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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널라이즈 디즈 - Analyze Th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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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피아 영화 무겁고 칙칙할 필요 있는가? 빌리 크리스탈의 연기가 일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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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 The Note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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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듯 이 영화는 어디서 본듯한 뻔한 그렇고 그런 사랑이야기 같다.   

이를테면 가난한 청년과 부자집 딸과의 운명적인 사랑. 그러나 그런 차이 나는 사람끼리의 사랑이 그렇듯 결혼까지는 적지않은 난관이 있어 보인다. 이럴 때 적수가 되는 경우는 부모가 될 경우가 많다. 아니나 다를까 여자의 부모 그중에서도 엄마의 반대가 만만치 않다. 게다가 전쟁은 이들의 사랑을 갈라놓기에 충분했다. 그래도 서로를 잊을 수 없어 그들은 헤어진 후에도 한동안 편지를 주고 받는다. 하지만 이 편지는 여자의 어머니에 의해 확실히 차단이 되고 그렇게 둘은 잊혀져 간다. 그런데 그렇게 세월이 흐른 후, 우연히 신문에난 노아(남자 주인공의 이름)의 기사를 본 앨리(여자 주인공)는 용기를 내어 연락을 하게 되고 이로인해 끊어졌던 그들의 사랑은 다시 불 타오르기 시작한다. 앨리는 약혼자까지 있지만 파혼을 하고 노아에게로 간다. 

보통의 작가들은 그렇게만 되면 할 얘기를 다 마쳤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둘은 행복하게 오래 오래 잘 살았더래요.' 그런데 보통 이렇게 끝나는 남녀 주인공의 나이는 평균 얼마나 될까? 옛날 같으면 10대 말에서 20대 초반이었을 것이고, 최근엔 20대 중반에서 말까지 잡을 것이다. 인간의 평균 수명이 70에서 80을 놓고 볼 때 이들은 그렇게 사랑을 이루고도 30년에서 길게는 40년까지도 바라보는 나이를 산다. 그때까지 정말 행복하게 오래 오래 잘 살고 있는 것일까? 살아가는 동안 그렇게 힘겹게 사랑을 이루고도 막상 살아보니 아니더라 해서 헤어지는 사람이 얼마며, 둘중 하나가 먼저 죽는 쌍이 얼마며, 둘 중 하나가 바람을 피우는 경우는 얼마일까? 그러니 오래 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말은 믿을만한 게 못된다. 그러므로 작가의 동화같은 말을 다 믿지는 말아라.  

그런데 영화는 독특하게도 이들이 사랑을 이루고 나서의 삶은 보여주지 않고 있다. 이를테면 아이를 낳고, 이사하고 승진하고 등등의 삶은 보여주지 않고 있다. 딱 사랑을 이루고 훌쩍 뛰어넘어 죽음을 바라보는 노년의 사랑을 보여주고 있다.

사람이 가장 슬플 때가 잊혀지는 것이라고 한다. 잊혀지면 그 전에 있었던 모든 일은 없는거나 마찬가지가 되어버린다. 그것은 또 얼마나 안타깝고 불행한 일인가? 당신이 사랑했던 내가 아직도 이렇게 당신을 사랑하는데, 당신은 나를 기억하지 못하니 그것은 정말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치매는 그렇게 앨리의 기억을 갉아 먹었고 요양소에서 만난 웬 낮선 노인에게서 어느 젊은 남녀 한 쌍의 사랑 이야기를 듣는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은 다름아닌 남편 노아이고, 그 이야기의 기록은 아내인 앨리가 쓴 것이다. 언젠가 치매에 걸려 자신의 사랑을 잊게 될 것을 미리 대비해서다. 그렇다면 누가 누구를 더 많이 사랑한 걸까? 치매에 걸려도 변함없는 사랑을 바친 노아일까? 자신이 사랑을 기억하지 못할까 봐 그것을 대비해 기록해 놓았던 앨리일까? 노아 없이 그 사랑의 기록은 가능하지 않았겠지만 그래도 나는 왠지 앨리쪽에 더 많은 비중을 두고 싶다. 아무튼 사랑을 하면 이렇게 예지가 생기나 보다.

그렇다. 사랑은 이루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의 순간을 자주 기억하고 가꾸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어떻게 이룬 사랑인가? 어떻게 그것을 다 이루었다고 한순간 마음의 창고에 넣어두고 산단 말인가? 

