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한 거짓말 창비청소년문학 22
김려령 지음 / 창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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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년도 더 된 일이다. 일본영화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으며, 지금처럼 일드나 일본 영화가 그렇게 많이 알려지지 않았던 시절에 같이 기숙사를 쓰던 형이 일본 영화 한 편을 구해왔다. 흔히 용산에서 빽판이라고 불리면서 암암리에 판매되고 있던 불법복제 DVD였다. 그 당시에는 이 영화가 정식으로 수입되지 않았기 때문에 어둠의 경로를 통하지 않고는 구할 수 없던 시절이다. 당시 대학가를 중심으로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을 비롯하여 정식으로 구입할 수 없는 영화의 불법 복제판을 대여해 주던 곳이 있었으니 불법복제 DVD를 시청했다고 나를 범법자 취급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몇 년 뒤 정식으로 이 영화가 수입되었을 때 정식 DVD를 구입하여 내 책꽂이에 꽂아 놨으니 대충 눈감아 주고 넘어가도 무방할 듯하다. 대충 눈치가 있는 사람은 알겠지만 그 영화의 제목은 러브레터였다. 얼마나 이 영화에 빠졌었는지 하얀 설원에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러브레터의 포스터를 1000피스짜리 퍼즐로 맞추기도 했다. 물론 고생은 엄청했지만. 

  이 영화의 백미는 뭐니뭐니해도 위에 첨부한 이미지샷이다. 사랑하는 연인 후지이 이츠키를 등반 사고로 보낸 화타나베 히로시가 자기 남자 친구의 첫사랑이자 동명이인인 후지이 이츠키와 편지를 주고 받는다. 그 편지를 통해서 후지이 이츠키가 진정으로 사랑한 것은 동명이인인 후지이 이츠키임을 알게 된다. 첫사랑 후지이 이츠키와 놀랍도록 닮았기 때문에 후지이 이츠키는 와타나베 히로시를 사랑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알아가면서 와타나베 히로시는 사랑하는 남자친구를 떠나보낼 수 있게 된다. 그 마음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 바로 위의 컷이다. 새하얀 설원 위에서 눈덮인 산을 향하여 와타나베 히로시는 이미 죽은 남자 친구 후지이 이츠키에게 커다란 목소리로 묻는다.  

  "오겡끼데스까?(잘 지내고 계신가요?)"  

  언뜻 보면 첫사랑을 다루고 있는 멜로물에 왜 그리 빠졌었던 것일까? 가슴 한쪽이 아릿할 정도로 아픈 사랑이야기 때문일가? 아니면 나카야마 미호의 깨끗하면서도 청순 가련한 외모에 빠졌던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이와이 슌지 감독의 치밀한 연출력 때문일까? 물론 그런 것도 있겠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이와이 슌지 감독의 차기작 4월 이야기를 그렇게재미있게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가 왜그렇게 러브레터에 빠졌던 것일까? "오겡끼데스까?" 이 한 마디 때문이다. 어느날 급작스럽게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 그렇지만 그를 떠나 보낼 준비는 되어 있지 않다. 그를 떠나보내는 여정인 편지 교환, 그리고 정지된 후 진심을 담고 물어보는 "오겡기데스까?". 그렇다. 내가 이 영화에 빠진 것은 와타나베 히로시의 오겡끼데스까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나의 이야기였다. 

  그 영화를 보기 4년전(그러니까 고1때) 나는 아버지를 떠나 보내야 했다. 1년 동안 투병 생활을 하시던 아버지를 보면서 진심으로 기도했다. 병이 완쾌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여름방학 보충 수업을 마치고 1주일간 병원에서 살면서 아버지를 본 것이 마지막이었다. 2학기 개학과 동시에 있었던 야영. 그곳에서 저녁을 해먹고 쉬던 나를 담임 선생님이 부르셨다. 왠지 불안했다. 집으로 가라고 하셨다. 올 것이 왔다는 생각에 하늘이 노래졌다. 집으로 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집에 도착하니 일가친척들이 모두 모여있었다. 동네 사람들도 전부 와 있었다. 나를 보자마자 고모와 어머니께서 우시기 시작하셨다. 방에 들어가니 이미 상황은 긑이 나 있었다. 무엇이 그리 맺히셨는지, 큰 아들을 못보고 가는 것이 그렇게 서운하셨는지 눈을 못감고 돌아가셨다. 눈을 감겨 드리고 그대로 욕실로 향해서 깨끗하게 씻고 3일간의 장례 절차를 마쳤다. 삼오제까지 지내고 학교로 돌아가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했다. 변함없이 수업시간에 만화책도 보고 딴 짓도 하고, 다른 사람들이 위로하면 괜찮다는 말로 대꾸했다. 

