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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보다 : 가을 2021 ㅣ 소설 보다
구소현.권혜영.이주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9월
평점 :
절판
지난 2018년 여름에 처음 간행된 문학과 지성사의 단행본 프로젝트 <소설 보다>가 최근 겨울호를 내면서 총 14권을 출간했다. 소설을 잘 읽지 않는 시대에 이렇게 한 회도 거르지 않고 나와주니 기특하다 싶다. 나는 창간호를 재작년에 읽고 이제 이 책을 두 번째로 읽었다. 이 번호엔 구소현, 권혜영, 이주란 세 여성 작가의 작품이 실렸다. 창간호는 4명의 작가의 작품이 실린 줄 아는데, 세 사람이든 네 사람이든 이 조그만 책에 한 사람 싣기도 부족할 것 같은데 어떻게 여러 작품이 들어갈 수 있는지 볼 때마다 신기하다.
첫 번째로 실린<시트론 호러>를 쓴 구소현 작가는 2020년 문학과 사회 신인상을 받으면서 활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이 작품은 창작 스터디를 배경으로 한다. 대학내에 있는 모임인데 서로의 작품을 봐주고 합평한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4명의 모임 중 한 명인 공선이 죽은 영혼으로 나온다. 어찌 된 일인지 공선은 저세상으로 가지 못하고 흔한 말로 구천을 떠도는 영혼이 되었다. 순간 약간 움찔했다. 그래서 호러라는 걸까.
문득, 나도 오래전 잠깐 창작 스터디에 몸을 담은 일이 생각이 났다. 물론 오래 못 갔지만. 솔직히 아무리 습작이어도 애써 썼는데 합평한답시고 찧고 빠면 포커페이스를 유지한다는 게 쉽지는 않다. 초고는 다 걸레라고 했던 헤밍웨이의 말을 그때 알았더라면 그냥 버린 셈 치면 되는 건데 그때는 참 어렸다는 생각이 든다. 또 한 번은 시나리오 스터디였는데 대여석 명 모였던 것 같다. 그중 여자라곤 나랑 나보다 연배가 아래인 A가 있었다. 또 그 모임엔 유부남 하나가 있었는데 A에게 자꾸 치근덕거리는 게 신경이 쓰였다. 그래도 일단 모른 척했다. 그러다 그 유부남 녀석 무슨 꿍꿍인지 A가 나온 단체 사진을 인터넷 카페에 올리더니 낄낄대며 무슨 퀴즈랍시고 문제를 냈다. 그러면서 뭘 알아맞혀 보라는 거다. 나는 그런 식으로 사람을 가지고 노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 그러지 말고 솔직하게 답을 공개하라고 장난치듯 가볍게 말했다. 그러자 그가 나의 마음을 알았을까, 갑자기 화를 발칵 내고는 그때부터 돌변한다. 그리곤 갑자기 웬 시키지도 않은 빨간펜 선생이 돼서는 그때까지 내가 카페에 올렸던 글을 복사해 빨간색으로 줄을 쫙쫙 치면서 비판을 해대는 것이다. 또 그것도 부족해 며칠씩 카페에 잠복하고 있다 내가 나타나면 뭐라고 막 공격을 해 댄다. 점잖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때는 좀 섬뜩한 생각이 들어 결국 카페를 탈퇴할 뿐만 아니라 모임에도 더 이상 나가지 않았다. 물론 세상의 모든 스터디가 다 그렇겠는가. 그래도 기본적으로 스터디는 안 하는 것보다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작가 지망생들의 창작 스터디를 소설로 쓴다는 건 어찌 보면 용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아직 풋내기 작가도 아닌 작가 지망생들의 이야기다. 독자는 언제나 작가가 쓴 완벽한 이야기를 원하지 아직 창작 스터디에서 나눌 법한 이야기를 읽는 건 별로 프로답않아 보인다. 그건 아직 작가가 되기도 전에 힘들다고 징징거리는 꼴 밖에 더 되겠는가. 작가 지망생들은 어떡하든 작가만 되면 다 되는 줄 알지. 천만의 말씀이다. 작가의 타이틀을 따는 순간 그때부터가 고생문이 훤히 열린다. 그래서 개점휴업이라고 문학상 겨우 하나 받고 몇 작품 쓰고 이름 없는 별이 되어 사라져간 작가도 많다. 그래도 이 작품에선 공선을 죽은 영혼으로 설정해 놓으니 나름 영리한 구성을 했다 싶기도 하다. 하지만 작가는 아직도 뭔가 위축되어 있는 건 아닐까 뭔가 배짱이 있었으면 싶다. (물론 배짱이 있어서 이런 글도 쓴다면 인정은 하겠다.)
