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 - 그해, 내게 머문 순간들의 크로키, 개정판
한강 지음 / 열림원 / 2009년 12월
평점 :
절판


'백지처럼 하얘진다'는 표현은 진부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럼에도 종종, 솔직히 말하면 자주 쓰게 된다.  오늘도 나는 이 글을 쓰기 전에 떠오르지 않는 생각을 쥐어짜며 이 말을 했었다.  이렇듯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 주변을 둘러보아도 우리가 일상에서 습관적으로 반복하는 것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그러나 현실에서 내가 진부하다고 놀리면서도 '백지처럼 하얗다'는 말을 자주 쓰는 것과는 달리, 독서 과정에서는 가끔, 아주 가끔은 맘에 쏙 드는 작가를 우연처럼 만날 때가 있다.  진부하지만 전혀 진부하지 않게 느껴질만큼 세련된, 일상에서 흔하디 흔한 말인데도 전혀 새로운 말을 쓰는 그런 작가를 만나면 괜히 긴 손편지라도 써야할 것만 같다.  '한강'은 내게 그런 작가 중 한사람이다.  가볍고 일상적인 글들이 낙엽처럼 깊게 쌓이면 나도 그녀처럼 오래된 토담벽처럼 허물없이 자연스러운 글줄이나 쓸 수 있으려니 하는 헛된 꿈을 심어 준 작가도 그녀였으니 따지고 보면 나는 그녀의 팬이라고 자처하기도 애매한 구석이 있지만 말이다. 

 

<채식주의자>, <바람이 분다 가라>, <희랍어 시간>, 그리고 <노랑무늬 영원>에 이르기까지 그녀는 줄곧 소설쓰기에만 매달렸었다.  마치 그녀에게 소설은 그녀의 삶이자, 생명인 것처럼.  이 책 <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은 그녀가 쓴 두번째 산문집이다.  그녀가 쓴 첫번째 산문집 <가만가만 부르는 노래>는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와 그에 얽힌 추억들을 다룬, 그리고 자신이 직접 작사, 작곡하여 음반으로 만들기까지 한, 어찌 보면 소설가의 취미생활과 같은 책인 반면에 이 책은 그녀가 아이오와 대학이 주최한 국제창작 프로그램(IWP)에 참가함으로써 만나게 된 사람들의 스케치이다.  즉 미국 아이오와시티에서 체류했던  석 달 반 동안 그녀가 만났던 세계 각국의(주로 제3세계의) 작가들과 그녀가 겪었던 경험들을 다룬 일종의 소품과 같은 책이다.

 

"그날 저녁 마흐무드와 나는 부슬비를 맞으며 헌책방 순례를 했다.  몇 권의 책을 서로에게 사주었고, '초원의 빛'이라는 이름의 단골 책방 2층에서 옷을 말리며 케이크를 들었다.  "사랑이 아니면"하고 마흐무드는 중얼거렸다.  "인생은 아무것도 아니야."  네 살 때 이스라엘군에게 고향을 잃은 뒤 청년 시절에 두 번 투옥되어 4년간의 옥살이를 했던, 그 뒤로 10여 년간 망명생활을 했던 그는 덧붙여 말했다.  "사랑 없이는 고통뿐이라구."  "하지만 때로는"하고 나는 반문했다.  "사랑 그 자체가 고통스럽지 않나요?"  마흐무드는 생각에 잠겼다.  "아니지.  그렇지 않아."  그의 음성은 숙연했다.  "사랑을 둘러싼 것들이 고통스럽지.  이별, 배신, 질투 같은 것.  사랑 그 자체는 그렇지 않아."  그 말을 꺼내기까지 마흐무드의 눈앞을 스쳐간 여인들의 얼굴을 나는 알지 못한다.  그가 그녀들과 보냈던 시간, 나누었던 밀어, 무수한 입맞춤과 어루만짐을 모른다.  다만 그가 그 여인들을 이용하지 않았다는 것, 그때마다 순정을 다했으며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사랑과, 사랑을 둘러싼 것들-다시, 마흐무드 中에서)

 

작가는 자신이 보았던 그들의 몸짓, 표정, 그들의 말과 표정 하나하나를 담담하게 쓰고 있다.  사랑은 그렇게 호들갑스럽거나 유난을 떨지 않아도 마음과 마음으로 전해지는 것임을 믿는 듯했다.  세상 모든 사람이 '표현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라고 주장할지라도 작가만큼은 마음 속으로 조용히 '사랑은 그만큼 은근한 것'이라며 입술을 깨무는 듯하다.  두꺼운 유리창을 통하여 바라보는 무음의 세상, 세월이 거둬간 습기만큼 파삭파삭해진 그때의 추억을, 그저 스쳐지나간 사람들일 수도 있었던 그들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있었나 보다.  나는 오늘처럼 겨울비가 내리는 날에 낙엽처럼 부스러지는 그녀의 추억을 읽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