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의 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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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심장을 쏴라>때 책을 다 읽고 작가가 작가 이전에 어떤 일을 했었는지 살펴보았다. 책이 정보 수집을 떠나 너무 치밀한 리얼리티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정말로 그 속에 살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런 소설이 나올 수 있을까, 역시 직업으로 체험한 부분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보통 작가들은 자신의 경험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세 번의 작품 이후의 작품이 그의 진짜 실력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7년의 밤>은 정유정의 세 번째 장편 소설이다. <네 심장을 쏴라>때까지만 해도 그냥 좀 글발이 있는 작가구나 했지만 <7년의 밤>은 무서운 사람이이다로 마침표를 찍었다. 소설 처음부터 끝까지 새벽 호수에서 이는 안개를 걷어내지 않고 깊은 우물 같은 절망을 끝까지 안고 갈 수 있을까.

 

작가의 상상으로 만들어 놓은 세령시의 살인 사건으로부터 시작된다. 얘기는 과거에서 현재로 그리고 다시 과거로 이어지는 소설로 얘기 속에 얘기를 넣은 액자 구성이지만 주인공 서원의 코멘트만 없다면 사건의 시작부터 끝으로 가는 얘기가 되어 버린다. 서사적으로 큰 무리 없이 짜임새는 하나도 흩트려져 있지도 않다. 400페이지 넘는 긴 소설을 짧은 호흡으로 읽을 수 있도록 긴 문장도 없다. 간혹 영화로 치면 독백으로 쓰일 긴 대사가 많다는 것 말고는 많은 내용이지만 짧은 얘기라고 할 수 있겠다.

7년전 우발적으로 교통사고를 내고 도망치듯 사건을 수습한 주인공의 아버지 현수, 아내를 폭행하고 딸까지 폭행을 삶의 교정이라는 말로 권력을 휘두른 오영제,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지켜봤던 승환, 아버지의 살인죄로 청춘을 잃고 살아가는 서원. 그리고 보니 모두 남자들이 주인공이 되어 이야기가 흘러가고 있다. 영제의 아내와 현수의 아내는 요리속의 데코레이션 같은 부분으로만 여겨졌다고 할까.

 

작가의 심리 묘사나 서사는 좋지만 역시 오영제에 대한 얘기는 솔직히 아쉽다. 그는 세디스트같은 사람이다. 아내를 때릴때도 알몸인 상태에서 회초리를 때리고 나중에 강간하듯 아내를 윤간한다. 또한 딸도 마찬가지 이다. 어린 딸이라고 하지만 딸도 회초리를 때릴때는 옷을 벗기고 무지막지한 주먹을 휘둘러 얼굴을 못 쓰게 만들어 버린다. 그런 오영제가 딸에게 갖는 애정이라는 것이 뭐 얼마나 대단할까, 그래서 딸을 죽인 범인을 찾아내 죽이고 또 세령시에 혼자 살아남은 서원을 7년 동안 떠돌며 살게 만들었을까. 그냥 그는 어떤 애정도 없는 자신의 욕정과 분노를 채울 사이코패스인가. 그런 부분 때문에 우발적이긴 했지만 영제의 딸을 차에 치이고 무서운 마음에 마지막 목숨을 끊게 만들었던 현수의 행동에 동조 할 수 없지만 오영제에게서 현수와 서원, 승현을 때어 놓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들게 만들었다.

물론 오영제를 이해 할 수 있는 부분이 아주 조금 고양이 에피소드를 통해 보여주긴 하지만 어찌되었건 마지막 죽어가는 현수를 동정하고 싶게 만들어졌다고 할까.

 

 

하긴 현실은 오영제처럼 어떤 이유나 과정 없이 악한 사람이 있으니 이런 부분도 그냥 그렇다고 생각하고 넘어 갈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현실은 더 지독한 슬픔이 많으니.

