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살면서 몇 개의 통과의례가 있듯 책도 그런 게 있지 않나 싶다.

초등학교 시절 학교를 지독하리만치 싫어했던 나는 그나마 학교를 견딜 수 있었던 건 책이 있었기 때문은 아닌가 싶다. 책을 읽고 사 모으는 낙이 없었다면 그 사막 같은 곳을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랬다고, 중학교를 들어가니 그렇게 애지중지 모았던 계림문고의 책들이 어느 순간 더 이상 좋아 보이지가 않았다. 중학생이면 어른은 아니지만 더 이상 애들도 아니니 애들이 보는 책들은 그만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책들을 모두 팔아버렸다. 3년 간 모았던 책이니 상당했을 텐데 그것을 팔아버렸는데도 조금도 아깝지가 않았다. 그런 것을 보면 나의 유년 시절이 가긴 갔나 보다 했다.

 

어쨌든 그에 따라 책도 이제 더 이상 문구점에서 사는 일도 없었다. 대신 시장에 있는 서점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시장 근처엔 두 곳의 서점이 있었는데 그 중 괜찮다 싶은 곳을 집중적으로 다님으로 단골이 되었다. 무엇보다 그곳 주인 아저씨가 정말 좋았다. 풍채가 좋고 후덕하게 생긴 인상만큼이나 사람을 편안하게 대해줘서 나는 꽤 오랫동안 그 서점을 자주 이용하곤 했다. 그리고 이제 나의 관심은 시시한 코흘리개 아이들이나 보는 가로줄 책에서 성인이나 볼 법한 세로줄 책으로 옮겨갔다.

지금 세로줄로 된 책을 읽으라고 하면 못 읽을 것 같다. 하지만 지금도 책이 여전히 세로줄로 나온다면 세로줄로 봤을 테지. 그만큼 우리나라 책의 가로줄의 역사가 그다지 오래지 않다는 얘기다.

 

난 이제 더 이상 어린 아이가 아니니 세로줄 책을 읽는 거야 당연한 것이긴 한데 그때나 지금이나 하나 같은 의문은 왜 세로줄 책이 있었냐는 거다. 물론 옛 고서들이야 그렇다고는 해도 현대에 들어와서도 출판사들마다 여전히 세로줄로 책을 내놓는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긴 그땐 신문이 세로줄인데 책이라고 가로줄로 냈겠는가?(모르긴 해도 그건 일본문화의 잔재는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도 해 본다.)

세로줄 책은 확실히 불편하긴 했다. 눈 다래끼[1] 걸린 눈이나 졸린 눈으로 책을 읽으면 영락없이 읽을 데를 또 읽는 경우가 많아진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읽을 운명을 타고난 사람은 그렇게라도 읽는 수 밖에.

 

어쨌든 그렇게 어른스러운 것 아니 적어도 어린 아이 같지 않은 책을 읽으려 하다 보니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 다소 막막했다. 학교에서는 만날 고전을 읽으라는데 그것도 재미가 있어야 읽을 것이 아닌가? 그러다 보니 신간에 눈이 가기도 하고, 마침 청소년을 겨냥한 책들도 속속 나와 있어 그 두 분야를 오가며 읽기 시작했다. 또 그러다 보면 거의 필연적으로 어느 새 에로틱한 소설에도 눈이 가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그도 그럴 것이, 청소년 시기는 성에 눈을 뜨는 시기이기도 하니 유독 민감한 건 어쩔 수가 없는 것 같다.

 

미워했다면사랑한 미워했다면사랑한 미워했다면사랑한

그런데 어느 날 서점에서 책을 고르고 있다 우연히 발견한 <채털리 부인의 사랑>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제목이 조금 수상하긴 했지만 하이틴 로맨스처럼 분홍 책 류로 나왔더라면 아예 손도 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 책은 당당히 고전 명작에 끼어있었다. 수상한 이유는 한 가지가 더 있었는데 아예 도스토예프스키나 톨스토이 같이 누구나 알아주는 고전이었다면 이것 역시 나중에 읽어 보겠다고 했을 것이다.

