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는 정치다 - 왜 프랑스는 문화정치를 발명했는가?
장 미셸 지앙 지음, 목수정 옮김 / 동녘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쉬는 날 아이들을 데리고 영화를 보기 위해 CGV 어플로 영화를 검색한다. 시중에 개봉중인 영화는 거의 대부분 한국 영화이다. 언뜻 생각해 보니 어느 순간부터 시중에 개봉중인 영화가 한국 영화인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다. 난다 긴다하는 영화들이 한국에 들어와서 맥을 못추기 시작한지도 꽤 시간이 흘렀다. 과거에는 기껏 2~3백만이 봤다면 대박이라고 말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천만에 육박하는 영화가 한 둘이 아니다. 과거 홍콩 영화에 열광하고, 4대 천왕을 이야기하던 때가 그리 오래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이젠 한류라는 이름으로 외국에서 한국의 4대 천왕을 이야기한다. 한국 드라마가 외국에서 꽤 잘팔린다는 뉴스를 들었다. K-POP이라는 말로 한국 음악이 외국에서 꽤 잘나간다. 이 정도면 한국도 문화 강국에 들어간다는 말이 신문을 장식한다. 그렇지만 정말 그럴까? 옮긴이는 한국의 문화 현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말로 날카롭게 비평한다.

 

  촉망받던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은 생활고로 세상과 이별하고, 미친 가창력, 전설로 불리는 가수 임재범은 100만원 안팎의 저작권료로 근근이 살아간다. 연극배우들은 보험 설계사, 카페 서빙을 겸해야만 생계를 이을 수 있고, 중견 조각가는 일용직 노동자보다 못한 직업으로 취급받는다. 문화 영역에서, 창작자로, 실연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감내해야 하는 굴욕은 한국 사회가 문화를 어떻게 취급하는지를 거울처럼 정확하게 투영한다.(p12)

 

  이러한 사회 풍조 속에서 한국에서는 인간으로서 누려야할 가치를 빼앗기고, 소유한 자본의 크기대로 평가 받는, 신자유주의에 휩쓸려 버렸다고 비판의 날을 날카롭게 세운다. 맞다. 우리 문화가 경쟁력을 갖추었다고 자화자찬하는 말 속에는 우리 문화 콘텐츠가 외국에서 팔릴만한 경쟁력을 가졌다는 의미가 숨겨져 있다. 쉽게 말해 한국의 문화 콘텐츠들이 돈을 벌어 들 일 수 있을 정도로 상품성을 갖추었다는 말이 문화 경쟁력이라는 말로 둔갑해 버렸다는 의미다. 과연 이런 현상이, 상품성을 갖추었다는 말이 우리 문화의 기반이 든든해지고, 성장했다는 말로 받아들일 수가 있는가? 내가 내린 결론은 아니올시다이다. 자본 회수와 이윤 창출이라는 절대적인 가치로 문화 성장을 판단할 수 없다. 위에서 언급한대로 오히려 자본과 이윤 창출이라는 절대적인 가치에서 벗어나 있는 예술인들의 삶은 더 팍팍해졌다. 왜 그런가? 문화 정책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문화 정치는 프랑스의 발명품이다."라는 다소 오만한 선언이 타당하게 느껴질 정도로 프랑스인들의 문화적 기반은 튼튼하다. 프랑스에서도 분명 팔리는 문화 콘텐츠가 있을 것이지만 팔리지 않는 문화 콘텐츠들이 더 많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처럼 생활고에 시달리지 않고 안타깝게 세상과 이별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팔리지 않는 콘텐츠임에도 불구하고 꾸준하게 이러한 콘텐츠들이 생산될 수 있는 이유는 프랑스의 문화 정치 때문이다. 팔리는 상품에 올인하는 한국의 문화 정책과는 달리 프랑스는 콘텐츠가 아니라 콘텐츠를 창출하는 예술가들에게 투자한다. 예술가들이 풍족하지는 않지만 생활고에 시달리지 않고 창작열을 불태울 수 있도록 국가는 정책적으로 이들을 지원한다. 이것이 프랑스가 오랜 세월 동안 문화 강국으로 세계 무대에서 명함을 내밀 수 있는 이유이다. 그리고 문화 강국이라는 명함은 프랑스에게 여러가지 장기적, 단기적 이익을 제공해 주었다. 1998 프랑스 월드컵에서 아트싸커라는 이름으로 우승을 차지한 것도 결국은 문화 정치의 힘이다. 과거 식민지를 꾸준하게 지원하면서 문화적인, 언어적인 연대를 유지하면서 일류 선수들을 프랑스로 귀화시킨 것이 아트싸커의 실체이다. 지단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것이 프랑스의 문화 정치의 핵심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문화정치는 어떤가? 멀리 갈 것도 없다. 유인촌 장관을 살펴보자. 내가 유인촌 장관을 주시하여 보는 것은 어떤 정치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다. 단순히 그가 역대 문화부 장관 중에서 최장수 장관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근 4년이라는 시간동안 문화부 장관을 역임했다면 프랑스의 자크 랑 문화부 장관에 비견할만 하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유인촌 장관이 문화부 장관으로 있으면서 어떤 문화 정치를 이룩했는지 살펴 보는 것은 한국의 문화 정치가 어느 위치에 서 있는지,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고 하겠다.

