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도가니 - 공지영 장편소설
공지영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세미나에 참석했다가 쉬는 시간 짬짬이 시간을 내어서 읽었다. 영화도 책도 보지 않았지만 워낙 이슈가 되었던 사건인지라 내용은 대략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는 내내 가슴에 커다란 바위를 얹은 것처럼 답답해서,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 오르는 분노와 불편함과 피해자들에 대한 미안함으로 책을 읽어 가는 것이 쉽지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덮는 것이 더 쉽지 않았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읽을 수가 있었다. 책을 다 읽고 덮은 시간은 새벽 3시! 몇 시간 자고 일어나야할 나에게 무척이나 피곤한 시간이었지만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가슴에 얹힌 커다란 바위가 계속 남아 있었던 까닭이다.
강인호가 자신의 승용차에 간단한 이삿짐을 싣고 서울을 출발할 무엽 무진시에는 해무가 밀려들기 시작했다. 거대한 희 짐승이 바다로부터 솟아올라 축축하고 미세한 털로 뒤덮인 발을 성큼 성큼 내딛듯 안개는 그렇게 육지로 진군해홨다. 안개의 품에 빨려들어간 사물들은 이미 패색을 감지한 병사들처럼 미세한 수증기 알갱이에 윤곽을 내어주며 스스로를 흐리멍덩하게 만들어버렸다. 바닷가 절벽 위에 선 사층짜리 석조건물 자애학원도 그렇게 안개 속으로 빨려들어가기 시작했다. 일층 식당에서 뻗어나와 반짝이는 노란 불칩이 마요네즈 빛깔로 희미해질 때쯤 어디선가 종소리가 들려왔다.(p7)
희미한 안개에 포근하게 감싸여 있는 무진시와 자애학원의 전원적인 풍경을 한폭의 그림처럼 묘사하면서 소설은 시작된다. 그러나 이렇게 아름다운 한폭의 풍경화에서 왠지 모르게 야만과 폭력, 그리고 음산한 귀기가 묻어 나온다. 그렇게 묻어나온 기운들이 숨을 턱 막히게 만든다. 단 9줄의 묘사이지만 공지영의 필력과 작품의 집필 의도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마치 퇴폐적인 일본 만화의 한자락을 보는 것 같아서 마음이 답답하다. 계속 책을 읽어야 하나 갈등이 된다. 그럼에도 반드시 읽어야만 할 것 같은 의무감 비슷한 것이 나로 하여금 책을 덮지 못하게 만든다.
아니나 다를까! 책의 내용은 충격이다. 단순히 변태라고 치부하고 넘어가기엔 문제를 둘러싸고 있는 불의와 모순이 너무나 강고하다. 약자를 배려의 대상이 아닌 착취의 대상으로 보는 그래서 약자는 강자에게 먹히기 위해 존재한다는 지극히 야만적인 생각, 자신의 밥그릇을 위해 불의에 눈막고 귀막은 침묵의 카르텔,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단 하루의 생존을 위해서 합의서를 써줄 수밖에 없는 피해자 가족들의 절박함, 왜 내가 아닌 다른 이가 용서하느냐는 피해자의 절규, 믿었던 법정에 대한 철저한 배신감! 소설이라 치부하기엔 너무나 리얼하다. "손녀 딸을 팔아서 아비 병원비를 대겠다는 것이 잘못된 줄은 알지만, 아닌 줄은 알지만 원하는대로 주겠다는 그들의 목소리가 자꾸 귀에 맴돌더이다. 손녀딸도 자식놈도 들을 수 없는 그 소리가 이 늙은이의 귀에는 자꾸 맴돌더이다."라는 할머니의 처절한 넋두리에 이르러서는 나도 터져나오는 슬픔을 삭힐 수 없어서 숨죽여 꺽꺽대며 울었다.
자애학원의 문제를 고발한 주인공을 전교조로 몰아서 붙이는 색깔론, 아직 어려서 사랑에 대해 진지하고 책임있게 다가가지 못해 발생한 비극 때문에 평생 가슴에 슬픔을 담고 살아온 그를 제자를 성폭행 파렴치범으로 몰아붙이고, 피해자들의 인권을 위해서 목숨걸고 싸우는 주인공의 여선배를 이혼녀로 그리고 품행이 바르지 못한 여인으로 몰아붙이는 가해자들의 행태! 같은 교회 일원이라고 제식구 감싸기에 급급한 교인들, 자신의 잘못은 절대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이 모든 일은 교회를 무너뜨리기 위한 사탄의 계략이라고 선언해 버리는 목사의 행위 앞에서는 할 말을 잃어 버렸다. 왜? 충분히 그럴 수가 있다는 생각에서도, 그렇다고 반기독교적인 소설이라고 생각해서도 아니다. 철저하게 현실적이어서 그렇다. 기독교인인 내가 지금까지 목격한 한국 기독교회의 작태가 고스란히 담겨 있어서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소설은 철저하게 현실적이다. 한나라당 모 인사가 공지영을 불러서 조사해야 한다고 했었는데, 아마도 그는 소설이 던져주는 현실성에 몰입한 나머지 그런 말을 했던 것이리라. 마치 드라마를 보면서 죽일 놈 살릴 놈 하는 열혈 드라마 시청자처럼 말이다.
도가니! 말 그대로 이 소설은 광란의 도가니이다. 부와 권력이 결탁하였을 때, 비록 아주 사소한 그래서 사회에서 조금이라도 용인될 수 있는 형태로라도 결탁하였을 때 그 결탁이 어떠한 형태로 사회적인 약자를 궁지로 몰아 넣는지를 살펴보면 광란과 광기의 도가니라는 말이 딱 어울린다. 부와 권력과 명예욕 등등 인간의 모든 욕구가 도가니 안에서 풀어져 이기심이라는 하나의 강고한 결과물을 만들어 내었음을 깨닫는다면 도가니라는 제목이 얼마나 적절한지 알게 된다. 만약 소설이 이것을 보여 주는 것에서 멈추어 버렸다면 이 책은 절대적인 절망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러나 그 절망의 끝자락에서 나는 새로운 희망을 발견한다. 도가니가 모든 불순한 물건을 태워 없애고 보다 순수한 물건을 만들어내는 기구이기 때문이다. 소설은 자애 학원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주목하면서 이 사회에 존재하는 모든 불의한 상황들을 적나라하게 폭로한다. 그리고 그 불의들을 도가니 안으로 밀어넣어 불순한 것들을 태워버리고 보다 순수하고 정의로운 사회라는 결과물을 만들어 낸다. 오랜 세월동안 묻혀져 있던, 그래서 고독하게 투쟁해야 했던 그들의 삶을 소설로, 그리고 영화로 제작하고, 거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재발 방지를 위한 특별법 제정과 법적인 조치들을 이끌어 낸다. 지금 도가니는 불의와 야만, 부조리 그리고 협잡이라는 불순물들을 녹이고 제하여 버리는 과정을 치열하게 전개하고 있다. 나는 거기에서 희망을 본다. 공지영 또한 거기에서 희망을 보고 있지 않을까?
책을 읽고 답답함을 느꼈다는 사람들이 많다. 아이들에게 이 사회가 어떤 곳인지 어떻게 가르쳐야할지 모르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바로 그들이 희망의 싹이 될 것이다. 공지영에게 정말로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