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도 그런지 알 수 없지만 내가 어렸을 때는 학생들을 동원하는 웅변대회가 많기도 했다. 웅변대회의 주제는 대개 정부를 찬양하거나 정부 정책을 홍보하는 내용이 주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웅변 원고를 쓰는 일도 만만치 않아서 온전히 학생에게 맡기기에도 미덥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교내 웅변대회야 자체적으로 하는 행사이니 참가하는 학생들이 스스로 원고를 쓰고 자발적으로 웅변 연습을 하게 마련이지만, 군 대항 혹은 도 대항 나아가서 전국 대항일 경우에는 학교의 명예가 걸린 문제이니 선생님들도 뒷짐을 진 채 마냥 손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학생이 쓴 원고에 첨삭을 가하고, 방과 후에 남아서 웅변 연습을 지도하고, 다른 학교의 출전자 정보를 빼내는 등 온갖 노력을 다했었다. 학교 대표로 선발되는 학생은 주로 학업 성적과 비례하는 경향이 있었다. 성적이 좋은 학생이 선생님의 말귀도 잘 알아듣고, 주제에 맞게 원고도 잘 쓴다고 판단해서 그렇게 했을 테다.


소심하여 남 앞에 서는 걸 무척이나 꺼리고 두려워했던 나도 웅변대회라면 지겹도록 많이 참가했었다. 대개는 담임 선생님의 강요에 의한 것이었지만 그 덕분에 발표력이 조금씩 좋아졌던 걸 감안하면 소득이 아주 없었다고는 하지 못하겠다.


최근 아랍에미리트를 국빈 방문한 대통령의 연설이 야당과 일부 언론의 도마에 올랐다. 대통령은 15일(현지시각) 아랍에미리트(UAE)에 파병된 아크부대 장병들에게 "아랍에미리트는 바로 우리의 형제 국가"라면서 "합동훈련을 하고, 작전을 하고, 교육을 하는 이 현장은 바로 여기가 대한민국이고 우리 조국"이라고 말했다. 여기까지는 그럭저럭 무난했다. 이어서 말하길 "형제국의 안보는 바로 우리의 안보"라며 "아랍에미리트의 적은, 가장 위협적인 국가는이란이고 우리 적은 북한"이라는 맥락에도 맞지 않는 다소 엉뚱한 말을 내뱉고 말았다. 이에 대하여 야당과 일부 언론은 '외교 참사'라는 평가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이란과 아랍에미리트는 한때 관계가 좋지 않았던 적도 있지만 지금은 관계를 완전히 복원하였고, 이를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그런 면에서 '아랍에미리트의 적은 이란'이라는 대통령의 발언은 국제 정세를 모르는 무식의 발로는 맞지만 그게 만약 '아랍에미리트의 적은 이스라엘'이라고 했더라면 어쩔 뻔했는가. 전 세계적으로 난리가 나지 않았겠는가. 게다가 '아부다비 지속가능성 주간' 개막식 기조연설에서도 '원전 생태계를 빠르게 복원하고'와 같은 행사 주제와 맞지도 않고, 의미도 없는 말을 연설 전문에 끼워 넣음으로써 우리나라 대통령의 무식을 전 세계에 알리기도 했다. 그러나 무식함이란 한 개인의 쪽팔림으로 끝날 수 있다. 물론 그가 대통령이라면 그 무게가 다르겠지만...


우리나라의 대통령은 연설만 했다 하면 실수를 반복한다. 그건 아마도 자신이 모르는 내용에 대하여 다른 사람이 써준 원고로 말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실수를 줄이려면 공부를 해야 하고, 공부를 하기 싫으면 아는 내용만 말해야 한다. 예컨대 모든 연설에서 폭탄주 제조법이라든가 대한민국의 술문화 등에 대하여 말한다면 실수는 거의 없거나 완전히 사라질지도 모른다. 물론 연설의 주제에 맞지 않아 코미디 같은 느낌이 약간 들긴 하지만 그래도 뭐 어떠랴. 실수를 무한반복하는 것보다 남들에게 웃음을 주는 게 더 좋지 않은가. 국익에도 그리고 듣는 이의 정신건강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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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 2023-01-17 16: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뉴스를 보셨군요^^
제 생각이랑 어쩜 이리도 일치하시는지..
매번 실수 실수 실수..
대통령이 무식하고 무능한거 죄악이지 않습니까?
남편은 아니라고... 용서가 가능하다는데 전 그말에 반대합니다
참 너그럽기도 하죠!
제발 공부 좀 합시다!

