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는 힘이 세다
사람의 유전자엔
기본적으로 이야기를 좋아하는 성질이 있다고 한다. 그 말이 맞기는 맞는가 보다. 유년 시절 아무나 보면 옛날 이야기를 해 달라고 조르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또 그만큼 이야기를 잘 해 주는 사람은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는 법이다. 그러므로
이야기를 잘하는 것도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어릴 적, 우리는 흔히 옛날 이야기는 할머니가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다음으로 많이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선생님이 아닐까? 선생님은 아는 것도 많을 테니 그런 기대가 많은
거겠지. 이왕 선생님 얘기가 나왔으니 내 인생의 선생님들을 얘기해 볼까 한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자신을 가르쳐준 선생님을 잊을 수 있을까? 물론 ‘스승의
은혜’란 노래도 있긴 하지만 솔직히 은혜를 헤아려 보라고 하면 제자 된 입장에서 그것이 다소 버거울
때가 있다. 물론 그분들의 특징이나 일화들을 생각해 보라면 얼마든지 하겠지만 말이다.
예를 들면, 나는 초등학교를 들어가기 전 유치원에 가는 대신 피아노 개인 교습을 받은 적이 있다. 즉 이 선생님이 내 생애 최초의 선생님인 셈이다. 그 선생님은 종종
유난히 희고 긴 팔과 손가락으로 피아노 앞에 앉은 나의 등 뒤에서 서서 내가 쳐야 할 피아노 곡에 몸소 시범을 보여주곤 했다. 그럴 때면 선생님에게서 향수냄샌지 비누냄샌지 모를 냄새가 났고, 또한
선생님이 피아노를 칠 때면 건반과 손톱이 탁탁 부딪히는 소리가 났는데 난 그 모두를 좋아했다. 특히
선생님의 손톱에서 나는 소리를 듣다 보면 잠이 저절로 올 것만 같고 나는 왜 저런 소리가 나지 않을까 안타까워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것만 빼면 나는 피아노 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피아노 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니 가끔씩 선생님과 갈등을 빚곤 했는데, 유난히 피아노가 잘 안 쳐지는 날엔 영락없이
선생님께 혼이 나곤 했다. 그럴 때면 나는 피아노를 마치고 선생님 집을 나설 때 (닭똥 같은 눈물은 이미 피아노 칠 때 한 차례 흘렸고)볼멘 소리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일 안 올 거예요.” 한다. 그러면 선생님도 차갑게 “그래. 오지
마.”하곤 내 등뒤에서 대문을 쾅 닫히는 소리를 듣는 것이다. 그러면
그게 또 얼마나 서럽던지.
하지만 그
다음 날 나는 어김 없이 피아노를 배우러 선생님 댁에 갔다. 그도 그럴 것이, 전날 선생님과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엄마한테 말하지 않았다. 그랬다가
엄마는 오히려 나를 혼낼 게 뻔했기 때문에. 그러니 또 그렇게 집을 나설 수 밖에.
그렇지 않아도
내 덩치 보다 두 배는 커 보이는 피아노에 주눅들어 있었는데 할 수만 있으면 엄마와 피아노 그리고 선생님과 평화롭게 잘 사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러려면 전날 무슨 일이 있었냐 싶게 집을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 다행히도
선생님 역시 전날 있었던 일 가지고 뭐라고 그러진 않는다. 정말 쉽지 않은 인생의 서막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 담임 선생님은 좀 무서웠다. 아이들이 조금만 잘못해도 꾸짖는
것이다. 그런 것을 보면 그 분은 선생님으로서 학생들을 어떻게 다룰지 나름 아는 분 갖기도 했다.
지금도 기억이 나는 건,
선생님이 갑자기 무슨 일을 하다 외마디 울음 소리를 내고는 그대로 교탁에 머리를 파묻고 한동안 꼼짝도 안 하는 것이다. 선생님은 그런 모습을 이후에도 몇 번인가 보이셨는데 그런 때가 되면 아이들은 떠들다가도 찬물을 끼얹듯 일순간
조용해진다. 그리고 아이들은 저마다 선생님이 울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몇 분 지나지 않아 선생님은 몸을 일으키시더니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하던 일을 마저 하곤 했다.