 

자신의 아들을 지키기 위해 승현에게 부탁한 소설은 서원을 어떻게 성장시킬까. 마지막은 그녀의 짧은 문장처럼 아주 짧게 끝이 나고 긴 여운을 남겨주었다. 참, 상투적인 감상을 준다. 그녀의 4번째 소설이 기다려진다. 이제부터 진짜 그녀의 얘기가 펼쳐질 것만 같다. 얼마나 더 깊은 절망을 또 안겨 줄 것인지. 벌써부터 짙은 안내가 몰려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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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하라 고양이 - 가끔은 즐겁고, 언제나 아픈, 끝없는 고행 속에서도 안녕 고양이 시리즈 2
이용한 글.사진 / 북폴리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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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하라 고양이

< 난 길의 감식가야 평생 길을 맛 볼거야. 이 길은 끝이 없어. 지구의 어디라도 갈 수 있어> - 영화 <아이다호>

후미진 골목을 돌면 불현듯 나타나는 고양이, 언덕을 오르면 주차된 자동차 밑에 반짝이는 작은 두 눈동자, 공원을 어슬렁거리는 고양이, 해 좋은 날 빌라 난간에 누워 잠을 청하는 고양이를 마주칠 때마다 아이다호의 기면증에 걸려 누워 잠이든 리버 피닉스가 떠오를 때가 있다. 고양이야 말로 길의 감식가가 아닐까.

이곳으로 이사 온 날 그달에 가장 추웠던 날이었다. 어찌나 추웠는지 보일러를 틀어도 따뜻하지 않았다. 이삿짐을 풀고 쓰레기를 버리러 나가니 꽁꽁 얼어 있는 음식물 쓰레기를 발로 건들고 있는 노랑 고양이를 보았다. 모든 것이 다 꽁꽁 얼어 있었다. 음식물 쓰레기봉투는 단단하게 얼어 있었고, 녀석의 발톱으로 생채기를 내지도 못하였다. 집으로 들어가 녀석에게 국물용 멸치를 가져와 바닥에 뿌려 주었다. 나는 녀석이 편히 먹을 수 있도록 몇 마리 던져 놓고 집으로 들어가 버린다. 저녁쯤 나와 보면 멸치는 없었다. 녀석이 먹었는지 다른 길고양이가 먹고 갔는지 모르는 일이지만 그때부터 나는 녀석을 아주 가끔 볼 수 있었고 내가 나오면 후다닥 도망을 갔다. 어느 날부터 아주 조금 간격이 좁혀졌다. 도망은 가지만 정말로 아주 잠깐 내가 또 뭘 놓고 가는 것인가 확인을 하고 도망을 가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느꼈다. 녀석이 나를 의식하고 있다고 말이다. 그렇게 삼 개월이 흘렀다. 이쯤 되면 나와 녀석이 좀 친해질 것도 같은데 그때쯤인가부터 녀석이 안 보였다. 여전히 멸치는 사라지지만 나와 눈인사를 딱 한번 했던 그 노랑이 녀석은 안 보였다.

<안녕, 고양이는 고마웠어요.>를 읽고 길고양이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었고 나도 길의 감식가라는 길고양이 친구를 하나 만들고 싶었나보다. 그래서 처음 이사와 마주친 녀석을 나 혼자 짝사랑을 하고 있었나보다. 그 추위를 견뎌 이제 봄이 왔는데 녀석은 길고양이의 습성처럼 영역을 옮겼는지 혹은 고양이 별로 사라졌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명랑하라 고양이>속에 처음 등장하는 “언제나 옳다”는 노랑 고양이 ‘바람이’의 등장에 가슴이 쿵쾅거렸다. 내가 처음 정을 주었던 그 노랑이 녀석이랑 너무 닮았던 녀석이라서 더 반가웠다.

작가가 서울 생활을 접고 어느 공기 좋은 시골로 이사를 가고 그곳에서 만난 길고양이에 대한 기록을 남겨 놓은 이번 책은 지난번과 같이 계절별로 고양이들의 생활을 기록되어 있다. 화사한 봄을 지나 반짝이는 여름, 쓸쓸한 가을을 스쳐 눈처럼 사그라지는 겨울 속에 만났다 헤어짐을 반복하며 인간과 똑같이 삶을 살아가고, 자식을 낳고 자식이 올바로 자랄 수 있도록 지극정성 길러내는 모성애로 짧은 생애를 마치는 길고양이들의 얘기. 이것이 이 책의 내용이 전부 일지 모르겠다.

