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각은 뭐니 뭐니 해도 일어나자마자 산에 오르는 짧은 순간이다.

특히 오늘처럼 밤새 눈이 내린 날은 산을 오르기도 전에 한껏 들뜨고 설레게 마련이다.  연인과의 데이트 약속에 나가는 청춘남녀의 심정이랄까?  옷을 챙겨 입는 손길이 바빠지고, 등산화의 신발끈을 바짝 조이고, 옆집이 깨지 않도록 발뒤꿈치를 들고 조심조심 복도를 걷는다.  아파트를 벗어나면 차가운 아침 바람이 내 볼을 스친다.

 

등산로에는 사람의 발자국이 보이지 않았다. 눈 덮힌 산은 그야말로 한 폭의 동양화. 행복했던 기억들이 어린애마냥 눈밭을 뒹구는 동안, 멀리 내가 사는 아파트에도 하나둘 불이 켜졌다.  산다는 것은 이처럼 저마다의 가슴에 불을 밝히는 일이 아닌가.  아침이 왔노라고 어둠을 향해 당당히 선언하는 일일 터인데...  마을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이 계곡을 타고 올라와 키가 큰 상수리나무를 흔들고 지나갔다.  때마침 그 밑을 지나던 나는 갑자기 머리 위로 쏟아지는 눈 세례에 흠칫 놀랐다.  습기를 잔뜩 머금은 눈은 어지간한 바람에도 떨어질 줄 몰랐다.

 

산길에는 먹이를 찾으러 나왔는지 작은 산짐승들의 발자국이 점점이 이어지다 숲으로 사라지고, 잠이 덜 깬 산은 옅은 어둠과 고요 속에 잠겨 있다.  잔가지와  나무둥치에 붙은 눈이 겨울의 정취를 자아낸다.  묏등에도 눈이 소복하다.  뽀드득 뽀드득 발밑에 눈 밟히는 소리가 재미있다.  거대한 정적에 둘러싸인 산과 그 고요 속을 걷는 나는 처음서부터 하나였음을 알겠다.

 

능선을 따라 걷노라면 심살내리던 마음도 멀리 달아나고 어깨는 한결 가벼워진다.  입춘도 지났으니 봄도 멀지 않을 터, 샛노란 가벼움이 온 산을 뒤덮을 때면 보고픈 사람들과 유람이라도 떠나야겠다.  걸음걸음마다 발 밑에 밟히는 눈덩이가 내 발걸음을 마냥 느리게 했다.  조금만 더 머무르라고 내 발을 잡는 듯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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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쓴 산문집은 단순하지 않다.  주제에서부터 문체에 이르기까지 시인의 시선을 따라가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성긴 삶의 틈새를 메우는 시인의 섬세한 손길이 없었다면 삶은 그닥 아름답지 않은 그 무엇으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엄마와 딸', 동질적이면서도 반쪽의 다름으로 영원히 남을 둘의 관계애 대해 시인은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인생의 황혼기에 서있는 시인의 아련한 그리움이 책의 제목에서 묻어난다. 

 

 

 

 

 

 

 

 

우리가 살면서 배우고, 경험하는 모든 것은 결국 두려움없는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하고 생각할 때가 있다.  그런 생각이 들 때면 지금도 궁금한 것이 '얼마나 많이 알고, 얼마나 많이 겪어야 나는 죽는 순간에도 담담할 수 있을까?'하는 점이다.  의문은 꼬리를 물고 이어지지만 나는 매번 자신이 없다.  그러나 애써 외면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아직은 담담하게 이런 책을 읽을 수 있지만 죽음으로 귀결될 내 삶의 끝조차 담담히 바라볼 용기는 아직 내게 없다.

