겠네요

실제로 만난 것은 아니지만, 오랜만에 보니 반갑네요
어깨를 다치시다니, 아주 심한 게 아니기를 바랍니다


희선

가연 2013-04-12 10:46   좋아요 0 | URL
전체적으로는 말씀그대로 요조가 어둡고 음울히 그려집니다. 요조가 소설 내부에서 취하는 삶의 방식을 요조 스스로 말하길 '익살' 을 부린다, 라고 언급하지요. 그 부분에 대한 제 설명이 부족한 것 같네요, 하하.

신뢰와 사랑이라고 저도 저렇게 써놓긴 했는데.. 한편으로는 믿는 것, 과 신뢰는 다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고, 막상 저 스스로도 이런 말을 내가 믿을 수 있나? 싶은 생각도 들고, 풋.

어깨는 거의 다나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너무 오랜만에 뵙죠? 저도 반갑습니다, 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