꼼쥐 2023-01-17 18:27   좋아요 1 | URL
대통령을 대신하여 변명하자면 대통령을 처음 해보는 것이라서 그런 듯합니다. ㅎ
사법시험에 9수를 한 것처럼 대통령 선거에서 9번쯤 떨어져 봤거나 대통령을 두 번쯤 연임했더라면 좀 잘하지 않았을까요? 그래도 늘 술만 마셨을까요? 이에 대한 대답은 잘 모르겠네요. 대통령을 한 번도 해보지 못해서. ㅎ

singri 2023-01-17 16: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죽하면 아무것도 하지말고 관저에서 술만 먹어라 하고싶은심정입니다

꼼쥐 2023-01-17 18:28   좋아요 1 | URL
그게 국익을 위해서는 백 번 옳은 선택인 듯합니다.
해외순방만 나갔다 하면 사고를 치니...

북프리쿠키 2023-01-17 16: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란이 아니고
˝이런˝으로 우기지 않을까요 ㅎㅎ

꼼쥐 2023-01-17 18:29   좋아요 1 | URL
그러면 이란이라고 최초 보도한 방송국을 먼저 찾아야 할 듯하네요. 그게 만약 TV조선이라면 어쩌죠? 정정보도를 요구할 수도 없고...

DYDADDY 2023-01-17 16: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연설만 코메디면 좋겠습니다. 대통령의 정치는 코메디를 넘어 흉측해진지 오래라서 차라리 연설만 코메디면 좋겠습니다.

꼼쥐 2023-01-17 18:31   좋아요 3 | URL
다른 나라 국가가 나올 때도 가슴에 경례를 하고 있고 흠을 잡으려 들면 모든 게 코미디인 듯합니다. 이건 뭐 국격을 떨어트려도 너무 떨어트리고 있으니 대통령이 아니라 북한의 X맨이 아닐까 의심스럽습니다.

잉크냄새 2023-01-18 1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저 지지리도 모자란 놈이란 생각만 드네요.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앉는 인간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라더니 그 머저리로 인하여 대통령의 자리가 참 우스워졌어요.

꼼쥐 2023-01-20 15:03   좋아요 0 | URL
대통령 본인도 대통령이란 자리를 우습게 생각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말이죠. 그렇지 않았더라면 지금처럼 그런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겟죠. 해외 동포들이 창피해서 얼굴을 들 수가 없다는 말을 여러 번 하더군요.

기억의집 2023-01-18 09: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러니 지금 미국이 상대도 안 하죠. 우리 나라 북한문제를 우리 나라만 빼고 미일만 회담 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지금 기업들이 대량 구조조정해서 지금 난리라던데.. 노인분들은 자기 자식들 짤려서 좋겠어요!!!

꼼쥐 2023-01-20 15:02   좋아요 0 | URL
미국이 자국의 경제만 우선시하니까 잘나가는 기업들 대부분이 미국으로 미국으로 떠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럼에도 미국 말이라면 뭐 하나 반박도 하지 못한 채 끌려다니는 꼴이란 정말 가관도 아닙니다. 게다가 일본에게 우리가 빚진 게 없는데 일본이 하자는 대로 모든 걸 양보하는 걸 보면 정말 화가 납니다.
 

아이들이 떠난 운동장은 휑한 쓸쓸함이 가득합니다. 운동장 가장자리를 따라 눈석임물이 얕은 물길을 내어 흐르고, 빈 운동장을 독차지하듯 길냥이 두 마리가 어슬렁어슬렁 산책에 나섰습니다. 푸석푸석한 오후의 겨울 햇살이 운동장 한가득 퍼져갑니다. 까치 한 마리가 날아와서는 먹이를 찾는 듯 포릉포릉 가볍게 날고 있습니다. 심심하던 차에 잘 되었다고 생각한 길냥이들이 까치 주변으로 몰려듭니다. 위험을 감지한 까치가 밭은 울음소리를 내며 경고성 엄포를 놓아 보지만 길냥이들은 전혀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길냥이들의 짓궂은 태도에 까치는 그만 포기하고 저만치 날아가버렸습니다. 운동장은 다시 길냥이들의 차지가 되었습니다. 겨울 햇살이 약간의 온기를 뿌려주는 동안 눈석임물이 졸졸 소리를 내어 흐르고 있습니다.


