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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 살의 책읽기 - 내 삶을 리모델링하는 성찰의 기록
유인창 지음 / 바다출판사 / 201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꿈 하나만을 먹고 살아가기에는 너무 늦은...

그렇다고 꿈꾸기마저도 포기하기에는 너무 이른...

마흔이란 나이는 바로 이런 나이일지도 모르겠다.

 

 

공자는 사람이 나이 40에 이르면 '미혹한 것이 없다'하여 마흔을 '불혹(不惑)'이라 일컬었지만, 마흔을 건너본 사람은 안다. 마흔이 얼마나 마음을 위태롭게 하고 마음을 뒤흔드는 나이인지를 말이다.

 

 

나이 40을 왜 '마흔'이라 하는지 아는가.

바로, 마음이 흔들린다를 줄여 마흔인 것이다.

 

썸네일

온 마음을 다해 살아온 지난 삶을 되돌아보며...

'과연, 이 삶이 내가 원했던 그 삶이었는지'

'혹시, 다른 사람의 삶을 내것으로 착각하며 살아온 것은 아니었는지'

'이대로, 이렇게 살아가도 되는 것인지'

'만약, 이렇게 살지 않는다면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

하루에도 몇번씩 마음이 흔들린다.

 

 

이런 나에게 한권의 책이 찾아왔더랬다.

마치 건조한 봄가뭄이 계속되던 어느날 예기치 않게 쏟아지는 소나기처럼...

허둥지둥 소나기를 피해 이것저것 가릴 것 없이 아무 담벼락이나 찾아들 듯 그렇게 유인창의 <마흔살의 책읽기> 속으로 숨어들었다.

'나만이 아니었구나. 마음 흔들리는 사람이 나 혼자만이 아니었구나...'

특별히 정답을 찾은 것도 아니요 삶이 바뀐 것도 아니지만, 그저 이점 하나만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었다.

 

 

'수많은 시험문제를 풀면서 살아 왔지만 자신의 문제에는 질문을 던져 본 적도 답을 구해 본적도 없고, 그저 숨을 쉬고 밥을 먹고 돈을 벌며 살았을 뿐이다. 그저 그것 뿐이다. 밥 먹은 힘으로 돈을 벌고 번 돈으로 또 밥을 먹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세월도 먹어치웠다.'

이와 같은 필자의 고백이 나의 독백으로 바뀌었다. 나 역시 그랬다.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그저 하루하루 전쟁하듯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일하며 투쟁하듯 살았다.

'그래서 그게 뭐 어떻단 말인가...?

그게 잘못이기라도 하단 말인가... ?'

처절한 외침으로 바뀐 나의 독백은 안다.

그건 바로 지나간 세월에 대한 미안함이자, 앞으로 다가올 세월에 대한 불안감이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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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와 메모하기 그리고 페이지 밑단 접기...

책읽을 때마다 나에게 나타나는 못된 습관들이다.

그런데...

유인창의 <마흔살의 책읽기>는 나에게 더 이상의 밑줄긋기도 메모도 밑단 접기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대신 나는 살아온 삶에 밑줄을 쭉ㅡ긋고 마음을 고이 접어 그 위에 메모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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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명재전(人命在錢)'

사람의 목숨이 더 이상 하늘에 달려 있지 않고, 돈에 달려 있다는 말이다. 

현대 물질 문명 사회에서 '돈'의 위력은 정말 막강하다. 이는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는 일반 상식이 된지 오래다. 유산 때문에 명절은 더 이상 가족간의 정을 나누는 기회가 아닌 부모 형제간 보이지 않는 힘겨루기의 장이 되었고, 몇 십년 동안 쌓아 왔던 우정이 단 돈 몇 푼에 산산조각 나고 만다. 오히려 이 정도면 다행이다. 돈 때문에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잃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그런데 이처럼 모든 사람들이 돈!돈! 하면서 '부'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은 의외로 적다. 우리나라에서 '부자학'이라는 분야를 처음으로 개척한 서울여대 한동철교수의 <부자학개론>이란 책을 보면, 부자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부자란 돈을 많이 갖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더 이상 돈을 벌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 사람이다.'

