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게 길을 묻다
이덕일 지음 / 이학사 / 2002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릴 때부터 역사를 꽤 좋아했었다. 이유는? 단순하다. 학교 곳곳마다 비치되어 있던 책들이 대부분 역사책이었기 때문이다. 위인전기를 비롯하여, 어린이 삼국사기, 어린이 삼국유사 등등 학급문고로 비치된 책들은 대부분 역사책이 아니면 세계 문학 전집이었다. 시골에서 읽을 거리가 많지 않았던 덕택에 이런 류의 책들을 거의 섭렵하게 되었고 그 덕일까? 중학교 고등학교 시간에 배우는 역사가 단순히 시험을 치르기 위한 암기 과목으로 생각되지 않았다. 친구들은 외울 것이 많아서 공부하기 싫다고 했는데 나는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하나하나 배워가는 재미가 쏠쏠했다. 중학교 시절에는 전혀 몰랐던 역사적인 사실을 배워간다는 재미가 쏠쏠했고, 고등학교 시절에는 역사를 해석하는 법을 배워가는 재미가 쏠쏠했다. 게다가 고등학교 역사 선생님은 꽤나 독특하신 분이셨다. 지금까지도 역사 교사 모임에서 활동하고 계시고, 지역의 문화 유산이나 역사적인 유산들을 널리 알리는데 힘을 쓰고 계시는 분이다.

 

  역사가 얼마나 재미있었던지 수학 공식 하나, 영어 단어 하나를 외우기에도 빠듯한 고등학교 시절에 단재 신채호 선생의 책들이나 한단고기와 같은 책들을 구해서 읽게 되었다. 궁금한 것들은 수업시간에 묻기 위해서 역사 시간을 그렇게나 기다렸다. 역사 선생님도 보통은 왜 그런것 보냐 영어 단어 하나라도 더 외워라 하지 않으시고 정사와 야사, 식민사관과 민족사관에 대해서 상세하게 설명해 주셨다. 사람들의 이름이나 학파의 흐름이 어땠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공부하던 국정 교과서가 식민사관에 의해 만들어진 것임을 알게 되었다. 한사군의 위치에 대해서도 국사 교과서에서 이야기하는 한반도 설과는 다른 설이 존재함도 알게 되었다.

 

  대학을 들어가서도 역사에 대한 관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더군다나 지연의 끈으로 얼떨결에 끌려 들어갔던 동아리가 맑시즘을 비롯한 인문사회 과학 서적을 읽던 동아리였기에 모든 것을 비판적인 눈으로 읽을 것을 주문받았다. 그러다 보니 역사서적을 보는 눈이 약간씩 삐딱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삐딱한 시선으로 사회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때론 역사 속에서 오늘을 보기도 하고, 이대로 가면 어떤 내일이 올지에 대해서도, 그리고 어떤 의도로 뜬금없이 역사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이제 역사는 단순히 역사가 아니라 오늘을 비춰보는 거울이 된 것이다. 쉽게 말해 역사는 파워 게임의 연장선상에 있었던 것이다.

 

  중국의 동북공정이 단순히 고구려의 역사를 연구하는 학술적인 목적이 아니라 고도로 정치적인 목적에 의하여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그 때쯤이다.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고구려를 주제로한 역사 드라마가 쏟아져 나온 것도, 담덕을 주인공으로 하는 만화책이나 소설책이 쏟아져 나온 것도 비슷한 때이다. 역사에 대한 고증이라는 그럴듯한 포장지를 한꺼풀 벗겨내니 그 안에는 치열한 영토 전쟁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서북공정도 독도문제도, 신장 자치구와 몽골의 문제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비단 타국과의 문제만이 아니다. 한국 내에서도 자신들의 정치적인 입장을 역사를 통하여 우회적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과거사 청산의 문제는 단순히 친일 부역의 청산이 아니라 이로 인한 현 기득권의 재배치 문제가 민감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권을 잡는 이들은 자신들의 입장에서 만들어진 역사를 역사 교육이라는 명분하게 교묘하게 주입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그렇게 주입하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언제부터인가 이러한 정치적인 쇼맨쉽도 사라지기 시작했다. 국사를 선택 과목에 집어 넣으면서 국민을 우민화하기 시작했다. 과거 일제 시대에 교회 안에서 출애굽기를 읽거나 설교하지 못하게 했던 것과 같은 모습이다.

 

  이제 역사는 현실을 읽는 눈과 생각을 기르는 도구가 아니라 하나의 문화 콘텐츠로 전락해 버렸다. 그러다 보니 드라마에서 역사적인 고증은 안드로메다로 날라가 버렸다. 미국의 마초 드라마 스파르타쿠스만 해도 역사적인 고증에 꽤나 공을 들여서 로마 군사들의 갑옷이나 무기의 디테일한 부분까지 신경을 썼지만 한국의 사극들은 이러한 역사적인 고증은 개나 줘버린지 오래다. 하나같이 음모, 로맨스, 애국심이라는 볼거리들을 제공하면서 시청율 올리기에 급급하다. 한예로 내가 즐겨보던 선덕여왕이라는 드라마를 살펴보면 거기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은 실재 자체가 의문시 되는 이들이다. 역사적인 근거가 빈약해서 논란이 되는 화랑세기를 기본으로 삼은데다가 그마저도 이리저리 비비 꼬아 놨기 때문이다. 다만 미실과 덕만을 통하여 당시 정치권을 풍자했기 때문에 즐겨 봤던 것이지 나는 아직까지도 선덕여왕을 사극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풍자극 혹은 마당극 정도로 받아들인다. 최소한 중요한 부분들은 건드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그리고 사극도 역사관은 있어야 한다는 이덕일 씨의 주장은 그런 의미에서 꽤나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역사에게 길을 묻는다. 책의 제목처럼 역사에서 오늘의 현실을 발견한다. 친인척 비리와 부정부패, 수사에 관해 다루고 있는 부분을 보고 있노라면 소름이 끼친다. 이덕일씨가 머릿글에 썼듯이 이글을 쓴지 벌써 10년이 지났다고 하는데(대략적인  배경은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초기이다.) 오늘날에도 거의 비슷한 모습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과거나 현재나 비슷한 문제를 가지고 골치를 썩고 있다면 그에 대한 해답을 찾는 과정에서도 과거의 사안들을 하나하나 살펴 보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역사에서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하면 바보라는 말을 왜 모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애써 무시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나는 꼼수다를 비롯하여 정치 평론 서적들이 인기를 끌고 있다. 한극 사회가 어디로 가는가 걱정하며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이다. 더 나은 미래를 모색하는 중이리라. 그렇다면 역사책을 같이 읽어 나가는 것은 어떨까? 처세술로 읽어도 좋고, 용인술로 읽어도 좋지만 역사의 진실한 가치는 현재 산적한 문제들을 바라보고 그에 대한 인과관계를 해석하고 더 나은 대안을 모색하는데 있지 않겠는가? 과거 지식인들이 역사 공부에 매진한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역사가 재미있는 이유, 우리에게 유의미한 이유 또한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