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한쪽 눈을 뜨다 문학동네 청소년 7
은이정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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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 전, 어떤 일 때문에 한 중학교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렇게 중학교를 방문하기는 정말이지 처음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때  내가 느꼈던 당혹감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것은 바로 책상 때문이었다.    

책상이 좀 낡기도 했지만 작은 듯도했다.  성인인 내가 보기에 작아 보이는 책상이 과연 아이들에겐 맞는 것인지? 아니면 아이들도 작다고 생각하는데 생긴 게 그 모양이니 별 수 없이 쓰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전자라면 상관이 없는 일이다. 하지만 후자쪽이라면 다소 문제가 있어 보였다.  그러면서 또 하나 드는 생각은, 내 중학시절 썼던 책상과 의자를 나는 어떻게 느꼈던 걸까? 하는 거였다. 그땐 나름 크게 느껴졌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새삼   '겨우 요거였어?' 하며 오히려 실망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만큼 같은 물건이라도 그 느낌이 다르다는 것이다.  요는,  아이들에게 맞지 않을 것만 같은 책상은 교육의 문제점을 상징적으로 반영하는 것일 것이며, 나는 그 시절 학교를 그저 두려움의 대상으로만 생각했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현대식 학교가 생긴이래, 교육은 한번도 사람에게 맞춘 적이 없다. 오히려 사람이 교육에 맞추어졌다. 그래서 벽돌공장에서 규격에 맞혀 벽돌이 찍혀 나오듯, 학교는 그렇게 규격에 맞는 인간만을 만들어 세상으로 내보냈다. 그 규격에 맞는 인간이란, 즉 세상을 자유자제로 유영할 수 있는 소위 말하는 우성인자이거나, 적어도 세상에 도태되지 않고 살아남을 인간을 의미한다.  학교는 작은 사회다. 여기서 잘 살아남는 자가 사회에서도 잘 살아남을 것이고, 여기서 도태되는 자가 사회에서도 도태될 확률이 높다. 즉 잉여인간. 루저가 되는 것이다.   

작가가 영섭의 시각으로 학교, 특히 교실을 야생의 사바나로 설정한 건 적절한 설정같다. 그리고 영섭이 이야기가 진행되는 내내 자신을 변신이 가능한 동물로 생각하는 건 씁쓸하지만 공감한다. 이는 어찌보면 그렇게 생각하므로 자신을 숨기려는 일종의 자폐적 성향 같기도 하다.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이 정글같은 교실에서 살아 남기란 쉽지 않을테니. 물론 그것은 일종의 자기방어적 사고일텐데, 일견 이해가 가면서도 역시 이런 식으로 자기 자신을 숨기는 영섭에게 씁쓸한 연민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랬던만큼 내가 어떤 식으로든 이 작품에 감정이입을 하고 있었다는 말이 될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기시감처럼 사춘기 시절, 그것도 중학시절과 맞닥트려질 수 밖에없었다. 그때 난 영섭이만큼도 영리하지도 못했다. 영섭은 그래도 학교를 사바나의 세계로라도 표현할 수 있었지, 하지만 난 도무지 이 학교라는 곳을 무엇으로 바라봐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이질적인 블랙홀 같은 곳이다가도, 그럭저럭 인간이 정붙이고 살만한 곳이란 생각을 하루에도 몇번씩 되풀이 해 가며 살았던 것 같다.   

분명 이 학교에서 살아남지 못하면 다른 어떤 곳에서도 살아남지 못할텐데, 나는 아침에 눈만 뜨면 학교 갈 일이 끔찍했고, 무사히 학교를 다녀오면 그 사실에 안도했다. 학교가 주는 구속이 싫었고, 선생님의 폭압내지는 압제도 내겐 끔찍했다. 무엇보다 학교는 나 있는 그대로가 인정될 수 없다는 사실이 서글펐던 것 같다. 작품 속 태준을 보라. 그에게도 문제가 없는 건 아닌데, 단지 공부 하나 잘 한다는 이유만으로 무난한 학교 생활을 하고있다. 어찌보면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 세상을 별 어려움없이 잘 살아갈 사람들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어느새 이들을 영웅시해 왔다. 하지만 그들이 공부에서만 앨리트지, 삶에 있어서도 앨리트는 아니지 않는가? 