모든 이들이 부러워할 만큼 많은 돈을 갖고 있어도 돈을 벌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면 그 사람은 결코 부자가 아니다.  비록 얼마 안 되는 적은 돈을 갖고 있더라도 충분히 쓰고 남아,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진정한 부자라고 한다. 

 

돈을 벌기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무엇을 위해 살까? 그들은 돈이 아니라 자아실현을 위해서 산다. 자아실현을 위해 열심히 살다보니 어느덧 돈을 모으게 되고 명예도 얻고 부도 따르게 된 것이다. 이들을 잘 살펴보면 참으로 담백한 삶을 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돈 때문에 사람을 잃지도 않고 갈등을 빚지도 않는다. 애당초 이들의 삶은 돈을 추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돈을 많이 갖게 되었다고 해서 삶의 방식이 바뀌지도 않는다. 장사를 하던 사람은 계속 장사를 하고 회사에 다니던 사람은 계속 회사에 다닌다. 이런 사람들은 오랜 세월에 걸쳐 부를 이루어 마침내 부자의 반열에 오르고, 이들 중 상당히 많은 이들이 전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고 돌아간다.

 

이와는 달리, 인생의 목표가 처음부터 '돈'인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말 그대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악착같이 돈을 쫓는다. 돈에 대한 이들의 집념은 놀라울 정도로 무서워서 때론 '인간'이기를 포기하기도 한다. 결국, 이들에겐 가족도 친구도 모두 떠나고 오로지 돈만 남는다. 말 그대로 갖은 건 돈 밖에 없는 것이다. 돈 밖에 없으니 우정도 사랑도 돈으로 살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들의 주위에는 돈을 받고 우정을 팔고 사랑을 팔려는 사람들로 넘쳐나게 되고, 결국 이들의 삶은 돈욕심으로 시작해서 돈자랑으로 막을 내리고 만다. 

 

부자가 되고자 한다면 우선 부자의 마인드를 가져야 한다.

부자의 마인드란 다름 아닌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자신이 잘하고 또 좋아하는 일에 혼을 쏟아 부을 줄 알아야 한다. 남들은 모두 하찮게 생각하는 사소한 일에도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고 혼을 담아 낸다. 이들은 타인의 감동을 불러 일으키는 사람들이다.

 

21세기 지식 정보화 사회는 또한 '소통'의 시대이기도 하다. 그리고 소통의 핵심은 바로 동감이요, 감동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사회에서 성공하는 사람들은 다름 아닌 타인을 감동시키는 사람인 것이다. 이들에게 부와 명예는 삶의 목적이 아닌 삶의 결과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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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아버지
옌롄커 지음, 김태성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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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옌롄커의 자전적 수필에 속하는 <나와 아버지>라는 작품은 원제목인 《我与父辈》에서도 알 수 있듯, 옌롄커 아버지 세대에 대한 이야기이자 그들에게 바쳐지는 진혼곡이라 할 수 있다.

 

중국 허난성의 편벽한 작은 시골마을에서 태어난 작가는 큰아버지와 작은아버지를 각각 한 분씩 두고 있다.

이야기는 작가의 유년에 대한 회상과 함께 둘째인 부친으로부터 시작해서 큰아버지 그리고 작은아버지로 이어진다. 사남매의 막내로 태어나 비록 어린시절부터 굶주림과 육체노동에 시달리지만 작가의 유년은 아버지 세대의 보살핌이 곳곳에 깊이 배어 있다.

