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생이 시골이어서 그런지 나는 집을 고를 때도 인근에 산이 없으면 왠지 불안하고, 그런 곳에서는 아무리 오래 살아도 쉽게 정을 붙이지 못한다.  그런 까닭에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 근처에도 야트막한 산이 있다.  평일 아침에 그 산을 매일 오르다보니 몇 년 되지 않아 나는 그 산의 속살을 훤히 꿰뚫게 되었다.  하여, 요즘처럼 밤이 긴 계절에도 달빛도 한 줄기 없는 캄캄한 길을 손전등도 없이 잘 걷는다.  아마 눈을 감고 걸어도 눈 뜬 초행자 정도는 따라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요즘 오르는 산과 내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고향의 산천과는 산에 사는 식물들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눈으로 뻔히 보면서도 그 이름을 모른다는 게 어찌나 얼띠고 한심하던지.  가끔은 산에서 우연히 만나는 사람에게 묻기도 하고, 이따금 식물도감도 찾아 보면서 이제는 어지간한 것들의 이름은 외우게 되었지만 처음에는 여간 답답한 게 아니었다.  식물이나 사람이나 제가 나고 자란 곳을 떠나 낯선 곳에 자리를 잡아  정착하는 데는 시간도 걸리고, 품도 드는 일이라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산에는 소나무, 아카시아, 은사시나무, 졸참나무, 밤나무, 쥐똥나무, 산벚나무, 찔레나무 등 수종이 비교적 다양한 편이지만 요즘 내 눈에 들어오는 나무는 밤나무와 졸참나무다.  미끈하게 쭉 뻗어 몸피도 야리야리한 은사시나무와는 달리 가지도 많고 몸통에 잔주름도 많은 그 나무들이 내 눈을 잡아 끌었던 것은 단지 겨울이 다 지나도록 칙칙한 작년의 갈잎을 다 떨구지 못하고 있다는 이유 하나였다.  이제는 말라 오그라든 채 가지 끝에 간신히 매달려 있는 나뭇잎들.  때로는 약한 바람에도 어떤 무게감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워진 그 잎들이 그렇게 겨울을 나는 이유가 궁금했다.

 

손을 대면 금방이라도 와삭 부서질 것 같은 마른 갈잎이 매서운 겨울 눈보라를 이기고 봄철 새순이 돋을 무렵이 되어서야 묵은 옷을 벗는 이유는 도대체 뭘까?  줄기를 보호하는 보온의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닐 테요, 그렇다고 잡아먹힐까 두려워하여 허세를 부리는 것도 아닐 텐데 말이다.  식물학자들이 들으면 웃겠지만 나는 요즘 그 나무들이 배려심이 많은 까닭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새순이 막 돋아날 무렵, 꽃샘추위로부터 여린 새싹을 지켜주기 위해 겨울 한철을 그렇게 악착같이 매달려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강한 봄바람을 타고 어딘가에 있을 어린 새싹을 찾아 멀리 날아가는 갈잎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 무한의 사랑과 배려심에 생각이 이르자 나는 밤나무와 졸참나무를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되었다.  게다가 가지에 붙어 엄혹한 겨울을 나기 위해서는 잎의 수분을 모두 날려보내고 최대한 가벼워져야 한다는 사실도 갈잎을 통해 배웠다.

 

요즘 나는 아침에 산을 오를 때마다 내 손이 닿을 수 있는 등산로 주변의 밤나무와 졸참나무에 가만히 손을 얹고 그 사랑과 배려를 생각하곤 한다.  식물도 그럴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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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를 더할수록 명절을 보내는 것이 더욱 힘겹습니다.

마치 내게 남겨진 에너지를 각혈을 하듯 어딘가에 모두 게워내고 돌아온 느낌입니다.  오가는 도로에, 사람들과의 대화에, 만나는 사람들의 얼굴에 새겨진 고단함에, 그리고...

무엇보다 견딜 수 없는 것은 감동이 없는 만남이 아닐까 싶습니다.  감동까지는 아니어도 적어도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시간들은 나로 하여금 잠시도 견딜 수 없게 합니다.

 

삶이란 3차원의 실재(實在)에 심각(心覺)을 더하는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보고, 듣고, 느끼는 현실에 마음을 더하는 일, 삶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듯싶습니다.  마음이 느껴지지 않는 현실은 삶에서 죽은 시간이자, 지워진 시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흔하디 흔했던 감동이 썰물처럼 스러지고 있음을 시시각각 느낍니다.  어쩌면 나는 지워진 시간 속에서 그림자로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철수의 <나뭇잎 편지>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살아 보면, 인생은 외롭게 혼자인 게 제 모습인 듯합니다.

제 그림자건 제 내면이건 제가 저를 길동무 삼아 살아가는 게 인생이지요.

어른이 된다는 건 그렇게 혼자 걷는 데 익숙해지고 태연해지는 것이기도 하고요."

 

저는 아직 어른이 되려면 멀었나 봅니다.