 

  과거 전원 일기를 통해서 양촌리 청년 회장으로, 양촌리 이장으로 일반 대중에게 친근한 이미지로 다가갔던 유인촌 씨가 문화부 장관이 되었을 때 놀랍게도 많은 문화계 종사자들이 반대를 했다. 그가 장관이 되고 그리 오랜 시간이 흐르지 않아서 반대의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를 알게 된다. 놀랍게도 유인촌 문화부 장관은 최장수 문화부 장관이면서도 실제로 이룩해 놓은 문화 정치적인 업적이 없다. 문화부 장관으로서의 그의 행적의 대부분은 문화 정치 중에서 문화에 방점이 찍히는 것이 아니라 정치에 방점이 찍혔다. 문화부 국감에서의 막말 퍼레이드는 우리에게 양촌리 이장이 대한민국의 문화부 장관을 역임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4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가 한 일은 MB 정권의 나팔수 노릇 뿐이다. 정권과 시각을 달리하는 연예인들을 고소하고 퇴출 시키는 것, 전 정부가 선임한 인사를 공격하면서 정권이 바뀌었으면 알아서 기어 나가라는 말로 협박한 것이 그의 업적의 전부이다. 김제동이 퇴출 됬고, 윤밴이 하차했다. 김미화는 골방으로 숨어 들었고, 정권을 편들지 않는 이들은 폴리테이너로 몰아 붙였다. 그덕에 많은 방송인들이 실업자가 되었다. 그뿐이 아니다. 강정 마음에서 연행된 영화 평론가는 면회도 금지된 채 30일이 넘는 시간 동안 단식을 이러가고 있으며, 수면 밑에서 구타를 당했다. 영화는 고만고만하고 비슷한 것들만 넘쳐난다. 어린 가수들을 조금이라도 벗기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학교 폭력은 웹툰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얼마나 어이 없던지 한 누리꾼은 그럼 아리랑 치기의 배후는 민요냐는 말로 대꾸한다. 문화는 철저하게 정치의 종속 변수가 되어 버렸다. 저항문학, 예술가의 자유로운 혼은 설 자리를 잃어버렸다. 그러면서도 백남준과 같은 아티스트가 나타나야 한다면서 수선을 떤다. 닌텐도를 보면서 우리나라는 왜 이런거 못만드냐면서 아쉬워한다. 과거로 회귀한 것은 정치와 사회 뿐만이 아니라 문화에서도 마찬가지다. 김명곤은 이러한 현실에 대해 이런 평을 남긴다.

 

  1970년대와 1980년대의 '일부 불온한' 문화 예술인은 군사정부의 독재적이고 폭압적인 권력에 거세게 저항했다. 그들은 민주와 통일, 인권, 평등의 기치를 드높이 내걸고 저항적이고 진보적인 문화 예술 운동을 펼쳤다. 1990년대 말에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국민의 정부와 참여 정부가 탄생되자 분위기가 180도 바뀌었다. 관리와 통제 정책은 지원과 육성 정책으로 변했다. 검열제도가 사라지고, 표현의 자유와 자율성이 신장되었다. 문화 예술인은 정치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고 마음껏 표현하고 소신껏 발언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다시 참담해졌다. 문화 예술계의 좌우 편 가르기가 무자비하게 진행되었다. 기관장 인사 파동, 방송 장악 시도, 표현의 자유 위축 등도 급속도로 심화되더니 급기야 비판적 문화 예술인들의 '목줄 조이기'라는 구시대적 작태까지 등장했다. 이제 연예인을 포함한 문화 예술인은 정치 권력의 눈치를 보고, 그들의 비위를 맞추고, 그들에게 적당히 이용당하며 살아온 옛 시절로 돌아갈 각오를 해야 한다.(꿈꾸는 광대 p65~66)

 

  이 시점에서 우리는 진지하게 묻고 대답해야 한다.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바른 문화 정책이겠는가? 무한도전 비빔밥 광고처럼 돈을 쳐발라서 뉴욕에서 CF 내보내면 되는가? 한국 방문의 해라는 정치적인 구호를 외쳐서 과연 문화 강국이 되겠는가? 대규모 토건 사업을 벌려서 골프장 만들고 선착장 만들면(그 와중에 올레길이 사라지고, 자연 경관이 훼손되어도) 장땡인가? 양촌리 이장이라면 그래도 된다. 범위도 제한되어 있고, 실패해도 그렇게 리스크가 크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수없이 많은 양촌리의 문화 정책을 세워야 하는 문화부 장관은 달라야 한다. 고작 양촌리 이장처럼 행세할 것이라면 아예 시작부터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김명곤의 문화관은 충분히 곱씹어 볼만한 내용이다. 지금부터라도 문화 정치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김명곤의 말로 글을 마무리한다.

 

  정부가 문화 예술을 지원할 때 너무  입김이 강하면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며 '지원은 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문화 예술 정책의 큰 원칙을 지켜주신 DJ 덕분에 국립 극장장의 업무를 소신있게 수행할 수 있었다. 그분은 예술가는 정부에 의해 굴레 씌워지고 길들여져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아신 유일한 '문화 대통령'이다.(꿈꾸는 광대 p72)

 

ps. 내용이 자세하고 자료가 풍부하다. 그것이 이 책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문화 정책에 대해서 관심이 있고 디테일한 자료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장점이 되겠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오히려 단점이 된다. 나는 후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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