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생 김지영 오늘의 젊은 작가 13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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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평균 성인 독서량이 채 열 권을 넘지 않는 한국 사회에서 하루에만 리뷰글이 무려 열 몇 개씩 달린다는, 바로 그 책이다.


사실, 나는 이 책을 어쩌다(?) 읽게 되었다. 

'힐링'과 '멘토링' 위주로 도배되다시피한 신간 베스트셀러 목록에 국내 순수문학 그것도 여성주의 소설이 오랜만에 등장했다는 뉴스도, TV 르포 작가 출신답게 충분한 사전 조사로 사실성을 살리면서도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라는 성공 비결도, 내 관심을 끌진 못했다.


여성가족부가 출범한지 십 년이 넘었고, 성폭력방지법과 남녀고용평등법이 제정되었지만, 일터에서의 유리천장은 여전하며, 가정에서의 가사 노동은 전적으로 여성의 몫이고, 일상에서의 성차별과 성폭력 또한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하긴 '역사(history)'를 바꾼다는 게 어디 그리 쉬운 일이던가. 

모든 구성원들의 일상이 하나에서 열까지 전부 바뀌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다. 일상의 변화는 단순히 생각이 바뀌었다고해서 가능한 게 아니다. 생각은, 즉 마음은 얼마든지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비가 다시 애벌레로 돌아갈 수 없듯, 철저한 구조적 '변태'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수 천년 인류 역사를 유지 존속시켜온 가부장제 사회에서의 여성 착취와 폐해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고, 하루 이틀만에 해결될 수 있는 문제도 아니기에, 이런 류의 현실 고발성(?) 소설들은 여성들만의 공감으로 막을 내릴 공산이 크다. 그리고 나의 개인적 경험에 비춰보자면, 독자로서 이에 따른 심리적 상실감과 공허감은 예상외로 오래 갔다.

 


 

그러나 이 책은 달랐다.

이 책은 현실을 이야기하지만, 현실을 '알렸다'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독자들로 하여금 현실을 바꿔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만들고, 방법들을 고민하고 찾아나서게 만든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가 서구 남성 중심의 사유 방식이라면, 여성주의는 "태초에 관계가 있었다.", "태초에 목소리가 있었다." 라고 믿는다. 여성주의는 차이나 차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차이를 이해하는 방식이다. 차이가 차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차이를 만든다. 여성주의는 정치적 올바름, 통일성이나 단일성의 가치보다는 대화의 가치를 강조한다. 그리고 이럴 때, 여성뿐만 아니라 다른 타자들의 목소리도 들리게 된다. 다른 타자들의 목소리를 배제하지 않는 것, 이것이 '진정한 보편주의' 정치학으로서 여성주의 언어가 지닌 힘이다. - 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 44쪽 -


'82년생 김지영'씨도 그녀의 어머니인 오미숙 여사도 어른 '말씀'을 잘 듣는 '착한' 여자 아이로 태어나 성장한다.

오미숙 여사가 시골에서 국민학교만 나온 뒤, 농사일을 돕다가 열 여섯살에 서울 청계천 봉제 공장에 취업해서 번 돈으로 오빠 둘이 대학을 나왔다. 억울했지만 그냥 다들 그렇게 사는 거라고만 생각했다. 오미숙 여사의 둘째 딸로 태어난 김지영씨는 남동생만을 챙기는 할머니의 눈총과 남자아이들만 반장이 되는 게 이상했지만 그냥 그런가 보다 여기면서 자란다. 



기업 추천서는 공부 잘하는 여자 선배가 아닌 고만고만한 남자 선배들 차지였고, 졸업 후 힘겹게 입사한 홍보대행사에서는 열심히 일했고 롤모델도 만났지만, 남자 동기가 먼저 진급하고 똑같은 일을 해도 남직원과 여직원의 연봉 체계가 처음부터 다르다는 걸 알게 된다. 결국, 결혼과 동시에 사직을 하고 육아에 전념하기로 결심하지만 억울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정대현 씨는 차분히 아내의 말을 듣고 적절한 순간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지영아, 잃는 것만 생각하지 말고 얻게 되는 걸 생각해 봐. 부모가 된다는 게 얼마나 의미 있고 감동적인 일이야. 그리고 정말 애 맡길 데가 없어서, 최악의 경우에, 네가 회사 그만두게 되더라도 너무 걱정하지 마. 내가 책임질게. 너보고 돈 벌어 오라고 안 해."

"그래서 오빠가 잃는 건 뭔대?"

"응?"

"잃는 것만 생각하지 말라며. 나는 지금의 젊음도, 건강도, 직장, 동료, 친구 같은 사회적 네트워크도, 계획도, 미래도 다 잃을지 몰라. 그래서 자꾸 잃는 걸 생각하게 돼. 근데 오빠는 뭘 잃게 돼?" -조남주 <82년생 김지영> 136쪽-


남자는 결혼하고 아빠가 되면 승진하고 월급이 오른다. 그만큼 책임감 있게 열심히 일할 거라는 생각에서 일종의 '투자'인 셈이다. 반면, 여자는 결혼하고 엄마가 되면 회사 입장에서는 빨리 털어버려야하는 '비용'이 된다.


'아이는 나라의 미래요, 민족의 미래'라고 한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소중한 존재를 여성에게만 떠맡기는 걸까?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해서? '


인류 사회는 가부장제를 통해 여성에게만 아이를 낳아 키우는 역할을 전적으로 부여함으로써 체제를 유지 발전시켜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정도 이상으로 출산과 육아 및 모성애를 중시하고 숭배하는 소위 '어머니 이론'을 만들어냈다. 인간의 모든 활동을 경제적 수치로 환산하길 좋아하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가사 노동의 가치를 수치화 하는데 인색한 이유 역시 일단 돈으로 계산되면 누군가는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인류 사회는 눈에 보이지 않는 여성의 노동과 헌신에 무임승차해 온 셈이다.  



가부장제는, 가족은, 국가는, 민족은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통제하고 활용 매개 동원함으로써만 유지된다. 우리 사회가 여성을 그토록 어머니로 호명하고 싶어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머니로 간주되는 여성은 성적 주체가 될 수 없고, 자신의 몸을 가질 수 없다. 그녀의 몸은 남성만이 주체가 되는 가족과 국가의 소유다. - 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 57쪽-



 

그냥 '그런 거려니 ...' '원래 그런 건가 보다...' 하고 여겨왔던 '차별'의 원인과 이유를 깨달았다.

몰랐던 걸 알게 되었으니 당연히 기뻐야 하는데, 몰랐을 때보다 더 혼란스럽고 더 아프고 슬프다.



