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두의 작품이다.

몇개의 작품이 더 있는데, 페이퍼에 실으려니 옆으로 퍼져서 한 작품만 실었다. 

영화 <취화선>에서 오원 장승업의 그림들을 실제로 그린 '신출귀몰한 붓놀림'의 화가로 유명하단다.

이 사람이 올해 <소설화전>을 열어었나 보다. 우리나라에 유명한 소설을 그림으로 그려 화제를 낳았었나 보다. 그것도 이청준의 작품을 가지고 작업을 했는데, 나는 지난 달, 우연히 교보문고엘 들렸다가 거기서 발행하는 무가지 <책과 사람>이란 잡지를 집어오게 되었는데, 거기에 그를 취재한 것을 보고 안 것이다.

 오래 전 교보문고에서 배달 발행하는 책 소식에 관한 책을 모았었는데, 그것에 비하면 몇 배는 업그레이드된 판형에 내용도 꽤 읽을만한 것들이 짭짭하게 들어있다.

엊그제 은행에 볼 일도 볼겸 굳이 교보문고 가서 11월호를 덥섞 집어왔다.

이 김선두를 취재한 글을 읽고 싶으신 분들은, 

지금,  http://www.kyobobook.co.kr/main.jsp 이 곳으로 가서 <사람과 책> 10월 호를 클릭해서 보시라.

사실 퍼 올려고 여러가지로 시도를 해 봤는데, 그쪽에서 복사를 못하도록 해 놓은 것 같아 퍼오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유익하다. 적어도 책에 관한 잡지가 이 정도는 되야지 하는 만족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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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르바나 2004-11-06 1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잡지하면 '출판저널'이 생각납니다.

창간호부터 열심히 보았지요. 그 화려했던 편집위원들.

이것 보는 재미로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아꼈는데. 아쉽게도 그만...

한 동안의 내홍끝에,

다른 주체가 재출판한다고 한 권 보내왔길래 보고 관심을 끊었습니다.

출판저널 하나 살리지 못하는 문화풍토가 참 아쉬웠지요.

stella.K 2004-11-06 1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뀌고나서 재미 없었나 보죠? 저도 책잡지는 그다지 기대가 없어요. 근데 이건 오랜만에 봐서그런지 꽤 괜찮더라구요. 교보 나가실 일 있으시면 한번 보세요.^^
 

26세에 옷벗는 일은 낡은 습관 16세의 그것은 가혹한 폭력

김광일기자 kikim@chosun.com

▲ 앙테크리스타
아멜리 노통브,장편소설
문학세계사 | 184쪽 | 8000원
첫키스는 날카로운 것도 달콤한 것도 아니다. 그저 어리둥절한 것이다. 그 나이에 이르면 우리는 묻게 된다. 악마를 사랑하는 일이 가능할까. 열여섯 먹은 깜찍한 소녀를 사랑하는 일, 그 속에 들어 있는 작은 악마를 사랑하는 일이 가능할까.

이 소설은 대학교 1학년이 된 열여섯 소녀 두 명이 친구로 만나고, 한 방을 쓰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적고 있다. 화자 주인공은 블랑슈라는 내성적이고 소심한 아이고, 그녀가 만나는 친구 크리스타는 외향적이고 매력적이며 모든 이들에게 인기가 높은 소녀다. 평생 친구를 사귀어 보지 못하던 블랑슈가 크리스타를 집에 데리고 오자 부모들이 반색한다.

‘첫날, 그녀가 웃는 걸 보았다. 순간, 나는 그녀가 알고 싶어졌다’(5쪽)라는 첫 문장으로 시작되는 이 소설은 맨 뒤에 깜짝 놀랄만한 반전을 준비하고 있다. 단순한 줄거리의 소품(小品)으로 인간의 본성을 탐색하는 작업에서 작가는 경묘한 솜씨를 보여준다.