그래서 기록은 중요하다. 내 사랑은 너무나 귀해서 자랑 삼아 누군가는 알아주길 바래서 기록할 수도 있다. 그러나 기록은 역시 나를 위해서 하는 것이다. 사랑의 순간을 가장 먼저 잊어버릴 나를 위해서 말이다. 결국 그랬을 때 남도 알아주는 법이다.  

나는 이쯤되면 판에 밖힌 사랑 얘기나 쓸 줄 아는 그렇고 그런 작가들 보다 앨리가 더 작가답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늙으면 매력도 없고 어떻게 그렇게 변함없이 사랑할 수 있을까 의심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사람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추억을 먹고 사는 동물이다. 늙으면 늙는대로 사랑을 볼 수 있는 시야가 새롭게 생긴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조금만 주위를 기울이면 죽음 조차도 자신의 뜻대로 정할 수도 있는 것 같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니까 말이다. 그래서 그럴까? 둘은 한 날 한 시에 앨리가 누웠던 일인용 침대에서 손을 꼭잡고 죽었다. 또 아니면 어떠랴?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죽음으로 헤어지는 것도 아름답지 않은가?  

영화는 처음 볼 때는 그저 그랬는데 보고나니 인생의 지평을 넓혀주는 뭔가가 느껴져 여운이 잔잔히 오래 갔다. 더구나 이 영화는 실화라고 한다. 이런 영화가 있어 인생을 좀 더 넉넉히 관조할 수 있는 것 같다. 

그나저나 나도 저런 사랑의 기록물 하나쯤 갖고 싶은데 (아직)없으니 사랑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보다. 그렇다면 난 뭐에 대한 기록을하며 순간을 기억할까? 

감독: 닉 카사베츠 

주연: 라이언 고슬링, 레이첼 맥애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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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의 전설 - The Legend of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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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영화의 분위기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을 연상케 만든다. 이야기가 우화적이라는 것도 비슷하고. 단지 다른 것이 있다면 <벤자민...>은 완전 허구지만,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과연 있을까 싶다. 일생 동한 한 번도 배에서 내려 땅에 발을 딛어보지 않은 남자 말이다. 그러므로 그는 세상이 말하는 금치산자다. 본적도 주소지도 없다. 그래서 그를 가리켜 '전설'이라고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딱 한 번 땅에 발을 딛어 보려고 했다.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기 위해서. 그러나 그는 배(여객선)와 땅을 이어주는 승강기 계단에서 주춤하다 이내 다시 배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결국 자기 안에 뭔가를 깨지 못하고 자폐적 삶을 산다. 무엇이 이 남자로 하여금 그토록이나 땅에 발을 내딛지 못하게 만드는 것인지 설명이 없다. 피아노 역시 언제 어떻게 배웠는지에 관한 설명이 없다. 그래서 어찌보면 이 영화는 불친절 하다. 또한 이 사람의 이름은 어떠한가? 1900년에 태어났다고 해서 나인틴 헌드레드다. 옛날에 우리나라 사람들 제 자식 이름 아무렇게나 지어주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더구나 고아로 태어나서 어느 인정 많은 흑인 손에서 자란다. 물론 그것도 잠깐 동안.  

그래도 이 남자 그다지 불행해 보이지는 않는다. 피아노를 잘 친다는 덕분에 여객선 악단 맴버가 되고, 땅에 발을 안 딛었다뿐이지 세상 어디든 다 돌아 다니지 않는가? 배 안에선 온갖 산해진미는 다 맛보고 살 것이고. 그러던 어느 날, 당시 재즈를 처음 발명했다던 흑인 피아니스트와 배틀을 하게 된다. 이 흑인의 삶도 만만치 않다. 매음굴에서 태어나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가 된 입지전적의 인물이다. 그때까지 자신의 피아노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견주어 보지 않았던 그는 분명 새로운 경험이었을 것이다. 그는 이 흑인 피아니스트의 뛰어난 연주 실력을 보면서 겁을 먹는다. 하지만 결국 자신의 연주 실력이 앞선다는 것을 알고 으쓱해 진다. 역시 영화에서의 압권은 단연 이 둘의 연주 실력을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까 한다. 그것은 주인공의 환상적인 장면과 결합해서 더욱 빛을 바란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다지 감동스럽지는 않다.  

영화를 보면서 내내 드는 생각은 산 입에 거미줄 치지는 않는다고 하는데 그것은 아마도 사람이 태어나면서 부여 받았다던 탈란트 또는 재능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그것은 주인공에게도 그렇고 배틀을 했던 흑인 피아니스트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그것이 결국 삶의 힘이되고 자신을 지켜주는 도구가 될 수도 있다. 이렇게 사람이 재주 하나만 있으면 먹고 산다는데 왜 그 재주를 발휘하며 이름을 남기는 사람은 극소수일까? 생각해 보면 안타깝다. 

