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진해도 벌받는다
유태영 지음 / 북치는마을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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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 안 읽었으면 후회할 뻔했다. 

저자에겐 좀 실례가 될지 모르겠으나, 얼핏 저자의 연배가 나의 아버지나 작은 아버지뻘은 되는 듯하다. 그래서일까? 요즘 젊은 사람이 읽으면 어떨지 몰라도, 나는 약간의 향수도 느껴지면서 참 따뜻한 책이란 생각을 했다. 또 그만큼 글에서 삶의 연륜이 느껴져 좋았다. 예전에 수필을 읽는 맛은 이랬다. 요즘엔 하도 스마트, 스마트 떠들어대서일까? 요즘에 나오는 에세이들 역시 스마트해진 느낌이 든다. 뭐 그 자체로도 나쁘진 않지만 깊이는 덜하다는 느낌은 어쩔 수 없다. 

 

이책을 읽으면서 또 지난 가을 시인 문정희님의 에세이를 읽으면서도 그렇고 과연 수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자연스럽게 생각해 보게 되었다. 글쎄, 나이가 드니 소설 보단 수필이 자꾸만 좋아진다. 항창 감성이 풍부한 사춘기나 젊을 때는 수필은 잘 안 읽게 되는 것 같다. 어디 수필에 대해 뭐라 한정지어 놓은 게 있나? 그냥 편하게 마음 가는대로 쓰는 글. 뭐 그 정도가 아니겠는가? 그런 책은 왠지 밋밋하고, 물에 물 탄듯, 술에 술 탄듯하여 읽기가 싫었던 것 같다. 그리고 같은 문학 문야라고 해도 흉내내기 가장 좋은 분야가 수필은 아닐까? 사람의 마음이 또 그러해 만만하면 별 것 아닌 것처럼 느껴지고, 시시하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나는 수필을 그렇게 생각해 왔던 것 같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내가 그렇게 만만하다고 생각하여 쓴 수필(이랍시고 쓴 글)을 다시 읽어보면 웬만한 낙서 보다 못할 때가 많다. 상황에 대한 묘사는 어느 정도 어설프게나마 갖췄을지 모르겠지만 깊이는 없다. 그리고 그런 글들은 내심 수필을 만만하게 여기던 젊은 시절 또는 사춘기 때 쓴 글이 대부분이다(물론 많이 쓴 것도 아니지만). 

 

하지만 이책을 보거나, 앞서 말했던 문정희님의 수필을 읽으면 삶의 연륜이 느껴져서 감동을 할 때가 많았다. 그렇다. 수필은 거져 써 지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편하게 쓸 수 있는 글이 수필이라고 해도 삶의 향기가 베어있지 않으면 쓰지 못할 분야가 수필이라고 생각한다. 이책은 삶의 향기뿐만 아니라 작가가 문학 교수라서 그런지 문학적 족적을 종횡으로 엮기도 하고, 삶의 교훈도 내포하고 있어 마치 아버지나 선생님께 이야기를 듣는 것 같은 느낌이다. 나이들면 누가 나에게 훈화하는 사람이 없어진다. 어릴 땐 그것을 드러내놓고 싫어하기도 했다. 하지만 바로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가 좋은 때임을 지나놓고 나면 깨닫게 되는데 그땐 이미 나이가 들만큼 들때라 돌이킬 수가 없다. 특히 책의 말미에 문학을 하려는 사람에게 온화하면서도 엄중히 써 놓은('문예 창작, 그 험로를 넘어') 부분을 읽으면 정말 가슴이 뭉클해질 정도였다. 물론 그런 말은 여태까지 어디선가 많이 듣던 얘기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왠지 저자의 글을 읽고 있노라면 뉘라서 이런 말을 또 해 줄까 싶은 묘한 감동이 있다. 게다가 이책을 읽는 또 하나의 기쁨은, 나는 옛 문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하는데, 춘원 이광수나 김유정 작가의 이야기를 읽는 건 정말 이책을 읽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특권 같다는 생각이 든다. 새롭게 알게된 '서음(書淫)'이란 단어의 이야기도 재밌고. 강추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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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놀 2013-02-20 2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필 좋아하시면 김수미 할머니 수필도 읽어 보셔요. 참 아름답답니다~
 

작년 6월 이후 나는 서재를 거의 비워두고 있었다. 지난 10년여 동안 서재활동을 해 온 나. 사람이 습관이 무섭다고, 안하고, 떠나 있었더니 그맘도 익숙해져서 이젠 하는 것이 오히려 어색한 느낌이었다. 물론 그 안하는 동안 문득 생각이 나 가끔은 들어와 보곤 했다. 하지만 그뿐. 다시 할 용기도 마음도 나지 않았다. 사람이 나와 같은 생각이 아니면 그렇게 공격하고, 쪼아댈 수 있다는 것이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그것도 알고 보면 현실인 것을 난 너무 편하고 안일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누구의 말을 들으니 52%인가 하는 숫자가 악성댓글에 시달린다고 한다. 왜 그래야 하는 지 모르겠다.

 

그래도 내가 아주 복이 없지는 않은 건지, 서재인 몇 분이 나의 안부를 물어봐 주셨고, 다독거려주셨다. i님은 일부러 다른 사이트에 글을 올리고 있는 나를 일부러 찾아 와 나를 걱정해 주셨다. 이곳을 떠나면 그뿐인 것을 이렇게까지 나를 생각하고 계셨나? 뭉클할 정도였다. 오래된 이야기이긴 하지만, ㅁ님도 본래 온라인 안에서의 논쟁은 무의미한 거라며, 그런 일은 오래 마음에 두고 있지 말라고 위로해 주셨었다. 물론 그분의 마음이 고맙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사람의 마음이 한 번 문이 닫히면 다시 열리기는 쉽지 않는다. 그러던 중 작년 말 p님의 방문을 받았다. 나는 그분이 내 방명록에 글을 써 주실 거라곤 생각하지도 못했다. 솔직히 나에게 공격을 퍼부었던 사람들이야 내가 모르는 사람들이니 세월가 잊으면 그만이다. 나름 공적인 발언을 하겠다고(그것이 어떤 사람 보기에 옳은 것이든, 그른 것이든) 하다가 나를 아는 서재지인들에겐 본의 아니게 선의의 피해가 가게 되었으니 난 그분들에겐 죄인 아닌 죄인이 된 느낌이었다. 솔직히 그 일을 겪어보기 이전에는 서재에서 자기 좋은 말이나 떠들고 있는 것이 답답하고, 그게 옳은 일일까 그런 생각을 참 많이 했었다. 서재질을 오래하다 보니 이런 폐해도 생기는구나 싶어 그래서도 이곳을 떠나있기를 바랬다. 이제 블로그 활동을 한다는 건 내겐 특별한 일이 아닌 것이 되고 말았다. 그냥 생각나는 대로 자유롭게 떠들고, 위무나 받자고 하는 일이 그 일이 아닌가 싶다.  

