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억관 옮김 / 민음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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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날에 문학사상사 출판사에서 나온 '상실의 시대' 책을 보면, 제일 뒤에 '작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출판사로 보내달라, 그러면 다 모아서 한꺼번에 보내주겠다' 라는 말이 적혀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당시 어렸던 저는 몇 번이고 당신에게 편지를 쓰려고 하다가 다시 관뒀습니다. 첫 문장을 안녕하세요, 로 시작하면 그 뒤는 어떻게 적어야 할지, 도무지 감조차 잡을 수 없었거든요. 사실은 그다지 힘주어 쓸 편지도 아니었거늘, 늘 누군가에게 편지를 쓸때는 이 편지를 보고 상대방이 어떻게 여길지 상상을, 그것도 나쁜쪽으로만 상상을 하게 되더군요. 어리고 의지할 곳이 필요했던 저는 무의식중에 당신의 소설에 의지를 하려고 들었나봅니다.

 

대학교에 들어가서 교내서점에서 웅크려 읽던 책도 당신의 책이었습니다. 학생회관에서 밥을 먹으면 바로 붙어있는 교내서점으로 내려가 정면에 보이는 부분이 일본소설들을 모아둔 곳이었는데 그 앞에서 서성거리다가 당신의 단편집들을 구매해 읽었습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사람은 익숙한 것을 (주위가 모두 새로운 환경뿐이라면) 처음엔 따르기 마련이고, 당신의 이름은 내가 아는 일본 작가들 중에서 가장 뇌리에 깊게 새겨진 이름이었으니깐요. 그때 같이 산 소설이 티티새, 요시모토 바나나의 작품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언제나 당신의 소설을 더 많이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아, 요시모토 바나나도 제가 좋아하던 작가 중 한명이었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당신을 더 좋아했습니다.

 

상실의 시대를 읽고 무슨 열병에 걸린 것 처럼 잔디 바닥에 눕기도 했고, 계단에 걸터앉아서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기도 했던 저는, 어느 순간 그런 것들이 저에게 더이상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고 그만두었습니다. 상실의 시대의 마지막은 (당신의 소설이니까 더 잘 기억하시겠지만) 와타나베가 미도리에게 전화하다가 자기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 라고 독백하면서 끝이 납니다. 다만 미도리보고 데려와달라, 너를 만나고 싶다, 라고만 말하면서 말이지요. 그 장면만큼 당시의 저에게 잘 들어맞았던 것은 없었습니다. 당시의 저도 어디로 가야될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고, 어디에 내가 있는지조차 알 수도 없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나이가 지나면서 계속 그렇게 도서관 계단에 걸터앉을수는 없었습니다. (여전히 이유는 명확히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저는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겠지요, 아니 할 수는 있어도 그때처럼 자연스럽게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 일탈적, (하지만 당시의 나에겐 무엇보다도 자연스러웠던) 행동을 하려면 억지로 꾸민 가면을 쓰지 않으면 못할 것 같습니다.

 

이번에 펴낸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는 상실의 시대를 뒤집은 것 같습니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비슷하지만요. 주인공의 주변에 정신적으로 문제를 안고 있었던 여자아이가 있는 것도 상실의 시대의 나오코의 변주같습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부분은 다자키 쓰쿠루는 상실의 시대의 주인공과는 달리 자신의 힘으로 상대를 찾아가지요. 그래서 이 책은 광고에서도 그렇듯 '당신은 어느 역에 있습니까?' 를 계속 물어옵니다. 역은 열린장소이자 동시에 어디로 가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할 곳이기도 합니다. 전작의 와타나베가 공중전화박스에 갇혀버렸다면 이번의 쓰쿠루는 사방으로 뚫린 곳에서 스스로를 밖으로 밀어냅니다.

 

이를 한발짝 더 진보했다, 주인공의 마음이 진보하거다, 라고 본다면, 그렇게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늘 '회피' 로 끝나던 성격이 '다가감' 으로 기울어졌으니까.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서 저는 위의 '도서관 계단에 걸터앉지를 못하는 것' 을 합리화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엔 외로웠던 거니까, 외로움을 해소하려면 다른 사람을 만나야 할테니까. 고고한 모습(이라고 생각했었던 행동들)이 무슨 소용일까, 사람 사이로 들어가지 못한다면. 그러니 나도 다가가자, 라고 마지막장을 덮으며 그런 느낌을 다시금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시금 미궁속으로 숨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냐면.. 조금 있다가 말씀드릴께요.

