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위가 높아질수록 운신의 폭이 넓어지고 개인의 자유 또한 비례하여 증가한다는 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조직의 구성원을 제재하는 룰은 변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지위가 올라갈수록 개인의 행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상사 혹은 감독관의 수가 현저히 줄어들기 때문이다. 당연하게도 권력의 최정점에 오르면 시스템이나 규칙에 의한 제재만 가능할 뿐 다른 어느 누구의 간섭이나 영향력도 미치지 않음은 물론이다.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는 말에서 지적되는 것처럼 사실 유명무실한 룰이나 규칙보다는 한 사람의 상사가 더 두려운 법이다. 그러므로 조직의 최정점에 올라 자신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상사를 더 이상 만나지 않아도 된다는 건 회사와 같은 조직의 구성원들에게는 꿈과 같은 일일지도 모른다. 그런 까닭에 많은 사람들이 권력의 최정점을 향해 기를 쓰는 것이다. 언덕 정상에 이르면 바로 굴러 떨어지는 걸 알면서도 무거운 바위를 굴리고 또 굴리는 시시포스처럼...

 

자유의 측면에서 보면 권력의 최정점에 이른 자는 아무도 없는 빈 방에 홀로 있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지위가 오를수록 스스로를 다스리는 신독(愼獨)에 힘써야 함은 권력에 오르는 자의 의무이자 자유가 방종으로 변질되지 않게 하는 방부제를 지니게 된다는 점이다. 대개의 권력자는 자신에게 무한대로 주어진 주체할 수 없는 자유로 인해 스스로를 망가뜨리고 종국에는 파멸의 불구덩이 속으로 빠져들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신독(愼獨)에 힘쓰지 않는 권력자는 결국 파멸의 길을 걷게 된다는 뜻이다. 예컨대 대중이 이용하는 열차의 의자에 구두를 신은 발을 버젓이 올려놓거나 하는 행위는 권력자의 입장에서 그게 무슨 큰 죄인가 싶겠지만 스스로를 엄격히 제어하거나 삼가지 않는 권력자의 태도에서 우리는 그의 말로를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신독(愼獨)에 힘쓰지 않는 권력자의 자유는 일종의 폭력으로 인식하게 된다는 점이다. 여성가족부를 없애는 자유, 대통령 집무실을 용산으로 옮길 자유, 허위 경력과 주가 조작의 범죄 혐의를 받는 아내를 처벌하지 않을 자유, 멤버yuji와 같은 허접한 박사 논문을 그대로 yuji할 자유 등은 최고 권력자에게는 자유일지 몰라도 사회 구성원에게는 일종의 폭력인 셈이다.

 

사회적 지위가 오를수록 자신의 행동을 엄격히 통제하고 스스로를 살피고 삼간다는 건 다른 누군가를 위한 자선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곧 자신의 삶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방어 수단인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지위가 오를수록 신독(愼獨)에 힘써야 한다. 권력자가 약자를 다룸에 있어 손쉽다고 생각하는 건 실질적인 행위가 뒤따르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 생각만으로도 커다란 위협이자 폭력이다. 구조적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에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여성이나 장애인을 다루기 쉬운 약자로 인식하고 아무렇게나 대접해도 된다고 믿는 사고방식 역시 우리 사회를 위협하는 커다란 폭력이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21세기 대한민국은 실체가 없는 폭력에 의해 마구 흔들리고 있다.

 

리베카 솔닛은 말한다.  “어떻게 되든지 간에 괜찮거나 나쁘다는 게 아니라 미래가 불확실하고 결정된 바가 없기 때문에 변화가 가능하며 최상의 변화를 위해 노력할 도덕적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는 의미다. 희망은 훈련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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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브로 봄.

