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hes Of Time (동사서독) O.S.T
록레코드 (Rock Records) / 1999년 7월
평점 :
품절


 

 

 

동사서독 - 장국영이 주연한 영화 - 에 대한 줄거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1. 동사東邪 황약사.

 

동사東邪는 동쪽의 사악한 사람이다. 동사 황약사는 사악하고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다. 자신의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는 마음껏 친절을 베풀지만 설령 그런 사람들일지라도 조금만 자신의 마음 밖으로 걸어나가면 주저없이 살수殺手를 쓴다. 동사 황약사의 제자였었던 매초풍과 진현풍이 서로 사사로이 정을 통하고 구음진경을 훔쳐 달아날 때 황약사는 자신의 딸 황용때문에 그들을 놓아줄 수 밖에 없었다. 좌절감에 사로잡힌 황약사는 애꿎은 자신의 다른 제자들의 다리를 모두 부수고 자신의 도화도에서 쫓아내버린다. 말하자면 엉뚱한 곳에 화풀이를 한 셈이다. 그에게는 인간의 윤리나 도덕, 허례는 헛된 것이었고, 그리하여 그런 것들에 대하여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는 그는 의도적으로 그런 것들을 모조리 무시한다. 하지만 단순히 사악하고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이라면 사람들이 절대 따르지 않을 것이고, 일파의 대종사, 라고 불리지도 않을 것이다. 황약사는 그 이상한 성격에 비례하여 거의 대부분의 잡다한 지식을 그 몸에 지니고 있었다.

 

다행이라면 다행스럽게도 황약사는 자신의 섬, 도화도에서 은거할 뿐 나올 생각을 거의 하지 않았다. 만약에 그의 제자가 구음진경을 가지고 달아나지를 않았었다면, 그리고 그의 딸이 섬을 나오지 않았었다면 분명 사조영웅전이나 신조협려때까지 밖으로 나올 생각을 조금도 가지지 않을 것이다. 그의 섬에는 모든 곳에서 복숭아꽃, 그러니까 복사꽃을 볼 수 있었다. 왜 섬에 그렇게 복사꽃을 많이 심었었는지는 나오지 않는다. 동사서독에서 친구로 등장하는 구양봉은 말한다.

 

그는 매번 이상하게도 동쪽에서 왔다. 몇 년 동안 계속 그랬다.

 

영화가 시작하면 황약사는 술을 한 동이 들고 친구 구양봉에게 찾아온다. 그리고 구양봉에게 자신이 어떤 여자에게 술을 한 동이 받았는데, 이 술의 이름은 취생몽사醉生夢死이니, 이 술을 같이 마시며 취하자, 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구양봉은 거절한다. 마지면 지난 일을 모두 잊을 수 있는 술, 취생몽사, 는 결국 황약사 혼자 마시게 되었다.

 

인간이 번뇌가 많은 까닭은 기억력 때문이라고 한다.

 

구양봉은 술에 가득 취해 벽에 기대 앉아 있는 황약사에게 묻는다. 나를 기억하는가? 황약사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리고 구양봉에게 묻는다. 우리가 무슨 관계였지? 그런 황약사에게 구양봉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한 때 정말 친한 친구였지만 지금은 아니라고.

 

 

 

2. 서독西毒 구양봉. 

 

서독西毒은 서쪽의 독랄한 인물이라는 단어다. 서독 구양봉은 백타산에 기거하며 수많은 독초와 독물을 다룬다. 독을 다루는 솜씨는 그 누구도 따라가지 못했다. 기기묘묘한 독들 앞에서 수많은 고수들이 목숨을 잃었다. 독물만 무서운 것이 아니었다. 전진파의 천하오절의 중신통, 왕중양은 자신의 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남제 단지흥에게 찾아가 말한다. 내가 죽고 나면 분명 구양봉이 발호할 것이니 당신의 일양지와 나의 선천공을 합쳐 대항하는 것이 어떻겠소이까. 단지흥은 흔쾌히 받아들이고 선천공을 전수받는다. 한 명의 오절을 상대하기 위하여 두 명의 오절이 그들의 절기를 합쳐야 할 정도였으니 구양봉의 무공이 어느 정도일지 충분히 상상이 간다. 구양봉의 합마공의 일부를 배웠던 신조협려의 양과는 소용녀에게 무공을 배우기 전에는 그 합마공 만으로 정식제자로 무공을 배웠던 전진교 도사를 상대하였다.

