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의 세기 이후 오퍼스 1
한나 아렌트 지음, 김정한 옮김 / 이후 / 1999년 11월
평점 :
절판


  희망버스, 반값 등록금, 한미 FTA반대 촛불 시위, 대추리 미군기지 이번 반대 시위... 

  그냥 머릿 속에 생각 나는 대로 이수가 되었던 사건들을 적어 보았다. 이외에도 더 많은 사건들이 있지만 그냥 최근의 사건들, 그래서 머릿 속에 바로바로 떠오르는 사건들을 적어 보았다. 이 사건들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공통점이 있다. 어떤 이들은 좌빨이네, 보수 꼴통이네 편가르기를 할 것이고, 어떤 이들은 MB네 쥐박이네, 놈현이네 할 것이고. 각자의 정치적인 입장에 따라서 찬반으로 팽팽하게 갈릴 것이다. 내가 이 사건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점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것들이 어떤 정치적인 입장에 따라 결정되었느냐가 아니라 이 사건들이 모두 강경진압을 경험했다는 것이다. 얼마전 있었던 희망 버스는 전 진보신당 대표 심상정 씨와 정동영 전 민주당 의원이 물대포를 맞고 현 국회의원인 이정희 의원이 최루액을 맞았다고 보도가 되었다. 대표적인 사람들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지만 이름조차 거론되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강경진압을 당했다. 반값 등록금 또한 마찬가지다. 한나라당에서 반값 등록금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야심차고 건설적인 이야기를 하는 중에 한나라당 출신의 정부 인사들은 반값 등록금을 외치는 시위들을 불법 시위로 몰아 철저하게 진압했다. 한미 FTA는 너무 유명해서 말한 필요도 없다. 오죽하면 전대협 깃발이 다시 등장했겠는가? 그 당시 전투화로 여학생을 걷어찬 그 전경과 위선은 처벌을 받았는지 모르겠다. 대추리 미군 기지? 역시다. 

  중요한 사건이 있을 때마다 정부는 전경을 투입하였고, 물대포를 쏘았으며, 최루액을 발사했다. 쌍용 자동차 사태에는 테이저 건이라는 신무기까지 사용하고 골프공을 날리기도 했다. 초반에는 말로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정부의 의견에 찬성하지 않는다거나 반발을 하면 여지없이 물리적인 수단을 동원하여 강경 진압을 하였다. 어떻게 국민의 손으로 투표를 해서 뽑은 정부가 자신들을 뽑아 준 국민들을 향하여 아무런 거리낌 없이 전쟁도 불사할 태도로 강경하게 대응을 할 수가 있는가? 그것도 차후에 책임 소재를 가릴 명령권자도 애매모호한 상황에서 말이다. 

  아렌트의 폭력의 세기는 이러한 고민에 대한 진지한 답변을 제시한다. 베버는 국가의 권력은 폭력을 행할 수 있는 권리를 독점하는 데서 나온다고 말한다. 이 말을 역으로 이해하면 국가가 폭력을 행할 권리만 가지고 있다면 권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권력은 폭력을, 그리고 폭력은 권력을 상호간에 창출해 내는 관계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렌트는 다른 의견을 제시한다. 폭력은 권력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수단 중 하나에 불과하며 정당성을 잃은 폭력의 행사는 권력을 파괴하는 부메랑이 된다는 것이다. 베버가 폭력과 권력의 관계에 대하여 상당히 낙관적인 입장이라면 아렌트는 비관적인 입장을 취한다고 하겠다. 이러한 두 사람의 차이는 정당성을 잃은 폭력을 행사했던 나치를 경험했는가 하지 않았는가에 달려 있지 않을까? 

  아렌트는 폭력과 권력의 관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분명히 말한다. 

