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 도쿄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윤옥 옮김 / 은행나무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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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살 도쿄 -오쿠다 히데오

- 청춘이 끝나고 인생이 시작되는 순간



 

재수를 위해 도쿄로 상경한 다무라 히사오의 10년 정도의 시간을 다룬 이야기를 읽으며 나의 20대 시절이 당연하게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도시로 올라온 다무라의 모습에는 나의 20대 시절의 모습은 없다. 나는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을 벗어난 적이 없는 서울 사람이었지만 나의 부모님들은 서울 사람들이 아니었다. 각각 다른 지역에서 태어난 두 분의 갈등 속에서 나는 도시에서 자랐고, 대학교도 서울에서 다녔다. 대학교에서 처음 맞는 여름 방학에 큰 당혹감은 친한 친구들이 두 명 빼고 모두 서울을 떠났다는 것이다. 방학이 되면 같이 여행도 가고 스터디도 하며, 더 많은 음주가무를 즐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친구들이 집으로 내려갔기 때문이다. 동아리 활동을 너무 극심하게 했기 때문에 고향으로 내려간 친구들의 빈자리를 많이 느끼지는 못했지만 허전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내가 살고 있었던 곳에서 떠나서 살아보고 싶은 생각을 늘 하고 있었던 것은 어쩌면 방학이 되면 기다렸다는 듯 미련 없이 자취방을 떠났던 친구들의 어질러진 집안을 보았을 때 였을까.


 

만약, 내가 다시 스무 살이 되어 도시로 올라간다면 어떤 것을 가지고 올라갔을까. 음악을 사랑했던 청년 다무라는 사랑하는 음악이 담긴 레코드 100여장을 짐에 넣어 올라왔다. 공부해서 대학에 들어가겠다는 녀석이 레코드 100장을 올라갔다는 것에 실소가 터졌다. 집안의 간섭과 갑갑한 고장의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도쿄에서 대학생이 되는 것이었고 그것을 핑계 삼아 떠날 수 있었다.

 

자신의 자서전같이 써 내려간 오쿠다 히데오의 [스무 살, 도쿄]속 다무라는 1980년대에서 일어났던 사건들과 그의 청춘을 녹였다. 실패해도 괜찮다고 토닥여줄 수 있는 청춘이라는 푸른 이름으로 지내는 동안 그가 사랑했던 존 레논이 떠났고, 나고야가 아닌 서울 올림픽이 열렸다. 레코드 백여 장을 들고 도쿄로 상경한 다무라가 대학에 들어 갈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지만 그는 대학에 들어갔고, 우연치 않는 말실수로 자신을 좋아했던 여자를 알게 되며 청춘에 걸맞은 첫사랑이 왔다가 지나갔다.

 

무엇이든 할 수 있었던 다무라는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대학을 중퇴하게 되었다. 동기들보다 늦게 들어갔던 대학이지만 사회생활은 더 빨리 시작하게 되었다. 한때는 신이나서 열심히 있했던 곳에서 다무라는 이름도 날리며 잘나가는 직장인이 되었다. 나이를 먹으면서 어머니의 당부로 선도 보게 되지만 레코드 백여 장을 들고 도쿄에 올라왔을 때의 설렘은 이제 사라진지 오래라 모든 것이 시큰둥하게 변해갔다. 그렇게, 어른이 되어가는 것일까.

서른을 앞둔 그해,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다무라는 이런 이야기를 나눴다.


 

< 군중이 장벽을 기어올랐다. 양손을 높직이 하늘로 쳐들고 있었다. 불꽃이 올라갔다. 환성이 메아리쳤다.

“동서냉전도 끝났군.” 오구라가 불쑥 말했다.

“좋은 일 아니냐?”라는 미와. “세계는 바야흐로 물이 오른 거야. 이게 시작이지.”

“우리도 그렇다면 좋을 텐데.” 히사오가 취기 오른 머리로 말했다.

“청춘은 끝나고 인생이 시작된다, 라는 거지.”

누가 한 말인가 했더니 모리시타였다. 녀석. 시건방진 소리를 다 한다.

하지만 비웃어줄 생각은 없었다. 녀석이 꽤 괜찮은 얼굴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서른이 된 사내의 얼굴이었다.

화면에서는 군중이 환희의 퍼레이드를 거듭하였다.