난 지금도 학교에 대한 잊혀지지 않는 기억이 있다. 중학교 들어와서 첫 성적표를 받던 날이다. 다른 과목은 그냥 그럭저럭 점수를 맞았는데, 수학에서 기대 이하의 점수를 받아 전체 성적이 한참 아래로 곤두박질 쳐버린 것이다. 어떻게 수학 하나 잘못했다고 이렇게까지 사람이 낮은 등수를 받아야 하는 건가? 나의 학교생활도 순탄치는 않겠다는 생각을 순간하게 되었고, 역시나 난 학교 적응이 쉽지 않았다. 작품에서 누구도 영섭에게 사바나에선 이렇게 살아가야 하는 거라고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나 역시도 누구에게도 학교를 견디는 법을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었다. 누구든 학교의 지도방침에 따라 올 사람은 따라오고, 못 따라오는 사람의 등에는 회초리 아니면 무관심만이 존재할 뿐이다. 거기서 내가 숨을 수 있는 곳은 책뿐이었다. 책은 나의 따분한 학교생활을 버티게 해 줬고, 학교가 주는 두려움을 어느 정도 완화해 주었다. 그것 외에 내가 학교를 이길 수 있었던 것은 별로 없었다. 작품 말미에 영섭이 변하여 모르는 아이들의 물건 갈취하고 장난을 쳐 보는 건 제목과 잘 어울리는 행동 같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모르는 사람은 순하다가도 돌출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솔직히 난 그렇게 첫 성적표를 받아든 날, 속으로 뭔가 새로운 기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어떻게 한 과목에서 낙제를 받았다고 이렇게까지 열등해야 하는가? 억울했다. 자신이 잘하는 것이 무엇이고, 그것에서 인정을 받는 이런 세상이 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지만 나의 생각은 생각에서 머무를 뿐이었다. 그건 기준을 바꿔야 하는 문제인데 그러기엔 난 힘이 없었다.  그래서 못하는 사람은 계속 못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그 시절을 보냈다. 그때 누구든, 내가 수학을 못하는 것은 전체를 못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항상 못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었더라면 나는 그 시절을 조금 편하게 보냈을지도 모른다. 그 시절 하나를 못하는 것에 대한 동공이 너무 컸기 때문에 무엇으도 메울 수 없을 거란 두려움이 컸다. 그래서 현실을 직시하고 싶지 않았고, 때문에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알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눈을 떠야할 때 눈을 감아버린 것이다. 작품에 나온 영섭이뿐만 아니라 등장인물 모두가 다 그렇지는 않을까? 그저 앞만 보고 달리라고만 하지, 왜 달려야 하는지, 어떻게 하면 잘 달릴 수 있는지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다.  그래서 하루가 멀다하고 성적비관 자살이 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죽기에는 그들의 젊음은 아직 저리도 아름다운데 말이다. 

나는 우리의 청소년과 젊은이들이 세상이 이미 만들어 놓은 그물과 기준에 맞추어 살게 되길 바라지 않는다. 그들 자신이 기준이 되고, 새로운 길을 만들어 갔으면 좋겠다. 나의 청소년 시절은 이미 오래 전에 지나갔고, 그 시절엔 권력이 지배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한 사람, 한 사람이 개성과 장점을 인정받기 어려운 시대였다. 하지만 세상은 이제 달라졌고, 달라져야 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인정 받고 존중 받는다면 세상은 진정한 매니아의 세상이 될 것이다. 세상에 장점이 없는 사람은 없다. 그런 의미에서 매니아는 있을 수 있어도 루저는 없어야 한다.  

이 책을 읽는 사람이라면, 여기 등장하는 아이들이 앞으로 어떤 아이가 될 것인가?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이들은 지금까지의 기준을 적용한다면 힘없는 루저가 될 확률이 높아 보인다. 그 공부 잘한다는 태준이까지도. 하지만, 새로운 기준으로 이들을 바라봐주고, 각자가 자신의 존재를 자각한다면 바람직하게 살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은 청소년의 내면을 시의적절하게 잘 표현해 준 작품이라고 할 수 있지만, 어떤 사건이 있다든지 그래서 반전이 있는 작품은 아니다. 그냥 이들의 내면 세계는 현재진행형이며 가변적임을 암시해 준다.  

청소년을 괴물에 비유한다지. 어린이도 아닌 어른도 아닌 애매한 존재. 그들은 이제 한쪽 눈을 떴다. 한쪽 눈만 가지고는 세상을 다 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들의 이러한 시기는 또 지나간다. 그러면 나머지 한쪽 눈도 뜨게 되겠지. 그들이 양쪽눈을 다 떴을 때 희망을 발견할 수 있도록 세상이 조금이라도 좋은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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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읽은, 정수복 교수의 <프로방스에서의 완전한 휴식>에 소개된 크리스티앙 가이라는 작가가 소개되어 있어 여기 발췌 정리해 본다. 

그는 1948년 생이라고 한다.  

청년기에 들어서 그는 고독을 이기기 위해 색소폰을 불기 시작했다. 이내 재즈 음악의 세계에 매료되어 한때 재즈 연주가의 길을 걸으려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먹고 살기 위해 이곳저곳 전전하며 손님들의 구미에 맞추어 하기 싫은 연주라도 억지로 해야하는 생활에 회의를 느껴 재주 연주가로서의 삶을 접었다고 한다. 그러고 난 다음 글을 쓰기 시작했다. 글은 돈이 되지 않았다. 먹고 살기위해 궃은 일을 마다하지 않았지만, 글을 쓰고부터는 모든 것을 감수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재주 연주가의 길을 떠났지만 재즈는 그가 글을 쓸 때 그가 글을 쓸 때마다 종이 위에 얼굴을 내밀었다. 재즈는 그에게 모국어와 같은 것이었다. 어쩌다 모국을 떠나 외국에 살게 되어서 모국어를 거의 쓰지 않아도 모국어는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듯이 재즈는 그의 몸속에 떨어지지 않고 붙어 있었다고 한다. 그는 책이 없는 집에서 자랐고, 글쓰기를 배운 적이 없었는데, 언제부턴가 책을 읽으면서 동시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청소년 시절에 무슨 책을 어떻게 읽었는지 전혀 기억에 없다고 한다. 그는 요즘에도 다른 작가들의 책을 읽으면서 문체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글의 분위기 속에 빠지면서 '문장 공부'를 계속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다른 사람의 글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즐기기'가 아니며 '일'의 성격을 지닌다고 한다. 책을 읽다보면 문장의 구성방식이나 어휘 선택을 살피고 작가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추측해보는 일을 계속하고 있는 자기를 문득 발견한다는 것이다.  

