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야 나무야 - 국토와 역사의 뒤안에서 띄우는 엽서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199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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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젠가 붓 글씨로 써드렸던 글귀를 엽서 끝에 적습니다.
  처음으로 쇠가 만들어졌을 때 세상의 모든 나무들이 두려움에 떨었다.
  그러나 어느 생각 깊은 나무가 말했다. 두려워할 것 없다.
  우리들이 자루가 되어주지 않는 한 쇠는 결코 우리를 해칠 수 없는 법이다.  

  아마도 이 책의 제목이 이 글에서 나오지 않았을까? 세상이 부조리하고, 정의롭지 못하다고 불평하는 이들에게 "두려워 할 것 없다. 우리들이 거기에 동조하지 않는한 결코 그들은 우리를 해칠 수 없다."고 다독이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여행을 다루는 콘텐츠들이 유행을 하기 시작했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으로는 1박 2일, 책으로는 한비야씨의 "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 바퀴반", 거기에다 올레길, 둘레길 등 무슨 무슨 길이 생기기 시작했다. 신간 도서 목록에는 여행 관련 책들이 꼭 한두권씩 끼어있기 마련이다. 언젠가 동생이 야심차게 서울 투어 프로그램을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서울 유적지와 여행 관련 책자를 살 대 따라간 적이 있었다. 서울 관련 여행 정보 책자들이 그렇게 많고, 종류도 다양한 줄은 그 때 처음 알았다. 추리고 추려서 산 것이 대략 스무권이다.   

  여행 관련 콘텐츠들이 이렇게 홍수를 이루는 것은 아마도 떠나고 싶어하는 현대인들의 소망을 반영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대로 좋은 것일까? 모 CF의 카피처럼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는 생각을 우리의 머릿 속에 집어 넣어주면서 여행을 소비 산업의 신개척지로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본다. 인생의 성숙을 위해서, 성장을 위해서 떠나는 여행이 먹고 마시고 즐기기 위한 소비 향락 주의로 변질되어 버린 것은 아닌가? 여행 정보지에 보면 싼 값에 맛있게 먹고 즐길 수 있는 곳을 소개하는 곳은 많지만 역사의 현장을 소개하는 글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지 않은가? 신영복 교수가 말한 것처럼 광화문의 이순신 동상같이 거추장스럽게 포장된 콘텐츠들만이 넘쳐나지 여수에 살아 있는 이순신 장군의 숨결은 느끼기 힘들지 않은가?   

  신영복 교수의 이 책은 여행의 본래적 의미에 충실하다. 그래서 색다르다. 그가 여행하는 자리자리마다 현실에 대한 통찰과 아픔이 배어 있다. 백담사에서 만해의 시비와 일해의 편액이 같은 공간에 걸려 있음을 보면서, 가야산의 최치원 시비를 보면서, 이천의 도자기 가마와 백마강을 보면서 그곳에 담긴 아픔과 한과 교훈과 모든 것들을 깊이 새김질한다. 그리고 한 장의 그림엽서를 띄운다.   

  그가 띄우는 그림엽서의 수취인은 누구일까? 뚜렷한 수취인이 없는 수취인 불명.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을 접하는 모든 독자들이 수취인이 될 수도 있을 것이고, 그가 밟고 다닌 자리에서 살아왔던 민초들이 그럴 수도 있을 것이고, 혹은 자신에게로 되돌아 올 수도 있을 것이다. 보다 많은 사람이 받아 볼 수 있는 엽서가 될지, 저자에게로 되돌아가는 엽서가 될지는 우리의 몫일 것이다. 도끼 자루가 되어 줄지 되어 주지 않을지는 나무 각자의 몫인 것처럼.  

  책을 덮고 나서 한없이 아쉽다. 내가 책이 아니라 바로 그 자리에 함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하는 생각 때문이다. 이만한 동행과 이런 여행을 한다면 그것은 정말 즐거운 일이 아니겠는가?   

  기억에 남는 문구로 끄적거림을 마무리한다.  

  옛 사람들은 물에다 얼굴을 비추지 말라고 하는 '무감어수(無鑑於水)'의 경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을 거울로 삼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만 그것이 바로 표면에 집착하지 말라는 경계라고 생각합니다. '감어인'(鑑於人). 사람들에게 자신을 비추어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과의 사업 속에 자신을 세우고 사람을 거울로 삼아 자신을 비추어보기를 이 금언은 요구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어깨동무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바위처럼 살아가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12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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