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대중문화 표류기
김봉석 지음 / 북극곰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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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이 책을 펼쳤을 때 뭔가모를 기대감이 있었다. 무엇보다 재미있을 것 같다는. 작가야 처음 듣는 이름이고(그래도 이 사람 나름 글 꽤나 쓴다는 부류에선 알아주는 고수긴 한가 보다) 난 바로 이 '대중문화'란 글자에 꽂혀 기런 기대감을 모락모락 피워 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대중문화는 결코 어렵지 않다. 그것은 그냥 자연스럽게 흡수되는 것이고, 즐겨야 하는 것이지 고찰되어지고 연구되어지는 거라면 골치 아파 내동댕이 처질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세상엔 되는 일 보다 안 되는 일이 더 많은데 이 '대중문화' 조차 까탈스럽고 어려운 거라면 우리는 어디가서 위로를 받는단 말인가? 모르긴 해도 범죄율의 증가와 깨우치지 못한 중생들이 거리를 방황하며 정신 병원에 사람들이 넘쳐날지도 모를 일이다.

 

저자는 특별히 '표류기'란 말을 쓰고 있다. 왜 그런지는 책을 읽으면서 이해가 갔다. 저자는 한마디로 자신을 루저 또는 조금 고상한 언어로 아웃사이더 뭐 그런 것으로 분류하고 있다. 어렸을 적 갑자기 말을 더듬게 된 이후로 그는 세상과 조우하지 못했고 자신만의 방법으로 세상을 향유해 나갔다. 그것이 학교와는 담을 쌓은 채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듣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그런 것들을 탐닉했고, 그런 것들에 표류했던 것이다. 얼마나 다행인가? 자신이 원해서 태어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태어난 이상 살아남아야 하는데 경쟁해서 살아남긴 싫고 그나마 이런 것들에 위로를 받으며 살아갈 수 있으니. 그리고 그것은 훗날 이렇게 훌륭한 당대 문화 체험기겸 인생 고백록이 되었다. 뭐라도 하나 붙들고 있으면 그것이 삶의 자산이되고 힘이 된다는 걸 이 책을 보면 알 수가 있다. 그러므로 아둥바둥하며 경쟁에서 살아남으려고 하지 말아라. 사람은 다 자기 밥숟깔은 자기가 물고 나오는 법이다. 

 

문화 체험기란 말을 썼는데 우린 보통 그런 건 외국에 나가 살면서 그 나라의 문화를 체험하고 글로 옮기는 것을 연상하곤 한다. 하지만 그것만이 문화 체험기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삶이 문화와는 동떨어져 얘기할 수 없으니 당대에 체험한 문화를 기록하는 것 또한 의미 있는 일이고 자신만의 자서전을 쓰는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이 책에 단번에 끌렸던 건 작가가 루저였다는 것이다. 만일 이런 책을 해외 유학파며 명망있는 어떤 문화 평론가가 썼다면 읽으면서도 과대평가하거나 잘난 척한다 했을 것이다. 

 

유년시절에 도무지 세상이 날 원하는 것 같지가 않다고 느끼면 가장 건전하고 빠르게 빠져드는 것이 책을 읽는 것이 아닐까 싶다.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왜 하필 그때부터 책을 읽기 시작했을까가 나 자신도 의문이었다. 그 보다 이를 수도 있고 늦을 수도 있을텐데 말이다. 물론 계기는 있었다. 초등학교 3학년 1학기를 마칠무렵 나는 갑자기 병원에 입원하게 됐다. 입원 기간을 한 달 남짓이었지만 몸은 피폐해져 오랫동안 학교에 갈수가 없게 되었다. 때마침 집도 이사를 하는 바람에 2학기를 공백기로 보내고  4학년에 편입했다. 그리고 첫 번째로 본 시험에서 거의 낙제에 가까운 점수를 맞았다. 그전까지는 공부를 제법한다고 생각했는데. 몸이 안 좋아져서 그런지 학교 생활도 생각보다 재미도 없었고 힘들기만 했다. 그때 나의 유일한 위로는 책을 읽는 것이었다. 빨리 많이 읽었던 것은 아니지만 현실을 도피하기에 이만한 것도 없었다. 중학교 들어가서는 더했다. 첫번째 시험에서 다른 과목은 그만그만 했는데 수학과 과학이 턱없이 떨어지다 보니 나의 석차는 앞에서 세는 것보다 뒤에서 세는 것이 빨랐다. 그렇게 되고보니 난 학교(사회)가 원하는 사람은 못되겠구나 일찌감치 학교 공부는 작파하고 책으로 빠져 들었다. 그 시절 책이 아니었으면 나는 이렇게 화창한 봄날 이 책의 리뷰를 쓰겠다고 책상에 앉아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내가 이책을 매력적으로 느낀 또 하나의 이유는, 저자가 나와 동시대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가 느꼈던 문화를 나 역시 같이 향유하고 누렸다는 것이 새삼 반가움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특히 당대 미국의 전설적인 락의 여왕 펫 베나타를 알고 있다니! 반가웠다. 솔직히 7,80년 대 전설적인 가수를 꼽으라고 한다면 보통은 레드 제플린이니 롤링 스톤즈니, 제퍼슨 스타쉽이니 뭐 그런 걸 나열하던데 저자는 의외로 펫 베나타를 지목한다. 그녀의 키가 155센티인지 그랬다는데 그 작은 체구에서 뿜어내는 락의 열기는 나를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그 시절 나는 김광한의 팝스 다이얼과 김기덕의 두시의 데이트를 번갈아 듣곤 했다. 거기서 펫 베나타의 곡이 나오면 로션병을 집어 들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왜 그런지는 그렇게 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하긴, 로션병을 들게 만든 팝 가수가 펫 베나타 한 사람이었겠는가? 어쨌든 로션병 하나 집어들면 세상이 온통 내것 같았고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었다. 그렇다고 가수를 꿈꿔 본 적은 한번도 없다.(그런데 지금 생각해도 웃긴 건, 펫 베나타를 그렇게 좋아했으면서도 정작 그녀의 레코드판을 산적이 없었다는 것) 

