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발 다가서면 또 한 발 물러서는 무지개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좁힐 수 없는 거리가 존재하나 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데올로기'를 가장 싫어하는 단어로 꼽고 있습니다만 저라고 왜 이데올로기가 없겠습니까.  그런데 말이죠.  제가 여태껏 살면서 이것만큼 털어내기 어려운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가장 싫어하는 단어를 무슨 신줏단지 모시듯 살고 있는 셈이죠.  저뿐만 아니라 다들 그렇겠지요.  공교육이라는 시스템 내에서 적당히 배운 사람이라면 말입니다.  생각하면 한심한 노릇입니다.

 

사람에게 아귀처럼 들러붙은 이 '이데올로기'란 놈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를 한없이 넓게 벌려놓는 걸 보면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세월호 참사를 보며 많은 사람들이 슬퍼했던 것도 이제는 서서히 옛일처럼 지워지고 잊혀져간다 할지라도 그 책임 소재를 따져 철저히 처벌해야 하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명확한 일이건만 그놈의 '이데올로기'가 뭔지 그에 따라 정부를 옹호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으로 양분되는 걸 보면서 참담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인륜의 문제도 이제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시대가 되었구나 생각할 때 뭐라 할 말이 없어집니다.  얼마 전 신문 기사에는 우리나라의 언론 자유국 순위가 실렸더군요.  보수 성향의 국제인권감시단체인 프리덤하우스에 의해 발표된 <2014 언론자유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언론자유지수 32점으로 조사 대상 197개 국가 중 68위로 '부분적 언론자유국(PARTLY FREE)'으로 분류되더군요.  이것은 나미비아나 칠레보다도 못한 창피한 순위였습니다.

 

한 나라의 언론자유도는 국민 개개인 간의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하고 국민 통합의 밑바탕이 되는 기본적 전제조건이 아니겠습니까.  2004년에 26위까지 올랐던 우리나라의 언론자유국 순위는 이제 전 세계의 조롱거리로 전락한 셈입니다.  독일의 진보언론 타츠(Taz)는 '대한민국에서의 언론의 자유, 대통령의 무릎에서 노는 애완견'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썼다더군요.

 

상황이 이럴진대 국가적 재난에 대한 대비인들 제대로 될 리가 없지요.  재난에 대처하는 마음가짐이나 자세도 그렇구요.  썩어빠진 '이데올로기'에 집착하여 나라가 망할 지경에 처했는데도 제 잇속을 챙기려는 작자들이 도대체 누구인지 묻고 싶은 심정입니다.  저는 앞으로 한 사람의 됨됨이를 평가함에 있어 그 사람이 가진 '이데올로기'의 집착도를 기준으로 삼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먼저 저부터 내려놓아야겠지요.  당연합니다.(오늘 낮에 뉴스를 보며 제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 하도 가관이어서 한마디 적었습니다.  지금까지도 흥분이 가라앉지 않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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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무율(悉無律)을 아시는지. 

어떤 단어는 한글이 더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습니다.  영어로는 'all - or - none law'라고 합니다.  대충 감이 오지요?   그렇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자극에 대한 반응이 제로일 수도 100%일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이 법칙은 원래  신경 섬유 근섬유 따위 단일 세포체 적용되는 것으로서 생물체 가한 자극 일정한 수치 아래에서는 반응 전혀 없다가 일정한 정도 이르면 최대 반응 보이고 이상은 아무리 강도 높여도 변화 일어나지 않는다는 법칙입니다.

 

저는 가끔 우리 생활을 지배하는 확률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실무율을 떠올리곤 합니다.  예컨대 로또 복권을 사서 1등에 당첨될 확률은 814만 5,060분의 1로서 벼락에 맞을 확률보다도 작은 수치입니다.  그러나 1등에 당첨된 사람에게는 확률 100%(all)이고 떨어진 사람에게는 확률이 0%(none)일 뿐이죠.  사실 확률이란 어떤 실행에 대한 사전 참고 자료는 될지언정 현실에서는 무용지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로또복권에 당첨되지 않았다고 확률만큼의 기댓값을 지급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 고등학교 동창 중에는 저와 생일이 같은 친구가 있습니다.  대학을 다니는 동안 같은 동네에 살았던 그 친구는 생일 전날이면 언제나 제게 전화를 하곤 했습니다.  지방 출신인 친구와 나는 서울이라는 거대 도시 안에 생일이 같은 누군가가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서로에게 힘이 되었던 듯합니다.  사실 수학적으로는 23명 중 생일이 같은 두 사람이 적어도 한 쌍 이상 섞여 있을 확률이 50%가 넘는다고 하니 그리 신기한 일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 친구와 나에게는 100%의 확률이었던 것이죠.

 

연휴가 끝난 지금 저는 가족들과 헤어져 다시 제 숙소에 돌아와 있습니다.  연휴 동안 변덕이 심한 봄날씨 탓에 조금 고생스러웠지만 아무 탈 없이 무사히 돌아온 것입니다.  게다가 우리나라 교통사고 사망율은 자동차 1만대 당 2.9명이나 된다고 하는데 저는 그 확률에도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죠.  대형 사고가 많았던 요즘, 괜한 수치에도 눈길이 가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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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 있어 오후는 대체로 '나른함'이나 '무료함'으로 묘사된다.  그것은 비단 문학에서만 그런 것도 아니요 미술이나 음악에서도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그러나 현대인에게 있어 오후는 아직 해가 지지 않은, 나른함을 이겨내고 열심히 업무에 매진해야 할 그런 시간에 지나지 않는다.  불행힌 일이지만 현대인이 오후의 '나른함'을 온전히 즐길 수 있는 여유로운 날은 일 년 중 얼마나 될까.