책속에는 우리의 삶과 똑같이 살고 있는 녀석들이 있다. 더 모질게 혹은 느긋하게 때로는 더 간절한 그들의 생활. 묘생이 전쟁일수록 더 많은 새끼를 낳아 희박한 생존율을 이겨낼 고양이를 낳는다는 축사 고양이들, 마치 애완견처럼 주인 할머니와 산책을 가고 배웅을 가거나 할머니가 마응 회관이라도 가시면 나올 때까지 밖에서 기다리고 같이 집으로 돌아가는 달타냥.<녀석이 삼총사의 그 달타냥이 아니라 하도 담을 넘어 여기 저기 쏘다니기 때문에 지어 주었다는 이름>, 자식을 낳고 어마라서 투정도 못 보리는 까뮈네 식구들. 이런 접대냥을 꿈꾼다면 여기 있다며 보여주는 봉달이, 봉달이를 따라 같이 뛰는 덩달이, 어미이기 때문에 섭씨 30도를 넘어도 긴 행군을 이어가며 자식들에게 먹이를 나르는 여울이, 전원 고양이들 얘기로 마치 그 마을만 가면 만나서 인사라도 나눌 것 같은 다정함이 생긴다.

내가 이름도 지어주지 못한 노랑이 녀석처럼 ‘바람’이가 무지개다리를 건너는 부분에서는 눈물이 안 나는 것이 이상할 만큼 많이 속상했다. 녀석 그냥 그 집에 좀 빌 붙어 있지 어디를 며칠 동안 다녔는지 살도 다 빠져 나타나 그렇게 슬픈 모습으로 무지개다리를 건너냔 말이다.

시인이 살고 있는 곳으로 가고 싶어진다. 달나냥을 만나서 좁을 길을 걷고 싶고...(나쁜 고양이는 없다에서 달타냥의 죽고 말았다.) 덩달이와 함께 개울도 걷고 싶고, 전원 고양이들과 인사도 나누고 싶다.

올 겨울도 참 춥다는데 우리 동네 고양이들 얼지 말고, 죽지 말고 봄이 오길 견뎌 내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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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사랑이었네
한비야 지음 / 푸른숲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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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비야”라는 네임 하나만으로도 큰 울림을 준다. 세계의 오지를 떠돌아 다녔던 그녀, 말라리나에 걸려 생과 사를 몇 번씩 넘겼지만 살아남았다. 대부분 한번 겪은 일에 크게 상처 받거나 질려서 절대로 같은 일을 하지 않을 것 같지만 절대로 물러나지 않은 강철 같은 그녀. 누군가 그녀처럼 살아보라고 한다면 나는 절대로 그럴 수 없을 것 같다며 뒷걸음질 치며 달아날 것만 같다. 그녀의 구호의 일은 절대로 만만하지 않고 어렵고 고통스러울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녀가 더 특별해 보이고 강단 있는 그녀의 삶이 위대해 보이기까지 하다.

 

그녀의 여행 기록문을 모두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그녀를 알게 해준 <지구 밖으로 행군하라>를 읽으면서 나의 나이를 한번 떠 올려보았다. 그녀가 가슴 뛰도록 행했던 일을 시작했던 나이가 몇이지? 그것은 내 가슴속에 꿈틀대고 있는 꿈을 이루기에 늦지는 않았을까하는 걱정이었던 것 같다. 이런 나에게 한비야는 그런 말을 하겠지. “아예 하지 않는 것보다 늦게라도 시작하는 편이 백배, 천배 낫다. 시도해보지 않는다면 성공할 기회는 0퍼센트다. P95"

내 인생의 모토는 <도전하는 삶>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늘 현실이라는 시간에 도전은커녕 하루의 시간을 쪼개어 쓰는데 실패하며 매번 투정과 불만으로 내일이 오는 것이 두려울 때가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주말 지내면 월요일이 오고 억지로 일어나 억지로 세수를 하고 밥을 먹고 출근을 하고 밤 되어 집에 돌아와 노곤한 하루를 정리하고 그렇게 일주일이 가고 한 달이 가며 또 일 년이 가는 것이 허무하다고 생각하는 청춘들이 어디 한두 명일까, 그런데도 그녀는 서른아홉에 중국 유학을 가서 중국어를 배우고 더욱더 많은 이들을 구하는 일을 하기위해 보스톤으로 유학길에 오르는 그녀의 삶의 원동력은 대체 무엇일까.