 

채털리 부인의 사랑이라! 고전이라고 해도 전에 들어 보지 못했으니 마치 신간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게다가 주인 아저씨는 거의 매번 내가 책을 고르는 안목을 칭찬하며 그에 대한 간단한 코멘트를 하곤 했는데 그 책도 나름 긍정적인 코멘트를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2]. 그래서 나는 조금의 의심도 없이 그 책을 사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만약 그때 주인 아저씨의 얼굴에서 조금이라도 묘한 웃음이 스쳤다면 나는 그 책을 사지 않거나 샀어도 꽤 떨떠름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책은 분명 고전이었다. 누가 고전에 묘한 웃음을 짓겠는가? 게다가 나는 고전엔 에로티시즘은 존재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건 하이틴 로맨스나 썬데이 서울같은 잡지에나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내가 그 책에 대한 아저씨의 긍정적인 얘기도 들었겠다 집으로 오면서 나 자신 그 동안 책을 고르는 안목이 많이 좋아진 것 같아 어깨가 절로 으쓱거릴 정도였다.  

 

그렇게 난 그날로 그 책을 조금씩 읽기 시작했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뭔가 이상했다. 좀 지루하지만 그렇다고 던져버리기엔 뭔가 아쉬움이 있었다. 안개에 쌓인 듯 몽환적이기도 하고 묘하게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뭐라고 해야 할 지 어린 나로선 뭐라고 표현하기가 어려웠다. 그렇게 읽다 어느 순간 정사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채털리 부인이 남편도 아닌 정원사와 정사를 하다 마침내 오르가슴에 도달해 한껏 고조된 느낌으로 아아, 좋아요.” 하는데 왜 그리도 화끈거리던지. 지금은 그런 장면이 나오면 그런가 보다 하겠지만 그땐 그런 책이 처음이라 채털리 부인의 이 외마디 외침이 왠지 그 부분만 도드라져 크게 확대되어 보이는 것이었다.

 

나는 그 부분을 읽고 책을 덮었다. 그리고 며칠을 고민을 했다. 무엇보다 이 책이 왜 고전이라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이 책은 분명 학교에서 금하는 소위 분홍책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내가 서점에서 그 책을 뽑아 들었을 때 주인 아저씨는 왜 제지를 하지 않았던 걸까? 그랬으면 사지도 않았을 텐데. 그 책 한 권 더 팔았다고 떼 부자 될 것도 아니지 않는가?   

 

그건 확실히 좀 충격적이었다. 마치 에덴 동산에서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눈이 밝아졌다는 아담이나, 판도라가 닫혀 있던 상자의 뚜껑을 연 것에 비견되리만큼 나에겐 적지 않은 사건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아담은 혼자만 눈이 밝아지게 되길 바라지 않았다. 그와 함께한 하와도 자신과 같아지길 바랬다. 그래서 부창부수를 이루지 않았는가? 친구 역시 지란지교로 우정을 쌓아나가야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이 엄청난 복음을 나만 알고 있어서야 되겠는가? 그래서 이것을 반 아이들에게 알릴까 말까를 고민하다 결국 알리기로 결심했다. 특별히 내게 크게 확대되어 다가온 그 부분을 아이들에게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세상에 비밀이 어디 있겠는가? 얘네들도 언젠가 알게 될 책을 조금 일찍 알게 되는 것뿐인데.

 

그때 아이들의 반응은 가히 상상을 초월했다. 나 자신 그렇게 반응이 뜨거울 줄은 상상도 못했다. 공히 말하건대, 남자만 늑대 울음 소리를 내는 것은 아니다. 여자 역시 여우 울음 소리를 낸다.

아우우~!”

그런데 누가 보면 정말 드라마 같이 짰다고 하겠다. 그 순간 여우들의 아우성을 듣기나 한 걸까? 국어 선생님이 교실로 들어 오시는 것이 아닌가? 그때가 중학교 2학년이었는데 그때 만난 국어선생님은 1학년 선생님과는 달라 느끼하고 까탈스러운 데가 있어 아이들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 선생님에게 딱 걸렸으니 나는 분명 혼이 날지도 모른다고 했다.     