아니나 다를까, 작품 뒤에 인터뷰 내용이 나오는데,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을 물으니 실패에 대해 덤덤해지고 싶다고 했다. 실패할 걸 알면서 왜 매번 크게 상처받는지 모르겠다며. 그건 어쩌면 실패를 대하는 작가의 태도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실패를 안 하는 길은 딱 두 가지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완벽하게 성공을 하던가 아예 도전을 하지 않던가. 그러나 둘은 너무 어렵다. 그보다 오히려 실패해도 좋으니 뭐라도 해 보자는 쪽이 더 낫지 않을까. 어차피 세상은 녹녹치 않다는 걸 작가도 모르지 않을 텐데 말이다. 누구는 근사한 목표를 세우고 멋지게 실패하는 거라고도 했다. 그게 더 멋지지 않은가. 그런 일은 거의 없지만 처음부터 너무 멋지게 성공하면 바닥을 몰라 나중에 심하게 골절상을 입거나 죽을 수도 있다. 실패는 하되 실망하지 않으면 된다. 쓰고 보니 (모르긴 해도) 작가 보다 오래 산 나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말 같다.
권해영 작가는 2020년 실천문학 신인상을 받으면서 작가 활동을 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여기 나온 세 작품 중 가장 마음에 든다. 어느 날 주인공이 사는 아파트에 화재가 났다며 주민 대피령이 떨어지고 대피하는 과정과 생애 처음으로 직장을 얻고 받은 돈의 사용처에 대해 씨줄과 날줄로 엮었는데 제법 재밌게 읽혔다. 기발하다는 느낌도 들고.
요즘 젊은이들은 돈을 모으지 않는다고 한다. 그냥 그 달 벌어 그 달 쓴다고. 어차피 평생 벌어봤자 집 한 채도 못 사고 결혼도 못 할 테니 그냥 현재를 즐기자는 주의. 하지만 난 작품의 주인공이 더 설득력 있게 느껴졌다. 작품은 사람 구실하고 사느라 즐길 틈도 없다고 말하는 것 같다. 그런데 주민 대피 과정과 교묘하게 엮는 건 어떤 은유인 걸까. 그보단 제목이 주는 암시가 더 큰 것 같기도 하다. <당신이 기대하는 건 여기에 없다>. 원래 작가는 태생적으로 행복보단 불행을 더 주시하는 존재들 아니던가. 정답보단 해답을 제시하고. 그렇다면 이렇게 쓰는 것도 틀리진 않다.
이주란 작가의 <위해>라는 작품은 정공법으로 쓴 소설 같다. 어떠한 기교도 없이 담백하게 썼다. 어느 가난한 처녀와 소녀의 예쁜 우정을 그렸다. 작가는 인터뷰에서 가난하다고 다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썼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 의도가 충분히 잘 살려진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세 사람 중엔 작가 연수가 가장 오래됐는데 그래서 그런지 안정감이 느껴진다.