 

그래도 p님의 격려에 힘입어(p님은 무엇보다 본인은 그 일을 크게 생각할지 몰라도 사람들은 금방 잊어버린다는 말씀에) 그냥 용기를 내 보자고 생각했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서재 활동을 하면 새로운 닉네임으로 바꾸고 활동을 하리라 마음 먹은 일을 실행에 옮겼다. 그래서 나의 닉네임은 스텔라에서 애티커스로 바꿨다. 스텔라도 나쁘지 않지만 나는 이 중성 내지는 남성스러운 이름이 싫지 않다. 가끔 여잔데도 실명이 남성 내지는 중성의 이름을 쓰는 사람을 만나곤 하는데 난 그게 좋아 보였다. 그래서 온라인에서만이라도 그렇게 해 보고 싶었다. 물론 그것 때문에 오해 받을 수도 있지만, 이것인 줄 알았는데 아닌 걸 알면 약간은 어이없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일단 속아줬다는 점에선 재미가 더 크다. 그러니 나중에라도 나 때문에 원망하는 사람이 없기를 바란다.     

 

그런데 그렇게 어색하게 다시 활동을 시작하고, 새해를 맞았을 때 예전에 심심찮게 서재에서 왕래하던 ㄴ님이 나에게 새해 인사를 하고 가셨다. 어찌나 반갑던지. 활동을 안 하신지가 꽤 되는데 그런 생각지도 않은 인사를 받고보니 눈물이 날 정도로 반가웠다. 내가 이렇게 다시 서재활동을 하지 않았더라도 그분의 인사를 받을 수 있을지 알 수가 없다. 물론 그때 이후로 또 다시 안 나타나시고 계시지만 지금도 어디선가 잘 지내고 계시겠지?

 

한 2개월여부터 몸이 안 좋아졌다. 나이 탓이려니 하지만 갑자기 안 좋아지고 보니 겁이 더럭 났다. 혹시 이러다 죽거나 반신불수라도 돼서 자리에 눕게 되는 것은 아닌가? 별의별 상상을 다하기도 했다. 건강했을 땐 삶도 죽음도 그다지 내겐 크게 의미로 와 닿지 않았다. 살면 사는 거고, 죽으면 죽는 거지 했다. 그런데 사람의 목숨이 그렇게 쉽게 죽는 것이 아닌데도 막상 이 세상에 내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니 내가 이렇게도 삶을 갈망했었나 아찔할 정도였고,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특히 우리 가족들에게. 나의 엄마에겐 더더욱. 사람이 올 때는 차례대로 와도 죽는 건 차례가 없다지 않는가? 내가 감히 엄마를 두고 어떻게 세상을 먼저 떠날 수 있겠나를 생각하니 가족들을 생각해서라도 건강하고 살아야겠다는 아니 적어도 죽는다는 생각은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니 가족을 두고 자살로 죽는 사람은 얼마나 독한 마음을 먹으면 그럴 수 있는 건지 할 말이 없어진다. 아무튼 그렇게 마음을 먹어선지 지금은 서서히 낫는 것도 같은데 그래도 아직은 조심하는 중이다. 원래 소심한 성격이라 아플 때는 최대한 몸을 사리게 된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서재를 비워놔도 하루에 100명 가까운 숫자가 내 서재를 다녀가곤 했는데, 며칠 전부터는 급격히 떨어져 두 자릿 수를 유지하는 것도 쉽지 않아졌다. 나를 걱정해 주시는 p님은 이것이 개명을 해서 그런 것은 아니겠냐고, 걱정 반, 위로 반 해 주셨다. 6개월 여 동안 비워두기까지 한 내가 조회수를 우논할 자격이 없는 것 같긴 한데 그걸 나도 잘 모르겠다. 개명을 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요즘 한창 도서정가제 때문에 알라딘이 뜨거운 감자로 떠올라서 그러는 것인지. 그래도 사람의 마음이 간사하긴 하다. 비워두어도 조회수가 나름 높을 땐 별로 신경에 없었는데 이렇게 저조하고 보니 뭔가 소외된 느낌이란 생각을 떨치기가 어렵다. 물론 이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 같지는 않아 보인다. 그래도 내가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것을 보면 외로워서겠지 싶어 씁쓸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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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놀 2013-02-05 2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온누리를 차갑게 식히면서 새 목숨이 튼튼하게 자라도록 북돋우는 겨울이
천천히 지나갑니다.
겨울이 있기에 봄이 따스하고 여름은 시원해요.
좋은 겨울이 가며
좋은 봄이 다가와요.

서울은 큰눈이 많이 쏟아진다는데,
큰눈에도 다 뜻이 있어요.