이 글을 여기까지 쓰고 보니, 

이제서야 요즘 내가 한없이 무기력한 이유를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모든 깨달음은 고통을 동반한다.는 그녀의 말은 옳았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대상이 사람이든 이데올로기든 조직이든, 더 헌신하는 사람이 느끼는 슬픔과 분노, 그리고 열정이 지나간 뒤의 황폐함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다. 왜 언제나 더 사랑하는 사람이, 더 열정적인 사람이 상처받는지에 대해 분개했다. 이것이 그 어떤 이념으로도 설명되지 않은 인생의 근원적인 불합리이고, 부정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사랑받을 때보다 사랑할 때, 더 행복하고 더 많은 것을 배운다. 사랑하는 고통으로부터 자신의 크기, 깊이를 깨닫는다. 자기 자신과의 대화를 포함해 모든 대화는 최음제이며, 인생에서 깨달음만 한 오르가즘은 없다. 상처는 그 쾌락과 배움에 대해 지불하는 당연한 대가이다. 사랑보다 더 진한 배움(intensive learning)을 주는 것이 삶에 또 있을까. 사랑받는 사람은 배우지 않기 때문에 수업료를 낼 필요가 없다. 사랑은 대상으로부터 유래-발생하는 에너지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 내부의 힘이다. 사랑하는 것은 자기 확신, 자기 희열이며, 사랑을 갖고자 하는 권력 의지인 것이다. 그래서 사랑 이후에 겪는 고통은 사랑할 때 행복의 일부인 것이다.  - 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 > 머리말 중-


 

 

나는 부디 이 책이 '많이 팔린  책'이 아닌, '좋은 책'으로 남았으면 좋겠다.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이 (현실에) 더 많이 아파하고 분노하고, (현실을) 바꿔야겠다고 결심했으면 좋겠다. 


더 나아가, 이 한 권의 책이 많은 이들에게 페미니즘을 새로 접하고 제대로 이해하는 '마중물'과 같은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이 책을 아직 읽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이 책만 읽은 사람은 없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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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끝의 아이들
나카와키 하쓰에 지음, 서수지 옮김 / 사람과나무사이 / 2017년 2월
평점 :
절판


학창시절 내내, 고대사와 중세사는 그렇게 열심히 가르치고 배웠으면서도 근현대사로 넘어올수록 특히 광복 이후 현대사에 대해서는 주마간산식으로 넘어갔던 것같다.  4.19 학생의거와 5.16 혁명 및 5개년 경제개발계획과 무장공비 침투 등에 대해 배운 기억밖에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 나는 4.3 제주사건도 전태일열사 분신도 광주민주화운동도 모른 채 어른이 되어버렸다.  

비교적 자유롭게 책을 접할 수 있게 되면서, 나는 현기영의 <순이삼촌>을 통해 4.3 제주사건을,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읽고나서는 광복후 좌우이념대립과 갈등을 알게 되었고,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과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등을 읽으면서는 도시 철거민과 소록도에 유폐된 한센병 환자들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이들 소설속에 담겨 있는 내용들은 때론 스물살 청춘이 받아들이기엔 너무 끔찍해서 머릿속으로 '이건 소설일 뿐'이라고 스스로를 일깨우곤 했지만, 실제 현실은 소설보다 훨씬 더 참담했을 거라는 걸 내 마음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역사가는 소설가가 될 수 없지만 소설가는 훌륭한 역사가가 될 수 있다'는 이 말을 믿는다.

 

나카와키 하쓰에의『세상 끝의 아이들』은 소설가가 어떻게 훌륭한 역사가가 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작가는 무려 20여 년에 걸쳐 역사적 사실들을 하나 하나 확인해가면서 고쳐쓰고 또 고쳐써서 이 한편의 소설을 완성했다고 한다.  



전기도 전화도 없는 일본 센하타 마을에 사는 다마코네 가족은 이장의 감언이설과 마을 사람들의 강요에 못이겨 만주 개척촌인 다이카주돈으로 이주해 온다. 이곳에는 일본인뿐 아니라 조선에서 건너온 사람들도 살고 있었는데, 미자네 역시 평안남도 평화리라는 곳에서 왔다.



 

예닐곱 살에 불과한 다마코와 미자는 그저 서로의 말투가 조금 이상하고 옷차림이 달라도 금방 친구가 될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요코하마에 사는 마리가 아빠 손을 잡고 만주로 여행을 왔다가 개척촌에 며칠 머물게 된다. 또래였던 세 아이는 허물없이 친하게 놀다가 평소 자기들이 잘 알고 있는 세계보다 조금 더 멀리 떨어져 있는 사찰을 찾아갔다가 그만 갑자기 쏟아진 빗물에 계곡물이 불어나 텅빈 사찰에 고립되고 만다. 그곳에서 아이들은 미자가 싸온 주먹밥을 나눠 먹으면서 긴긴 밤을 서로 의지하며 지새우고 이튿날 구조된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세 아이는 뿔뿔이 흩어져 각자의 운명을 짊어지고 살아간다.

다마코는 일본이 전쟁에 져서 고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만 유괴되어 중국인에게 팔려가 중국인 메이주로서 문화대혁명을 겪는다. 가족도 이름도 심지어 일본말도 잊어버렸지만 이상하게 빗속에서 나눠 먹던 주먹밥의 온기만큼은 칠십여 년이 지나도록 다마코의 기억에 오롯이 남아 있다. 어렵고 힘들 때마다 자신이 먹기에도 부족했을 주먹밥을 기꺼이 나눠줬던 미자(욧짱)를 떠올리면서 버텨낸다. 



 

한편, 조국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미자네는 일본으로 건너간다.

피지배민족이라는 신분때문에 차별당하고 신변의 위협을 느낄 때마다, 미자는 주먹밥을 나눠 먹으면서 '예쁜 옷을 입은 것처럼 언제나 가슴을 쭉 펴고 걸어야 해'라던 마리의 말을 떠올린다. 비록 김미자 대신 도미타 요시코(富田美子)로 살아가고 있지만,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한순간도 잊지 않고 가슴을 쭉 펴고 당당하게 행동하려고 노력한다. 마치, 먼 발치에서 친구 마리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미국과 소련의 냉전 구도 아래에서 남북으로 분단된 한반도에서는 남과 북 대립의 골이 깊어졌다. 같은 반도에 사는 조선인들끼리 정치체제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으르렁거렸지만 대다수 조선인들은 그 차이조차 이해하지 못했다. 남한 각지에서 공산주의자 색출과 소탕이 시작되며 많은 사람이 체포되었다. 글을 읽고 쓸 줄 안다거나 북한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간첩 취급을 받았다. 제주도에서 일어난 4.3사건에서는 아무 근거 없이 무차별적으로 양민이 학살당했다.