 

저자는 그 시절 우리 가요를 많이 들었다고 하는데, 난 팝송 아니면 그 어떠한 소리도 듣는 것을 거부했다. 자꾸 듣다 보니 그것만으로는 성에 차질 않았다. 그렇다고 그 시절 좋아하는 팝 가수의 라이브 공연을 지금처럽 쉽게 볼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나마 나의 이런 타는 듯한 목마름을 달래줬던 건 지금은 없어졌지만 당시 AFKN이란 미국 방송이 있었다. 거기서 매주 '솔리드 골드'란 프로가 있었다. 그걸 보면 인기 팝 가수들의 공연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그것을 보는 것이 나의 유일한 낙이었다. 그리고 그 시절 확실히 난 미국을 동경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 무렵 미국으로 이민 간 나의 작은 아버지 일가를 얼마나 부러워 했는지 모를 것이다. 

 

또 그만큼 그 시절 '메이드 인 코리아'는 모든 게 다 시시하고 시큰둥했다. 그건 내가 받았던 학교 교육에 기인했던 것 같기도 하다. 만날 빈 머리에 우겨 쳐넣기나 하려고 하고 선생들은 막대기 들고 아이들 잡겠다고 쌍심지를 치켜 세우는데 내가 우리나라의 것을 좋아할리 만무하다. 난 그래서 드라마도 보지 않았고, 책도 외국 작가의 것만을 선호했으며, 음악 역시 가요 같은 건 거의 듣지도 않았다. 학교 교육이 좀 더 인간적이 었다면 난 그 모든 것들을 조금이라도 좋아하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난생 처음 과외 선생님의 손을 잡고 극장에 가서 본 영화가 <챔프>란 영화였을 것이다. 아빠를 잃고 나 보다 조그만 남자 아이의 우는 모습이 얼마나 슬프던지 나 역시 울었다. 아니 그땐 그냥 울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뭔가를 제대로 봤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저자는 내 인생의 영화로 <대부>를 꼽고 있는데, 나는 딱히 생각나는 영화가 없다. 그래도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건 오래된 영화는 아닐까? 오드리 헵번이나 잉그리트 버그만 또는 제임스 딘이 나왔던 일련의 영화들 말이다. 이들이 나왔던 영화들은 시간이 흘러도 변함이 없다. 특히 제임스 딘의 영화는. 원조 청춘의 아이콘 아닌가. 

 

저자는 또 이장호 영화에서 한국영화를 봤다고 소개하고 있는데 저자가 쓴 소위 '이장호론'(140p~)은 가히 명문이라고 해도 좋을만치 잘 썼다. 나도 이장호의 영화를 몇편 본 기억이 난다. 그러면서 의외로 영화를 잘 만든다고 감탄했었다. 하지만 내가 감히 한국영화를 봤다고 하는 건 임권택의 일련의 영화들이 아니었을까? 우리나라의 것이라면 무조건 냉소하고 보는 내가 알게 모르게 그의 영화를 참 많이 봤던 것 같다. 만다라는 물론이고, 씨받이, 서편제, 노는 계집 창, 취화선, 춘향뎐, 달빛 길어올리기 그리고 최근 화장까지. 크게 감동할 정도는 아니지만 임권택 감독만큼 한국적 소재를 잘 담아 내는 감독도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난 임권택론을 쓸 수가 없다. 

 

저자는 민주화 항쟁을 보며 대학을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했고, 하루키의 <세계의 끝과 하드 보일드 원더랜드>를 보며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 먹었다고 쓰고 있다. 모르긴 해도 저자는 그때까지 세상엔 도무지 관심이 없다가 자신이 알고 있는 세계가 아는 것의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해서 알을 깨고 나와야겠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확실히 민주화 항쟁과 하루키는 세대를 가르는 뭔가의 상징임엔 틀림없다. 나 역시도 그랬으니까. 사실 나는 좀 뒷북을 쳐대는 스타일이라 민주화 정점에선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잘 몰랐다가 교회에서 연극 대본을 쓰다 소위 말해 조직의 쓴 맛을 보고 어느 창작 학원에 발을 내딛었을 때야 감을 잠았다. 그땐 민주화 항쟁의 후일담이나 논하던 시절이었는데 말이다. 그 무렵에 보았던 이정현이 나왔던 <꽃잎>이란 영화는 충격적이긴 했다. 실상은 영화 보다 더 충격적이라고 하던데 그러고 보면 난 아웃사이더는 물론이고 루저도 못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영화 <꽃잎>은 확실히 영화는 영화다. 그후에 이정현이 매스컴에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를 보면 말이다. 그녀는 더도 덜도 아닌 딱 연예인일 뿐이었으니까. 