즐거운 하루 듬뿍 누리면서
새 하루도 기쁘게 맞이하셔요.

stella.K 2013-02-06 13:41   좋아요 0 | URL
아, 맞다. 힘든 때 함께살기님이 가장 많은 힘이 되어주셨는데 잊고 있었어요.ㅜ
서울엔 생각 보다 많이 안 왔어요. 그래서 다행이라고 가슴 쓰러내리고 있었어요. 눈 오면 왜 그리도 근심스럽던지...거기 고흥은 괜찮은가요?
이대로 이번 겨울의 마지막 눈이었으면 좋겠어요.ㅋ
명절 잘 지내세요.^^

기억의집 2013-02-05 2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문 이미지는 말론 브란도죠. 말론 브란도가 고양이 좋아했나봐요. 애티커스는 무슨 의미예요? 남자 이름인 것은 알겠는데.... 저도 지금 닉넴을 다른 것으로 하고 싶은데 뭘로 할까 생각중이에요. 도서정가제반대로 할까? 말까? 목하 고민중~

더 이상 과거 이야기 하지 않으셨으면 해요. 조회수가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크라인 넛츠의 가사처럼 말달리자~ 2012년 왈가왈부해 봤자 지난 과거일뿐, 2013년 무조건 달리시길 바래요^^

그리고 건강이 최고예요. 건강은 건강할 때 지켜야하더라구요. 지금은 나아지고 계시다니 다행중 다행~

stella.K 2013-02-06 14:08   좋아요 0 | URL
에이, 말론 브란도 보셨으면 애티커스의 뜻도 보셨는 줄 알았는데...ㅜㅋ
그러게요. 과거는 과거일뿐인데...어제 이 글 써놓고 오늘 아침 생각하니 괜히 썼다 싶어 지울려고 했는데 지울 수가 없게 되어버렸어요. 이렇게 댓글들을 다셨으니...ㅠ
도서정가제는 좀 그래요. 이것도 시간 지나면 잊혀질텐데 기왕이면 멋진 이름으로 바꾸세요.
솔직히 저 개인적으론 도서정가제 논란은 별로 의미가 없다고 봐요. 뭔지는 모르겠지만, 구조적이고,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가격만 가지고 우논한다는 게 말이 안 되는 것 같아요. 어떤 것에 기울던 결국 그 책임은 고스란히 일반 독자가 질텐데 모든 건 결국 상술이잖아요. 상술을 좋다 나쁘다 말할게 뭐 있나요? 그래도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일단 독자로서 책을 싸게 사 볼 수 있다는 건 큰 메리트 같아요. 그걸 처음부터 봉쇄했으면 모를까, 내내 출판사나 서점이나 그맛을 보게 해 주고 이제와 가격합리화니 어쩌고 나서면서 도서정가제 하는 건 좀 웃기는 발상 같아요. 현실적 대안과 출판사의 자성이 먼저 이루어지고 그다음 도서정가제를 찬성하든, 반대하든 해야 하지 않을까요?ㅋ

아, 정말 한 해, 한 해 나이 먹을수록 건강이 최고란 생각해요. 기억님도 늘 건강 잘 챙기세요. 어제까지 멀쩡해도 꺽어지는 건 순간 같아요. 아픈 거 싫어서 늘 조심하고 산다고 생각하는데. 아프면 일상이 왜 그리도 고맙고, 감사한지 걱정 없이 잠자리에 들고, 걱정 없이 눈을 뜬다는 건 정말 감사한 일 같아요. 오늘 죽을 지, 내일 죽을 지 그렇게 하루 하루를 버티는 사람의 마음을 어떨까? 그러면서 유한한 생명 이젠 죽음도 생각해야 하는 거구나. 벼라별 생각을 다하고 사는 요즘입니다.ㅋ

이진 2013-02-06 0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 저도 몇번가서 인사 드릴걸. 이런 무책임한 녀석이 있나.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거긴 정이 안 붙는걸요. 깔끔하지가 않아서 어색하고, 깨트리기 어려운 알 같아요. 그래도 돌아오셨을때 제가 제일 먼저 맞지 않았나요? 그것 하나에 왠지 뿌듯(?)했는데, 아니라면 이 소이진 물러가겠나이다... 비밀글하고 싶은데 모바일이라 안되네요. 오늘 학원 갖다와서 두시간 동안 반찬 만들었어요. 세상에 채소 다듬는게 힘도 많이 들뿐더러 시간도 오래 걸리더라구요. 느타리볶음, 오뎅볶음, 감자볶음을 만들었는데 셋다 그럴듯해요. 그냥, 저 이제 우리집 남자들 요리해 먹여 살리는 엄마됬다구요ㅎㅎ

2013-02-06 14: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2-06 18: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2-07 18: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13-02-12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오늘에야 일상으로 돌아왔네요. 설날 잘 보냈나요?
북한 3차핵실험을 심각하게 보도하는 뉴스를 보니 웬만한 일은 별것 아니다 싶어요.
목숨을 위협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을까요.
그저 우리가 작은 일에도 심각하게, 또는 신중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듯해요.
다산 정약용의 표현으로 말하면, 그저 밤 한 톨에 울고 웃으며 사는 것 같아요.

저는 밤 한 톨에 울지 않고 웃으며 살 거예요. 그러고 싶어요. 님도 그러하시길...^^

stella.K 2013-02-13 13:35   좋아요 0 | URL
네. 저는 그럭저럭 잘 보냈습니다.
마지막날은 언니네 식구들이 왔는데 언니고 조카고 와서 많이
도와주고 갔는데도 엄마가 거의 몸살이 날 지경이었습니다.
그 전전 날부터 무리를 하셨던 게 마지막 날을 버티기가 힘드셨나 봅니다.
이래서 손주들은 오면 반갑고, 가면 더 반갑다고 했나보다 싶어요.ㅠ

울라라세션의 임윤택이 결국 돌아갔더군요. 회복이 되는가 싶었는데 결국 죽어서 안타까웠어요. 그의 사인엔 여러 가지 악재가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악성댓글에 시달린 것도 있었다더군요. 사람의 살고 죽는 것이 혀끝에 달려 있다더니 정말 이 보이지 않는 악성댓글자들 너무한다 싶어요. 자신이 그 죽음에 일조했다는 자각이나 하고 사는 건지 원...ㅉ

2013-02-14 14: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2-14 18: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블루레이] 광해, 왕이 된 남자
추창민 감독, 이병헌 외 출연 / CJ 엔터테인먼트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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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이 좋았다고 해야할까? 얼마 전 동명의 책을 (선물 받게 되어)먼저 읽었다. 그렇지 않아도 극장 상영 때 보지 못했던 터라 기쁜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다. 작가가 정말 글을 잘 쓴다는 생각을 했고, DVD가 나오면 꼭 보리라 다짐했었다. 그리고 드디어 엊그제 그 소망을 이루었다. 