 

옌롄커은 부친이 수년에 걸친 엄청난 노동을 감수한 끝에 얻은 산비탈의 자경지에 고구마를 심어 수확의 기쁨을 누리기 직전 인민공사로부터 자경지를 몰수당하자, 그 허망함을 못내 견디지 못하고 한줌의 흙처럼 무너지는 부친의 모습을 본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자녀을 배불리 먹이고 결혼시키는 것을 평생의 의무로 여겼던 '부모'라는 이름의 숭고함은 장성한 자녀들에게 번듯한 기와집을 지어주기 위해 한겨울 자녀들을 이끌고 강을 건너 돌들을 져나르던 아버지와 큰 아버지의 모습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부모라고 왜 삶이 힘들지 않겠는가. 고사리손을 내밀며 끼니때마다 숟가락질을 부지런히 해대는 자식들의 그 '입(口)'에 심한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부모'라는 이름이 가져다 주는 삶의 '무거움'는 때때로 절규하며 자식들을 향한 심한 매질로 노름과 자살이라는 일탈적 행동으로 표출되었으리라. 

 

무려 슬하에 팔남매를 둔 작가의 큰아버지는 옌롄커 자신뿐만 아니라 그의 회상에 동참하는 모든 이들에게 참을 수 없는 눈물과 함께 '인성(人性)'에 대한 본질을 직시하게 만든다.

 

큰아버지는 매년 노름을 하면 잃기만 하셨고 잃고 나서도 또 노름을 하셨다. 판돈이 크다 보니 큰아버지는 해마다 택원 하나 또는 새로 지은 기와집 세 채를 날리셨다. 큰아버지는 심지어 아이들을 데리고 북풍한설을 그대로 견디면서 얼음을 깨고 강을 건너가 바위를 깨고 돌을 날라 겨울 내내 피땀 흘려 벌어서 모은 돈을 노름으로 한순간에 날려버리기도 했다. 돈을 다 잃고 나서 큰아버지가 무슨 생각을 하셨으며 무슨 행동을 하셨는지, 마음 속으로 어떤 몸부림과 고통이 있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

 

큰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오시면서 평소와 다름없이 길가에서 아는 사람들과 몇 마디 얘기를 나누셨고, 아이들을 전부 마을 오동나무 밑으로 불러 모은 다음, 주머니에서 사갖고 오신 사탕과 콩엿을 한 무더기 꺼내 한 줌씩 나누어주셨다. 그리고 아이들의 머리와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시고 아이들이 한 무리의 제비처럼 사탕과 콩엿을 먹으면서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확인한 다음, 천천히 발길을 돌려 댁으로 돌아가셨다. 그러고는 곧장 독약을 드셨다. 큰아버지가 입고 계시던 옷의 한쪽 주머니에는 아이들을 위해 산 사탕과 콩엿이 들어 있었고 또 다른 주머니에는 자신을 위해 산 쥐약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농촌의 험난한 삶의 조건에서 벗어나기 위해 작가는 일찍부터 '이터우천(一头沈): 본뜻은 편들기란 뜻인데 허난 사투리로는 장기간 떨어져 사는 부부을 지칭함'인 작은아버지를 따라 신샹의 시멘트 공장에서 임시노동자로 일한다. 그러나 해마다 명절때 근사한 도시의 향취를 실고 고향에 나타나던 작은아버지의 도시 생활 또한 고단하기는 농촌과 매한가지이다.

 

도시에 호구가 없는 농촌출신들은 설령 도시에서 살더라도 영원히 '주변인'일 수밖에 없으며 도시인들의 삶은 그들에게 그저 사막의 '신기루'와 같을 뿐이다. 그러나 농촌에서도 그들은 일찌감치 농촌을 떠난 '외지인'에 다름 아니다. 이를 작가는 '허공에 매달린 삶'으로 묘사하고 있다.


"시골사람의 눈에 도시가 하늘 높이 매달린 천당이고, 농촌은 대지 위의 지옥이라고 한다면 삼촌은 사십여 년에 달하는 인생의 황금기를 허공에 매달린 채 보낸 셈이다.(본문305p)"

 

작가의 부모 세대에 대한 단상은 우리의 부모 세대 혹은 그 바로 윗 세대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도시화와 산업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과정에서 자신의 몫을 챙기지 못한 채, 생존을 위해 한평생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도리와 예절을 잃지 않고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다한 바로 그 모습 말이다.