 
이 남자 땅에 발을 내딛을 자신도 없으니 사랑하는 여자도 차지하지 못하고 평생 고자처럼 살았지. 그러고 보면 아무리 뛰어난 재주를 가졌다고 해도 매력이 없는 건 그가 사랑을 해 보지 않고 은둔자를 자처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영화는 한 인물을 다뤘다고 해도 매력이 없고 밋밋할 뿐이다. 알아 줄만한 감독에(이 감독은 '시네마 천국'을 만들기도 했다) 거장이라 불릴만한 엔니오 모리꼬네가 음악을 맡았다고 해도 말이다.   

이 영화는 화자가 자신의 낡은 트럼펫을 어느 악기점에 팔다가 그 집 주인에게 자신의 오랜 친구에 관해 고백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져 있다. 화자는 나인틴 헌드레드가 몸담고 있던 여객선 악단에서 트럼펫 주자이기도 하다.   

친구의 의미가 희박해진 요즘 언제나 그 만남을 함께하지 못하고 추억함이 아쉽다. 그래서 친구인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또 어떤 친구가 기억해 줄까? 그런 생각도 해 본다. 

뭐든지 한때 영화롭고 한때 좋을 뿐이다. 주인공이 몸담았던 여객선도 세월이 흐르면서 큰 고철더미에 지나지 않는다. 추억을 다하고 찾아간 고철 속에서 옛 친구를 다시 만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그렇다. 그 속에 나이틴 헌드레드가 아직도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제 죽어서야 배에서 내려오게 될 것이다. 죽어서야 땅에 내려온다던 새 아비정전처럼 말이다. 인생 별거 있어? 그러면서 내려오겠지. 그나마 그가 그렇게 죽었더라면 그 밋밋함이 조금은 상쇄되지 않았을까? 다시 만나도 딱히 할 일도 없으면서 엔딩은 또 어쩌면 그리도 싱겁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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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토랑 2009-10-22 1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영화 앞부분만 봤었는데
가끔 생각 나더라구요.. 배의 밑바닥에서 파도만 바라보고 심심하게 살아오던 소년이
처음으로 음악을 들은게 어땠을까..
이상하게 꼬마녀석이 밖을 보고 있던 장면이 가끔 생각나더라구요

stella.K 2009-10-22 13:46   좋아요 0 | URL
그 꼬마 넘 귀엽지 않아요?
근데 이 남자 좀 아쉬운 삶을 살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음악영화로는 나름 볼만하다고 생각합니다.^^
 
흑수선 - The Last Wit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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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탄한 구성, 비주얼이 좋은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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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 버터플라이 - M. Butterf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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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독특하면서도 파격적이다.  

68년 중국. 프랑스 외교관(?) 르네가 어느 날,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 공연을 보고 거기에 나왔던 주인공을 사랑하게 된다. 그 사랑은 치명적이어서 가정을 버리게 만들었고 동시에 격정적인 사랑을 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봤더니 그 여자는 중국 공안당국이 파견한 공작원이었고 더 충격적인 건 지금까지 여자인 줄만 알았던 여인이 남자였다는 사실이다. 이에 르네는 충격을 받고, 자신이 과연 사랑했던 사람이 누구였던가 심한 혼란을 겪게 된다. 또한 더불어 그때까지 누렸던 자신의 지위와 명예는 한 순간 날아가버리고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만다. 그리고 그곳에서 정체성의 혼란으로 손에 매니큐어를 바르고 여자처럼 행동하는 기행을 한다.   

인상적이고 충격적인건 르네는 일본의 가부끼 분장을 거기 수용된 죄수들 앞에서 시연해 보이면서 자신의 비극적 사랑을 이야기 하는 것이다. 그리고 맨 마지막 장면에 공연이 끝남과 동시에 조그만 손거울로 자신의 목을 그음으로 비극적 삶을 마감한다는 내용이다.  

