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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이렇게 조용히 - 88만원세대 새판짜기
우석훈 지음 / 레디앙 / 2009년 9월
평점 :
3무 세대! 돈이 없고, 집이 없고, 결혼을 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이태백! 이십대의 태반은 백수라는 말이다. 취업 5종 세트라는 말도 있다. 취업을 위해 필요한 필수 자격들이란다. 과거에는 토익, 학점, 학벌 3종 세트였는데 요즘은 더 치열해져서 인턴, 아르바이트, 공모전, 봉사활동, 자격증 5종 세트로 늘었다고 한다. 여기에다가 얼마전 우석훈의 88만원 세대라는 명칭까지 더하여지면 20대의 생활이라는 것은 온통 암울하기만 하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말!
"힘들지? 대학가면 괜찮아. 놀고 싶지? 대학가서 놀아! 열심히 해서 SKY가면 과외해서 학비도 벌고 너희 용돈도 벌 수 있어!"
난 20대는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위에 있는 말들과는 병아리 눈꼽만큼이지만 거리가 있다. 그러나 IMF가 막 터지고 어렵던 시기에 대학을 입학한 97학번이다. 20대의 청춘이 암울한 암춘(暗春)으로, 온통 새까만 흑춘(黑春)으로 바뀌어 가기 시작한 것이 내가 대학에 입학하던 시기 즈음부터 일 것이다. 눈부시게 푸를 것만 같고, 자유로울 것만 같았던 대학시절, 난 참 많은 방황을 했었다. 학비, 군입대, 아르바이트 경제 문제는 결코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부분들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3남매인 우리는 모두 2년 터울이었다. 내가 대학원에 입학하던 해에 막내가 대학에 입학했으니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그렇게 무식했었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머리가 조금씩 커지기 시작할 무렵인지라 사회를 바라보는 눈도 삐딱했다. 비록 한 학기이지만 한총련, 학생운동에 열심을 내기도 했었고, 밤을 하얗게 세울 정도로 가슴 시린 사랑도 해보고, 수박 겉핥기나마 막스를 공부하기도 하고. 그 혼란스럽고 힘들던 시절 나를 지탱해 준 것은 세 가지였다. 친구, 신앙, 고궁! 가족에게 못할 고민들도 친구들에게 털어 놓았고(그 친구들이 지금도 연락하는 친구들이다.) 어릴 적부터 믿었던 기독교의 신앙, 그리고 경복궁, 덕수궁 같은 고궁들이 내 피난처요, 휴식처였다. 물론 그덕에 학점은 4.0만점에 3점대를 간신히 방어했지만 지금와서도 후회하지 않는다. 그 시절이, 그 고민이, 그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에 내가 있는 것이고, 내 20대가 단순히 암춘, 흑춘이 아니라 청춘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요즘 교회에서 20대를 볼 때마다 참 힘들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도 교회에 나오는 20대들은 비교적 마음에 여유가 있는 편인데도 불구하고, 참 재미없게 산다. 학원, 학점, 편입, 스펙, 취업 등등등... 언젠가 누가 기도하면서 이런 기도를 했는데 20대들의 삶이 그대로 담겨 있어서 마음이 짠햇었다. "돈은 필요한데 쓸 돈은 없고, 학교는 가야하는데 학점이 안나오고, 취업은 해야 하는데 직장은 없고, 결혼은 해야 하는데 사람이 없습니다." 어쩌다가 푸르디 푸른 청춘이 이렇게 암울하게 되어 버린 것일까? 어쩌다가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말 한마디에 주저앉아 펑펑 울고, 위안을 얻는 것일까?
IMF가 우리에게서 빼앗아간 가장 커다란 것은 부도, 경제적인 자신감도, 일자리도 아니다. 물론 우리가 잃어버린 그런 것들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지만 가장 가슴아픈 것은 신뢰와 연대가 깨어졌다는 것이다. IMF 이후 10년, 신자유주의 10년은 우리에게 승자독식과 무한 경쟁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만들었다. 우석훈은 이것은 신자유주의의 육화라는 아주 멋들어지고, 새련된 말로 표현을 했다.
연대를 외치는 노조도 비정규직 문제에 대하여 무관심하고, 옆 집에서 누가 죽어도 무관심하며, 지하철에서 누가 맞아도 말리는 이 하나 없는 것이 관계가 깨어진 후 우리 사회에 보편화된 비극이 아닌가? 결국 미래에 대한 희망은 관계의 복원, 연대에서부터 나온다는 의미다.(혹 이 연대를 SKY의 연대라고 읽을까 두렵다.) 그런 의미에서 우석훈의 진단은 옳다고 할 수 있다.
지금 20대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리더와 진, 권력이나 교섭력이 아니라 방살이에 갇힌 친구들과 같이 밥을 먹을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이고, 그러한 사회적 관계의 복원이다. "혼자라야 마음 편하다."는 친구들을 불러낼 수 있는 우정과 그 친구들을 환대할 수 있는 밥상 공동체가 아닐까 싶다. 그런 다음에야 3무 세대란 말을 없앨 수 있고, '88만원 세대'를 한때의 일로 기억하게 될 것이다.(p171)
또한 20대 운동이 당사자 운동의 성격을 띠어야 한다는 의견에도 전적으로 동의한다. 다만 아쉬운 것은 현실에 대한 바른 진단과 20대 운동의 바른 방향 제시에도 불구하고 뜬 구름 잡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것이다. "자, 모여라. 20대 삶이 어떠냐? 팍팍하지 않으냐? 이대로 있으면 안된다. 너희들 움직여야 한다. 옆에 있는 친구들을 의심하지 말고 믿어라." 그런데 구체적인 방법이 없다. 바라봐야 할 구체적인 깃발이 없다. 20대에게 깃발을 제시하는 것이 주제넘은 짓이라고 생각이 든다면, 그것들은 당사자들이 찾아야할 숙제라고 생각한다면 최소한 40대가 20대를 위해서 어떤 마인드를 가져야 하는가, 어떻게 정책적으로 연대할 것인가에 대해서 제시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88만원 세대를 통하여 문제 제기가 되었고, 이 책을 통하여 문제를 풀어 나가기 위한 "새판짜기"라는 타이틀까지 걸었는데 여전히 정확한 문제제기와 미적지근한 새판짜기에 멈추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88만원 세대를 통하여 만났던 우석훈의 번뜩이는 재치를 이 책에서도 기대했기에 더 실망하고 아쉬워 하는 지도 모르겠다. 선전 혹은 잘 싸웠다는 칭찬보다는 간신히 막아냈다는 말이 다 잘 어울리는 책이다. 저자의 말대로 저자는 수성보다는 공성에 더 어울리는 사람이어서인지도 모르겠다.
편집 상 아쉬운 것은 중간 중간 사용되는 어려운 용어를 각주가 아니라 본문에 파란색 배경의 칸에 설명한 것이다. 글을 한참 읽고 있는데 흐름이 끊기는 것이 책의 내용에 몰입하기 어렵게 만든다. 간혹 모르는 단어라고 할지라도 책의 문맥을 통하여 대략적인 개념 이해가 가능하고, 미진한 구석이 있다면 한 단락이 끝나고 난 후에 확인해 보아도 될 텐데 중간 중간에 파란색으로 끼어든 불청객들이 내 눈을 잡아 끄는 통에 전체적인 맥락 이해에 어려움을 주었다. 가능하다면 다음 판을 낼 때 이 부분을 편집하여 각주로 돌리는 것이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