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인의 책마을> 출판 기념회 날 모임 장소에서, 우연히 이 책의 저자 중 한 사람인 agnes님과 동석을 하게 되었다. agnes님은 전에도 한번 만난 적이 있어 이번이 두번째 만남이였고, 다시 만날 수 있게 돼서 내심 꽤 반가웠다. 왜 내가 "꽤"라는 말을 썼냐면, 사실 agnes님은 현재 대학을 다니는 아직 20대 초반의 아가씨이기 때문이다.  

출판기념회라고는 하지만 이미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와 있었고, 나를 포함해 그들은 더 이상 젊다고만 할 수 없는 사람들 속에 나이 어린 사람이 오도카니 와 앉아 있으니 반가울 수 밖에.  하지만 나이 많은 사람들이야 좋지만 당사자로선 좀 쑥스러울 것도 같다. 나도 그 나이 때 그랬으니까. 그래도 이 아가씨 성격이 좋아 사람들과 이야기도 잘하고 웃기도 잘한다. 이 아가씨는 현재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는 재원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말하면 의학 전공한 친구가 없다는 것이 금방 탄로가 나겠지만, 언젠가 agnes님이 게시판에 자신이 방학임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바쁘게 지내는지를 간략하나마 써놓은 글을 읽어 본적이 있다. 읽어봤더니 공부하느라 바쁘게 지내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다른 개인적인 볼일로 바쁜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밑에 '공부는 안해요?' 했더니, 너무도 당연하게, '지금은 방학이라 공부 안해요.' 라고 써 놓은 것이다. 순간 아, 내가 아무래도 드라마나 영화를 너무 많이 받구나 싶었다. 드라마나 영화 보면 가장 바쁘고 치열하게 공부하는 학생으로, 법학도나 의학도가 나오지 않던가?    

마침 그날 내 옆에 앉았길래, 진짜 의학도들 방학 때 공부 안하냐고 했더니, 진짜 안한단다. "물론 골수 의학도들은 하겠죠. 하지만 골수라 봤자 손에 꼽을 정도고, 나머지는 방학 때 딴일해요." 한다. "드라마나 영화 보면 의학도들 밤새워서 공부하고 막 그러던데...난 솔직히 밤새워 공부하는 게 싫어서 의학 전공은 꿈에도 생각 못했거든." 그러자 이 아가씨 웃으며, "아, 물론 시험 때는 밤새워서 공부해요. 족보 가지고. 족보가 뭔지 아시죠? 그런데 족보 한 권이 거의 전화번호부 수준이죠. 그거 전부 다 외워 시험 볼려면 머리가 터지긴 해요. 후후."  과연 그럴만도 하겠다. 하기야 학교 공부가 뭐 그리 좋아 방학 때도 주구장차 하겠는가? 확실히 이 아가씨한테 방학 때 공부 안하냐고 묻는 건 우문이고, 그녀는 현답을 했을 뿐이다. 

나는, 의학하면 떠 오르는 게 해부학이다. 사람의 시체를 직접 다뤄야 한다는 점에서 바로 이것 때문에 어렵게 들어간 의대를 포기했다는 얘기를 종종 듣기도 했으니까. 그러자 agnes님은 웃으며, "글쎄요, 옛날엔 그랬을런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워낙에 처리 방법이 많이 발달이 돼서 그런 이유로 의대를 포기했다는 말은 들어보질 못했어요. 그리고 나름 재미있기도 하구요." 역시 난 하나마나한 얘기를 했던 셈이다. 순간 속으로, '그래. 맞아 지금은 21세기지?!'  