이 영화화는 나에게 참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사실 유쾌한 영화가 아니기 때문에 추천할만하지는 않다. 그래서일까?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었다고는 하나 이 영화는 19금으로 분류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단 본의 아닌 동성애를 다루고 있다. 요즘에야 이런 것쯤. 할 수도 있겠지만 이야기의 배경이던 68년 당시나, 영화와 됐던 15년 전이나 동성애는 쉽게 다루어지지 않은 소재다. 그런데 영화에서 동성애도 동성애지만 동양문화를 보는 서양인의 태도다. 서양인의 입장에선 동양이 굉장히 신비로울 수 있을 것이다. 말에 의하면 동양의 신비함과 깊이는 서양의  그것이 따라올 수 없다고 하지 않는가. 나 역시 그것에 동의한다. 하지만 이 영화에 나오는 서양인 르네(제레미 아이언스)는 동양에 너무 매료된 나머지 자신을 망각하기 조차 했다. 어떤 면에서는 감독이 너무 동양을 과대평가했다고나 할까? 르네가 죽는 장면에서 마치 서양의 그것이 동양에 전복 당한다는 것을 암시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은 생각까지 들게 만든다. 

사실 그게 아니더라도 정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사랑하는 연인이 여성이 아닌 남성이란 것이 충격적이긴 하다. 그렇게 치명적인 사랑은 일생에 한 번 할까 말까한 것이고, 르네로서도 더 이상의 사랑은 불가능해 보인다. 결국 그는 치명적임과 동시에 자살을 감행할 정도로 허망한 사랑을 했다는 것일 게다. 

그런데 또 주목해야할 것은 인간의  '고백'이다.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는 고백. 그런 의미에서 죽기 전에 꼭 한 번 운다는 가시나무 새와도 흡사하다. 내가 보고 체험한 것을 누구에게든 말하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인 것이다. 그래서 임금님의 귀는 당나귀 귀라고 말해야 하는 인간의 모습이 있는 것이다. 인간은 결코 이야기를 가슴에만 묻어두는 존재가 못 된다. 그 이야기기 희극이든 비극이든 말해야 한다. 그런데 말하는 사람의 입장과 듣는 사람의 입장이 다르다. 듣는 사람은 웃기고, 유쾌하고, 즐거운 이야기를 원하지만, 말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는 때가 있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는 내가 남을 즐겁게 만들고 싶을 때만 가능하다. 그러나 가끔은 포장되지 않은 나 자신 있는 그대로를 말하고 싶을 때도 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사람들은 그런 얘기를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런 것들은 그리 유쾌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밀하고, 음습하며, 슬프고, 우울한 것이다. 그런 말을 누가 듣고 싶어하겠는가? 물론 그것을 말할 때 내 자신이 정화도 되지만 듣는 사람은 그것을 전이시킬수가 있어 조심스럽다. 즉 듣는 사람은 희극을 듣고 싶어하며, 말하는 사람은 비극을 말하고 싶어한다. 이것이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아이러니인 것이다.  

이것을 뒤짚어 보면, 나는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잘나 보이고 싶은 욕망과 또 누구한테는 한 없이 못나고 찌질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가끔은 나도 고백을 하고 싶을 때가 있다. 나의 잘난 면만이 아니라 못난 면도 보여주며 누구에겐가 위로받고 포용받고 싶어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에 있어서 우리가 간과할 수 없는 건 인간은 그렇게 내밀하고 음습한 이야기를 결국은 좋아한다는 것이다. 희극은 오래 기억되지 않는 반면 비극은 오래 기억이 되는 법이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이 그러하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희극 보다는 비극에서 인간의 내면을 더 잘 보여주는 법이니까. 그래서 감독은 이것을 영화화 할 생각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영화에서 르네는 맨얼굴로는 자기 얘기를 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의 수치심을 들어내야 하는 것인데 맨 얼굴로는 가능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 분장이 필요했겠지. 말하고 싶은 욕망과 너무 수치스러워 말할 수 없는 양극단에서 선택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죽기를 각오한 고백이기도 하다. 마치 가시나무 새처럼 말이다.  

결국 본 영화의 교훈은 '치명적 사랑은 엄청난 비극을 가져오는 법. 사랑을 너무 사랑하지 말지니.' 가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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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지금까지 세 번째...
    from stella09님의 서재 2009-10-21 18:02 
    알라딘에 영화 리뷰가 생긴 후로 지금까지 세 번째 이주의 리뷰에 당선이 됐다.  첫 번째는, <더 리더>였고,  두 번째는, <헤어스프레이>였으며,  세 번째는, <M 버터플라이>였다.  그런데 그동안 정작 책에서는 이주의 리뷰가 한 번도 안 되고 있다.  책까지 바란다면 너무 큰 욕심일까?   아무튼 어제 조금 우울한 일이 있었는데 덕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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