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왜 나는 하필 초등학교 4학년 때 책을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했던 걸까?
사실 어렸을 때 난 내 동생과 소꿉놀이를 참 많이 했다. 언니와 오빠가 학교에 가고 없으면 나는 자연 동생과 함께 놀았다. 남자 아이라면 소꿉놀이 같은 건 싫어 할만도 할 텐데 동생은 그러지 않았다. 나를 잘 따르는 편이었는데 동생도 나 아니면 놀만한 상대가 없었으니 그랬을 것이다. 그리고 동생이 초등학교에 들어가자 우린 더 이상 소꿉놀이는 하지 않았다. 대신 인형놀이를 하고 지내곤 했다(소꿉놀이나 인형놀이나 한 끗 차이 아닌가?) .
그 무렵 살던 곳에서 이사를 했는데 그때부터 생각지도 않게 장식용 인형이 생기기 시작했다. 우린 그걸 가지고 인형 놀이를 했던 것이다. 처음엔 내가 동생을 데리고 했는데 언제부턴가는 동생이 먼저 자청해서 놀이를 하자고 했다. 나는 귀찮긴 했지만 마땅히 놀 것도 없으니 몇 번 응해주곤 했다. 그 인형들을 가지고 한마디로 플롯은 없으면서 내러티브만 있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만들어 놀았던 것이다.
그런데 언제까지나 이렇게 계집 아이 같이 놀 것만 같은 동생이 언제부턴가 진짜 남자 아이가 돼가고 있었다. 이젠 놀아도 남자 아이 같이 놀고, 장식 인형이 아니라 조립식 장난감(말하자면 접착식 본드가 함께 들어간 요즘으로 말하면 피규어의 조악한 형태 같은)을 만들어 또래 친구와 같이 놀기도 하고, 어떤 땐 혼자 놀기도 하는 것이다. 혼자 놀 땐 좀 가관이었다. 혼자 악당도 됐다가 정의의 사도도 됐다가, 한마디로 그런 다중인격체 놀이가 없었다.
나는 그런 동생의 노는 모습을 보면서 나에게 있어 한 시절이 갔음을 느꼈다. 이제 동생은 절대로 나와 계집 아이처럼 놀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던 것이다.
이렇게 하루 아침에 노는 차원이 달라져 버렸으니 나의 관심이 책으로 옮겨 갔던 건 어쩌면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건 그때까지 어린이 책으로 계몽사에 필적할만한 다른 책이 없었는데(적어도 내가 알기론 그렇다) 그 무렵 ‘계림문고’라는 아동용 문고가 나왔던 것이다. 바로 이 계림문고가 나에겐 최초의 책이었던 것이다.
이 책은 계몽사처럼 전집을 표방하고 있긴 하지만, 계몽사의 단점을 보완한 책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계몽사의 책은 무조건 한 질로 사야 했다. 게다가 하드 커버라 묵직했다. 그런데 계림문고는 페이퍼백이면서 싸고 낱권으로 살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아는 사람은 안다. 책을 사서 모으는 기쁨이 어떤 건지를. 난 그것을 이 계림문고 책들을 사는 데서 비로소 알아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계몽사의 책은 엄마가 언니와 오빠를 위해 사 준 거지 나를 위해 사 준 것은 아니었다. 물려서 읽을 수도 있지만 난 처음부터 내 물건이 아닌 것엔 마음이 가지 않았다. 나는 뭐든지 내 것으로 규정지을 수 있는 걸 원했던 것이다. 그러니 내가 그 책에 애착을 보였던 건 당연했다.
시험이 끝나면 나는 어김 없이 학교 앞 문구점을 갔다. 그때나 지금이나 서점이 많지 않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다. 물론 요즘에 서점이 많지 않은 건 옛날에 서점이 많지 않은 것과는 다르긴 하다. 옛날엔 오프라인 서점이 아니면 책을 살 수 없는 줄 알았는데 학교 앞 문방구에서도 책을 살 수 있었다는 건 나에겐 거의 행운과 같은 일이었다. 굳이 그 먼 서점까지 갈 필요가 없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그렇지 않아도 내가 자주 갔던 단골 문구점엔 계림문고 한 종 밖에는 없어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그래도 좋았다. 시험이 끝나면 해방감과 더불어 문구점에 책을 3권 사는 것이었다. 왜 3권이냐 하면, 낱권으로 사면 당시 가격으로 350원이었다. 그런데 문방구 주인이 3권을 사면 천원에 해 줬다. 돈 없는 초등학생에게 50원 아끼는 게 어딘가? 그때 초코 파이 하나의 가격이 그쯤 했는데 말이다.
어쨌든 난 그렇게 세 권의 책을 사다 다음 시험 볼 때까지 시간을 쪼개 읽는 것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잠자는 시간, TV 보는 시간까지 쪼갰다는 것은 아니다. TV에선 ‘6백만 불의사나이’니 ‘특수 공작원 소머즈’니 하는 멋있고 기가 막힌 프로를 하는데 그것을 어떻게 포기하고 책만 읽는단 말인가? 그렇게 볼 거 자 보고, 잠자 거 다 자고 그 나머지 시간 예를 들면, 학교에서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 또는 집에 돌아와서 짬짬이 자투리 시간에 읽는 것이다.
그러면서 고민은 고민대로 한다. ‘아, 난 왜 이렇게 책을 빨리 못 읽는 것인가? 역시 초등학교 1학년 때 담인 선생님의 말이 맞는 것 같아.’ 뭐 이렇게 자책하면서 말이다.
삽화 좀 들어가고 200쪽이 채 될까 말까 하지 않았을까? 그걸 다음 시험 볼 때까지 붙들고 있다니. 그렇다고 세 권을 사면 사는 족족이 다 읽느냐면 그렇지도 않다. 재미없다고 엎은 책도 꽤 된다.
그래도 학창시절 그 사막 같은 학교 생활을 견딜 수 있게 해줬던 건 그렇게 시험이 끝날 때마다 책을 샀던 나만의 호사를 누릴 수 있어서가 아니었나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