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탑
전아리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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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그렇게 유명한 줄은 몰랐다(아마도 본인은 지금쯤 이 유명하다는 말을 꽤 부담스러워 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읽어보니 그럴만 하다고 생각한다. 20대 초반의 나이에 이만한 문체를 가지고 이런 소설을 쓴다는 게 가히 놀랍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왠만한 작품에 이런 말을 잘 하지 않는다. 교만해서인지 아니면 뭘 몰라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난 기고 뛰고 나른다는 요즘의 작가들에게 함부로 좋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작가는 뭔가 다르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주인공 연이를11살 때부터 19세까지를 홀수 나이로 아우르고 있다. 연이의 삶을 이루고 있는 주변은 어둡고 칙칙하다. 띨멍한 병욱이, 알콜중독자인 아버지, 늘 다른 사랑을 꿈꾸는 엄마, 자기 세계에만 웅크리고 있는 같은 반의 서영이 등. 하나 같이 밝은 구석이라곤 없다. 그 가운데 영악한 아이로 자라는 연이의 내면 세계 역시 음습하며 어찌보면 스산한 느낌마져 들게 한다. 어머니가 교통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는데도 울지 않는 아이. 학교에서 여행을 보내 주는 것도 겉으로는 근사한 이유 같아도 그 속내를 알고 보면 좋은 것마는 아니지만 그것을 냉정히 이용할 줄 아는 아이. 연이는 꿈은 꾸지 않지만 현실을 그 어떠한 미사여구나 어줍짢은 해석없이 담담하게 살아간다. 그리고 마지막은 병욱과 서영이 셋이서 여행을 떠난다는 설정이 깊은 여운을 남긴다.

그것은 바로 얼마 전에 본 연극 <청춘예찬>을 떠올리게도 한다. 물론 연극의 내용은 좀 다르긴 하지만 그것 역시 어두운 10대 말을 다루고 있고 보고나면 조금은 우울해진다. 책을 읽다보면 나의 11세는, 13세는...17세, 19세는 어떠했는가를 반추하게 만든다. 물론 이 책의 주인공처럼 특별하지는 않았다. 부모를 잘 만난 덕에 사치스럽진 않아도 별 부족할 것 없이 살았다. 그런데도 나 역시 그때를 떠올리면 웬지 공허롭고 우울하다. 너무 엉터리 같이 살아 10대를 다시 살아보고 싶은 생각마저 든다. 하지만 10대를 다시 산다고 좋을까?

누가 10대의 아이들에게 꿈을 가지라고 했는지, 비전을 가지라 했는지 모르겠다. 그것은 전체 사춘기 아이들 중  상위 3% 이내의 아이들에게나 해당되는 말 아닌가? 그 반대의 아이들은 오히려 세상을 냉정하게 이용해 먹는 방법을 터득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 보게 된다. 또 왜 사춘기 소설은 그토록 칙칙해야 하는 것인지 작가에게 묻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너무 밝게만 그려도 구라 같지 않은가?

어쨋거나 이 영악하기 이를데 없는 이 책의 작가 만큼은 지켜보고 싶다고 말하고 싶다. 그만한 나이에 이런 작품을 쓴다면 앞으로 그녀가 30대가 되고 40대가 될 때는 어떤 작품을 세상에 내놓을지 자못 궁금해진다. 작가의 건필을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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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져 2008-06-27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텔라님이 지켜보고 싶다하니 나도 지켜보고 싶어지는 이 마음!!
잘 지내죠? ^^

stella.K 2008-06-27 16:18   좋아요 0 | URL
앗, 플레져님! 오랫만이어요.
잘 지내죠? 자주 좀 봐요!^^
 
렘브란트 반 라인
사라 에밀리 미아노 지음, 권경희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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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예술가의 초상을 보는 것은 나에겐 그다지 편하고 좋은 것은 아니다. 전에 에밀 졸라의 <작품>이란 책을 읽었는데 결국 읽다 읽다 그 끝을 보지 못하고 덮어버렸던 기억이 있다. 그것은 세잔을 너무나 비참하고 처절하게 그려놔 책에서 자양분을 얻기 보다 오히려내 안의 기운을 뺏어간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글쎄...지금쯤 그 책을 다시 읽으면 어떤 느낌이 들까? 그때 보단 좀 편안한 마음으로 읽을 수 있으려나?