그런데 얘기하다 보니 그 아가씨가 모르는, 그 아가씨가 다니는 학교의 인물사(?)를 알려주게 됐다. 그녀는 현재 연세대 재학중이다. "혹시 가수 윤형주 알아요?" "...??" "모르기도 하겠다. 7,80년 유명한 통기타 가순데. 아마 어머니나 아버님은 아실 거예요." "...아...." "아참, 왜 음료 선전 중에 오란씨 선전 알아요? 하늘에서 별을 따다, 하늘에서 달을 따나 두 손에 담아 드려요.... 뭐 이런 노랜데. 그 CF 노래 작곡한 사람인데." "...잉??" "윤석화 모르나? 그 여자가 불렀는데!" "......??" "아, 연극 신의 아그네스. 그거 초연한 주인공." "...??" 나는 답답해서, "닉넴이 아그네스잖아. 그 정도는 알아야징." "아, 미안해요." "아니 뭐, 미안할 것 까지는 없고, 아무튼 가수 윤형주가 agnes님 학교 같은 꽈 선밸 거예요. 물론 졸업은 못했지만. 그 사람이 해부학에서 무릎을 꿇었다는 얘기를 들었던 것 같아요. 도저히 피를 볼 수가 없어서... 그래서 부모님과 싸워서 연예계로 나왔던가 그랬지 아마." 그러자 조금 이해한다는 표정이다. "아......! 그렇지 않아도 저희꽈에 유명한 연예인 선배가 있다는 건 들어본 것 같아요." 그때 나의 전광석화 같이 이 아가씨를 깨닫게 해 줄 확실한 일화가 생각이 났다. "그 사람이 누구냐면, 시인 윤동주 알지?" "네. 알아요." "그 사람의 6촌 동생이래요." 그러자 이 아가씨 거의 '헐~'하면서 웃는 분위기였다. 하긴 말이 좋아 6촌이지 거의 남이나 다름 없는 거 아닌가? 길거리에서 만나도 누군지도 모르고 그냥 지나칠 사이. 그러니 헐~하는 거야 당연하다. 

그러고 보니 이 아가씨와 내가 대화를 한다는 건 거의 20년의 간극을 뛰어넘는 일이었다. 그러니 요즘 젊은이들이 나이 먹은 기성 세대들과 이야기가 통할까 싶기도 했다. 그런데 또 꼭 그것 때문에 자격지심 같은 걸 가질 필요는 없다. 이 아가씨가 모르는 학교사를 그 학교 출신도 아니면서 내가 알려준 것과, 요즘 문단계에 한창 주목 받고 있는 전아리가 그 학교를 다니고 있다는 것도 알려 줬으니까 오히려 고마운 일 아닌가? "하긴, 워낙에 학교가 크기도 하구요, 원래 이공계 학생들이 자기 분야가 아니면 학교에 뭐가 있는지도 몰라요."하며 쑥스러워 한다.   

아무튼 그러고 돌아와서, 그렇다면 이 아가씨 학교 공부를 안할 때는 뭘할까? 뭐에 관심이 있을까? 궁금했다. 그걸 <100인의 책마을>에서 조금 알 수가 있었다. 이 아가씨 고등학교 때부터 최근까지에쿠니 가오리와 사랑에 빠졌다는 걸 알게 되었다.   

에쿠니 가오리라. 내가 아직 접해보지 못한 작가다. 그런데도 난 항상 온다 리쿠와 헷갈린다. 영화와 책이 같은 것은 아니지만, 나는 이 작품을 영화로 본적이 있다. 일본문학이 각광을 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일본식 감성을 내뿜는 영화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 에쿠니 가오리는 늘 나의 관심 밖이었다. 그런데 이 아가씨가 쓴 글을 보니 마음이 조금은 동한다. 글도 다른이와는 다르게 존대말을 쓰면서 조심스럽고도 낮은 목소리로 조근댄다. 물론 그녀가 소개해 준 책을 다 읽을 생각은 없지만 개중 몇권은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약간 놀라운 것은 이 책에 나오는 저자들은 하나 같이 책 소개를 하면서 읽어 보라고 권하고 있는 반면, 이 아가씨는 싫으면 싫다고 솔직히 말한다. 얘를 들면, 에쿠니 가오리의 <장미 비파 레몬>이란 책을 두고 한 말이다. 

  "그녀의 장면 중 가장 마음에 들지 않은 책. '코'자 돌림 여자 9명이 우르르 나와서 우리도 우리만의 사랑과 생활이 있다고 외치는 통에 산만하기 그지없다." 

