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의 기억이 나른한 일상을 떠받치는 오후. 오늘처럼 흐리고 비가 오락가락하는 궂은 날씨의 휴일이면 온갖 상념들이 사정없이 몰아친다. 생각의 물꼬가 터져 부유하는 상념을 따라 이리저리 휘둘리다 보면 괜한 허기가 몰려오기도 하고, 축 늘어진 피로가 혈관을 타고 흐르기도 한다. 이런 날 오후에는 달콤한 오수(午睡)의 유혹을 뿌리치기 어렵다. 동네 뒷산에는 여전히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궂은 날씨에도 개화를 위한 분주한 노력이 꿈결인 양 아른거린다. 아파트 화단에 핀 산수유는 빗물을 머금은 채 다소곳하고 아슴아슴 잠에 빠져드는 듯 시야에서 멀어지는 풍경들.

 

"산수유는 다만 아른거리는 꽃의 그림자로서 피어난다. 그러나 이 그림자 속에는 빛이 가득하다. 빛은 이 그림자 속에 오글오글 모여서 들끓는다. 산수유는 존재로서의 중량감이 전혀 없다. 꽃송이는 보이지 않고, 꽃의 어렴풋한 기운만 파스텔처럼 산야에 번져 있다. 산수유가 언제 지는 것인지 눈치채기 어렵다. 그 그림자 같은 꽃은 다른 모든 꽃들이 피어나기 전에, 노을이 스러지듯이 문득 종적을 감춘다. 그 꽃이 스러지는 모습은 나무가 지우개로 저 자신을 지우는 것과 같다. 그래서 산수유는 꽃이 아니라 나무가 꾸는 꿈처럼 보인다."  (김훈의 '자전거 여행' 중에서)

 

김훈의 글은 언제 어느 곳에서 읽어도 그 맛이 느껴진다. 때로는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는 말을 주문(呪文)처럼 믿고 따르는 정신 나간 사람도 있긴 하지만 사계절 온전한 정신을 갖고 자연의 섭리를 따라 둥글게 살아가고자 하는 이의 글을 읽고 있노라면 글을 읽는 사람도 덩달아 머리가 맑아지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럴 때면 공간이 의식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이 공간을 지배한다는 생각이 절로 들기도 한다. 오죽 못났으면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이 공간에 따라 자신의 의식이 이리 기웃 저리 기웃 지배를 당할까.

 

나라가 미쳐 돌아가려는지 제정신이 아닌 듯 보이는 사람들이 뉴스의 전면을 뒤덮고 있다. 그것을 변명이나 하려는 듯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는 둥 해괴한 소리를 늘어놓기도 하고 말이다. 봄비가 내린 산에는 하루가 다르게 초록이 짙어지겠지만 2022년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은 하루가 다르게 갈색이 짙어지는 느낌이다. 초봄에 낙엽이 지려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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