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었네? 나이가 많나봐요? 우리애는 1살밖에 안됐는데?! 기운이 없나봐? 에이구 가여워라...어째!
할아버지네?할아버지야! ㅋㅋㅋㅋㅋㅋ

우리 시츄 이름은 사랑이예요! 애칭은 깡총이, 니니, 꿀떡이, 귀욤이, 애교쟁, 달콤이, 토끼츄, 갓난츄, 내못난, 츄츄니, 응애츄, 털복이, 관종이, 초코츄, 냠냠이, 먹보츄, 초롱이, 식신이....

이 친구들은 빨리 나이들어요! 지금 어린 그 강아지들도 곧 늙고 힘이 빠지고 여기저기 아파하고 걷기도 힘들어져요. 그런 변화들도 끝까지 사랑해주세요. 마지막까지 지켜주세요.

노견과 함께하는 사람들은 그 과정 중이예요.

19년쯤 울다가 웃으며 읽었던 책인데
요즘 츄츄가 아파서 읽었던 기억이
새삼 다가오네요.
고통을 잘 참는다는 이 친구들..
그래서 더러 질병도 늦게 발견되곤 하죠.
아프면 버림받을까 본능적으로 두려워한다는게
가장 안타까웠던것 같습니다.

ㅡ뒤늦은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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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1-18 14:2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사랑이 사진찍을때 맘상한일이 있었나봐요 ㅋㅋㅋ 저희 외삼촌이 키우던 시츄는 22년을 살다가 갔어요. 전 두번 반려견 보내고는 두번 다시 못키웁니다 츄츄 아프지 마라 ㅠ.ㅠ

미미 2021-01-18 14:50   좋아요 2 | URL
22년이라 정말 대단하네요!저는 16년까지 살았다는 얘기듣고도 희망을 품었는데! 얘는 삐지면 썩소도 지어요ㅋㅋ
(웃는 사진 추가합니다!)

scott 2021-01-18 14:58   좋아요 2 | URL
츄츄 눈빛이 ◕‿◕
똘망 똘망 ㅋㅋ
시츄가 간이 나쁘데요 유전적으로
관리 잘해주시면 좀더 오래 곁에 있을수 있어요
ɔ ˘⌣˘

미미 2021-01-18 15:04   좋아요 2 | URL
맞아요!! 얘는 지금 심장도나쁘고 암도있고 기관지염에 10가지 질환을 묵묵히 참아내고 있어요.
(̵̵́╹ᴥ╹)̵̵̀대단츄ㅋㅋ

얄라알라 2021-01-18 14:29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반려동물등록증이란 걸 오늘 처음 알았어요. 초록 배경에 빨간 목줄에 너무나 사랑스럽네요

미미 2021-01-18 14:55   좋아요 1 | URL
그러게 말이예요. 저도 최근에야 알고 만들었어요^^

mini74 2021-01-18 14:3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츄츄 예뻐요. 저 어릴 적 치와와 키웠는데 그 아이 이름도 사랑이였어요. 생각만 해도 울컥해서 저는 강아지 책을 잘 못 봐요. 울 집 개님 똘망이랑 츄츄 모두 건강하고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길 ~ 모든 강아지들이 버림받지 않고 주인 사랑 많이 받으며 살다 가길. ~

미미 2021-01-18 14:59   좋아요 3 | URL
똘망도 넘 귀엽고 예뻐요!! 저도 읽는내내 힘들었어요. 치와와 정말 똘똘하죠. 예전에 키웠어요.제가 잠시 외국에서 살때 저를 찾았는지 집을 나갔대요. 미안해서 엄청 울었어요.

라로 2021-01-18 15:0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희도 츄츄라는 이름을 가진 개가 있었어요. 벌써 25년 전에 죽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녀석이죠. 점잖고, 인자(응?) 하고 인내심 많고, 검은색 sheepdog 있었는데. 아무튼, 반려동물 등록증이라니!! 한국 정말 쩐다!!👍

미미 2021-01-18 15:10   좋아요 1 | URL
어머 그랬군요~!그동안 완전 독특한 이름인줄알고좋아라했네요ㅋ 라로님 넘 재밌어요!!👍👍

cyrus 2021-01-18 16:4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반려견의 생년월일까지 가려주는 센스! ㅎㅎㅎㅎ 반려견도 가족 구성원이고 개체이니 개인 정보를 가려주는 게 맞아요. ^^