그는힘들여 쓴 첫 원고를 출판사에 보냈는데, 얼마 후 편집 담당자에게서 전화가 왔다고 한다. 그 편집 담당자는, '당신의 작업은 재미있는데 한번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만나서는 그에게, '당신이 쓴 원고의 현재 상태는 지나치게 시뮈엘 베케트의 영향 아래 있다. 베케트를 벗어나 당신 스스로의 이야기를 당신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써보라'고 주문을 하더란다. 그래서 그는 몇 달 동안 아파트에 쳐박혀 자기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긴 독백 형식으로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계속 적어 내려갔다. 그렇게 해서 1987년 그의 첫 작품  <그는 말한다>가 출판되었고, 그후 지금까지 12권의 소설을 썼다고 한다. 그 책들은 각각 개별적인 작품들이지만 모두 자전적 요소를 반영하고 있다고 한다.  

반 고흐가 파리 시절에서 시작하여 아를과 생-레미 그리고 오베르-쉬르-우아즈 시절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여러편의 자화상을 그렸다면, 크리스티앙 가이는 소설이라는 형식을 통해 줄곧 자화상을 그린 셈이 되는 것이다.  

그는 자기의 참모습을 찾기 위해서 이런저런 방식으로 계속해서 글을 썼다. 그러다보면 자기가 자신을 알아볼 수 있을 때가 오리라고 생각하며 글을 썼다. 그렇게 해서 나온 열두 편의 소설은 모두 자신의 모습을 분명히 하기 위한 자기 모색과 자기 탐구의 작업이었다. 그는 지금 글을 쓰지 않고 있다. 그는 지금 여백 속에 있으며, 그 여백 속에서 새로운 글이 떠오르기를 조용히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자신의 모습을 더 분명히 그리기 위해서 이번에는 어떤 이야기를 쓸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런 글을 읽으니, 자신이 체험하지 않은 현실은 단 한 줄도 쓰지 않겠다했던 아니 에르노가 생각이 났다.  그 역시도 자전적 소설을 쓰는 작가로 유명한데, 크리스티앙 가이도 그렇고, 그런 작가군이 있는가 보다.  글을 쓰다보면 정말 내가 어떤 인간인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반 고흐가 한번도 아닌 몇 번에 걸쳐 자회상을 그렸다니 새삼 놀랍다. 그는 아마도 자신의 모습을 그릴 때마다 낮설게 보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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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포 선라이즈 - Before Sunrise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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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리처드 링클레이터
주연 : 에단 호크, 줄리 델피

벌써 15년 전쯤에 만들어졌던 영화다. 나는 뭐 때문이었는지, 개봉 당시에 보지 못하고 이제서야 봤다. 그런데 이 영화 지금 봐도 너무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어쩌면 지금 보게 되서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개봉 당시에 봤다면 '뭐 영화가 이래?'하며 시큰둥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지금 이 영화를 보고 난 느낌은 왜 그리도 아련한지.  

우리가 가끔 옛날 사진을 보는 것은 추억 때문일 것이다. 그런 것처럼 지나간 시절의 영화를 보는 것은 그 영화속에서 옛 추억을 음미하며, 시간을 더듬어 보고 싶은 욕망 때문일 것이다. 

    

15년 전이면 나도 저 주인공들만큼이나 젊었다.  그래서 그만큼 감정이입이 잘 되는 느낌이다. 영화를 볼 때만큼은 나도 저 남녀 주인공의 나잇대로 돌아가 그때를 음미해 보고 싶어진다. 특히 그때의 느낌과 정서를. 그리고 생각한다. 영혼도 나이를 먹는 걸까? 하고.   

마침 영화 가운데 저 둘이 나누는 대화가 잊혀지지 않는다. 여자가 말했다. 자신은 아주 많이 늙어서 사람을 대하고 있는 것 같다고. 그에 반해 남자는, 자신은 지금도 13살인데 어른인 척하고 사람을 대하는 것 같다고.  나는 그들의 말에 공감한다. 더 공감하기론 남자의 말에 더 공감하지만.  어느 때, 나는 10대 시절을 너무나 또렷이 기억하는데(그것은 그때 있었던 일뿐만 아니라 그때의 감정, 정서까지도) 지금 나는 그때에 비해 너무 많은 나이를 먹었다고 생각하면 아찔해지곤 한다.  

아무튼, 저들의 대화를  이렇게 듣고 보면 영혼은 아주 어린 아이였다가도, 아주 늙음을 자유자재로  고무줄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영화를 볼 때 놀라운 것은, 여행길에 만난 두 남녀가 하루동안 나누는 사랑 이야기를 보여준다는 것에 있다.   