 

 

 

 

 

 

그저 머리로만 기억하던 어떤 것들이 어느 날, 어느 순간에 까닭도 없이 환한 빛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아무리 단순하고 명확한 지식도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 데에는 나름대로의 순서가 있나 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떤 계기가 주어진 것도 아닌데 기적처럼 그 의미를 깨닫는 순간이 그렇게 제각각일 수가 있을까?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그 기적과 같은 순간을 기대하며 이 책을 고른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은 '기하학의 눈'이 아닌 '감성의 눈'을 통하여 바라보는 세상을 소설로 옮긴다.  그의 작품의 매력은 바로 그것이 아닌가 싶다.  사물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 독자의 입장에서 그것은 작가의 친절한 배려로 생각되어진다.  다소 낯설게 받아들이는 독자도 있겠지만 말이다.  사색적이고 철학적인 소설 쓰기를 해 온 작가가 소설가의 입장에서 말하는 소설은 조금 다를 듯하다.  나는 여전히 밀란 쿤데라의 소설에 열광하지만 그가 말하는 소설의 관점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이 책이 기대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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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의 추리 소설가 아서 코난 도일을 모르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초등학생인 아들녀석도 요즘 그의 작품 '명탐정 셜록 홈즈'에 푹 빠져서 산다.  나 역시 그랬던 적이 있다.  그렇게 좋아하던 작가였으니 그와 연관된 책들은 보이는 족족 다 읽어치운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그때 읽었던 것 중에는 그의 일화를 담은 책이 있었다.  워낙 유명한 분이니 전해지는 일화도 꽤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중에 전보와 관련된 일화는 그의 위트와 천재성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어느 날 코난 도일은 국회의원, 사업가, 변호사,경찰 등 고위층에 있는 몇몇 친구들에게 같은 내용의 전보를 보낸다.

"이런 내용의 전보를 받으면 누구나 놀랄테지?"

그는 혼자 중얼거렸다. 그때 마침 그의 아내가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여보, 혼자 뭘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어요?"

"그게 말이오. 사람들은 흔히 자기는 전혀 죄를 안 짓고 사는 것처럼 뻔뻔스럽게 행동하거든.  그래서 정말 죄를 짓지 않고 사는 지 알아보기 위해 내가 전보를 띄웠소."

그러자 아내는 "전보를 뭐라고 띄우셨는데요?"하고 물었다.

코난 도일은 아내의 질문에 자신이 썼던 전보 내용을 들려주었다.

"<탄로났으니 어서 도망가시오!> 라고 써서 평소 가장 도덕적으로 행동한다는 친구들에게 보냈다오. 결과가 너무 궁금하군" 하며 마소를 지었다.

 

다음 날 도일은 그가 전보를 보냈던 친구의 집을 차례로 방문했다.  그러나 전보를 받았던 친구는 단 한 명도 집에 남아 있지 않았다.  집에 돌아온 그는 한숨을 쉬며,

"여보, 내 친구들은 모두 죄를 지었나 봐." 하였다.

아내는 도일에게 "모두 숨고 없던가요?"하고 물었다.

그러자 도일은, "다들 어제 집을 나가서 안 들어왔다지 뭐요.  그래서 가족들에게 어디 갔냐고 물었더니 가족들도 모른다는 거야.  그 정도면 알 만하지 않겠어?" 하고 대답했다. 

 

사실 코난 도일도 권력에 욕심이 없었던 것도 아니어서 지역 의원 선거에 두 차례 출마했었다.  표를 많이 얻지 못해 두 번 다 낙선했지만 말이다.

 

요즘 박 당선인은 내각인선 작업의 고충이 이만저만한 게 아닌 모양이다.  왜 아니 그렇겠는가.  총리 지명을 받았던 분도 자진 사퇴한 마당이니 누가 선뜻 나서겠는가.  그래서인지 박 당선인의 말은 더 가관이다.  인사청문 신상검증을 비공개로 하자는 것인데, 미국처럼 우리나라의 사정기관이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받고 있다면 물론 그렇게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신뢰도에서 꼴찌를 벗어나지 못하는 검찰,경찰,국세청에게 신상검증을 맡긴다면 신상검증을 하지 말자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더구나 비공개로.

