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세에 옷벗는 일은 낡은 습관 16세의 그것은 가혹한 폭력
▲ 앙테크리스타 아멜리 노통브,장편소설 문학세계사 | 184쪽 | 8000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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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키스는 날카로운 것도 달콤한 것도 아니다. 그저 어리둥절한 것이다. 그 나이에 이르면 우리는 묻게 된다. 악마를 사랑하는 일이 가능할까. 열여섯 먹은 깜찍한 소녀를 사랑하는 일, 그 속에 들어 있는 작은 악마를 사랑하는 일이 가능할까.
이 소설은 대학교 1학년이 된 열여섯 소녀 두 명이 친구로 만나고, 한 방을 쓰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적고 있다. 화자 주인공은 블랑슈라는 내성적이고 소심한 아이고, 그녀가 만나는 친구 크리스타는 외향적이고 매력적이며 모든 이들에게 인기가 높은 소녀다. 평생 친구를 사귀어 보지 못하던 블랑슈가 크리스타를 집에 데리고 오자 부모들이 반색한다.
‘첫날, 그녀가 웃는 걸 보았다. 순간, 나는 그녀가 알고 싶어졌다’(5쪽)라는 첫 문장으로 시작되는 이 소설은 맨 뒤에 깜짝 놀랄만한 반전을 준비하고 있다. 단순한 줄거리의 소품(小品)으로 인간의 본성을 탐색하는 작업에서 작가는 경묘한 솜씨를 보여준다.
이 소설에는 앙드레 지드의 ‘탕자 돌아오다’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일종의 가출 신드롬과 탕자 콤플렉스, 혹은 최근에 한국에서 개봉된 적이 있는 ‘팻걸’이라는 영화를 느끼게 해준다. 아직 솜털이 거세어지지 않은 나이의 어린 인간들은 어떻게 해서 자신의 영혼을 단련시키는가.
첫 대목에서부터 블랑슈는 크리스타와 자신의 방에서 싸운다. 블랑슈의 옷장을 구경한 크리스타는 먼저 홀랑 옷을 벗고 그 가운데 차이나식 이브닝 드레스를 입어 보인 다음 블랑슈에게도 옷을 완전히 벗고 드레스를 입어 보라고 권한다. 블랑슈가 망설이자 거의 강제적으로 옷을 벗기려 든다. 이때 블랑슈가 이렇게 생각한다. ‘여섯 살에는 옷 벗는 일이 아무것도 아니다. 스물여섯 살에 옷 벗는 일은 이미 낡은 습관이다. 열여섯 살에 옷 벗는 일은 가혹한 폭력행위다.’

▲ ※벨기에 출신으로 현재 프랑스 에서 활동중인소설가 아멜리노통브(Am lieNothomb) 는그동안 국내에서 프랑스식 발음인'노통'으로 소개됐지만 벨기에식으로 읽으면'노통브'가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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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옷을 벗는다’는 것은 매우 일관된 테마를 형성하고 있다. 성숙으로 향하는 욕망, 그것을 일깨워주는 계기, 그 계기는 천사가 아니라 악마가 준비해주고 있으며, 그 욕망의 이면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고, 이성(異性)을 유혹하려는 복잡한 심리가 발달되어 간다는 측면이다. 작가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몸은 세 가지 미적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데, ‘힘, 우아한 기품, 충만함이 그것’이다.
‘몽상할 장소 없이는 살 수 없는’ 블랑슈는 크리스타에게 점차 몰린다. 공간을 빼앗기고, 애정을 몰수당하고, 그는 친구 관계조차 모두 크리스타에게 통제된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블랑슈는 크리스타에게 반격할 수 있는 기회를 엿보게 되고, 그녀의 이중성을 철저히 밝혀낼 수 있는 전기를 맞게 된다. ‘색채의 나라에 떨어진 장님처럼’ 어리둥절하던 그녀가 점차로 세상을 알아가게 되고, 물정에 빠삭한 크리스타의 생활력 이면에는 엄청난 거짓이 있었다는 것을 밝혀낸다. 그리고 그 뒤에 몰려오는 후폭풍을 멋있게 이겨낸다.
아르셰(arch?e)라는 단어는 ‘화살이 미치는 사정거리’를 말한다. 블랑슈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다. ‘활의 욕망이 제아무리 강렬하다 해도 화살이 날아갈 수 있는 거리의 끝이 있기 마련이기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의연한 실패….’(93쪽)
이 소품은 특히 곳곳에 사금(砂金)처럼 번쩍이고 있는 작가의 재치, 표현력, 그리고 생의 순간을 포착하는 날쌘 손길을 느낄 수 있어서 독서의 기쁨이 두 배다. 주인공의 심리 묘사는 한국 작가들의 그것과 전혀 다른 양상을 보여주기도 한다. 부모와 크리스타를 살해하고 싶다는 욕망과 이중 삼중으로 꼬이고 튀는 심리의 비탈면이 독서의 긴장에 감칠맛을 준다.
2시간 거리의 열차를 타고 혼자서 산사(山寺) 구경을 하러 가실 분들께 들고 가시라고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