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속으로 4 - 택한 나의 그릇, 사도행전 8.9장 이재철 목사의 사도행전 설교집 4
이재철 지음 / 홍성사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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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도행전 8장과 9장의 강해 설교로 사울의 회심과 낙향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며 몇가지 고민했던 부분들에 대해서 적어본다.

 

  첫번째 한국 기독교의 광신적인 편협함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도자로 존경받는 사울의 등장은 그렇게 아름답지 않다. 사도행전 속으로 3권의 말미에 보면 스데반의 순교와 그로 인한 사울의 등장에 관해서 기록하고 있다. 사도행전 속으로 4권에서는 이렇게 등장한 사울이 스데반의 순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기록하면서 시작한다. 사도행전 8장 1~3절에서는 사울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사울은 그가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회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얻가 옥에 넘기니라

 

  스데반이라는 한 사람이 죽었다. 아무렇게나 살았던 사람도 아니요, 경건한 삶을 다른 이들에게 본이 되었던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죽었는데 사울은 스데반의 죽음을 조금도 애석해하지 않고 오히려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사울의 생각이 유대교적인 틀에 사로 잡혀 있기 때문에 그렇다.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자기의 신념과 종교만이 옳다고 생각하는 편협한 사고는 열정적이면 열정적일수록 더 위험하고, 비인간적이 되어 버린다. 사울이 꼭 그렇다. 열심을 내면 낼수록, 유대교에 독실하게 될수록 많은 사람들이 박해를 받고 목숨에 위협을 받는다. 열심을 내지 않으니만 못한 결과를 만들어냈다.

 

  사울의 모습을 보면서 더 안타까워지는 것은 편협한 사울의 모습이 한국 교회의 현주소이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 동안 불교, 유교 문화권에 속해 있던 우리 나라에서 기독교를 전파하는 것은 꽤나 유연하고 전략적인 사고가 필요한 일이다.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면서 다른 종교를 비난하는 현 한국 교회의 모습은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다. 백번양보해서 예수천당 불신지옥이야 기독교의 정체성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에 포기해선 안된다고 하더라도 산사에 찾아가서 불상을 훼손하는 광신적인 모습은 스데반의 죽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사울의 편협함을 그대로 옮겨 놓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한 반성과 회개가 없다면 앞으로 한국 교회는 자신의 편협함 때문에 거꾸러지게 될지도 모를 노릇이다.

 

  둘째 하나님의 선택은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이다. 당시 스데반 정도는 아니지만 사울보다는 독실한 기독교인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아마도 사명자라는 말로부터 가장 먼 사람을 꼽자면 사울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지만 하나님은 사울을 선택하셨다. 하나님의 선택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몫인 것을 깨닫게 해주는 일이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보여주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핍박하고, 그것을 당연한 일로 여기는 사울을 선택하셨다면 하나님의 선택을 받지 못할 사람은 없을테니 말이다. 사람들을 가려가면서 정죄하고 편가르는 한국 교회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부분이다.

 

  셋째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숙성의 시기가 필요하다. 사명을 받았다고 다 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명을 받았어도 일할 수 있는 적절한 시간이 있다. 사명을 받은 사람들이 해야할 일은 그 시간을 기다리면서 자기 자신을 돌보고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때가 이르렀을 때에 조금도 망설임없이 그 일을 감당해야 한다. 사울이 그렇게 열심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지만 실패하고 고향으로 낙향했던 것도 사울을 하나님의 그릇으로 빚어가는 시간을 갖기 위해서이다. 돌아가는 것 같지만 그 시간이 사울을 마지막까지 달려가도록 충전하고 준비하는 시간이 되었다. 준비가 되지 않고 열정만으로 뛰어나갔다가 도중에 멈추고 포기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대기만성이라는 사자성어가 생각나는 책이다.

 

  마지막으로 백주년 교회에서 시행하고 있는 직분의 호칭제에 대해서는 조심스러워진다. 직분을 직위로 착각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편이지만 빈대잡으려다가 초가삼간을 태우는 격이 되지 않을까 싶어 조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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