힘들게 일본에서 돌아온 조선인 중에는 과거 일본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목숨이 위태로워지는 상황에 부닥치자 밀항까지 해서 일본으로 도망쳐 돌아오는 사람도 있었다. 미자 부모님은 밀항한 동포를 집에 숨겨주었다. 그중에는 광복 전에 일본 공장에서 일본군 강제위안부로 일했던 여성도 있었다. 갖은 고생을 하고 고국으로 돌아가 시집까지 갔지만 전쟁 중에 일본에서 일했다며 시댁에서 종군위안부였다는 의심을 받아 소박맞고 쫓겨났다고 했다.

관동대지진 후에 벌어진 조선인  학살 당시, 똥장군에 숨어 목숨을 부지했다는 아저씨도 4.3사건에 쫓겨 딸네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동네 사람들과 뒷산으로 도망가 살 수 있었지만 군인들에게 아기 울음소리를 들킬까 두려워 도망치던 중에 계곡에 아기를 던지고 온 부모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평화리에서 도망쳐온 젊은이도 숨겨주었다. 그 청년에게서 미자네 가족이 고향을 떠난 후 벌어진 일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결국, 연락이 끊어진 미자네 외삼촌 일가는 광복 후 바로 일본에 협력한 친일파라는 꼬리표를 달고 외삼촌과 외사촌이 죽임당했다고 한다. 그 후 집도 땅도 빼앗기고 남은 가족들끼리 마을을 떠났단다. 미자 어머니는 구슬피 울더니 제사를 지낼 때마다 외삼촌 가족의 명복을 빌어주었다. -273~274쪽 

 

외면했거나 잘 몰랐던 우리 역사와 모습을 이방인의 시선으로 접하게 되면 여러가지 감정이 솟구치곤 한다. 타국의 역사를 자세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경외감이 들면 들수록 우리 자신의 모습에 화가 나고 부끄러워진다. 그리고 만약 그 이방인이 일본인이라면, 고마운 마음도 함께 생겨나는건 비단 나 혼자만의 경험은 아니리라. 

 

 

자신이 일본인 학교에 본명으로 다니던 때의 이야기와 한국전쟁으로 친척들이 몰살당한 일, 조선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 통학 도중에 불한당 같은 사람들에게 괴롭힘당한 일, 통명이라 부르는 일본 이름을 대고 출신을 숨기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재일교포에 대한 이야기....

그중에서도 붕수가 조선학교의 수학여행으로 북한에 다녀온 이야기가 기억에 남았다.

"재일교포는 동포의 과거를 간직한 사람들이야."

동포란 현재 북한과 남한, 두 개의 나라로 분단된 한민족을 뭉뚱그려 부를 수 있는 편리한 말이었다.

"일본 식민지 시절의 기억을 그대로 간직하고 새 기억을 덮어씌우지 않고 있거든. 일본에 살며 순수 배양된 언어와 문화, 한반도에 사는 동포들이 이미 버린 것까지 그대로 사용하지. 북한에 가서 절실하게 깨달았어. 사실, 한반도 동포들은 재일교포의 존재를 알지 못해. 타향살이하는 재일교포는 고향을 그리워하며 고향에서와 같은 삶을 살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지만 정작 고향 사람들은 재일교포의 존재를 모르고 옛것에도 흥미가 없어."

붕수는 쓸쓸하게 웃었다.

"북한도 남한도 자꾸자꾸 변화해가. 하지만 우리 재일교포는 변하지 않아. 그래서 동포는 동포라도 같은 동포가 아니야. 재일교포는 북한사람도 남한사람도 아니야. 그냥 재일교포지. 일본에 살며 일본 문화를 흡수하면서도 동시에 동포의 옛 문화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 우리는 이제 일본사람도 북한사람도 남한사람도 아니야. 그리고 더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어."

미자는 놀랐지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일본에서 불고깃집 하는 자신이야말로 재일교포의 존재를 현실 세계에서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326쪽

 

잘 알려져 있다시피, 현재 일본에는 재일조선인, 오키나와인 그리고 아이누족 등 크게 세 개의 소수민족이 존재한다고 한다. 그렇지만 일본 정부는 소수민족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문제 해결은 문제 인식으로부터 출발한다.라는 명제에 비추어볼 때, 일본 정보의 태도는 문제 해결을 거부한다기보다는 문제 인식을 거부함으로써 문제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고 있는 셈이다. 이것이 바로 잘못된 역사에 대한 일본 정부의 그릇된 역사관이라 하겠다. 



끝으로,

세 명의 주인공 중 하나인 마리의 사연이야말로 이 소설의 주제와 직접 맞닿아 있으며 작가의 관점이 잘 드러나 있다. 전쟁의 참상과 함께 오늘날 일본인에게 기대되어지는 마음가짐과 자세를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에, 다소 길지만 인용해 본다. 

 

마리는 삼 년이나 이세자키초에서 일하며 로쿠초메 너머로는 가본 적이 없었다. 그 너머로 가면 기억이 되살아날 것 같아서였다. 지금 자신의 손을 잡은 가쓰시 오빠의 이 손을 잡고 미하루다이의 집에서 내려오던 언덕길. 공습으로 타죽은 사람들의 팔다리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수습해주는 사람도 없었다. 초여름의 뜨거운 태양 아래서 썩어들어 가던 팔다리.

마리는 속속들이 기억하고 있었다. 공습 날 아침, 새까맣게 타죽은 가족.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내 손을, 내 손가락을 하나하나 억지로 펴서 캐러멜을 빼앗아갔던 아주머니, 내 그릇의 감자를 날름 먹어버린 아저씨. 가쓰시 오빠가 찾아낼 때까지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았다. 시설에서는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았다.

나뿐만이 아니다. 길바닥에서 죽은 사람들의 주머니를 뒤져 지갑을 훔치던 사람. 공습으로 부모를 잃고 불구가 된 것도 모자라 사람들에게 천덕꾸러기 취급받던 전쟁고아들.

이런 일본인 따위 필요 없다. 이 세상에 증오스러운 일본인을 더는 늘리고 싶지 않다.

그리고, 마리는 알고 있었다.

일본인, 나 역시 일본인.

일장기를 흔들며 신이치 오빠를 필리핀으로 보냈다. 고철을 모으고, 총알 우표를 사고, 총탄을 보냈다. 싱가포르가 함락되었을 때는 등불을 들고 축하했다. '함락'된 싱가포르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리고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잊어버렸다. 일본인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 일본인이 얼마나 많이 죽어갔는지, 옥쇄를 각오하고 적을 쳐부수자, 한 사람이 한 명씩 죽이자며 학교에서 죽창을 들고 짚 인형을 찔렀다.