미미 2021-01-18 17:10   좋아요 1 | URL
그걸 알아봐주시고 감사해요ㅋㅋㅋㅋ
역시 👍🤭
 

나의 많은 선배들은 글을 끝까지 쓸 수도 없었고,보존할수도 없었으며, 힘들게 버텼으나 마지막까지 버티지는 못했다! 그러나 나는 운 좋게도 그럴 수 있었다.
그 문이 닫히기 전에, 나는 처음으로 한 줌의 진실을 그 틈 사이로 내밀 수가 있었다.
그리고 반물질로 싸인 물질처럼, 그 진실은 밖으로 날아오르자마자 폭발했다!
진실이 폭발하자, 마치 격류처럼 사람들로부터 편지가 쇄도했다. 그것은 예상한 대로였다. 특히 신문 기사의 격류도 일어났다. 그것은 분함과 증오를 감추고 하는 수없이 칭찬하는기사들이었다. 공식적인 찬사가 너무 많이 나올수록 나는 씁쓸해졌다.
우리 나라의 모든 신문이 수용소에 대해 쓴 소설‘이 나왔다.
는 것을 일제히 알리고, 게다가 신문쟁이들이 앞다투어 이 소설을 내놓고 칭찬하고 있는 것을 알았을 때, 예전 죄수들은 또거짓말이다! 그 교활한 거짓말쟁이들은 언제나 그렇지! 하고생각했다. 우리 나라의 신문이 그 통상의 예를 벗어나 갑자기진실을 칭찬하는 일은 아무래도 상상할 수가 없었다! 일부 예전 죄수들은 나의 소설을 읽으려고도 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그런데 읽기 시작하자 일제히 하나의 신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것은 기쁨의 신음 소리며, 아픔의 신음 소리였다. 그리고 편지가 쇄도하기 시작했다. 
<이반 제니소비치의 하루>를 말함ㅡ옮긴이주 - P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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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흐름이란 항상 예측할 수 없는 사태로 우리를 놀라게 한다. 이것은 가장 선견지명이 있는 사람들한테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우리로서는 전혀 예상할수 없었다. 눈에 보이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느닷없이 진동하며, 조금이기는 하지만 여태껏 굳게 닫혀 있던 심연의 문이잠시 열려 그 문이 다시 오랫동안 닫히기 전에, 그 틈새에서두세 마리 진실의 새가 밖으로 날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 P213

특히 냉철한 사람들은 편지 뒤에 서명을 하지 않았다(<내게 남아 있는 여생과 건강을 소중히 하고 싶습니다>). 신문들이 들떠서 칭찬하고 있는 와중에 이런 질문을 한 사람도 있었다. <볼꼬보이가 어떻게 이 소설의 출판을 허락한 거죠? 저는놀랐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투옥된 것은 아닌지 걱정되네요.
빨리 답장해 주세요.> 혹은 이런 것도 있었다. <왜 당신이 뜨바르도프스끼와 함께 투옥되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 P215

진실이라는 것은 언제나 부끄러움이 많고 얌전해서, 거짓이 뻔뻔스럽게 날뛰는 사이에도 잠자코 있게 마련이다.
- P220

우리와 함께 수용소군도의 생활을 자세히 보았던 독자는낮은 목소리로 인터내셔널을 부를 만한 장소도, 시간도 없었다는 것을 알고 있겠지? 벌채 작업 후에 겨우 걸으면서 노래를 부를 힘이 남아 있었겠는가? 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면하루 종일 소지품 보관소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낼 수 있는 놈들이었을 것이다!
- P224

그들을 제일 분개시킨 것은 <어찌하여 슈호프는 싸우지 않았는가?>라는 것이었다. 수용소 제도를 타도할 것인가, 아니면 총을 들고 싸울 것인가 등에 대해서는 아무것도쓰지 않았는데,< 어찌하여 그들은 싸우지 않았는가> 하고 물을 뿐이다(나한테는 이미 껜기르 수용소의 반란을 그린 원고가 준비되었으나 나는 그 원고를 발표할 용기가 없었다...…).