렘브란트 역시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도 그럴 것이, 예술가의 삶이란 게 그리 녹녹한 것이 아님을 우리는 평전으로든 소설로든 이미 접해서 알고 있지 않은가? 예술가들이 편안한 여생을 보냈다는 말은 거의 들어보지 못한 것 같다. 도스토예프스키는 평생 빚진 돈을 갚기 위해 글을 쓰지 않으면 안 됐고, 우리의 부유한 톨스토이 할아버지도 끝내는 달려오는 기차에 몸을 던졋다고 하지 않은가? 모짜르트나 베토벤은 어떤가? 내가 읽은 렘브란트도 말년이 그다지 행복해 끝난 것 같지는 않다.

그래도 내가 이 책을 읽을 생각을 했던 건, 저자의 작품에 대한 다채로운 표현 때문이었다. 저자는 소설적 문체만을 구사하지 않고, 다양한 방법으로 렘브란트를 묘사하고 있다. 거기엔 주로 희곡적 방법을 차용하고 있는데 그게 참 이채롭게 느껴진다. 그런 것으로 보아 작가는 희곡에 대해 아주 조예가 깊거나 아주 관심이 많아 보인다. 또한 이밖에도 서간체도 사용하고 있고, 시도 들어가 있으면 한 인물에 대한 다양한 조명, 이를테면 '나'라고 하는 1인칭과 그를 보는 또 다른 시선 3인칭을 적절히 대비한 것 또한 작가가 렘브란트를 얼마나 신중히 다루고 싶어했는지를 볼 수가 있다. 더구나 문체는 상당히 지적이다. 그래서 지적 욕구를 채워 주기에도  손색이 없다.

그런데 보다 보면, 또 다른 점에서 이 책을 생각하게 만든다. 즉 이를테면 개인적 신앙을 작품 속에 표현하는 주인공의 노력이다. 알겠지만 렘브란트가 살았던 시기는 바로크 시대로서 신의 세기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렘브란트 자신도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  그 시대는 예술 작품 속에 자신이 믿는 신을 어떤 식으로든 표현하길 즐겨했고 그래야 했던 시대였다. 그래서 렘브란트를 비롯해 당대의 서양 예술가들은 성서를 토대로한 예술 작품을 그리기 좋아했으며 그것은 상당히 사실적이며 오늘 날까지도 명화로서 칭송을 받는다.     

그런데 렘브란트도 인간이었던 만큼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낸다. 그 자신 독실한 기독교인인 것만큼은 사실이었지만 그렇다고 금욕적으로 살았던 것도 아니었고, 인간적 실수나 없었던 것도 아니다. 때론 비난 받아 마땅할 일도 행하였으며 그런 자기 자신을 변호하느라 고뇌하는 것들을 본다. 특히 돈과 여자의 문제에 있어서 말이다.

돈과 여자라. 독실한 신앙이든 아니든지간에 이것으로부터 자유롭고 깨끗해지기는 쉽지 않은가 보다. 거기에 여자가 끼었다는 것이 같은 여자로서 껄쩍지근하긴 하지만 어차피 여자와 남자는 서로 끌리는 존재임에 틀림없으니 그냥 이성의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다란 말로 돌려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리라. 그리고 여자가 사회적 약자인 것도 사실이니까. 렘브란트도 남자가 아니던가.

이 책을 읽고 있어서였을까? 요즘 부쩍 신앙과 인간의 위선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하기야 이런 생각이 어디 한때뿐이었겠는가? 작년에 기독교에 대한 맹비난과 철퇴를 맞은 후로 나는 부쩍 왜 그들은 기독교인을 비난할까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문제는 신앙을 권력의 수단으로 삼고 있다는 것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

