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 유동하는 근대 세계에 띄우는 편지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조은평.강지은 옮김 / 동녘 / 2012년 8월
평점 :
절판


현대 사회를 한마디로 요약하여 말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보편성을 추론할 수 있는 몇몇 클러스터(cluster), 예컨대 문화, 국가, 주권, 민족,가정 등 동질적이고 영속적이며 심원한 상호관계를 유지할 것이라고 믿었던 이러한 클러스터들도 현대에 이르러서는 파괴되거나 해체되어 그 형체를 유지하기 힘든 상태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사회학자인 지그문트 바우만 교수는 현대의 이러한 특성을 '액체성'(liquid)으로 규정하고 있다.  바우만 교수가 말하는 '액체성'이란 우리 삶의 기준이 소멸하고, 국가기능 약화로 인해 시장의 장악력이 강해지는 일련의 현상을 의미한다.  개인의 안전을 보장해주던 국가 장치가 축소되고 개인의 삶이 파편화되는 결과는 미래의 불확실성을 증폭시키고 소비시장의 중심에서 언저리로 내몰리는 현대인들에 대한 자각과 그 대안을 모색하는 지표가 될 수 있기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바우만 교수는 이 책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이 책에서 몇 가지 이유를 설명하고자 했다. 한번에 끝나는 일년 정도 걸리는 실험을 했고, 그 결과물이 이 책이다. 특별한 계획이나 기획 없이, 그리고 내가 무엇을 논의하겠다는 논제에 대한 일람표도 만들지 않고 실험을 시작했다. 사건에 대한 나의 반응을 기록하고자 했고, 사건들이 부각되었다가 사라지는 발전 과정을 지켜보고자 했다. 그 사건들을 요약하고, 의미를 이해하고자 했으며, 그것들이 전달하는 메시지를 읽고 흐르는 ‘사물의 질서’에서 장소들을 발견하고자 했다. 200년 전에 살았던 영국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처방이기도 한 ‘작은 모래알에서 우주를 보라’는 말을 실천하고자 했던 것이다. 사소한 것에서 우리 시대의 본성을 연역하는 것은 일 년 동안 일어난 사건의 연대기를 파악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이 바로 그 사소한 것에 남겨진 총체성의 성격이다. 때때로 참으로 사소하고 겉으로 보기에 무의미한 것처럼 보이는 파편들일지라도….”

난파선의 작은 파편처럼 유동하는 액체의 세상에서 부유하는 현대인에게 작가는 자신이 발견한 현대의 모습을 44편의 편지로 옮긴다.  의미없이 제각각 떠도는 작은 파편에서 세계의 질서를 읽어내려는 노력의 산물이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이다.  구체적 현실에서 보편적인 문제의식으로 확대하는 일반화의 작업은 사회학자로서의 저자가 취할 수 있는 추상적 사유의 직접적인 방법이 될 수 있겠다.  땅 위에 굳건히 선 농사꾼이 출렁이며 떠도는 뱃사람들을 바라보며 들려주는 이야기는 내가 나에게 또는 내가 너에게 전하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액체성의 시대에 살면서도 변화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조금은 낡은 사고방식의 틀 안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최소한 어떤 사건이 터지고 난 직후에야 비로소 변화를 감지하듯이.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농사꾼인 동시에 어부인 셈이다.

 

"삶을 선택하는 일들에는 차근차근 읽고 하나하나 잘 따라할 수 있게 해주는 그 어떤 설명서도 부착되어 있지 않다.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다.  아니면, 로마의 시인 루칸이 사랑에 관해 남긴 아주 기억할 만한 의견까지 동의하자면, 살아간다는 것은 마치 사랑하는 일처럼 운명에 인질로 사로잡히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그와 같은 삶이란 정말 불쾌하고 불안하며 심지어 무서운 것일까?  그럴 것이다.  더구나 틀림없이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구나 정말 곤란한 문제는 살아가는 일에는 또 다른 인생이 있을 수 없다는 점이다."   (P.374)

 

나는 가끔 내 인생을 돌이켜 보며 의문을 던질 때가 있다.  '나는 절대적이고도 확고하게 내 인생을 주도적으로 살고 있는가?  내 인생의 경로에서 벌어지는 작은 사건들을 실감하고 생생히 기억하며 미래의 변화를 대비하고 있다고 확신하는가?'  나는 그 어떤 질문에도 자신있게 대답할 수 없다.  스무 살 때에도 그랬고, 그보다 더 어린 시절에는 말할 것도 없으며, 인생의 반을 허비한 지금의 시점에서도 그렇다.  바우만 교수는 이 책에서 사소하지만 중요한 사건들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있다.  어쩌면 그 작은 사건들이 우리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작은 실마리가 될 수 있기에.  인간의 지식이란 이성에서 연역되어 나오는 것이 아니라 경험으로부터 획득된다는 말은 이 책에서도 유용하다.

 

"즉 교육은 표면에 드러나는 각양각색의  인간 경험 밑바탕에는 분명 불변하는 세계의 질서가 놓여 있다는 가정을 전제하고 있을 뿐 아니라, 분명 인간 본성을 지배하는 영원한 법칙들이 있다는 가정 또한 전제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우선 첫 번째 가정은 지식이란 분명 선생들로부터 학생들에게 전달될 필요가 있으며 또 이런 방식이 유용하다는 사실을 정당화시켰다.  또한 두 번째 가정은 선생들이 다음과 같은 자기 확신에 물들게 만들었다.  선생인 자신들은 반드시 자기의 학생들이나 피보호자들이 따라하고 모방하기를 바라는 본보기를,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을 만큼 타당성을 갖는 그러한 본보기다운 태도를 끝까지 고집해야 한다는 확신 말이다."   (P.201)

 

 유동하는 액체성의 시대에 영원하다고 확신하는 어떤 것을 가슴에 품고 사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나의 확신과 상반되는 어떤 실재를 현실에서 보게 될 때 그 고체성의 확신은 비수가 되어 나의 가슴에 꽂힌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학과 같은 미련함을 버리지 못한다.  현실을 수용하고 인정하기는커녕 현실을 애써 부정하고 외면하며 때로는 분노한다.  액체에 떠있는 고체는 쉽게 뒤집혀지고 떠밀리기 마련이다.  두 발을 뻗대고 힘을 쓸 수도 없다.  오히려 자신의 힘만 낭비할 뿐이다.  사소하고 작은 변화라도 놓치지 않고 관찰할 것이며, 이 세계의 이상함과 부조리를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인간의 역사에 관해서는 비판적이지만, 인간에 관해서는 낙관적"이라고 했던 카뮈의 확신을 믿기로 하자.

 

2012년에 우리는 대통령 선거라는 중요한 선택을 했다.  어차피 선택은 피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 선택의 결과는 좋든 싫든 공동체가 함께 짊어져야 할 몫이다.  비록 그것이 잘못된 선택이었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중요한 것은 그 작은 변화의 일면에는 언제나 불만과 실망이 섞이게 마련이고 부지불식 간에 그렇게 쌓인 실망과 불만이 예고도 없이 새로운 변화를 몰고올 것이라는 점이다.  작은 사건의 면면을 살펴 미래의 또는 현재의 큰 변화를 감지하고 대처하는 능력을 키우는 데 있어 이 책은 그 바탕이 될 것이라고 본다.  '한 알의 모래알에서 세상을 보고/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보라'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구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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