이 소설에는 앙드레 지드의 ‘탕자 돌아오다’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일종의 가출 신드롬과 탕자 콤플렉스, 혹은 최근에 한국에서 개봉된 적이 있는 ‘팻걸’이라는 영화를 느끼게 해준다. 아직 솜털이 거세어지지 않은 나이의 어린 인간들은 어떻게 해서 자신의 영혼을 단련시키는가.

첫 대목에서부터 블랑슈는 크리스타와 자신의 방에서 싸운다. 블랑슈의 옷장을 구경한 크리스타는 먼저 홀랑 옷을 벗고 그 가운데 차이나식 이브닝 드레스를 입어 보인 다음 블랑슈에게도 옷을 완전히 벗고 드레스를 입어 보라고 권한다. 블랑슈가 망설이자 거의 강제적으로 옷을 벗기려 든다. 이때 블랑슈가 이렇게 생각한다. ‘여섯 살에는 옷 벗는 일이 아무것도 아니다. 스물여섯 살에 옷 벗는 일은 이미 낡은 습관이다. 열여섯 살에 옷 벗는 일은 가혹한 폭력행위다.’


▲ ※벨기에 출신으로 현재 프랑스 에서 활동중인소설가 아멜리노통브(Am lieNothomb) 는그동안 국내에서 프랑스식 발음인'노통'으로 소개됐지만 벨기에식으로 읽으면'노통브'가 된다.
여기서 ‘옷을 벗는다’는 것은 매우 일관된 테마를 형성하고 있다. 성숙으로 향하는 욕망, 그것을 일깨워주는 계기, 그 계기는 천사가 아니라 악마가 준비해주고 있으며, 그 욕망의 이면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고, 이성(異性)을 유혹하려는 복잡한 심리가 발달되어 간다는 측면이다. 작가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몸은 세 가지 미적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데, ‘힘, 우아한 기품, 충만함이 그것’이다.

‘몽상할 장소 없이는 살 수 없는’ 블랑슈는 크리스타에게 점차 몰린다. 공간을 빼앗기고, 애정을 몰수당하고, 그는 친구 관계조차 모두 크리스타에게 통제된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블랑슈는 크리스타에게 반격할 수 있는 기회를 엿보게 되고, 그녀의 이중성을 철저히 밝혀낼 수 있는 전기를 맞게 된다. ‘색채의 나라에 떨어진 장님처럼’ 어리둥절하던 그녀가 점차로 세상을 알아가게 되고, 물정에 빠삭한 크리스타의 생활력 이면에는 엄청난 거짓이 있었다는 것을 밝혀낸다. 그리고 그 뒤에 몰려오는 후폭풍을 멋있게 이겨낸다.

아르셰(arch?e)라는 단어는 ‘화살이 미치는 사정거리’를 말한다. 블랑슈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다. ‘활의 욕망이 제아무리 강렬하다 해도 화살이 날아갈 수 있는 거리의 끝이 있기 마련이기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의연한 실패….’(93쪽)

이 소품은 특히 곳곳에 사금(砂金)처럼 번쩍이고 있는 작가의 재치, 표현력, 그리고 생의 순간을 포착하는 날쌘 손길을 느낄 수 있어서 독서의 기쁨이 두 배다. 주인공의 심리 묘사는 한국 작가들의 그것과 전혀 다른 양상을 보여주기도 한다. 부모와 크리스타를 살해하고 싶다는 욕망과 이중 삼중으로 꼬이고 튀는 심리의 비탈면이 독서의 긴장에 감칠맛을 준다.

2시간 거리의 열차를 타고 혼자서 산사(山寺) 구경을 하러 가실 분들께 들고 가시라고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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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4-11-06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여자에 관해 말들이 많다. 한쪽에선 좋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고, 한쪽에선 뭐 이러냐고 하는 사람이 있고. 누구의 말이 옳은지 알고 싶어 어제 <살인자의 건강법>을 주문했다. 아마 모르긴 해도 내 타입은 아닌성 싶긴하다. 나머지는 읽어 보고...