말살을 다짐했던 귀축미영을 받아들이고, 크리스마스를 축하하고, 징글벨 노래를 부른다. 헬로 아저씨들이랑 논다. 초코릿을 얻어먹는다. 헬로 아저씨는 우리 머리 위로 소이탄을 퍼붓고, 기관총을 난사하고, 원자폭탄까지 떨어트렸는데.

미군이 물러간 뒤 보도규제가 풀리며 원폭과 공습의 참상이 보도되었다. 헬로 아저씨들은 제정신으로는 할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한 짓을 광기에 휩싸여 저질렀다. 그런데도 모두 잊고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시치미를 뗀다.

마리는 하쿠라쿠의 할머니댁에 맡겨지고 나서 다닌 국민학교에서 교과서에 먹을 칠해 지웠던 것을 기억한다. 그때 시커멓게 먹을 칠해 지워야 했다. 먹칠하고 나서는 무엇이 적혀 있었는지 잊으라고 했다. 학교에서 선생님은 무엇을 가르쳤던가, 무엇을 가르치지 말아야 했던가. 제대로 공부할 수 없었다.

같은 일이 또다시 반복된다.

일본은 한국전쟁 특수로 경기가 살아났다. 군대를 갖지 말아야 할 일본이 경찰예비대라는 이름으로 군대나 다름없는 조직을 창설하고, 미군은 일본에서 한반도로 진군했다. 가족사진을 보여주며 눈물을 글썽이던 헬로 아저씨는 이번에는 한국에 폭탄을 떨어트린다.

어쩌면 '나는 조선인'이라고 말했던 욧짱의 머리 위로도. 나에게 주먹밥을 나누어주었던 욧짱의 머리 위로.

(...)

다들 행복하게 살 생각이었다. 전쟁해서 행복하게 살 생각이었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주려고 전쟁터에 가서 다른 누군가를 죽였다. 누군가를 행복하게 하고자 다들 공장에서 무기를 만들고 먹고 싶은 음식도 먹지 못하고 참아야 했다.

다른 사람을 불행하게 할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도 누군가의 행복을 위해 수많은 사람이 불행해졌다.

마리는 당황한 가쓰시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행복해지지 못해도 괜찮아!"

약속을 지켜주었다. 나를 잊지 않아주었다. 이 다정한 사람을 위해, 내 행복을 위해 누군가를 불행하게 하고 싶지 않다. -338~342쪽

 

 

 

작가는 일본인으로서 마리의 입을 통해 일본인에게 묻고 있다.

'나 혼자 잘 살려고 전쟁을 한 게 아니었다. 다른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다들 전쟁터에 나갔고 공습에 가족을 잃었다. 그런데 국가는 전쟁터에서 죽은 사람만 용사 대우를 해주고, 공습으로 죽은 이들에 대해선 아무런 구제도 해주지 않았다. 개죽음일 뿐이라면서...'


공습으로 가족 전부를 잃은 마리에게 이들의 죽음은 결코 '개죽음'이 아니다. 개죽음일수가 없다.

그렇다면, 누구를 위해서? 무엇을 위해서?

'개죽음'이 아니라면, 이들의 죽음은 또한 뭘까?  

 

첫 선거로 선출된 의원들이 제19회 제국 의회를 열었고, 제국 헌법 개정안은 압도적인 다수로 가결되어 일본 헌법이 탄생했다.

그날 아침, 고다마 선생님은 교단에 서서 볼에 홍조를 띠고 말했다.

"이제 두 번 다시..."

혼잣말하듯 다시 한 번 반복하고는 칠판 쪽으로 빙글 몸을 돌아 아이들에게 등을 돌렸다. 선생님의 등이 부들부들 떨렸다.

마리는 가슴이 아팠다. 마리에게 두 번 다시 전쟁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제 두 번 다시 어머니와 아버지가 불에 타죽지 않음을 의미했다. 이제 두 번 다시. -237쪽

 

'유엔평화유지군'이라는 명목 하에 자위대의 행동 반경이 넓어지고 있다. 이제 일본은 아시아 1,2위를 다투는 군사력을 마음만 먹으면 자국 영토를 넘어 전 세계 어느 지역으로까지 파견할 수 있게 되었다. 평화헌법을 수정하려는 시도 역시 줄기차게 이루어지고 있다. 북한의 핵위협에 한국보다 더 호들갑을 떨면서 불안감을 조성하는 것 역시 일본인들의 평화헌법 수호 의지를 약화시키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잘못된 역사 교육을 받은 일본의 전후 세대들은 침략국으로서의 일본, 전범국으로서의 일본이 아니라, 세계 최초의 피폭국이라는 일본만을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들의 잠재의식 속에 내재되어 있는 집단적인 피해의식이 보복으로 표출되어 다시 전쟁이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그 누가 보장할 수 있겠는가.


 

우리 역시 힘이 없어 짓밟혔던 가슴 아픈 역사일수록, 어리석게 되풀해했던 기막힌 역사일수록, 잊지 말아야 한다.

역사는 특히 잘못된 역사는 그 어떤 협상의 조건도 타협의 대상도 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사과도 그 어떤 책임 인정도 합당한 배상금 청구 노력도 없이, 그저 위로금 몇 푼 받고 위안부 문제를 없었던 걸로 하자며, 앞으로는 두번 다시 언급하지 않겠다고 약속까지 해준 한국인이 있다는 사실 역시 잊지 말자. 그 사람이 한때 우리를 대표하는 민선 대통령직을 수행했었다는 사실 또한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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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와 수잔 버티고 시리즈
오스틴 라이트 지음, 박산호 옮김 / 오픈하우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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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진 거라곤 사랑밖에 없는 남자에게서 그 사랑마저 빼앗아간 여자는 죽어 마땅하다."

 

 

이 책을 다 읽고나서 제일 먼저 떠오른 문장이다. 

어디서 주워 읽었는지 이젠 기억조차 나지 않지만, 모골이 송연해지면서도 왠지 모르게 카타르시스가 느껴진다. 배신과 분노와 복수의 감정을 이보다 더 자극하는 문장이 또 있을까?

 

이제 남자의 복수는 피할 수 없는 임무가 되었고, 그 수단은 폭력일 것이며, 그의 모든 행위에는 정당성이 부여되리라. 왜 폭력이 동원되어야만 하는지, 어째서 선악의 분별보다 성별의 차이가 더 부각되는지 등에 대한 질문은 설자리를 잃는다.