 

언제나 그렇듯, 원작이 있는 영화인 경우 영화를 보면 책을 읽고 싶고, 책을 먼저 읽게되면 영화를 보고 싶어지게 된다. 하지만 그래서 두 가지를 다 이루게 되면 분명 어느 한쪽은 기울게 마련이다. 즉 원작이 좋으면 영화가 좀 기울거나, 원작이 안 좋으면 영화가 좋거나. 물론 여기엔 둘 다 좋거나, 둘 다 나쁜 경우는 거의 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어쨌든, 책으로 읽었을 때는 작가가 나름 조선시대 궁중 생활사를 작품속에서 잘도 고증해 냈다는 생각을 했다. 예를 들면, 왕의 변기인 매화틀이나 이를 담당하는 상궁이 있었다는 게 놀라웠고, 왕의 건강을 책임지는 당시의 의관들이 매일 왕의 매화를 직접 맛 봤다는 것이 놀라웠다. 게다가 작가 특유의 필치를 읽어내는 맛도 남달랐다.나름 우아하고 세련됐다고나 할까? 인물의 캐릭터를 잘 살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난 작가가 너무 좋아서 그의 나머지 작품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더랬다. 그런데 그의 작품 중엔 어떤 건 벌써 절판이 된 작품도 있어 좀 놀라웠다. 어쨌거나 글은 확실히 긴 여운을 남기게 마련이고, 상상력을 펼치기엔 더 없이 좋다. 더구나 몇몇 에피소드는 영화로는 어떻게 표현됐을까 궁금했다. 특히 이미 말한 광해의 매화틀이나, 왕의 매화라고 더러운 줄도 모르고 기꺼이 맛을 보는 의관들이 어떻게 표현됐을지 궁금해졌다. 광해의 매화라고는 해도 또 이병헌의 그것이기도 하지 않는가?ㅋ

 

하지만 책을 덮었을 때 남는 건 그런 것이다. 아무리 가짜여도 이런 왕은 있을 수 없으며, 왕의 역사는 곧 찬탈의 역사며, 왕좌를 지키기 위해 사람을 믿지 못하는 건 여전하고, 역시 왕과 양반들의 무능함을 또 한 번 보는 것 같아 아무리 팩션이라고는 해도 씁쓸했다. 

 

 

그런데 모든 것엔 장단점이 있게 마련이듯, 같은 작품을 영화로 보니 감회가 새로운 것도 사실이었다. 막연하던 것이 더 뚜렷해지는 것도 있고, 아쉬운 장면도 있다. 예를 들면, 책으로 읽으면서 좋았던 것들이 막상 영화로는 획획 지나가는 느낌이어서 왜 이렇게 아무런 감흥도 없이 지나가는 거지? 하는 것들이 의외로 많았다. 긴요하게 잡아야 할 장면도 너무 밋밋하게 지나가 버리고.

  

그래도 이 영화는 엔딩을 제외하고는 비교적 원작에 충실했다고 보여진다. 감독이 원작에 충실한 영화를 만들기는 나름 쉽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그것도 어찌보면 양날의 검이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것은 원작자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이 될 수도 있지만, 그래서 연출자의 무능이란 약간의 오해를 감수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만일 내가 원작자라면 나는 연출자가 내 작품 그대로를 연출하기 보다 연출자 나름의 해석으로 더 멋있게 표현해 주길 바랄 것이다. 반대로, 내 작품을 연출에서 잘 못 살리면 그 사람하고는 더 이상 상종을 하지 않게되는 건 당연지사다. 그런데 원칙적으론 원작자는 말이 없어야 한다. 해석은 사람마다 얼마든지 다를 수 있고, 지금도 기존에 있어왔던 작품들이 새롭게 해석되고, 재탄생되는 마당에 원작자가 나와 같은 생각이 아니라고 어찌 비판을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말인데, 아마도 이 작품의 원작자는 자신의 작품을 영화로 만들어 준 것에 대해 적어도 싫어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뭐 그 정도면 잘 만든 것 아닌가?

 

그런데, 나 개인적으론 영화는 그래도 뭔가가 빠진 듯한 느낌을 지을 수가 없었다. 책이라면 그 정도면 나쁘지 않다는 느낌인데 말이다. 그게 뭘까? 어찌보면 이 작품은 역사 펙션의 새로운 시각을 부여했을지 모른다. 무엇보다 이 영화가는 노골적인 피의 이미지를 보이지 않고 있다. 물론 거의 영화 말미에 하선을 도망가게 만들고 도부장이 그를 쫓는 장수들과 싸우는 장면은 어쩔 수 없이 피를 흘릴 수 밖에 없지만 그것은 모두 풀샷으로 찍었다. 그렇다면 결국 그런 것이었나? 역사는 어차피 찬탈의 역산데 피 흘리는 장면이 거의 없다는 것에서 약간의 허탈감이 있었다는 것? 나 역시 어떤 영화에서건 피 흘리는 장면은 있어줘야 한다고 생각했던 걸까? 난 그런 거 보기 싫다고 생각했는데 언제부턴가 익숙해진 사관(思觀)이 있었던 걸까?

 

이 작품은 (원작을 포함해서)확실히 차별화된 뭔가가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이 작품은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 것도 같다. 그런데 서글픈 건, 현실에서는 없고, 가짜 또는 이상에서만 존재한다는 점에서 팍팍한 현실을 사는 우리를 위로해 주거나 조롱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우선 현실에서의 광해를 보자. 그는 왕이 되어서도 언제 자신이 죽을지 몰라 불안해하고, 아무도 믿지 못하는 편집광으로 나온다. 때문에 그의 성격은 포악하고, 찔러서 피도 안 나오게 생겼다. 더구나 그는 안 상궁을 은밀히 만나고 그녀에게서 마약도 하는 것으로 나오고 있다. 게다가 양귀비를 태운 공기를 마셔 혼수상태에 빠지기도 한다. 그런 것으로 봐 실제의 광해는 현명한 사고와 판단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은유했던 건 아닌지? 무엇보다 처남인 유종호의 결백을 알면서도 당시의 정사의 늑대들에게 내줘야하지 않느냐고까지 한다. 물론 자신이 살기 위해서.

