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 괴물이 된 이십대의 자화상 지금+여기 3
오찬호 지음 / 개마고원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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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에 한번 봤던 그림일 것이다. 누가 했는지 기가 막히게 잘 그렸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공감을 했던 기억이 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이 그림이 생각났다. 오늘날 20대들에게 이 그림을 보여준다면 그들은 어떤 대답을 할 것인가? 아마도 나랑은 다른 이야기를 하겠지?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 그저 씁쓸해졌다. 이 그림이 공감을 받지 못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는 사실이 서글프다.

 

  공감의 능력!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덕목이 아닐까? 동감은 아니더라도 공감은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성품이고, 이것은 이 사회를 살만하게 만들고, 더 좋은 곳으로 만드는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오죽하면 리프킨이 공감의 시대라는 장문의 책을 냈겠는가?

 

  한국 사회를 관통하는 단 하나의 글자를 꼽자면 소통일 것이다. 명박 산성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불통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닫게 한다. 불통이라는 말의 의미를 깊이 파고든다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공감의 부재라는 현실에 직면하게 된다. 정치인들이 소통을 말하지만 정작 국민들은 불통을 말했던 것은 정치인들이 국민의 상황에 공감하지 못하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이 책은 더 나쁜 상황에 대해서 말한다. 불통, 즉 공감의 부재가 정치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 시대에 보편적으로 퍼졌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저자는 지금까지 자기가 만났던 젊은이들의 삶을 하나하나 풀어 나가기 시작한다. 사회 정의에 대해서 말하면서 같이 데모에 참석했던 이들도 비정규직 문제라든지, 월세와 같은 문제에 대해서는, 사회적인 약자에 대해서는 전혀 공감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을 한다. 말만하는 것이 아니라 그는 나름대로 그 문제에 대한 원인도 분석하고 있다. 자기 계발의 논리에 경도되어 있음이 가장 큰 문제라고 한다.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책을 읽으면서 얼마나 고개를 끄덕였던지 아직도 고개가 뻐근하다.

 

  직업이 직업이다보니 젊은이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열심히 스펙을 쌓는 이들도 있고, 꿈을 가지고 앞을 향해 달려나가는 친구들도 있다. 그런 그들을 보면서 마냥 기특하지만은 않다. 저자와 같은 이유에서이다. 많은 젊은이들이 열심히 스펙을 쌓고 공부를 하고, 독서를 한다. 사회 문제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고민들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렇지만 그들의 삶은 결코 말랑말랑하지 않다. 아무리 노력해도 노력만으로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다. 나도 과거 이러한 벽에 부딪혔었고, 그래서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했었다. 그러나 요즘 친구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저자의 말처럼 자기를 더 채찍질한다. 그러면서 언젠가는 자신의 노력이 결실을 맺게 될 것이라고 자위한다. 그런 친구들을 보면서 "야! 그래봐야 소용없어. 너희들이 도무지 넘을 수 없는 벽이 존재해. 그 부분을 해결하지 않는다면 너희들이 노력할수록 더 힘들 뿐이야!"라는 말을 하고 싶지만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한다. 대신 "열심히 해봐. 언젠가는 누가 알아주겠지!"라는 마음에도 없는 위로를 건넨다. 그리고 돌아서서 안쓰러움과 미안함, 답답함에 고개를 숙인다.

 

  이 책에서도 많이 말했던 책이 있다. 천번은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라는 책이다. 나도 이 책을 몇번 읽었고, 선물도 많이 했지만 그러면서도 "꼰대 정신에 투철한 책"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당장 아픈데 이 순간만 넘기면 괜찮아진다는 공허한 위로가 얼마나 그 친구들에게 공감이 될까? 그러면서도 아이들에게 공감의 능력을 잃어버리면 안된다고 말하는 것도 꼰대짓 같아서 미안하다.

 

  맑스가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라는 말을 했는데 나는 자계서는 민중의 아편이라고 말하고 싶다. 특별히 20대의 아편이라고 말하고 싶다. 김난도, 이지성, 혜민 등등의 글을 보면서 참 쉽다는 생각, 그리고 옐로우 페이퍼보다 더 해롭다는 생각을 해봤다. 이렇게 자계서를 읽고 나만 아니면 돼라는 생각에 투철한 젊은이들에게 공감을 말하는 것은 무리가 아닐까 싶다.

 

  그냥 답답해서 적다보니 끄적거리는 것도 만만치 않다. 두서도 없다. 그러면서도 끄적거리는 이유는 젊은이들이 공감의 능력을 회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 때문이다. 물론 이것도 그들에게는 꼰대짓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그렇지만 젊은이들을 더 이상 괴물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 이렇게라도 하지 않는다면 더 답답할 것 같아서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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