남녀가 사랑에 빠지는데 얼마나 걸릴까? 물론 각 개인마다 다르겠지만, 몇분에서 몇 개월 또는 몇년씩 걸리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얼마 걸리지 않는다. 적어도 이들이 기차에서 내려 어느 레코드 가게에서 서로가 고른 레코드를 골라 부스에서 음악을 들어 볼 때다. 둘은 음악을 듣다 서로 키스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다. 물론 거기선 하지 않지만.  

이 영화가 지금 봐도 좋은 것은, 사실 그 시절에도 CD가 없었던 것도 아닌데, CD를 고르는 것이 아니라 추억의 LP판을 고른다는 것이고, 그것을 역시 턴테이블로 듣는다는 것에 있다. 낭만적이고, 추억이 고스란히 돼 살아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나는 모든 건 감정이입이 되도 키스만큼은  감정이입이 잘 안 된다. 어느 영화에서, 잉그리드 버그만이 그런 대사를 했던 기억이 난다. 키스할 때 코를 어디에 둬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것이 아닌 것처럼, 설마 코 때문에 키스를 못할까?  하지만 나이들어 가면서 그 욕망도 점점 사라진다.  하게 되더라도 아주 형식적이고, 기계적인 키스만하게 되고. 흔히 말하는 뽀뽀 정도. 그나마 그것도 할 생각을 못하게 되는 때가 온다. 그래서일까? 그 둘의 키스가 왠지 좋아보이지만은 않는다. 역시 키스도 젊을 때 한 때 할 수 있는 것인가 보다. 물론 또 모를 일이다. 황혼에 사랑이 가능한 것처럼, 황혼의 키스도 가능할 수도 있지 않을까?  비록 몸은 늙어도 영혼은 늙지 않는다면 몸은 구속 받지 않게될 것이다.  

이렇게 이들은 영화에서 엄청나게 키스를 많이 하지만, 섹스는 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에로틱이 아닌 플라토닉이다. 남녀가, 그것도 피끊는 청춘이 사랑을 하는데 어떻게 섹스를 하지 않을 수 있을까? 맥 빠져할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영리하게 잘 만들어졌다. 보여줘 봤자 아주 잘 보여주지 못 할 것이라면 슬쩍 눙치고 넘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 결과 19금은 면했으며, 15세 등급을 받고, 미국내 모처에서 '죽기전에 꼭 봐야할 영화'에 그 이름을 등재시켰으니 영리하달 밖에.  

영화는 때로 누구나 보여줄 수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 보다, 보여 줄 수 없는 것을 보여주거나 아예 안 보여주는 것이 유리할 수도 있다. 그때도 유행이었을  프리 섹스의 시대에 플라토닉 러브는 얼마나 시대착오처럼 보여질 수 있겠는가? 하지만 감독은 과감하게 그것을 보여주고, 저 남녀로 하여금 사랑을 무형의 타임캡슐 속에 집어넣고 봉인한 채 헤어지게 만든다. 물론 그들은 6개월 후에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한다. 그런데 여자가 다시 기차에 몸을 싣는 순간, 나는 정신이 들듯, 과연 저들은 정말 사랑을 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사랑을 하면 하룻밤에도 만리장성을 쌓는다잖는가?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과연 저들이 다시 만나기로 한 6개월 후에도 사랑을 확인할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하지만, 그 무엇도 옮고 그른 것은 없다.  사실 저들의 나이 땐 인생을 관조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기성세대 특히 부모세대의 사랑을 비판하고, 자신들의 과거의 철부지 사랑을 얘기하며 내린 결론이었을 것이다. 물론 저들은 사랑을 시작했으니, 그러해왔던 것처럼 한동안은 뜨겁게 타오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해서 사랑을 혹사시키지는 말자고 했을 일일지 모를 일이다. 오래도록 서로를 사랑하는 이 마음을 가지고 헤어지자고 했을 것이다. 누구는 이게 무슨 사랑이냐고 할지 모르고, 또 누구는 이것도 엄밀히 말하면 사랑이라고 할 것이다.  

어제 라디오를 들으니, 한 진행자가 그런 멘트를 한다. 망각만큼 완벽한 기억은 없다고. 사람의 기억은 완벽하지가 않아서 기억할 때마다 왜곡되고 뒤틀려 버리기마련이므로 망각속에 집어 넣으면 기억은 그대로인채 보존되는 것이다. 참 역설적이지만 맞는 얘기다 싶다. 그런 것처럼 저들의 사랑도 그런 건 아니겠는가? 사랑하게 됐다고 모든 것이 완벽해지는 것은 아니다. 사랑하면 또 그만큼 오해하고, 갈등하고, 미워해야 한다. 그들은 그렇게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 하나만을 가지고 헤어지게 되길 바랬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난 왠지 이들의 사랑이 일견 대견하게도 느껴지는 것이다.  사람 사는 모양은 똑같다고 해도, 다른 식의 삶은 가능한 것인가에 대해 의문을 던지는 것이 인간이다. 그리고 그것은 나이먹고 퇴화의 과정을 거치면 못하는 것이고, 가능하면 젊을 때 가능하다.  

