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는 힘이 세다  

 

사람의 유전자엔 기본적으로 이야기를 좋아하는 성질이 있다고 한다. 그 말이 맞기는 맞는가 보다. 유년 시절 아무나 보면 옛날 이야기를 해 달라고 조르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또 그만큼 이야기를 잘 해 주는 사람은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는 법이다. 그러므로 이야기를 잘하는 것도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어릴 적, 우리는 흔히 옛날 이야기는 할머니가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다음으로 많이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선생님이 아닐까? 선생님은 아는 것도 많을 테니 그런 기대가 많은 거겠지. 이왕 선생님 얘기가 나왔으니 내 인생의 선생님들을 얘기해 볼까 한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자신을 가르쳐준 선생님을 잊을 수 있을까? 물론 스승의 은혜란 노래도 있긴 하지만 솔직히 은혜를 헤아려 보라고 하면 제자 된 입장에서 그것이 다소 버거울 때가 있다. 물론 그분들의 특징이나 일화들을 생각해 보라면 얼마든지 하겠지만 말이다.  

 

예를 들면, 나는 초등학교를 들어가기 전 유치원에 가는 대신 피아노 개인 교습을 받은 적이 있다. 즉 이 선생님이 내 생애 최초의 선생님인 셈이다. 그 선생님은 종종 유난히 희고 긴 팔과 손가락으로 피아노 앞에 앉은 나의 등 뒤에서 서서 내가 쳐야 할 피아노 곡에 몸소 시범을 보여주곤 했다. 그럴 때면 선생님에게서 향수냄샌지 비누냄샌지 모를 냄새가 났고, 또한 선생님이 피아노를 칠 때면 건반과 손톱이 탁탁 부딪히는 소리가 났는데 난 그 모두를 좋아했다. 특히 선생님의 손톱에서 나는 소리를 듣다 보면 잠이 저절로 올 것만 같고 나는 왜 저런 소리가 나지 않을까 안타까워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것만 빼면 나는 피아노 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피아노 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니 가끔씩 선생님과 갈등을 빚곤 했는데, 유난히 피아노가 잘 안 쳐지는 날엔 영락없이 선생님께 혼이 나곤 했다. 그럴 때면 나는 피아노를 마치고 선생님 집을 나설 때 (닭똥 같은 눈물은 이미 피아노 칠 때 한 차례 흘렸고)볼멘 소리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일 안 올 거예요.” 한다. 그러면 선생님도 차갑게 그래. 오지 마.”하곤 내 등뒤에서 대문을 쾅 닫히는 소리를 듣는 것이다. 그러면 그게 또 얼마나 서럽던지.

 

하지만 그 다음 날 나는 어김 없이 피아노를 배우러 선생님 댁에 갔다. 그도 그럴 것이, 전날 선생님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엄마한테 말하지 않았다. 그랬다가 엄마는 오히려 나를 혼낼 게 뻔했기 때문에. 그러니 또 그렇게 집을 나설 수 밖에.  

 

그렇지 않아도 내 덩치 보다 두 배는 커 보이는 피아노에 주눅들어 있었는데 할 수만 있으면 엄마와 피아노 그리고 선생님과 평화롭게 잘 사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러려면 전날 무슨 일이 있었냐 싶게 집을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 다행히도 선생님 역시 전날 있었던 일 가지고 뭐라고 그러진 않는다. 정말 쉽지 않은 인생의 서막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 담임 선생님은 좀 무서웠다. 아이들이 조금만 잘못해도 꾸짖는 것이다. 그런 것을 보면 그 분은 선생님으로서 학생들을 어떻게 다룰지 나름 아는 분 갖기도 했다.  

 

지금도 기억이 나는 건, 선생님이 갑자기 무슨 일을 하다 외마디 울음 소리를 내고는 그대로 교탁에 머리를 파묻고 한동안 꼼짝도 안 하는 것이다. 선생님은 그런 모습을 이후에도 몇 번인가 보이셨는데 그런 때가 되면 아이들은 떠들다가도 찬물을 끼얹듯 일순간 조용해진다. 그리고 아이들은 저마다 선생님이 울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몇 분 지나지 않아 선생님은 몸을 일으키시더니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하던 일을 마저 하곤 했다.

 

나는 또 그게 걱정돼 심각하게 언니에게 말했더니 언니는 선생님이 피곤해서 그러는 걸 거라며 별 대수롭지 않게 받아 넘기는 것이었다. , 하여간 언니는 일생 도움이 안 된다.

 

하긴, 한 반에 80명이나 되는 아이들이 바글대고 있었으니 힘들기도 하시겠지. 하지만 선생님의 그런 모습은 확실이 반전이긴 했다. 그렇게 아이들을 엄하게 다루기로 정평이 나신 분이 그런 약한 면도 있었으니 말이다. 지금도 가끔 선생님을 떠올리면 그때 어딘가 아프셨던 건 아닐까? 아니면 유난히 사는 게 힘들고 고달프셨던 걸까? 걱정도 되고 궁금하기도 하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만난 담임 선생님은 남자 분이셨다. 그렇다고 눈에 확 띄는 미남 선생님을 생각하면 안 된다. 그야말로 그 시절 전형적인 아저씨상 그 자체였다.

 

난 그 선생님이 1학년 때 선생님 보다 낫다고 생각했는데, 선생님은 나에게 매를 대신 적이 없었고 오히려 예뻐해 주셨다. 하지만 나 아닌 몇몇 아이들에겐 아주 무섭게 대하셨는데 구체적으로 얘기는 하지 않겠지만 그렇게 하신 것이 일벌백계의 전형을 보이기 위한 선생님 나름의 교육 방법이었을 것이다. 선생님은 가끔 웃긴 이야기도 해 주셨는데 난 선생님이 그렇게 몇몇 아이들을 거칠 게 다뤘다는 점 때문이었는지 나를 예뻐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좋은 선생님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리고 3학년 때 만났던 선생님이야말로 내가 막연하게 그렸던 좋은 선생님의 전형을 보여준 분이 아닌가 한다.

 

초등학교 3학년쯤 되니 아이들도 나름의 촌티를 벗고 제법 학생티가 나지 않았을까? 그도 그럴 것이, 자기들 밑으로 두 학년이나 후배들이 생겼고, 학교생활도 제법 익숙해졌을 테니 나름의 관록이 붙었을 테지. 그리고 그에 걸맞게 어느 나른한 봄날 공부하기 싫은 아이가 총대를 매듯 선생님, 옛날 이야기 해 주세요.” 하면 연이어 전염 돼 반 아이 전체가 일제히 옛날 얘기해 달라고 아우성을 쳤을지 모를 일이다. 또 그렇지 않으면 선생님이 인심이라도 쓰듯 자청해 언제가 들려줘야지 한 이야기로 아이들을 사로잡았던 것은 아닐까?

 

그 어느 쪽이어도 좋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시작된 이야기는 뜻밖에도 고대 이스라엘 이야기이다.

옛날 이야기를 해 달라고 하면 대부분 우리나라 전래동화 같은 건데 일단 이국적인 느낌이 좋았다. 그리고 그것은 그 나라에서 총리대신까지 올랐던 요셉이란 사람의 이야기다. 형들과 잘 지내지 못해 온갖 누명과 설움 속에도 신앙의 정절과 근면함으로 일궈낸 인간 승리이자 영웅의 이야기는 내 어린 마음에도 신선함을 넘어 묵직한 감동으로 전해져 왔다. 난 너무 감동스러워 선생님의 이야기를 아예 외워버릴 정도였다.

 

그게 또 어느 정도냐면 기러기 새끼는 알을 깨고 나오는 순간 제일 먼저 보는 사물을 자기 어미로 인식한다. 거기서 나온 말이 각인 효과라고 하지 않던가? 그처럼 난 한동안 마치 오래 전부터 그 얘기가 나를 위한 이야기처럼 나의 모든 것이 점령당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훗날 내가 기독교에 귀의하고 성경이란 것을 처음 읽기 시작한 중학교 3학년 어느 날 창세기를 읽었을 때 전기에 감전이라도 되는 줄 알았다. 바로 거기에 그 옛날 선생님이 들려 주셨던 요셉 이야기가 실려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가끔 그 선생님을 떠올릴 때면 그 이야기의 출처가 어디에 있을까 궁금했었다.