나는 또 그게
걱정돼 심각하게 언니에게 말했더니 언니는 선생님이 피곤해서 그러는 걸 거라며 별 대수롭지 않게 받아 넘기는 것이었다. 쳇, 하여간 언니는 일생 도움이 안 된다.
하긴, 한 반에 80명이나 되는 아이들이 바글대고 있었으니 힘들기도 하시겠지. 하지만 선생님의 그런 모습은 확실이 반전이긴 했다. 그렇게 아이들을
엄하게 다루기로 정평이 나신 분이 그런 약한 면도 있었으니 말이다. 지금도 가끔 선생님을 떠올리면 그때
어딘가 아프셨던 건 아닐까? 아니면 유난히 사는 게 힘들고 고달프셨던 걸까? 걱정도 되고 궁금하기도 하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만난 담임 선생님은 남자 분이셨다. 그렇다고 눈에 확 띄는
미남 선생님을 생각하면 안 된다. 그야말로 그 시절 전형적인 아저씨상 그 자체였다.
난 그 선생님이 1학년 때 선생님 보다 낫다고 생각했는데, 선생님은 나에게 매를 대신
적이 없었고 오히려 예뻐해 주셨다. 하지만 나 아닌 몇몇 아이들에겐 아주 무섭게 대하셨는데 구체적으로
얘기는 하지 않겠지만 그렇게 하신 것이 일벌백계의 전형을 보이기 위한 선생님 나름의 교육 방법이었을 것이다. 선생님은
가끔 웃긴 이야기도 해 주셨는데 난 선생님이 그렇게 몇몇 아이들을 거칠 게 다뤘다는 점 때문이었는지 나를 예뻐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좋은
선생님이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리고 3학년 때 만났던 선생님이야말로 내가 막연하게 그렸던 좋은 선생님의 전형을 보여준 분이 아닌가 한다.
초등학교 3학년쯤
되니 아이들도 나름의 촌티를 벗고 제법 학생티가 나지 않았을까? 그도 그럴 것이, 자기들 밑으로 두 학년이나 후배들이 생겼고, 학교생활도 제법 익숙해졌을
테니 나름의 관록이 붙었을 테지. 그리고 그에 걸맞게 어느 나른한 봄날 공부하기 싫은 아이가 총대를
매듯 “선생님, 옛날 이야기 해 주세요.” 하면 연이어 전염 돼 반 아이 전체가 일제히 옛날 얘기해 달라고 아우성을 쳤을지 모를 일이다. 또 그렇지 않으면 선생님이 인심이라도 쓰듯 자청해 언제가 들려줘야지 한 이야기로 아이들을 사로잡았던 것은 아닐까?
그 어느 쪽이어도 좋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시작된 이야기는 뜻밖에도 고대 이스라엘 이야기이다.
옛날 이야기를
해 달라고 하면 대부분 우리나라 전래동화 같은 건데 일단 이국적인 느낌이 좋았다. 그리고 그것은 그
나라에서 총리대신까지 올랐던 요셉이란 사람의 이야기다. 형들과 잘 지내지 못해 온갖 누명과 설움 속에도
신앙의 정절과 근면함으로 일궈낸 인간 승리이자 영웅의 이야기는 내 어린 마음에도 신선함을 넘어 묵직한 감동으로 전해져 왔다. 난 너무 감동스러워 선생님의 이야기를 아예 외워버릴 정도였다.
그게 또
어느 정도냐면 기러기 새끼는 알을 깨고 나오는 순간 제일 먼저 보는 사물을 자기 어미로 인식한다. 거기서
나온 말이 ‘각인 효과’라고 하지 않던가? 그처럼 난 한동안 마치 오래 전부터 그 얘기가 나를 위한 이야기처럼 나의 모든 것이 점령당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훗날
내가 기독교에 귀의하고 성경이란 것을 처음 읽기 시작한 중학교 3학년 어느 날 창세기를 읽었을 때 전기에
감전이라도 되는 줄 알았다. 바로 거기에 그 옛날 선생님이 들려 주셨던 요셉 이야기가 실려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가끔 그 선생님을 떠올릴 때면 그 이야기의 출처가 어디에 있을까 궁금했었다.