 

지난 한세기 동안 세상이 아무리 바뀌고 변한다 한들 인간의 가치와 정신은 크게 바뀌지 않았고 또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늘 아래 한 생명으로 태어난 이상, 생명으로서 혼신의 힘을 다해 생존하고 자손을 번창시키는 것. 이것보다 더 중요하고 숭고한 것이 또 무엇이 있단 말인가.

 

참고로 이 작품의 번역에 대해 한마디 덧붙이자면, 역자 김태성은 옌롄커의 작품들을 비록하여 <핸드폰> 등 굵직굵직한 작품들을 많이 번역하여 소개하는 대표적인 번역가라 할 수 있다. 원문에 침잠하지 않으면서도 중국어의 특징을 잘 살린 그의 유려한 번역 문장을 나는 좋아한다. 특히, <나와 아버지>라는 작품은 중국식 표현을 의역하지 않고 의도적으로 직역하여 원문의 분위기와 원작가의 문체를 최대한 고스란히 살리려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2장의 [나의 그 시대]에 등장하는 작은아버지를 5장에서 넷째삼촌으로 옮긴 것은 아무래도 부적절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여러가지 정황으로 볼 때, 분명 동일 인물을 작은 아버지와 넷째삼촌으로 옮긴다면 아무래도 독자의 혼란을 불러올 소지가 충분하기 때문이다. 나중에 원서를 구하게 되면 다시 확인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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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12월20일 현재, 중국어 원문을 확인해 본 결과 옌롄커는 [나의 그 시대]에서 함께 시멘트 공장에서 고생했던 수청(큰아버지의 둘째아들)작은아버지를 각각 '书城'과 '四叔'표기하고 있다. 그러므로 한국어 번역본의 '작은아버지'와는 '넷째삼촌'은 동일 인물이 아닐까 싶다. 이에 대해 해당 출판사 홈페이지에 확인을 요청하는 글을 남겼으나 두 달이 지나도록 정확한 답변을 듣지 못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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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 살의 철학 - 열정의 서른에서 결실의 마흔으로
가와기타 요시노리 지음, 박혜령 옮김 / 토네이도 / 2011년 10월
평점 :
절판


'열정의 서른에서 결실의 마흔으로'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불혹'에 대한 저자의 견해가 평소 내 생각과 엇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옛날 공자가 살던 시절에는 사람이 나이 마흔에 이르면 그 어떤 유혹에도 흔들림이 없다고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요즘도 과연 그럴까? 평균 수명이 늘어난 오늘날 마흔은 안타깝게도 '불혹'이 아닌 '유혹'의 시기에 더 가깝다. 세상을 어느 정도 알고 적당한 사회적 지위과 경제를 부를 갖춘 40대는 남여를 불문하고 멋있다. 그래서 그만큼 유혹도 많고 마음도 흔들리기 쉽다. 

그러므로 '불혹'이란 더이상 '흔들림이 없는 것'이 아닌 오히려 정반대로 흔들리기 쉬운 '유혹'으로 읽힌다.


기와키타 요시노리가 꼽는 마흔살의 철학은 '이게 전부가 아니다'로 요약할 수 있다. 마흔에 접어들면, 이젠 쉬고 싶고 습관적으로 은퇴 이후를 기웃거리게 되는데 이러면 안 된다. 그럴듯한 노년을 꿈꾼다면 스스로에 대한 책직질을 더더욱 늦추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40대의 노력은 2,30대의 노력과는 뭔가 달라야 한다. 2,30대의 노력이 사회적 지위와 물질적인 혜택을 얻기 위한 것이라면 40대의 노력은 자아실현을 위한 것이여야 한다.


돈만 보며 달려가는 인생은 돈만 있는 인생일 뿐이다. 아니 오히려 돈조차 붙들지 못한 채 빈손으로 원망 가득찬 가슴만을 두들길 뿐이다. 돈은 마치 그림자와 같아서 손에 잡힐 듯 하지만 잡히지 않는다. 따라갈수록 그만큼 더 멀리 도망치고 만다. 그래서 돈이 절실하면 할수록 돈을 쫒지 말아야 한다.