 

하지만 구양봉이 정말로 무서운 점은 무공이라던가 독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의 가장 큰 무기는 그의 독랄한 심성이었다. 아무리 강력한 무공을 가지더라도 그 무공을 다루는 사람이 심성이 연약하다면 그 심성을 노려 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구양봉, 서독은 그 무공과 그 무공을 다루는 심성에 있어서 다른 사람과 매우 달랐다. 대종사의 체면 같은 것은 그에게 없었다. 앞서 본 동사 황약사의 경우에는 그나마 대종사로서의 품격이 있었었지만 동사는 자신에게 불리할 것 같은 상황에서는 언제든 그런 품격따위를 버릴 수 있었다. 상황이 불리해지면 말을 바꾸고, 이전의 말을 사과하지만 다시 상황이 좋아진다면 언제든 상대의 등에 칼을 꽂을 수 있었다. 동사가 세상의 법도를 무시한다면 서독은 세상의 법도를 깨부수려고 돌아다니던 사람이었다.

 

거절당하기 싫으면 먼저 거절하는 것이 최선이다.

 

그런데 구양봉과 황약사, 그리고 홍칠공의 젊은 시절을 다룬 동사서독, 에서는 저만큼 독랄한 모습으로 그려지지는 않는다. 한 여자를 사랑했지만 무공에 미쳐 밖으로 떠돌던 구양봉. 결국 그 여자는 기다림에 지쳐 그의 형과 결혼한다. 그의 형과 그녀가 결혼하던 날, 구양봉은 그녀를 억지로 범하고 자신과 같이 떠나자고 말한다. 하지만 그녀가 거부하자 쓸쓸히 홀로 백타산을 떠난다. 물론 그녀도 구양봉을 좋아했었다. 하지만 끝끝내 그녀와 맺어진 사람은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 왜 그녀는 그를 떠나버렸을까?

 

날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았어요.

 

우리는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어떤 감정과 기분을 전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실제로 언어로 표현하지 않더라도 알 수 있는 것들도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그건 언제나 시간이 지난 뒤에 깨닫게 되는 것이다. 아, 그때 그녀가 이런 말을 하려고 했었구나, 그리고 나는 그때 이 말을 삼키고 있었구나. 사랑에 빠진 연인은 사랑한다, 라는 말을 듣고 싶은 법이다, 적어도 서로가 영원히 지속되리라고 믿는 그 시간동안은.

 

하지만 그는 자존심때문에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어요, 그 말이 듣고 싶었는데도.

 

결국 구양봉은 그녀를 등지고, 하지만 여전히 그녀를 잊지 못한채 사막에 가서 청부업자로 활동하게 된다. 아마 그때부터가 아니었을까? 거절당하느니 거절하는 것이 더 낫다고 여기게 된 시점은. 동사서독에서 나타난 그는 냉정하고 잔혹한 살수인 척 하지만, 끝내 입꼬리가 떨리는 것만은 감추지 못한다.

 

 

 

3. 독고구패獨孤求敗.

 

독고구패獨孤求敗는 홀로 패배를 구한다, 라는 의미다. 이름부터가 매우 광오한 느낌을 준다. 독고구패는 끝끝내 한 번도 패배를 당해본 적 없는 무사다. 결국 상대를 찾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는데, 바로 이 점 때문에 김용이 쓴 작품중에서 가장 강한 무사가 누구인가, 라는 질문의 대답에 단골로 나온다. 물론 천룡팔부의 무명승 편을 드는 사람도 많다. 여하튼 독고구패와 무명승이 김용의 전 작품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무사다, 라고 말을 한다고 하여도 절대 잘못된 말은 아닐 것이다. 독고구패가 펼치는 검술은 독고구검이다. 총 9가지의 초식으로 등장하며, 김용 작품 중 소오강호에서 그 위력을 선보인다. 신조협려에서도 독고구패의 심득이 나타나는데, 양과는 독고구패의 심득 중 중검을 익히고 무림에 나가 서역의 무사를 모조리 무찌를 수 있었다. 독고구패에 대한 언급은 그 후에는 거의 등장하지가 않는다.