진/우맘 2004-11-06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사와 노통이라...잘 안 어울릴 것 같은데.^^

그나저나, 와우, 노통의 사진은 항상 요거 하난거야? 하고 궁금했는데, 다른 사진을 또 구경하게 되어 좋아요.^^

진/우맘 2004-11-06 1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 한 사람이 좋기도 하고 싫기도 하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어요. 그게 바로 접니다. ㅡ.ㅡ

좋건 싫건, 이상하게 신경씌여 간과할 수 없게 만드는, 묘한 매력을 가진 작가예요. 살인자의 건강법엔, 노통 특유의 독설로 책과 작가에 대한 생각이 많이 펼쳐져 있으니, 책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누구나 즐겁게 읽을 수 있으리라 봅니다.^^

stella.K 2004-11-06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진우맘님, 제가 어제 알라딘에 신청한 게 산사와 노통의 책이걸랑요. 이국 사람이 쓴 이국적충의 소설이란 점에서 끌려서...이를테면 산사는 중국인이지만 프랑스 영향을 많이 받았고, 노통은 일본에서 자란 줄 알고 있어요. 이들의 문체가 어떻게 다를지 궁금하거든요.^^

진/우맘 2004-11-06 1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사? 그런 작가도 있어요?

제가 말한 '산사'는, 기자가 마지막 줄에 쓴 저거.....'2시간 기차 타고 山寺 구경가실 때...' 저건디.^^;;;;

stella.K 2004-11-06 1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흥~그거였구나. 전 요즘 <측천무후> 쓴 그 샨사를 생각했어요. 오버했다는...ㅜ.ㅜ

진/우맘 2004-11-06 2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은 제가 모르는 작가를 너무 많이 아세요. 흐흑....
 
이름 뒤에 숨은 사랑
줌파 라히리 지음, 박상미 옮김 / 마음산책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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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마태우스님이 주최한 번개모임에 갔을 때, 난 참 묘한 경험을 했더랬다. 그것은 일상적인 나의 이름을 두고 온라인에서 쓰는 닉네임으로 불리워진 것이다. 이것은 나만이 경험한 것은 아니고, 거기 못였던 모든 서재인들이 본명으로는 누가 누군지 모르겠고, 온라인 상에서의 닉네임으로 불리워져야 누가 누군지를 파악하는 것이다. 나도 그랬지만, 오프 라인에서 조차 닉네임으로 불리워져야 한다는 그 사실이 익숙치 않아 서재인들 서로 어색해 하는 것이 역력했음을 엿볼 수가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또 그것에 금방 익숙해져서 닉네임으로 서로를 불렀다. 아마도 알라딘에서 나의 본명이 불리워진다면 이것 또한 꽤 어색했을 것 같다.

이름이란 상당히 중요하다는 것을 다들 공감하는 바일 것이다. 하지만 어떤 사회 또는 어느 장소에서 어떻게불리워지느냐에 따라 자신이 갖는 자아 정체감은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비교적 지극히 평범하고 정상적인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가끔 정말 이런 이름이 존재할까 싶은 이름이나, 어떻게 저런 이름을...하는 혐오스러운 이름의 소유자를 볼 때, 나는 그의 부모가 어떠한 사람일까 궁금해질 때가 있다. 이름은 평생 자신을 따라다니는 것인데 어떻게 자식한테 그런 이름을 지어줄 수 있을까 놀라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도, 아버지가 작가 고골리를 좋아하고 인도에서는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이름을 바로 지어주는 것이 아니라 한동안 고골리로 불리웠던 아들에 관한 이야기다. 아들은 고골리란 이름을 어렸을 땐 좋아해서 그 이름으로 불리워지는 걸 좋아했지만 커서는 그 이름이 싫어 '니킬'이라는 본래의 인도식 이름을 부여 받는다. 하지만 그러면서 늘 그렇듯 미국 내에서의 이민족으로서 겪는 자아정체의 혼란을 작가 다름의 시선으로 밀도있게 그려나간다.

