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영화포스터 커버 특별판)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3월
평점 :
품절


영국의 소설가 줄리언 반스를 만난다는 것은 '소설을 통한 인문학적 채험'을 하는 색다른 경험입니다.  말은 많이 들었지만 섣불리 다가갈 수 없었던, '인문학'이라는 거대한 무게에 짓눌리기보다는 오히려 궁금증과 호기심을 증폭시켜 대담하게 '비밀의 화원'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찾도록 만드는,  설렘과 기대로 '인문학'에 한발 다가서게 하는 그런 소설을 만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기분 좋은 일입니다.

 

저로 하여금 줄리언 반스를 처음 알게 해준 책은 <내말 좀 들어봐>였습니다.  출간된 지 벌써 10여 년이 흘렀군요.  사랑에 대한 보편적인 주제를 다루는 소설임에도 결코 지루하거나 진부하지 않은, 작가만의 독특한 시각과 재치가 넘치는 표현들, 무엇보다도 철학과 상식을 넘나드는 작가의 지성은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저는 오늘 줄리언 반스의 신작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읽었고, 제 예상대로 호평이 쏟아지더군요.  예감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줄리언 반스의 작품은 소설 속의 한 구절 한 구절을 예사로 넘기기 힘든, 말하자면 소설을 통째로 옮겨 적고 싶은 유혹을 떨치기 어렵게 하는 소설이지만 리뷰라는 한정된 틀 속에서는 그런 짓거리는 통하지 않겠지요.  그러나 저는 지금 쓰는 리뷰에 제가 특히 마음에 두었던 작품 속의 구절을 최대한 많이 인용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다음의 인용문부터 보시죠.

 

"우리는 살면서 우리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얼마나 자주 할까.  그러면서 얼마나 가감하고, 윤색하고, 교묘히 가지를 쳐내는 걸까.  그러나 살아온 날이 길어질수록, 우리의 이야기에 제동을 걸고, 우리의 삶이 실제 우리가 산 삶과는 다르며, 다만 이제까지 우리 스스로에게 들려준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우리에게 반기를 드는 사람도 적어진다.  타인에게 얘기했다 해도, 결국은 주로 우리 자신에게 얘기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p.165)

 

이 소설을 관통하는 주제와 같은 구절입니다.  적어도 우리는 자신의 과거에 대해, 세월이 한참이나 흐른 후에 바라보는 과거에 대해 일말의 죄책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 시절로 되돌아가 자신의 과오나 실수를 바로잡을 수는 없다 하더라도, 예컨대 그 시절의 나는 경험이 부족해서, 보통의 젊은이가 갖는 치기 어린 과대한 감정 표출로 인하여, 혹은 으스대며 뻐기고 싶은 영웅심의 발로였다는 말로 우리의 과오나 실수를 합리화한다는 것은 조금쯤 비겁해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나이가 들수록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과거의 사실을 가감하고, 기름을 치며, 때로는 망각이라는 그늘 뒤로 숨기도 합니다.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말입니다.  우리의 기억이 얼마나 미약하고 터무니 없는 것인지요.  게다가 그 기억을 바로잡아 줄 친구들도 하나둘 이 세상을 떠나고 나면 결국엔 그 기억들이라는 게 나 스스로에게 했던 독백에 불과한 것이겠지요.  

      

"즉, 바로 우리 코 앞에서 벌어지는 역사가 가장 분명해야 함에도 그와 동시에 가장 가변적이라는 것.  우리는 시간 속에 살고, 그것은 우리를 제한하고 규정하며, 그것을 통해 우리는 역사를 측량하게 돼 있다.  안 그런가?  그러나 시간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 속도와 진전에 깃든 수수께끼를 파악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역사를 어찌 파악한단 말인가.  심지어 우리 자신의 소소하고 사적이고 기록되지 않은 것이 태반인 그 단편들을."    (p.106~p.107)

 

위에 인용한 글은 이 소설의 또 다른 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인식하는 역사에 대한 문제입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토니 웹스터는 학창 시절 '역사가 무엇이냐'는 선생님의 질문에 대해 역사는 ‘승자들의 거짓말’이라고 답합니다.  그러나 노년에 이른 그는 ‘역사는 살아남은 자, 대부분 승자도 패자도 아닌 이들의 회고에 가깝다’고 번복합니다.  소설의 중심축을 이루는 또 다른 인물인 에이드리언은 같은 질문에 대해'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라고 말합니다.  라그랑주의 말을 인용한 것이지요.  선생님은 덧붙입니다.  '역사는 패배자들의 자기기만'이라고.