 

동사서독에서는 독고구패에 대해서 창의적인 해석을 내렸다. 황약사에게 버림받은 비련의 여인이 수련하여서 경지에 이르렀는데, 그녀가 바로 독고구패다, 라고. 영화에서는 황약사와 얽히는 두 명의 사람이 등장하는데, 모용언과 모용연이 바로 그들이다. 우연히 황약사를 만난 모용언은 황약사에게 약속을 하게 만든다. 너에게 누이동생이 있다면, 약속하지, 내 그녀와 결혼할테니. 하지만 황약사는 이미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고 그 말은 먼지처럼 흩어져 메아리처럼 멀리서 간간히 울릴 뿐이었으니. 이에 모용언은 자신의 누이동생을 황약사가 버린 것이라고 느끼고 구양봉에게 의뢰를 하게 된다.

 

황약사를 죽여주시오

 

왜 그를 죽이려고 하시오?

 

다른 여자때문에 내 여동생을 버렸으니까.

 

하지만 모용연의 생각은 달랐다. 모용연은 자신의 오빠인 모용언이 자신과 황약사의 사이를 가로막는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구양봉에게 별개의 의뢰를 하게 된다. 자신의 오빠를 죽여달라고. 그러나 이상함을 느낀 구양봉에게 모용언과 모용연은 자신들의 정체를 드러내게 된다. 결국 모용언과 모용연은 동일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한 사람의 몸에 두 명의 인격이 깃들고, 각각의 인격은 남과 여로 나뉜다. 모용언은 남자의 인격이고 모용연은 그 누이동생으로서의 인격이다. 이를 알게 된 상태에서 다시 그들의 대사를 돌이켜보면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모용연은 남자로서의 자신, 모용언이 죽기를 바랐다. 그렇게 된다면 황약사를 자신과 더 가깝게 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기 때문에. 모용언은 사랑의 대상인 황약사 본인이 죽기를 바랐다. 그를 사랑한 만큼 증오하였기에. 사랑에 빠졌었지만 이윽고 사랑을 이루지 못하면 둘 중 하나때문이라고 인간은 믿는다. 그들의 사랑에 장애물들이 있거나, 혹은 사랑의 대상 자체가 잘못되었거나.

 

모용언과 모용연, 이들의 의뢰 내용은 저런 사랑이 깨진 후, 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어준다. 장애물로서의 오빠, 혹은 잘못된 대상으로서의 황약사. 어떻게 보면 이 두가지 이유를 만들기 위하여 모용언은 모용연과 분리된 것이다. 하지만 누구든 알 수 있듯이 사랑의 실패에 명확한 이유는 없다. 어쩌면 가장 비난받아야 할 대상은 자기 자신일런지도 모른다. 황약사가 사랑한다는 여인을 만나 죽이려고 했었지만, 끝끝내 검을 거둔 까닭은 죽이게 되면 황약사의 말을 자신이 긍정한다는 맥락이 되어버리게 때문이었다. 그녀를 정말로 황약사가 사랑하니까 자신이 죽이게 된 것이다, 가 되어버릴테니까. 그녀를 황약사가 사랑한다는 것을 인정하기가 싫기에. 

 

세상사람들에게 묻노니, 정이란 무엇이기에 생사를 가늠케 하는가?