청춘의 끝을 맞이한 사내들은 그 모습을 오래도록 지켜보고 있었다. > P 385~386




 1989년이 끝나고 이제 1990년을 앞둔 청춘이 끝이 나고 인생이 시작된 그들은 지금, 어떤 인생을 살고 있을까. 청춘이 끝나고 인생이 시작된다는 모리시타의 말에 밑줄을 쫙 그으면서 나의 시간을 떠 올려본다. 오래전 청춘이 끝이 나고 인생이 시작된 것이 분명한데 왜 아직도 청춘이 끝이 나지 않아 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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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키우는 고양이 - 유튜버 haha ha와 공생하는 고양이, 길막이의 자서전
하하하(haha ha) 원작, 길막이와 삼색이 감수 / 다독임북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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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을 주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인간을 키우는 고양이]




어느 양어장, 싱싱한 잉어들이 헤엄쳐 다니는 곳. 굶지 않고 지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한 어미 고양이는 그곳에 터를 잡아 새끼를 낳아 키웠다. 일정 기간이 되면 영역을 떠나 자신만의 영역을 만들어 나가는 길고양이인 어미는 영역을 벗어나기도 전에 어느날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어미를 잃은 고양이중 한 마리였던 길막이는 그곳에 자신의 어미처럼 새끼를 낳았다. 그 고양이들에게 밥은 주고 정은 주지 않겠다는 양어장 주인인 haha ha님은 길막이의 딸들, 그 딸들이 낳은 아들들과 함께 살고 있다. 그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지만 고양이들에게는 무릉도원이 아닐까?


 

여름에는 잉어를 삶아주고, 겨울에는 빙어를 잡아 먹방도 찍게 해준다. 고양이를 위해 따뜻한 집도 만들어 주고 감자, 맛동산(고양이들의 오줌과 똥을 그렇게 말한다.)도 걸러주는 수동 화장실도 만들어줬다. 물론 고양이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것 같지는 않다. 복막염에 걸린 고양이 무(조, 무, 래기는 연님의 아들들. 연님이는 길막이의 딸)는 절대 집으로 들이지 않겠다는 하님의 집으로 들어가 치료까지 받게 되었다. 순진무구한 얼굴, 늘 하님의 집을 염탐했던 무는 결국 집에 눌러 앉았다. 타고난 금손으로 뭐든 뚝딱 만드는 하님에게 핸드메이드 캣휠까지 얻었다.


 

길막이의 딸들과 그의 자식들, 어느 날 굴러온 돌로 양어장에 눌러 앉은 삼색이, 그녀의 딸들 둘이 뒹굴 거리는 이 양어장의 모습을 담은 유튜브는 어느덧 구독자 100만을 찍었다. 구독자 40정도 되었을때 쓰인 이 책은 사랑스러운 고양이들의 모습을 닮았지만 사실 절대 고양이들에게 정을 주지 않겠다는 하하하라는 사람을 궁금하게 만들었다. 이런 무릉도원을 만들어주면서 고양이들보다 사실 개들을 더 좋아하고, 고양이들과 한 겨울 캠핑을 하며 책을 읽는 그는 어떤 사람일까.


 

어느 날 작은 몸으로 양어장을 찾아온 삼색이는 길막이 식구들에게 구박을 받았지만 결국 그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렇지만 인간에게 절대 곁을 주지 않았다. 원래 고양이들은 다 그렇다. 절대 처음부터 호락호락하지 않고 도도하다. 삼색이도 그랬지만, 그가 가져다 준 밥은 아주 잘 먹었다. 한 달이 지난 후 그를 향한 마음을 변했는지 사람의 손을 허락했던 그 순간의 모습은 가슴이 먹먹했다. 길막이네 식구 사이에서 머리 드밀고 밥을 먹다가 솜방망이로 맞고, 우리 애들 먹을 것도 없으니 너는 빨리 가라며 얼마나 크게 하악질을 하던지. 하지만 삼색이는 굴하지 않고 그곳에 알박기를 성공했다. 하님도 모르게 새끼 두 마리도 낳았다. 문득 생각해 보니 삼색이가 어쩌다 이 양어장을 찾아 왔을까 궁금해지곤 했다. 영역 동물인 고양이는 태어나 3개월이 지나기도 전에 어미의 곁을 떠나 다른 영역으로 옮긴다. 그렇게 떨어져 나온 삼색이는 어쩌다가 양어장에 도착했을까.