 

그런데 비해 가짜 광해는 한마디로 가슴이 있었고, 눈물이 있었다. 광해와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광해를 연기해야 했던 하선이 시간이 가면서 가짜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는 진심이 있었기에 결국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 가짜 광해야 말로 진짜 우리가 바라는 지도자가 아니겠는가? 진짜 광해는 그 시대 한 사람만 존재했는가? 그렇지 않다. 모습만 바뀌었고, 정도만 다르다뿐 우리가 아는 광해는 광해 이전에도 있었고, 이후에도 있었다. 자신이 왕이고 지도자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권력에만 아부할 줄 알지 진정으로 백성들의 소리엔 귀기울일 줄 몰랐다. 그것은 그 조선시대 거쳐 오늘 날에도 계속 이어져 오고 있다.

 

왕에게 거는 백성의 소망은 소박하기 이를데 없다. 어미의 생사 확인만이라도 할 수 있다면, 부하가 실수하더라고 책망치 않고 다독임을 받았다면 그들은 자신의 목숨이 조금도 아깝지 않다. 사람은 그런 것이다. 누구든 자신이 누군가에게로부터 인정 받고, 위로 받았다면 그 보다 큰 것으로 갚아주고 싶어하는 여리디 여린 존재. 인정해 주고, 위로해 주는 사람이 자신 보다 크면 클수록 그는 더 큰 것으로 갚아주려고 한다. 우리가 과연 이런 사람을 언제 만나 봤더란 말인가? 언제인지도 모르겠다. 

 

반대로, 마침 어제 우연찮게 <힐링 캠프> 재방송을 봤는데, 배우 이준기가 게스트로 나왔다. 놀라운 건, 그가 군대 가기 전 믿었던 사람에게 호된 배신을 당한 적이 있다고 고백하는 것을 들었다. 얼마나 그 배신감과 상실감이 컸는지, 사람이 나쁜 사람이 될 수 있는 건 순간이겠구나를 그때 처음 깨닫게 되었고, 너무 괴로워 술을 마시고 다음 날 정신을 차리고 보면 자기 집 소파와 샌드백이 칼로 난자가 되어져 있더란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가 그러는데 그의 눈에 악마가 서려있는 것이 보이더란다. 난 그게 이해가 간다. 그것이 어디 이준기 한 사람 뿐이겠는가? 사람은 그럴 수 있는 존재다. 지금도 믿거라 하는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고 미처 돌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가급적이면 인간에게 배신감은 안겨주지 말아야 한다. 그게 신의로 맺어져야 할 사람이라면, 지도자라면, 왕이라면, 대통령이라면 더더욱. 

 

나는 영화의 엔딩이 원작과 달라 정말 좋았는데, 한마디로 울컥할 뻔했다. 하선이 왕의 역할을 했던 건 고작 보름 남짓. 그동안 사람을 어떻게나 감동을 시켜놨던지 당대 따를만한 사람이 없다던 허균조차도 하선이 용안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내내 구박을 받다가도 맨 마지막엔 정중한 인사까지 받는다. 확실히 사람의 진심은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는 것을 영화는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다소의 함정이 있어 보이긴 하다. 정치가 정말 인정주의로만 가능하겠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도 초야에 묻힌 관객이라면 누구든지 안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 카타르시스 한 번하고 영화관을 떠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영화 자본주의 환상은 더 높아지기만 하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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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즈드 노트
유키사다 이사오 감독, 사와지리 에리카 외 출연 / 캔들미디어 / 2011년 10월
평점 :
품절


이야기가 작위적인 감이 없지 않다.

하지만 모처럼 순수함에 푹 빠져 본 영화다. 

생각해 보면 요즘 영화는 이야기 자체의 순수함 보다는 얼만큼 세련되었는가에 더 촛점이 맞혀져 있지 않는지? 그래서 어찌보면 순수함은 촌스럽다는 것과 동의어처럼 되어버린지도 오랜 느낌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저예산으로도 얼마든지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좋은 예를 남긴 영화이기도 하다.

 

 

특히 주인공의 공간(집)이 참 마음에 든다. 창문을 열면 주인공이 짝사랑하는 이시토비가 오르내렸던 돌계단도 마음에 든다. 꼭 이탈리아 풍이다. 영화 분위기도 깔끔하고. 한 가지 흠이 있다면 영화가 조금 길다는 정도?! 그렇게까지 길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일본엔 만년필 전문점이 있는가 보다. 우리나라에도 있을까? 그 보다 아직도 일기를 만년필로 쓰는 사람이 있다는 설정이 생뚱맞기도 하지만 아날로그적 감성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보통은 컴퓨터로 쓰지 않나? 하긴, 영화는 2007년도 작으로, 지금이야 아날로그 방송도 종료된 마당이지만 이때만해도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공존했던 시기다. 물론 그래봐야 디지털에 밀려 아날로그는 거의 있으나마나한 상황이긴 하지만. 그래도 아날로그는 앞으로도 당분간은 유효할 것이다. 

 

또 특이한 건(?) 요즘에도 영화에서처럼 이렇게 순수한 선생님이 계셨나 싶은 것이다. 저 클로즈드 노트의 주인 말이다. 초등학교 교사다. 물론 이제 막 초등학교 교사로 발령을 받았으니 첫 제자들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각별할까? 보고 있으면 나의 초등학교 시절 기억이 새록새록 떠 오른다. 영화는 36명이 한 반으로 되는데, 글쎄 그렇게 30명 정도면 선생님의 관심 반경에 다 들어올 수 있는 인원이 되는 건가? 내가 초등학교 때만해도 한 반은 70명에서 80명 선이었다. 원래 그런가 보다 해서 많은 줄도 몰랐다. 선생님이 그 많은 아이들을 다 신경 써 줄 수 없다는 것도 당연하게 받아들였고, 선생님이 편애하는 아이들이 있다는 것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물론 나는 거의 그 편애하는 아이들 틈에 끼어 본 적이 없지만.  그런데 저 클로즈드 노트의 주인인 마노 이부키는 아이들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아이들의 특징을 파악해 그 아이들에게 맞춤식 상을 수여해 종업했을 때 상을 받지 못한 아이들이 없게 만들었다. 과연 요즘도 그런 선생님이 계실까?