 

신조협려의 이막수는 원호문을 외워 자신의 실패한 사랑에 대하여 노래한다. 구양봉에게 자신의 속마음들을 토로한 모용언은 그날로 강호를 떠나 그 정을 가지고 무공만 연마를 계속 하면서 생활을 보낸다. 언젠가 자신이 그에게 자신을 사랑하느냐고 물으면, 그가 부디 거짓말이라도 하기를 바란다, 라고 호소하면서. 그녀의 무공은 은거 전에도 황약사에게 상처를 입힐 정도였으니, 은거 후 그녀의 무공수위가 어느정도나 강력해졌을지는 가늠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그녀를 진실로 강하게 만든 것은, 바로 저 이막수의 말 처럼 정情때문이리라.

 

 

 

4. 북개北丐 홍칠공.

 

개방의 방주 홍칠공은 인의와 협을 중시하면서 약자를 돕는 대종사이다. 그의 이명으로는 구지신개가 있는데, 9개의 손가락이라는 말 그대로 그의 손가락은 식지가 하나 없다. 북개의 유일한 단점이 먹는 것에 대한 탐욕이 크다, 라는 것인데, 바로 그 탐욕 때문에 의인을 죽게 한 적이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손가락 하나를 잘라 그것을 단죄하였다. 하지만 식지를 자른 뒤에도 여전히 식탐은 강하여, 그 약점을 노려 황용이 자신의 정인情人인 곽정에 그의 무공을 전수하게 만든 적이 있었다. 물론 아래에 소개할 동사서독에서는 다르게 전개되지만 말이다. 하지만 힘이 없는 정의는 공허하다는 말이 있듯, 인의와 협을 중시하려면 그에 상응할 정도의 힘은 갖춰야 한다. 홍칠공에게는 두 가지 무서운 무공이 있는데 하나는 타구봉법이고 다른 하나는 항룡십팔장이다. 타구봉법은 말 그대로 미친 개를 때려잡는데 쓰는 봉법이라고 할 수 있는데, 개방방주의 진산절기이다. 그리고 아마도 개방방주로 취임할때에 반드시 익혀야 할 무공일 것이다. (황용이 후에 개방방주에 취임하는데, 그녀는 항룡십팔장은 제대로 펼치지 못한다.) 하지만 타구봉법보다 더 위상이 높은 절기가 바로 항룡십팔장이다.

 

신조협려와 사조영웅전의 시대 보다 몇 백년 전, 송대에 소봉이라는 개방 방주가 있었다. 그는 그의 전 생애를 걸쳐 한 번의 패배도 당하지 않았고, 오직 이 항룡십팔장 하나만으로 전 무림을 제패하였다. 당시 소봉이 무림을 종횡할때에는 항룡십팔장은 18개의 초식이 아닌 28개의 초식이었고, 따라서 항룡이십팔장이라고 불렸다. 소봉은 자신의 의제인 허죽과 함께 이를 정리하고는 18개로 간추려 이후 개방에 전해내려지게 하였다. 이것이 천룡팔부 개정판에서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소봉이 작품 내에서 쓴 초식은 저 28개의 초식 중 일부 뿐인데, 특히 항룡유회, 라는 초식을 즐겨 사용하였다. 이는 주역의 건괘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소봉이 주역에 통달하였다는 묘사는 전혀 나오지 않지만 - 통달하였다면 의제인 단예가 그랬을 것이다 - 굳이 초식의 힘을 발휘하는데에는 주역의 도움이 필요없었는지 그의 초식을 받아낼 수 있었던 인물은 없었다.

 

이런 항룡십팔장을 익혔었으니 홍칠공의 무공의 수위 또한 앞서 말한 동사서독에 가히 비견할 만하리라. 동사서독, 에서의 홍칠공의 무공은 젊을 때부터 서독과 비견할 만한 정도로 나타나 보인다. 앞으로 어차피 앞으로 거지가 될 것이 분명하지만, 젊은 시절엔 거지가 아니었었던 북개는 천하제일의 검수가 되기 위하여 무림천하를 종횡하면서 다닌다. 그러다가 우연히 구양봉이 있는 사막에 도착하고는 함께 일을 시작하면서 세월을 보낸다. 구양봉은 홍칠공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았었지만 그의 무공이 탐나 함께 일하기 시작하였다. 그도 그럴게 홍칠공은 앞서 의뢰를 받았던 사람이 해결못하였었던 사막의 도적들을 한 칼에 모조리 제압하였으니 인정안할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홍칠공에게 아내가 찾아오면서 그의 생활은 바뀌기 시작한다.