중국말에 "女人为钱而变坏,男人有钱而变坏"라는 말이 있다. 의미인즉, 여자는 돈을 위해 나쁘게 변하고 남자는 돈이 생기면 나쁘게 변한다는 뜻이다. 그만큼 사람은 돈에 약하고 또 돈 때문에 변한다.

변하는 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부자가 되면 당연히 빈자 때와는 달라야 한다. 

변하지 않으면 빈자가 부자가 될 수도 없거니와 설령 운이 좋아 부자가 되었다 한들 빈자의 마인드에 머물러 있다면 금방 빈자로 되돌아오고 말기 때문이다.


문제의 핵심은 변하되 어떻게 변하는냐하는 것이다. 좋게 변하면 좋은데 나쁘게 변하기가 쉽다. 주위를 둘러봐도 돈 없던 사람이 정당한 방법이건 그렇지 않건 간에 돈을 갖게 되면 열에 아홉은 변하기 마련이고 또 대부분은 나쁜 쪽으로 변한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마흔에 접어 들면 조급해할 것이 아니라 담백하고 단순한 삶을 추구해야 한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에 과감히 도전도 해보고, 자신이 잘 하는 분야에 더욱 매진해서 일가견을 이루도록 힘써야 한다. 즉, 매슬로우의 인간욕구 5단계(생리적욕구-안전의 욕구-사회적 욕구-존경의 욕구-자아실현의 욕구) 중, 최고 단계인 '자아실현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할 때가 바로 사십대인 것이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 즐겁고...즐거우니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주 하게 되니...더욱 더 잘 하게 되고... 이러다 보면, 명예도 얻고 돈도 얻게 되는 것이다. 설령, 돈도 명예도 얻지 못했다 해도 아쉬울 하나 없다. 그만큼 자신만의 삶을 살았기에 삶에 대해 만족하고 스스로의 존재가치를 추구했기에 자존감 또한 크기 때문이다. 

 

무릇, 나이들수록 멋있어지는 사람은 자존감이 큰 사람이다. 이런 자존감은 젊은 시절의 오기나 패기와는 분명 다르다. 오기나 패기는 사람을 역동적으로 만들긴 하지만 때론 부담스럽고 불편하다. 중년에 이르러서도 오기나 패기로 가득한 사람들은 주변사람들에게는 그저 피하고 싶은 골치덩이일 뿐이다. 청년의 열정이 폭발적인 에너지와 불굴의 도전 정신으로 구현된다면 중년의 열정은 은근과 끈기 그리고 연륜으로 승화되어야 한다.

 

채우려면 우선 버려야하다.

버리지도 못하면서 채우려고만 한다면 줄줄 흘려 넘친 술잔처럼 품위가 없다. 자기 스스로에겐 엄격하되, 주변과 공동체에 대해서는 너그러워야 한다. 종종 나이 들어서 보이는 '노욕(老慾)'은 역겹다 못해 사람을 서글프게 만든다. '노욕(老慾)'이라고 해서 뭐 대단한 것도 아니다. 지하철에서 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는 것도 노욕이요, 노인석 비어있는데도 불구하고 일반석에 앉아 젊은이들 서있게 만드는 것도 바로 노욕이다. 자식 며느리에게 연락 자주 안한다고 불호령을 내는 것도 노욕이요, 주말마다 불러내는 것도 노욕이라면 노욕일 것이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나이 들어가면서 가장 하지 말아야 할 것은 '돈욕심'과 더불어 '돈자랑'이다. 