자기는 투쟁의 1그램도 나타내지 못하면서, 우리한테는 톤단위의 투쟁을 요구하고 있었다!
항상 그랬다. 전투가 끝나면 갑자기 많은 용감한 자들이 나타나게 된다.
- P226

이 말은 참 맞는 말이다 ㅡ 매 맞을 때 고함을 질러라! 
나중에 아무리 고함을 쳐도 믿는 사람은 없다.
- P239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어느 죄수나 당신의 책을 읽으면 슬프고 화가 치밀 것이다.>
<스딸린 시대에 제정된 25년의 형기에 관한 법률이 지금도유효하다면, 도대체 무엇이 달라졌는가?><우리가 다시 아무런 죄도 없이 투옥되었는데, 대체 지금은누구의 <개인숭배> 시대라는 말인가?><검은 안개가 우리를 감싸고 있어서, 아무도 우리를 보지 못하고 있다.><어찌하여 볼꼬보이와 같은 사람이 처벌되지 않았는가?
그와 같은 사람이 지금도 우리의 교육자로 되어 있다.>

솔제니친이 받은 편지들(미미)
- P241

이제 와서 나의 책이 해를 미친다고 공인되고 그 출판이 잘못되었다며(〈문학에 있어서 주의주의가 낳은 후유증>), 이미공공 도서관에서 몰수된 지금, 이반 제니소비치의 이름이나 나의 이름, 혹은 수용소군도를 입 밖에 내기만 하여도 돌이킬수 없는 반역으로 간주되고 있다.  - P243

1964년 12월부의 소련 정부의 성명서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쓰여 있었다. 터무니없이 사악한 짓을 했던 사람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어떠한 사정이 있어도, 공정한 처벌을 면할 수가 없다… 일부 민족을 모조리 말살하려던 파시스트 살인자들의 나쁜 짓은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것이었다.〉이것은 전쟁 범죄가 있은 후 20년이 지나고 서독이 시효를적용하려고 한 데에 반대하여 발표했던 성명서였다.
하지만 그들은 똑같이 <일부 민족을 송두리째 근절하려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을 단죄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 P246

소련에서는 아무리 중요한 사회적 사건이 일어나도 두 가지 길밖에는 없었다 묵살되거나, 아니면 왜곡되거나.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큰 사건 중에서 이 두 가지의 길을 벗어난것은 하나도 없었다.
- P257

그런데 1955년 초에는, 투옥 기간 전반에 걸쳐서 보상한다는 계획안이있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며, 동유럽에서도 그렇게 실시되었다. 하지만동유럽의 경우는 그 인원수와 연수가 적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다 미리 계산해 보고 놀랐다. 이것을 실시하면 국가가 파산하겠다! 그래서 2개월의 보상을 실시하도록 했다.
- P259

<독립 채산제>란 이런 것이다. 즉 죄수는 자유 고용인과 동일한 노동에 대하여 그 70퍼센트의 보수밖에 받지 못한다(그것은 웬일일까? 그가 만든 제품에서 이상한 냄새라도 나는가? 만일, 이것이 서구였다면 착취와 차별이 되었을 것이다).
그 나머지 보수 중에서 50퍼센트는 꼴로니야를 위해 공제되었다(수용소 구내의 유지비, 실무 직원과 경비견을 위한 비용). 그 나머지에서 또 식비와 의류비를 제한다(생선 대가리가 들어 있는 수프를 먹고 있는데). 그리고 마지막에 남은 금액은 <석방 때까지>죄수의 계좌에 들어가 있게 된다.  - P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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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투쟁은 절망적이었다. 그러나 자기의 목숨을 걸면서까지 부정과 싸운 것은 인간적이었다! 그의 투쟁은 패배와 직결하고 있었으나, 헛된 것이라 말할 수는 없었다. 만일 우리가 타협적으로 굴지 않고, <그런 짓은 소용없다, 무리다!>라고 단념하지 않고 다르게 행동했다면 우리 나라는 전혀 다르게 되었을 것이다! 심지어 미뜨로비치는 시민도 아니었다. 그는 유형수였다. 그래도 그의 안경의 빛은 지구의 권력자들을 떨게 했던 것이다.
- P156

우리 모두 지겨운 혐오감을 감추고, 다함께 바보들의 축제로나아갔다. 투표는 모든 유형수들한테도 허용되어 있었다.
그토록 선거는 가치 없는 것이었다.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들에게도 선거인 명부에서 자기 이름을 찾아 빨리 투표하도록재촉했다.  - P157