 

하루키는 확실히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하루키 이전과 이후로. 그의 문학계의 출현은 확실히 센세이션 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분명 세대별로 그 세대를 가름하는 인물이 있을 것이다. 90년대는 하루키의 세대로 불리울만 하다. 특히 그의 <상실의 세대>를 읽지 않고 문학을 논할 수 있을까? 저자는 그의 책을 읽고나서야 비로소 글을 써야겠다고 다짐했다지만, 나는 어찌어찌 굴러먹다 교회에서 연극 대본을 쓰기 시작하면서 그때야 비로소 우리의 것을 보기 시작했다. 우리 드라마를, 개그 프로를, 영화를. 연극 대본을 잘 쓰겠다고 대학로 바닥을 먼지를 휘날리며 다니지 않았다. 솔직히 난 글을 쓰긴 써도 희곡을 계속 쓸 생각은 아니었으니까. 조금 쓰다 다른 분야로 전향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당장 나에게 떨어진 미션은 대본을 잘 쓰는 것이니 지금의 언어와 코드를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게 내가 대본을 쓰는데 얼마나 도움이 되었는지는 지금도 알 수는 없다. 그냥 무의식적으로라도 도움이 되었을 거라고 믿고 싶을 뿐이다. 솔직히 열심히 쓰지도 않았으니까. 하지만 (글 쓰는데)도움이 되라고 주문을 넣으며 어느 해에 본 영화만 해도 120편 가까이 본적도 있다. 물론 진짜 본다는 영화광들에 비하면 쪽수도 안 되겠지만 지금은 그때처럼 열심히 보진 않는다.  비록 루저라도 좋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연결시킬 수만 있다면 복 받은 인생 아닌가? 

 

솔직히 처음에 저자를 루저라며 나와 동일시하며 반가워 하긴 했지만 확실히 저자는 나와는 다르고 배아픈 구석이 있긴 하다. 열심히 노력한 사람이 좋은 대학 들어가고, 좋은 스펙 쌓고, 대우 받고 그러면 또 그런가 보다 하겠다. 한데 팽팽히 놀다 반짝 노력해서 대학 가고(그것도 좋은!), 또 자기 좋을 대로 살다 뭔가를 하고, 또 놀다가 뭔가를 이루고 그러다 이렇게 책까지 냈다. 이런 사람은 같은 루저라도 급수가 다르다. 무엇이 그 다름을 결정했던 것일까? 생각해 봤더니 저자는 자기 좋아하는 분야는 확실히 들이 팠던 사람이었다. 때론 넓게 동시에 깊게. 나는 앞에서 책을 좋아했다고 떠들어 댔지만 들이 파지는 않았다. 그저 내가 읽을 수 있는 만큼의 독서를 했을 뿐이다. 세상이 원하는 출발 선상에서 경쟁을 할 생각이 없다면 자기 좋아하는 분야를 미치도록 좋아해야 한다. 그래야 이런 책도 낼 수 있는 것이다. 책은 어느 한 분야에 대한 기록이요, 집약된 보고서이며, 동시에 저자 자신의 자서전이기도 하다. 

 

저자는 나이 오십이 넘으면 과거를 되짚어 보는 에세이를 한 번 써 보고 싶었다고 고백한다. 자신에 대해 정리해 보고 싶었다고 고백한다(264p). 왜 그런 마음이 생겼는지 알 것도 같다. 나이 50이면 하프 타임 아닌가? 나머지 반을 위해 정리를 해 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인생 50년을 살았다면 할 말이 좀 많겠는가? 50년을 사는 동안 참으로 많은 것들이 자신을 스쳐 지나갔을 것이다. 모든 것이 그대로 있을 줄 알았는데 과거의 산물로 남아 있거니 흐르는 시간속에 사장되고 말았다. 한때 가요계를 주름잡았던 정훈희도 가고, 김추자도 갔다. 카페에 가면 뮤직 박스가 있어 DJ에 음악을 신청하면 틀어주기도 했다. 나는 그 때 퀸의 '위아 더 챔피언'을 틀어 달라고 해서 누군지 모르지만 음악을 아시는 분 같다며 칭찬을 들었던 적도 있다. 그게 영원히 계속될 줄만 알았는데 어느샌가 없어지고 말았다. 대중 문화는 그런 것이다. 그게 없어진다고 해서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않는다. 문화는 새로 태어나는 것이며, 이미 있었던 것이라도 새롭게 변형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또 모를 일이다. 그런 카페의 DJ가 요즘 우리나라 문화의 메카에 여전히 살아 있을지. 다른 옷으로 갈아 입은 채 말이다. 그 속에 내가 있다. 이런 문화의 흐름을 향유하고 지켜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아니 우린 이미 그렇게 하고 있다.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던. 대중 문화는 인간을 가장 즐겁고, 위안을 주기 위해 고안해낸 인간이 만든 가장 고도화된 산물일 것이다. 그럼에도 한 가지 흠은 너무 일찍 나타났다 사라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중 문화는 결코 만만히 볼 것이 아니며 사라질 뿐이지 죽지는 않는다. 빨리 뭔가에 담아 둘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 책 아주 괜찮다. 읽으면 자신만의 표류기 하나 쓰고 싶다고 생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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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4-25 1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00년대 대중문화를 추억하는 책은 과연 언제 나오게 될까요? 제가 지금 20대 중후반이니까 빠르면 2, 3년 뒤에 나올 거라 생각해요. 이번에 새로 나올 ‘응답하라’ 시리즈가 80년대 시절로 맞췄으니 ‘2000년대 시절을 배경하는 ’응답하라‘ 시리즈도 나온다면 제목은 ‘응답하라 2002’가 될 것 같아요. 저는 2002년을 추억하면서 가장 먼저 생각나는 영화가 `몽정기`에요. 2002년은 제 나이 또래 남자아이들이 한창 성에 호기심을 가지기 시작하는 무렵이라서 이 영화를 학교에서 봤던 기억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아요.


