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역사 ⓔ - 세상을 깨우는 시대의 기록 ㅣ 역사 ⓔ 1
EBS 역사채널ⓔ.국사편찬위원회 기획 / 북하우스 / 2013년 2월
평점 :
기록과 기억!
비슷해 보이는 두 단어의 차이는 무엇일까? 철학적으로 딱딱하고 복잡하게 규정하지 말고 단순하게 생각하자. 기록은 어떤 사건을 문서나 그림과 같은 형태로 작성하는 행동이다. 기록의 행위를 더 넓게 해석한다고 해도 그것을 보관하는 것까지가 기록의 역할이다. 이에 비하여 기억은 기록된 것을 토대로하여 재구성하는 단계까지를 포함한다. 이렇게 적고 보니 더 어려운 것 같다. 좀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하여 영화의 한토막을 빌려서 설명을 해본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을 아는가? 멀게는 다크 나이트 시리즈와 인셉션을 감독했고, 가깝게는 잭 스나이더 감독의 맨 오브 스틸을 제작한 사람이다. 항상 블록 버스터 영화를 만들지만 밝게, 화끈하게만 만들지 않는다. 영화 속에 철학적인 질문들, 정의에 관한 내용들을 담고 있는데 이 사람을 주목하게 만들었던 영화가 메멘토다. 영화의 내용은 간단하다. 주인공은 단기기억 상실증이라는 희귀한 질병을 앓고 있다. 그의 기억력은 딱 10분간만 유효하다. 10분이 지나고 난 다음에는 모든 기억을 잃어버린다. 주인공은 기억을 잃지 않기 위하여 자기 몸에 문신을 새긴다. 주인공은 이 문신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밖에 없지만 그 문신이라는 것도 완전하지는 않다. 어떤 것은 볼펜으로 새겨서 사라져 버리기까지 하고, 어떤 것들은 재구성하는 과정 속에서 왜곡되기도 한다. 게다가 자기가 옳다고 믿었던 기억 조차도 실은 타자에 의해서 왜곡되기도 한다. 주인공의 행위 가운데 사건의 단서를 남기기 위하여 문신을 새기는 행위를 기록, 그것을 토대로 사고를 재구성하는 일련의 과정(심지어는 왜곡된 것일지라도)을 기억이라고 할 수 있다. 잠간 이야기가 샛길로 빠지지만 메멘토라는 제목에서 나는 기록이라는 행위에 집착하지만 그것을 재구성하는 기억의 단계에서는 심각하게 왜곡되어 다른 사람들에게 휘둘리고 이용당하는 주인공의 안타까움을 느끼게 된다.
기록과 기억은 역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철저한 기록은 기억의 근거들을 제시해 주고, 이렇게 생성된 기억은 우리에게 현실에 대한 평가의 기준을 제공해 준다. 그만큼 중요한 기록과 기억이라는 것이 중요하지만 문제는 오늘날 기록과 기억이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기록과 기억이 불완전한 것이 아니라 줄 사이의 관계가 불완전한 것이다. 사회가 어찌 되었든, 우편향이든 좌편향이든 일단 데이터는 남는다. 작심하고 숨기려고 해도 인터넷이라는 도깨비 방망이는 모든 기억들을 차곡차곡 그 안에 채워 넣는다. 그것을 어디에 쓸 것인지는 관심밖의 일이다. 이렇게 기록에 충실했기 때문에 정치인들의 말바꾸기가 과거에 비하여 잘 드러나는 것이리라. 그런데 이렇게 충실한 기록(비록 그안에서 진위 여부를 가리는 작업이 필요하지만)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오늘날 우리들의 삶에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마치 10분이 지나면 기억들을 잃는 메멘토의 주인공처럼 그 시간이 지나버리고 나면 까맣게 잊어버리기 일쑤다. 피흘리고, 투쟁하고, 이러면 안된다는 자성도 그때뿐이다. 시간이 지나면 또 반복될 뿐이다. 기록은 있느나 기억이 결여되어 있다는 말이다. 혹은 기억을 한다고 할지라도 심하게 왜곡되어 있다는 말이다.
왜 그런가? 어떻게 하면 이런 안타까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이 책의 세 장의 제목이 이에 대한 답변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 나는 누구인가?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 라티어로 보면 의미가 더 정확해진다. "Quaestio! Cogito! Memento" "질문하다. 생각한다. 그리고 기억한다." 우리의 기억이 왜곡되어서 누군가에게 이용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질문해야 한다. 어떻게 살 것인지, 이렇게 사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 이 상황이 과연 정의로운 것인지 등등 우리가 몸담고 있는 시대를 바라보면서 끊임없이 질문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는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 과연 이 상황 속에서 우리는 어떤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가, 우리가 존재하는 양식이 과연 옳은 것인가 자신을 바라보면서 질문을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이런 과정 속에서 일어난 일들을, 그리고 행동들과 생각들을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한다. 물론 기억하는 과정 속에서도 지속적으로 질문하고 생각하는 과정이 동반되어야 할 것이다. 이 세단계 중에 어느 것 하나라도 결여되어 버린다면 영화 메멘토의 비극이 영화만의 이야기가 아니게 될 것이다.
역사e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다. "Quaestio, Cogito, Memento" 과거를 끄집어 내지만 이것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의 이야기이다. 과거 그들이 했던 고민은 오늘날 우리의 고민이며, 과거에 있었던 일들은 오늘에도 동일하게 일어난다. 이것들을 오늘 기억하지 못하면 이 일은 머지 않은 미래에도 또 일어날 것이며, 일어나는 것이 당연하다.
표지에 기록되어 있는 "내가 두려워 하는 것은 역사뿐이다"라는 연산군의 말과,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이들에게 과거는 반복된다."는 조지 산타야나의 말은 우리의 가음에 이 책과 함께 묵직한 무엇인가를 던져주고 간다. 그건 아마도 이 시대를 기억해야할 우리의 책임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