 

보고 있으려니 나의 초등학교 시절이 생각났다. 내가 막 초등학교에 입학했던 장충동에 있는 한 초등학교는 내가 입학하고 1년인가, 2년 있다가 학생들에게 상을 수여하는 제도를 폐지 했었다. 공립학교 중 시설은 제일 좋으면서 왜 그런 어의없는 일을 단행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물론 난 3학년 1학기만 다니고 집이 이사하는 바람에 전학을 가야했는데, 모르긴 해도 그 학교는 그렇게 하는 동안 학생들의 사기가 저하됐을 것이다. 공부를 잘 해도, 선행을 해도 칭찬을 받을 수 없고, 치하를 받을 수 없으니 학생들이 무슨 학교 생활에 흥미를 느끼겠는가? 모르긴 해도 언젠가 학생들에게 상을 수여하는 제도를 다시 부활했을 것이다. 아니 꼭 그래야만 한다.

 

사실 영화에 나오는 이부키 선생은 학생 사랑이 좀 과한 편인 것 같긴 한데, 선생님이 아무리 편애를 해도(그들도 인간 아닌가?) 지나놓고나면 아무리 그렇더라도 선생님은 학생에게 좋은 걸 주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크건 작던. 나도 그렇게 선생님들께 크게 눈에 띄는 학생은 아니었지만(그래도 아주 제외지는 않았다) 그래도 몇몇 선생님은 '참 좋은 선생님이었지' 하는 선생님들도 계셨던 것도 사실이다. 이렇게 사람들 저마다 일생에 한 번은 그런 선생님이 계시지 않을까? 엔딩 부분에서 교통 사고로 세상을 떠난 선생님(그것도 하필 종업식 날?!)을 기리며 종이비행기를 날리는 부분은 작위적이긴 하지만 동시에 뭉클하기는 하다. 이런 사제지간의 정이 남아 있다면 그 선생님께 배운 제자는 이담에 나이 먹어서도 절대로 엇나가지 않을 것이고, 좋은 심성을 가지고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부키 선생의 애인이자 주인공이 짝사랑하는 이시토비 류는 일러스트레이터겸 화가다. 특이하게도 만년필로 그림을 그리는. 그런데 그 그림이 참 마음에 든다. 나중에 개인전도 열더만. 정말 그런 그림이 있는지는 모르겠는데(미술에 대해선 거의 문외한이다) 그만한 필치면 주목을 받을만 하겠다 싶다. 물론 따로 대역은 있겠지?

 

이 영화 정말 가슴 따뜻한 영화다. 훗에 다시 한 번 보고 싶어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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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04 15: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13-02-04 15:34   좋아요 0 | URL
이것, 첫 추천은 저였어요. ^^

2013-02-04 18: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절망은 나의 힘 - 카프카의 위험한 고백 86
프란츠 카프카 지음, 가시라기 히로키 엮음, 박승애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2년 12월
평점 :
절판


내가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솔직히 말하면, 이 책을 읽는데 다소의 망설임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물론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프란츠 카프카라는데 무엇을 망설이겠는가? 그러나 문학을 좋아한다고 해서 세상의 모든 작가를 다 좋아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편견이겠지만, 나 같은 경우 카프카의 작품은 중학교 때 처음 접해보고 왠지 넘지 못할 산맥같아 읽다가 포기한 적이 있다. 그 난해함과 우울함, 약간의 괴기스러움은 내 취향은 아니지 싶었다. 그리고 거기에 굳이 한 가지 이유를 더하자면, 작품의 분위기 못지 않게 그의 삶이 그리 유쾌한 삶은 아니었다는 것도 한몫했을 것이다. 차라리 순탄치 못했다면 그를 이해했을 것 같다. 스스로를 유폐시켰던 삶이 뭐 그리 알고 싶고, 본받고 싶을까?     

사람은 어떤 사람을 사귀느냐에 따라 그 삶도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 책도 그런 것 같다. 어떤 작가의 어떤 작품을 읽느냐에 따라 기분뿐만 아니라, 사고나 영혼까지도 좌우하기도 한다. 실제로 난 그런 경험을 하기도 했는데, 가령 에밀졸라의 <작품>이란 책을 읽다가 주인공의 불행한 삶이 가위에 눌리는 기분이어서 결국 그 책을 다 읽지도 못하고 덮어버렸던 적이 있다. 그후 난 에밀졸라의 책은 선택하기를 주저하게 됐다. 이처럼 책 한 권을 읽어도 사람의 기분을 좌우할 때가 많은데, 이책을 읽는다는 건  나에게 얼마만한 모험이 될런지 알 수 었는 일이었다. 오죽했으면, 이 책을 엮은 가시라기 히로키도 그를 가리켜 '실패의 달인'이라고 했을까? 

하지만 막상 읽어보니 이책은 그리 가위 눌릴만큼 기분이 안 좋아지는 책은 아니었다. 오히려 카프카를 더 알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고 할까? 그러리만큼 이책의 저자는 카프카를 아주 잘 소개해 놓았고, 카프카를 빌어 절망이 현대인에게 어떤 의미인지 아주 간결하면서도 이해하기 쉽게 잘 설명해 놓았다. 솔직히 읽으면서도 저자가 이 정도로 쓸 정도라면 카프카에 대해 상당히 통달해 있지 싶은데 아니나 다를까, 저는 에필로그에서, 학창 시절 <카프카 전집>이 간행 되었을 때 한 권, 두 권 모으는 일이  작은 즐거움이었고, 현재하는 일도 카프카의 작품을 번역하고, 그에 대한 평론을 쓰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카프카는 어떤 사람이였나? 

 

이책을 읽어 본 바에 의하면, 카프카는 무척이나 소심한 사람 같다. 오죽했으면 그가 약혼자 밀레나에게 보내는 편지에 "우유 컵을 입으로 가져가는 것조차 두려워집니다. 그 컵이 눈앞에서 깨져서 파편이 얼굴로 튀어 오르지 말란 보장이 없기 때문입니다.(24p)"라고 했을까? 사실 이 정라면 거의 신경증 환자에 가깝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뿐인가? 그는 평생 부모로부터 작가의 꿈을 인정 받지 못했고, 아버지 앞에서는 기 한 번 제대로 펴 보지 못했다. 게다가 한 작가의 애인이라면 흔히 우리가 생각하듯 아름답고, 지적인 사람일 것 같지만 카프카는 사람을 볼 줄 몰랐던지 우리가 상상하는 그런 여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집에서 일해주는 하녀였다고 한다. 그런 여자와 결혼할 생각을 했던 건 단지 그녀가 카프카에 비해 큰 덩치를 가져서였는데 바로 그점이 왠지 자신을 보호해 줄 것만 같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는 두 번의 청혼에도 불구하고 끝내 결혼을 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결혼도 용기와 책임의식이 있어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는 너무나 나약한 사람이었기에 그도 쉽지는 않았으리라.  