 

나는 또 그때야 비로소 그 이야기를 들려주셨던 선생님의 의도를 알았다. 선생님은 그 이야기를 통해 아이들이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아가길 바랬을 뿐 아니라 신앙을 갖게 되길 바라셨던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내가 어느 특정 종교를 선전하기 위해 이 글을 쓴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보다 난 어린 시절 들은 이야기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하고 싶다.                   

 

아무튼 성인이 되어 요셉의 이야기는 여러 각도에서 연구되고 표현 된다는 것을 알았다. 하긴 나도 이렇게 감동스러운데 세상에 이야기를 다룰 줄 안다는 작가들이 이런 이야기를 가만 놔 둘 리가 없다. 그 중 가장 어린 아이들이 좋아할만한 작품은 앤드류 로이드 웨버와 팀 라이스[1]가 콤비를 이루어서 만든 뮤지컬<어메이징 조셉 드림 코트>이 아닐까 한다. 나는 언젠가 이것을 우연히 TV를 통해 본적이 있는데 정말 환호하리만치 잘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또한 2001년도에 독일 문학의 거장 토마스 만의 <요셉과 그 형제들>(살림 간)이 한국어로 번역되어 나왔다. 그 작품은 한 권의 분량이 무려 4백 쪽 넘었고, 그런 책이 7권이나 된다. 성경에 요셉에 관한 분량은 몇 장 되지 않는데 어떻게 그렇게 방대한 저작으로 남길 수 있는지 그저 놀랍다는 말 밖에는 할 말이 없다.  

 

무엇보다 그 책은 기독교 신앙을 옹호하기 위해 썼다기 보다 신화적 관점에서 썼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에 비해 송봉모 신부가 쓴 <신앙의 인간 요셉>(바오로딸 간)란 책은 그야말로 요셉이라고 하는 성서 인물을 깊이 있게 묵상하고 쓴 책인데 개인적으로 이 책이 감동이 있고 무척 마음에 든다.

 

이렇게 요셉 이야기를 대할 때마다 나는 초등학교 3학년 때의 담임 선생님이 생각이 난다. 아이들을 사랑하고 온유하게 대해 주셨던 모란꽃 같은 선생님이셨다.

 

하지만 왜 사람마다 그런 거 있지 않나? 나에게 좋은 사람은 오래 곁에 있어주지 않는다는 묘한 징크스 같은 거 말이다. 그래서일까? 그 선생님과 나와의 인연은 그리 오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난 그 해 여름이 시작될 무렵 몸이 급격히 안 좋아 병원에 입원을 해야 했고, 또 가을엔 살던 곳에서 이사를 해 아예 학교를 옮겨야 했다.          

 

그렇다고 성격이 좋아 사람들을 잘 챙기는 스타일도 못 되어 선생님은 늘 가슴 속에만 있지 한 번도 찾아 뵙지도 못했다. 물론 찾아 뵙지 못하는 선생님이 어디 그 선생님뿐이겠는가? 제자가 되어 훗날 잘 찾아 뵙지도 못할 거면서 선생님이 좋은 분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건 확실히 의미가 없어 보인다. 그분들도 알고 보면 아이들에게 정 안 줄려고 노력하며 사시는 줄도 모른다. 사제지간이래 봤자 길면 1, 2년이고 짧으면 몇 개월이다. 그래도 어떻게 나를 가르쳐 준 선생님들을 잊을 수 있겠는가? 거기에 덤으로 평생 가슴에 잊지 못할 이야기를 새겨 주신 선생님을 잊지 않고 살고 있다면 그도 복된 인생이겠다 싶기도 하다.

 

이렇게 이야기는 힘이 세다. 영혼까지도 사로잡으니 말이다. 하지만 또 그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은 더 세지 않을까? 이렇게 오래도록 선생님을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사람이 되고 싶은가? 그렇다면 이야기를 선물해라. 그럼 그 사람이 오래도록 잊지 않고 당신을 기억할 것이다. 

그나저나 그 선생님은 잘 계신지 모르겠다.          

                 

 

       



[1] 이들은 세계적인 뮤지컬계의 거장들로서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에비타>, <캐츠> 등을 작사 작곡한 사람들이고, 이들은 정말 탁월한 스토리텔러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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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22 00: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5-22 13: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푸른기침 2014-06-28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셉과 그 형제들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토마스 만의 작품입니다.^^
이젠 없앤 책이지만 이리 표지라도 보니 마음이 찡합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많은 생각을 던져준 작품이지만 이젠 읽을 형편이 안되네요 ㅠ
멋진 주말요

stella.K 2014-06-28 16:09   좋아요 0 | URL
와~ 푸른기침님은 저를 어디까지 놀라게 하실 건가요?ㅎ
이 책을 아시는군요. 왜 없애셨습니까?
저는 완독은 아직 못하고 있습니다만
7권까지 다 가지고 있습니다. 정말 좋은 책은 못 버리겠더라구요.ㅠㅋ

푸른기침 2014-06-28 16:15   좋아요 0 | URL
스텔라님이 가지고 계신 책이 필요없어지는 순간이 오면 제게 넘기심이 ㅋ
예전에 <요셉과 그 형제들 깊이읽기>를 놓고 읽던 추억이 떠오르네요.
가끔 추억만으로도 설렙니다.
근데 예전 닉네임에도 K가 들어갔나요. 너무 오래전이라 기억이 가물가물....

stella.K 2014-06-28 16:27   좋아요 0 | URL
ㅎㅎ 그땐 K가 아니라 09가 붙었죠.
근데 저도 궁금한 게 있습니다.
지금의 닉넴 전에 어떤 이름이셨는지?
날 것이라고 하셨잖아요.
옛 이름이면 제가 알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2014-06-28 16: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6-28 16: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6-28 16: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4-06-29 14:31   좋아요 0 | URL
제 기억도 아직 쓸만하긴 하군요.ㅋ
 

인생을 살면서 몇 개의 통과의례가 있듯 책도 그런 게 있지 않나 싶다.

초등학교 시절 학교를 지독하리만치 싫어했던 나는 그나마 학교를 견딜 수 있었던 건 책이 있었기 때문은 아닌가 싶다. 책을 읽고 사 모으는 낙이 없었다면 그 사막 같은 곳을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랬다고, 중학교를 들어가니 그렇게 애지중지 모았던 계림문고의 책들이 어느 순간 더 이상 좋아 보이지가 않았다. 중학생이면 어른은 아니지만 더 이상 애들도 아니니 애들이 보는 책들은 그만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책들을 모두 팔아버렸다. 3년 간 모았던 책이니 상당했을 텐데 그것을 팔아버렸는데도 조금도 아깝지가 않았다. 그런 것을 보면 나의 유년 시절이 가긴 갔나 보다 했다.

 

어쨌든 그에 따라 책도 이제 더 이상 문구점에서 사는 일도 없었다. 대신 시장에 있는 서점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시장 근처엔 두 곳의 서점이 있었는데 그 중 괜찮다 싶은 곳을 집중적으로 다님으로 단골이 되었다. 무엇보다 그곳 주인 아저씨가 정말 좋았다. 풍채가 좋고 후덕하게 생긴 인상만큼이나 사람을 편안하게 대해줘서 나는 꽤 오랫동안 그 서점을 자주 이용하곤 했다. 그리고 이제 나의 관심은 시시한 코흘리개 아이들이나 보는 가로줄 책에서 성인이나 볼 법한 세로줄 책으로 옮겨갔다.

지금 세로줄로 된 책을 읽으라고 하면 못 읽을 것 같다. 하지만 지금도 책이 여전히 세로줄로 나온다면 세로줄로 봤을 테지. 그만큼 우리나라 책의 가로줄의 역사가 그다지 오래지 않다는 얘기다.