모처럼 좋은 영화를 봤다는 생각이 든다. 이 영화는 대사가 좋은 영화다. 귀에 밟히는 대사들이 많았다. 이 영화의 후편이 나왔다고 하는데, 왠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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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11-04-21 14: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참 좋아했던, 그래서 여러번 보았던 영화예요!

후편은 10년뒤에 만들어졌지요.
기대를 많이 갖고 보았는데, 생각보다는 별로였습니다.
이 영화가 너무 좋았기 때문에 기대가 컷던 탓인 것 같아요.
함께 본 아내는 좋았다고 하더라구요.(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요.)

stella.K 2011-04-21 14:43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형만한 아우가 없다고,
전편만한 후편이 없다는 속설을 못 깰까요?
근데 왠지 저는 보고 싶어지네요.^^

네오 2011-05-04 08: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잘 읽었습니다~ 제가 기억하기로는 이 영화를 2006년 7월의 디브디로 봤네요~ 11년이 지난 후의 영화라며 마음놓고 보다가 커다란 충격의 휩싸여 그 이후 아마도 이 영화를 50번 넘게 본거 같네요~ 너무나 아름다운 사랑이야기 였습니다~(대본집도 구입해서 그 대사대사 하나하나 외우고 있었던 시절이^^) 제가 지금 왜 이 영화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있냐면 지금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사랑을 카피하다>가 이 영화가 유사해서요~ 중년업그레이드버전이라고 할 만하더군요~ 이 영화도 물론 좋습니다~

stella.K 2011-05-04 11:08   좋아요 0 | URL
오, 네오님, 대단하십니다.
무려 50번을 넘게 보시다니!
이 영화 참 괜찮았어요. 그죠?
별것 아닌 것 같은데도 여운이 참 짙게 남아요.
<사랑을 카피하다>도 이런 류군요. 나중에 한번 꼭 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마워요.^^
 
프로방스에서의 완전한 휴식
정수복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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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엊그제, 나는 친구와 함께 두 번째로 부암동엘 갔었다. 

비록 처음 갔을 때만큼의 감동은 아니었지만, 겨울이 보여주는 그곳과, 봄이 보여주는 그곳이 또 다른 느낌이었다. 역시 좀 더 화사해졌다고나 할까? 같이 간 친구도, 서울에 이런 숨은 곳이 있는 줄 랐다며 감탄을 연발했다.  바로 이것이 부암동을 가면 첫번째 느끼는 것이고, 두번째로 느끼는 건 프랑스의 어느 마을이 꼭 이렇지는 않을까? 하는 착각이다.  

마침 그때 나는, 이 책을 읽고 있던 중이었다. 이쯤되면 상상을 더 확대 해, 프로방스와 부암동을 함께 생각해 본다. 말하자면, 부암동은 한국의 프로방스. 프로방스는 한국의 부암동쯤은 되지 않을까? 시쳇말로, 상상하는데 세금 내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프랑스, 그것도 프로방스를 아직 한번도 가 보지 않은 나는 어찌보면 부암동에서 그곳을 대리만족을 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읽고난 느낌은, 실제로 프로방스에 가 보면 더 많이 감탄하게 될 것 같다는 것이다. 물론 당연한 말처럼 들릴수도 있겠는데, 사실 사진이나 책만 보고 그곳엘 갔다가 실망하는 경우도 적지 않거니와, 이 책이 굳이 단점이라면 단점은, 사진은 저리 예쁘고 낭만적인데 비해 저자의 글이 (때론 지나치리만큼) 차분하고 사색적여서 하는 말이다.   

저자는 프랑스에서 학위를 받고 귀국을 했지만, 우리나라의 숨막히게 돌아가는 라이프 스타일이 맞지 않아 프랑스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런 저자의 선택을 나는 충분히 이해하며 공감한다. 아마 나라도 그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무엇이 저자를 프랑스로 다시 돌아가게 만들었을까? 프로방스의 풍광과 정취 때문에? 그럴 수도 있을 것도 같다. 하지만 상당 부분 고흐를 반복적으로 언급한 것을 보면, 어쩌면 고흐를 잊지 못해서 다시 돌아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아닐까? 그런 짐작도 해 보게 된다. 그만큼 프로방스 아를은 고흐가 살았던 동네고, 뒤에 가면 아예 <반 고흐의 '장소'들을 찾아서>란 쳅터를 따로 할애할 정도로, 저자는 반 고흐 애호가고, 또는 '고흐니스트'라 불러 줄만했다.  

책을 읽으면서, 고흐는 과연 그가 누구이길래 이토록 지식인에서 일반인에 이르기까지 사람의 영혼을 흔들어 놓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만큼 저자와 프로방스, 반 고흐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 나도 전염이라도 된듯 예전에 읽었던 <반 고흐, 영혼의 편지>를 다시 읽어야겠다는 충동을 느꼈다. 그리고 이 우울하고 을씨년스러운 반 고흐의 그림을 다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고흐의 그림은 뭔가의 중독성이 있는 것 같다. 한때는 우울하고 을씨년스러운 것이 싫어 외면했던 그림을 나이 들어서야 점점 좋아지고 있다. 그것은 또 어쩌면 고흐의 그림 자체보단 그의 그림을 칭송해마지않는 사람들의 영향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들의 글과 말을 통해 고흐를 이해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다가가는 계기가 되는 것 같다.  