그런데 이 소설이 인도인이 쓴 인도 소설이냐라고 했을 때 인도 작가가 쓴 소설은 맞지만 인도 소설이라고는 역시 할 수 없을 것 같다. 물론 중간 중간에 인도인의 풍습이나 주인공의 부모가 인도를 그리워 하는 건 보여지지만 작가는 역시 인도계 미국인인 것처럼, 지극히 미국풍이란 느낌을 내내 받았다.

미국 문학을 가리켜 '거리의 문학'이라고 누군가 말을 했는데, 역시 나는 그 말에 동의한다. 그래서 어찌보면 뿌리가 없어뵈고 또 어찌보면 그것 자체가 뿌리인지도 모르겠다. 모험과 활동성은 그려지지만 깊은 성찰의 의미는 그리 드러나지 않아 보인다.

나는 가끔 미국의 허리우드 영화와 미국 문학이 같아 보인다는 느낌을 배제할 수가 없다. 그래서 이미 영화화된 작품을 굳이 소설로 다시 읽고 싶은 생각이 안든다. 결국 미국 소설은 참 영화적이란 생각이 든다.

미국 문학을 왜 거리의 문학이라고 했을까? 거리는 머물기 위해 나 있는 것은 아니다. 끊임없이 어디론가 가야만 하는 것이다. 가다보면 미로를 경험하기도 하겠지. 미국인의 인생 또한 그러하리라. 미국 그것도 중심부라고하는 뉴욕이 최첨단 문화의 메카라는 것은 굳이 뉴욕을 가 보지 않아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나름대로 이민족으로서 주류사회에 정착한 사람일지라도 그들은 자아 정체의 혼란을 겪는다.

현대 문학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성(性)인데, 이 작품에서도 주인공과 그의 아내가 여러 사람과의 섹스를 하는 과정이 나온다. 심지어는 주인공 니킬의 아내 모슈미는 결혼해서도 다른 남자와 섹스를 해서 결국 결혼이 파경에 이르게 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데, 현대 문학에서의 담론은 역시 자이 정체성의 혼란과 성인 것 같고,  이 작품 역시 그것을 굳이 비껴가지 않고 있다.  자아의 모호성이 성의 탐닉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

<이름 뒤에 숨은 사랑>이란 소설 제목에서 나는 나름대로 굉장한 의미를 담고 있는듯한 느낌을 받았었다. 하지만 뭔가 이름에 그리 값하지 못하고 미진한 아쉬움이 남는 소설인 것 같다.

인도 작가가 썼다고 해서 그나름의 독특함이 있을 줄 알았는데, 지극히 미국적이었다고 한다면, 작가는 그다지 소설적 모험을 즐겨하지 않던가, 아니면 떠나 온 인도를 잊고 있는 건 아닌가란 의구심도 가져본다.

그리고 이 만한 작품에 뉴욕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읽는 소설이란 수식어가 나로선 그다지 탐탁지가 않다. 이를테면 이 소설을 완독한지 얼마 안되는 나로선, '뉴요커들 별것 아니네' 이거나 내가 이런 풍의 소설을 그다지 즐겨하지 않던가, 둘 중의 하나일 것이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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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져 2004-11-08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작가의 축복받은 집 을 읽으면서 느꼈던 건 미국과 인도의 경계에 들어있는 작가의 모습이었어요. 미국 사회에 들어가고 싶어하는 열망도 보였지만, 이국땅에서 자신의 기원을 잃고 싶지 않은 이면이 아닐까 해요. 인도를 알리고 싶은 욕구도 있겠지요... 요즘엔 장편소설을 잘 읽지 않았어요. 나중에 읽어봐야겠네요. 추천합니다, 스텔라님...!

stella.K 2004-11-08 17: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고, 못 쓴 글인데...고마워요. 사실 리뷰 쓰고 반응 없으면 좀 민망하더라구요. 그래도 플레져님이 이 리뷰를 빛나게 해 주셨네요.

이 책 전에 판다님한테 싸게 산 거예요. 알라딘엔 참 좋은 분들 많아요. 그죠?^^

icaru 2004-12-30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에 대한 자료를 찾아볼려고 검색했는데~~ 님의 훌륭한 리뷰가 있었네요~~!!