 

또한, 사람이 너무 자기 자신을 과대평가 해도 안 되지만, 과소평가해도 안 되는 법이다. 하지만, 카프카는 늘 자신이 글을 너무 못 쓴다고 학대에 가까우리만치 자책을 했다고 한다. 그것은 아마도 사람 저마다 잘 하고 싶은 일이 있을텐데 과도하리만치 잘 해야한다는 강박 때문에 오히려 못할 거란 생각에 그랬던 것 같다. 그러기에  그는 손대는 작품마다 끝을 본 작품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건 확실히 나에게 새삼 놀라운 부분이긴 했다. 미완성 작품도 작품으로 인정 받을 수 있다니. 물론 그런 작품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보통의 작가의 작품이라면 미완성은 미완성일뿐 그것을 작품이라고 인정할 수 있을까? 나름 그것도 작품이라고 인정해 주는 문단의 풍토가 약간은 부럽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도 카프카였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의 작품이 오늘 날에도 많은 작가들에게 영향을 미친 것을 보면 말이다.   

 

그의 과소 평가는 그의 작업 태도에도 영향을 미쳐, 이미 방대한 양의 원고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늘 작업 양이 부족하다고 말하곤 했다고 한다. 또한 자신은 늘 전업 작가가 되길 원했지만, 빵을 위한 직업에 불만을 가졌다고 하는데 그렇다고 그가 가난하게 살았던 것도 아니다. 실제로 그는 부잣집 아들이었다. 하긴, 아버지가 부자인 것과 자신과는 별개의 것이라는 걸 카프카는 일찌감치 깨달았을지 모를 일이다. 그렇다고 그가 원치않는 일을 한다고 업무 능력이 형편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 능력을 인정 받아 출세가도를 달리기도 했단다. 그럼에도 그는 늘 행복하지 않았다면 그는 확실히 자아상에 적지않은 문제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 인간관계는 원만했을까? 인간관계도 서툴고, 기피하여 자신의 작품을 의뢰할 줄도 몰랐다고  그래서 브로트라는 당대 유명한 대중작가 겸 그의 친구가 대신 출판을 해 주기도 했다고 한다. 왜 그는 그처럼 한사코 당당하고, 적극적인 자기 자신을 인정도, 상상도 하지 못했던 걸까?         

 

절망의 카프카에서 공감의 카프카로...

 

사람이 이해가 가면 연민을 느끼는 걸까 아니면 연민이 느껴지면 이해할 수 있는 것일까? 이런 카프카를 좋아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또 어느틈엔가 그를 공감하기도 하고, 연민을 느끼기도 했다. 특히 그는 학교에 절망하면서, 그는 자신이 받은 교육은 해로운 독에 지나지 않았다(106p)고 일기에 토로하곤 했는데, 나는 왠지 깊은 공감이 갔다. 나 역시 중학교 2학년 때를 제외하고, 어떤 시기에도 학교를 결코 좋아해 본적이 없었으니까. 그나마 중학교 2학년 때 잠깐 학교도 어쩌면 다녀 볼만한 곳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왜 그런지에 대해선 나도 잘 모르겠다. 그냥 그 시절에 알았던 친구들이 좋았던 것 같다. 하지만 이후 나의 의지와 상관없는 입시 한파에, 더욱 깊어지는 고질적인 사춘기 병(?)이 학교를 불신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또한 카프카는 친구 관계에 희망은 없다며, 그가 친구관계에 대해 나름대로 정리한 것은, 그것은 허무한 도움닫기였다(178p)고 단편에서 고백하기도 했는데, 그건 나도 같은 생각이다. 솔직히 나이가 먹으면 먹을수록 친구관계를 유지해 나간다는 게 쉽지 않다. 이해할 수 없는 건, 지난 번 만났을 때만 해도 까르르거리며 잘 지냈던 친구가 오늘 다시 연락을 해 보면 이유없이 화를내고, 으르렁 거리는 것이다. 내가 특별히 잘못한 것 같지도 않은데 그렇다면 이 친구는 그동안 나를 만나오면서 가졌던 불만을 참고 있다가 표출을 한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의 문제에 빠져 누가 건드리기만 폭발 일보직전의 찰라였는지, 그걸 알 수가 없다. 아무튼 그 후 이내 서로 연락을 하지 않고 있으며, 멀어져간 친구가 몇 명 된다. 그러면서 나는 친구에 너무 연연해하지 않으며, 새롭게 누구를 만나게 될지라도 현재 만나고 있는 것에 충실할 뿐 거기에 그 어떤 의미도 부여하지 않겠다고 다짐할 뿐이다. 하긴, 그런 일이 없던, 있던 친구는 한때 친구일 뿐 한번 멀어지기 시작하면 좀처럼 다시 가까워지지는 않는 것 같다. 그나마 지금도 오랜 세월을 두고 변함없이 만나는 친구가 두어 명 정도 있는데 그만도 나쁘지만은 않은 것 아닌가? 물론 그들도 언제 연락이 끊길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카프카는 친구 관계를 허무한 도움닫기로 표현했는데, 그건 맞는 말 같다. 

카프카는 심약한 자신을 자책하곤 했다. 왜 그런지에 대해선 여러가지로 생각해 봐야겠지만, 아무래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부유한 환경에서 문학을 좋아고, 생각이 많은 사람의 하나 같은 공통점은 아니었을까? 또한 그는 당대 훌륭한 필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작가로 인정 받는 것. 작가가 돼 제대로 된 돈을 벌며 산다는 것의 어려움에 대해 자주 툴툴거렸다고 한다. 그건 그때나 이때나 작가라면 하나 같이 공감하는 바일 것이다. 또 많은 작가지망생들이 바로 이 이유 때문에 바로 작가의 길로 들어서지 못하는 이유가 되기도 하는 것이겠지. 