stella.K 2015-04-25 18:13   좋아요 0 | URL
이책 나한테는 아주 좋았어. 하지만 너의 시대의 문화를 얘기한테면
좋긴해도 이책만큼 좋아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근데 너 정말 아직도 20대야? 난 거의 말쯤되지 않았을까 하는데 말야.
리뷰에 쓴게 나에겐 딱 네 나이 때였던 게지.ㅋㅋ

붉은돼지 2015-04-26 0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옛날엔 AFKN이 있었어요.제가 국민학교 다닐 때 대학생이던 형님이 정말 열심히 보던 기억이 납니다

이장호 이야기하니 언젠가 토크쇼에서
자신이 영화할려고 집나올 때 어른이 동생 대학 등록금 쓸려고 소 팔아 꿍쳐 놓은 돈 훔쳐 가출했다는 이야기 듣고 아!!! 감탄이랄까 여하튼 좀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그만큼 자신이 있었다는 이야기겠지요~

stella.K 2015-04-26 16:45   좋아요 0 | URL
저자는 이장호 감독의 똘끼가 좋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그런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었군요.

AFKN이 언제 없어졌는지 모르겠어요.
요즘엔 미드도 많이하고 라이브 공연도 자주 볼 수 있으니 있어야할
또로 방송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나 봐요.
뭐 우리 나라 방송도 외국 사람들이 보기에 나쁘지 않겠지요.
다 과거의 산물이어요.ㅋ
 
문학의 숲을 거닐다 - 장영희 문학 에세이
장영희 지음 / 샘터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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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의 깊이와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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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시간 2008-2013
이명박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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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회고록을 쓰는 대통령이 얼마나 있는지 모르겠다.

고 노무현 대통령 서거 후 <운명이다>란 책을 읽은 적이 있다. 그때 참 많이 울어면서 읽었다. 우리나라 대통령임에도 이분에 대해 너무 몰랐구나 마음이 아팠다. 지금도 그분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그는 임기 중에도 잠시지만 대통령직을 중지 당해야 했던 적이 있다. 높은데서 일하시는 분들의 일이야 낮은 일개의 국민이 속속들이 알리는 없고 단지 이미 한 나라의 대통령이 된 분에게 과연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건가? 이 나라가 알고 보면 정말 무서운 나라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 그뿐인가? 고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받게 되었을 때 우리나라 누군지 모르겠지만 몇 사람이 한림원 앞에서 김대중 대통령에게 노벨상 수여를 철회해 달라는 농성을 했다고 해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뭐 나름의 이유가 있었던 것 같긴 한데 꼭 그렇게까지 해서 한 사람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역시 그 상의 권위에 흠집을 내야하는 건가? 웬지 같은 국민으로 창피한 생각이 들었다. 모르긴 해도 그분이 돌아가셨기에 망정이지 지금도 살아계셨다면 두고 두고 그 일은 회자되지 않았을까? 즉 이를테면, '김대중 대통령 노벨 평화상 받은 것이 적절한가, 아닌가?' 하며 이것 가지고 논문을 써도 몇 권은 나올 것이다.

다시 고 노무현 대통령 이야기로 돌아가, 아무튼 난 그 책을 읽은 덕에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 알 수 있는 기회가 돼서 나름 좋았다. 물론 평소에도 이 분에 대해 난 그다지 나쁜 이미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 책 한 권으로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 알 수 있게 되고 그 분의 자살이 더 가슴이 아팠는데 놀라운 것은, 그 분의 자살 소식을 듣고도 전혀 동요하지 않고 오히려 국가의 이미지 실추시켰다며 비난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 사람은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 한 번이라도 제대로 알려고 했다면 저렇게 못 했을텐데 하며 좀 놀랐다. 나중에 사람들의 생각은 나와 같지 않을 수 있다는 걸 생각하며 마음을 정리했지만 그래도 아쉬움은 남았다. 그만큼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인식에 격차는 존재한다. 하지만 어쨌거나 책 한 권이 사람에 대한 인식을 바꿔 놓기도 한다. 