이 소설...인도판 '영원한 이방인'인가봐요.. 음~!

stella.K 2004-12-30 1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고...복순 언니, 이미 한참 전에 쓴 리뷰라 이젠 읽는 사람이 있을까 싶었는데 님 같은 분이 계셔서 반갑군요. 근데 그리 잘 쓴 리뷰도 아닌데...작품은 그만 그만한 것 같아요. 물론 님이 읽으면 다른 느낌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스포츠조선 김소라기자


▲ 주홍글씨
탄탄한 원작이 있어 영화가 두배 재미있다. 소설을 토대로 만든 작품들이 하반기 극장가를 점령했다.

지난달 8일 개봉한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를 비롯 '주홍글씨',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오는 12일에 개봉하는 '모터싸이클 다이어리', 12월 10일 개봉을 앞둔 '브리짓 존스의 일기:열정과 애정' 등이 히트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들.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는 역대 일본 소설 판매 1위를 기록한 가타야마 쿄이치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했다. 화제작 '주홍글씨'는 김영하의 '거울에 대한 명상'과 '사진관 살인사건'을 각색한 작품.

또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은 일본 여류작가 타나베 세이코의 단편소설을 각색했다.

'모터싸이클 다이어리'는 체 게바라가 집필한 동명의 회고록에서 시작한 작품. 영화 속 내레이션을 통해 체 게바라의 실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체 게바라의 회고록 외에도 알베르토 베르나도의 여행일지 '체와 함께 한 남미 여행기'와 체 게바라의 '나의 첫 대여행'을 참고했다.


▲ 모터싸이클 다이어리
전편에 이어 브리짓 존스의 좌충우돌 연애담이 펼쳐지는 '브리짓 존스의 일기:열정과 애정' 역시 헬렌 필딩의 베스트셀러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소설을 영화화하는 움직임은 최근 두드러지고 있는 현상. 이미 책을 통해 한차례 검증을 받은 탄탄한 이야기 구조를 토대로 좀더 완성도 있는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게 제작자들의 설명이다.

원작과 비교해 가며 작품을 감상해 보는 것도 이 가을 또다른 영화 감상 포인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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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멋진 판타지 - 다른 세계를 꿈꾸는 치열함
멋진 판타지 - 굴렁쇠생각 1
김서정 지음 / 도서출판 굴렁쇠 / 2002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문학의 위기를 말한지는 이미 오래되었다. 영상의 시대를 맞이하여 어떤 평자들은 소설은 이제 영상이 흉내낼 수 없는 방식으로 글을 쓰라고 말한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드는 생각은 그래서야 문학은 더욱 위기를 맞이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다. 이런 류의 주장들 - 문학은 영상매체가 따라올 수 없는 표현, 보다 복잡한 심리묘사와 난해한 이야기 구조를 지니는 방식으로 문학성을 고수해야 한다 - 은 어제오늘 나온 것은 아니다. 결국 이런 류의 주장은 모더니즘이 일찌기 주장했던 바이기도 하다. 그런 주장대로라면 앞으로의 문학은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소수의 사람들이 즐기는 고급한 예술로 점차 사멸해가는 장르가 될 수밖에 없다. 마치 서구의 고전음악이라고 불리는 장르가 현재 일정한 한계에 봉착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이것을 문학의 비타협적인 속성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문학이 세상과 불화한다는 것은 단순히 정치적(이때의 정치적이란 말의 의미는 현실정치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주류권력과 불화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뤼시엥 골드만은 "소설 사회학을 위하여"에서 소설을 "타락한 사회에서 가장 타락한 방식으로 진실을 추구하는 서사"라고 정의한 바 있다. 여기서 핵심은 "타락한 사회에서의 가장 타락한 방식"이 무엇인가?를 묻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진실을 추구하는 서사"가 무엇인가?를 묻는 일이다. 소설 문학은 이미 태생적으로 타락한 사회에 적응하는 방식으로 나타난 장르이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은 여전히 "진실을 추구하는 서사"로서의 위치를 놓치지 않는다.