그런데 좀 묘한 게 느껴진다. 2, 30년 전의 젊은 작가들의 글이나 요즘 젊은 작가들의 글이나 별 큰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다. 예전에 우린 당대의 젊은 작가들의 작품에 인색했다. 어쩌면 그렇게 글을 못 쓰는지 모르겠다고 앞다퉈 침을 튀기며 성토하기에 바빴다. 지금 와 생각해 보니 이해가 갈 것도 같다. 20대 작가는 꼭 20대에 맞는 글을 쓴다. 30대 작가는 30대스럽게 쓰고, 40대는 40대스럽게 쓰며, 50대도 그렇다. (작가는 나이가 들면 들수록 서사의 깊이가 느껴져 좋은 글을 쓸 가능성이 많은데 글을 점점 안 쓰는 것 같다.) 그러니 당대의 젊은 작가들은 비슷한 연배의 독자들에겐 환영을 받지 못하는 거다. 좀 다를 줄 알았는데 자기와 같은 얘기를 하고 앉았으니 그걸 못 견뎌하는 것이다. 그걸 요즘 작가들도 똑같이 반복하는 걸 본다. 옛날보다 훨씬 좋은 환경에서 공부하고 자랐을 텐데도 오히려 이 사회가 쳐놓은 그물망에 그들도 똑같이 갇혀서 헬 조선의 이야기를 쓰는 것이다. 세상이 좋아졌으면 그만큼 작가들도 행복한 글을 써야 할 텐데 그렇지가 못하다.
그래서일까? 옛날의 젊은 작가들은 글 못 쓴다고 욕해도 별로 죄책감 같은 거 없는데 (믿거나 말거나 한 소리지만 욕받이 작가가 더 대성하는 법이다.ㅋ) 요즘 작가들에게 나쁜 말은 못 하겠더라. 다 동생 같고 조카 같은 작가들 아닌가. 진정한 작가가 어디 작품 몇 개 썼다고 되는 건가? 다 연수가 차고 이러저러한 경험치가 작가를 만드는 거지. 또 내가 아니어도 비슷한 또래의 독자들에게 알게 모르게 욕먹고 있을 거다. 그렇게 작가는 욕을 먹고 크는 거다.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것처럼 비슷한 또래의 독자들은 결코 좋은 소리 안 한다. 그 생리만 이해하면 된다.
단지 나이 많은 독자로서 오늘날의 젊은 작가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너무 같은 동류의식에 휘말려서 전망 없는 삶에 대해선 가급적 안 썼으면 좋겠다. 그런 건 선배 작가들도 많이 했던 거다. 지금 그대들이 쓰는 글은 나이를 거스를 수 없는 일종의 통과의례 같은 것일 수도 있겠는데 독자가 뭘 원하는지를 알았으면 좋겠다. 물론 독자의 입장에서 같이 느껴주고 대신 말해 주는 거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그건 별로 의미가 없는 생각이다. 독자는 그 이상을 원하기도 한다. 너무 입맛을 맞출 필요는 없지만.
누구는 말했다. 우리나라 정치엔 유머가 없다고. 난 우리나라 문학 판도 별다르지 않다고 본다. 뭔가 모를 패배의식 아니면 지나친 엄숙주의 또는 선민의식을 전 세대 작가들로부터 그대로 답습해 오고 있는 건 아닌지 살짝 걱정도 된다.
또한 이런 프로젝트를 기획하는 기획자나 출판사에게도 이 지면을 빌어 한마디 하고 싶다. 이런 기획은 분명 좋고 환영할만하다. 그러나 언제까지 젊은 작가에게만 허락할 건지 모르겠다. 물론 젊은 작가들이 자신의 작품을 발표할 지면을 얻는다는 건 좋은 일이다. 난 진심 젊은 작가들이 잘 됐으면 좋겠다. 하지만 독자의 입장을 얘기하자면, 앞서도 얘기했지만 재작년에 창간호를 읽었는데 비슷한 책을 또 읽는 느낌이다. 물론 3년의 차이가 얼마나 나겠냐마는 예를 들어 30대 작가는 3년 전에도 있지만 올해도 있고 5년 뒤에도 있을 것이다. 나 같이 30대를 거쳐 온 사람은 30대 작가가 별로 새롭지는 않았다. 즉 너무 작가층이 한정적이란 얘기다. 물론 기획부터 젊은 독자를 겨냥한 거라면 할 말은 없지만 다양한 연령층의 작가를 확보할 생각은 없는지 아니면 그런 기획을 따로 할 생각이 없는가 묻고 싶다.(물론 그럼 또 나와 비슷한 또래의 작가를 여전히 씹어대고 있을까.ㅋ)
아무튼 난 10년 20년 뒤에도 어느 책에선가 이들의 이름을 다시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들의 건투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