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산 - 김훈 장편소설
김훈 지음 / 학고재 / 2011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난 주에 카인을 읽은 이후로 갑자기 소설에 꽂혔다. 난 소설을 잘 안 읽는 편이다. 소설보다는 인문학이나 사회과학 쪽의 책을 선호하는 편인데 예전에 사놓고 아직도 읽지 않았던 흑산이 눈에 들어왔다. 김훈의 소설 중에서 남한산성과 칼의 노래에 대한 기억이 꽤 좋았기 때문에 흑산에 대한 기대도 어느 정도 있었다. 게다가 천주교의 박해를 다룬 이야기이기 때문에 어떻게 이 종교적인 문제들을 풀어나가려나 궁금하기도 했다.

 

  한장한장 넘겨가면서 무엇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흑산이라는 제목이 붙었기 때문에 나는 흑산도에 유배되었던 정약전의 일대기를 다룬 이야기겠거니 생각했다. 평소 순교하면서 신앙을 지킨 정약종보다는 다산 정약용에 대한 PR을 더 많이 하는 천주교의 모습이 이상하게 느껴지던 차에 도대체 김훈이라는 사람은 도대체 천주교의 박해에 대해서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나갈 것인가 궁금했는데 이 책은 정약용은 물론 정약전에 대해서도 그렇게 비중있게 다루지 않는다. 정약용은 소설에서 잠시 스쳐가는 사람으로 등장하며, 순교로 자신의 신앙을 지켰던 정약종도 그렇게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물론 흑산도에 유배되었던 정약전의 삶도 그다지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고 있다. 마지막까지 정약전의 이야기가 등장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본다면 곁다리일 뿐이다. 오히려 김훈은 천주교의 이름모를 신자들, 천주교를 고발하기 위해 잠입했고, 자신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자기 여동생마저도 죽이는 선택을 한 박차돌의 삶에 대해서 자세하게 이야기한다. 길갈녀, 아리, 강사녀와 같은 민초에 대해서 비중있게 다룬다.

 

  김훈이 비중있게 다루는 것은 민초만이 아니다. 대비에 대해서도 생각보다 비중있게 다루고 있다. 중간중간 끼어드는, 어찌보면 빼버려도 이야기의 흐름에 큰 지장을 주지 않는 대비의 교서와 언행에 대해서 자세하게 다룬다. 또한 흑산도의 별장이라는 쥐꼬리만한 권력을 가지고 마음껏 휘두르고 있는 오구칠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다룬다. 책의 절반이 넘어갈 무렵, 나는 이 책은 소설이 아니라는 판단을 내렸다. 소설의 형태를 띄고 있지만 그 어느 책보다도 더 묵직한 정치적인 메시지를 던진다. 칼의 노래가 그랬고, 남한산성이 그러했듯이 말이다.

 

  이 책의 묵직한 메시지는 206페이지의 아래의 대목에 명확하게 드러난다.

 

  대비전의 조회는 대체로 그렇게 끝났다. 대비는 자신의 말의 간절함으로 세상을 바로잡을 수 있고 백성을 먹일 수 있다고 믿는 모양이었다. 신료들은 그렇게 느꼈다. 대비의 말은 곡진하고 다급했다. 대비는 자신의 그 다급한 말과 간절한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 현실을 이해할 수가 없는 듯했다. 신료들은 대비가 내린 자교를 읽으면서 눈물겨웠다.

 

  왜 그럴까? 이 책을 읽으면서, 대비를 보면서 누군가 생각이 나는 것은? 같은 여자라서가 아니다. 사고의 틀과 주장하는 형태가 정말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간곡한 말과 생각으로 간절히 원한다면 우주가 나서서 도와줄 것이라는 사고 방식을 대비를 통하여 보게 된다. 자신은 그렇게 간절히 원하고, 백성들을 잘 다스리려고 하는데 왜 현실이 바뀌지 않는가? 이 부분에 대해서 다른 각도에서 생각하지도 못하고, 밑에 있는 신하들이 아뢰지도 못한다. 혼자 끙끙 싸매다가 머리가 너무 아픈 나머지 짱아지와 굴비만 들이라는 대목에서는 속에서 불이 올라온다. 신하들은 "대비마마 통촉하여 주시옵소서."라는 말을 지껄이겠지. 무엇을  통촉해야 한다는 말인가?

 

  문득 정약현이 사위 황사영에게 했던 이야기가 떠오른다. "잊지 말거라. 육손이는 그의 아비와 어미가 낳은 아들이다." 곤장을 맞고, 주리를 틀리면서도, 목이 베어지면서도 믿음을 포기하지 못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리라. 언제 한번 사람 대접 받아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사람 대접해준다는 것! 한번 이런 대접을 받으면 평생 떠나지 못하겠지? 김개동이와 육손이가 그랬던 것처럼...

 

  이야기가 잠시 곁으로 샜지만, 갑갑하다. 정약전의 마음을 내리 누르는 흑산이 여기에 있는 것 같고, 박차돌을 이용하면서도 끊임없이 의심하는 포도대장이 여기있는 것 같다. 백성들의 삶을 돌아보지 못하고 동떨어진 간곡한 말만 해대는 대비가 여기 있는 것 같고, 대비의 전교를 전하는 세 방울의 딸랑 거리는 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다. 더 암울한 것은 흑산을 자산으로 바꿀만한 조짐이 지금 우리에게 없다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