 

벌써 며칠째 기다리는군.

 

쫓아도 안가는데 어쩌겠소?

 

누가 안된다고 했었나? 다 하기 나름이라네. 나도 예전엔 자네 같았지.

 

천하를 얻기 위해선 여자를 버려야 되는줄 알았던 구양봉은 자신의 모습과 홍칠공을 겹쳐보면서 후회를 내뱉는다. 하지만 여전히 홍칠공에게는 그의 아내가 버겁기만 하였다. 하지만 쫓아보내도 떠나지 않는 그녀를 보면서 홍칠공은 점차 조급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여기서 홍칠공과 구양봉의 차이가 드러난다. 구양봉이었다면 자신을 기다리는 아내를 죽임으로써 거기서 벗어나려고 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후에 몇 번이고 후회를 하며 회한을 곱씹을 것이다.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하고. 하지만 물론 돌아간 뒤에는 구양봉이라면 몇 번이고 똑같이 그녀를 죽일 것이다. 하지만 홍칠은 그와는 달랐다.

 

난 당신처럼 되기 싫소.

 

벌써 몇 번이고 구양봉에게 퇴짜를 맡은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돈이 없다는 이유로 구양봉에게 자신의 남편을 죽인 원수들을 죽여달라는 의뢰를 거절당하고 있었다. 구양봉은 몇 번이고 그녀에게 돈이 없으면 몸이라도 팔아서 돈을 마련하라고 권유했지만 그녀는 '그렇게 하기는 싫다', 고 말했다. 남편의 원수를 갚는데 몸을 팔다니, 말도 안되는 일이니 그녀의 거절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런 그녀가 홍칠공에게 의뢰를 하였다. 제발, 제발 남편을 죽인 저 무사들을 죽여주세요. 제가 드릴 수 있는 대가는 이 달걀 하나 뿐입니다. 하지만 제발 제 의뢰를 받아주세요. 몇날을 고민하던 홍칠공은 검을 집어들고 뛰쳐나간다. 끝내 그는 자신의 아내 - 로 상징되는 그 무엇 - 를 죽이지 못한 것이었다. 격렬한 싸움끝에 무사들을 모조리 죽이고 돌아온 홍칠공의 손가락은 아홉 개였다.

 

난 당신처럼 되기 싫소.

당신은 달걀 하나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지는 않을테니

 

몇 번이고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을 죽이고 후회할 수 있는 구양봉과는 달리 홍칠공은 후회를 만들지 않기로 결심했다. 가난한 여자의 의뢰를 받아들였던 것은 그 첫걸음이었다. 구양봉은 앞으로도 미래를 걷더라도 과거를 후회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홍칠공은 미래에는 미래의 일만을 바라볼 것이다. 그것을 알기에 구양봉은 홍칠공에게 질투를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여기, 이 자는 자신이 걷지 못하는 삶을 살아가리라. 자신과 정 반대의 길을 걷게 되리라. 가난한 여자는 자신의 의뢰때문에 피투성이가 된 홍칠공을 보고는 구양봉에게 제발 치료해달라고 매달리지만 구양봉은 매정하게 거절하고는 다시금 가난한 여자에게 윽박지른다. 네가 뭔가를 의뢰하고 싶다면 몸이라도 팔아라, 라고. 구양봉은 홍칠공에게 질투를 느꼈지만, 이 질투는 단순한 질투가 아니었으니, 자신은 도저히 가지 못하는 길을 걷는 사람에 대한 질투였다. 애초부터 같은 길을 걸을 수 있고, 그 길에서 차이가 나는 것이라면 이렇게까지 질투를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구양봉은 도저히 걸을 수 없는 길을 걷고 있었기에, 그리고 구양봉 스스로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자신의 좌절감을 감출 수 없었다. 결국 그런 질투와 화를 마주한 가난한 여자는 죄책감에 자신의 몸이라도 팔아서 구양봉에게 치료를 부탁하려고 하지만 그런 그녀를 홍칠공은 꼭 붙든다.