 

그는 삶 모든 부분에서 다 절망을 했다. 미래에 대해서, 직업에 대해서, 결혼이나, 자식 또는 인간관계는 물론이고, 학교나 직업, 음식 등, 하다못해 꿈이나 진실에 대해서까지도 절저하게 절망했다. 과연 이런 사람이 또 있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다. 왜 그리도 절망함으로 자신을 철저히 짓밟았던 걸까? 그건 사랑을 받지 못한 것에 기인한 것이라고 쉽게 추측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말했다시피, 그는 아버지에게 인정 받지 못했으며, 어머니나 다른 형제들에게도 받아들여지지 못했으니 그럴만도 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것이 이유의 전부는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카프카의 절망은 무엇이었을까?

 

고백컨대, 나는 이 책을 읽기를 잘 했지만, 동시에 이 책을 읽기를 또한 잘못했다는 생각을 한다. 잘한 것은, 이 책으로 인해 그동안 외면만했던 카프카에 대해 다소나마 관심이 생긴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이책의 작가의 의도처럼 과연 카프카가 절망만 했던 사람이었을까에 의문을 가져본다. 그것은 저자가 테마를 그렇게 잡았기 때문에 그런 스펙트럼에서 보자면 카프카는 실패의 달인이고, 절망의 왕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르긴 해도, 저자는 요즘 너무 팽배해 있는 하면 된다는 식의 지나친 낙관주의나, 반대로 염세주의를 경계하기 위해 이책을 썼던 건 아닌가 싶다. 뭐든 지나치면 모자란만 못하다고 하지 않는가. 

 

나는 카프카가 절망만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절망을 했다면 왜 절망할 수 밖에 없는지도 알아야 하고, 힘이라고 얘기했던 것처럼 그는 이 절망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그는 거의 모든 것에 절망했지만 한 가지 절망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문학이었고, 자신이 작가라는 사실을 늘 잊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작가는 어떤 족속이냐는 것이다. 만일 정말 우리가 유토피아에 살고 있다면 그 세계에서 가장 먼저 없어져야 할 직업은 바로 작가일지도 모른다. 불만이 없는 완벽한 세계. 여기에 불만 많은 작가가 필요할까? 역대로부터 작가들은 끊임없이 인간과 세계의 불일치에 대해 그 불만을 끊임없이 들춰냈던 족속들이다. 거기에 카프카도 존재해 있었다. 누구는 불만이 나의 힘이라고 했다. 작가는 바로 이 불만과 불일치를 글로 쓰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세상의 변혁을 가져온다고 믿는 것이다. 인간이 불만을 토로한다는 것은 그만큼 그 안에 이상적인 세계가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불만을 갖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작가는 혁명가가 아니다. 다만 끊임없이 불만을 토로하며 문제제기만을 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카프카의 절망이란 건 그 나름의 방식으로 끊임없이 불만을 토로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것이 어떤 사람 보기엔 절망하는 것처럼 보여졌던 건 아닐까? 

 

더불어 그가 절망하지 않고 불만으로 삶지 않았던 유일한 삶의 분야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아이러니 하게도 죽음이었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였냐면, 살면서 그는 늘 불면중에 시달렸는데, 죽음을 생각하자 마음에 편안을 느끼며 비로소 잠을 잤다고 했다. 사람이 너무 염세주의에 빠져 죽음만을 생각하는 것도 문제긴 하겠지만, 오늘 날의 세대는 건강 염려주의의 세대다. 어떻게 하면 건강하게 오래 살 것이냐에만 온통 관심이 가 있지 죽음에 대해선 통 관심이 없다. 거기에 죽음을 오히려 기대했다던 카프카는 오히려 기이하기까지 하다. 그가 너무 이른 나이에 죽어서 그렇지 죽음에 대해서도 좀 기대하며 사는 것도 살기 위한 또 하나의 방법은 아닐까? 아무튼 그는 우리가 잘 아는대로 이내 결핵으로 절명하고 만다. 아마도 그제서야 그의 이 세상에 대한 불만과 절망이 끝나지 않았을까? 아니면 저 세상에서도 그가 타고난대로 절망을 했을지 알 수 없다.

 

그래도, 작가에게 문학은 구원이다 

 

나는, 카프카가 다른 모든 것을 배신했지만(난 왠지 그의 절망이 세상에 대한 등돌림 곧 배신처럼 느껴졌다), 끝까지 자신이 작가였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는 게 마음에 든다. 그 절망을 문학으로 승화시킬 줄 알았던 카프카는 진정한 작가고, 작가에게 있어 문학이 구원이었다는 건 틀림없는 사실인 것 같다. 그래서 난 이 책을 읽고나서야 비로소 카프카를 알고 싶어졌다. 그래도 기왕이면 그를 알고자 원했다면 순수하게 그의 작품으로 알았으면 좋았을 것을 내가 너무 게을렀다는 생각이 든다. 

문학에서만은 절망하지 않고 희망했던 카프카. 이제 그를 만나러 가야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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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3-01-29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 수는 높은데, 댓글은 없네요. ㅋㅋ
이 책 벌써 읽으셨군요. 이 책의 어떤 구절에서 글감을 얻어서
글을 쓸 예정이었어요.
절망 속에서 사는 사람도 성공의 길을 걸을 수 있다는 것 같아서
책 제목이 맘에 듭니다. ^^

작가들은 희망보다는 절망을, 낙관보다는 비관을 향한 사람들 같아요.
그렇게 어두운 색채를 띤 작가들이 좋은 작품을 쓰는 경향이 있고요.
그래서 밝음을 가진 사람들은 소설을 쓰지 못할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갖게 되어요.
어두우면 사색적, 철학적이 되어서일까요?
(늦게 와서 미안합니다.^^)

stella.K 2013-01-29 18:03   좋아요 0 | URL
오, 아니어요. 이렇게 와서 봐 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하죠.
정말 이책은 할 말이 많은 책 같았어요.
그보단 카프카 자체가 할 말이 많은 작가인 것 같습니다.
맞아요. 절망속에 산다고 성공하지 말라는 법이 없는 것 같더라구요.
하지만 행복하지는 못한 것 같아요. 그걸 또 구분해야 하다니...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