매일 아침 오르는 산에도 어김없이 봄이 찾아왔다. 가지마다 연녹색 새순이 돋고 다소곳한 진달래도 꽃을 피웠다. 숲은 나름의 질서 속에 오가는 계절을 준비하곤 한다. 그러나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어서 산 주변은 온통 새로 들어선 아파트로 빼곡하다. 그렇게 아파트 건설이 한창이었던 몇 년 동안 숲과 그것에 기대어 살던 동물들이 수난을 겪었으리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소리에 민감한 뱀들이 제일 먼저 자취를 감추었고, 겨울철이면 먹이를 찾아 산 아래쪽을 향해 겅중겅중 뛰던 고라니도 보이지 않고, 이따금 나타나 나의 아침 산행길에 동무가 되어주던 너구리도 찾을 길 없고, 흔하디 흔하던 청설모도 모두 사라졌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숲의 어둠을 몇몇 산새들이 겨우 생명의 기척을 내고 있을 뿐이다. 숲은 이제 콘크리트 바다에 둘러 쌓인 작디작은 섬이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자연이 살아 있는 곳이 자연스러운 것처럼 언젠가 자연이 모두 사라지고 인간 홀로 남으면 인간다워지는 것인가, 하고 말이다. 사람에게는 '애정 총량의 법칙'이란 게 있어서 인간에 대한 애정이 없으면 동물에게 과도한 애정이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여 사람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개든, 고양이든 동물과 친밀해지는 게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르고, 그것이 꼭 나쁜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주가 조작과 허위 이력의 피의자가 처음 보는 경찰견을 꼭 끌어안고 찍은 사진이 온 국민이 꼭 알아야 하는 소식은 아닐 터, 요즘 기자들은 뉴스거리가 어지간히도 없는가 보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게다가 그런 범죄를 저지른 자가 입은 후드티나 슬리퍼를 두고 검소하다는 둥 매진이 되었다는 둥 하는 가십 거리를 뉴스 지면에 실어준다는 것도 참으로 창피한 일이 아닌가. 대한민국의 기자는 참으로 한가한 사람들이다.


며칠 전에는 제74주년 4·3 희생자 추념식이 있었다. 그 자리에 보수 정권의 대표가 참석하는 건 어찌 보면 획기적인 일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묵념 사이렌 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당당하게 이동하는 태도는 뭐란 말인가. 지각 입장도 미안한 일인데 하물며 묵념도 하지 않고... 그런 오만방자한 태도가 보수의 품격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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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기억이 나른한 일상을 떠받치는 오후. 오늘처럼 흐리고 비가 오락가락하는 궂은 날씨의 휴일이면 온갖 상념들이 사정없이 몰아친다. 생각의 물꼬가 터져 부유하는 상념을 따라 이리저리 휘둘리다 보면 괜한 허기가 몰려오기도 하고, 축 늘어진 피로가 혈관을 타고 흐르기도 한다. 이런 날 오후에는 달콤한 오수(午睡)의 유혹을 뿌리치기 어렵다. 동네 뒷산에는 여전히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궂은 날씨에도 개화를 위한 분주한 노력이 꿈결인 양 아른거린다. 아파트 화단에 핀 산수유는 빗물을 머금은 채 다소곳하고 아슴아슴 잠에 빠져드는 듯 시야에서 멀어지는 풍경들.

 

"산수유는 다만 아른거리는 꽃의 그림자로서 피어난다. 그러나 이 그림자 속에는 빛이 가득하다. 빛은 이 그림자 속에 오글오글 모여서 들끓는다. 산수유는 존재로서의 중량감이 전혀 없다. 꽃송이는 보이지 않고, 꽃의 어렴풋한 기운만 파스텔처럼 산야에 번져 있다. 산수유가 언제 지는 것인지 눈치채기 어렵다. 그 그림자 같은 꽃은 다른 모든 꽃들이 피어나기 전에, 노을이 스러지듯이 문득 종적을 감춘다. 그 꽃이 스러지는 모습은 나무가 지우개로 저 자신을 지우는 것과 같다. 그래서 산수유는 꽃이 아니라 나무가 꾸는 꿈처럼 보인다."  (김훈의 '자전거 여행' 중에서)

 

김훈의 글은 언제 어느 곳에서 읽어도 그 맛이 느껴진다. 때로는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는 말을 주문(呪文)처럼 믿고 따르는 정신 나간 사람도 있긴 하지만 사계절 온전한 정신을 갖고 자연의 섭리를 따라 둥글게 살아가고자 하는 이의 글을 읽고 있노라면 글을 읽는 사람도 덩달아 머리가 맑아지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럴 때면 공간이 의식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이 공간을 지배한다는 생각이 절로 들기도 한다. 오죽 못났으면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이 공간에 따라 자신의 의식이 이리 기웃 저리 기웃 지배를 당할까.