문학의 위기란 결국 엄살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소설은 여전히 타락할 건덕지를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세상을 타락한 사회라고 인식한다면 할수록 소설은 그 가운데서도 가장 타락한 방식의 서사이므로 앞으로도 도 많이 추락할 수 있다. 그렇다면 소설은 어떻게 타락할 것인가? 그 방식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이 욕망의 무한 질주를 앞서는 서사를 채택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정반대의 길로 달려가는 것이다. 그 정반대의 길에서 만날 수 있는 장르 중 하나로 나는 판타지를 꼽고 싶다. 판타지하면 최근 성공리에 시리즈를 마감한 톨킨의 판타지 소설 "반지의 제왕"을 먼저 떠올릴 수 있을 텐데, 이 소설 역시 출간 이후 금세기 이내 영화화되기는 어렵다는 평을 들었던 작품이다. 결국 세기를 넘겨 영화화에 성공했다.

판타지에 관한 책들을 찾다보니 주로 아동문학과 관련한 분야에서 세 권의 책을 보게 되었는데, 어린이 문학평론가인 김서정이 번역한 마리나 니콜라예바(Maria Nikolajeva)의 "용의 아이들"과 김서정 자신의 책 "멋진 판타지", 이재복의 "판타지동화세계"가 그것들이다. 앞서 말한 "용의 아이들"은 어린이들이 주독서대상인 판타지동화에 대한 기호학적인 접근을 통해 어린이문학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넓히고 있다. 무엇보다 국내에 제대로 된 아동문학 개론서가 없는 현실이고 보면 "용의 아이들"이 지니고 있는 가치는 더욱 높아진다. 이 책은 그런 한국적 현실에 꼭 필요한 책이면서도 한국적 현실 자체는 누락되어 있다는 아쉬움을 남긴다. 한국의 어린이문학 현실에 필요한 책이지만, 한국의 어린이문학은 언급되지 않는다. 이에 대해서는 차차 이야기할 기회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김서정의 "멋진 판타지"는 '어린이문학평론집'이라는 부제를 달고 '굴렁쇠'에서 출간되었다. 이 책은 전체가 3부의 구조로 꾸며져 있는데, 제1부 '판타지는 멋있다'를 통해 판타지란 무엇인가를 규정하고 있다. 판타지란 그리스말에서 나왔는데, '눈에 보이도록 하는 것', '현실로는 나타나지 않는 것을, 상상력의 힘을 빌어 어떤 특정한 모양으로 바꾸어 놓는 활동이나 힘 또는 그 결과'라고 한다. 저자에 따르면 판타지는 '현실 세계의 법칙을 깨뜨리는 이야기'이지만 이런 단순한 정의보다 중요한 것은 그런 요소들이 어떻게 '다른 세계'에 대한 생각을 끌어낼 수 있는가에 촛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이 세계와는 다른 또 하나의 세계, 다른 사람은 생각지도 못했던 나만의 세계를 뛰어난 상상력으로 만들어 내놓아, 읽는 이를 놀라고 감탄하게 하는 이야기" 그것이 바로 판타지라고 말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의문을 던진다. 전래동화도 판타지인가? 저자는 "전래동화는 이 세상이, 사람들의 이성으로 모두 설명할 수 있는 곳은 아니라고 말한다. 또 소박한 윤리, 도덕으로 단순하게 살아갈 수 있는 곳도 아니라고 말한다. 설명할 수 없고 받아들이기 힘든 삶도 모두 나름대로 귀한 것이라는 사실을, 논리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들려주는 것이 전래동화"라고 말한다. 매우 재미있는 해석이고, 공감할 수 있는 정의였다. 이 정의를 통해 우리는 전래동화 역시 판타지이며 훌륭한 전래동화, 판타지는 현실세계와는 다른 세계를 이야기하지만 결코 현실과 괴리된 꿈같기만 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속성을 알 수 있다. 저자는 제1부에서 판타지의 여러 덕목들을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제2부 '잊혀지지 않는 이야기'에서 저자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서구의 동화들 - 단순히 동화라고 규정할 수 없는 철학우화들이라 할 수 있는 것들 - 을 집중적으로 다룬다. 미하엘 엔데, 필리파 피어스, 루이스 캐럴, 엘윈 브룩스 화이트, 앨런 알렉산더 밀른,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등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으며(위엔 언급된 작가들 이외에도 많으나 편의상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만 언급) 뛰어난 작품들을 발표한 이들이다. 이들 가운데 특히 필리파 피어스의 "한밤중 톰의 정원에서"는 특이한 판타지이다. "반지의 제왕"처럼 선과 악 사이의 처절한 전투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기이한 캐릭터들이 줄이어 나오지도 않는다. 도리어 아주 평범한 일상적인 풍경들 속에서 벌어지는 현실이 어떻게 판타지가 될 수 있을까? 저자는 그것을 "시간"이라고 말한다. 한밤중 톰은 시계를 바라보며 환상,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판타지의 세계로 들어간다. 영원할 것 같은 어린 시절은 일순간의 꿈과 같다. 한 번 흘러간 시간은 영원히 되돌릴 수 없다는 진부하기 짝이없는 교훈을 필리파 피어스는 짐짓 근엄한 표정으로 재미란 설탕가루에 버무려 준다.