 

haha ha님의 유튜브를 알고 있다면 이 책은 그동안의 양어장에서 있던 고양이들과 정을 주지 않겠다는 그의 기록, 그리고 그가 애정을 담아 찍은 고양이들의 사진에 입꼬리를 올려 줄 것이다. 우주 최강 미모 삼색이의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모습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어느 날부터 보이지 않는 길막이의 딸 연님이가 걱정이 된다. 길막이의 딸중 연님이는 유독 사람 손을 안탄 고양이였다. 동배에서 나온 야통이와 달리 사나운 연님이는 건너편 집의 삼색이네도 제일 쫄게 만들었던 고양이였다. 연님이가 낳은 아들 셋중 한 마리는 독립을 했고 두 마리는 양어장을 떠나지 않았다. 길막이의 딸 연님과 그의 자식들, 그리고 야통이와 빈집이의 아이들. 건너편에서 자주 넘나들고 있는 삼색이네 식구들. 넓은 양어장에 함께 사는 것이 힘들어 보이지 않았는데, 영역을 아들들에게 남겨주고 연님이는 다른 곳으로 떠난 것 같다. 더 이상 연님이가 보이지 않는다는 영상을 보며 내가 키우는 고양이도 아닌데 눈물이 흘렀다. 인사 한마디 하지 못하고 떠난 옛사랑도 없는데 왜 그런 마음이 들어 울컥하게 만들어 놓는 걸까, 고양이들이란. 부디 연님이가 어느 곳에서 인간을 길들이며 잘 살고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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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지나버린 엄마의 생일 케이크를 찾아왔다. 엄마가 좋아하는 케이크로 주문을 넣었는데, 정작 엄마는 생일 케이크 맛을 보지 못하셨다. 주인을 잃은 케이크는 제 값을 하는 맛이었고 다음에 또 주문하고 싶은 맛이었다. 그래서 슬픈 케이크였다. 



새벽, 응급실로 들어간 엄마의 보호자로 들어가기 위해 코로나 검사를 처음 받았다. 다소 당황스러운 순간이 두 번 지나가고 나서 세 시간 이후에 음성이라는 소식을 접하고 엄마와 함께 병실로 갈 수 있었다. 그리고 이틀 엄마 옆에 붙어 나는 처음으로 간호라는 것을 했다. 30년 전 수술을 하셨던 엄마의 간호는 나의 몫이 될 수 없었고 그 이후 입원 한번 없이 건강하게 사셨다. 처음으로 환자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엄마 옆에서 잠깐 졸거나 뜬 눈으로 이틀 지난 후 간병인 선생님에게 인계 후 집으로 돌아와 절망했다. 엄마가, 이제 내가 알던 그 엄마는 이제 없다는 생각에 눈물이 났다.



뇌경색으로 쓰러진 엄마는 갈수록 낯선 엄마가 되었다. 한 달 동안 엄마의 가슴에 저런 역정이 있었다는 것에 놀랍고 당황스러웠다. 어떤 문제가 있어도 이성적이셨던 엄마가 저런 감정적인 모습만 하루 종일 보이는 것에 동생이 울며 전화를 했다. 감정 기복이 심해지며 화를 내는 엄마의 말에 속에서 천불이 났다가 꺼졌다가 한다고.


나는 모든 것들을 잊고 싶어 책을 읽었지만 잘못된 선택이었다. 하나도 읽을 수 없고 사소한 말들도 귀를 거치지 못하고 사라졌다. 하지만 때로는 웃기도 했다. 그렇게 웃다가 내가 이렇게 웃어도 되는 걸까, 그런 생각에 웃음이 눈물로 바뀌기도 했다. 그렇게 나도 엄마처럼 감정이 조율이 안 되고 있다. 그래도 웃어야겠지. 엄마, 늦었지만 생신 축하해요. 라는 말을 하며 전화를 했다. 엄마는 오랜만에 예전의 엄마로 돌아와 웃으셨다. 엄마, 우리 서로 힘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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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1-03-13 09: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엄마가 웃으셨다.˝ 이 대목에서 안도가 되네요. 얼마나 힘드셨을까요. 쾌유를 바랍니다.

2021-05-22 23: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3-13 19: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오후즈음 2021-05-22 23:49   좋아요 0 | URL
답글이 늦었네요. 감사합니다. 힘든 시간이 잘 지나갔습니다.
 
오 해피 데이
오쿠다 히데오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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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매일 행복하겠어 [오 해피데이_ 오쿠다 히데오]



이사를 가기위해 짐을 줄이지 않았다면 그녀의 심정을 백프로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총 6개의 에피소드로 이뤄진 오쿠다의 단편집에 있었던 첫 번째 이야기 <sunny day>의 노리코의 마음은 어떻게든 짐을 줄여보자는 나의 절실함과 비슷해보였다.



