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따금 이런 생각이 든다.
딱히 어떤 이유에서라기보다 우연성에 기인한 한 사건(우연의 발현이자 삶의 한 조각)은 마치 수많은 우연을 싣고 이제 막 플랫폼에 진입하는 열차의 감속처럼 느껴진다. 사람들은 대개 우연이 우연으로 존재하는 한 자신의 삶과 그것들을 굳이 결부시키려들지 않지만(혹은 우연의 존재조차 인식하지 못하지만) 그 우연이 모여 어떤 질량으로 환원될 때 사람들은 비로소 그 존재를 재삼재사 깨닫곤 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개입되는 것은 스트레스이다. 스트레스는 마치 어떤 사건(우연의 결합체)을 구성하기 위한 촉매제처럼 보이는데 그 느낌은 대략 이렇다. 감각적으로 느껴지는 스트레스는 우리가 마치 깊은 수조에 거꾸로 매달린 채 수조의 물이 서서히 차오를 때 느껴지는 육체의 감각과 유사하다. 먼저 머리가 잠기고, 어깨, 가슴, 몸통, 무릎, 발, 급기야 발바닥까지 완전히 잠기면 우리는 깊은 무력감에 빠지게 된다.
때로는 우연을 사건으로 결합하던 스트레스가 그 우연 속에 스며든 채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발현된 사건이 종결되고 또 다른 우연이 새로운 사건을 준비할 때면 숨겨졌던 스트레스는 자신의 힘을 과시하려는 듯 여지없이 우리의 몸을 깊은 무력감 속으로 끌고간다. 밀란 쿤데라는 무력증 뒤에 오는 죽음에의 유혹을 현기증이라 했다. 동일한 높이에서의 행진에서 벗어나 가장 높은 곳으로 상승하려는 욕구와 가장 낮은 곳으로 떨어지려는 욕구 중 어느 것이 더 강한 것일까? 스트레스는 상승의 욕구보다는 추락의 욕구를 증가시킨다.
간혹 심한 스트레스는 우리의 영혼과 육체를 동시에 지배하기도 한다. 깊은 무기력증으로 인도하는 이러한 스트레스는 우리 몸의 세포 곳곳에 스며들어 육체적으로 옴짝달싹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 자신의 세포를 파괴함으로써 스트레스의 결박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믿게 한다.
"인간은 가장 깊은 절망의 순간에서조차 아름다움의 법칙에 따라 자신의 삶을 작곡한다."고 했던 밀란 쿤데라의 말은 그 결말이 어떠하냐의 기준에서 했던 말은 아닌 듯하다. 그 결말이 해피엔딩이든, 또는 비극적 결말이든 그 모든 것은 인간 개개인이 바라는 바대로 아름답게 이루어진다는 의미이다. 결국 운명이라는 것은 우리가 바라는 어떤 결말, 혹은 사건을 향해 알 수 없는 우연들이 아름다움의 법칙에 따라 결합할 뿐이다. 스트레스라는 촉매제와 함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