내가 바로잡을 수 없는 다른 사람의 말과 행동에 하시로 휘둘립니다.  내 말과 행동에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이 나처럼 또 그렇게 상처를 받고 많이 외로웠겠지요?  제 몸보다 마음이 먼저 늙는다는 건 참으로 서글픈 노릇입니다.  아내의 처진 어깨가 내 눈에 아프게 박힙니다.  이런저런 풍경들 앞에 그저 담담할 수 있는 날은 언제일까요?

 

가족들과 헤어져 빈 숙소로 돌아온 오늘, 차 한 잔을 앞에 놓고 진한 고요를 우려내고 있습니다.

비 그친 하늘에는 안개가 자욱하고, 먼 산이 우련하여 마음마저 흩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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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 이런 생각이 든다.

딱히 어떤 이유에서라기보다 우연성에 기인한 한 사건(우연의 발현이자 삶의 한 조각)은 마치 수많은 우연을 싣고 이제 막 플랫폼에 진입하는 열차의 감속처럼 느껴진다.  사람들은 대개 우연이 우연으로 존재하는 한 자신의 삶과 그것들을 굳이 결부시키려들지 않지만(혹은 우연의 존재조차 인식하지 못하지만)  그 우연이 모여 어떤 질량으로 환원될 때 사람들은 비로소 그 존재를 재삼재사 깨닫곤 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개입되는 것은 스트레스이다.  스트레스는 마치 어떤 사건(우연의 결합체)을 구성하기 위한 촉매제처럼 보이는데 그 느낌은 대략 이렇다.  감각적으로 느껴지는 스트레스는 우리가 마치 깊은 수조에 거꾸로 매달린 채 수조의 물이 서서히 차오를 때 느껴지는 육체의 감각과 유사하다.  먼저 머리가 잠기고, 어깨, 가슴, 몸통, 무릎, 발, 급기야 발바닥까지 완전히 잠기면 우리는 깊은 무력감에 빠지게 된다.

 

때로는 우연을 사건으로 결합하던 스트레스가 그 우연 속에 스며든 채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발현된 사건이 종결되고 또 다른 우연이 새로운 사건을 준비할 때면 숨겨졌던 스트레스는 자신의 힘을 과시하려는 듯 여지없이 우리의 몸을 깊은 무력감 속으로 끌고간다.  밀란 쿤데라는 무력증 뒤에 오는 죽음에의 유혹을 현기증이라 했다.  동일한 높이에서의 행진에서 벗어나 가장 높은 곳으로 상승하려는 욕구와 가장 낮은 곳으로 떨어지려는 욕구 중 어느 것이 더 강한 것일까?  스트레스는 상승의 욕구보다는 추락의 욕구를 증가시킨다.

 

간혹 심한 스트레스는 우리의 영혼과 육체를 동시에 지배하기도 한다.  깊은 무기력증으로 인도하는 이러한 스트레스는 우리 몸의 세포 곳곳에 스며들어 육체적으로 옴짝달싹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 자신의 세포를 파괴함으로써 스트레스의 결박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게 한다.       

 

"인간은 가장 깊은 절망의 순간에서조차 아름다움의 법칙에 따라 자신의 삶을 작곡한다."고 했던 밀란 쿤데라의 말은 그 결말이 어떠하냐의 기준에서 했던 말은 아닌 듯하다.  그 결말이 해피엔딩이든, 또는 비극적 결말이든 그 모든 것은 인간 개개인이 바라는 바대로 아름답게 이루어진다는 의미이다.  결국 운명이라는 것은 우리가 바라는 어떤 결말, 혹은 사건을 향해 알 수 없는 우연들이 아름다움의 법칙에 따라 결합할 뿐이다.  스트레스라는 촉매제와 함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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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의 병문안을 다녀왔습니다.

친구는 당뇨 합병증으로 몇 년째 병원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병문안 날짜를 차일피일 미루던 나는 그마저도 핑계를 댈 수 없는 처지에 이르고 말았던 것입니다.  친구는 괴사가 진행되는 한 쪽 발의 절단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 일정이 다음주로 정해졌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나는 더럭 겁이 났던 것입니다.

 

초췌해진 친구의 얼굴을 오래도록 지켜볼 수가 없었습니다.

아직까지는 건강에 별 문제가 없는 나로서는 아픈 친구에 대한 일말의 동정심, 또는 의례적인 요식행위인 것만 같아 미안한 마음이 먼저 들었던 것입니다.  검게 변한 발가락에서는 살 썩는 냄새가 나는 듯했습니다.  끔찍했습니다.