노리코는 집에 방치된 피크닉 테이블을 옥션에 팔게 되면서 옥션의 맛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쓰지 않는 물건을 찾아 팔았지만 이후에는 내가 사더라도 비싸고 좋다고 생각하는 물건들을 찾아내었다. 그녀의 품목들은 많은 구매자들이 선호하는 물건들이었다. 처음 아무도 선택되지 않는 물건을 만날 때는 마치 시련을 당한 것처럼 슬퍼했지만 환호하는 물건을 내놓자, 그녀의 평범했던 얼굴이 빛나기 시작했다. 그녀의 그런 모습에 주변 사람들이 생기 있어 보인다며 칭찬을 하기 시작했다. 그저 물건을 팔고 돈이 생겨서 그동안 가고 싶었던 비싼 음식점을 갔던 것으로 즐거워졌을까.


단순하게 물건을 팔고 돈만 얻었다면 노리코는 옥션을 통한 즐거움을 찾지 못했을 것이다. 처음 구매자가 노리코에게 감사의 메시지를 보내지 않았다면 노리코의 집에 잠들고 있던 물건들이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시작으로 점점 활기찬 매일을 만들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일이든 과하면 부작용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녀가 물건을 팔기위해 집안의 물건들을 찾아내는 것처럼 나도 그랬다. 노리코의 옥션 아이디 sunny day같은 날이 cloud day로 바뀌는 것은 한 순간이었고, 내게도 행복이 오래 지속 되지 않았다. 행복한 날이 어떻게 매일 되겠어.

 


어떻게든 물건을 버리자는 생각으로 대학교 앨범을 빼고 초중고 앨범도 다 버렸다고 하니 주변인들이 뭘, 그렇게까지 버렸냐는 얼굴들이었다. 어린 시절 유독 많이 받았던 편지들이 커다란 박스 4개나 있었는데, 그것도 다 버렸다. 버리면 버릴수록 기분이 좋았다. 이 물건들을 버리고 나면 공간이 비워진다는 것이 머릿속에 그려지면서 가슴이 뛰었다. 노리코가 더 좋은 물건을 찾아 옥션에 올려 물건을 팔고 싶어 했던 것처럼 그래서 결국 남편의 애장품까지 올렸던 것처럼, 나 또한 필요 없는 물건을 더 많이 버려 빈 공간을 만들고 가벼운 집으로 만들고 싶은 욕구에 추억의 물건들을 다 버리고 말았다. 잠깐 행복했다. 물욕을 버리고, 조절 할 수 있는 배포를 가질 수 있다니, 지금의 나이에 철들었다며 스스로 칭찬까지 했다. 하지만 추억의 물건이 하나도 없는 현실의 집에서 간혹 그리워졌다. 집을 통째로 쓰레기통에 버리듯이 도망친 새로운 보금자리에서 외롭고 서글퍼졌던 어떤 날은 촌스럽게 웃고 있었던 초등학교 시절의 사진들이 너무 그리워졌다. 행복하지 않았다. 버리고 행복해질 줄 알았던 순간이 어느 날은 없어서 슬펐다.


 

두 번째의 이야기 <우리 집에 놀러오렴>을 읽으면서 점점 변하는 평범한 직장인 다나베 마사하루보다 살고 있던 모든 집기들을 들고 집을 나간 아내의 마음에 감정이 이입됐다. 잠시의 별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내는 대부분의 물건을 들고 나가버렸고 텅빈 집에 남게 되었다. 필요한 물건을 사기위해 들렸던 곳에서 잊고 있었던 자신의 취향을 찾아버렸다. 결국 그가 잊고 있었던 턴테이블의 음악도 찾아 들으며 그곳은 남자들의 욕망이 가득 담긴 아지트로 변하게 되었다. 결혼이라는 틀에 자신의 취향을 멀리 했던 그에게 자아가 찾아 왔다. 원하는 소파를 사기위해 얼마나 발품을 팔던지, 이런 꼼꼼함은 어디다 숨겨 놓고 나온 것인지.


 

그의 집에 잠시 들린 아내는 놀랐다. 내 남편의 취향이 이런 것이었나? 남편의 몰랐던 취향을 발견한 것은 새로운 남자를 만나는 설레임일지 모르겠다. 그래서 그들은 별거가 새로운 시작이 되었을테니. 그들의 앞으로의 날들에는 정말 행복한 일들만 있을 것 같고, 그랬으면 좋겠다.