 

나라가 미쳐 돌아가려는지 제정신이 아닌 듯 보이는 사람들이 뉴스의 전면을 뒤덮고 있다. 그것을 변명이나 하려는 듯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는 둥 해괴한 소리를 늘어놓기도 하고 말이다. 봄비가 내린 산에는 하루가 다르게 초록이 짙어지겠지만 2022년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은 하루가 다르게 갈색이 짙어지는 느낌이다. 초봄에 낙엽이 지려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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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선거가 있은 지 십여 일이 지났습니다. '웰컴 투 꼰대 월드!'를 외치는 대한민국의 많은 꼰대 님들 덕분(?)에 나를 비롯한 많은 꼰대 청산론자들은 곳곳에서 스트레스를 받는 불상사를 겪어야 했습니다. 오프라인에서의 스트레스는 그러려니 하고 참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퇴근을 하고 조용히 휴식을 취해야 하는 시간에도 스트레스는 줄어들지 않습니다. 텔레비전의 뉴스와 온라인을 뒤덮은 기사들 대부분은 취임도 하기 전의 대통령 당선자에 대한 '용비어천가'로 넘쳐납니다. 이것은 숫제 MB 시절의 '기레기' 탄생 신화를 뛰어넘는 수준입니다. 심지어 어떤 기자는 질문에 앞서 "정말 외람되오나"라는 말로 당선자의 심기를 살피려는 모습을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알아서 긴다'는 말은 비단 군부 독재 시대에나 있었던 과거의 유물만은 아니었나 봅니다.


나는 텔레비전의 모든 뉴스와 인터넷 포털 기사를 차단한 채 독서와 음악 감상의 시간을 늘려가고 있는 중입니다. 말하자면 강제적인 디지털 디톡스(digital detox)를 실천하고 있는 셈인데 이것 역시 크게 효과를 보고 있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행위가 자발적인 게 아니라 '강제적인'에 방점이 찍혀 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나도 모르게 중독의 수준에 이른 웹 서핑이나 텔레비전 시청 등은 마음을 먹는다고 쉽게 끊을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천군이라는 기녀에 빠져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김유신이 이를 끊기 위해 습관처럼 기생집을 찾는 애마의 목을 베었던 것을 감안할 때 TV 리모컨이나 스마트폰 버튼을 누르는 제 손가락을 잘라야 하겠지만 차마 그렇게는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내일은 낮과 밤의 길이가 같다는 춘분입니다. 마냥 짧기만 했던 동지섣달의 낮 길이가 시나브로 이렇게 길어졌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강원도엔 때 아닌 폭설이 내리고 기세를 드높이는 꽃샘추위로 인해 행인들의 어깨는 한껏 움츠러드는 요즘입니다. 검찰 출신의 최고 권력자로 인해 대한민국의 여론 역시 한껏 움츠러드는 걸 보면 기자들 또한 켕기는 게 많은 모양입니다. 서릿발 같은 검찰 권력의 칼날이 약하디 약한 서민의 어깨를 겨누지나 않을까, 쌓이는 스트레스에 더해 걱정이 점점 늘어만 갑니다. 그리고 국민들의 공포심이 증가하면 증가할수록  권력자를 향한 그들의 '용비어천가' 소리는 높아만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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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사 2022-03-21 1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떡을 할 놈의 세상 ㅜ

꼼쥐 2022-03-24 18:55   좋아요 0 | URL
조금 시간이 가면 나아질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은가 봅니다. ㅜㅜ
 