하긴, 꼭 고흐가 아니어도 우리 나이 정도가 되면 뭐 하나에는 정통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난 이 얘기를 들으면 이게 솔깃하고, 저 얘기를 들으면 저것이 솔깃한, 아직도 사춘기적 감수성에서 크게 벗어난 것 같지가 않다.  

저자는 프로방스가 시간이 정지된 곳 같다고 했다. 그래서 빨리빨리를 외치는 보통의 한국 사람이 정서라면 꽤 따분하고 심심한 곳이 될지도 모른다고 했다. 글쎄... 사람 사는 것은 어디든 같지 않을까? 30대 때까지는 도시가 좋다가도 40이 넘어가면 그런 시간이 정지된 듯한 고요한 곳이 좋아지는 때이기도 하다. 내가 부암동에 매료된 것도  알고 보면 저자가 프로방스를 두고 얘기한 것과 비슷한 맥락 때문인 것 같다. 재밌는 건, 저자가 자신의 일상을 써 놓은 대목이 있어 소개해 볼까 한다. 

미란이 8월1일 아침에 발목을 다친 지 벌써 6일째다. 요즘음 나의 일상생활은 일하는 주부의 처지를 생각하게 한다. 아침 8시경에 일어나서 식사를 준비해 미란과 함께 먹고 난 다음 12시경까지 글을 쓰다가 다시 점심식사를 준비해서 먹고 설거지를 하고 나서 아를 시내의 유적과 박물관을 다니다가 (중략) 돌아와 샤워를 한 다음, 저녁식사를 준비해 먹고 치우고, ...... 텔레비전을 조금보다가 저녁 산책을 나갔다 들어온 다음, 라디오를 듣거나 책을 읽다가 잠자리에 든다. 살림을 하는 주부이면서 동시에 글을 쓰는 작가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까 집안일과 직장일이라는 이중의 노동에 시달리는 취업주부들의 처지가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211p)  

뭐 저자가 아내가 발목을 다친 후 비로소 취업주부를 이해하게 됐다니 다행스러운 일이긴 하다. 하지만 이 정도 가지고도 그것을 깨달았다면, 서울에서 취업주부를 이해하려면 이것의 두 배, 세 배는 더 해야 체험이 됐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난 오히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저자가 참 목가적으로 산다는 느낌이 들어 오히려 웃음이 나왔다. 우리가 추구하고 싶은 삶이 이런 거 아닌가? 배우자가 다친 건 차치하고라도, 밥 먹고, 글 쓰고, 박물관 나들이나 산책 다녀오고, 다시 오붓하게 둘만의 저녁을 만들어 먹고 책 읽다 자는 것. 이 얘기가 프로방스니까 가능할 것이다. 우리나라 같으면 어림없다.  

읽으면서 느꼈던 건, 선진국의 조건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선진국에 진입하려고 하는 나라는 그것에 진입하지 못해 휴식도 반납하고 안달복달하면서 산다. 하지만 선진국일수록 산책로가 발달이 되어있다. 그 길을 산책하면서 많은 것들을 사색하고 힘을 키웠다. 우리도 좀 그래야 하지 않을까?  

책이 참 지적이란 생각을 했다. 읽으면서,  반 고흐는 물론이고, 까뮈와 페트라르카를 알게 되고, 크리스티앙 가이란 작가도 알게 된 건 의외의 수확이었다. 나는 이런 지적인 에세이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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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1-04-20 0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나오자마자 보관함에 담아두고 있어요. 표지의 저 초록색은 정확하게 무슨 색이라고 부르는지 그것도 찾아본다고 하고 아직 못찾아보고 있네요.
시간이 정지한 것 같은 프로방스와 그 반대의 한국, 두 곳을 동시에 좋아하기란 가능성이 참 희박할 것 같아요.
지적인 에세이를 좋아하시는군요 ^^

stella.K 2011-04-20 11:41   좋아요 0 | URL
전에 신영복 교수의 <더불어 숲>이란 여행 에세이를 읽은 적이 있는데
참 좋더라구요. 그책 생각이 났어요.
좋기도 그책이 더 좋았구요. 이책도 나름 그에 못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oren 2011-04-20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제목이 은근히 '완전한 휴식'을 꿈꾸는 사람들을 유혹하는 듯싶네요.
stella님의 글을 읽어보니 '부암동'도 궁금하고 프로방스에도 가보고 싶네요.

stella.K 2011-04-20 11:42   좋아요 0 | URL
ㅎㅎ 당장 가능성있는 것부터 하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부암동에 한번 가 보십시오.
제가 왜 그렇게 말하는지 이해하실 거예요.^^
 
거의 모든 사생활의 역사
빌 브라이슨 지음, 박중서 옮김 / 까치 / 201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을 보며 문득, 초등학교 때 거의 누구든지 가졌던 '전과'가 생각이 났다. 왜 그런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만큼 두께에 압도 당했다고나 할까? 넓적한 크기에 글씨도한 빽빽하다. 오래 전부터 제법 두터운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는 빌 브라이슨을, 나는 이제야 이 책으로 접하게 됐다.  사실, 빌 브라이슨은 그동안 다양한 분야에서 백과사전적이며, 전방위적 글쓰기를 해 온 작가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그 특유의 입담도 한몫했던 것으로 알고 있고. 그런 그가 이번엔 (내가 평소 관심이 많았던) '집'을 주제로 책을 썼다.  