 

<그건, 사랑이었네>는 그녀의 삶의 원동력들에 대한 질문의 답을 얘기해주고 있다. 그녀의 하루, 일주일, 한 달 일 년을 가득 채우고 있는 가난한 오지의 사람들을 구하는 일들이 그녀의 희망이며 꿈이며 삶의 원동력이라고 말하고 있다. 아프리카 수단의 한 아이가 기니아충에 감염 되어 살갗으로 삐져나오는 기니아충 때문에 구토를 하고 괴로워하는 아이를 보며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녀는 눈물보다 더 현실적인 것들을 얘기하고 있다. 아프리카에서는 물은 생명 그대로라고 했다. 하지만 물이 어디 아프리카만 중요한 것일까. 이미 우리나라도 물 부족 국가이지만 간혹 점심시간이 끝나고 양치질을 하러 화장실에 가면 물을 틀어 놓고 이를 닦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내가 수도꼭지를 닫아버리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칫솔질을 하는 동안 물을 틀어 놓고 있는 사람들의 물 사용 때문에 간혹 화장실 거울에 이런 부분을 권유해줄 문구를 써 놓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을 때도 많았다. 모두에게 특히 아프리카에선 더욱도 소중한 그 물을 우리는 너무 쉽게 흘려보내고 있다. 그녀는 이런 물이라도 좀 아껴야 한다는 얘기를 한다. 이런 얘기들은 우리가 물에 대한 얘기를 할 때마다 하는 얘기지만 습관이라는 것이 무섭다. 쉽게 틀면 나오는 물 때문에 물이 소중한 것을 모르는 우리들은 어디서부터 고쳐나가야 할까.

 

그들에게 수십 미터라도 내려 보내서 떠 올릴 우물을 만들어 줄 수는 없지만 내가 좀 아껴 준다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녀의 권유대로 뭔가 실천을 하고 싶어진다. 이것이 한비아의 힘인 것 같다. 그녀는 에세이를 쓰지만 읽는 이들은 이 책이 에세이가 아니라 자기 계발서로 돌변하고 만다. 그녀가 구호 과정에서 생긴 일들을 얘기하며 스스로의 시간을 반성 할 때만다 내게는 어떠했을까 고민하게 되고 실천하게 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맨토로 삶고 싶어지는 것일 거다.

 

그녀의 삶의 원동력이 구호의 일이라지만 그녀도 안식이 필요한 사람이다. 그 안식과 위로는 그녀의 기도에서 비롯된다. 그녀는 끊임없이 기도한다. 종교의 벽이 없는 그녀는 이슬람교인과도 교류하며 그들의 종교를 인정해주고 받아들여준다. 그것이 꼭 그 종교를 흡수하고 따라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인정해 준다는 것이다. 사실 나는 그녀의 종교 얘기가 거슬렸다. 종교가 없고, 특정 종교에 대한 고정관념이 있어 기도라는 단어를 더욱더 싫어하는 사람인지라 그녀가 기도로 사람들에 대한 고통을 호소하는 부분을 읽을 때마다 책장을 넘겨 버리고 싶을 때가 있었다. 하지만 끝까지 그녀의 얘기에 집중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편견 없는 종교의 이해다. 이슬람 친구에게는 그녀의 성경책을 그녀는 코란을 읽으며 서로를 더 이해 할 수 있도록 하는 그녀는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며 이해하려한다. 물론 꼭 서로의 종교에 대한 이해가 그녀의 방법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더욱더 그녀의 종교 얘기에 거부감을 거두어 드린 부분은 그녀의 기도는 자신의 안녕과 평안을 위한 것이 아니라 깨끗한 물만 있어도 눈이 멀지 않을 수 있었던 수단의 한 아이를 위한 기도이며, 물을 길러 가기위해 위험한 길을 가는 여자아이가 성폭행을 당하지 않고 무사히 올 수 있도록 하는 기도이며, 하루만 더 일찍 아니 열 시간만 더 일찍 자신을 만났으면 죽지 않았을 6개월 지난 아이를 위한 기도라는 것에 가슴이 따끔거린다.