 

난 이제 더 이상 어린 아이가 아니니 세로줄 책을 읽는 거야 당연한 것이긴 한데 그때나 지금이나 하나 같은 의문은 왜 세로줄 책이 있었냐는 거다. 물론 옛 고서들이야 그렇다고는 해도 현대에 들어와서도 출판사들마다 여전히 세로줄로 책을 내놓는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긴 그땐 신문이 세로줄인데 책이라고 가로줄로 냈겠는가?(모르긴 해도 그건 일본문화의 잔재는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도 해 본다.)

세로줄 책은 확실히 불편하긴 했다. 눈 다래끼[1] 걸린 눈이나 졸린 눈으로 책을 읽으면 영락없이 읽을 데를 또 읽는 경우가 많아진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읽을 운명을 타고난 사람은 그렇게라도 읽는 수 밖에.

 

어쨌든 그렇게 어른스러운 것 아니 적어도 어린 아이 같지 않은 책을 읽으려 하다 보니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 다소 막막했다. 학교에서는 만날 고전을 읽으라는데 그것도 재미가 있어야 읽을 것이 아닌가? 그러다 보니 신간에 눈이 가기도 하고, 마침 청소년을 겨냥한 책들도 속속 나와 있어 그 두 분야를 오가며 읽기 시작했다. 또 그러다 보면 거의 필연적으로 어느 새 에로틱한 소설에도 눈이 가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도 그럴 것이, 청소년 시기는 성에 눈을 뜨는 시기이기도 하니 유독 민감한 건 어쩔 수가 없는 것 같다.

 

미워했다면사랑한 미워했다면사랑한 미워했다면사랑한

그런데 어느 날 서점에서 책을 고르고 있다 우연히 발견한 <채털리 부인의 사랑>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제목이 조금 수상하긴 했지만 하이틴 로맨스처럼 분홍 책 류로 나왔더라면 아예 손도 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 책은 당당히 고전 명작에 끼어있었다. 수상한 이유는 한 가지가 더 있었는데 아예 도스토예프스키나 톨스토이 같이 누구나 알아주는 고전이었다면 이것 역시 나중에 읽어 보겠다고 했을 것이다.

 

채털리 부인의 사랑이라! 고전이라고 해도 전에 들어 보지 못했으니 마치 신간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게다가 주인 아저씨는 거의 매번 내가 책을 고르는 안목을 칭찬하며 그에 대한 간단한 코멘트를 하곤 했는데 그 책도 나름 긍정적인 코멘트를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2]. 그래서 나는 조금의 의심도 없이 그 책을 사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만약 그때 주인 아저씨의 얼굴에서 조금이라도 묘한 웃음이 스쳤다면 나는 그 책을 사지 않거나 샀어도 꽤 떨떠름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책은 분명 고전이었다. 누가 고전에 묘한 웃음을 짓겠는가? 게다가 나는 고전엔 에로티시즘은 존재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건 하이틴 로맨스나 썬데이 서울같은 잡지에나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내가 그 책에 대한 아저씨의 긍정적인 얘기도 들었겠다 집으로 오면서 나 자신 그 동안 책을 고르는 안목이 많이 좋아진 것 같아 어깨가 절로 으쓱거릴 정도였다.  

 

그렇게 난 그날로 그 책을 조금씩 읽기 시작했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뭔가 이상했다. 좀 지루하지만 그렇다고 던져버리기엔 뭔가 아쉬움이 있었다. 안개에 쌓인 듯 몽환적이기도 하고 묘하게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뭐라고 해야 할 지 어린 나로선 뭐라고 표현하기가 어려웠다. 그렇게 읽다 어느 순간 정사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채털리 부인이 남편도 아닌 정원사와 정사를 하다 마침내 오르가슴에 도달해 한껏 고조된 느낌으로 아아, 좋아요.” 하는데 왜 그리도 화끈거리던지. 지금은 그런 장면이 나오면 그런가 보다 하겠지만 그땐 그런 책이 처음이라 채털리 부인의 이 외마디 외침이 왠지 그 부분만 도드라져 크게 확대되어 보이는 것이었다.

 

나는 그 부분을 읽고 책을 덮었다. 그리고 며칠을 고민을 했다. 무엇보다 이 책이 왜 고전이라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이 책은 분명 학교에서 금하는 소위 분홍책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내가 서점에서 그 책을 뽑아 들었을 때 주인 아저씨는 왜 제지를 하지 않았던 걸까? 그랬으면 사지도 않았을 텐데. 그 책 한 권 더 팔았다고 떼 부자 될 것도 아니지 않는가?   

 

그건 확실히 좀 충격적이었다. 마치 에덴 동산에서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눈이 밝아졌다는 아담이나, 판도라가 닫혀 있던 상자의 뚜껑을 연 것에 비견되리만큼 나에겐 적지 않은 사건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아담은 혼자만 눈이 밝아지게 되길 바라지 않았다. 그와 함께한 하와도 자신과 같아지길 바랬다. 그래서 부창부수를 이루지 않았는가? 친구 역시 지란지교로 우정을 쌓아나가야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이 엄청난 복음을 나만 알고 있어서야 되겠는가? 그래서 이것을 반 아이들에게 알릴까 말까를 고민하다 결국 알리기로 결심했다. 특별히 내게 크게 확대되어 다가온 그 부분을 아이들에게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세상에 비밀이 어디 있겠는가? 얘네들도 언젠가 알게 될 책을 조금 일찍 알게 되는 것뿐인데.

 

그때 아이들의 반응은 가히 상상을 초월했다. 나 자신 그렇게 반응이 뜨거울 줄은 상상도 못했다. 공히 말하건대, 남자만 늑대 울음 소리를 내는 것은 아니다. 여자 역시 여우 울음 소리를 낸다.

아우우~!”

그런데 누가 보면 정말 드라마 같이 짰다고 하겠다. 그 순간 여우들의 아우성을 듣기나 한 걸까? 국어 선생님이 교실로 들어 오시는 것이 아닌가? 그때가 중학교 2학년이었는데 그때 만난 국어선생님은 1학년 선생님과는 달라 느끼하고 까탈스러운 데가 있어 아이들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 선생님에게 딱 걸렸으니 나는 분명 혼이 날지도 모른다고 했다.     

 

하지만 또 마음 한 구석엔 정말 선생님은 이 책을 어떻게 생각할지 그 반응이 궁금하기도 했다. 분명 <채털리 부인의 사랑>은 에로티시즘이고, 우리들은 아직 그런 책을 보면 안 된다. 내가 이 선생님께 혼이 나고 책을 압수를 당한다면 그 책을 청소년에게 판 서점 아저씨가 잘못인 거고, 압수하지 않는다면 명작인 게 맞고 책을 선택하는 나의 안목이 상당한 수준인 것이 증명되는 셈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선생님은 그 책을 만지작거리며 몇 마디 하더니 나에게 그냥 돌려주는 것이었다. 후자의 승리인 셈이었다. 선생님 역시도 서점 아저씨처럼 이 책에 대해 비아냥거리거나 묘한 웃음 같은 건 짓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이 책은 뭔가 대단한 책임에 틀림없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학교가 규제하는 분홍책의 규준은 무엇이었을까? 어린 나로선 헷갈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쨌거나 나는 그 일이 있고 나서 <채털리 부인의 사랑>을 수일에 걸쳐 완독했고, 더불어 책을 보는 안목이 한층 더 깊어진 듯 했다. 그리고 나의 그런 책 선택에 묵언의 용기를 줬던 서점 아저씨나 국어 선생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생겼다. 그 분들이 아니었다면 영국에 그런 숨은 거장이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겠는가?