선거라는 것은 받아 쥔 투표용지를 되도록 빨리 투표함까지가져가서 그 구멍 속으로 밀어 넣는 일뿐이었다. 만일 누군가발을 멈추고 입후보자의 성이라도 자세히 읽는 흉내를 내기라도 한다면 그것은 이미 의심받는 일이 된다 - 당 기관이추천을 잘못했다고 생각하는가? 읽을 필요가 없지 않는가?
투표가 끝나면 모두 당당히 술을 마실 수가 있었다(봉급은 제날짜건 가불이건 반드시 선거 전에 지불되었다). 모두 가장좋은 옷을 입고(유형수도 마찬가지) 거리에서 사람을 만나면깊이 고개를 숙이며, 서로 무슨 연고인지 인사를 하며, <좋은하루입니다!〉라고 했다..…….
- P157

도형 수용소에서 우리는 황당한 광경을 보면 드러내 놓고웃었지만 유형지에서는 자기의 생각을 남한테 말할 수 없게된다. 유형수들은 보기에는 자유인과 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으나, 우선 처음에 사회로부터 받아들인 것은 무엇이든 감춘다는 기본적인 습관이었다.  - P158

인간이란 일생을 통하여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변한다! 자기 자신한테나 다른 사람한테나, 전혀 몰랐던 사람이 되기도 한다! 이렇게 여러 가지 모습 중 하나를 향해, 우리는 명령이라든가법률이나 충동에 의해, 또는 아예 눈을 감고 있기 때문에, 주저하지 않고 즐겁게 돌을 던지는 것이다.
- P161

그런데 어찌 된 노릇인지, 사령부에 공석이 보이기 시작했다.「그 사령관은 어찌 되었나요?」 「그는 이제 여기에 없소.」사령부의 인원이 줄었다! 응대하는 것도 친절해졌다. 신성한등록 확인도 그다지 신성하지 않았다. 만약 어떤 사람이 저녁 시간까지 오지 않더라도 넘어갔다. 「괜찮소, 다음에 합시다! 」여러 민족들이 차례로 권리를 되찾고, 다른 주로의 여행도 전보다는 자유로워졌다. 〈곧 우리를 고향으로 보내 준대요.
고향으로!〉라는 소문이 점차 심해졌다.  - P166

제20차 당 대회가 시작되었다. 흐루쇼프의 연설에 대해서우리는 오랫동안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꼬끄 쩨레끄에서 사람들이 그것을 읽기 시작했을 때도, 유형수들한테는 보여 주지 않았다. 우리는 BBC를 통해서 그 연설에 대해 알게 되었다).  - P171

그는 1944년에내가 스딸린에 대해 쓴 해학에 웃음까지 지었다. "참, 이것은바로 지적했군요! "조서에 딸려 있는 죄를 입증하는 증거물중에서 전선에서 쓴 나의 단편 소설을 보고 칭찬했다. "이 속에는 반소비에뜨적인 것은 하나도 없더군요! 원하신다면 가져가도 좋아요. 발표하는 게 어떨까요?" 그러나 나는 환자처럼 기어드는 목소리로 거절했다. 「아닙니다. 저는 이미 오래전부터 문학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고 있었어요. 만일 제가 앞으로 몇 년을 더 산다면 물리학을 공부해 볼까 합니다.」 (이것이 지금의 유행이다! 앞으로 우리는 이렇게 대답해야 한다.)
매를 아끼면 버릇이 나빠진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감옥은나름대로의 지혜를 우리한테 가르쳐 주었다. 체까-GB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 P173

만일 체포가 물을 단숨에 얼려 버리는 혹한이었다면, 석방은 두 혹한 사이 약간의 해빙에 지나지 않는다.
두 체포 사이의.
왜냐하면 이 나라에서는 석방이 있으면, 그 뒤에는 언제나반드시 체포가 잇따르게 마련이다.
흐루쇼프 시대가 오기까지 40년간, 석방이란 2개의 체포사이의 상태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은 2개의 섬 사이에 던져진 구명보트였다. 
하나의 수용소에서 다른 수용소로 가는 동안에, 이것을 이용하여 물에서 버둥거려 보라는 것이었다.
첫 번째 날부터 마지막 날까지의 사이가 형기이며, 한 수용소 구내를 나가서 다른 수용소 구내에 들어가기까지의 사이가 <석방>인 것이다.
- P175