점심을 먹은 후 사무실 근처의  초등학교 운동장을 몇 바퀴 돌고, 아무도 없는 벤치에 앉아 햇빛을 쪼이다 들어왔습니다. 자신의 삶에서 크게 욕심만 부리지 않는다면 하루하루의 일상은 언제나 평화롭고 푸근합니다. 어제 도서관에 잠시 들렀다가 팟빵의 오디오 매거진 <월말 김어준>이 책으로 출간된 것을 보고 조금 놀랐습니다. 반갑기도 했고 말이죠. 검은색 바탕에 흰색 글씨로 '월말 김어준 part 1'이라고 쓰인 책등을 발견하였을 때 뭐랄까, 오래된 친구를 길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 듯한 그런 느낌을 받았던 것입니다. 서가 옆에 서서 책을 잠시 펼쳐보고 다시 꽂아 놓을 생각이었는데 그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쟁쟁하게 들리는 듯하여 나도 모르게 책을 대출하고 말았습니다.


동장군의 기세가 절정을 이루어야 할 시기에 예년보다 따뜻한 나날이 이어지다 보니 봄이 멀지 않은 듯한 느낌이 듭니다. 내가 지금 읽고 있는 백은선의 산문집에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한 가지 면만 가진 사람도 없고 한 가지 성격만 가진 인간도 없고 나는 내가 싫고 좋고 슬프고 이상하고 안도하고 그런 반복을 계속해서 들락날락거리는 게 내게 남은 삶을 탕진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것은 나뿐이야."


두서없는 글이 되고 말았습니다. 삶이 두서없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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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gri 2023-01-10 19: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김어준 책 어려워보여요.tbs서 내쳐지더니 유튜브에서 첫방으로 슈퍼챗 세계 1위찍었다고. 왠지 유튜브도 불안하긴하지만요ㅋ .
5세후니 일 잘 하네요;;ㅡㅡ

꼼쥐 2023-01-12 15:55   좋아요 0 | URL
팟빵에서 가끔 들었던 내용인지라 그리 어렵지는 않았지만 다 아는 내용이라고 생각해서인지(건방지게) 집중할 수가 없었어요. 유튜브 방송은 동접자가 여전히 20만에 육박하고 슈퍼챗도 많더군요.
 

2023년 새해가 밝았다. '검은 토끼의 해'라는 기묘년의 한 해를 사람들은 그저 막연한 희망과 함께 맞는다. 오래된 습관처럼 말이다. 대학교 2학년생이 되는 아들은 새해의 일출을 볼 자신은 없다면서 어제 오후 자신의 사진기를 메고 남한산성으로 향했었다. 일출 대신 2022년의 마지막 날 일몰을 사진에 담겠다는 의도. 나는 일몰도 일출도 관심이 없는 사람이지만, 보신각 타종행사를 보기 위해 자정의 추위와 혼잡을 무릅쓰고 기를 쓰고 종로로 향하는 사람들이나 새해의 일출을 보겠다고 강원도로 향하는 긴 차량행렬의 정체를 묵묵히 인내하는 사람들의 에너지를 때론 존경해 마지않는다.


인천 송도의 국제캠퍼스 기숙사에서 1년을 보낸 아들은 며칠 전 신촌의 원룸에 자리를 잡았다. 보증금 천만 원에 월 60~70만 원에 달하는 임대료. 거기에 식비며 용돈, 등록금 등을 더하면 대학생 한 명에게 드는 비용 치고는 꽤나 큰 부담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더구나 물가며 금리가 천정부지로 치솟는 마당이니 '월급 빼고는 다 오른다'는 탄식이 올해도 계속되지 않을까 싶다. 우리나라의 기업들은 치솟는 금리뿐만 아니라 신용 경색으로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는 데 애를 먹고 있다. 돈이 씨가 마른 것이다. 회사채를 발행하면 언제든 원하는 만큼의 자금을 조달할 수 있었던 지난 정부 때와는 달리 지금은 아무리 우량한 기업도 회사채를 발행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회사채가 팔리지 않았을 때의 뒷감당이 더 무섭기 때문이다. 이러한 추세로 인해 2023년에는 많은 기업들이 문을 닫고 IMF 외환위기와 같은 경제 위기가 도래할지도 모른다는 암울한 전망이 비등하다.