 

 

오늘날 문화 상품의 흥행여부는 이성적 판단이나 윤리적 규범이 아니라 원초적으로 자극시킬 수 있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는 것 같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녹터널 애니멀스>는 인간 대뇌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있다는 '파충류의 뇌'를 정확하게 명중시킨다. 만약 이 소설이 출판된다면 실패한 소설가 지망생이자 수잔의 전남편이었던 에드워드는 어쩌면 돈방석에 앉고 하루아침에 유명인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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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아이의 엄마이자 심장수술 전문의를 남편으로 둔 수잔에게 어느날 전남편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가 도착한다. 그녀의 전남편이었던 에드워드는 로스쿨을 다니다가 전업작가가 되려고 공부를 그만두었지만 결국 소설가가 되지 못한 채 보험 영업으로 전향한 인물이다. 그는 20여 년 만에 전처인 수잔에게 자신이 쓴  소설 원고를 보내온다. 소설의 제목은 <녹터널 애니멀스>. 성공한 대학교수('토니')가 아내('로라')와 십대 딸('헬렌')을 데리고 여름 휴가를 떠났다가 고속도로에서 만난 3인조 강도에게 아내와 딸을 잃고 혼자 살아남아 복수한다는 내용이다. 

 

 

진부한 내용이지만 이야기는 제법 흥미진진하게 펼쳐지고, 읽기를 주저하던 수잔은 서서히 물 속으로 잠영해 들어가듯 책 속으로 빠져 든다. 전남편 에드워드가 창조한 가상의 세계는 그녀를 과거 속으로 이끈다. 마치 바닷속처럼 나른함과 동시에 불안감이 엄습한다.

 

 

 

수잔이 처음에 에드워드의 책을 읽기로 동의했을 때 그 책이 그녀에게 이런 영향력을 발휘하리라는 걸 알았어야 했다. 지난 20년이란 시간이 하나도 흘러가지 않은 것처럼 에드워드가 부활하리란 점을 예측했어야 했다. 그리고 그가 살아나면서 이혼과 초기의 아놀드와 그녀가 생각하고 싶지 않은 다른 질문들도 떠오를 것이란 점을 예견했어야 했다. 하지만 이렇게 불안스런 흥분을 느낄 거라는 미래를 내다볼 수 있었을까? 그녀는 지금의 이 불안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 불안은 그 원인에 비해 터무니없이 심각하다. 그녀는 이 소설 속 토니의 이야기가 에드워드를 그녀의 마음속에서 부활시켰다는 점을 제외하고도,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그녀에게 또 다른 영향을 미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토니의 이야기 어딘가에 위협이 도사리고 있었지만 그게 뭔지 혹은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집안일을 하는 동안 기억을 뒤져 그걸 찾아보려고 애썼다.  -292쪽

 

 

 

"이 퍼즐에서 빠진 조각을 찾아봐."

에드워드의 요청대로 그의 소설 속에서 빠진 걸 찾아보려던 수잔은 어느덧 자신의 인생에서 빠진 게 무엇인지 골똘히 생각하게 된다. 

 

 

 

토니의 세계는 수잔의 세계와 닮았다. 그 한가운데에 있는 폭력만 빼면. 그런데 그 폭력 때문에 둘의 이야기는 전적으로 다르다. 이런 불운을 목격하도록 유도돼서 내가 얻는 게 뭘까? 수잔은 궁금했다. 이 소설은 토니의 인생과 내 인생 사이의 차이를 확대시키는 걸까, 아니면 우리 둘을 합치는 걸까? 이건 날 위협하는 걸까, 아니면 달래주는 걸까? 그런 질문들이 그녀의 머리를 스쳐갔지만 잠시 독서를 중단했는데도 아무 답도 떠오르지 않았다. -333쪽

 

 

 

수잔은 에드워드가 자신에게 소설을 읽게 만든 진짜 의도가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에드워드는 소설속 인물인 토니를 내세워 자신을 버리고 다른 남자('아놀드')에게 가버린 수잔에게 복수하려는 걸까?

소설속 주인공 토니와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수잔이 정신적으로 고통받고 스스로 자책하면서 아놀드와의 위태로운 결혼생활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게 목적일까?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녹터널 애니멀스>를 본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마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토니와 수잔>을 읽은 독자라면, 특히 이 작품을 쓴 오스틴 라이트가 무려 40여 년 간이나 대학에서 소설작법을 가르쳤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독자라면, 고개를 가로 저을지도 모른다. 에드워드 즉 오스틴 라이트는 [녹터널 애니멀스]에서 토니와 동료 교수 프란체스카 후턴의 대화를 통해, 복수야말로 가장 저열하고 원시적인 방식임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녹터널 애미널스17]

 

토니는 점심을 먹으며 프란체스카 후턴에게 말했다. "우리가 두 놈을 잡았어요. 내가 한 놈의 신원을 확인했고 경찰이 다른 놈을 죽였죠."

(....)

"당신은 놈이 얼마나 나쁜 놈인지 알기를 원하는 게 아니에요. 거기엔 눈곱만큼도 관심 없어요. 당신은 놈이 당신을 그런 식으로 다치게 해놓고 그냥 빠져나갈 순 없다는 걸 알리고 싶은 거예요. 당신의 자존심 때문에 그런 거라고요."

"놈이 내게 그런 짓을 해놓고 그냥 빠져나갈 순 없어요."

"이제야 솔직해지는군요."

그녀가 손에 얼굴을 기대자 금발 머리가 얼굴 한쪽으로 흘러내렸다. 그의 생각을 대변해주고 있는 그녀의 눈이 진지하면서도 아름다웠다.

"헬렌이 로라와 나에게 복수가 얼마나 원시적인 감정인지 설교하던 기억이 나요. 우린 복수와 정의를 아주 아슬아슬하게 구분했죠. 그때 나는 우리가 얼마나 문명인인가, 라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나요."

"당신은 문명인이에요. 문명인이 아닌 건 레이예요."

"그건 나에게 부담되는 말이에요." 토니가 말했다.

"당신이 부담이 된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되는 거예요."  -247~250쪽 中-

 

 

 

결국 토니는 자신이 받은 상처를 똑같은 방식으로 되갚아준다. 에드워드 역시 수잔에게 자신이 받은 수모와 모멸감을 똑같이 되돌려준다. 이보다 더 공평하고 통쾌한 복수극은 없으리라.  

 

그런데 오스틴 라이트는?

그도 정말 독자들이 자신의 작품을 '치명적이고 세련된 복수극'으로만 읽고, 즐기고, 기억하길 바랄까?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 작품이 단순히 치명적이고 세련된 복수극으로만 읽혀지지 않는다. 

오스틴 라이트는 '이야기 속 이야기'라는 구조를 통해, 작가와 독자의 관계에 대해 (자신의 학생들에게) 설명을 시도하고 있는 건 아닐까?