 

그런데 나는 또 왠지 이때부터 하이틴 로맨스를 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솔직히 그때까지 하이틴 로맨스엔 눈길도 안 줬는데 또 누가 아는가? 거기에도 숨은 명작이 있을지. 내가 그때까지 하이틴 로맨스를 읽지 않는 이유는 학교가 금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읽을 시간이 없어 안 읽고 있었을 뿐이다. 그건 (애석하게도)만화도 포함이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책을 빨리 읽을 수 없는데 언제 그런 책을 읽겠는가? 책에 있어서 만큼은 갈 길이 너무 멀기 때문에 한 눈 팔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워낙 모범생(?)이었던 만큼 학교에서 금하는 것을 해서 곤란에 빠지는 것을 나 자신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역시 하이틴 로맨스는 재미가 없다. 꼭 다른 명작과 비교해서 질이 떨어져서 만도 아니다. 그도 한 자락 깔고 읽으면 읽을만하다고 생각한다. 단지 내가 재미없다고 생각한 건, 난 이미 <채털리 부인의 사랑>을 읽었기 때문에 하이틴 로맨스는 차라리 건전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재미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내가 몇 권 읽지 않아 확실히 뭐라고 얘기는 못하겠지만, 내가 읽은 책에는 남녀가 옷을 벗고 화끈하게 정사를 하는 장면은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물론 로맨스인 만큼 사장과 여비서간의 사랑 뭐 그런 건 나오는 것 같다. 그것도 관계가 비정상적인 것도 아니다. 기껏해야 배우자와 행복하지 못해 고독해 하는 남자를 여자가 위로해 주는 그런 내용이 주였다. 그런데 이 정도 가지고 학교가 검열을 한다면 학교는 하이틴 로맨스의 수준 보다 낮아도 너무 낮은 것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나 혼자만의 생각일 뿐이었다.

 

어느 날 불시에 담임 선생님은 아이들의 소지품을 책상 위에 꺼내 놓으라고 했다. 그리고는 자기 뒤에 앉은 아이의 소지품을 검사해 학교가 금하는 물건이 있으면 그걸 앞으로 앞으로 전달해 선생님이 있는 교탁까지 가는 방식을 썼다. 그건 좀 확실히 비열한 방법이긴 하다. 여기가 무슨 빨갱이 공산당도 아니고, 압수하려면 선생님이 직접 수거를 할 일이지 동급생들끼리 이게 뭐 하는 짓이란 말인가 


 
어쨌거나 나는 멋모르고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내 뒤의 아이가 문제가 될 만한 소지품을 가지고 있나 알아 보는 사이 내 앞의 아이가 바로 내가 읽고 있던 하이틴 로맨스를 낚아채듯 순식간에 앞으로 앞으로 전달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순간 당황하여 작은 목소리로, “, 그거 왜 가져가?”했다. 그리고 그 친구가 야속하다고 느낄 새도 없이 선생님은 나를 빤히 쳐다보며 왜 가져 가긴 왜 가져가!” 하며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어찌나 무안하던지.

나는 단지 내 책이 그 친구에게 들켜 화가 나서가 아니다. 내가 그 책을 읽어 본 바에 의하면 그 책은 압수 당하고 할 만큼 대단한 책이 아니었다. 한마디로 그런 한심한 책을 선생님이 압수하겠다니 좀 어이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문득 생각해 보니 그건 나나 그렇게 생각할 일이지 선생님이 그렇게 생각할 리가 없었던 거다.

적어도 선생님이 학생의 소지품을 압수하려거든 정말 그 물건이 압수할만한 것인지 알아야 한다. 나는 선생님께 묻고 싶었다. 선생님은 하이틴 로맨스를 읽어나 보셨냐고? 그리고 압수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 되시냐고.

이 정도 가지고 나쁘다고 하면 아이들이 주말 연속극은 어떻게 보겠는가?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 아이들치고 주말 연속극 안 보는 아이가 얼마나 되겠는가? 드라마 제작자들이 어디 아이들의 정서를 고려해서 드라마를 만드는가? 그저 심의규정만 지키려고 할 뿐 그건 내가 본 하이틴 로맨스 수준이거나 그 보다 수위가 높다.

 

더구나 지금은 남녀공학이 많아졌지만 그때는 초등학교만 졸업하면 적어도 6, 여자는 대학을 여대를 진학한다면 무려 10년 동안을 남녀 관계에 대해선 알지도 못하고 무성애자로 지내게 된다. 그렇다면 어디서 이 남녀 관계를 알겠는가? 몸으로 체득할 수 없다면 머리로라도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 남녀관계에 대해 무뇌아가 되면 학교가 책임져 줄 텐가?       

왜 이 나라는 남자들의 욕망의 찌꺼기를 배설하러 사창가에 가는 것은 허락하면서 여자와 청소년들의 욕망은 책임지려고 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누구는 한 술 더 떠 사창을 공창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하던데[3], 공창이든 사창이든 그건 모두 남자를 위한 것이지 이 나라가 언제 한 번 인간의 정서와 욕망에 대해 진정으로 관심을 기울인 적이 있는가? 그렇다고 아니할 말로 이 나라의 여자와 청소년들이 우리도 공창을 만들어 달라는 것도 아닌데 겨우 책 가지고 규제를 한다면 차라리 머리 깎고 중이 되라는 것과 다를 게 뭐가 있겠는가? 그렇다고 언제까지 어린 아이처럼 전쟁놀이나 하고 고무줄놀이나 하면서 스트레스를 풀라고 하겠는가?  

 

솔직히 말해 보자. 선생님을 포함해 어른들도 크던 작던 일탈을 꿈꾸지 않는가? 그러면서 아이들이 책 같은 작고 소소한 것 가지고 일탈을 꿈꿀 수 없다면 어디 숨막혀서 살겠는가?

물론 그때 난 선생님의 그런 반응을 너무 민감하게 받아 들였을지도 모른다. 나의 담임 선생님도 나 정도의 생각을 할 줄 몰랐을까? 그건 아닐 것이다. 단지 선생님 눈에 띄었다는 것이 잘못이었겠지. 그렇더라도 그건 정말 미봉책에 지나지 않고 화낼 일고의 가치도 없는 일이다.

 

언제 사춘기 아이들이 어른들 말 듣는 것 봤나? 고전을 읽어라 읽어라 아무리 떠들어도 안 읽는다. 가끔 그렇게 일탈의 독서도 해 봐야 고전의 소중함을 알고 적어도 읽어볼까 하는 생각이라도 하지 않을까? 학생에 대한 그만한 믿음도 없이 어떻게 가르치겠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또한 그런 식으로 학교가 올바른 독서지도는 뒷전이고 적발만 하겠다면 독서에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그 국어 선생님이 내가 <채털리 부인의 사랑>을 읽는 것에 대해 뭐라고 하지 않은 것은 두고두고 감사할 일이지만 더 나아가 왜 그 책이 명작의 반열에 드는지, 왜 하이틴 로맨스는 죽었다 깨어나도 명작이 될 수 없었는지, 또는 에로티시즘은 예술이면서 포르노는 왜 예술이 아닌지 가르쳐 줬더라면 오늘 날 많은 청소년들이 자기 성기를 부여잡고 허우적대는 문제는 좀 해결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1] 실제로 난 중학교 입학해서도 한동안 눈 다래끼를 달고 살았다. 한 달에 한 번이 멀다 하고 낫던 것 같은데 별 좋다는 민간요법을 다 썼다. 참기름도 발라 보고, 아버지 치질에 바르는 약도 발라 보고, 하다못해 초등학교 6학년 때 같은 반 남자 아이가 눈썹을 뽑아다 돌멩이 위에 올려 놓으란다. 그러면 길 가던 누군가가 발로 차게 되면 그 다래끼가 그 사람에게 옮겨 갈 것이라나 뭐라나. 미신 같은 소리고, 치사하고 잔인한 방법 같긴 하지만 한 번인가 시도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에 대한 벌이었을까? 졸업 사진을 찍어야 했는데 그만 그 원수 같은 다래끼가 또 나고 말았다. 안대를 차고 찍을 것이냐 벗고 찍을 것이냐를 친구들과 의논하다 벗고 찍기로 했다. 어차피 개인 사진은 찍지 않고 단체 사진 하나 찍을 것인데 거리가 있고 흑백으로 찍을 것이니 그렇게 티는 많이 나지 않을 것이라는 중론이 있어 그렇게 한 것이다. 나중에 졸업장에 찍힌 사진을 보니 친구들 말 듣기를 잘했다 싶었다.    