 

박 당선인의 고충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다.  당선인의 측근 중에는 그동안 권력기관의 비호 아래 축재를 비롯한 갖은 불법을 저질렀던 사람들이 대부분일텐데 그들의 과거를 세탁하여 깨끗이 할 수도 없는 일이고, 권력의 감시를 받았던 인물들은 그나마 조금 깨끗하겠지만 그들 대부분이 진보적 성향의 인물들이라 코드가 맞지 않을 테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형국이니 당선인의 고민이 깊을 것이다.  도덕적으로 완전한 인물은 물론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상식선에서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인물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사람마저 찾기 어려웠으니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다'는 말만 되풀이 하는 게 아닌가.

 

차라리 코난 도일처럼 탄로났으니 도망가라는 전보를 띄우면 어떨까?  아니면 카톡 메시지를 날리던가.  그래도 남아 있는 사람에게 장관을 맡기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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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다는 인사를 할 겨를도 없이 봄날씨처럼 포근한 하루를 맘껏 즐겼다.

지난 연말연시의 혹독했던 추위도 그저 옛말이 된 듯, 이대로 봄이 오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요즘 부쩍 독서에 열을 올리다 보니 주변 사람들의 농을 자주 듣게 된다.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는다던데...'하며 살짝 말꼬리를 흐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올해 목표가 뭐길래 그렇게 책만 파는 거야?'하고 직설적으로 묻는 경우도 있다.  어느새 우리는 '독서란 큰 맘을 먹어야만 가능한 행위'쯤으로 인식하고 있음이다.  책이란 언제나 곁에 있고, 가볍게 읽을 수 있는 것임에도 말이다.  어른이 된 우리는 나도 모르게 책에 대한 두려움만 쌓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침에는 늘 그렇듯 마을 뒷산을 올랐다.  몇 년을 한결같이 올랐던 산인데 나는 단 하루도 같은 느낌을 받은 적이 없다.  어떤 날은 기온은 비슷한데 달이 뜨지 않았고, 어떤 날은 지난 해 태풍 볼라벤에 쓰러진 나무 밑에서 바스락 소리를 내며 달아나는 청설모에 자지러지도록 놀라기도 하고, 또 어떤 날은 푸슬푸슬 눈이 날리기도 하고...  요즘은 내가 집을 나서는 아침 여섯 시에도 어둠이 가시지 않는다.  한 시간 남짓 운동을 하고 산을 내려올 즈음이면 먼 산마루가 청자색으로 변한다.  그 어슴푸레한 여명에 비친 능선의 실루엣은 마치 카펫의 올처럼 나무들이 보송보송하다.

 

내가 운동을 하는 시각에 매일 만나는 사람은 단 세 명에 불과하다.  그런데 오늘은 제법 날씨가 풀려서인지 지난 가을에 보고 겨우내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도 간간이 만났지 뭔가.  반갑다 못해 웃음이 터지려고 하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통통하게 살을 찌운 모습들이 어찌나 우습던지...  '그동안 어떻게 지냈느냐?' 묻는 통에 그저 '잘 지낸다'는 대답이 고작이었지만 그 외에 달리 뭔 말이 필요할까?  서로 얼굴을 보지 않았어도 사는 모습이야 거기서 거기인 것을.

 

저녁에 아이들을 가르치다 보면 일주일이 그렇게 빨리 지나갈 수가 없다.  요즘은 가끔 피곤함을 느끼기도 하지만 나는 아이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운다.  시간이 되면 아이들과 야유회라도 가고 싶은데 서로가 편한 시간을 맞춘다는 게 여간 어렵지 않다.  나야 그렇다 치더라도 내가 자랄 때와는 다르게 요즘 학생들은 바빠도 너무 바쁘다.  좀처럼 짬을 내지 못한다.  그래서야 어디 그게 폭력이고 고문이지 학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내가 '레미제라블'을 한 번 보라고 권했는데 나 역시 여직 못 보고 있다.  '봐야지, 봐야지'하며 미루다가 그만 시기를 넘긴 것이다.  그만한 시간이야 내려고 맘만 먹으면 못할 것도 없지만 혼자 영화관을 찾는 것도 쑥스럽고, 아이들을 가르치지 않는 저녁이면 밤공기 마시며 외출하는 것보다 이불 속이 마냥 그리운 탓에 나는 아내의 말을 건성으로 듣고 말았다.