재미있지 않은가? 이러면  어떤 사람은 오히려 관심을 가질 수도 있다. 무엇을 얼마나 못 썼길래 하며. 하지만 귀가 얇은 나로선 거의 믿는다. 그런데 또 생각해 볼 건, 이 아가씨와 나와는 20년의 간극이 있다고 앞에서도 밝혔다. 정서나 감성은 유동적이기도 해 어쩌면 난 이 책에서 그녀가 발견하지 못한 걸 발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또 어쩌랴? 일단 제껴놨으니 나와는 인연이 없다고 할 밖에. 

그런데 비해 <낙하하는 저녁>은 극찬을 했다.  아, 이거다! 하면서. 

주인공보다도 더 주인공 같은 '하나코'가 사랑스럽다. 한 남자에게 차인 후 실연의 아픔을 이겨내기까지의 과정이 기본 내용이지만, 책을 읽고 나면 "그런 것은 아무래도 됐고, 하나코를 주인공으로 책 한 권 더 써 주세요."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오, 정말? 그렇다면 나는 좀 끌린다.  실연 안 당해 본 사람이 있을까? 그런데 이 아가씨 당차게 한 권을 더 써 달라니? 과연 어떻길래? 작가가 실연에 대해 한 번 쓰기도 어려울텐데 말이다. 

 그런데 이거야 말로 그녀의 글을 읽고 정말 읽고 싶게 만든다. 

그녀 자신의 결혼 생활에 대해 쓴 에세이집. 꼭 소설 같이 쓰는 바람에 자꾸 읽는 동안 에세인지 헷갈린다. 그래도 분명히 소설과 다른 맛이 있다.   

 오호,  그렇다면 오묘한 맛이겠군! 책 하나에 에세이와 소설이 동시에. 내가 읽고 싶은 글형태다. 

그날 누군가, 책 읽는 사람은 가족 모두가 책을 좋아해서 읽지는 않는 것 같다고 하자, agnes님은 바로 동감했다. "맞아요. 저희집도 저 밖에 책을 안 읽어요. 어떻게 책을 안 읽을 수가 있는지 모르겠어요. 지금도 서점에 가면 이 책 저 책 아~ 너무 읽고 싶어져요."라고 말하는데 그 표정이 정말 귀여웠다. 마치 김이 모락 모락 나는 갓 구워낸 빵이 얼마나 맛있는지 아냐고 갖은 표정으로 말하는 것 같아 아직도 그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하긴, 나도 우리집에선 내 동생과 나 밖엔 책을 읽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좀 특이동물로 취급 받기도 한다. 그리고 이 아가씨처럼 나도 한 때 그런 표정을 지으며 책이 얼마나 좋은지 아냐고 말하던 때가 있었던 것 같다. 지금도 여전히 책이 좋은 건 사실이지만 그런 표정은 다시 못 지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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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09-05 1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잼있어요^^

루체오페르 2010-09-05 1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감을 주는 아가씨인가 보군요.^^

저도 주위를 보면 책 좋아하는 사람이 잘 없어요.ㅋ

lo초우ve 2010-09-06 0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가내려서인지 .. 아이겅 허리야~!
며칠전에 골다공증 검사햇는데 뼈가 약할뿐 이상무.
그런데 왜 허리가 아플꼬... ㅡ,.ㅡ;;
스텔라님~~ ^^
비오는날 들으면 딱 좋은 음악중에
Jose Feliciano - Rain
이곡 들어봐야겠어요 개인적으로 좋아하거든요 ^^
그리고, 오랜만에 윤형주씨의 노래도 함께 들어봐야겠요.. 후훗~ ^^

요즘 20대는 윤형주씨 거의 모르지싶네요 ^^
울 아이들은 알지만요(주루룩 연녕생 25,24,23 이렇게 낳는것도 신기하다는 남편사무실 직원말)한때 인터넷방송을 남편이랑 했기때문에 그덕분에 알고있는듯해요 ^^