내가 이 책을 읽으려 했던 것도 이와 비슷했다. 나는 처음부터 이 대통령의 지지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반대자도 아니다. 어찌보면 관망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 내가 이 책을 읽었던 건 지금이라도 이 분에 대해 아는 것도 좋겠다 싶었다. 그 '좋겠다'란 말은 꼭 좋은 의미에서 좋겠다란 말은 아니다. 그냥 아무 거부감이 없이 읽어 보겠다는 뜻이다. 읽다보면 달라지거나 새롭게 알 수도 있지 않을까. 무엇보다 이 책은 한 개인의 회고록이다. 회고록은 역사성을 담고 있다. 이 분의 치적은 우리나라 현대사에 어떤 식으로든 기록될 것이고, 그 이 전에 이 분이 먼저 쓰는 역사라고도 볼 수 있다. 어차피 회고록은 개인의 역사를 기술할 뿐이다. 그것이 옳고 그른 건 차후의 문제다. 평전이라면 좀 더 객관적일 필요가 있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 책은 출판 전부터 너무 말이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분이 재임 기간 중 너무 호불호가 심했기에 그것은 거의 불가피 했다고 보여진다. 그래도 우리가 나름 좋은 세상에 산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우린 전두환 대통령 시대까지 대통령에 대해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억압의 시대를 살아왔다. 나 어렸을 땐 박정희 대통령이 하나의 왕조는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에 필적할만한 다른 인물은 없었다. 그게 독재인 줄도 모르고 누가 감히 나랏님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논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랬던 것이 언제부턴가 대통령이 풍자의 대상으로까지 그 표현이 자유로워졌다. 그렇게 되었는데 책에 대해 읽어보기도 전에 나쁜 소리를 한다고 잡아가는 사람은 없다. 

그런 것처럼 이 책에 대한 안티한 독자의 마음은 알겠는데 가끔은 저건 좀 심하지 않나? 오히려 쓴 사람의 인격을 의심해 보는 글도 상당수 눈에 띈다. 그래도 일국의 대통령인데 저런 표현은 좀 자제해 주면 좋지 않을까. 또 그런 글이 워낙 많다보니 그것의 다른 생각 즉 이 책에 대해 긍정적인 느낌을 가진 사람이 왠지 좋게 얘기하면 돌을 맞지 않을까 겁을 내야하는 상황이다. 우리나라는 아직 나와 다른 것을 틀린 것이라 간주하고 그때부터 따돌림을 시키거나 적대감을 갖지 않던가.

어쨌든 그런 것을 차치하더라도 이 책은 상당히 건조하게 씌여진 것만은 사실이다. 적어도 나의 느낌은 그렇다. 노무현 대통령의 자서전은 뭔가 절절한 느낌이었는데 왜 이명박 대통령의 회고록은 이토록이나 건조한 것일까? 그런데 자서전과 회고록의 차이는 뭘까? 알고 싶어졌다. 자서전의 사전적 의미를 보자. 네이버 사전에 보면, '[명사] <문학> 작자 자신의 일생을 소재로 스스로 짓거나, 남에게 구술하여 쓰게 한 전기.'라고 나와 있다. 그렇다면 회고록은 어떠한가? '지나간 일을 돌이켜 생각하며 적은 기록.' 같은 것 같아도 어딘가 다른 것 같다.

자서전은 지나간 삶을 반추하며 반성과 회한을 쓴 것이겠지만, 회고록은 그야말로 기록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명박 대통령의 글이 건조한 건 일견 이해가 갈 것 같다. 그런 글은 확실히 치적이 많이 들어날 수 밖에는 없다. 그렇다면 쓰는 사람과 독자의 욕구와 입장이 좀 다를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독자는 반성과 회한이 들어간 좀 더 자서전적인 것을 원했을 것 같다. 나 역시 그랬으니까. 그런데 비해 이 대통령은 자신의 옳고 그름은 훗날 역사가 판단할 거라고 믿었던 건 아닐까? 그가 쓴 회고록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을 쓸리는 없을테고. 단지 자신이 한 일에 있어 잘잘못에 대한 스스로의 평가를 자제한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이명박 대통령이야 그 이전부터 강한 의지의 면모를 보이며 승승장구한 인물 아닌가. 그런 사람의 특징은 긍정적인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이 회고록 역시 긍정적이고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 입지전적으로 보인다. 그것이 또 보는 사람에 따라선 나쁘게도 보이는 것은 아닐까?

어쨌거나 난 이 책이 그다지 감동스러웠던 것은 아니었다. 이명박이란 인물을 알기에도 조금은 부족했다고 본다. 노무현 대통령의 그것은 워낙에 감성을 자극하는 면이 있어 자서전이든 회고록이든 한 권의 책 가지고는 쉽게 그 인물을 파악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한 가지 바람은 있다. 우린 스스로 우리나라에 대해 그다지 긍정적이지 못하다. 외국 사람들은 우리나라에 대해 좋은 점을 우리보다 더 잘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말이다. 그런데 우린 왜 우리나라에 대해 안 좋은 점들을 먼저, 더 잘 인식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우리나라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조금은 긍정적으로 바뀌었으면 좋겠다. 또한 우리나라도 어느 때 한 번 인지도가 높은 대통령이 나왔으면 좋겠다. 정말 객관적으로. 아무리 좋아하는 대통령이 있어도 그를 싫어하는 사람들 때문에 정말로 그 대통령이 좋냐고 다시 물으면 거기에 주춤하기 마련이다. 그거야 뭐 내가 좋다는 거지 하며 말꼬리를 흐릴수도 있다.