[2] 그 일은 주로 주인 아저씨가 책 껍데기를 싸 줄 때 이루어졌는데, 지금은 그런 일이 없어졌지만 내가 학교 때만해도 어느 서점이나 책의 겉껍데기를 싸 주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래서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서점은 자기네 서점명이 들어간 포장지로 싸 주기도 했다. 그렇게 책을 싸는 동안 주인과 손님간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책을 아무리 읽으라고 떠들어 봤자 소용없고, 누군가는 내가 고른 책에 대해 공감해주고 한 두 마디라도 코멘트를 해 주면 그것이 독서에 관한 관심을 유지해 갈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지금은 그 역할이 인터넷 서점에서의 블로그 활동이나 SNS이 그것을 대신 하지만 소통의 도구나 창구가 별로 없던 시절엔 그런 서점 아저씨의 역할이 주효했다고 본다. 다시 말해, 요즘엔 코치라는 직업이 유행인가 본데 지금 생각하면 나름 그 서점 주인 아저씨가 나의 독서 코치는 아니었나 싶다.  

[3] 오래 전에 그런 말이 있었는데 그게 또 아이러니 하게도 당시 경찰계 나름 높은 지위에 계신 어느 여경님이 하신 말씀이시다. 그녀는 그래야 성범죄가 줄어들 거라는 주장인데 논리적으로는 맞는 얘기인 것도 같은데 난 좀 보수적이어서 그런지 심정적으로는 쉽게 긍정하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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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14-05-14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을 안 읽는 사람이라 '채털리 부인의 사랑'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고,

세로 쓰기에 대해 말씀드리면, 한글의 세로 쓰기는 한문의 세로 쓰기에서 온 것입니다. 같은 의문으로 한문을 왜 세로 쓰기를 했을까 생각해 보면 ; 종이책 이전 대나무나 비단의 두루마리 형식에서 유래되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stella.K 2014-05-14 13:43   좋아요 0 | URL
오우, 좋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드라마를 보니 그랬을 거란 생각이 들긴 하더군요.
그런데 한글 시대에도 세로줄로 썼다는 게 참 그래요.
가로줄 책은 80년 중반무렵 들면서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던 것 같은데,
어렸을 때 다락에 일본 잡지가 있었어요.
그게 다 세로줄이더라구요. 그래서 그렇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암튼 좋은 정보 고맙습니다.^^
 

책을 좋아하다 보면 예기치 않는 분야의 책을 의도적으로 읽기도 한다. 이를테면,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극장가에 영화 <캐리>가 들어왔다. 이 영화는 알다시피 스티븐 킹의 원작을 영화화 한 것으로서 장르는 호러다. 하지만 그 영화는 청소년 이하 관람 불가라 볼 수가 없었다 

 

영화가 청소년 이하 관람 불가판정을 받게 되는 경우는 선정성 때문인데 가끔 그 선정성의 기준이 애매할 때가 있는 것 같다. 우리는 흔히 영화가 선정성이다라고 하면 으레 노출 수위를 생각하지만 영화 <캐리>가 불가판정을 받은 이유는 그런 이유 때문인 것 같지는 않고 아마도 무서운 영화가 아이들의 정서에 미칠 것을 고려해서 불가 판정을 내린 것이 아닌가 한다.

 

그 영화가 상영될 무렵 책도 함께 번역돼서 나왔는데 그렇다면 어린이에게 영화를 못 보게 했으니 책도 팔지 못하게 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나는 서점에서 비교적 손쉽게 그 책을 구입할 수가 있었다. 그렇다면 영화는 안 되고 책은 된단 말인가?

 

하긴 영화 보다 책이 단속이 덜 한 건 사실이다. 그때만 하더라도 극장 아니면 영화를 볼 수가 없고 극장 수도 몇 되질 않으니 청소년 이하를 걸러내는 건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당시의 아이들은 말도 잘 들어서 그렇게 보지 말란 영화는 보지 않는다.

 

이렇게 영화는 볼 수 없으면서 책은 볼 수 있는 이 작품이 아이들 사이에서 어떻게 인식되었느냐는 좀 생각해 볼 일이긴 하다. 사실 그 작품이 선정적이라고 생각하는 건 피가 낭자한 것도 있겠지만 사춘기 여자 아이의 월경을 직간접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이 같은 또래 여자 아이들에겐 더 민감한 사항이었다. 그러니 그 작품은 남자 아이들에겐 호기심이었고, 여자 아이들에겐 민감했던 책이었다. .

 

지금은 영양 상태가 워낙 좋아서 여자 아이들이 초등학교 3, 4학년이면 첫 월경을 한다지만, 당시는 이르면 초등학교 6학년 늦어도 중학교 1학년 전후해서 대부분 시작한다. 가뜩이나 월경을 언제 시작하게 될지 은근 예민할 때니 그 책에 예민했던 건 당연했다.

 

그런데 그런 아이들의 민감함을 자극한 아이가 있었으니 그건 바로 나였다. 자유 민주주의 국가에서 책을 읽고 싶어 읽겠다는데 그 누구의 제제를 받아야 하는 것인가? 더구나 학교에선 보지 말라는 것도 아닌데 못 볼 이유가 없지 않는가?

 

난 그 작품이 무섭다면 얼마나 무서운지 알고 싶었다. 그런데 단순히 주인공이 월경을 하느냐 마느냐 가지고 같은 반 남자 아이들을 의식해서 못 본대서야 말이 되겠는가? 그런데 내가 어쩌다 부주의하게 책상에 그 책을 올려 놓으면 아이들은 얼굴을 찡그리며 빨리 책상 속으로 집어 넣으라고 종주먹을 하는 것이다.          

 

물론 여자 아이들이 왜 그런지는 모르는 바는 아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확실히 좀 난센스긴 했다. 어차피 월경이 시작됐거나 시작할 운명들 아닌가? 그게 쉬쉬한다고 감춰질 수 있는 문젠가? 그리고 그때 여자 아이들이 그 책에 민감했던 것을 보면 얼추 월경을 시작했다는 말일 수도 있는데 그런다는 게 더 이상하지 않은가? 그러면서 물어보면 아니라고 딱 잡아떼는 것보다 아예 누가 무슨 책을 읽던 관심 없다가 더 확실한 방어책은 아니었을까?

 

하긴, 나도 이제 고백하는 거지만 그때 내가 그 책을 굳이 사서 본 이유는 꼭 작품이 어떤지,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 하는 고상한 목적이 있어서만은 아니었다. 지금이야 책을 고를 때 그런 것을 고려해서 고른다지만 사실은 반 아이들에게 은근 관심을 끌고 싶었던 것도 있었다. 그러니 내 책상 위에 살짝 올려놓고 치우는 것을 잊은 양 멍하게 있다가 같은 여자 아이들로부터 원성을 샀던 게지. 그래 놓고 내린 결론은 난 공포물은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난 그 책을 반도 못 읽고 덮어버렸다. 재미도 없거니와 내가 아직 그 책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성숙되지 않은 것 같았다. 게다가 표지라도 좋았다면 어떻게든 끝까지 읽었을지도 모른다. 돼지 피를 덮어쓴 주인공의 몰골을 표지로 쓸 생각을 했다니? 그건 좀 그렇지 않은가?

