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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 1916-1956 편지와 그림들 - 개정판 ㅣ 다빈치 art 12
이중섭 지음, 박재삼 옮김 / 다빈치 / 2011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정확히 오후 3시경이었나 봅니다. 흐린 하늘에 휙 긋고 지나가는 빗줄기. 창유리로 맥없이 떨어지던 빗방울. 바람이 불고 지난 가을의 마른 낙엽이 스산하게 흩날렸습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자연의 섭리가 섞바뀌는 계절의 빈 자리에서 고독처럼 머물렀습니다. 이 순간에도 삶의 가장 밑바닥을 밟고 있는 어느 예술가의 고독한 외침이 들릴 것만 같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잔혹한 것이 예술입니다. 피를 토하지 않는 예술은 다 거짓처럼 보일 뿐, 한 점 감동도 전하지 못합니다.
빈센트 반 고흐의 편지는 워낙 유명하여 그림에 무지한 저도 몇 번이나 읽고 보았습니다. 그는 위대한 화가이기 이전에 뛰어난 문학가요, 명철한 철학자였던 듯합니다. 그가 그린 그림의 기저에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사색의 물결들이 암반처럼 자리했겠지요. 그러나 예술을 향유하는 사람들은 고통 속에서 살았던 예술가의 삶을 더는 기억하지 않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화가 이중섭도 크게 다르지 않을 듯합니다.
제가 이중섭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아마도 미술 교과서의 한 귀퉁이에 소개된 그의 그림을 보았을 때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너무나도 유명한 <황소>였지요. 국어 교과서에도 그와 관련한 에피소드 한 편이 소개되었던 듯합니다. 저는 그때 선생님이 일러주신 대로 받아적었을 뿐, 그가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에 대한 어떠한 호기심도 없었던 듯합니다. 제 머릿속에는 그저 이중섭이라는 이름이 서 푼짜리 지식으로만 남아 있었습니다.
오늘 제가 <이중섭 편지와 그림들>을 우연처럼 손에 잡았을 때, 저는 그저 서 푼짜리 지식에 약간의 윤기를 더하고자 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의 삶과 예술에 대한 열정은 가벼운 지식으로 남겨두기에는 너무도 큰 것이었습니다. 모든 위대한 예술가가 그렇듯 그도 시대의 우울함을 온 몸으로 겪어낸 듯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을 일본에 두고 그가 견뎌야 했던 가장으로서의 책임과 그림에 대한 희구와 갈망은 제가 읽었던 빈센트 반 고흐의 삶과 무척이나 많이 닮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꼭 그렇게만 말할 것도 아닌 것이 고흐의 그림이 사색과 순간적 느낌, 자연에 대한 경외에서 비롯되었다면 이중섭의 그림은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태현, 태성에 대한 그리움과 순수, 강한 생명력에서 비롯되었던 듯합니다.
"나만의 사람, 마음의 사람인 남덕이여! 나는 당신의 편지와 그립고 그리운 아이들과 당신의 사진을 기다리고 있소. 지금은 싸늘하고 외로운 한밤중, 뼈에 스미는 고독 속에서 혼자 텅 빈 마음으로 있소. 그림도 손에 잡히지 않아 휘파람, 콧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때로는 시집을 뒤적이기도 하오. 당신의 편지가 늦어지는 걸로 보아 혹시 당신이나 아니들이 감기로 눕지나 않았는지요?" (p.121)
책에는 유화, 수채화, 스케치, 구아슈화, 은종이 그림 등 이중섭의 대표 작품 90여 점과 더불어 1953년부터 1955년까지, 이중섭이 일본에 있던 아내 이남덕(마사코) 여사와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 이남덕 여사가 이중섭에게 보낸 편지, 이중섭이 결혼 전 마사코에게 띄운 그림엽서 등이 담겨 있t습니다. 놀라운 것은 남존여비의 사상이 시퍼렇게 살아있던 그 당시에 이중섭의 편지는 아내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하나 숨김 없이 적고 있다는 점입니다. 어쩌면 요즘의 연인들이 쓰는 연애편지도 이보다 더 뜨겁고 열렬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비록 하나하나의 문장이 미려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걱정, 경제적으로 무능했던 가장으로서의 심경, 고생하는 아내에 대한 위로와 감사의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모든 복합된 감정이 그의 그림으로 표현된 것이겠지요.
"예술은 무한한 애정의 표현이오. 참된 애정의 표현이오. 참된 애정이 충만함으로써 비로소 마음이 맑아지는 것이오. 마음의 거울이 맑아야 비로소 우주의 모든 것이 올바르게 마음에 비치는 것 아니겠소? 다른 사람은 무엇을 사랑해도 상관이 없소. 힘껏 사랑하고 한없이 사랑하면 되오. 나는 한없이 사랑해야 할, 현재 무한히 사랑하는 남덕의 사랑스러운 모든 것을 하늘이 점지해주셨소. 다만, 더욱더 깊고 두텁고 열렬하게, 무한히 소중한 남덕만을 사랑하고, 사랑하고 또 사랑하고 열애하고, 두 사람의 맑은 마음에 비친 인생의 모든 것을 참으로 새롭게 제작 표현하면 되는 것이오." (p.128)
이중섭의 그림은 엄혹한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꿈이요,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원했던 그의 기도요, 단란한 가정을 꿈꾸었던 절실한 소망일 것입니다. 비록 그 모든 것들이 그의 삶에서 이루어지지 않은 채 그림 속에서만 덩그러니 남게 되었지만 현실을 사는 우리는 그의 그림을 보면서 꿈을 꾸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으며 현실의 고단함을 위로받는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