 

하지만 또 마음 한 구석엔 정말 선생님은 이 책을 어떻게 생각할지 그 반응이 궁금하기도 했다. 분명 <채털리 부인의 사랑>은 에로티시즘이고, 우리들은 아직 그런 책을 보면 안 된다. 내가 이 선생님께 혼이 나고 책을 압수를 당한다면 그 책을 청소년에게 판 서점 아저씨가 잘못인 거고, 압수하지 않는다면 명작인 게 맞고 책을 선택하는 나의 안목이 상당한 수준인 것이 증명되는 셈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선생님은 그 책을 만지작거리며 몇 마디 하더니 나에게 그냥 돌려주는 것이었다. 후자의 승리인 셈이었다. 선생님 역시도 서점 아저씨처럼 이 책에 대해 비아냥거리거나 묘한 웃음 같은 건 짓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이 책은 뭔가 대단한 책임에 틀림없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학교가 규제하는 분홍책의 규준은 무엇이었을까? 어린 나로선 헷갈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쨌거나 나는 그 일이 있고 나서 <채털리 부인의 사랑>을 수일에 걸쳐 완독했고, 더불어 책을 보는 안목이 한층 더 깊어진 듯 했다. 그리고 나의 그런 책 선택에 묵언의 용기를 줬던 서점 아저씨나 국어 선생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생겼다. 그 분들이 아니었다면 영국에 그런 숨은 거장이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겠는가?

 

그런데 나는 또 왠지 이때부터 하이틴 로맨스를 읽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솔직히 그때까지 하이틴 로맨스엔 눈길도 안 줬는데 또 누가 아는가? 거기에도 숨은 명작이 있을지. 내가 그때까지 하이틴 로맨스를 읽지 않는 이유는 학교가 금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읽을 시간이 없어 안 읽고 있었을 뿐이다. 그건 (애석하게도)만화도 포함이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책을 빨리 읽을 수 없는데 언제 그런 책을 읽겠는가? 책에 있어서 만큼은 갈 길이 너무 멀기 때문에 한 눈 팔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워낙 모범생(?)이었던 만큼 학교에서 금하는 것을 해서 곤란에 빠지는 것을 나 자신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역시 하이틴 로맨스는 재미가 없다. 꼭 다른 명작과 비교해서 질이 떨어져서 만도 아니다. 그도 한 자락 깔고 읽으면 읽을만하다고 생각한다. 단지 내가 재미없다고 생각한 건, 난 이미 <채털리 부인의 사랑>을 읽었기 때문에 하이틴 로맨스는 차라리 건전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서 재미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내가 몇 권 읽지 않아 확실히 뭐라고 얘기는 못하겠지만, 내가 읽은 책에는 남녀가 옷을 벗고 화끈하게 정사를 하는 장면은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물론 로맨스인 만큼 사장과 여비서간의 사랑 뭐 그런 건 나오는 것 같다. 그것도 관계가 비정상적인 것도 아니다. 기껏해야 배우자와 행복하지 못해 고독해 하는 남자를 여자가 위로해 주는 그런 내용이 주였다. 그런데 이 정도 가지고 학교가 검열을 한다면 학교는 하이틴 로맨스의 수준 보다 낮아도 너무 낮은 것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나 혼자만의 생각일 뿐이었다.

 

어느 날 불시에 담임 선생님은 아이들의 소지품을 책상 위에 꺼내 놓으라고 했다. 그리고는 자기 뒤에 앉은 아이의 소지품을 검사해 학교가 금하는 물건이 있으면 그걸 앞으로 앞으로 전달해 선생님이 있는 교탁까지 가는 방식을 썼다. 그건 좀 확실히 비열한 방법이긴 하다. 여기가 무슨 빨갱이 공산당도 아니고, 압수하려면 선생님이 직접 수거를 할 일이지 동급생들끼리 이게 뭐 하는 짓이란 말인가 


 
어쨌거나 나는 멋모르고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내 뒤의 아이가 문제가 될 만한 소지품을 가지고 있나 알아 보는 사이 내 앞의 아이가 바로 내가 읽고 있던 하이틴 로맨스를 낚아채듯 순식간에 앞으로 앞으로 전달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순간 당황하여 작은 목소리로, “, 그거 왜 가져가?”했다. 그리고 그 친구가 야속하다고 느낄 새도 없이 선생님은 나를 빤히 쳐다보며 왜 가져 가긴 왜 가져가!” 하며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어찌나 무안하던지.