다른 한 편으로 내가 이 책에서 가장 재미있게 읽은 부분은 린드그렌의 "삐삐 롱스타킹"에 대한 비평 '내 이름은 꼬마 혁명가'이다. 그것이 한국사회만의 특징인지 아니면 전세계 모든 어른들이 그렇게 사는지 모르겠지만, 어려서는 부모, 가족의 참견, 자라서는 학교, 사회의 참견을 받으며 살아간다. 아이가 어른이 되길 꿈꾸는 것은 더이상 부모의 참견을 받고 싶지 않다는, 어른이 되면 어린이가 할 수 없는 뭔가 그럴 듯한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라는 환상 때문이다. 어른이 되면 하고 싶은 일도 많지만, 할 수 있는 일도 참 많을 것이라는 환상은 어른이 되고자 하는 어린이의 마음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러나 막상 어른이 되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기껏해야 눈치를 안보고 담배를 피울 수 있다거나, 술을 마신다거나 하는 것들에 불과하다. 그나마를 즐기기 위해 어른이 된다는 건 참 비극이다. 그래서 어른들은 다시 어린이가 되고 싶어진다. 작은 호기심에 하루가 가는 줄 몰랐던 시절, 떠 가는 구름을 보며 시시각각으로 흘러가는 구름을 온종일 쳐다보던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삐삐'는 어른과 아이의 환상을 한 몸에 버무린 존재다. 삐삐는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한다는 점에서 아이들에게는 어른이고, 돈이 곧 자유라는 어른들의 환상 속에서 그는 돈 많은 어린이다. 아이 입장에서도, 어른 입장에서도 삐삐는 부러움을 한 몸에 받을 만한 존재다. 삐삐가 반권위적이란 점만 놓고 보면 그는 완벽한 아나키스트이다. 삐삐의 뒤죽박죽 별장에서는 세상의 권위, 예절, 질서, 체제 따위는 온통 뒤죽박죽이 되어버린다. 그런데 삐삐가 그런 전복적인 자유를 즐길 수 있는 요소들은 무엇인가? 그것은 말을 번쩍 들만큼 엄청난 힘과 해적 선장 아버지가 물려준 금화들, 그리고 무엇보다 천진난만하여 어른들을 꼼짝 못하게 만드는 말의 힘이다. 그렇다고 삐삐가 무척 논리적인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삐삐는 논리적이라기 보다는 어린이기 때문에 보이는대로 솔직하게 말하는 것이다. 어른들은 논리를 가장하지만 그것이 진실은 아니다. 세상은 논리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란 사실을 어른들은 이미 내면화하고 있는 탓에 그들 자신의 논리가 천진난만한(?) 삐삐에게는 통하지 않는 것이다.