나 역시 이 부분에 대해서 상당한 문제점과 거부감을 갖고 있는 사람중의 한 사람이다. 신앙은 순결함 그 하나만으로 지켜질 수 없다는 것에 비극이 있는 것 같다. 렘브란트는 그림을 그려 먹고 살았고, 일가를 이루었다. 그런데 그것이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했다는 것인데, 사람들은 그의 작품을 보고 하나님을 찬양했겠지만, 그는 그렇게 그려야 자신의 몸값이 올라가고 칭송을 받았다. 이것은 확실히 그에겐 또 다른 의미에서의 십자가였을 것이고 딜레마였을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고난 당하고 있을 때 사람들이 그러지 않던가? 저가 만일 신의 아들이어든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고. 예수님은 기꺼이 그것을 거부하시고 온전히 고난을 받으셨지만, 이후의 많은 신앙인들은 기꺼이 십자가를 지다가 그 자신 스스로가 그 십자가에서 내려 온다. 그 이유는 그 십자가가 너무 극악스러워서일 수도 있고, 그 스스로가 신적 권위를 부여하고 싶기 때문일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자신의 십자가는 여전히 지고 쓸쓸히 죽어간다. 이 책에서도 렘브란트의 말로를 그렇게 표현했다. 그것은 작가의 상상력일 것이다. 렘브란트는 실제로는 더 평안하게 죽어갔을지도 모르고 아니면 더 비참하게 죽었을지 모를 일이다.

사람이 무엇을 추구하든 그것으로 인해 심판을 받고, 그것으로인해 구원도 받으며, 그것으로인해 위해를 가할 수도 있고, 그것으로인해 남에게 도움도 주는 법이다. 나는 이 책을 통해 그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개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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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A
비카스 스와루프 지음, 강주헌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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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발상이 좋다는 생각이 든다. 퀴즈쇼에 나가 문제를 다 풀고 거금의 상금을 받아야하는데 도리어 경찰에 체포되어 변호사 앞에서 자신의 무고함을 증명하기 위해 진술하는 것으로 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하지만 주인공이 자기 얘기를 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체험과 인도 문화의 이면을 엮어 술술 잘도 풀어나가고 있다.

사실 그동안 외국 소설이라고 하면, 주로 일본, 중국, 미국과 서유럽 지역이 주로 번역되어 나오는 실정이고 보면 인도 소설은 확실히 제3세계 소설로 나오자마자 상종가를 치며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그 이름을 올리고 있으니 마이너리티 소설의 선전이요, 우리나라도 문학을 보는 지평이 넓어졌다고 해야할까?

그 소설은 (비록 그 나라에 가본 건 아니지만) 인도에 대해 보여줄 수 있는 건 거의 다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싶다. 인도하면 빠지지 않는 타지마할에 관한 이야기, 인도 국민이 영화를 좋아하느니만큼 세계에서 가장 많은 영화 편수를 자랑한다고 하는데 그래서일까? 배우 지망생의 친구 살림이나 주인공이 인도의 유명한 여배우의 집에서 종 살이를 한다는 설정에서 그 나라가 영화를 얼마나 좋아하는가를 작가는 능청스럽게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가난 때문에 압제 당하는 인도 여성에 관해서도 인상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또한 주인공의 이름이 독특했던만큼 인도의 종교문제도 건드려 주고 있다.

더구나 이 소설은 주인공 람 모하마드 토마스가 태어나자마자 버린 받은 고아 소년의 성장기다. 물론 고아라는 사실이 주인공에겐 힘겨운 삶을 부과하고 있지만, 어느 것에도 눈치볼 것 없고 거칠 것이 없는 자유로운 영혼이란 점에서 소설적 인물로는 더 없이 매력적인 인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 읽다보면 꼭 모험담을 보는 것 같아 재미가 있었다. 게다가 친구와의 진한 우정. 갱단과의 한판승, 창녀 애인과의 신의도 보여준다는 점에서 마치 무슨 버디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어 지루하지가 않았다.

단지 약간의 아쉬움이 있다면 너무 많은 얘기를 다룰려고 해서일까? 읽다 보면 중간에 뭔가가 뒤섞여 매끄럽게 풀어내지 못하고 있는 듯한 느낌 든다. 그래도 나중엔 해피앤딩으로 끝나고 있으니 나름 카타르시스가 느껴지면서 잘 만들어진 영화 한편 본듯한 느낌이다. 가히 추천할만 하다.  

사족: 이 책 읽으면서 퀴즈쇼에 대한 의혹이 일었다. 우리나라 지상파 방송에서 매주하고 있는 퀴즈쇼에 이와 비슷한 함정과 의혹이 있지는 않을까?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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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8-02-04 0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책 보고싶던데... 도서관에 신청해놨더니 아직 안 사주네요. ^^

stella.K 2008-02-04 10:41   좋아요 0 | URL
저런...이런 책은 빨리 빨리 사 놓고 순환해야할텐데...
재밌어요. 꼭 읽어보세요.^^
 
나, 제왕의 생애 (반양장)
쑤퉁 지음, 문현선 옮김 / 아고라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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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만 듣던 쑤퉁의 소설을 이제야 읽었다. 결론부터 말하지면 쑤퉁은 상당한 이야기꾼이란 생각이 든다.