 

기억하시오, 항상 당신을 바라보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5. 그리고 다시, 동사東邪 황약사.

 

난 그녀에게 내가 그녀를 사랑한다는 것을 절대 말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맛보지 않은 과일이야말로 가장 달콤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매년 황약사는 구양봉의 형수를 찾아간다. 구양봉의 형수는 황약사에게 자신의 아들이야기와 함께 구양봉의 이야기를 매번 꺼낸다. 구양봉의 친구로 남아있는한 황약사는 계속 그녀에게 찾아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아들을 바라보면서 항상 구양봉을 떠올리고, 그런 구양봉은 사막의 한 가운데에서 그녀를 그린다. 구양봉때문에 구양봉의 형수를 찾아갈 수 있었지만, 그런 그녀는 그에게 도저히 도달할 수 없을 만큼 너무나 멀다. 그녀들 사이에 황약사는 마치 전령처럼 오간다. 그래서 황약사는 항상 동쪽에서 구양봉을 찾아간다. 사실은 황약사는 그녀를 사랑했었다. 그녀를 잊기 위하여 다른 친구의 아내와 불륜도 저지르고, 술김에 모용연에게 추파를 던지기까지 했었지만, 그녀의 그림자는 그의 마음 속에서 절대로 지워지지 않는다. 황약사는 조용히 읊조린다. 구양봉의 형수가, 그녀가 사랑이라는 경연에서 우승하지는 못하였으리라. 차마 그녀를 사랑의 승리자라고 할 수는 없으리라, 라고. 그녀는 사랑하는 구양봉을 버리고 그의 형과 결혼하였으며, 그 결혼은 행복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런 그녀를 자신에게 비교하면서 나지막히 탄식한다.

 

하지만 난 처음부터 졌다.

 

자신에게 복사꽃을 좋아하는 법을 가르쳐 준 그녀. 황약사에게는 누구보다도 소중한 사람이었지만, 항상 구양봉을 매개로 다가갈 수 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다면 황약사는 그녀한테는 주변인이었을 뿐이니. 죽음이 다가왔다는 것을 느낀 그녀는 구양봉에 대하여 피를 토하듯 오열하면서 속내를 털어놓는다. 말로 사랑한다는 말을 해야만 영원한 줄 알았다면서, 만약에 다시 되돌릴 수 있다면.. 되돌릴 수 있다면 반드시 돌아가겠노라고. 왜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 이루어지지 못할까? 정말 많은 사람들이 정말 많은 사랑을 하고, 정말 많은 눈물을 흘리며 이별로 끝을 맺는다. 왜 그럴까? 사랑만 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게 아닐까? 그게 아니다. 아니, 그게 아니었다. 두 사람의 사랑만 있더라도 그 사랑 자체가 걸림돌이 되는 줄 누가 알았겠는가.

 

왜 그와 결혼하지 않았소?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았어요.

 

때로는 말이 필요없는 경우도 있는 법이오.

 

결혼 전야에 그녀는 구양봉을 만났다. 구양봉은 그녀보고 함께 도망가자고 말했지만 그 말로는 움직이기에 충분하지가 않았다. 그런 그녀를 구양봉은 억지로 범하고 사막으로 떠나고 만다. 구양봉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작정으로 그런 일을 저질렀으며, 그것을 알기에 그녀는 평생 구양봉을 보지 못하리라고 생각하며 살아가게 되었다. 황약사는 죽음을 앞둔 그녀에게 때로는 말이 필요없는 경우도 있다고, 그 사실을 그녀가 모를 거라고 여기고 낮게 읊조렸지만, 그녀는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알지만 받아들일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가 나를 그대로 떠나갈 것이리라고.  그가 나를 붙잡으려고 내미는 손을 뿌리친다면 그는 다시는 손을 내밀지 않을 거라는 것을. 그게 거절당하기 전에 먼저 거절하는 구양봉이라는 것을. 끝없는 확인은 사랑의 속성이다. 여기서 그 둘의 사랑은 서로의 성격과 엇갈려 이윽고 파국을 맞게 되니, 이것이 바로 사랑 자체가 걸림돌이 되는 인 것이다.

