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 민음의 시 104
박정대 지음 / 민음사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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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대의 시를 읽으면 아련한 슬픔이 묻어나곤 한다.  그것은 아마도 나만이 느끼는 주관적 감정일 수 있다.  왜 그렇게 느꼈을까?  그것은 시인과 내가 겪었던 추억의 공유, 적어도 같은 시대, 같은 지역에서 느꼈던 막막함이 아닐 수 없다.  시인은 정선에서, 나는 고한에서, 산들로 둘러싸인 육지 속의 섬과 같은 곳에서 자랐다.  석탄 트럭이 굉음을 울리며 도로를 질주하고, 인생의 막장과 같은 곳으로 몰려든 사람들이 악다구니를 쏟아내는 곳.  삶은 생각만큼 아름답지도,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부모의 한숨 소리에 설핏 잠이 깬 그 순간에 배웠다.  생존본능의 포로였던 아이들은 전혀 아이답지 않았고, 오직 살아남아야 한다는 슬픈 매질이 내 영혼에 문신처럼 남았다.

 

4 만항재

아무리 달려도 이정표가 나타나지 않아 뒤돌아 보면 좁은 산길 아래로 폭포처럼 쏟아지는 나무들의 물결, 허공의 바다를 털털거리며 지난다.  갈매기 한 마리 날지 않는 이곳은 전생에 무슨 바다였나.  길이 좁아질수록 생각은 날아가고, 길이 험해질수록 더욱 깊어지는 그리움의 계곡, 엄나무들은 엄숙하게 머리를 길렀지만 식솔들 이끌고 산 중턱까지 와서 정착한 낙엽송, 참나무 이주민들.  아무리 달려도 너에게 가는 길은 보이지 않아 어느새 다다른 하늘 밑, 침묵은 끝나지 않고 바람 끝에 매달려 와서 끝내 만항재, 해발1,330m라고 씌어진 곳에서 불어가는 음악, 페루, 나비, 바람. 

 

5. 음악, 페루, 나비의 경계를 지나서

오래도록 꿈꾸던 것, 그것을 나는 만항재에서 본다.
만항재는 음악과 페루와 나비의 경계선. 이 경계선을 지나면
음악만이 남을 것. 그때부터 나는 눈을 버리고 음악을 얻을 것.
그리고 당신이 어느 날 참 많이 어두워져서 그때부터 음악소리 들린다면,
그것이 바로 나의 이름이다.
('열두 개의  촛불과 하나의 달 이야기' 中에서)

 

그랬다.  만항재를 넘으면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전나무 숲에서 홀연히 나타나는 정암사와 진신사리를 모셨다는 수마노탑. 

황동규 시인은 태백에서 만항재를 넘어 몰운대로 차를 몰며 이렇게 읊었다. 

고개가 가파르다./자장율사가 진신사리 봉안했다는 정암사 가는 길/그도 헐떡이며 넘었으리라./앵앵대는 소형차를 길가에 그냥 내버리고 싶다./가만, 자장이며 의상 같은 쟁쟁한 거물들이/경주, 황룡사, 부석사를 버리고/ 왜 강원도 산 속을 방황했을까?//왜 자장은 강원도 산골에서 세상을 떴을까?/입적지 미상의 의상도 행려병자가 아니었을까,/이곳 어디쯤에서?/가파른 언덕을 왈칵 오르자/해발 1280m의 만항재./태백시 영월군 정선군이 서로 머리 맞댄 곳./자글자글대는 엔진을 끄고 차를 내려 내려다보면/소나무와 전나무의 물결/가문비나무의 물결/사이사이로 비포장도로의 순살결/저 날것,/도는 군침/

 

태백시에서 만항재를 넘으면 바로 고한이다.  석탄산업의 부흥기였던 7,80년대에  고한은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넘쳐났었다.  그 주변 지역은 다 그랬다.  전국의 사투리가 모두 모여 새로운 사투리가 생겨나고, 사람들은 그 억센 사투리를 시나브로 닮아갔다.  허술하기 짝이 없는 마스크와 헬멧을 쓰고 막장에서 꼬박 8시간을 일했다.  요새와 같았던 유배지에서 돈 벌어 도시로 나갈 꿈을 꾸었던 사람들, 그러나 천형과 같은 광산일은 대를 물려 이어지고, 지친 사람들은 '잊혀진 곳에서 잊혀질 곳으로의 비상'을 기다렸다.  도로도, 집도, 심지어 냇물까지 검었던 그곳에서 오직 산과 하늘만 푸르렀다.  봄이면 태백산맥을 넘은 높새바람이 석면 슬레이트 지붕을 날리고, 겨울이면 방 안의 물도 꽁꽁 얼었던 그 혹독한 지역에서 철마다 아이들은 태어나고 또 그렇게 질긴 목숨을 지켜갔다.

 

박정대 시인은 그 매섭던 바람의 끝자락을 닮았다.  서정적이고 낭만적인 그의 시는 때로는 긴 호흡으로, 때로는 순간에 정지한 채로 자연을 모방한다.  그 시뮬아크르의 세계는 현실의 벽을 자유자재로 넘어 상상의 세계로 안내한다.  태백준령에서 자란 소년이 간절히 바라던 그 상상의 세계로.  높은 산맥을 따라 점점이 흩어진 가난한 마을들, 그 육지 속의 격렬비열도엔 음악 같은 눈이 내리고 눈처럼 고운 꽃가루가 흩날리기를...  중년의 시인은 아린 손마디처럼 절절한 꿈을 꿈 속에서도 바라나 보다.

 

나는 삶이 봄바람처럼 느슨하다 느낄 때 박정대의 시집을 읽는다.  그의 슬픔과, 꿈과, 음악과, 나비로 사라지고픈 불멸의 잔상과 먼 이국의 어느 섬과, 사람들.  시인의 눈에 촛불처럼 흔들리는 삶.

 

10 밤의 여행자들

........

허공에다 당신은 매일 간절한 키스를 한다. 그 입맞춤이
대지의 가슴에 닿아 그곳에서 아름다운 나무들이 태어나기를,
그 나무 아래서 사랑하는 사람과 오래 함께 머물 수 있기를 기도한다.
그것이 내 이름이다.
어느 날 당신은 창밖에 환하게 핀 앵두꽃을 보고
밤이 어디론가 사라진 줄 알았다.
당신은 그 꽃을 보면서 이유를 알 수 없는
슬픔에 눈물을 흘렸다.
눈물이 때로는 음악이 된다는 것을 당신은 알고 있다.
그래서 당신은 매일 밤마다 촛불을 켜 들고 어디론가 여행을 떠난다,
그것이 내 이름이다. 
   <'열두 개의 촛불과 하나의 달 이야기' 中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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