이야기 구조는 단순하다. 15세 때 왕위에 등극한 단백이 어떤 과정을 통해 몰락해 가는가를 그리고 있다. 이야기는 어린 나이에 왕위를 이어 받았기 때문에 어머니와 할머니의 간섭(수렴첨정이라 해야 옳겠지만 그 말은 이 소설에서는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과 눈치를 봐야했고, 많은 비빈들의 치마폭에 쌓여 그들의 시기와 질투를 지켜봐야 했으며, 형제들의 시해의 위험속에 살았으며, 결국 모반으로 왕위에서 쫓겨나 한낱 줄타기 광대로 전락하게 된다는 것이 이야기의 전부다. 이것은 역대 몰락의 길을 걸었던 제왕들의 전형이다. 하지만 저자가 가상의 역사 소설이라고 했던만큼 아무리 픽션이라고는 해도 허위라도 꾸밀만한 역사적 사건 같은 것은 없다. 단지 우리나라에 <조선왕조실록>이 읽는 것처럼 이 책에도 <섭궁비사>라는 것이 있어 이야기에 비중을 실을려고 하지만 이것 역시 가상의 역사책일 뿐이다.

읽고 있노라면 꼭 동화를 읽는 듯한 분위기다. 나는 바로 저자의 이런 점을 높이 사고 싶다. 뻔한 이야기를 자신만의 색깔로 변주해 내는 솜씨가 가히 탁월하다. 읽고 있노라면 영화 <마지막 황제>도 생각이 나고, 광대가 마지막까지 줄타기를 즐겼던<왕의 남자>도 생각이 난다. 몰락한 제왕 단백이 마지막에 줄타기 광대가 된다는 설정에서 묘한 아우라 마져 느끼게 한다. 왕위에서 쫓겨나 궁을 나와서야 비로소 세상을 알게되고, 광대가 되어서야 인생의 의미를 깨닫는다는 것은 생의 아이러니를 알게 되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보인다. 또한 <논어>에 대한 글귀는 단 한줄도 인용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이 주는 미장센도 만만치 않아 보인다. 한마디로 이 소설은 잘 빚어낸 우아한 이미지 소설이란 생각이 든다. 나는 이 책을 덮으면서 가까운 시일내에 그의 또다른 소설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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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7-12-31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곱번째 줄에 전형다>>>전형이다. 수정해 주셔용^^
쑤퉁의 이름을 많이 들으면서 저도 참 궁금했던 작가에요. 오늘 오랜만에 책장 정리하면서 읽어야 할 책이 너무 많아 새해에는 가급적 새 책 안 사기 운동을 펼쳐야겠다고 다시금 다짐했어요. 그래도 언젠가 쑤퉁을 만나볼 겁니다. 스텔라님 새해 복 많이 받으셔요~

stella.K 2007-12-31 18:21   좋아요 0 | URL
ㅎㅎ 역시 예리하시군요. 이 책에 대한 호불호가 좀 나뉘는 것 같은데, 저는 좋았습니다. 마노아님도 기회 있으면 꼭 한번 읽어 보세요. 님도 복 많이 받으시길...!^^
 

조경란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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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요리를 주제로한 작품들은 참으로 흥미롭다. 물론 몇 작품 보지는 못했지만 <바베트의 만찬>이나 <초콜릿>같은 작품은 인간의 식욕을 자극할 뿐만 아니라 음식을 통해 음식이 가진 은혜를 베풀며, 나아가 종교적인 이유에서 금욕하는 인간들을 점잖게 또는 경쾌하게 조롱한다. 물론 이 두 작품들은 금욕 자체를 꼬집는 것이 아니다. 금욕 그 뒤에 감춰진 인간의 위선과 권위 의식을 까발리려고 했을 것이다. 그 밖에도 음식 하나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보여줬던 드라마 <대장금>같은 경우는 이영애라는 당대 최고의 배우가 주인공을 맡았다는 것을 차치하고라도, 드라마 자체만으로도 숨 죽이고 볼만한 훌륭한 작품이었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음식을 소재로한 영화나 문학작품은 많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 또 음식을 소재로 한 독특한 작품이 나왔다. 바로 조경란의 <혀>이다. 위에 언급한 작품들은 요리를 통해 인간의 위선이나 권력을 까발렸다면, 조경란은 독특하게 식욕과 성욕 나아가서는 애욕에 관해 지적이고도 음울하지만 훌륭한 성찬을 차려주었다. 