 

병실 한쪽에서는 방학을 맞은 친구의 아들이 보조침대에 앉아 스마트폰 게임에 열중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아빠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말입니다.  빠르게 움직이는 손가락과 눈동자는 세상 어느 것에도 눈곱만큼의 관심도 없다는 것을 대변하고 있었습니다.  알 수 없는 서글픔이 몰려왔습니다.  그리고 문득, 세상의 종말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 병실의 풍경이 그 전조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문명은 육체를 파괴하는 쪽으로 발전해왔고, 미래의 문명은 영혼을 파괴하는 쪽으로 발전하겠구나'하는 무서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생각이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자본주의 발달과 함께 급속도로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온 현대 문명은 주로 육체의 편리에 국한된 것이었습니다.  자동차와 각종 전자제품 등은 우리 주변에서 이제는 너무도 흔한 것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화공약품 덩어리로 변질된 각종 식재료는 또 어떻습니까?

 

인간 육체의 파괴는 예견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기구의 발달은 이제 그 정점에 다다른 듯 보입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탐욕은 브레이크가 없습니다.  각종 매스 미디어의 발달은 이제 스마트폰으로 진화했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아주 쉽게 잠식당하도록 고안된 것이지요.  육체를 파괴하도록 설계된 과거의 문명은 그나마 의학의 발달과 아직은 건재한 영혼으로 인해 생명마저 파괴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의 파괴는 무엇으로 막을 수 있을까요?

문명의 발전은 파괴와 무엇에서 다른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발전은 파괴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요?  과거에는 육체를, 미래에는 영혼을 파괴하는 쪽으로 문명은 '발전'하고 있습니다.  아니, '파괴'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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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4-01-10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래의 문명은 영혼을 파괴하는 쪽으로 발전하리라는 암울한 전망을 결코 한 귀로 듣고 흘리질 못하겠군요. 연초에 어떤 신문을 보니 '총균쇠'의 저자인 재레드 다이아몬드 교수의 인터뷰 기사가 실렸더라구요. 이대로 가다가는 지구별이 50년도 못 버틴다구요.

꼼쥐 2014-01-12 20:47   좋아요 0 | URL
저도 재레드 다이아몬드 교수의 의견에 동감합니다. 육체를 파괴하는 일은 비교적 오래 걸렸지만 인간의 영혼을 파괴하는 일과 그로 인한 지구 전체의 파괴는 가속화되리라는 생각이 들어요. 끔찍한 일이지만 말이죠.
 
에세이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새해를 맞는 기분은 언제나 약간의 흥분과 기대가 뒤섞이게 마련이지요.  그런 까닭에 저는 새해에는 주로 에세이를 읽곤 합니다.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는 데에는 에세이만 한 게 없다는 생각에서이지요.  그러나 연초에 출간되는 책은 얼마나 많은지요.  책을 고르는 일부터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자칫하다간 책욕심만 키우고 맙니다.  올해도 다르지 않군요.

 

 

 

대한민국의 현대문학사에서 최인호 작가만큼 영욕의 세월을 살았던 분도 드물지 싶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재학 시절에 등단하면서부터 시작된 작품 활동은 2013년 암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참으로 지난한 세월이었겠지요.  무수히 많은 작품이 영화화되고 인기와 명성을 한 몸에 받았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세인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기도 했습니다.  그가 떠나기 전 나는 <최인호의 인연>을 읽었습니다.  한 작가의 유고집을 읽는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입니다.  더구나 새해에 말이지요.  그러나 우리 곁을 떠난 노작가의 삶을 더듬는 것은 살아있는 자의 또 다른 의무가 아닐까요?

 

 

 

 

 

 

소설가의 산문집을 읽는 것은 나의 또 다른 즐거움입니다.  신경숙 작가의 <아름다운 그늘>을 읽었을 때도 그랬고, 공지영 작가의 <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를 읽을 때도 그랬습니다.  소설가의 산문집은 작가의 민낯과 같습니다.  나는 지금도 소설가의 산문집은 그냥 지나치지 못합니다.  왜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딱히 여행기를 즐겨 읽는 것은 아니지만 이따금 눈에 띄는 여행기가 있습니다.  여행지에서나 있을 법한, 자신의 속내를 가감없이 드러내는 그런 책은 쉽사리 눈을 떼지 못하겠습니다.  치장에 익숙한 수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에 지친 까닭이겠지요.  사람과 사람의 만남에 목마른 까닭이기도 합니다.

 

 

 

 

 

 

 

 

햇살이 쏟아지는 오후에 까무룩 잠이 들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될 수만 있다면 그렇게 자는 듯 죽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사는 게 뭔지 하는 유행가 가사의 한 소절쯤으로 삶의 가치가 낮아질 대로 낮아진 요즘 진정으로 나를 알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삶이 무엇인지 정답은 없다고 할지라도 그 비밀의 문을 살짝이라도 엿볼 수만 있다면 내게 남은 날들을 힘차게 살 수 있을 듯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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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4-01-06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 설레는 일은 많다. 하성란 에세이도 궁금합니다. 소설가의 에세이는 내공이 느껴져요~~~

꼼쥐 2014-01-08 13:20   좋아요 0 | URL
그렇죠? 그런데 소설가는 소설에 집중하고 독자들로 하여금 애타게 만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하루키처럼 너무 많은 에세이집을 출간하면 무덤덤해지거든요. 신경숙 작가처럼 너무 적어서도 곤란하지만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