그는 현재 영국의 어느 목사관을 빌려 살고 있는가 본데, 책 첫 페이지를 펼치면 그 목사관 집 1층 평면도가 나온다. 배열 순서에 따라, 쓰레기통, 우물, 홀, 부엌, 거실, 보라색 방(일종의 또 하나의 거실), 또 아래는 식료품실, 설거지실, 또 하나의 부엌(그 안쪽엔 식료품실과 설거지실을 포함), 식당 (그 구석엔 종복의 저장품실)과 현관문을 사이에 두고 집무실로 되어있다.  

일단 이렇게만 보면, 우리나라엔 없어도 되는 몇 개의 방과 시설들이 눈에 띈다. 예를 들면, 식당이나, 보라색 방, 집무실은 없거나 있어도 다른 이름으로 불렸을 것 같다. 내가 생각하기엔, 보라색 방이 또 하나의 거실로 쓰였다면, 그건 얼핏 우리나라에서 사랑방으로 쓰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하지만, 저자는 처음 이곳으로 이사왔을 때 그곳의 벽이 보라색이었기 때문에 그냥 보라색방이라고 한다. 거기에 600권 가량의 책이 있었다고 하니 우리나라고 치면 서재용도는 아니었을까 싶다. 집무실은 우리나라에선 사랑방으로 쓰였을 가능성이 높다. 적어도 나라면 그렇게 썼을 것이란 말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서민의 집은 이렇게 문화적이지마는 않다. 아주 단출하게 있어야 할 것만 있을 뿐 이런 문화 주택이 어디 흔하겠는가? 

그렇다고  저자의 집을 마냥 부러워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가 살고 있는 집도 지어진지는 제법 오래된 모양인가 본데, 몇백 년을 이어 온 우리나라 고택도 알고보면 나름의 용도와 운치와 멋을 지닌 문화주택이란 걸 금방 실감할 수 있을 테니.  

내가 집에 관심이 있는 건,  순전히 드라마와 살면서 점점 알고 싶어지는 우리나라의 한옥 때문일 것이다. 전자는  거짓말을 하고 있을 거란 혐의 때문이고, 후자는 한옥이야 말로 사람에게 맞춘 집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오늘 날의 현대식 집은 사람에게 맞추었다기 보단, 사람이 집에 맞추어진 형태가 아니던가?  순전히 드라마 때문이란 건, 특히 사극을 말하는 것인데 드라마가 어차피 허구의 이야기인만큼 무대 세트도 현대식 감각을 아주 배제할 수만은 없을진데, 보다 보면 과연 저 시대 실제 집은 어떻게 생겼을까가 궁금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집에 대한 이야기만을 하고 있지는 않다.  특이하게도 집의 세부 구조를 소재로 그 안에 인간이 어떻게 살아왔나를 미시사적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 읽다보면, '정말 이런 일이 있었어?' 기절초풍할 일들이 많이 나온다. 특히 내가 집을 다룸에 있어서 관심있어 한 쪽은 화장실이고 다음이 침실인데, 그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가장 들어나지 않는 곳이고, 은밀한 곳이기도 하니까. 그나마 화장실은 최근에 속속들이 많이 들어나긴 했다. 적어도 하이힐이 왜 발명되었는지, 18세기 이전만하더라도 프랑스나 영국의 거리가 온통 분뇨 천지였다는 정도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래도 역시 모를 건 옷에 관한 미스테리다. 그토록이나 거리가 더러워 하이힐을 만들어 신고다닐 정도였다면, 당연 옷도 좀 짧아져야 되는 것 아닌가?  그런데 그 시대 여자들의 옷은 짧아질 줄을 몰랐다. 그렇게 분뇨가 많았던 거리에서 그 치렁치렁한 옷들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하면 아찔하고,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싶은 생각이 든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빌 브라이슨옹이 다음 번엔 인간의 복식에 대해 다루어주길 간절히 바라마지 않는다(나의 바람을 그가 알리 없겠지만).  

사실 이 책은 미시사에 대해 다루고 있다고는 하나, 읽다보면 인간 더러움의 역사, 또는 인간 미련함의 역사를 보는 것 같아 "이럴수가...?!"가 저절로 나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게 만드는 때가 한 두번이 아니었다.  그리고 빌은 일부러 이런 역사만 알아가지고 짖궃게 우리에게 장난을 치는 것도 같다. "늬들이 인간의 역사에서 이런  일이 있었는 줄은 꿈에도 몰랐을 거다. 그래 알게 되니까 어떠냐? 재밌지? 히히히"  조금 맛보기를 해 볼까? 기왕 화장실 얘기가 나왔으니(화장실 얘기는 어렸을 때나 어른이 되어서나 항상 흥미진진하다) 좀 더 얘기해 보자. 현대의 화장실이 그래왔듯이, 목욕실과 변소를 같은 공간에 두듯이, 저자 역시 그렇게 다루고 있다.     