 

오늘은 주말과 연휴가 이어지는 첫날입니다.

내일도 편히 쉴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이죠.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휴일 아침에는 다른 날보다 더 일찍 잠에서 깬다는 사실입니다.  학창시절에도 그랬던 기억이 납니다.  졸리면 아무때나 잘 수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해가 환한 대낮에 잠으로 시간을 축내는 것도 딱한 노릇입니다.  평일과는 다르게 휴일에는 오후에 잠깐이라도 자고 싶다는 유혹이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집니다.  그것 참 이상하지요.

 

날씨가 참 좋았습니다.

청명한 하늘이 마치 가을 하늘 같았어요.  햇살은 따가웠지만 알맞게 부는 바람이 사람들을 기분 좋게 하는 그런 날이었죠.  고속도로의 정체가 심하다는 인터넷 기사를 보니 집에서 그저 책이나 읽으며 시간을 소일하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싶더군요.  그렇다고 연휴 내내 이럴 수는 없겠지요.  '어린이 날'이라는 복병도 있으니까요.

 

그동안 읽고 싶었던 책을 두어 권 쌓아놓고 이 책 저 책 번갈아가면서 읽고 있습니다.  마스다 미리의 <어느 날 문득 어른이 되었습니다>와 레이먼드 챈들러의 <나는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나>, 정여울의 <마음의 서재>가 그것입니다.  이따금 창밖의 하늘을 쳐다봅니다.  꽤 많은 시간이 흐른 듯한데 아직도 해가 지려면 두어시간이나 남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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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의 여왕 5월은 끝내 오고야 말았다.

온 국민의 설움과 분노를 뒤로 한 채 말이다.  5월의 신간 에세이를 휘작휘적 뒤적이다 몇 번인가 아득해졌다.  '이게 무슨 소용이람.'하는 마음이 나를 아득한 절벽으로 밀어부쳤다.  세월호 희생자들이 우리에게 남긴 의미를 천천히 곱씹는 한 달이 될 듯하다.

 

 

 

나는 전문적인 에세이스트보다는 오히려, 또는 산문을 위주로 쓰는 작가보다는 오히려 시인이 쓴 산문을 좋아한다.  음감이나 박자 관념이 없는 내가 왜 이런 버릇이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시인이 쓴 산문을 읽을 때 나는 글 속에서 리듬감을 느끼곤 한다.  마치 시를 읽는 것처럼 말이다.  천양희 시인의 산문도 그랬으면 좋겠다.

 

 

 

 

 

 

 

 

명상이나 삶의 가르침에 어느 정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틱낫한 스님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딱히 깊은 사색을 즐기지 않는 나도 스님의 책을 두어 권 소장하고 있다.  물론 한참 전에 산 책이다.  요즘 들어서는 이상하게도 주제가 조금 무겁다 싶으면 고개가 외로 꼬아진다.  그러던 내가 이 책에 눈길이 간 걸 보면 세월호 참사의 영향이 아닐까 싶다.  나는 어차피 죽는 날까지 누군가에게 영원한 타인이니까.

 

 

 

 

 

 

얼마 전에 읽었던 김형경의 <남자를 위하여>는 남자인 내가 읽기에는 거북한 책이었다.  까놓고 말하면 '당신이 뭘 안다고?'하는 말이 목까지 차올랐던 책이다.  그 저변에는 아마도 작가의 이분법적 사고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남자와 여자라는, 혹은 여자의 입장에서 바라본 남자와 같은.  같은 인간의 입장에서 차이에 대해 말하는, 좀 더 관대하거나 따뜻한 시각을 기대한다.  이 책을 선택한 것은 일종의 도전이다.

 

 

 

 

 

 

 

<7년의 밤>하면 정유정! 하고 굴비두릅처럼 떠오르는 까닭은 그녀의 소설이 워낙 유명하기도 했거니와 이제 그녀도 어느덧 중견작가의 반열에 올라섰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요즘에는 여행기를 통 읽지 않았다.  마음이 어두워서였다.  이 책은 부디 가볍고 밝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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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향소에서

 

세상에 아깝지 않은 목숨이 어디 있으랴

생때같은 내 새끼 가슴에 묻고

물 한 모금인들 가벼이 넘겼으랴

 

바다에서 비롯된 푸른 슬픔이

끝내 온 산천을 휘감아 돌고

바다도 하늘도 짙푸른 오늘

 

노란 희망을 가슴에 달고

가신 님들 빼곡한 제단에 나설 제

가슴 속 분노 한자락 뽑아

향불에 사른다

 

다하지 못한 생명이 끝내 서러워

눈물자욱 어룽진 하늘 끝자락 

산 자의 죄의식이 발끝에 걸려

휘청이다 무릎을 꺾고 재배하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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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분향소를 다녀온 뒤 들었던 복잡한 심경입니다.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다 노트에 끄적였던 글을 블로그에 옮겨 적는데

슬픔보다는 치미는 분노가 더한 것은 왜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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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4-04-30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곳 청주에도 분향소가 설치되었다고 하는데......생각만으로도 눈물나서 어떻게 가야할지요....
어른들의 무질서가 아이들에게 고스란히 책임 전가되었네요.

꼼쥐 2014-05-02 14:13   좋아요 0 | URL
많은 분들이 분향을 다녀오셨더군요.
저는 오히려 이제 그 슬픔을 거두려고 다녀왔습니다. 언제까지 허우적댈 수는 없는 일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