 

상실의 시대, 의 향기만 이 책에서 느낀 것은 아닙니다. 꿈속에서의 성적인 행위를 그려낸 부분은 해변의 카프카, 를 떠올리게 만들었습니다. 다자키 쓰쿠루가 어울리던 친한 친구들 중 두명의 여자아이들의 이름은 시로(흰색)와 구로(검은색)인데, 이는 1973년의 핀볼, 의 두명의 쌍둥이 여자를 떠올리게 만듭니다. 주인공과 성교를 가지는 것조차도 비슷한 상황이지요. (비록 이 책에서는 꿈속이었지만요) 결국 떠나버리는 것도 비슷합니다. 그 외에도 동경기담집, 의 서사와 닮은 부분도 있습니다. 정말 수많은 '비슷한' 이야기들이 이 책에서 다시금 생명을 갖고 반복됩니다.

 

 저는1Q84를 읽고 당신의 일생의 대작이 나왔다, 라고 여겼습니다. 아마 이 이상 더 훌륭한 소설은 쓰지 못할 것이다, 라고 느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1Q84를 읽으며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비난을 할때도 저는 정말 대단한 작품이라고 여겼습니다. (1Q84는 호불호가 심하게 갈리는 소설인 듯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당신의 책에 대한 기대감은 한껏 부풀었었습니다. 1Q84만큼은 못쓰더라도 이번 소설 또한 아주 뛰어난 작품이겠지, 라고. 하지만 뭐랄까, 네, 저는 이번 책이 마치 당신의 모든 작품들의 총집편같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말하자면, 힘이 빠진 것 같다는 느낌을요.  

 

아까, 이제 나도 누군가에게 다가가자, 라고 생각했었지만, 그 생각이 미궁속으로 빠져버렸다고 이야기했지요? 이제 그 이유를 말해야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한가지 질문을 드려야 될 것 같습니다. 왜 '그'들은 그대로인가요? 당신의 소설의 주인공들은 너무나 그대로입니다. 주인공들한테 느껴지는 '시크함' 은 여전한데, 당신의 소설을 읽는 나는 더이상 그렇게 시크하게 살지는 못합니다. 이번 소설에서는 다른 소설들과는 다르게 그나마 '다가간다' 고 이야기하지만 그걸 언급하는 부분은 결국 마지막 몇 장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몇 장을 제외하고는 당신의 소설의 분위기는 그 옛날의 상실의 시대에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대로입니다. 이 책의 주인공들은 모두 서른을 훌쩍 넘는데도 말이지요. 어쩌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질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까지는 그냥 질문에 지나지 않으며, 진짜 요지는 이것입니다 : 이렇게 그대로인 '그- 당신 소설의 그들' 가 어떻게 마지막에 이르러 그렇게 쉽게 바뀔 수 있는지 저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미궁에 빠져버렸습니다.

 

요즘 저는 풀밭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고, 밤에 넓은 곳으로 나가 하늘을 바라보는 대신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는 자리에 나가서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게임을 하기도 합니다. 어쩌다보니 술게임들도 제법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전의 저는 이런 것들은 모조리 질색이었고 이런데 시간을 쏟느니.. 하는 생각을 가지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사람 사이에서 얻는 것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조금씩 이렇게 어울려 나갈 생각입니다. 그러나 저는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런게 귀찮습니다. 혼자서는 못사는 세상, 그리고 직접 사람들을 만나며 배우는 지혜들, 그런 것들을 떠올리고는 어울리기는 합니다만, 저는 도저히 이런 것들에 익숙해지지는 못할 것 같네요. 늘 그런 자리에 있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집에서 책이나 한 자 더 봤으면,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니까.

 

결국 사람은 자, 이제 나가자, 한다고 해서 그렇게 쉽게 바뀌지는 못한다, 라는 겁니다. 하지만 이 소설 속 다자키 쓰쿠루는 너무나 쉽게 해냅니다. 상대 여성을 '이번에 잃으면 다시는 이런 사람을 얻지 못할 것이다' 라고 속으로 생각하면서 말이지요. 너무나 적극적으로 달려가는 그의 마지막 모습에 저는 솔직히 아연했습니다. 너무나 그대로였던 주인공이 너무나 극적으로 바뀌어버렸으니. 그의 한계는 여자주인공의 손을 잡고 '당신을 잃기가 싫어' 라고 말하는 것 까지일텐데. 다가와야 할 사람은 여자주인공일텐데. 사랑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고 말하면 쉽겠지만, 사랑이 도대체 무엇인가요? 그리고 내가 상대를 사랑이라고 확신한다고 해서 상대방이 나를 사랑이라고 확신할까요. 여기서 여주인공은 주인공에게 순례를 떠나서 그를 버렸던 친구를 만나라, 라는 이야기밖에는 하지 않습니다. 결국 이 책에서는 다자키 쓰쿠루의 행동 변화를 제대로 설명해내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결국 주인공이 여주인공을 만나러 가는 것은 '개인적 판단' 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그가 그저 여주인공의 손을 붙잡고 외롭다, 라고만 말하기를 바랬습니다.