  권력과 폭력은 대입저이다. 즉 하나가 절대적으로 지배하는 곳에서, 다른 하나는 부재한다. 폭력은 권력이 위태로운 곳에서 나타나지만, 제멋대로 내버려둔다면 그것은 권력의 소멸로 끝난다. 이것은 폭력의 대립물을 비폭력으로 사고하는 것이 올바르지 않다는 것을 함의한다. 그래서 비폭력적 권력을 이야기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동어반복이다. 폭력은 권력을 파괴할 수 있다. 하지만 폭력은 권력을 전혀 생사할 수 없다.(90p) 

  그런데 왜 여지없이 권력의 정당성 혹은 정책의 정당성이 흔들릴 때마다 위에서 보듯이 국가는 폭력을 사용하는 것일까? 왜 폭력을 사용함으로써 스스로 권력을 파괴하는 우를 범하는 것인가? 정치인들이 생각하고 있는 권력의 의미가 국민의 위임이 아니라 국민의 복종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기꺼이 폭력을 사용해서라도 우매한 백성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려 시도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엄청난 모순이 존재한다. 이렇게 행사된 폭력은 가장 빠르고 완전한 복종을 가져오지만, 가장 효과적으로 그리고 철저하게 국가가 가진 권력을 파괴하게 된다는 것이다. 국민들의 국가에 대한 권력 위임은 국가에 대한 신뢰에 기반을 두는 것인데, 이를테면 부적절한 폭력의 행사는 신뢰와 복종을 맞바꾸는 밑지는 장사라고 하겠다. 이런 의미에서 아렌트의 말은 권력을 획득한 정치인들이 마음 속 깊이 새겨야할 경구이다. 

  폭력은 항상 권력을 파괴할 수 있다. 이를테면 총구로부터, 가장 빠르고 완전한 복종을 가져오는, 가장 효과적인 명령이 나올 수 있다. 총구로부터 결코 나올 수 없는 것은 권력이다.(86p) 

   아렌트의 이 말은 역사가 증명해 주는 진리이다. 나치의 몰락, 군부 독재의 몰락, 중동의 재스민 혁명과 줄줄이 뒤를 잇는 반정부 시위들이 아렌트의 말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비단 멀리 갈 필요가 없다. 우리나라 5공의 몰락을 보면 딱 여기에 들어맞지 않는가? 삼청교육대, 강경 탄압, 백골단 등등 수없이 많이 행사된 폭력이 몇 년간의 완전한 복족을 이끌어 냈지만 결국은 권력의 파괴와 소멸로 이어지지 않았는가? 얼마간의 시차가 존재할 뿐이다. 

  아렌트의 문장 자체가 워낙 난삽한 까닭에, 게다가 번역까지 한 몫 거든 까닭에 책을 읽는 것이 쉽지가 않다. 오죽하면 원서를 구해서 읽는 것이 낫지 않을까라는 무모한 생각하기 해보았겠는가? 빵가게 재습격님의 말대로 여러번 읽어서 그 의미를 해독해 내는 방법밖에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력과 권력에 관한 아렌트의 사상은 너무나 탁월해서 조금씩 씹어먹는 맛이 쏠쏠하다. 오바마 대통령이 백악관에 들어가면서 딱 한권만 가지고 들어갈 수 있다면 링컨에 관한 책을 가지고 가겠다고 했는데 내가 청와대에 들어갈 리가 절대 없겠지만 만약 나에게 동일한 질문을 던진다면 나는 이 책을 기꺼이 꼽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On Violence"라는 원제를 "폭력의 세기"로 번역한 역자의 의도가 궁금하다. 부끄럽지만 아렌트에 대해 무지하던 시절 "세기"를 century가 아니라 intensity로 오해했던 적이 있었다. "폭력에 대하여"라고 직역하기만 했었어도 이런 웃기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읽다보면서 이러한 부분이 눈에 몇 부분이 띈다. 내가 별 두개를 준것도 순전히 이러한 이유이다. 책 내용은 별 4개에서 5개를 줘도 아깝지 않다.  

PS. 예전에 책을 다 읽고 나서 한마디로 이 책을 이렇게 평가했던 적이 있다. "이 책의 번역 자체가 폭력이다." 그 정도로 읽기가 난해하다. 원문도 번역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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