옛날에 남자 아이들에게 꿈이 뭐냐고 물으면 대통령이라고 대답하는 아이가 열의 아홉은 있었다. 하지만 대통령은 알고 보면 그렇게 고귀하고 명예로운 직업은 아니다. 임기가 만료가 되면 곧바로 범법자가 돼 재판에 회부가 되기도 한다. 그것을 보면 씁쓸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다. 왜 우리나라는 세종대왕 같은 대통령이 나오면 안 되는 거냐고 광화문 앞에서 시위라도 하고 싶다. 위대한 시민의 위대한 대통령. 또는 위대한 대통령이 이끄는 위대한 시민 뭐 이런 타이틀을 기대할 수는 없는 걸까? 그런 의미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아직 아닌 것 같다. 그래도 개인이 보는 현대사의 한 단면으로서는 읽힐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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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4-11 2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아이들은 스마트폰도 혼자서 잘 사용할 줄 알고, 스마트폰으로 어른의 세계를 금방 이해하니까 대통령이 안 좋은 직업이란 걸 잘 알거예요. 장래희망 일순위로 대통령이라고 말하는 아이들도 많지 않을 것 같아요.

stella.K 2015-04-12 18:05   좋아요 0 | URL
그렇지. 옛날엔 만인지상일인지하였잖아.
지금은 대통령 해 먹기 정말 어려운 시대야.ㅠ

2015-04-12 11: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5-04-12 18:10   좋아요 0 | URL
그래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읽히는 것 아니겠습니까?ㅋㅋ
필요한 것 같아요. 양심적이고 인간적이다는 말은 부분을 얘기
하는 거지 전체를 얘기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특히 큰 일하는 사람들은.
그래서 대통령의 생애 만족도가 높다잖아요.
전 그냥 그런가 보다해요.
 
사랑에 빠지게 만드는 기술 - 진정한 사랑을 꿈꾸는 사람들을 위한 ‘연애 교과서’
안토니 보린체스 지음, 김유경 옮김 / 레디셋고 / 2015년 1월
평점 :
절판


책 제목이 여느 연애에 관한 책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책에 대한 호불호가 있지 않나 싶다. 연애를 갈망하는 사람은 그런 책에서 방법을 터득하고 실전에 써 먹기도 할 테지만, 싫어하는 사람은 사랑하는데 무슨 그런 책이 필요하냐고 손사래를 칠지 모르겠다. 마치 사랑의 욕구는 본능이며 굳이 책을 읽지 않아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 자존심이 걸린 문제가 아닌가? 그런 책(나부랭이)이나 읽고 연애를 해야한다면 나답지가 않다고 허세를 부려 보는 것이다. 자신이 무슨 돈 후앙의 후예쯤으로 착각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또 그런 것과 달리 막상 남이 하는 사랑은 낭만적이고 멋있어 보이는데 내가 하는 사랑은 어렵고 고난의 연속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이것을 인정하기가 싫은 것이다. 그렇다. 사랑은 의외로 어렵다. 내가 마음에 있어하는 상대는 다른 사람을 이미 좋아하거나 나에게 관심이 없고, 내가 관심 없어 하는 상대는 나를 좋다고 한다. 이런 경우는 더 심하다. 그 사람이 객관적으로든 주관적으로든 좋은 사람이긴 한데 막상 사랑의 순간이 오면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상대가 다가오는 것을 차단한다. 사랑을 원치 않는 것도 아닌데 왜 막상 다가오면 순간 뒤로 한발 물러서게 되는 것일까? 사랑을 시작하기도 전에 깨질까봐 두려운 것이다. 아니면 내가 이런 사람인데 이러고도 나를 좋아할까 시험하고 확인하고 싶은 마음도 있다.

 

이건 주로 개인의 문젠데 요즘엔 이것이 사회적인 문제가 되기도 한다. 돈과 스펙이 없으면 사랑할 수 없는 세대로 바뀌고 있다. 그래서 그것에 자격미달인 사람은 아예 사랑은 꿈도 꿀 수가 없다.  오래 전 들었던 말 중에 잊혀지지 않는 말은 '사람은 영이 있어서 (직감적으로)그 사람이 나를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를 안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이건 솔직히 낭만의 시대에나 통용될 수 있는 말은 아닐까? 요즘은 그렇지 않다보니 남녀관계를 너무 쉽게 규정하고 남자는 이렇더라, 여자는 저렇더라 하며 서로 험담한다. 사랑할 수 없는 바에야 그렇게라도 해서 나의 처지를 보상 받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이 낭만의 시대가 다시 회귀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사람중의 한사람이다. 즉 갑순이와 갑돌이가 한 마을에서 사랑한다는 말이 폴폴 퍼져 나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는 것이다. 그래도 이 낭만적 풍경이 아직 가능한 공간이 있다. TV 브라운관이 그것이다. 즉 남녀의 사랑을 미화시키기에 더 없이 좋은 드라마가 그것이다. 하지만 이 드라마를 보고도 대리만족을 하기보다 요즘 저런 사랑이 어딨냐고 반문한다면 우린 너무나 사랑없는 삭막한 세대에 사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런데 더 문제는 사랑과 집착을 혼동하는 정신적 상태다. 이것 때문에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죽임을 당하기도 한다. 사랑을 하면 그 사랑을 가꿔 나가도록 해야하는데 나는 하나도 변하지 않으면서 사랑은 있는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이라며 내가 상대에게 받아들여지길 바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안 되면 서로 싸우고 상처를 내는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에 '우리는 사랑받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좋아해 달라고 요구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들인다. 하지만 사랑을 얻기 위해서는 그럴만한 사람이 되는 것이 가장 사랑하는 방법이다.(41p)'란 말이 정확히 맞는 얘기라고 생각한다. 왜 사랑하려고 노력하지 않는가? 사랑은 저비용 고효률이란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사람이 사랑하지 않고 어떻게  살 것인가? 사랑이 인생을 풍요롭게 하고 세상을 여유롭게 보도록 한다는 말에 누구든 동의할 것이다. 