어떤 사물이나 서비스의 가격에 대해 골똘히 생각할 때가 더러 있습니다. 사실 소비에 익숙하지 않은 나는 쓰던 물건을 쉽게 버리거나 기분에 따라 쉽게 구매하지도 않는 까닭에 이렇다 할 과소비는 없는 편이지만 필요한 물건을 구매하거나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한 순간이 오면 지불해야 할 가격이 적정한지 곰곰 생각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물론 합리적인 소비자라면 누구나 그렇겠습니다만 나의 경우와 하나 다른 게 있다면 아마도 터무니없이 비싼 바가지 가격을 걱정하는 일반 소비자와는 다르게 나는 제품의 생산자에게 돌아가야 할 몫이 너무 저렴한 게 아닌가 하고 걱정한다는 점입니다. 그렇다고 내가 타인보다 정이 많거나 경제적으로 부유하다는 오해는 하지 말아 주시길...

 

이와 같은 습관은 아마도 먹거리를 제외한 일반 소비의 많은 부분을 책이 차지하는 데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책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책의 구매가 끊을 수 없는 취미생활이기도 하지만 나날이 쪼그라드는 출판시장의 어려움을 감안할 때, 그리고 그 한 권의 책이 내 수중에 들어올 때까지 거쳤을 많은 노력과 시간을 생각하면 현재 물가에 비해 책의 가격은 터무니없이 저렴한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절로 드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내가 출판계에 몸을 담고 있거나 가까운 사람이 그쪽 계통에서 일을 하고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어떤 사람에게는 한 권의 책이 전 생애에 걸친 삶의 결과물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의 삶 전체에서 얻은 깨달음을 만 원 남짓한 돈으로 퉁친다는 게 때로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박하다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예컨대 고인이 되신 전시륜 님은 <어느 무명 철학자의 유쾌한 행복론>이라는 책 1권을 출간했을 뿐입니다. 그것도 많은 우여곡절 끝에 사후에 출간되었지만 말입니다. 그런 소중한 책을 고작 만 원 남짓한 돈을 지불하고 구매하면서 내가 할 일은 다했노라 고개를 빳빳이 든다는 게 인간답지 못하다는 생각입니다. 우리 주변에선 이런 일들이 얼마나 많이 벌어지는지요. 어떤 이는 '공정 가격'이라고 합디다만 나는 그런 어려운 용어를 떠나서 인간 대 인간으로서 생각해보자는 뜻입니다. 누군가가 들려주는 삶의 의미를 어떻게 만 원, 2만 원 따져가며 셈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물건을 구매하거나 타인의 손을 빌릴 때 우리는 적어도 그 속에 숨은 많은 시간과 노력을 셈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공정이고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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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2-03-14 1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 무명철학자의 유쾌한 행복론. 저도 참 좋아했던 책이고 그래서 친구들에게 선물도 많이 했었는데요. 여기서 만나게 되네요.

꼼쥐 2022-03-19 21:35   좋아요 0 | URL
아, 다락방 님도 ‘어느 무명철학자의 유쾌한 행복론‘을 좋아하셨군요. 참 귀한 책인데 다락방 님의 공감 댓글을 읽고 나니 저도 왠지 기분이 좋아지네요. ㅎ

새파랑 2022-03-14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꼼쥐님의 글을 보니 책값이 너무 싸다는 생각이 듭니다. 작가가 혼신을 다해 썼을 이야기인데 함부러 셈하는 것도 어쩌며 실례일수도 있겠네요~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글인거 같아요 ^^

꼼쥐 2022-03-19 21:38   좋아요 1 | URL
더러는 정말 형편없다고 생각하는 책도 만날 때가 있지만 그래도 대부분의 책은 작가의 노력에 비해 우리가 지불하는 대가는 정말 싼 편이라고 생각해요. 밥 한 끼의 값으로 한 사람의 지적 재산을 모두 살 수 있다는 게 생각해보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