 

 

소설은 '쓰는 자(작가)'와 '읽는 자(독자)' 둘 다 존재해야 마침내 완성되지만, 작가와 독자는 같은 시공간 속에 존재해서는 안된다는 철칙이 있다. 쉽게 말하면, 작가는 글쓰기 과정에서는 철저히 독자를 무시(?)해야 한다. 독자를 의식한 순간, 더 이상 내가 쓰지만 내 글이 아닌 (그들의) 글이 되어버릴 개연성이 크기 때문이다.

 

 

 

수잔 또한 에드워드처럼 자신도 글을 쓰고 싶어했었다는 걸 안다. 그렇지만 글쓰기 자체보다는 누군가에게 보여진다는 걸 스스로 의식함으로써 자신의 글을 자가검열하게 될까봐 두려워했다는 사실도 떠올린다.

 

 

 

 

 

 

 

글을 쓰는 대신, 그녀는 독자로써 남편 에드워드의 글들을 비평했다. 최대한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면서 순수하고 헌신적인 마음가짐으로 남편의 글을 대했다.(고 생각했다.)

 

'도대체 뭐가 문제였을까?'

 

 

에드워드가 말한다. 그러니까 말해봐. 내 책에 빠진 게 뭐지? 그녀는 대답한다. 그걸 몰라, 에드워드? 당신 눈엔 보이지 않아? 그 생각에 그녀는 잠시 옆길로 빠진다. 그녀의 삶에 빠진 건 뭘까? 그녀는 살아생전 다시 아놀드를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보게 될지 궁금했다. 설사 그게 증오가 아니더라도. 그녀는 아주 오랜 세월 그랬던 것처럼 습관의 힘이 그녀를 다시 잡아당기는 걸 느낀다. 지저분한 갈색 흙더미가 올라오는 겨울 잔디밭을 내다보면서, 아직도 에드워드를 용서하고 칭찬하고 비판하는 편지를 쓸 거라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어떻게 아놀드를 좀 더 강하게 대할 수 있는지, 좀 더 스스로를 존중할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하다가 수잔 모로는 꿈을 꾸기 시작한다. -481쪽

 

 

 

작품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그리고,

오스틴 라이트는 우리에게 묻는다.

 

"그러니까 말해봐. 당신 인생에서 빠진 게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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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줌파 라히리 지음, 이승수 옮김 / 마음산책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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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누구도 자신의 이름 앞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내가 맨 처음 이 작가에게 관심을 갖게 된 건 순전히 그 이름때문이었다.

'줌파 라히리(Jhumpa Lahiri)' 

난 아직도 그녀의 이름을 한번에 정확히 발음하거나 입력하지 못한다. 특별히 길거나 어려운 자음이 섞여 있는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혀가 꼬이고 오타를 내고 만다. 


내 이름도 그렇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이름을 알려주면 단번에 제대로 알아듣거나 표기하는 사람은 드물다. 발음하기 어렵기는커녕 오히려 그 반대임에도불구하고, 성과 이름을 구분하기 좋은 다른 단어들에 빗대어 알려주지 않으면 안된다. 예를 들면, 금은동할때 '금'이라든지 희소식할 때 '희'자라고 또박또박 다시 말해주는 식이다. 


그래서 그녀의 소설 속 주인공처럼 나 역시 상당히 오랫동안 튀는 이름 대신 무난한 이름을 갈망했더랬다. 누구나 다 아는 흔한 이름이라면, 왠지 이름 속에서도 익명성이 보장될 것만 같았다.



 

인도계 미국인인 줌파 라히리도 어쩌면 이국적인 이름 탓에 어렸을 때부터 자신보다는 자신의 이름이 먼저 관심의 초점이 되는 경험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그녀의 작품들은 현대 미국사회에서 인도계 이민 2세라는 독특한 신분과 그로 인한 남다른 체험을 바탕으로 씌어졌다. 그래서 여타의 작가들과 다르면서도 또한 그런 차별성이 작품의 색깔을 규정짓고 작가로서의 한계로 작용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수성이 보편성을 압도한다고나 할까.

내가 3년 전 처음으로 줌파 라히리의 작품(<저지대>)을 읽은 후, 그녀의 또 다른 작품들을 찾아 읽지 않은 이유였다.  


(인도계) 이민자가 아니라면 결코 느낄 수 없는 감상들과 겪지 않아도 되는 상처들...

작가의 개인적 체험이 깊게 배어있는 작품은 공감이나 통찰이 아닌 이해와 연민만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다가 최근 우연히 그녀의 단편집 <그저 좋은 사람>을 읽게 되었다.

다섯 편의 단편과 한 편의 중편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집의 등장인물들 역시 대부분 인도계 이민자들이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나와는 너무 다른 이질적인 일상 속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들이 조금도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혼자 남은 친정아버지의 거취를 고민하던 딸과 오히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이기를 거부하는 아버지...('길들지 않은 땅')

실연으로 힘들어하는 딸에게 짝사랑했던 남자때문에 자살할 뻔했었던 부끄러운 과거를 고백하는 엄마...('지옥-천국')

어린 남동생을 정도 이상으로 잘 보살폈으나 성인이 되어 알콜중독자가 되어버린 동생을 견디지 못하는 누나...('그저 좋은 사람')


이들의 이야기는 더이상 이민자와 같은 특수한 사람들만이 겪는 남다른 '사건'들이 아니라, 누군가 현재 직면하고 있고 누구나 앞으로 직면해야하는 삶의 '과제'들이었다.


 


#-진정한 예술은 평범함을 특별하게 표현하거나 특별함 속에서 평범함을 찾아낸다



훌륭한 작가일수록 평범한 일상을 특별하게 표현할 줄 알고, 개인의 특수한 체험 속에서 모든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보편성을 이끌어낸다. 


줌파 라히리의 첫번째 작품집인 <축복받은 집>과 퓰리처상 수상작인 <그저 좋은 사람>은 '인도계 미국작가'라는 첫인상을 '절제된 문장을 구사할 줄 아는 지적인 작가'로 바꾸어놓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이 정도의 수준에 이른 작가들은 국내에도 적지않다는 생각을 한 것 또한 사실이었다. 


그녀가 갖춘 작가로서의 재능은 인정하면서도 나는 고집스럽게(결론적으론 어리석게도) 그녀를 대중소설과 순수소설 사이에서, 타고난 재능과 적당히 따라주는 운으로 명성을 얻은 신진작가 중 한명이라고, 문화적 다양성을 추구함으로써 여전히 존재하는 인종차별주의를 교묘하게 감추려는 미국 주류 문학계가 찾아낸 또 한 명의 유색인 작가 중 한명이라고만 생각했더랬다.