 

이 책은 여느 자기계발류의 연애 방법을 나열한 책이 아니다. 사랑이 예술적 창의력의 산물이라면 심리학자가 쓴 과학적 기술을 서술한 책이다. 저명한 사회심리학자인 에히리 프롬이 '사랑의 기술'을 썼다. 우리는 사랑의 속성에 대해 소설이나 영화같이 감성적 사례로 알 수도 있겠지만 심리학 같은 과학적으로 측정 가능한 것으로도 알아야 한다. 이 책은 그것을 알기에 참고가 될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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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5-03-06 1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목차를 보니 실험심리학에 충실한 책인거 같습니다. 프롬의 <사랑의 기술>과는 성격이 많이 다른 듯해 보입니다. 제가 가진 책 <첫 눈에 반하는 사랑>과 좀 비슷한 거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류의 책을 읽으면 많은 한계가 보입니다. 왜냐하면 성과 사랑을 `환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과학적 분석이 쓰잘데기 없는 것처럼 보이거든요~

어쨌거나 사랑이나 행복 같은 추상적인 것들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책들은 그 자체만으로 대단하긴 하지만 수긍하지 못하는 부분들이 산재합니다. 아무리 실험으로 뒷받침한다지만...뭐랄까, 그 전제에 동의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할까요..

여튼, 이런 류의 책은 그 의의와 한계가 명확하여 호불호가 확실히 갈립니다. 사랑을 책으로 논해봤자 쓰잘데기 없는 것 같지만 서도..ㅎ

신간인데, 미리 맛보기한 느낌입니다..ㅎ 잘 읽었어요~^^

stella.K 2015-03-06 18:05   좋아요 0 | URL
저도 이런 류의 책을 그리 선호하진 않습니다.
그런데 왠지 심리학자가 썼다니까 읽어보고 싶더라구요.
협찬 받은 책이거든요.
생각 보다 재미는 없었는데 다른 블로거들보면 별 다섯 개도 줬더라구요.
그런데 또 생각해 보면 우리가 정말 사랑을 잘하고 살까?
뭐 그런 생각이 들어요. 사랑과 집착을 혼동하기도 하고
아예 사랑을 못하는 사람도 있고. 그런 걸 생각하면 이런 책이
전혀 무익하다고도 할 수 없을 것 같고.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대충 쓴 리뷴데...
 
내가 가장 아름다울 때 내 곁엔 사랑하는 이가 없었다
김경주 지음 / 열림원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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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받아들면 조금은 뜨악해진다. 판형이 여느 시집처럼 되어있는데 막상 펼쳐보면 지문과 대사로 이루어진 희곡집이다. 그런데 저자인 김경주는 자신의 글을 '시극'이라고 말한다. 시극이라. 서지 분류도 애매해 이 책은 시에도 들어가 있고 희곡에도 들어가 있다. 그렇다면 독자는 이걸 어떻게 봐야할까? 나는 시의 운률은 잘 모르겠고 아무리 봐도 한 편의 희곡 같다. 그런데 굳이 '시극'을 안다고도 모른다고도 할 수 없는 애매한 장르로 분류해야 하는 것인가?

 

내가 요즘 돌아가는 우리나라 연극계의 흐름을 잘 몰라서 그런지 아니면 이 분야가 너무 안 알려져서 그런지 몰라도 저자 김경주는 벌써 십년 전부터 이 시극을 알리기 위해 노력해 왔다고 한다.  그렇다면 김경주가 말하는 '시극'이란 무엇인가?  어려울 것도 없다. poetic drama. 즉 대사가 시의 형태로 쓰인 희곡을 말하는데, 산문적 구조를 갖고 있지만 각각의 글에 라임과 운율이 살아 있는 문학적 장르라고 한다.  쉽게는 로미오와 줄리엣이 그렇고,  고대 그리스 3대 비극 시인에서부터 셰익스피어에 이르기까지가 그렇다고 한다.  원래 시와 극은 하나였고, 시인은 곧 극작가였다고 말한다. T.S. 엘리엇의 <캣츠>도 시극이었다고.