 

                                            

                                 <캐리>가 우리나라에 처음 초판이 나왔을 때 영화 광고 사진을

                                            그대로 썼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나의 독서가 꼭 많은 사람들의 눈을 잡아 끌 필요는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단 한 사람의 눈을 사로잡을 수만 있다면 나의 과시용 독서는 성공이다. 그 시절 나는 그렇게 <캐리>를 읽는 것에 실패했지만, 어떤 책 하나로 내가 좋아하던 남자 아이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그건 당시 계림문고는 흥행에 성공을 했는지 어린이용 추리물을 새롭게 내놓기 시작했다. 그래 봐야 이 추리물도 당시엔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다. 셜록 홈즈 아니면 괴도 루팡이 전부였으니까. 그것을 어린이 입맛에 맞게 편집해서 팔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시절 난 내 바로 앞에 앉은 남자 아이를 좋아했는데, 그 아이는 확실히 마성의 아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여자 아이라면 이 아이를 좋아하지 않고는 못 베기는 뭔가의 매력이 있었으니까. 보통 그런 아이를 두고 여자 아이들은 바람둥이라고 하고 또 그런 바람둥이 아이를 내가 좋아할 리 없다. 그런데도 어느 새 나 역시 그 아이를 좋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마성의 아이랄 밖에.

 

생각해 보면 나도 이 아이의 눈이 띄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던 것 같다. 하지만 난 뭐 하나 특별하게 눈에 띄는 것이 없었다. 남과 같이 공부를 잘 했던 것도 아니고, 특출 난 제주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저 책 하나 열심히 읽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난 바로 이 따끈 따끈한 추리물로 그 아이를 사로잡을 수도 있지 않을까란 생각을 막연하게 했던 것이다. 지금이야 남녀 구분 없이 추리물을 좋아한다고 하지만 아무래도 그땐 남자 아이들이 여자 아이 보다 압도적으로 좋아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처음 나오기 시작해서일까? 남자 아이들도 아주 열광적이지는 않았던 것 같다.

 

어쨌든 난 그런 책을 일부러 그 아이가 알아줬으면 해서 거의 눈만 보일 정도로 높이 올려서 보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아이가 나에게 말을 건넸던 것이다. 그런데 그 마성의 아이는 확실히 하는 짓도 남 다르긴 했다. 그냥 빌려 달라고 말로 해도 되는 것을 굳이 검지 손가락으로 나의 미간을 톡 건드리더니 , 그 책 좀 빌려 줄래?”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모르긴 해도 제간엔 내가 하도 책을 열심히 읽고 있으니 그냥 말로 해선 알아 듣지 못할 것 같아서 그런 제스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게 참 묘했다. 그 아이의 그런 반응을 내가 좋아해야 하는 건지 싫어해야 하는 건지 잘 분간이 가질 않았다. 그렇게 고대해서 얻어낸 기횐데 그저 생각지도 않았던 것이라 잠시 혼란이 왔을 뿐이었다. 내가 원하던 순간이 오긴 했지만 그렇다고 기다렸다는 듯 격하게 반응을 하면 얼마나 값 싸 보이겠는가? 그래서 무심한 듯 시크하게, “그래. 다 읽고 빌려줄게. ” 했다. 이게 중요한 거다. 무심한 듯 시크하게.   

 

하지만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난 그 아이의 여자가 될 수 없었다. 앞서도 얘기했지만 그런 아이와 사귀려면 미모는 기본이고 공부도 잘 해야 하는데 미모는 고사하고 공부를 못했으니 그 아이가 나를 좋아할 리 없지 않은가? 그렇지 않더라도 남이 좋아하는 아이를 나도 좋아한다는 건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가질 수 없다면 시크하게 버리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좋은 사람은 또 오는 법이니까.     

 

사실 마성의 아이라고 해서 그 친구가 특별한 뭔가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그건 아니다. 좀 짓궂은 데가 있어서 그렇지 활달하고 그저 남자다운 박력이 있는 그런 아이였다.

 

그래도 워낙 여자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은 아이였으니 이 친구가 과연 누구를 좋아하느냐가 관심사였던 건 사실이다. 그런데 학년이 거의 마쳐갈 무렵 어떻게 하다가 그 친구가 좋아하는 아이가 누구인지가 밝혀졌다. 그리고 그것이 밝혀졌을 때 과연 그 아이라면 그럴만하다.’ 싶었다. 상대 아이는 정말 나 보다 예쁘고 공부도 잘 하는 아이였다. 하지만 그 아이도 그 친구를 좋아하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은근 새침하고 자기 속내를 쉽게 드러내는 아이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당연히 좋아하지 않았을까 

 

어쨌든 그것을 아는 순간 그 친구는 나에게 있어서 더 이상 마성의 아이가 아니었다. 그냥 바람기가 많은 그런 아이였을 뿐이다. 그리고 그게 꼭 아니어도 우린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뿔뿔이 흩어져 중학교를 가야 한다. 그때는 남녀 구분이 확실했으니 중학교를 가면 지금만큼 이성교재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그 친구와 사귈 수 없다고 해도 크게 손해 볼 것도 없었다.    

 

그래도 부인할 수 없는 건 그 아이가 나를 어느 정도 마음에 두고 있었다는 거다. 그건 단순히 내가 치마 두른 여자 아이여서 마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나의 미간을 톡하고 건드릴 만큼 책을 읽고 있는 내 모습이 인상적이어서는 아닐까  

 

나 역시 책 읽는 사람은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 오래 전 지금의 집으로 이사를 했을 때 마침 집에서 가까운 양재 시민의 숲을 친구와 함께 간 적이 있다. 그때 우연히 격자무늬 등받이가 있는 벤치에 웬 키가 훤칠한 흑인 남자가 책을 읽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찌나 인상적이던지 한동안 곁눈질하며 본적이 있다.

 

이렇듯 책 읽는 사람은 시선을 고정시키는 마력이 있다. 꼭 그렇게 숲 속의 벤치가 아니어도, 하다못해 지하철을 탓을 때 스마트폰을 보거나 무심한 표정들 속에 누군가 꼭 한 사람은 책을 보고 있는 모습이 포착이 된다. 그러면 그 사람이 보고 있는 책이 무엇일까와 함께 그 사람이 뭔가 모르게 달라 보이는 것이다  

 

누구를 유혹하고 싶은가? 책 읽는 모습을 보여줘라. 좋아한다고 무작정  들이대는 것 보다 그렇게 책을 보며 무심한 듯한 표정이 오히려 상대의 애간장을 태우는 것이 될 수가 있다.

 

, 물론 책만 본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은 아니다. 그에 맞는 코디도 필요하고 포즈도 필요하겠지. 명색이 사람을 유혹하는 것인데 아무렇게나 대충은 좀 아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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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4-05-10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석하게도 저는 유혹하고 싶은 사람이 없사옵니다. ㅋㅋ
언젠가 들은 소린데 지적인 여자에게 남자가 호감을 갖는 경우는 별로 없다고 합니다.
똑똑한 남자에게 호감을 갖는 여자들이 있는 반면에요.
오히려 똑똑한 여자를 싫어한다고도 해요. 백치미 있는 여자가 더 매력적일 수 있나 봐요.
물론 사람 나름이겠죠?
으음... 책을 읽고 있으면 여자든 남자든 그건 분위가 나죠. 맞아요. 이걸 왜 저는 젊은 시절에 몰랐는지 모르겠어요. 애석해라... 님의 글을 진작 봐야 하는 거였는데...

참, 제의 받으신 좋은 소식을 축하드립니다.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시길 응원합니다. ^^


stella.K 2014-05-11 18:56   좋아요 0 | URL
저도 그런 얘기 들어본적 있어요. 저는 백치미는 아닌 것 같고...ㅋㅋ
그럴 수 없다면 남자들은 대체로 잘 웃는 여자를 선호한다는 얘기도 있어요.
그런데 여자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너무 잘 생긴 사람은 보기는 좋은데 왠지 사귀기엔 부담스러운 것 같아요.
이 글 쓰면서 저의 남자 취향에 대해서 다시 생각 보게 됐어요.
전 썼던 것처럼 활달한 사람을 좋아하고 뭔가 분위기를 알고 자상한 사람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ㅎㅎ

 

그런데 왜 나는 하필 초등학교 4학년 때 책을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했던 걸까?