 

돌이켜 보면 모든 게 후회투성이다.  사는 게 다 그런 것인지 모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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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 중에 이름이 '종북'인 분이 있다.  자연을 사랑하고 사람을 아끼는 순한 분이다.  가끔 그분을 만날 때면 '나도 저렇게 늙을 수만 있다면'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런 면에서 나만큼 철저한 종북주의자도 세상에 다시 없겠다 싶다.  그런데 각종 언론이나 인터넷에서 종북 운운하는 기사를 볼 때마다 어깨가 으쓱하고 자랑스럽기는커녕 영 마음이 개운치 않은 게 사실이다.  내가 아는 종북氏는 꽤나 연로하신 분인데 그분보다 나이도 한참이나 어린 분들이 뉘집 개이름 부르 듯 '종북, 종북'할 때면 나도 모르게 욱하는 심정이 아니 들 수 없기 때문이다.  곁에서 그런다면 한 대 쥐어박기라도 할텐데 그마저도 어려우니 속으로만 꾹꾹 눌러 참곤 한다.  동방예의지국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내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리라고 본다.

 

한번은 내가 "어르신, 요즘 유명인사가 다 되셨던데요?" 하고 농을 치자 대체 뭔 소린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시기에 "인터넷이건, 방송이건 어르신 함자가 안 나오는 곳이 없어요."하자 그제서야 알겠다는 듯 밝게 웃었다.  그리고 "그렇다고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을 이제 와서 바꿀 수 있남?" 하시며 혀를 끌끌 찼다.

 

나는 한 국가가 다양한 사람들로 채워지면 질수록 더 성숙한 사회라고 믿는 사람이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서로가 서로를 비난해서는 안 된다는 암묵적 전제조건이 따른다.  내 의견이나 이념이 다른 사람과 다를 수 있다.  그리고 다른 것이 어쩌면 당연할 테고.  물론 그렇게 일방적으로 비난 일색인 사람의 인간성이 나쁜 것이니 그것도 다양성의 한 측면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 하지 않을까?  내가 '종북氏'라고만 했어도 이런 글까지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 주위에 '좌빨'이나 '수꼴'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없으니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지만 말이다.

 

나는 참 궁금한 것이 만일 우리나라가 통일이라도 된다면 그때도 '종북'을 외치는 사람이 있을까 하는 점이다.  아마 없겠지 싶다.  그렇다면 이 용어는 한시적으로 쓰일 수 있는 말이고 생명력이 그리 길지도 않은, 한마디로 좋지 않은 말인데 왜 그렇게 그 말을 쓰지 못해 안달하는 것일까?  정히나 쓰고 싶다면 '종북氏'라고나 하던가.  혹시 그 말을 영구히 쓰고 싶어서 통일을 부정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만일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반 인륜적이요, 반 민족적인 사람이 아닐 수 없다.  어찌 그깟 말 한마디 때문에 헤어진 동포들의 가슴에 철책을 칠 수 있을까?  인간이라면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믿는다.

 

아무튼 요즘 인터넷 키워드에 '종북'이라는 단어가 다시는 안 보였으면 하고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 이 글을 쓴다.  앞으로는 '종북氏, 또는 종북氏주의자'라고 하자.  그것이 이 땅에 사는 모든 '종북'씨를 욕되게 하지 않는 일이며, 동방예의지국의 국민으로서 우리가 할 도리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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