그리고 우리나이 학창시절때에나 피 터지게 공부하고 머리에 쥐날정도로 공부했죠
요즘 아이들 그다지 공부에 연연하지 않나봐요
그러니 맹장 떼어내려고 수술실에 들어갔다가
오히려 배짼 뱃속에 연장 집어넣고 나오자나요
쯧쯧...
책 열심히 읽고 리뷰 잘 쓰면 뭐합니까?
정작 해야 할 일들은 개판인것을요..
이말은 누구 들으라고 하는 말이 아니구요
현실이 그렇다는거에요 ^^;
괸히 비오는 아침부터 우울해지려고 하는군요 ㅋ


마녀고양이 2010-09-06 1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쿠니 가오리,, 이 작가한테도 한때 홀랑 빠져서 현재
보유한 책 5권(생각보다 적네요..), 읽어본 책은 절대 다수. ^^
확실히 제가 일본 작가를 좋아하네여. ㅋ

우리집도 저 밖에 책 안 읽어여. 그리고
막 구워내서 자르지도 않은 식빵을 손으로 뜯어먹는 맛은.... 아흑~

순오기 2010-09-06 2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아가씨 글 나도 읽었어요, 덩달아 잘 아는 사람처럼 동감하고 있어요.^^
하지만 나는 에쿠니 가오리를 하나도 안 읽었다는...
오늘 110, 총 180288 방문

stella.K 2010-09-07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그래서 저도 이번 기회에 에쿠나 가오리 한번 읽어보려구요.^^

책가방 2010-09-07 15: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에는 실명으로 되어 있는 아가씨네요..^^
저도 이 분 덕분에 에쿠니 가오리의 "그녀들"이 궁금해졌답니다.
전 (반짝반짝 빛나는)만 읽어봤거든요..^^
글쓴이를 직접 만나는 일은 가슴 벅찬 일일것 같아요..^^

blanca 2010-09-08 0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유쾌하게 읽었어요. 의대생이었군요. 사실 저도 에쿠니 가오리 전작주의를 시도해 봤었는데. 무겁지 않고 잘 읽히면서도 참 이쁜. 그러나 새로울 것 없는 얘기들이 계속. 그 지점에서 멈췄어요. 스텔라님이랑 이 아가씨랑 얘기하는 장면이 막 그려지면서 혼자 막 웃었어요. 오란씨. 윤석화. 윤형주. 이젠 이런 것들을 가지고 얘기할 수가 없군요. 이십 대와. 근데 윤동주 육촌이었군요, 몰랐어요 ㅋㅋ

stella.K 2010-09-08 12:31   좋아요 0 | URL
그때 나름 재밌었어요. 거의 뭐 조카뻘이니.
그 아가씨 몰랐던 것을 알아 나름 신기해해서
저도 나름 뿌듯했습니다.ㅋㅋ

라로 2010-09-08 0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에쿠니 가오리 하나도 안 읽었어요,,,에고 <100인의 책마을> 덕분에 읽을 책이 갑자기 몇 백개 더 늘었다구요,,ㅠㅠ

기억의집 2010-09-10 1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일본소설 좋아해도 에쿠니는 도저히 못 읽겠던대요. 저는 첨엔 일본소설 안 좋아했는데 그 이유가 에쿠니하고 바나나 때문이었어요. 도저히 못 받아들이겠더라구요. 일본소설 수준이 다 에쿠니나 바나나 수준인 줄 알았다는. 지금도 둘은 도저히 안 읽혀지고 읽을 생각도 안 해요. 네이버에 바나나 에세이 연재하던데..것도 읽다가 말았네요. 스텔라님, 교보문고 한번 갔다오세요. 에쿠니스탈이 맞는지 아닌지 확인 한 번 하심이.

stella.K 2010-09-10 16:22   좋아요 0 | URL
그런가요? 하긴, 저도 바나나 소설 한번 읽고 이게 뭐야? 의아해 했던 적이.ㅎㅎ
그래도 밑의 두 권은 왠지 끌려요. 언제 읽게될지 모르겠지만. 언제고 교보 나가게 되면 한 번 볼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