 

사실 아직도 나는 그녀가 평범한 여대생에서 직장생활을 벗어나 낡은 남방에 면바지, 지퍼 가득 달린 조끼를 입고 말라리아에 몇 번씩 걸려 사경을 해매거나 피부병에 걸려 괴로운 나날을 지내는 것이 이해 가지 않을 때가 많다. 그런데 얼마 전에 유기견과 고양이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며칠 가슴이 먹먹해져서 울다가 나도 모르게 고양이 사료를 사고 밤이면 다른 사람 모르게 사료들을 놓고 오는 날들이 생겼다. 그녀가 월드비젼에서 일하는 이유는 더 특별한 것이 있겠지만, 나는 왠지 내가 느낀 그 감정과 별반 다르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생각과 실천, 그 분기점에서 분명 갈등이 생기며 결국 생각을 넘어선 실천만이 행복을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녀는 많은 청춘들에게 희망을 주거나 절망을 주기도 한다. 그녀처럼 살고 싶다는 희망, 해보니 절대로 그녀처럼 될 수 없는 절망. 하지만 그녀는 그런 청춘들에게 그런 말을 할 것이다. “두드려라, 열릴 때까지!” 그리고 그녀의 말처럼 꽃이 피는 시기가 다들 다르니 내 행복이 꿈이 지금 당장이 아니라도 걱정하지 마라. 개나리는 봄에, 국화는 가을에 꽃이 피지 않느냐…….국화인 나는 아직 가을이 오지 않았으니 꽃을 피우지 않을 뿐이다. 단지 내 시간이 아직 봄을 길게 즐기다 오는 것이니 곧 여름이, 그리고 가을이 올 것이다. 그러니 무조건 시작하라고. 그래서 이었을까? 그녀를 보면 사람들이 돈을 주며 구호하는 일에 보태달라고 한단다. 생일날 자신에게 멋진 코트를 사주기 위해 백화점을 가다 만난 여대생은 코트 값을 모두 한비야에게 주는 훈훈한 에피소드들이 어디 한두 개일까. 언젠가 책을 읽고 그녀의 삶에 자극을 받은 어떤 겨울날 나는 월드비전으로 전화를 걸어 매월 기부를 하고자 자동이체를 걸어 놓았다. 그것이 벌써 삼년이 되어 간다. 그 작은 돈이 아프리카 어느 아이에게 물 한 모금이라도 도와 줄 수 있다는 것을 간혹 통장정리를 할 때마다 느끼곤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좀 더 열심히 살자고 생각했다. 아주 작게나마 누군가를 도와 줄 수 있다는 것이 이렇게 즐거울 수 있을까. 일주일에 두 번씩 몰래 고양이 밥을 주러 나갈 때마다 밤마다 보는 그 고양이들에게 작게 인사를 할 때마다 즐거워지는 마음, 이것이 무엇일까. 그녀 또한 이것을 그렇게 부를까. 그것이 사랑이었다고. 손발이 오그라드는 단어지만 잠시 즐거워지는 것을 보니 나 또한 그녀처럼 이불속으로 파고들며 잠을 청할 때 내일은 얼마나 즐거울까 생각 할 수 있는 단계까지 올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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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근두근 내 인생
김애란 지음 / 창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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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의 일과가 스펙터클하게 지나가는 것은 영화나 드라마뿐일까. 아침에 일어나 옷을 입고 출근 준비를 하고 복잡한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어제 다 지워지지 않은 피로를 등에 업고 다시 하루를 시작하며 세상의 가장 긴 침묵이 보내주는 긴 한숨과 함께 직장 문을 열고 들어간다. 점심이 지나고 차츰 밀려오는 하루의 그림자가 어느덧 나를 저녁시간으로 이끌고 간혹 생겼던 저녁 약속도 어느덧 사라져 똑같은 패턴으로 집으로 돌아가며 하루의 24시간 중 가장 고되고 녹녹치 않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피로를 신발장에 채 넣지도 못하고 끝이 날 때가 많다.

