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투쟁은 절망적이었다. 그러나 자기의 목숨을 걸면서까지 부정과 싸운 것은 인간적이었다! 그의 투쟁은 패배와 직결하고 있었으나, 헛된 것이라 말할 수는 없었다. 만일 우리가 타협적으로 굴지 않고, <그런 짓은 소용없다, 무리다!>라고 단념하지 않고 다르게 행동했다면 우리 나라는 전혀 다르게 되었을 것이다! 심지어 미뜨로비치는 시민도 아니었다. 그는 유형수였다. 그래도 그의 안경의 빛은 지구의 권력자들을 떨게 했던 것이다.
- P156

우리 모두 지겨운 혐오감을 감추고, 다함께 바보들의 축제로나아갔다. 투표는 모든 유형수들한테도 허용되어 있었다.
그토록 선거는 가치 없는 것이었다.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들에게도 선거인 명부에서 자기 이름을 찾아 빨리 투표하도록재촉했다.  - P157

선거라는 것은 받아 쥔 투표용지를 되도록 빨리 투표함까지가져가서 그 구멍 속으로 밀어 넣는 일뿐이었다. 만일 누군가발을 멈추고 입후보자의 성이라도 자세히 읽는 흉내를 내기라도 한다면 그것은 이미 의심받는 일이 된다 - 당 기관이추천을 잘못했다고 생각하는가? 읽을 필요가 없지 않는가?
투표가 끝나면 모두 당당히 술을 마실 수가 있었다(봉급은 제날짜건 가불이건 반드시 선거 전에 지불되었다). 모두 가장좋은 옷을 입고(유형수도 마찬가지) 거리에서 사람을 만나면깊이 고개를 숙이며, 서로 무슨 연고인지 인사를 하며, <좋은하루입니다!〉라고 했다..…….
- P157

도형 수용소에서 우리는 황당한 광경을 보면 드러내 놓고웃었지만 유형지에서는 자기의 생각을 남한테 말할 수 없게된다. 유형수들은 보기에는 자유인과 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으나, 우선 처음에 사회로부터 받아들인 것은 무엇이든 감춘다는 기본적인 습관이었다.  - P158

인간이란 일생을 통하여 여러 가지 모습으로 변한다! 자기 자신한테나 다른 사람한테나, 전혀 몰랐던 사람이 되기도 한다! 이렇게 여러 가지 모습 중 하나를 향해, 우리는 명령이라든가법률이나 충동에 의해, 또는 아예 눈을 감고 있기 때문에, 주저하지 않고 즐겁게 돌을 던지는 것이다.
- P161

그런데 어찌 된 노릇인지, 사령부에 공석이 보이기 시작했다.「그 사령관은 어찌 되었나요?」 「그는 이제 여기에 없소.」사령부의 인원이 줄었다! 응대하는 것도 친절해졌다. 신성한등록 확인도 그다지 신성하지 않았다. 만약 어떤 사람이 저녁 시간까지 오지 않더라도 넘어갔다. 「괜찮소, 다음에 합시다! 」여러 민족들이 차례로 권리를 되찾고, 다른 주로의 여행도 전보다는 자유로워졌다. 〈곧 우리를 고향으로 보내 준대요.
고향으로!〉라는 소문이 점차 심해졌다.  - P166

제20차 당 대회가 시작되었다. 흐루쇼프의 연설에 대해서우리는 오랫동안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꼬끄 쩨레끄에서 사람들이 그것을 읽기 시작했을 때도, 유형수들한테는 보여 주지 않았다. 우리는 BBC를 통해서 그 연설에 대해 알게 되었다).  - P171

그는 1944년에내가 스딸린에 대해 쓴 해학에 웃음까지 지었다. "참, 이것은바로 지적했군요! "조서에 딸려 있는 죄를 입증하는 증거물중에서 전선에서 쓴 나의 단편 소설을 보고 칭찬했다. "이 속에는 반소비에뜨적인 것은 하나도 없더군요! 원하신다면 가져가도 좋아요. 발표하는 게 어떨까요?" 그러나 나는 환자처럼 기어드는 목소리로 거절했다. 「아닙니다. 저는 이미 오래전부터 문학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고 있었어요. 만일 제가 앞으로 몇 년을 더 산다면 물리학을 공부해 볼까 합니다.」 (이것이 지금의 유행이다! 앞으로 우리는 이렇게 대답해야 한다.)
매를 아끼면 버릇이 나빠진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감옥은나름대로의 지혜를 우리한테 가르쳐 주었다. 체까-GB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 P173