그와 같은 위기가 온다고 할지라도 현 정부는 자신들의 책임은 전혀 없다고 발뺌할 게 분명하다. 지금까지의 행태로 보아서는 전 정부의 책임이라거나 노조의 책임으로 돌릴 개연성이 높지만, 과연 그런 변명이 위기 상황에서도 통할지 두고 볼 일이다. 윤석열 정부 8개월. 그 짧은 시기에 많은 국민들이 정말 희한한 이유로 세상을 등졌다. 길거리에서 깔려 죽기도 하고, 차를 몰고 가다 불에 타서 죽기도 하고, 산업 현장에서 기계에 빨려 들어가거나 깔려 죽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 정부는 미안해하지 않는다. 모든 게 죽은 이들의 잘못일 뿐 자신들은 그저 술이나 퍼마시고 전쟁만 말하면 그만이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정부를 믿고 있는 대한민국의 국민들을 오히려 해외에 있는 동포들이나 우리나라를 사랑하는 외국의 국민들이 더 걱정을 한다. 정권이 바뀔 때까지 부디 안녕하시란다. 그게 내가 들었던 새해 인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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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집 2023-01-01 23: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진짜 미친놈 하나 뽑아서 .. 짜증나고 무기력해졌는데 요 며칠 저는 다시 각오를 다졌어요. 다시 진보유튭 부지런히 듣고 있고 열심히 윤 욕하고 다녀요. 저의 남편도 금융권인데 아예 채권 발행할 수가 없다고 하더라도 십프로대인데 감당이 안 되서 기존 것만 관리한다고 하는데.. 남편말로는 지금 imf와 다를바 없다고 하는데요. 단지 돈을 끌어오지 않을 뿐이지 기업들 힘들다고. 저는 한편으로는 국힘 뽑은 것들 쌤통이다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집값 떨어지는 것만 잘하고 있긴 하네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꼼쥐 2023-01-02 17:41   좋아요 2 | URL
정말 그렇습니다. 문제는 본격적인 고통은 아직 시작도 안 했다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얼마나 큰 고통이 닥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부디 나라 경제가 와해되는 일만은 없었으면 하고 바라게 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엊그제 퇴근 무렵에 자동차 타이어를 교체하기 위해 타이어 전문점을 들렀었다.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궂은 날씨 탓에 평일보다 손님들이 적을 것이라는 나의 생각은 타이어 판매점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어림잡아 대기 차량만 족히 예닐곱 대는 되는 듯 보였다. '이걸 어쩐다. 되돌아가야 하나? 아니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기다려서 교체를 하고 가야 하나?' 갈등을 거듭하다 결국 교체하는 쪽으로 결론을 짓고 사무실에 눌러앉았다. 다들 나처럼 날씨만 믿고 어떻게든 대기 시간을 줄여보겠다는 심산으로 이 궂은 날씨를 뚫고 예까지 온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니 제 발등을 찍은 사람들의 면면이 참으로 딱하게 여겨졌다. 동병상련의 마음이랄까, 아무튼.