 

그런 일상이 일주일을 채워지고 달력 한 장을 넘기다 보면 어느덧 탁상 달력을 다시 사들여야 하는 한해가 되어 버린 해가 벌써 몇 해가 지났는지 모르겠다. 그런 내게도 가슴 떨린 사랑을 했던 날들도 있었는데도 왜 그런 따끈따끈했던 기억들을 오늘의 고된 날이 녹슬게 만들었을까. 그들은 산성 작용을 해서 내 모든 것들을 부식시키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김애란의 <두근두근 내 인생>이라는 제목 때문에 잠시 침식되는 기억들을 재생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게 다가왔다. 컴퓨터 속에 저장되어 있는 MP3파일들을 꺼내서 바로 들을 수 있는 노래들이 아닌 버튼을 꾹 누르고 약한 노이즈가 가미된 라디오에서 녹음한 노래를 듣는 그 추억을 생각하며 책을 펼쳤던 나는 많이 당혹스러웠다.

 

책을 읽는 동안 기억하고 싶은 문장에 붙여 놓는데 포스트 잇 플러그들이 책에 한 하나도 붙여있지 않는 책을 읽어버렸다. 책을 읽는 동안 자꾸만 점점 잦아드는 숨소리 때문에 그 어떤 행동도 하지 못했다. 그냥 책을 읽을 수밖에 없을 뿐이었다. 책을 읽고 나서 그냥 책속에 있는 주인공 아름이의 내일을 생각하지 않고 오늘만 함께 생각하게 되었다. 참 이상한 일이다. 주인공 아름이는 내일을 떠 올리는데 읽는 독자인 나는 왜 아름이의 내일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했을까. 담담한 주인공을 서술한 김애란 작가와 달리 당황스런 주인공을 받아들이는 독자의 입장 때문이었을까. 그녀는 이미 하루가 한 달로 나이를 먹는 아름이를 겪었기 때문일까.

 

지금 아름이의 나이 열일곱, 자신이 만들어졌던 그때 부모의 나이가 되어버렸다. 그들의 부모는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의 새끼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진짜 새끼를 만들어 버렸다. P13> 정말로 잘 하는 것이라고는 애를 일찍 만들어 놓은 것 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외할아버지의 생각처럼 그들의 부모는 능력을 말하기에는 너무 어렸고 순박했다.

당혹스러운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열일곱의 어머니는 친구에게 이런 조언을 듣는다.

 

“나는 풀기 어려운 문제가 생길 때마다 노트를 반으로 갈라 표를 만들어. 그런 뒤 그 일의 좋은 점과 나쁜 점을 하나씩 적어 내려가. 그럼 이상하게 한눈에 답이 보일 때가 있더라고. ” P25

 

하지만 열일곱의 어머니는 나쁜 점만 가득 써 놓고 좋은 점을 두어 개도 쓰지 못하고 아름이를 세상 밖으로 나오게 했다. 인생이 좋은 점과 나쁜 점을 적어 놓고 나쁜 점이 훨씬 많아도 그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일까. 그렇게 열일곱의 어머니는 잠을 자도 대답을 할 수 있는 뭐든지 할 수 있는 엄마가 되었고 나이보다 훨씬 늙어 보이는 어머니의 자리로 살아가면 될 뿐인 것 같은 인생이 쉽지가 않다.