만일 체포가 물을 단숨에 얼려 버리는 혹한이었다면, 석방은 두 혹한 사이 약간의 해빙에 지나지 않는다.
두 체포 사이의.
왜냐하면 이 나라에서는 석방이 있으면, 그 뒤에는 언제나반드시 체포가 잇따르게 마련이다.
흐루쇼프 시대가 오기까지 40년간, 석방이란 2개의 체포사이의 상태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은 2개의 섬 사이에 던져진 구명보트였다. 
하나의 수용소에서 다른 수용소로 가는 동안에, 이것을 이용하여 물에서 버둥거려 보라는 것이었다.
첫 번째 날부터 마지막 날까지의 사이가 형기이며, 한 수용소 구내를 나가서 다른 수용소 구내에 들어가기까지의 사이가 <석방>인 것이다.
- P175

나딸리야 이바노브나 스똘랴로바는 1945년 4월 27일에 까르 수용소에서 석방되었다. 국내 신분증을 교부받아야 했기때문에 곧 그 지방을 떠날 수는 없었다. 그녀에게는 빵 배급권도 없었고 머무를 곳도 없었고 일이라고는 장작을 패는 일밖에 없었다. 수용소의 친구들이 모아 준 몇 루블을 쓰고 나서, 스똘랴로바는 수용소로 돌아가 경비병들에게 짐을 가지러 왔다고 거짓말을 하고서는(그 지역의 오랜 관습이었다)자기의 막사로 뛰어들었다! 재회의 기쁨은 대단했다! 친구들은 그녀를 둘러싸고 취사장에서 수프를 날라다 주었고(참 맛있구나!), 웃으면서 사회의 불편한 생활 이야기를 들었다. 여기가 훨씬 편하다는 결론이었다. 점호 시간이 되었다. 한 사람이 남았다! 당직자가 나무랐으나, 다음 날 아침까지 (다음날은 5월 1일이었다) 수용소 구내에서 밤을 보내고, 아침에는나가라고 했다!
- P176

내가 아직 학생이었을 때, 로스또프 대학에는 조금 이상한N. A. 뜨리포노프라는 교수가 있었다. 그는 언제나 움츠리고,
늘 긴장하여 안절부절 못했다. 복도에서도 그를 부를 수가 없었다. 후에 알게 되었지만, 그는 이미 들어갔다 나온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복도에서 누가 부르는 것은 보안 장교가 부르는 소리로 들렸던 것이다.
- P178

<너무 일찍 >석방된 사람들은 불행했다! 아베니르 보리소프는 1946년에 석방되었다. 그는 어떤 큰 도시가 아니라, 자기의 고향 마을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의 오래된 친구들이나동급생들은 그와 길에서 만나지 않도록, 또 멈춰서 이야기하지 않도록 애썼다. (그의 친구들은 최근까지 전선에서 용감히싸운 젊은이들뿐이었는데!) 만일 도저히 말을 피할 수 없을경우에는 되도록 무난한 말을 골라서 슬금슬금 도망치듯 했다. 이 몇 해 동안 그가 어떻게 지냈는지, 묻는 사람은 아무도없었다). (아니, 우리는 중앙아프리카에 대해서보다 수용소군도에 대해서 더 모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 P178

스딸린 시대의 가장 좋은 석방은 수용소 문을 나와, 그곳에 남는 것이었다. 그러한 사람들은 이미 작업 현장에서도 알려져 있어서, 이내 채용되었다. 이미 조사가 끝난 사람들이기때문에, 내무부의 직원들도 그들을 길에서 만나면 의심하지않고 사람으로 대우했다.
- P180

그럼 명예 회복의 형태란 어떤 것인가? 노파 C. 에게 불친절한 호출장이 왔다. 내일 아침 오전 10시까지 경찰에 출두할것. 이것뿐이었다! 호출 전날 밤에, 그녀의 딸이 호출장을 들고 경찰에게 달려갔다.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궁금해서 왔어요. 이게 무슨 일이죠? 어머니한테 어떻게 설명하면 될까요?」 「아니, 걱정할 것 없어요. 이것은 좋은 소식입니다. 돌아가신 남편의 명예 회복에 관한 일 때문에 그래요.」(그것이 그녀에게 슬픈 소식일지도 모르지 않는가? 자선을베푸는 사람은 그런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우리 나라에서 <자비>의 형태가 이 정도라면, 잔학의 형태는 대체 어떨지 알 수 있을 것이다!
- P183

제7부

스딸린 사후

.....그들은 또한 자기들이 행한 살인을 회개치 아니하더라.
<요한의 묵시록 9 장 21절> - P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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