조경란의 작품을 처음 대해 본 나로선 이 작품이 적지 않은 울림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작품은 결코 빨리 읽히는 것이 아니었으며, 그 이미지도 상당히 강렬하다. 독특하게도 이 책의 부록으로 그녀가 이 작품을 쓰면서 참고했을 참고 문헌이 나오는데, 작품속에서 그것들을 정말로 적절히 잘 녹여내, 읽으면서 지적인 만족감을 충족시켜 주었다.

사실 난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인간이 갖는 식욕과 성욕이 서로 얼마만한 연관이 있을까에 대해 그리 심각하게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런데 이 작품을 읽는 동안, 어느 한 모임에서 우연찮게 식욕과 성욕에 관한 열띤 토론(?)을 하게 되었다. 즉 인간의 욕구 가운데 가장 기본적이고 원초적이라 할 수 있는 식욕과 성욕 중 어느 것이 더 우위이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나는 오래 생각할 것 없이 당연히 식욕일거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사람은 하루 이틀 섹스를 하지 않아도 살 수 있지만 배가 고프면 못 사는 것이 아니냐고 했다. 게다가 성욕은 일부러 금욕하고도 나름 만족하게 잘 사는 사람도 있다. 이를테면 신부나 수녀들 또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어도 다른 등등의 이유에서. 하지만 금방 그 자리에 있었던 이를 뒤엎는 반론이 나왔다.

영장류의 동물 실험이 있었단다. 뇌에 전류를 흐르게 하고 한쪽에선 버튼을 누르면 여러 가지 성적 상상이 가능하게 했고, 한쪽엔 실제로 풍성한 먹을거리를 쌓아 놨다고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실험에서 그 동물(침팬치나 오랑우탄쯤 됐겠지?)은 코 앞의 먹을 것을 놔두고 성적 상상을 할 수 있는 그 버튼만을 굶어 죽을 때까지 하고 있더란다(물론 그러다 진짜 죽었는지 아사 직전에 그 실험을 멈췄는지 그후의 일은 알길이 없었다). 그 얘기를 들으니 일말의 의심이 남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생명체가 갖는 성욕이란 것도 무시 못하는 것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 흥미로운 건, 수컷들이 전쟁을 하지 않을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은 암컷들이 그들의 성욕을 잘 달래주면 전쟁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하기야 인간의 모든 역사 배후에 이런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가 숨어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그 말은 결코 근거없는 말은 아닐거라고 생각한다.

그러고 보면 인간이 갖는 욕구는 그 하나로서만 존재하지 않고 유기적으로 존재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식욕. 즉 인간의 절대 미각를 좌우하게 되는 '혀'는 정말 잘 다스려야 하는 인체기관임에 틀림없다. 보라. 아담과 하와의 타락을. 그들은 혀로 신께서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따서 맛을 보았으며 수 많은 애증 낳게 했다. 사실 인간의 역사는 애증의 역사라해도 과언은 아니지 않는가?  

이 작품에 대해 불만이 있다면 시종 낮고 음울하다는 것일게다. 적어도 요리에 관한 작품이라면 좀 밝고 경쾌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생각해 봤더니 내가 본 요리를 소재로한 일련의 작품들 역시 그리 밝지마는 않았던 것 같다. 그중 이 작품이 조금 더 심했던 것 같다. 하지만 왜 이렇게 쓸 수 밖에 없었는지는 마지막을 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마지막 반전이 참 놀랍고 그로테스크 하다. 갑자기 예전에 보았던 박찬욱 감독의 <친절한 금자씨>가 생각이 났다.

아직 읽어 보지 않았다면 한번쯤 읽어 보라고 조심스럽게 권하고 싶다. 그럼 내가 왜 그렇게 말하는지도 이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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