변소(privy)라고 해서 애초부터 이름처럼 사적인 공간은 아니다. 로마인은 특별히 배설과 대화의 조합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었다. 로마의 공중화장실은 대개 20개 남짓의 좌석이 서로 상당히 가깝게 놓여 있어서, 그곳을 이용하는 로마인은 십중팔구 버스를 이용하는 현대인과 마찬가지로 전혀 남을 의식하지 않았을 것이다(여기서 불가피하게 제기될 법한 문제에 미리 답변하면, 각 좌석 앞의 바닥에는 수로를 따라 물이 흐르고 있어서, 사용자들은 막대기 끝에 달린 스펀지를 거기 담가서 뒤를 닦는 데에 사용했다). 화장실에서 낯선 사람과도 편하게 어울리는 관습은 현대에 와서도 한동안 지속되었다.(428p)

역사상 대(大)문화인일 것만 같은 로마인이 변소를 이렇게 사용했다는 게 놀랍지 않은가? 한때 화장실 꿈을 잘 꿨던 (지금도 아주 가끔씩 꾸는) 나는 그다지 놀랍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실제로 저 광경이 있었다는 게 놀랍긴 놀랍다(오늘밤 꿈에 나올까 겁난다ㅜ). 뭐 그 정도 가지고 그러냐고 한다면 좋다. 조금 급수를 높여서, 

가구목수이자 자물쇠공인 조지프 브라마가 최초의 현대식 수세식 변기를 가지고 1778년에 특허를 얻었다. ...... 그러나 초창기의 변기는 그다지 잘 작동하지 않았다. 때로 역류가 일어나서 애초에 없애고자 했던 오물보다 더 많은 오물이 방 안을 채우는 바람에 사용자가 혼비백산하기도 했다.(433p)  

가히 어떤 모양새였을지는 알 것도 같다. 뭐 이 정도는 수위조절이라 해 두자.  600년 간이나 씼는 것과는 담을 쌓고 살았다니 그에 대한 각종 전염병의 역사를 우리의 빌 브라이슨옹은 참 친절하게도 알려준다. 그 밖에 "헉"소리 날만한 장은 많으니까 지면상 생략한다.  

그래도, 우리의 빌이 이야기를 포괄적으로 잘 다룬 장이 있다면, 홀을 다뤘던 3장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재미있기도 하지만 이걸 보면서, 우리나라에서 한때를 풍미했던 외화들, 이를테면 '초원의 집'이나 '뿌리' 같은 드라마 또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같은 영화의 배경이 됐던 집의 구조물들이 보기에만 그럴듯할뿐 실제로는 화려하지도 않으며, 허술하기 짝이없는 것이라는 걸 이 책을 보면 새삼 깨닫게 된다.  그 안락하고, 문명스러워 보이는 벽난로도 그다지 따뜻한 것이 아니며 애물단지에 가까웠다. 한마디로 집은 처음부터 사람 완벽히 지켜주던 구조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정말 우리나라의 온돌이 언제부터 있어 온 건지 모르겠지만 그것이 서양의 그것보다 훨씬 몇 배는 더 우수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아무튼 이런 웃지못할 역사의 한 단면들을 빌 브라이스는 끊임없이 주저리 주저리 떠들어 대고 있는 것이다. 어느 장을 보든지, 이것 말하고 있는가 보다 싶으면 또 금방 저걸 얘기하고 있고, 저 얘기가 또 언제 끝났지 싶게 새로운 이야기들을 굴비 엮어내듯 엮어내고 있다. 과연 이 사람의 백과사전적 지식의 끝은 아닌가 놀라지 않을 수 없고, 얼마 전에 읽었던 <토머스 페인>의 작가 폴 콜린스를 연상하게도 된다.  

이 책은 솔직히 역사적인 사실만 다루었음에도 불구하고 편하게 읽을 수만은 없는 책이다.  그렇다면 빌은 뭐 때문에 이런 걸 주저리 주저리 떠들어 내는 것일까? 뭐 지적 과시? 뭐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꼭 그 때문만은 아닐 수도 있다. 오늘 날 하나도 쓸모도 중요하지도 않은 것들이 역사의 어느 한 시대에선 중요하게 다루어지던 때가 있었다. 그런 걸 보면 정말 웃음이 나올 정돈데, 또 그렇게 읽어가다 보면, 과연 우리 시대 중요하다고 믿었던 것들이 앞으로 50년 또는 100년 뒤에 어떻게 평가를 받을까? 생각하니 마냥 웃을 수만은 없다. 인생이란 가까이 보면 비극이고, 멀리 놓고 보면 희극이란 말이 있는 것처럼, 역사도 그런 것이 아닐까? 특히 미시사는 더더욱.  게다가 인간이란 종은 어쩌면 그리도 척박하고, 위험한 환경 속에서도 살아남아 지금까지 명백을  지켜올 수 있었을까? 신기하다 못해 경외감을 가질 정도다. 또 그러면서 인간이 왜 그렇게 극악스럽게 자연을 해쳐가면서까지 살고자 했는지도 이해할 수 있을 것같다. 저자는 바로 이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 이 책을 쓰지 않았을까? 

이 책은 읽기에 따라선 재미있을 수도 있지만, 너무 많은 지식을 쏟아내고 있어 때론 질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므로 강추 하기 보단, 독자의 선택에 맡겨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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