줌파 라히리의 작품을 세 편이나 읽고도 그녀를 이런 식으로만 기억할 뻔했던 나를 어리석음 속에서 꺼내준 건 그녀의 장편소설 <이름 뒤에 숨은 사랑>이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언젠가 뭐라고 했는지 아니?"

고골리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모두 고골리의 「외투」속에서 나왔다."라고 했다."

"그게 무슨 뜻이죠?"

"언젠가 이해할 날이 있을 거다. 생일 축하한다." (105쪽)



아쇼크 강굴리는 아들 고골리 강굴리의 열네번째 생일날『니콜라이 고골리의 단편 모음집』을 선물로 주면서 이처럼 말했다. 아들이 끔찍히 싫어했던 이름('고골리')을 아들에게 부쳐준 아버지의 사연이 담겨 있는 책이었다. 그러나 아들은 끝내 이 책을 읽지 않았고, 그 이유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열네 살이란 너무 어린 나이니까...


성인이 된 고골리는 아버지가 지어준 '고골리'라는 이름을 버리고 '니킬'로 개명한다.

설령, 그가 아버지가 선물로 준 고골리 단편집을 읽고 자신의 이름에 얽힌 사연을 알고 있었다하더라고, 그 속에 담겨있는 진실만큼은 결코 깨닫지 못했으리라. 그러기에 스무 살이란 너무 눈부신 나이니까...


 

 

나는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을 읽고 또 읽었다. 그냥 한 두번 더 읽은 게 아니라, 톨스토이의 <부활>이나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읽고난 것처럼, 눈으로 입으로 가슴으로 그렇게 읽고, 또 읽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이렇게 존재하기까지 얼마나 놀라운 기적들이 일어났었는지를 떠올리면서...

내 마음속을 통과했던 수많은 문학작품들이 시공간을 뛰어넘어 어떻게 서로 이어져있는지를 떠올리면서...

그리고, 이제는 더이상 이곳에 없지만 여전히 내곁에 남아 나를 살아가게 만드는 이들을 떠올리면서...




 

#-한계를 안다는 건 중요하다. 그러나 실패할 거라는 걸 알면서도 도전한다는 건 더 중요하다

 


나는 한 사람의 직업과 그의 인품은 별개라고 믿어의심치 않아왔다.

학창시절에는 성격은 좋지만 실력은 떨어지는 선생님과 교수님을 공공연히 싫어했고, 사회생활을 시작하고부터는 너그럽고 공평하지만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하는 선배와 직장 상사들을 은연 중에 무시했었다.


그래서 대통령과 국회의원도 착한 사람보다는 능력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줌파 라히리를 알고 나서, 특히 그녀의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를 읽고 나서, 이와 같은 내 사고방식에 금이 생기기 시작했다.  책 속에 긋는 밑줄들이 늘어날수록 마음 속에 생기는 금도 더 늘어났고 더 깊어졌다.



 

나는 노력을 좋아한다. 한계가 있는 조건을 더 좋아한다. 무지가 어떤 식으로든 내게 필요하다는 걸 안다.

한계가 있음에도 지평선은 끝없이 펼쳐진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다른 언어로 읽는다는 건 성장과 가능성의 끝없는 상태를 내포한다. 배우는 초심자로서의 내 일은 절대 끝나지 않으리라. (42쪽)


이탈리아어로 글을 쓸 때는 구속받고 제한받는데도 왜 더 자유롭다고 느끼는 걸까?

아마 이탈리아어에서는 불완전할 자유를 얻었기 때문이리라.

왜 불완전하고 빈약한 이 새로운 목소리에서 매력을 느끼는 걸까? 이렇게 부서지기 쉬운 피난처에서 노숙자나 다름없이 살기 위해 훌륭한 저택을 포기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창작이라는 관점에서 봤을 때 안정감만큼 위험한 것은 없기 때문이리라.

자유와 제한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을까 나 자신에게 묻는다. 왜 감옥이 천국과 다름없을 수 있는지 나 자신에게 묻는다. (72쪽)


글을 쓰는 언어를 깊이 이해해야 한다는 걸 안다. 내가 이탈리아어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능력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안다. 내 이탈리아어 글쓰기는 덜 영글고 성급하고 늘 근사치에 불과하다는 걸 안다. 난 용서를 구하고 싶다. 내 이 충동이 어디서 생겼는지 설명하고 싶다. (75쪽)


 

이 책은 줌파 라히리가 젊었을때부터 배워왔던 이탈리아어를 좀더 잘 하기 위해서 이탈리아로의 이주를 감행한 후, 2년 만에 이탈리아어로 쓴 수필집이다.

그녀 스스로 고백한 것처럼 그리고 이 책의 역자가 밝힌 것처럼 그녀의 이탈리아어는 외국인의 회화로는 훌륭할지 몰라도 작가의 문장으로는 부족한 수준이라고 한다.

 

그럼에도불구하고 그녀가 영어를 포기하고 이탈리아어로의 글쓰기를 고집한 이유는 무엇일까? 

불완전할 자유였다. 바로 실패할 자유였다. 너무 익숙하고 완벽한 언어를 버리고 새로운 언어로 글쓰기에 도전하고 실패하기 위해서였다. 도전하고... 실패하고... 또 도전하고 실패하고...


줌파 라히리는 타고난 재능과 운이 좋아서가 아니었다.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과정 속에서 작가가 되었고, 작가가 되자 거기에 안주하지 않고 또다시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목표를 스스로 설정하고 도전한다.



영어권 작가로서 줌파 라히리는 뛰어나다. 그녀는 이미 직업적으로 성공했다. 

그러나 이탈리아어 작가로서 그녀는 아직 견습작가에 불과하다. 그녀의 작품을 좋아하는 이기적인 독자의 한명으로서 나는 그녀가 이탈리아어를 빨리 포기하고 부디 다시 영어로 돌아와주길 희망한다. 그렇지만 그녀의 이탈리아어 작품집만큼은 꼭 원서를 구해서 갖고 싶다. 그 한 권의 책은 그녀가 뛰어난 작가이기 이전에 훌륭한 사람이라는 걸 증명해주기 때문이다. 


그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클 것이며, 실패할 거라는 걸 잘 알면서도 도전한다는 것의 의미를 두고두고 일깨워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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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나날
제임스 설터 지음, 박상미 옮김 / 마음산책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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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뭇잎을 햇빛에 비췄을 때 보이는 잎맥을 그리고 싶다'


 

나는 일찌기 제임스 설터의 단편집 <어젯밤>을 읽은 후, 그가 남긴 이 말을 완벽하게 이해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몇 편 안 되는 그의 작품들을 다 읽고 난 지금, 내가 과연 이 말의 의미를 이해하기나 했었는지 아니 앞으로 이 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수나 있을지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 없다.   