사실 어렸을 때 난 내 동생과 소꿉놀이를 참 많이 했다. 언니와 오빠가 학교에 가고 없으면 나는 자연 동생과 함께 놀았다. 남자 아이라면 소꿉놀이 같은 건 싫어 할만도 할 텐데 동생은 그러지 않았다. 나를 잘 따르는 편이었는데 동생도 나 아니면 놀만한 상대가 없었으니 그랬을 것이다. 그리고 동생이 초등학교에 들어가자 우린 더 이상 소꿉놀이는 하지 않았다. 대신 인형놀이를 하고 지내곤 했다(소꿉놀이나 인형놀이나 한 끗 차이 아닌가?) .

그 무렵 살던 곳에서 이사를 했는데 그때부터 생각지도 않게 장식용 인형이 생기기 시작했다. 우린 그걸 가지고 인형 놀이를 했던 것이다. 처음엔 내가 동생을 데리고 했는데 언제부턴가는 동생이 먼저 자청해서 놀이를 하자고 했다. 나는 귀찮긴 했지만 마땅히 놀 것도 없으니 몇 번 응해주곤 했다. 그 인형들을 가지고 한마디로 플롯은 없으면서 내러티브만 있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만들어 놀았던 것이다.

그런데 언제까지나 이렇게 계집 아이 같이 놀 것만 같은 동생이 언제부턴가 진짜 남자 아이가 돼가고 있었다. 이젠 놀아도 남자 아이 같이 놀고, 장식 인형이 아니라 조립식 장난감(말하자면 접착식 본드가 함께 들어간 요즘으로 말하면 피규어의 조악한 형태 같은)을 만들어 또래 친구와 같이 놀기도 하고, 어떤 땐 혼자 놀기도 하는 것이다. 혼자 놀 땐 좀 가관이었다. 혼자 악당도 됐다가 정의의 사도도 됐다가, 한마디로 그런 다중인격체 놀이가 없었다.

나는 그런 동생의 노는 모습을 보면서 나에게 있어 한 시절이 갔음을 느꼈다. 이제 동생은 절대로 나와 계집 아이처럼 놀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던 것이다.

이렇게 하루 아침에 노는 차원이 달라져 버렸으니 나의 관심이 책으로 옮겨 갔던 건 어쩌면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건 그때까지 어린이 책으로 계몽사에 필적할만한 다른 책이 없었는데(적어도 내가 알기론 그렇다) 그 무렵 계림문고라는 아동용 문고가 나왔던 것이다. 바로 이 계림문고가 나에겐 최초의 책이었던 것이다.

이 책은 계몽사처럼 전집을 표방하고 있긴 하지만, 계몽사의 단점을 보완한 책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계몽사의 책은 무조건 한 질로 사야 했다. 게다가 하드 커버라 묵직했다. 그런데 계림문고는 페이퍼백이면서 싸고 낱권으로 살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아는 사람은 안다. 책을 사서 모으는 기쁨이 어떤 건지를. 난 그것을 이 계림문고 책들을 사는 데서 비로소 알아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계몽사의 책은 엄마가 언니와 오빠를 위해 사 준 거지 나를 위해 사 준 것은 아니었다. 물려서 읽을 수도 있지만 난 처음부터 내 물건이 아닌 것엔 마음이 가지 않았다. 나는 뭐든지 내 것으로 규정지을 수 있는 걸 원했던 것이다. 그러니 내가 그 책에 애착을 보였던 건 당연했다.

시험이 끝나면 나는 어김 없이 학교 앞 문구점을 갔다. 그때나 지금이나 서점이 많지 않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다. 물론 요즘에 서점이 많지 않은 건 옛날에 서점이 많지 않은 것과는 다르긴 하다. 옛날엔 오프라인 서점이 아니면 책을 살 수 없는 줄 알았는데 학교 앞 문방구에서도 책을 살 수 있었다는 건 나에겐 거의 행운과 같은 일이었다. 굳이 그 먼 서점까지 갈 필요가 없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그렇지 않아도 내가 자주 갔던 단골 문구점엔 계림문고 한 종 밖에는 없어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그래도 좋았다. 시험이 끝나면 해방감과 더불어 문구점에 책을 3권 사는 것이었다. 3권이냐 하면, 낱권으로 사면 당시 가격으로 350원이었다. 그런데 문방구 주인이 3권을 사면 천원에 해 줬다. 돈 없는 초등학생에게 50원 아끼는 게 어딘가? 그때 초코 파이 하나의 가격이 그쯤 했는데 말이다. 

어쨌든 난 그렇게 세 권의 책을 사다 다음 시험 볼 때까지 시간을 쪼개 읽는 것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잠자는 시간, TV 보는 시간까지 쪼갰다는 것은 아니다. TV에선 ‘6백만 불의사나이특수 공작원 소머즈[2]니 하는 멋있고 기가 막힌 프로를 하는데 그것을 어떻게 포기하고 책만 읽는단 말인가? 그렇게 볼 거 자 보고, 잠자 거 다 자고 그 나머지 시간 예를 들면, 학교에서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 또는 집에 돌아와서 짬짬이 자투리 시간에 읽는 것이다.

그러면서 고민은 고민대로 한다. ‘, 난 왜 이렇게 책을 빨리 못 읽는 것인가? 역시 초등학교 1학년 때 담인 선생님의 말이 맞는 것 같아.’ 뭐 이렇게 자책하면서 말이다.

삽화 좀 들어가고 200쪽이 채 될까 말까 하지 않았을까? 그걸 다음 시험 볼 때까지 붙들고 있다니. 그렇다고 세 권을 사면 사는 족족이 다 읽느냐면 그렇지도 않다. 재미없다고 엎은 책도 꽤 된다.

그래도 학창시절 그 사막 같은 학교 생활을 견딜 수 있게 해줬던 건 그렇게 시험이 끝날 때마다 책을 샀던 나만의 호사를 누릴 수 있어서가 아니었나 생각한다. 



 

[2] 두 편의 외화 시리즈와 관련해서 한 때 이 영화는 위험한 영화로 지목되기도 했다. 그것은 각각의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들이 갖고 있는 초능력 때문인데 이 영화를 보고 높은 데서 뛰어내려 죽거나 다치는 아이들이 속출했다는 신문 보도를 접한 적이 있다. 이를테면 자신에게도 그런 초능력이 있다고 착각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아이들은 영화와 현실을 구분하지 못한다. 하긴 그게 꼭 어린 아이들만 그렇겠는가? 나도 한때는 그런 초능력을 갖게 되길 간절히 바라긴 했지만 용케도 영화와 현실을 잘 구분한 덕에 오늘날까지 무탈하게 잘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실 내가 초능력을 갖게 되길 바랬던 건 또래 아이들과는 다르다. 그건 <특수 공작원 소머즈>에서 주인공으로 나왔던 린지 와그너의 긴 금발 머리 때문이다. 그녀가 초능력을 쓸 때마다 휘날리는 금발 머리가 어찌나 멋있던지! 그에 비해 나는 불행히도 고수머리에 양갈래로 묶고 다녔다. 그렇지 않으면 머리가 붕 떠서 어떻게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고수머리라 파마할 필요가 없어 좋겠다고 하지만 그건 남 하기 좋은 말이고, 나는 지금도 연예인같이 멋지게 머리를 해서 사진 한 번 멋지게 찍어 보는 게 소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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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격적으로 책을 읽기 시작한 건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다.

기억이 흐릿하긴 한데, 그때 이미 집엔 계몽사란 어린이 책 전문 출판사에서 나온 50권짜리 <소년 소녀 명작 전집>이던가 하는 전집류와 같은 출판사인지는 모르겠는데 20권짜리 <어린이 전래 동화>인가 하는 책이 있기는 했다. 둘 다 몇 년 된 책들인데 이 책들은 나를 위한 책은 아니었다.