어두워진 하늘에서는 눈이 하염없이 쏟아지고 끝도 알 수 없는 무한 대기의 긴 기다림만 내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의자에 앉아 휴대폰 액정에 코를 박고 있는 사람들과 별 내용도 없는 텔레비전 화면을 맥 놓고 바라보다 이유도 없이 채널만 돌리는 사람 등 기다림은 나를 포함한 사람들 모두에게 몸이 배배 꼬일 정도의 길고 지루한 시간이었다. 나 역시 딱히 할 게 없었던 건 매일반. 답답함도 풀 겸 야외에 놓인 대기 의자로 자리를 옮겼다. 테이블에 놓인 재떨이에는 담배꽁초가 수북했고, 누가 피우다 불을 끄지도 않고 버린 담배꽁초에서는 가늘고 푸른 연기가 길게 피어올랐다. 허술한 차양막을 비웃기라도 하려는 듯 바람이 불 때마다 시린 눈발이 안쪽까지 들이쳤다. 그렇게 한참을 앉아 있던 어느 순간 웬 노인 한 분이 의자를 끌어 내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다짜고짜 야당에 대한 욕을 쏟아내는 게 아닌가. 자신이 여당의 지구당 위원장이라면서. 어떤 양해도 구하지 않고 나에게 말을 걸어온 것도 불쾌했지만 지지율 16%(모닝컨설트 조사)의 대통령을 찬양하는 정신 나간 사람과 같은 자리에 있다는 것도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누구나 사상과 양심의 자유는 있는 것이지만 그가 나보다 나이가 더 많다고 해서 내게 자신의 사상을 강요할 권리는 없지 않은가. 그는 60대 후반이나 70대 초반쯤으로 보였다. 인상을 쓰며 자리를 피하는 나를  쫓아오면서까지 자신의 주장을 큰 소리로 떠들어댔다. 중간중간 육두문자를 섞어가면서 말이다. 나보다 나이만 어리다면 "정신 차려, 이 미친놈아!" 하고 한마디 따끔하게 충고를 하고 싶었지만 아버지뻘의 그 사람에게 차마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대한민국 국민 중 16%에 해당하는 개, 돼지의 모습을 엊그제 직접 내 눈으로 목격하고 들었던 생각은 나는 앞으로 저렇게 늙지 말아야겠다는 것이었다. 타인의 의사를 무시한 채 내 주장을 함부로 지껄여서도 안 되겠지만 아무런 근거도 없이 그저 본인이 싫다는 이유로 타인을 비방하고 16%의 국민이 마치 전체 국민인 양 포장하는 그런 미친 짓은 하지 말자는 다짐을 새롭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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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날씨라고 해도 믿을 만큼 순하고 부드러운 날이었다. 12월도 중순을 향해 치닫고 있는데 이래도 되는 건가? 하는 의문이 남기는 하지만 말이다. 아파트 주변을 거니는 사람들의 표정은 날씨만큼이나 가볍고 여유로워 보였다. 어린 손자와 함께, 반려견의 목줄을 잡고, 혹은 연인이나 가족과 함께 기울어가는 겨울 햇살을 받으며 느리게 걷는 사람들. 우뚝 솟은 아파트 단지의 유리창에 반사되는 햇살의 눈부심. 누렇게 마른 잔디 위로 마른 햇살이 번진다.


사람들은 이따금 아무것도 아닌 일에 괜한 거부감이나 부담을 느끼곤 한다. 오늘처럼 순한 날씨에도 부담 아닌 부담을 느끼기도 하고, 산책을 하는 사람들의 담담한 시선에도 차마 말로 다 할 수 없는 진한 감동을 느끼기도 한다. 모든 살아 있는 것에 대한 연민과 거룩함, 그리고 공감과 애정이 빚어내는 저 진한 무념의 시선.


오늘 발표된 올해의 사자성어가 '과이불개(過而不改)'라고 보도되었다. 매년 교수신문이 온라인 설문조사를 통해 뽑아 온 사자성어는 그해의 정치상황이나 사건에 영향을 받는 것이지만 올해는 유독 그런 느낌이 강했다. 지난달 23일부터 30일까지 교수 935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의하면 476명의 교수(전체의 50.9%)가 '과이불개'를 뽑았다고 한다. 논어의 '위령공편'에 등장하는 '과이불개 시위과의(過而不改 是謂過矣)', 즉 "잘못하고도 고치지 않는 것, 이것을 잘못이라 한다."는 구절에서 앞의 네 자만 딴 것이다.


어디 정치인들 뿐이랴. 소위 나라를 이끌고 있다는 모든 엘리트 집단이란 집단은 모두 저마다의 이익을 챙기기에 분주할 뿐 국가 전체의 안위나 서민의 삶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는 게 일반적이지 않은가. 비근한 예로 국가인권위원회에서 2003년부터 논의되었고, 2007년 유엔 인권이사회의 권고에 따라 법무부가 입법 예고한 이래 현재까지 제정은커녕 공청회조차 열리지 않는 '차별금지법'만 보더라도 우리나라 기득권 세력의 공고한 이기심을 엿볼 수 있지 않은가. 오늘따라 겨울 햇살은 저리도 따사로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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