제3부 '독일동화문학과 판타지'는 208쪽에 불과한 얇고 작은 이 책에서 가장 작은 쪽수를 차지하고 있지만, 가장 이론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이 부분이 이 책의 전체에서 가장 활력이 없어 보인다. 게다가 저자가 언급하고 있는 부분들 - 독일동화문학은 낭만주의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으며, 독일 낭만주의는 독일 정신의 한 유산으로 인식되고 있다. - 에서 나는 한 가지 의문아닌 의문이 생겨났다. 그것은 판타지 문학 전체에 대한 것과도 연결된다. 전래동화란 개념, 전래동화가 본격적으로 채집되기 시작한 것은 고전주의 시대를 거쳐 낭만주의에 이르러서다. 낭만주의란 사조는 결국 민족주의와 깊은 연관을 맺게 된다. 히틀러가 바그너의 "니벨룽겐의 반지"를 연모한 것처럼 말이다. 낭만주의의 자기 파괴적 속성은 반합리주의와 연결되고 이는 다시 파시즘과 연결된다. 그런데 저자는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거의 전혀 연구가 없어 보인다.

앞서 판타지 문학이 지닌 덕목들 - 다른 세계에 대한 열린 상상력과 설명할 수 없고 받아들이기 힘든 삶도 모두 나름대로 귀한 것이라는 사실, 교훈성과 전복적인 기운들 - 을 일거에 무화시켜 버릴 수도 있는데, 이 부분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에서 나는 무척 아쉬움을 느꼈다. "과학에는 국경이 없지만 과학자에게는 국경이 있다"는 말은 이중의 소외를 말하는 것이다. 하나는 과학, 과학연구에는 그 어떤 제약도 주어질 수 없는 초월적인 것이란 의미에서의 소외이고(이는 다시 말해 과학은 시민사회의 도덕률이나 윤리에서 자유로운 어떤 것이라는 위험한 규정이 된다), 그런 과학자들조차 국가 이데올로기에는 종속된 존재여야 한다는, 즉 국가구조의 하부에 속해야 한다는 규정을 통한 소외를 암시하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를 판타지 문학에 대입시키면 판타지에는 국경이 없으나 판타지 문학에는 국경이 있다는 말이 될지 모르겠다.

옛이야기는 동화의 어머니라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판타지 문학은 독일동화문학의 예에서 알 수 있듯 전래동화와 깊은 연관이 있으며 이는 다시 민족과 연결된다. 판타지문학이 '다른 세계'를 다룬다 하더라도 현실과 괴리된 이야기일 수 없는 것처럼 판타지 문학의 태생 또한 민족과 결부되지 않을 수 없다. 서구의 판타지 문학이 한국 혹은 동양의 판타지 문학과는 다를 수밖에 없는 것처럼 말이다.톨킨의 "반지의 제왕"에 대한 여러 해석들 가운데 하나는 그가 경험한 세계대전에 대한 것이다. "반지의 제왕"에서 가장 두드러진 암시는 모르도르의 화산에서도 알 수 있듯 '불'이다. 세계을 일순간에 잿더미로  만들 수 있는 불에 대한 암시가 대량폭격과 소이탄, 핵에 의한 공포를 말하는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해리 포터" 시리즈가 판타지이면서 동시에 다른 세계에서조차 자본주의 방식의 마법 - 가령, 님버스제 최신 모델의 빗자루 - 를 표현하는 것 이 또한 앞으로 판타지 문학이 풀어야 할 숙제일지 모르겠다. 판타지 문학이 과거 낭만주의 속에서 민족적 뿌리를 찾는 시도로서 행해진 전래동화 채집이라는 민족적 뿌리를 거부할 필요도, 거부할 수도 없지만 가장 순수한 듯 보이는 판타지 문학 역시 타락한 현실과의 치열한 대결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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