엄마가 나 보다 먼저 학교에 다니고 있었던 언니와 오빠를 위해 방문 판매를 온 책 장사에게 그 책을 샀던 것이다. 엄마는 언니와 오빠가 초등학교엘 다니고 있었으니 그런 책 한 질쯤은 두고 읽어도 좋을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그땐 또 서열 의식이 강해서 오빠가 나와 동생에게 함부로 그 책들을 만지지 못하게 했다. 읽어야 한다면 꼭 오빠의 허락을 받고 읽어야 했다. 하지만 나와 동생은 아직도 한글을 떼기 전이었으니 그 책에 욕심 낼 처지가 못 됐다. 그러니 오빠가 그 책 가지고 위세 부려봤자 나와 동생에겐 그다지 먹히지는 않았다. 말하자면, ‘그래? 그럼 그냥 오빠 가져. 어차피 우린 책도 잘 볼 줄 모르잖아.’ 뭐 그런 식이었다.

그래서 그럴까, 서열 의식도 다 같이 욕심 낼만한 것에서 내야 빛을 바라는 거지 한글도 다 못 뗀 조무래기들을 데리고 내 봤자 알아주지도 않는다라는 걸 오빠도 알았는지 나중엔 책에 대해 그다지 욕심을 내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전집들은 무료한 날 심심함을 달래기 위한 좋은 놀잇감이 되어 주곤 했다. 이를테면 그 50권 자리를 책꽂이에서 빼서 다 흩어 놓고는 걸레로 깨끗이 먼지를 닦고 1권부터 마지막 권까지 누가 빨리 찾아서 다시 책꽂이에 꽂아 놓나 시합을 하는 것이다. 중간에 두 세 권 정도를 잃어버려서 항상 그 놀이에선 아쉬움이 남았지만 우리 같은 조무래기들에겐 전집류는 그런 존재였다.

나중에 한글을 깨쳤으니 슬슬 읽어 볼만도 할 텐데 나는 왠지 그 전집엔 손이 가지 않았다. 이제 초등학교를 갓 들어갔으니 한글만 깨쳤다 뿐 왠지 어려울 거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제 초등학교엘 갓 들어 간 아이가 <소공자><소공녀>를 어찌 알겠으며, <쿠오레>는 또 어찌 알겠는가? 그런 것들을 읽으려면 적어도 언니 나이쯤 되야 하는데 그때 되면 그 책들은 구닥다리가 되는 것이다.   

더구나 초등학교 1학년 때 처음 받았던 생활통지표(그때는 성적표가 아니었다. 통지표였다)에 담임 선생님은 나의 뭘 보고 그런 평가를 내리셨는지 모르겠는데, 내가 책 읽기를 싫어하는 것 같다고 쓰셨다.

솔직히 난 그렇게 써 있는지도 몰랐다. 나중에 언니가 읽어줘서 알았는데 언니는 또 뭐가 좋다고 읽으면서 깔깔대고 웃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생애 처음으로 받아 본 생활통지표에 국어가 였으니 점수로 치자면 빵점을 맞은 거나 다름없으니 그것과 연관 짓다 보니 웃을 수 밖에. 하지만 그게 웃을 일인가? 오히려 언니라면 가슴 아파하며 격려해줘도 부족할 판에 생판 남도 아니고 뭐 하자는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가만 생각해 보면 언니도 알고 보면 날 것도 없었다.

솔직히 그 무렵이 70년 대 초였고, TV가 흔한 시절이 아니었는데 그런 시절에 아이에게 전집류를 사 주는 부모가 몇이나 될까? 그런 엄마의 마음도 모르고 언니를 위해 산 그 계몽사 전집을 몇 권 읽고 안 읽었던 것이다.[1] 그러면서 내 통지표에 담임 선생님이 그런 평가 좀 썼다고 킥킥대고 웃을 수 있는 것인가? 하여간 언니라고 하나 있는 게 도움이 되질 않는다고 생각했다.       

 

사실 나 역시도 생애 첫 통지표에 국어 성적이 라는 건 어린 마음에도 충격적이긴 했다. 이런 성적이라면 앞으로 이 험난한 학교 생활을 어떻게 헤쳐 나갈지 좀 캄캄하긴 했다. 그리고 정말 선생님은 나의 뭘 보고 책 읽기를 싫어한다고 했는지 알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만해도 선생님 말씀은 곧 진리요 법인데 의문을 품었다간 오히려 반항하는 것처럼 보일 테니 그럴 수도 없었다.

하지만 오랜 시간 나 자신을 두고 봤을 때 선생님 말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글을 남들처럼 빨리 읽지를 못하는 것이다. 아주 천천히 읽는 편인데 그것을 선생님은 내가 책을 읽기를 싫어한다고 본 것 같았다. 책을 천천히 읽는 것과 책을 싫어하는 것과는 다른 것인데 그때 선생님은 나를 좀 더 인내하고 지켜봐 줄 수는 없었던 것일까?

아무튼 그런 담임 선생님의 평가도 있었고, 언니의 조롱을 받고 나니 확실히 이 부분에서 은연중 열등감을 느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내가 지금 말할 수 있는 건 언니는 일찌감치 책과 담을 쌓고 살지만, 나는 거북이 경주하듯 빨리 읽지 못하여 많이 읽을 수는 없지만 길게 꾸준히 읽어 지금에 이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때 언니의 웃음이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또한 담임 선생님의 그런 평가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그렇게 독서는 시간을 이기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런 사람도 봤다. 책을 빨리 읽을 수 있는데 많이 읽지 않는 사람이 있고, 느리게 읽는데 많이 읽는 사람도 봤다. 물론 빨리 많이 읽으면 그 보다 좋을 수야 없겠지만 어떻게 읽든 그것을 시간과 함께 할 수 있는 사람만이 진짜 책을 읽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성적에 있어서 영원한 는 있을지 모르지만 영원한 는 없다. 나는 훗날 학교를 다니면서 국어에서 썩 괜찮은 성적을 거둔 적도 있으니까. 물론 그것이 내 인생에 스크래치는 좀 남겠지. 그러나 사는데 지장이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래서 말인데 열등감은 열등감으로 있지 않는다. 무엇이든 자신의 한 가지의 것에 가만히 응시해 보라. 그러다 보면 그것에 휘말리는 나 자신 보단 뭔가 그것을 이겨보고 싶다는 나 자신을 발견할 때가 있다. 나는 바로 그 열등감을 응시하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본격적인 독서의 길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1] 사실 이것도 분명치는 않다. 나중에 언니는 그 책을 다 읽었다고 했던 것 같은데 나는 언니가 그 책을 산 초기 때를 제외하고 읽는 걸 보지 못했다. 단지 내가 지금 와 이렇게 밝히는 것은 누가 옳고 그르냐를 말하려 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객관성 유지 차원에서 밝혀두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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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14-04-30 15: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청나게 빠르셨네요. 저는 초등학교 전에 책 읽기를 조금 좋아하다가 초등학교 입학부터 대학교 입학까지 독서의 공백기였죠. 학업이 분명 관련되었겠지만 시간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독서의 시작은 대학입학이지만 대학시절에는 도서관에서 책만 빌렸지, 독서는 부진했죠. 정작 부끄럽지 않을 정도의 독서는 대학 졸업과 함께 시작했죠. 저도 왜그랬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책 읽기 좋은 학창 시절 책을 안 읽다가 남이 책을 안 읽는 그 시절부터 책을 읽게 된 이유를요.

stella.K 2014-04-30 18:31   좋아요 0 | URL
와우, 이 글 올리기 잘했군요.
이렇게 마립간님 댓글도 받고.
제가 빠른 거군요. 전 남 보다 책을 빨리 읽지 못해
무지 열등감 느꼈었는데. 이거 벗어난 거 얼마 안 되요.ㅎㅎ

2014-04-30 17: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4-30 18: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14-04-30 1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초등4학년 때부터 책과 친해지다니... 저에 비해 많이 빠르군요.
원래 4학년 때가 뭔가 알기 시작하는 때가 아닌가 생각해요.
저도 4학년때부터 공부에 흥미를 느끼면서 성적이 오르기 시작했거든요.

으음... 추천 수도 높고 방문자 수도 200명이 넘고 이제 예전으로 돌아가신 듯하네요.
축하드려요...

stella.K 2014-04-30 18:31   좋아요 0 | URL
제가 빠른 거군요. ㅋ

지지난주부턴가 이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