 

오랜만에 읽은 오쿠다 히데오의 단편들에 혼자 낄낄거리며 다시 웃었다. 역시, 오쿠다 히데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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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빵의 위로
구현정 지음 / 예담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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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환영 [유럽, 빵의 위로]



독일에 오랫동안 여행했을 때 가장 좋았던 순간은 기차를 타는 것이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다른 지역으로 가기위해 플랫폼으로 들어서기 전에 꼭 사야 하는 것이 두 개가 있다. 커피와 브레첼이었다. 굵은 소금이 박혀 있는 담백한 빵인 브레첼은 처음에는 참 맛 없는 빵이었지만 먹으면 먹을수록 계속 먹고 싶은 빵이었다. 1유로도 안하는 싼 값에 처음 선택했던 브레첼이 이리도 맛이 있었다는 것은 때로는 외로웠던 독일 생활중 가장 반가운 만남이었다.


 

다른 도시로 출발하기 전 도너츠와 커피의 짝꿍처럼 나에게는 브레첼과 커피가 짝꿍이었다. 천천히 출발하는 기차에 앉아 유난히 높은 하늘과 넓은 들을 보면서 내가 지금 여행중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간혹 다른 빵들도 챙겨서 기차에 올랐지만 이상하게 브레첼이 주는 여행의 맛이 없었다. 한국에서 먹어보지 못한 그 나라만의 그 향기가 가장 많이 들어 있다고 느낀 빵은 브뤠첸도 아닌 브레첼이었다. 그 브레첼을 먹고 있으면 독일을 떠돌고 있는 나의 현재가 행복했었다. 그래서 한국에 돌아와 브레첼를 몹시도 그리워했다. 어쩌다 들어온 굵은 짠 소금에 화들짝 놀랐지만 이내 침으로 넘어가고 부드러운 빵속은 놀란 혀를 위로하는 시간을 어떻게 다시 느낄 수 있을까. 새벽 기차에 홀로 앉아 있었던 그 푸른 시간은 눈 감아도 그려지는 풍경이었다.


 

<유럽, 빵의 위로>에도 브레첼 얘기가 나온다. 맥주의 나라, 독일에서는 맥주 안주에도 좋은 브레첼은 부드럽거나 딱딱해도 좋은 빵이었다. 저자가 유럽에서 만난 빵의 위로는 내가 만났던 그 시간을 회상했다. 그때 그 빵을 들고 걸었던 그 좁은 골목이 떠올랐고, 그날 있었던 그 향기까지 나서 힘들었다. 저자가 만난 유럽빵들은 내게도 이런 기억들을 쏟아냈다.



이런 빵이 뭐가 맛있다고 궁시렁거리며 입천장이 까지게 먹었던 파리의 바게트며, 왕소금이 이 사이에 끼어서 한참을 물을 마시게 했던 브레첼, 벨기에의 그 와플이 뭐라고 먹었던 와플의 바삭함, 겹겹이 뜯어 먹으며 즐겼던 크루아상, 상제리제 거리에서 맛보았던 라듀레의 마카롱, 로텐부르크에서 먹었던 단단한 달콤한 슈나벨, 유럽의 첫 도시였던 비엔나에서 먹었던 머리까지 띵하게 했던 진한 초콜릿의 자허 토르테, 스페인 톨레도에서 기차를 기다리며 목마르게 먹었던 마지판들. 여행의 고된 발걸음은 때로는 즐거웠던 모든 순간에 반짝였던 그 빵들이 주는 잠깐의 위로는 언제나 환영한다.


 

빵 때문에 다이어트가 어려운 나는 전국 5대 빵집이라고 불리는 곳을 모두 다녀왔었다. 각 지역마다 유명한 빵들을 먹으면서 또 그때의 시간들을 지인들과 공유 했었다. 유독 빵에 밭이며, 야채가 많이 들어간 한국빵은 주식보다 간식으로 많이 먹지만, 유럽의 빵들은 주식의 개념이 있으니 더 담백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였는지 유럽이 빵이 사실 아주 맛있다고 느껴진 적은 많지 않았다. 무엇인가 함께 곁들여 먹어야만 했던 빵들이 훨씬 많았기 때문에 유독 기억에 남는 빵은 많지가 않다. 하지만 내게 그 어떤 것도 필요 없이 오로지 맥주와 브레첼만 있다면 그날은 다 필요 없다. 물론 커리부어스트가 있다면 더 금상첨화이겠지만. 독일이라는 나라가 유독 많은 기억이 있는 것은 내가 그간 머물렀던 유럽의 도시 체류 기간이 가장 길었기 때문이다. 그래서들 다들 한 달 살이를 하는것 같다. 어서 빨리 그런 기회가 또 와 주었으면 좋겠다. 얼마나 더 기다려야 아무 걱정 없이 브레첼을 들고 기차를 타기위해 그 독일의 작은 도시에 설 수 있을까. 매일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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