 

"어쩌면 이것이 젊은 사람과 나이 든 사람의 차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젊은 시절에는 자신의 미래를 꾸며내고, 나이가 들면 다른 사람들의 과거를 꾸며내는 것."    (p.141)

 

그렇다면 기록되지 않는 평번한 사람들의 삶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분명 시간과 역사 속에 존재했었지만 기록되지도, 또는 기억되지도 않는 개인의 삶은 무의미한 것으로 남는 것일까요?  그리고 그러한 삶은 역사에 어떤 방식으로 기여하는 것이며, 개인은 자신의 삶을 어떤 방식으로 수용해야 할까요?  자신의 삶이 만족스럽지 않다고 확신하는 순간 삶을 거부해야 마땅할까요?  소설 속에서도 인용되고 있습니다만 카뮈는 자살이 단 하나의 진실한 철학적 문제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책에서 주인공 토니는 자신의 애인이었던 베로니카가 친구 에이드리언을 사랑하게 되면서 저주에 가득찬 편지를 보냅니다.  공교롭게도 토니가 편지에 썼던 예언은 현실에서 그대로 재현되었고, 에이드리언은 자살로 생을 마감합니다.  노년에 이르러 까맣게 잊고 있었던 자신의 편지와 불행한 삶을 살았던 주변 사람들을 보면서 토니는 자신의 삶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우리는 살면서 좌충우돌하고, 대책없이 삶과 맞닥뜨리면서 서서히 기억의 창고를 지어간다.  축적의 문제가 있지만, 에이드리언이 의미한 것과는 무관하게 다만 인생의 토대에 더하고 또 더할 뿐이다.  그리고 한 시인이 지적했듯, 더하는 것과 늘어나는 것은 다른 것이다."    (p.153)

 

"나는 인생의 목적이 흔히 말하듯 인생이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님을 얼마의 시간이 걸리건 상관없이 기어코 납득시킨 끝에, 고달파진 우리가 최후의 상실까지 체념하고 받아들이게 하는 데 있는 건 아닌가 생각할 때가 가끔 있다."    (p.183)

 

주인공 토니는 궁극적으로 자신을 자책하며 후회하고 있습니다.  일견 회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변하는 것은 없습니다.  어찌 됐건 살아 있는 자에게는 또 다른 내일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죠.  토니의 아내였던 마거릿은 말합니다.  "토니, 이제 당신은 혼자야."라고 말입니다.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간에 자신이 저질렀던 젊은 시절의 과오는 여전히 지워지지 않은 채 토니의 노년에 영향을 미칩니다.

 

"내 애기의 요지는, 장담컨대, 회한의 주된 특징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데 있다.  이미 까마득한 시간이 흐른 마당에 사과를 하거나 보상해봤자 부질없는 짓이다.  하지만 내가 틀린 거라면?  시간을 거꾸로 돌려서 회한을 단순한 죄책감의 문제로 바꾸어, 사과를 하고 용서받을 방도가 있다면?  베로니카가 생각한 것처럼 내가 나쁜 놈이 아니었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녀가 기꺼이 그를 믿어준다면?"    (p.186) 

 

저는 이렇게 리뷰를 마칠까 합니다.  추리소설의 기법으로 씌이진 이 소설은 제 리뷰와는 다르게 읽는 재미도 함께 느낄 수 있습니다.  추측컨대 이 소설을 읽은 독자라면 이언 매큐언의 소설 <속죄>로 이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 반대일 수도 있겠군요.  제 바람입니다.  부디 예감이 틀리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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