  나는 아버지를 그렇게 떠나 보낸 줄 알았다. 4년 뒤 러브레터를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런데 아니었다. 러브레터를 보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속으로 오겡끼데스까를 얼마나 많이 되뇌였는지 모른다. 비로소 나는 아버지를 떠나 보낼 수 있었다. 어머니는 그 후로 5년을 더 아버지를 붙잡고 사셨다. 돌아가신지 10년이 되어가지만 여전히 아버지를 붙잡고 사셨다.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셨지만 아버지의 옷가지들은 여전히 장롱에 보관되어 있었고 그 옷은 대학생이 된 내 몫이 되었다. 품은 작고 다리 길이는 길지만 그것들을 수선해서 입었다. 그러나 그것은 내 옷이 아니었기에 불편했다. 마치 아버지를 떠나보내지 못했던 우리 가족의 마음처럼. 

  우아한 거짓말을 읽고 서평을 쓰기 전에 참 많은 생각을 했다. 천지를 잃고(그것도 자살이라는 극단적으로 충격적인 방법을 통해서) 떠나보내지 못해 힘들어하는 가족들, 친구들의 이야기가 이 책의 기본 구조이다. "내일을 준비하던 천지가 오늘 죽었다"는 충격적인 말로 시작하는 이 책은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야 하는 아픔에 관한 기록이다. 아직 떠나보내지 못하고 보신각을 드나들며 수시로 천지를 떠내 보이는 엄마, 떠나보내기 위해 노력하고 화연을 붙잡는 만지, 천지라는 친구의 부재를 받아들이지 못하여 유령처럼 떠도는 화연, 천지를 원망하는 미라, 그런 미라와 만지 사이에서 힘들어하는 미란. 그들은 모두 천지의 예상치 못한 부재 때문에 힘들어 하고 방황한다. 아직 떠나보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여전히 이들에게 천지는 곁을 맴도는 유령과 같은 존재이다. 아직 오겡끼데스가를 진심을 담아 외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러면서도 하루하루 힘겨운 삶을 이어가기 위하여 오겡끼데스까라는 인삿말을 건넨다. 자기를 방어하기 위해 하는 진심이 담기지 않는 안부의 인사! 이것이 우아한 거짓말이다. 남에게 피해를 끼치기 위한 거짓말이 아닌 자기가 살아남기 위해 하는 거짓말. 

  살면서 이런 거짓말을 참 많이 한다. 잘 지내고 계시죠? 언제 한번 보죠. 언젠 한번 밥 먹죠. 언젠 한번...언제 한번...언제 한번...언제 한번이라는 말이 실현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적당히 넘기는 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언제 한번이라는 말을 남발하면서 살아간다. 마치 "나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나는 당신을 싫어하지 않아요, 나는 괜찮아요."라고 말하듯이. 매끄러운 사회 생활을 위해 언제 한번같은 우아한 거짓말을 하기 시작했을 때, 그 때가 우리는 어른이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 책은 성장 소설이 맞다. 비록 서글픈 현실이지만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한분이 더 떠올랐다. 나와 같은 나이의 아들을 잃고서(그것도 자살로) 힘들어 하셨던 그 분. 옆에서 위로해줘서 고맙다면서 옷 한벌 사주신 그 분. 그 분은 사랑하는 아들을 보낼 준비가 되셨을까? 절대로 화장하지 못하겠다고 버티던 그 분을 설득해서 화장하고 납골당에 봉안하게 했었는데. 몇 년 뒤 다시 뵜을 때 조금만 시간이 흐르면, 자기 부부가 죽기 전에 아들의 유골을 훌훌 뿌려서 자유롭게 해주시겠다고, 그게 둘째 아들에게 짐을 지우지 않는 길이라고 하셨는데. 그 후로 또 1년을 사는게 바빠서 연락도 하지 못하고 지냈다. 그래도 걱정이 되지 않는 것은 그 분은 그 분 나름대로 사랑하는 아들을 떠나 보낼 준비를 하고 계신 것 같아서이다. 언젠가 그 분도 우아한 거짓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아들에게 오겡기데스까를 외칠 수 있었으면 좋겠다. 

  ps.글샘님의 이벤트로 받게 된 책이다. 같은 리뷰어로서 관계를 맺게 되고 이렇게 책까지 받게 되었는데 그 책이 참 좋다. 글샘님께 감사들 드린다. 글샘님의 리뷰를 일부러 찾아 읽었는데 이 책이 그 분에게도 많은 위로가 되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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