 

아직 뭘 해야 할지, 어떤 것을 더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선택을 위해서 노트를 반으로 갈라 좋은 점과 나쁜 점을 적어 선택을 할 고민들도 많을 나이에 열일곱의 엄마가 아빠가 낳은 아름이는 엄마와 아빠가 자신을 만들었던 숫자로서의 나이가 되었지만 생물학적으로는 지금의 엄마와 아빠의 나이보다 두 배나 나이를 먹은 육체를 가지게 되었다. 조로증으로 열일곱의 아름이는 혈압약과 관절약과 혈당을 조절해야 하는 약을 먹으며 청춘이 지녀야 할 고민들과는 이미 멀어졌고, 고민을 해결하기 위해 노트를 반으로 접어놓을 일도 없어지게 되었다.

 

문득 작가의 의도를 들여다보게 되었다. 단편 몇 편을 읽고 알게 된 김애란 작가는 왜 이런 얘기를 쓰게 되었을까. 대체 조로증을 앓는 아들을 보면서 느끼는 부모들의 반응이은 상투적인 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마음이 들었었다. 그러나 하루가 다르게 늙어가는 아들을 보며, 너를 사랑하고 이런 아픈 네가 나의 슬픔이라는 것이 기쁘다고 말하는 부모의 말이 절대로 상투적이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조로증을 앓고 있는 부모의 시선이 아닌 자신의 병을 앓는 사람치고 열일곱까지 살았다는 것이 기적이라며 자신의 얘기를 열여덟의 생일에 부모에게 선물을 하고 싶은 아름다운 마음만 청춘인 늙어가는 손의 주인공이라는 것에 더 가슴이 따뜻해진다.

 

노안이 찾아와 앞이 점점 보이지 않게 되는 아름이의 시력처럼 그들의 가정생활도 점점 어두워졌다. 그동안 아름이의 병원비로 어린 나이에 부모가 된 그들은 매일 열심히 일해도 아름이를 위한 혈압 약하나 사기가 어려워지고 있는 것이다. 병원비를 위해 텔레비전 프로에 나가게 되고 많은 책을 읽는 아름이의 넓디넓은 배경지식으로 아름이는 더 눈물 나게 아름다운 청춘으로 많은 사람들의 성원을 입게 되었다. 그리고 열일곱…….누군가 가슴에 붉은 실 하나를 풀어 놓은 것을 잡고 싶을 그런 순정을 만나게 되었다. 자신처럼 아픈 청춘을 살아가고 있는 서하라는 아이.

풋풋한 두 아이의 순정처럼 보일 이 부분에서 나는 참 이상하게 졸렸다. 아름이와 서하의 편지 부분이 가장 지루했던 부분이 아마도 서하의 존재를 짐작하고 있어서였을까.

 

아름이가 부모님께 주고 싶었던 뒷얘기를 읽는 동안 아주 짧게 그들의 청춘이 팔랑거리다 사라졌다. 나는 문득 아름이의 이별이 안타까워졌다.

 

“아빠”

“응?”

“그리고 엄마.”

“그래”

그리곤 남아 있는 힘을 가까스로 짜내 말했다.

“보고 싶을 거예요.”

-P322

 

아름이 적어 내려간 <두근두근 그 여름> 때문에 나는 또 한 번 저물어가는 청춘에 눈물이 났다. 두근두근했던 네 청춘의 시간을 내가 기억해 놓겠다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분명 내일부터 또 시작되는 내 일상이 별반 다르지 않더라도 그것에 아주 많이 고되고 힘들다고 생각하는 시간을 때로는 네 청춘을 떠올리며 두근두근하게 하루를 보내 보겠노라고 마음먹었다. 나도 맹랑한 너를 기억하고만 싶다. 소설 속에서 영원히 잠든 아름다운 청춘. 또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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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화가들의 반란, 민화 정병모 교수의 민화읽기 1
정병모 지음 / 다할미디어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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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한창 보고 있는 오디션 프로그램 때문인지 이 책을 읽는 동안 주류 음악과 비주류 음악의 논점들을 생각해 보았다. 특히 홍대에 가면 어디서든 들을 수 있을 것 같이 생각되는 인디밴드들의 음악이 어쩜 그림으로 치면 이런 민화와 같은 장르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서양미술에 관한 책을 여러권 읽고 나서인지 우리 민화들의 얘기에는 인디밴드 같은 생소하고 너무 담백하고 화려하지 않는 수수한 옷차림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절로 들었다. 어디든 기타 하나 들고 자리에 앉아 노래를 부르는 자유로운 영혼들의 속삼임임이 들리는 것 같은 민화들의 그림에 대한 감상은 민화를 채워 넣은 먹과 같은 움직임이다.