나딸리야 이바노브나 스똘랴로바는 1945년 4월 27일에 까르 수용소에서 석방되었다. 국내 신분증을 교부받아야 했기때문에 곧 그 지방을 떠날 수는 없었다. 그녀에게는 빵 배급권도 없었고 머무를 곳도 없었고 일이라고는 장작을 패는 일밖에 없었다. 수용소의 친구들이 모아 준 몇 루블을 쓰고 나서, 스똘랴로바는 수용소로 돌아가 경비병들에게 짐을 가지러 왔다고 거짓말을 하고서는(그 지역의 오랜 관습이었다)자기의 막사로 뛰어들었다! 재회의 기쁨은 대단했다! 친구들은 그녀를 둘러싸고 취사장에서 수프를 날라다 주었고(참 맛있구나!), 웃으면서 사회의 불편한 생활 이야기를 들었다. 여기가 훨씬 편하다는 결론이었다. 점호 시간이 되었다. 한 사람이 남았다! 당직자가 나무랐으나, 다음 날 아침까지 (다음날은 5월 1일이었다) 수용소 구내에서 밤을 보내고, 아침에는나가라고 했다!
- P176

내가 아직 학생이었을 때, 로스또프 대학에는 조금 이상한N. A. 뜨리포노프라는 교수가 있었다. 그는 언제나 움츠리고,
늘 긴장하여 안절부절 못했다. 복도에서도 그를 부를 수가 없었다. 후에 알게 되었지만, 그는 이미 들어갔다 나온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복도에서 누가 부르는 것은 보안 장교가 부르는 소리로 들렸던 것이다.
- P178

<너무 일찍 >석방된 사람들은 불행했다! 아베니르 보리소프는 1946년에 석방되었다. 그는 어떤 큰 도시가 아니라, 자기의 고향 마을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의 오래된 친구들이나동급생들은 그와 길에서 만나지 않도록, 또 멈춰서 이야기하지 않도록 애썼다. (그의 친구들은 최근까지 전선에서 용감히싸운 젊은이들뿐이었는데!) 만일 도저히 말을 피할 수 없을경우에는 되도록 무난한 말을 골라서 슬금슬금 도망치듯 했다. 이 몇 해 동안 그가 어떻게 지냈는지, 묻는 사람은 아무도없었다). (아니, 우리는 중앙아프리카에 대해서보다 수용소군도에 대해서 더 모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 P178

스딸린 시대의 가장 좋은 석방은 수용소 문을 나와, 그곳에 남는 것이었다. 그러한 사람들은 이미 작업 현장에서도 알려져 있어서, 이내 채용되었다. 이미 조사가 끝난 사람들이기때문에, 내무부의 직원들도 그들을 길에서 만나면 의심하지않고 사람으로 대우했다.
- P180

그럼 명예 회복의 형태란 어떤 것인가? 노파 C. 에게 불친절한 호출장이 왔다. 내일 아침 오전 10시까지 경찰에 출두할것. 이것뿐이었다! 호출 전날 밤에, 그녀의 딸이 호출장을 들고 경찰에게 달려갔다.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궁금해서 왔어요. 이게 무슨 일이죠? 어머니한테 어떻게 설명하면 될까요?」 「아니, 걱정할 것 없어요. 이것은 좋은 소식입니다. 돌아가신 남편의 명예 회복에 관한 일 때문에 그래요.」(그것이 그녀에게 슬픈 소식일지도 모르지 않는가? 자선을베푸는 사람은 그런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우리 나라에서 <자비>의 형태가 이 정도라면, 잔학의 형태는 대체 어떨지 알 수 있을 것이다!
- P183

제7부

스딸린 사후

.....그들은 또한 자기들이 행한 살인을 회개치 아니하더라.
<요한의 묵시록 9 장 21절> - P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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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어려운 시절 먼 타국에서도 교육열!

한국인들도 까자흐스딴에서 크게 성공했다. 그들의강제 이주는 훨씬 일찍부터 실시되었고, 1950년대 초에는 상당히 자유롭게 되었다. 그들은 이미 사령부에서 등록 확인을받지 않아도 좋았고〉, 자유롭게 다른 주로 이동할 수 있었으나, 공화국 밖으로는 나갈 수 없었다. 그들은 좋은 집이나 넓은 마당을 소유하지는 않았다(젊은 세대의 생활 양식이 유럽화 될때까지,그들의 주거 환경은불편하고 원시적인 것이었다.)하지만, 그들은 교육열이 높아서 재빨리 까자흐스딴 지방의 교육시설을 점령하고 (이미 전쟁 때부터는 그들을 막을 장애물이 없었다)공화국의 지식인층을 지탱하는 사람들이 되었다. - 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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