 

내가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에는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없었죠.

 

다시 시작하기를 바라지만, 동시에 그것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 그녀는 잘 알고 있다. 다시 시작한다고 해서 구양봉이 새로운 선택을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구양봉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거절당하기 싫어서 먼저 거절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를 위하여 그녀는 마지막으로 취생몽사를 남긴다. 그녀는 이제 죽음으로 사랑을 완전히 떠나겠지만 홀로 살아갈 구양봉이 걱정된 것이다. 그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받아들이지 못하기에 미래에 무엇도 기대하지 않으며, 거절당하기 싫어서 먼저 거절하기에 어떠한 관계도 맺지 못하고 과거만 그릴 사람이기에. 하지만 정작 구양봉은 마시지 않고 마지막, 아니 가장 처음에 황약사가 구양봉에게 권한 취생몽사를 마시고 모든 기억을 잊어버린다. 더이상 구양봉의 친구가 아닌 것이다. 그렇기에 더이상 자신이 사랑한 여자한테로 다가갈 수 없으며, 다가갈 수 없을 바에야 영영 잊어버리는 것이 나을지어니 - 동시에 그는 자신이 사랑하였던 여자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린다.

 

인간이 번뇌가 많은 까닭은 기억력때문이라 한다.

그해 부터 난 많은 걸 잊고 오직 복사꽃 좋아한 것만 기억했다.

 

그리고 황약사는 도화도, 복사꽃 핀 섬의 주인이 된다.

 

 

 

6. 마지막, 서독西毒 구양봉.

 

구양봉의 곁에는 이제 아무도 없다. 그는 황약사가 남기고 간 취생몽사를 살짝 들이켜보지만 다시 내던져버린다. 그는 모든 것을 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여전히 과거에 얽매인 그는 사막을 내려다보면서 독백한다.

 

잊으려 할수록 더 기억에 또렷히 남는다.

 

그녀는 그 술을 마시고 구양봉이 자신에 대하여 완전히 잊어버리기를 바랐었지만, 동시에 자신을 영영 잊지 않기를 바랐다. 취생몽사는 술 이름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녀와 구양봉이 서로를 마주볼 때 그녀가 말한 농담이기도 하였다. 농담에서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무엇인가를 잃어버리고 싶다면 그걸 간직한다면 언젠가 잃어버리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반대로 무엇인가를 간직하려고 한다면 그걸 잃어버리려고 한다면 어떨까?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으로 슬퍼할바에야, 차라리 완전히 잊는 게 어떻겠는가? 하지만 잊지 못한다면 영원히 그 사랑을 그리며 살아가달라.

 

그리고 구양봉은 후에 설산에서 홍칠공과 겨룬 후 함께 목숨을 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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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3-05-31 02:39   좋아요 0 | URL
읽다보니 <채운국 이야기>가 조금 떠오르기도 하는군요
글 속에 나온 사람들 사랑이 엇갈리다니... 여기에는 없다 해도 잘된 사람도 있나요
홍칠공을 질투한 구양봉은 홍칠공과 싸우다 죽는군요
무엇인가를 이루려면 사랑도 하면 안 된다고 하는데, 마지막에 잘되는 사람은 사랑도 한 사람이에요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좋은 것이다는 거겠죠^^


희선

가연 2013-06-04 01:00   좋아요 1 | URL
와, 채운국 이야기 아세요? ㅎㅎ 왠지 반갑습니다, 풋.

잘된 사람은 음.. 없네요, 천하오절중에는... 그나마 동사가 현상유지를ㅎ
ㅋㅋㅋ 동감합니다. 마지막에 잘되는 사람은 사랑도 한 사람이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