덧발라지는 유화와 다르게 점하나 찍으면 사르르 번져서 선이 그어지는 번짐과 여백은 아직 다 채워나가지 못하고 있는 삶의 단면이 아닐까.

 

책을 통한 민화에 대한 생각이 다른 부분들이 조금 있었다. 내가 생각했던 민화란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을 통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민화가 오히려 사실적인 그림이기보다는 관념적인 그림이 더 많다는 것이다. (P27) 대상을 현장이나 사실 그대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관념 속에서 재구성한 특색을 보인다고 한다. 풍자를 통한 그림이 민화가 많이 나오는 것도 이런 재구성을 통한 또 다른 현실 반영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그런지 민화에 펼쳐진 추상세계는 상상력의 산물인 부분이 많다 (P26) 현실을 그린 것 같지만 현실성이 부족하고 상상의 세계인 것 같지만 현실에 기반을 주고 있는 것, 그것이 현실이자 꿈이고 실재이자 환상을 그려내는 것이 민화라고 할 수 있겠다.

 

“민화의 매력은 사실 그대로 묘사한 것보다 대상을 새롭게 재구성하는 짜임새에 있다. 그림 속의 대상들을 하나하나 분해한 뒤 이들을 새로운 구조 속에 재편성했다. 그러한 점에서 민화는 시각의 세계가 아니라 관념의 세계이고, 현실의 세계가 아니라 상상의 세계다.” (P94)

 

 

무명화가가 펼치는 무한한 변화의 상상력은 기존의 모티브를 넓히고 해체하고 변형하고 있다. 하지만 민화는 문명 자유 속에서 태어난다. 인디밴드들의 음악이 훨씬 주류 음악보다 더 통쾌하게 다가오는 부분은 이런 부분과 맞닿아 있기 때문은 아닐까.

그래서 민화는 소박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단순하고 평면적이고 서민들의 복잡한 표현보다는 단순한 표현을 좋아하고, 입체적인 이미지보다는 평면적인 이미지를 선호한다. 단순함을 극대화하여 표현하고자 하는 부분을 부각시키는 민화의 특징으로 우선 그림을 대하는 태도가 억압적이 않다. 미술관에 관람표를 들고 들어가 한참을 뭔가를 생각하며 봐야 할 것 같은 그런 부분위기는 아닌 것이다. 그래서인지 민화는 색체가 밝다. 또한 그런 부분의 정서적으로도 밝게 표현되는 것 같다. 여기에 서민 특유의 긍정적인 가치관이 덧붙여지면서 단순히 정서적인 차원을 넘어서서 어려운 시대를 밝히는 등불과 같은 역할을 한 것이다. 민화에 배어 있는 흥취는 개인적인 정서 못지않게 사회적인 정서 차원의 요인도 있는 것이다. (P48)

 

우리 선조들이 그린 다양한 민화를 통해 그들이 말하려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라는 마지막 주제속에 유토피아에 대한 언급이 있다. 유토피아는 우리의 꿈이요 희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작은 매우 현실적인 데서 출발한다는 말처럼 그림의 관념화로 현실을 묘사했지만 그 시작은 결국 현실인 것이다.

건강과 복, 돈 가정의 행복을 위한 꿈과 희망의 유토피아가 때로는 호랑이로, 그 호랑이를 조롱하며 나뭇가지에 앉아있는 까치처럼, 승천하는 용처럼, 용이 되기 위해 발버둥치는 잉어처럼, 그 잉어가 들어가고자 했던 그 등용문처럼 우리는 꿈꾸며 희망을 버리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시간이 수천 년 흘렀어도 삶의 본질은 결국 행복의 시작 앞에 있다. 그 시작을 위해 화선지에 번지는 먹처럼 천천히 담담하게 현실이라는 그림 앞에 서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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