 

난 여전히 당신의 팬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당신의 팬일 것 같습니다. 지금도 이 소설의 별점을 3개를 주려다가 결국엔 별 한개를 더 추가를 하고 맙니다. 당신의 소설에 별점을 3개 이하로 주는 건 도저히 할 수가 없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그 어렸던 나, 돈이 없어 밥먹을 돈을 아껴가면서 당신의 책을 구입하고, 서점의 한 귀퉁이에서 당신의 소설 한 구절을 외우려 읽고 있었던 나와 비교하자면, 지금의 경제력을 어느 정도는 갖춘 - 그리고 돈을 벌기 위해서 직장생활을 하는 - 나는 당신의 소설을 덜 좋아하게 된 것 같습니다. 다만 제가 여전히 당신을 좋아하는 이유가 있다면 - 당신의 소설을 보면 그때의 나를 떠올리게 만듭니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당신의 소설을 손에서 놓을 수 없나봅니다. 당신을 좋아했던 그때의 나를 떠올리게 만들기 때문에 여전히 당신을 좋아하게 될 것 같습니다. 지금의 나는 - 비록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정쩡한 모습을 취하고 있지만 - 그때의 나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그럼에도 가끔은 정말 외로웠던, 그래서 도서관 계단 한중턱에 앉아서 누군가 말을 걸어주기를 기다리던 저의 치기를 그리워할때도 종종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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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3-07-15 18:49   좋아요 0 | URL
으앗. 저는 이 책이 제게 배송중인데 가연님은 벌써 읽으셨군요!
[상실의 시대]가 가연님에게 아주 의미 있는 책이었군요. 어느 한 때를 떠올리게 할 정도로 강한 책이요. 저는 [상실의 시대]를 아주 재미있게 읽었지만, 제게 어떤 영향을 미쳤다고는 볼 수 없을것 같아요. 다만 언급하신 마지막 부분만큼은 기억이 아주 선명하게 나네요. 저는 자신이 어디있는지 모른다고 수화기를 통해 대답하는 와타나베를 보면서, 바로 이래서 이 책은 상실의 시대인 것이다, 라고 생각했었거든요.

가연님이 느끼는 이 책에 대한 서운함이 대체 어떤것인지, 저도 책을 읽어봐야 알 수 있겠죠. 리뷰의 제목을 보니 실망한 것 같은데 별은 네개구나, 라고 생각하며 읽어내려갔더니, 역시, 하루키라서, 하나 더 준 거네요.

가연 2013-07-16 00:43   좋아요 0 | URL
ㅎㅎ 기대는 많이 했는데.. 뭔가 기대만큼은 아니었기에 이렇게 끄적거렸네요, 풋. 상실의 시대를 제가 너무 좋아하는 걸지도 모르겠어요.

아, 덕분에 ttb들어왔는데.. 10원이 들어왔..ㅎㅎㅎㅎㅎ 어쨌든 감사합니다. 10원이라도 들어왔기에 다행스럽네요. 요즘 제가 서재활동을 거의 잘 안해서.. 그래도 글은 잘 읽고 있어요

희선 2013-07-16 00:40   좋아요 0 | URL

새 작품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에 대해서


《노르웨이의 숲(상실의 시대)》때는 순수한 리얼리즘 소설을 쓰려고 생각했다. 한번 써두지 않으면 한단계 위로 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 스스로는 실험적으로 쓴 것이 베스트 셀러가 된 것은 기뻤지만 어떤 압박이 되었다.

지난번 작품 《1Q84》의 큰 뜻은 모두 3인칭으로 쓴 것. 3인칭은 어디에도 갈 수 있고, 누구라도 만날 수 있다. 도스토옙스키 《악령》같은 종합소설을 쓰고 싶었다. (《다자키 쓰쿠루》는) 내 감상으로도 머리와 의식이 따로따로 움직이는 이야기. 이번에는 《1Q84》와 견주어 문학의 후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나한테는 새로운 시험이다.

사건을 쫓는 것이 아니고 의식이 흘러가는 가운데 사건은 두고 간다. (다자키의 애인) 사라 씨가 쓰쿠루 군(지난날과 마주보기 위해)한테 나고야에 가라고 말하지만, 같은 식으로 나한테 쓰라고 말한다. 사라가 나를 이끌어간다. 이끌려가 무언인가를 경험하는 것으로 더욱 자신이 단단하고 크게 되어가는 느낌이 든다. 읽는 사람 가운데도 그런 느낌이 들면 좋겠다.

이번에는 살아 있는 사람에 대해 관심이 많이 가서 자꾸 생각하다보니(등장인물들이) 멋대로 움직였다. 사람과 사람의 인연에 큰 관심과 공감을 갖게 되었다.