 

그만큼 설터의 작품은 밀도가 높다.


어떻게 단 두 명의 인물만으로 특별한(?) 사건 전개도 없이 삶을 그려낼 수 있는지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그는 '삶이란 이런 것이다.'라고 관념적으로 설명하기보다는 유리창을 흔드는 바람 한 점, 손끝에 맺히는 이슬 한 방울, 코끝에 맴도는 한 줄기의 향기로 삶을 표현하고, 그 삶과 같은 속도로 움직이는 시간을 포착해낸다.  


 

삶은 미스터리였다. 숲과 비슷했다. 멀리서 보면 하나의 덩어리로 이해되고 묘사될 수 있었지만, 가까이 갈수록 흩어져 빛과 그림자로 조각났고, 그 빽빽함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다. 그 안에는 형태가 없었고, 경이로울 정도의 디테일만이 어디나 가득했다. 이국적인 소리와 쏟아지는 햇빛, 무성한 잎사귀, 쓰러진 나무, 나뭇가지 꺾이는 소리에 달아나는 작은 짐승들, 곤충, 고요함, 그리고 꽃. 이 모든 것은 제각각이면서도 밀접하게 엮여 있고, 보이는 것과 달랐다.


실제로 이 세상엔 두 종류의 삶이 있다. 비리의 말처럼, 사람들이 생각하는 당신의 삶 그리고 다른 하나의 삶. 문제가 있는 건 이 다른 삶이고 우리가 보고 싶어 하는 것도 바로 이 삶이다. (66쪽)



 

삶은 미스터리다.


해변에 누워 푸른 하늘을 보고, 햇살처럼 부서지는 아이들의 웃음 소리를 들으며, 달콤한 포도주와 연인의 따뜻한 향기에 취하고, 나른하게 움직이는 계절의 변화를 느낀다. 

그렇지만, 그 무엇도 삶은 아니다.



 

삶은 마치 숲과 같다.


숲은 멀리서 보면 엇비슷해 보일 뿐 숲을 이루는 개별 나무들의 차이는 드러나지 않는다.

가까이 다가가 보아도 빛이 허락한 모습만을 볼 수 있을 뿐, 나무의 본질을 볼 수는 없다. 눈(眼)은 빛이 비춰주는 사물을 볼 뿐, 빛 자체는 제대로 볼 수 없는 이치와 같다. 어쩌다 한줄기 빛 속으로 흩날리는 먼지의 무리를 보고나서야 빛이 존재한다는 걸, 그 덕분에 사물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뿐이다.   


삶은 빛 그 자체다.


빛 자체는 볼 수 없다. 우리는 그저 빛이 비추는 사물을 볼 수 있을 따름이듯, 내 삶은 타인의 삶에 비추어질때만 볼 수 있다.


 

책은 그녀의 무릎 위에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읽지 않았다. 사람의 인생을 바꾸는 건 결국 하나의 문단, 하나의 진술이다.

우리의 내부로 파고 들어오는 문장들은 가느다랗다. 수영할 때 민물 가자미가 몸 속으로 들어오듯. 그녀는 흥분했다. 힘이 생기는 것 같았다. 다른 것이 그렇듯, 윤이 나게 닦인 문장들이 딱 적당한 때 도착한 기분이었다. 타인의 삶이 비추지 않는 우리의 삶을 어떻게 상상할 수 있겠는가? (238쪽)


 

 

타인의 삶이 비추지 않는 우리의 삶을 어떻게 상상할 수 있겠는가.

나는 이 문장 앞에서 휘청했다. 

마치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날카로운 통증이 온몸을 관통하는 것 같았다.


결국 삶은, 존재하지만 볼 수는 없는 빛과 같은 어떤 것이다. 내 삶은 타인의 삶 속에 비춰질 때만 볼 수 있다...



 


 

역자의 설명에 따르면, 이 책의 원제인 <Light Years>는 '광년(光年)'이라는 뜻도 있다고 한다. 광년은 빛이 일년동안 이동한 거리를 나타내는 단위이지만, 기나긴 억겁의 시간을 의미하기도 한다. 


설터는 사람 역시 숲을 이루는 한 그루의 나무와 같다고 생각했고, 나무를 이루는 잎맥처럼 삶을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를 그려내고 싶어했다. 그렇다면, 그에게 삶을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는 '빛(Light)'과 '시간(Year)'이지 않았을까?


 

삶은 볼 수 없는 빛과 시간으로 이루어져 있고, 모든 건 결국 선택의 문제다.


무감각한 권태와 무의미한 실존에 질식당하지 않으려면 최소한 한가지는 있어야 한다. 그게 일이건 사랑이건 가족이건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문제는 이것들을 동시에 가질 순 없다는 점이다.


내가 이 작품을 읽고 깨달은 건 바로 이 점이다. 결국 인생이란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중 하나 혹은 두가지를 반복적으로 취사(取捨) 선택하는 과정의 연속이라는 거...




 

'작가들의 작가'라는 수식어는 그냥 붙여진 게 아니었다.


한 권의 책은 몇 단락으로 요약되고, 다시 몇 개의 문장으로 압축되다가 마침내 단 한개의 문장으로 뇌리에 새겨지는 법이다. 그런데 설터의 작품은 도무지 단 한 문장으로 정리되지 않는다.  평생에 걸쳐 재독(再讀)할 가치가 충분한 작가다.


 

 

나무에 새겨진 나이테처럼, 삶은 흉터로 나뉜다. 인생 초기에 생긴 흉터들은 더 촘촘하다. 시간에 압축된 듯, 이십 년 세월의 상처들은 잘 구별이 되지 않는다. (250쪽)


계절은 그녀의 은신처였고 그녀의 의복이었다. 그녀는 그 안에서 굴복했다. 땅처럼, 과일처럼 익고 시들었다. 겨울이면 긴 양털 코트로 몸을 감쌌다. 그녀에겐 낭비할 시간이 있었고, 요리를 하고 꽃꽂이를 했다. (256쪽)

이 평온한 시간, 이 안락한 공간, 이 죽음. 실제로 여기에 있는 모든 것들, 접시와 물건들, 조리 기구와 그릇들은 모두 부재하는 것의 삽화였다. 과거로부터 밀려온 조각들이고 사라져버린 몸체의 파편들이었다. (273쪽)

 

이제 나이가 들어 보이는 것이 확실했다. 사랑 대신 존경을 받을 나이였다. 허영을 키우고 잡지책을 넘기던 시절을 지나, 부러움을 받던 세상에서 더 넓고 더 고요한 세상으로 순례를 해온 것이다. 여행자처럼 할 얘기가 많았지만 말로 할 수 없는 것들도 많이 있었다. (3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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