나는 단지 내 책이 그 친구에게 들켜 화가 나서가 아니다. 내가 그 책을 읽어 본 바에 의하면 그 책은 압수 당하고 할 만큼 대단한 책이 아니었다. 한마디로 그런 한심한 책을 선생님이 압수하겠다니 좀 어이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문득 생각해 보니 그건 나나 그렇게 생각할 일이지 선생님이 그렇게 생각할 리가 없었던 거다.

적어도 선생님이 학생의 소지품을 압수하려거든 정말 그 물건이 압수할만한 것인지 알아야 한다. 나는 선생님께 묻고 싶었다. 선생님은 하이틴 로맨스를 읽어나 보셨냐고? 그리고 압수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 되시냐고.

이 정도 가지고 나쁘다고 하면 아이들이 주말 연속극은 어떻게 보겠는가?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 아이들치고 주말 연속극 안 보는 아이가 얼마나 되겠는가? 드라마 제작자들이 어디 아이들의 정서를 고려해서 드라마를 만드는가? 그저 심의규정만 지키려고 할 뿐 그건 내가 본 하이틴 로맨스 수준이거나 그 보다 수위가 높다.

 

더구나 지금은 남녀공학이 많아졌지만 그때는 초등학교만 졸업하면 적어도 6, 여자는 대학을 여대를 진학한다면 무려 10년 동안을 남녀 관계에 대해선 알지도 못하고 무성애자로 지내게 된다. 그렇다면 어디서 이 남녀 관계를 알겠는가? 몸으로 체득할 수 없다면 머리로라도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 남녀관계에 대해 무뇌아가 되면 학교가 책임져 줄 텐가?       

왜 이 나라는 남자들의 욕망의 찌꺼기를 배설하러 사창가에 가는 것은 허락하면서 여자와 청소년들의 욕망은 책임지려고 하지 않는지 모르겠다.

 

누구는 한 술 더 떠 사창을 공창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하던데[3], 공창이든 사창이든 그건 모두 남자를 위한 것이지 이 나라가 언제 한 번 인간의 정서와 욕망에 대해 진정으로 관심을 기울인 적이 있는가? 그렇다고 아니할 말로 이 나라의 여자와 청소년들이 우리도 공창을 만들어 달라는 것도 아닌데 겨우 책 가지고 규제를 한다면 차라리 머리 깎고 중이 되라는 것과 다를 게 뭐가 있겠는가? 그렇다고 언제까지 어린 아이처럼 전쟁놀이나 하고 고무줄놀이나 하면서 스트레스를 풀라고 하겠는가?  

 

솔직히 말해 보자. 선생님을 포함해 어른들도 크던 작던 일탈을 꿈꾸지 않는가? 그러면서 아이들이 책 같은 작고 소소한 것 가지고 일탈을 꿈꿀 수 없다면 어디 숨막혀서 살겠는가?

물론 그때 난 선생님의 그런 반응을 너무 민감하게 받아 들였을지도 모른다. 나의 담임 선생님도 나 정도의 생각을 할 줄 몰랐을까? 그건 아닐 것이다. 단지 선생님 눈에 띄었다는 것이 잘못이었겠지. 그렇더라도 그건 정말 미봉책에 지나지 않고 화낼 일고의 가치도 없는 일이다.

 

언제 사춘기 아이들이 어른들 말 듣는 것 봤나? 고전을 읽어라 읽어라 아무리 떠들어도 안 읽는다. 가끔 그렇게 일탈의 독서도 해 봐야 고전의 소중함을 알고 적어도 읽어볼까 하는 생각이라도 하지 않을까? 학생에 대한 그만한 믿음도 없이 어떻게 가르치겠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또한 그런 식으로 학교가 올바른 독서지도는 뒷전이고 적발만 하겠다면 독서에 무슨 희망이 있겠는가?