(다자키는 친구 넷과 이룬 공동체에서 잘려 버림받지만) 나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고, 무엇이 사람 마음을 다치게 하는지는 거의 안다. 사람은 그렇게 다치면서 마음을 닫고, 시간이 지나면 마음을 조금 열어서 한단계 위로 가는 일을 되풀이하면서 자란다. 성장 이야기의 하나다.

나는 내 소설을 다시 읽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우는 일이 단 하나 있다. 그것은 소설은 아니지만(지하철 사린 사건 피해자나 유족을 취재한) 《언더그라운드》. 죽임 당한 20대 부인 이야기를 듣고 집을 나와 전철을 타고 있을 때 눈물이 나왔다. 한시간 정도 멈추지 않았다.

그게 다른 이야기를 쓰고 있을 때 되살아났다. 그 책을 쓴 일은 나한테 큰 경험이었다.

소설을 쓰기 시작한 29, 30살쯤에는 쓰고 싶어도 쓸 수 없는 것이 많이 있었다. 쓸 수 있는 것을 조금씩 늘려서 쓰고 싶은 것을 거의 쓸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2000년쯤. (이번 작품도) 그냥 쓸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쓰려고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인터뷰 가운데서)



얼마전에 뭔가 없을까 찾아보니 하나 나오더군요 그런데 이것은 한부분입니다 이번 책에 대해 한 말만 옮긴 겁니다 많은 말은 없지만 조금 도움이 될까 해서... 다른 것은 아직... 이것저것 찾아두기만 하고 게을러서 제대로 읽지도 않고, 어떤 것은 읽다 말기도 하고... 핑계를 댄다면 네이버 사전을 쓰기가 조금 어렵게 되어서(낱말을 다 아는 게 아니기 때문에)... 컴퓨터 때문인 듯합니다 사실 다른 것보다 게을러서 그렇습니다^^

사람이 사랑 때문에 바뀌기도 하죠 처음에는 그렇더라도 나중에는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을 하겠죠 그러니까 쓰쿠루는 자신의 뜻으로 그렇게 지난날 일어난 일을 알아보려 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그런 말을 하셨군요) 다른 사람 이름에는 색깔을 넣어주었지만 쓰쿠루한테는 넣어주지 않았죠 그게 쓰쿠루한테는 남들과는 동떨어진 느낌을 주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본래 사람은 같기를 바라기도 하니까요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쓰쿠루(作る) 이름(책 제목에는 히라가나'つくる'로 썼지만)에는 만들다는 뜻이 있는 것은 아닐까 스스로 만들어가야 한다, 만들어갈 수 있다 이것은 저만의 생각입니다

책을 읽지도 않고 이런 말을 하다니... 그냥 색이라는 것만 보고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이 가진 색을 하나로 말할 수는 없지만 누구한테나 그 사람만의 색은 있지 않을까 싶거든요

자신의 어느 때를 떠오르게 하는 소설이 있다는 것은 좋지 않나 싶습니다


희선

가연 2013-07-16 00:58   좋아요 0 | URL
이 글은 저도 읽었던 것 같네요. 아닌가? 제가 읽은 것은 다른 인터뷰인가 헷갈리네요. 사실은 작품 중에도 쓰쿠루의 의미가 나옵니다. 작가가 상당히 노리고 쓴 이름인 것 같습니다.

사람은 이름을 받아서, 그 이름의 의미대로 살아가게 되는 경우도 있다고 하지요. 특히나 소설이라면 더욱 그런 경향이 강하게 드러납니다. 그래서.. 사실 쓰쿠루의 이름을 작중에서 풀이했을때 결말이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있었습니다. 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제 생각에 지나지 않지만.. 주인공의 주위의 네 명의 친구는 각각 아카, 아오, 시로, 구로란 색깔을 가지고 있는데.. 사실 시로와 구로, 그러니까 백색과 흑색을 색깔이라고 불러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흑백은 무채색이지요. 뭐, 무채색도 색채라 부를 수 있기는 하지만.

그런데 이렇게 보면 - 두 색깔이 무채색이다는 사실로 미루어보면 흥미로운게, 결국엔 다자키 쓰쿠루는 색채와 전혀 상관없이 자신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색채가 있든 없든 그건 사실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라는 것 처럼. 이는 핀란드에서 구로가 말하는 부분에서 명확히 드러납니다. 또한 희선님께서 적으신 '그 사람만의 색' 과도 비슷한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어요. 어떻게 부여할 수 있냐면 - 그 사람만의 색은 사실 그냥 그 사람의 개성입니다. 굳이 색채로 표현될만한 성질의 것은 또 아닌거지요. 그래서 저는 이 색채, 라는 것이 어쩌면 그저 소설의 맥거핀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도 해보았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더욱더 실망감이 커졌었달까, 라는 이야기를 저렇게 길게 푸념해두었답니다.

2013-07-17 01: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7-20 22: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8-05 00: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8-05 13:1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