나는 또
그때야 비로소 그 이야기를 들려주셨던 선생님의 의도를 알았다. 선생님은 그 이야기를 통해 아이들이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아가길 바랬을 뿐 아니라 신앙을 갖게 되길 바라셨던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내가 어느 특정 종교를 선전하기 위해 이 글을 쓴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보다 난 어린 시절
들은 이야기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하고 싶다.
아무튼 성인이
되어 요셉의 이야기는 여러 각도에서 연구되고 표현 된다는 것을 알았다. 하긴 나도 이렇게 감동스러운데
세상에 이야기를 다룰 줄 안다는 작가들이 이런 이야기를 가만 놔 둘 리가 없다. 그 중 가장 어린 아이들이
좋아할만한 작품은 앤드류 로이드 웨버와 팀 라이스가
콤비를 이루어서 만든 뮤지컬<어메이징 조셉 드림 코트>이
아닐까 한다. 나는 언젠가 이것을 우연히 TV를 통해 본적이
있는데 정말 환호하리만치 잘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또한 2001년도에 독일 문학의 거장 토마스 만의 <요셉과 그 형제들>(살림 간)이 한국어로 번역되어 나왔다. 그 작품은 한 권의 분량이 무려 4백 쪽 넘었고, 그런 책이 7권이나 된다. 성경에
요셉에 관한 분량은 몇 장 되지 않는데 어떻게 그렇게 방대한 저작으로 남길 수 있는지 그저 놀랍다는 말 밖에는 할 말이 없다.
무엇보다 그 책은
기독교 신앙을 옹호하기 위해 썼다기 보다 신화적 관점에서 썼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에 비해
송봉모 신부가 쓴 <신앙의 인간 요셉>(바오로딸
간)란 책은 그야말로 요셉이라고 하는 성서 인물을 깊이 있게 묵상하고 쓴 책인데 개인적으로 이 책이
감동이 있고 무척 마음에 든다.
이렇게 요셉
이야기를 대할 때마다 나는 초등학교 3학년 때의 담임 선생님이 생각이 난다. 아이들을 사랑하고 온유하게 대해 주셨던 모란꽃 같은 선생님이셨다.
하지만 왜
사람마다 그런 거 있지 않나? 나에게 좋은 사람은 오래 곁에 있어주지 않는다는 묘한 징크스 같은 거
말이다. 그래서일까? 그 선생님과 나와의 인연은 그리 오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난 그 해 여름이 시작될 무렵 몸이 급격히 안 좋아 병원에 입원을 해야 했고, 또 가을엔 살던 곳에서 이사를 해 아예 학교를 옮겨야 했다.
그렇다고
성격이 좋아 사람들을 잘 챙기는 스타일도 못 되어 선생님은 늘 가슴 속에만 있지 한 번도 찾아 뵙지도 못했다. 물론
찾아 뵙지 못하는 선생님이 어디 그 선생님뿐이겠는가? 제자가 되어 훗날 잘 찾아 뵙지도 못할 거면서
선생님이 좋은 분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건 확실히 의미가 없어 보인다. 그분들도 알고 보면 아이들에게
정 안 줄려고 노력하며 사시는 줄도 모른다. 사제지간이래 봤자 길면 1,
2년이고 짧으면 몇 개월이다. 그래도 어떻게 나를 가르쳐 준 선생님들을 잊을 수 있겠는가? 거기에 덤으로 평생 가슴에 잊지 못할 이야기를 새겨 주신 선생님을 잊지 않고 살고 있다면 그도 복된 인생이겠다
싶기도 하다.
이렇게 이야기는
힘이 세다. 영혼까지도 사로잡으니 말이다. 하지만 또 그
이야기를 전하는 사람은 더 세지 않을까? 이렇게 오래도록 선생님을 잊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사람이 되고 싶은가? 그렇다면 이야기를 선물해라. 그럼
그 사람이 오래도록 잊지 않고 당신을 기억할 것이다.
그나저나
그 선생님은 잘 계신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