그 국어 선생님이 내가 <채털리 부인의 사랑>을 읽는 것에 대해 뭐라고 하지 않은 것은 두고두고 감사할 일이지만 더 나아가 왜 그 책이 명작의 반열에 드는지, 왜 하이틴 로맨스는 죽었다 깨어나도 명작이 될 수 없었는지, 또는 에로티시즘은 예술이면서 포르노는 왜 예술이 아닌지 가르쳐 줬더라면 오늘 날 많은 청소년들이 자기 성기를 부여잡고 허우적대는 문제는 좀 해결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1] 실제로 난 중학교 입학해서도 한동안 눈 다래끼를 달고 살았다. 한 달에 한 번이 멀다 하고 낫던 것 같은데 별 좋다는 민간요법을 다 썼다. 참기름도 발라 보고, 아버지 치질에 바르는 약도 발라 보고, 하다못해 초등학교 6학년 때 같은 반 남자 아이가 눈썹을 뽑아다 돌멩이 위에 올려 놓으란다. 그러면 길 가던 누군가가 발로 차게 되면 그 다래끼가 그 사람에게 옮겨 갈 것이라나 뭐라나. 미신 같은 소리고, 치사하고 잔인한 방법 같긴 하지만 한 번인가 시도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에 대한 벌이었을까? 졸업 사진을 찍어야 했는데 그만 그 원수 같은 다래끼가 또 나고 말았다. 안대를 차고 찍을 것이냐 벗고 찍을 것이냐를 친구들과 의논하다 벗고 찍기로 했다. 어차피 개인 사진은 찍지 않고 단체 사진 하나 찍을 것인데 거리가 있고 흑백으로 찍을 것이니 그렇게 티는 많이 나지 않을 것이라는 중론이 있어 그렇게 한 것이다. 나중에 졸업장에 찍힌 사진을 보니 친구들 말 듣기를 잘했다 싶었다.    

[2] 그 일은 주로 주인 아저씨가 책 껍데기를 싸 줄 때 이루어졌는데, 지금은 그런 일이 없어졌지만 내가 학교 때만해도 어느 서점이나 책의 겉껍데기를 싸 주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래서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서점은 자기네 서점명이 들어간 포장지로 싸 주기도 했다. 그렇게 책을 싸는 동안 주인과 손님간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책을 아무리 읽으라고 떠들어 봤자 소용없고, 누군가는 내가 고른 책에 대해 공감해주고 한 두 마디라도 코멘트를 해 주면 그것이 독서에 관한 관심을 유지해 갈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지금은 그 역할이 인터넷 서점에서의 블로그 활동이나 SNS이 그것을 대신 하지만 소통의 도구나 창구가 별로 없던 시절엔 그런 서점 아저씨의 역할이 주효했다고 본다. 다시 말해, 요즘엔 코치라는 직업이 유행인가 본데 지금 생각하면 나름 그 서점 주인 아저씨가 나의 독서 코치는 아니었나 싶다.  

[3] 오래 전에 그런 말이 있었는데 그게 또 아이러니 하게도 당시 경찰계 나름 높은 지위에 계신 어느 여경님이 하신 말씀이시다. 그녀는 그래야 성범죄가 줄어들 거라는 주장인데 논리적으로는 맞는 얘기인 것도 같은데 난 좀 보수적이어서 그런지 심정적으로는 쉽게 긍정하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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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14-05-14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을 안 읽는 사람이라 '채털리 부인의 사랑'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고,

세로 쓰기에 대해 말씀드리면, 한글의 세로 쓰기는 한문의 세로 쓰기에서 온 것입니다. 같은 의문으로 한문을 왜 세로 쓰기를 했을까 생각해 보면 ; 종이책 이전 대나무나 비단의 두루마리 형식에서 유래되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stella.K 2014-05-14 13:43   좋아요 0 | URL
오우, 좋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드라마를 보니 그랬을 거란 생각이 들긴 하더군요.
그런데 한글 시대에도 세로줄로 썼다는 게 참 그래요.
가로줄 책은 80년 중반무렵 들면서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던 것 같은데,
어렸을 때 다락에 일본 잡지가 있었어요.
그게 다 세로줄이더라구요. 그래서 그렇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암튼 좋은 정보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