 

그렇게 설명하니 이해가 갈 것도 같다. 그러고 보니 작년 말에 보았던 안중근의 삶을 조명한 연극 <나는 너다>란 작품도 시극이라고 해야하지 않을까? 배우 윤석화가 연출을 맡았고, 탤런트 송일국이 주인공으로 나온다는 이 단순한 정보만을 가지고 보기 시작한 연극은 배우들이 구사하는 대사에 약간은 당황스러웠다. 뭔가 일상어가 아닌 시에 가깝다는 걸 인지하기 시작했으니까. 처음엔 대사가 이렇게 어려워서야 관객이 알아 먹겠나? 뭐 그런 생각을 했는데 그 시간 내내 대사를 듣고 있노라니 상당히 고급하면서도 응축된 언어를 구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그러면서 원래 희곡은 이래야 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었더랬다.

 

책 얘기는 안하고 잠시 딴 얘기를 해서 그렇긴한데, 책을 소개하는 글에서도 그런 얘기를 하고 있지만 영화, 드라마와 같은 촘촘한 스토리텔링이 각광받는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시극은 점점 설 자리를 잃어버리렸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영화나 드라마는 그 대사가 일상어와 약간의 B급 언어로 이루져 있다. 일설에 의하면 드라마의 언어 수준은 중학교 2학년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에 맞혀져 있다고 한다. 우린 어느새 그것이 정석인 양 그 보다 다른 차원의 언어에 대한 모험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건 좀 생각해 볼 일이긴 하다. 언어가 구사할 수 있는 높은 수준을 거부하고 상업주의와 결탁한 오염된 언어가 전부인 양 하고 살아 온 것은 아닌지. 

 

김경주는 그동안 이 시극을 알리기 위해  홍대의 클럽과 카페, 버려진 공장, 들판, 부둣가, 길거리 등 장소를 초월해 시극 운동을 펼치고 있다고 했다. 가히 그의 노력이 어떠한 것인지 알 것도 같다. 적어도 우리는 이 카페라는 곳을 좀 더 문화 공간으로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프랑스의 카페는 당대 유명한 철학자와 작가들에 의해 발전해 온 공간이 아니던가.  또한 카페라는 공간이 있었기에 그 나라의 문화가 발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 날 우리의 카페는 프랜차이즈에 듣도 보도 못한 음료를 팔고, 음악이나 틀어주는 상업주의의 대표 공간일 뿐이다. 물론 요즘엔 카페를 조금 이색적인 공간으로 활용하는 곳도 없지는 않지만 아직은 미약하다.  어느 날 우연히 카페 갔다가 최소한의 무대 장치와 소수의 배우들에 의해 흘러나오는 시극의 대사를 듣는다면 그날은 그야말로 눈과 귀가 호사하는 (소위 말하는)계 탄 날은 아닐까?

 

하반신 대신 고무 튜브를 끼고 거리를 기어 다니며 구걸을 해서 먹고사는 김 씨. 눈 내리는 겨울밤, 파출소 직원은 얼어붙은 길바닥을 배회하는 김 씨를 등에 업어 파출소로 데려 오고, 파출소 직원은 김 씨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이 시극의 주요 내용이다.  잠시 이들의 대사를 음미해 보자. 

파출소 직원/ 또 뭘 보았지?

 

김 씨, 의자에서 내려 창가 쪽으로 기어간다.

잠시 멍하니 창밖을 바라본다.

 

김씨/ 몰래 떨어지는 눈물요.

파출소 직원/ 왜 그걸 자네 손등에 함부로 떨어뜨리고 지랄이야.

                  그건 집에 가져갈 수도 없잖아.

김씨/ 맞아요. 몰래 얼른 주어서 집에 가져갈 수도 없는 거죠.

파출소 직원/ 그런 건 빨리 잊어버리는 것이 나아. 갈 길을 가야지. 앞으로.

김씨/ 그게 누구의 것이든 눈물은 따뜻해요. 손등에 떨어지면.

파출소 직원/ 눈물 나네. 왜 바다로 기어가려고 하지?

김씨/ 배가 고파서 아가미를 열어놓고 물을 마시고 싶었어요.

파출소 직원/ 내가 업어서 이곳으로 데려오지 않았으면 자넨 눈사람이 됐을 거야.   지느러미가 있는 눈사람.

김씨/ 한 번이라도 저를 업은 사람은 절 내려놓고 모두 떠났어요.

                                                                            (74~75)         

 

 시가 한 번 읽어서 그 운율와 의미 파악이 쉽지 않은 것처럼 시극 역시 반복해서 읽고 음미해 보면 대사가 주는 의미와 매력이 있을 것이다. 그것을 일부러 찾아 읽기도 해야겠지만 그것을 경험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도 중요한 것 같다. 

 

제목은 왕가위 감독의 영화 <동사서독>에서 장만옥이 흘러간 사랑을 회상하며 애잔하게 읊었던 대사를 그대로 사용한 것이라고 한다.  등장인물의 대사가 어려운 건 아니지만 미학적 코드가 숨어있다.  뒤에 나오는 문학평론가 허희의 평론도 눈여겨 봐 두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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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돼지 2015-02-18 1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동사서독 다시 보고 싶습니다...

stella.K 2015-02-18 19:27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저도 그 영화 본 것 같은데
기억이 안 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