 

기와기타 요시노리의 <마흔살의 철학>은 마흔을 위한 책이라기보다는 삼십대를 위한 책이 아닐까 싶다. 삼십대 중반부터 다가올 '마흔'에 대비해야 한다. 정신적으로 나태해지지 않도록 또한 정서적으로 공허해지지 않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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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바꾸는 글쓰기 공작소 - 한두 줄만 쓰다 지친 당신을 위한 필살기 이만교의 글쓰기 공작소
이만교 지음 / 그린비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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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러시아 브랜디의 <작가수업>부터 <소설쓰기의 모든 것1,2>, 윌리엄진서의 <글쓰기 생각쓰기>까지 그러고보니 그동안 접한 글쓰기 관련 책들이 하나같이 외서에 편중되어 있었다. 의도적으로 외서만을 찾아 읽은 건 아니었는데 어찌하다보니 그리 되었다. 그러다가 독서목록에도 올라와 있지 않던 책을 만나게 되었다. 아마 윌리엄케인의 <거장처럼 써라>라는 책을 빌리러 갔다가 그 책 대신 집어든 책이었다. 우선은 한국인의 관점에서 쓰여진 '글쓰기론'을 접해보고 싶었던 마음이 컸고, 그 다음으론 유난히 두툼한 두께에 홀렸다고나 할까. 작가의 작품이나 영화를 접한 것은 아니었으니 책을 선정하는 데 있어 지은이의 영향력은 0%에 가깝다.

 

      

 

참고로, 이만교는 2005년 영화로도 만들어진 '결혼은 미친짓이다'라는 작품의 원작자로 나름 지명도를 갖고 있다. 유쾌하고 발직한 작품으로 알고 있는데, <글쓰기 공작소>를 통해 언뜻 느낀 그의 글쓰기 자세는 결코 발직하지도 가볍지도 않았다. <글쓰기 공작소>에서는 다양한 예문을 통해 글쓰기의 잘잘못을 지적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등 글쓰기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구체적이고 방법들이 제시되어 있다.


그렇지만 글쓰기 공작소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가장 큰 가르침은 바로 글쓰기의 방법이 아닌, 글쓰기 자세가 아닐까 싶다. 작가 역시 깊이 있는 사유와 주제의식이야 말로 글쓰기의 핵심이라고 일갈하고 있다. 


좋은 글이란 자기 자신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이고,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깊이 있는 독서를 통해 씨앗문장과 씨앗도서를 갖고 있어야 한다.


무릇, 글쓰기의 시작은 글읽기에서 시작한다. 그런데 독서도 올바르게 해야지 호기심이나 관심분야만을 기웃거려서는 결코 좋은 독서력을 키울 수 없다. 저자인 이만교는 밑줄긋기를 통해 사유의 폭을 넓히고, 이를 글쓰기의 씨앗문장과 씨앗도서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특히, 그가 깊은 감동을 받은 씨앗도서 <전태일 평전>은 시간을 내어 곱씹어 읽어 보아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언치에서 벗어나기 위해 언어를 갈고 다듬는 '조탁'을 게을리 하지 말고, 일상언어와 관용구의 사용을 피해야 한다.


글쓰기를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뛰어난 통찰력을 발휘하고 있다.  소설지망생들의 가장 큰 실수란 언어에 대한 감수성이 빈약하고 평소 사용하는 일상언어를 그대로 문장속에 옮겨놓는다는 점이다. 사실, 출판언어는 일상언어와는 달리 오로히 문자만으로 독자와 소통해야 한다. 그러므로 글쓰는 사람이라면 훨씬 더 명징하고 적확한 단어와 표현을 선택해야 한다.


감수성이 무디어지면 다수언어가 된다. 그러므로 창작언어를 구사하는 소수가 되어야 한다.


글쓰기의 대가들이 한결같이 강조하는 부분이다. 상투적인 표현을 피하고 색다른 표현을 창조해내야 하고 언어의 창조성은 예리한 감수성을 통해 표출된다. 언어에 대한 감수성은 글자 하나 단어 하나 표현 하나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집착하는 과정을 통해 키워진다. 이만교에 따르면 '언어는 너무나 다양하고 너무나 섬세하고 너무나 예민해서 단 한 글자도 허투루 나오지 않으며 단 한 글자도 속일 수 없으며, 한 문장 한 문장의 변화가 곧 내 삶의 한순간 한순간의 변화일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언어를 매만지는 자세가 숭고하고 웅숭스럽기 그지없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좋은 글은좋은 소재(글감)만으로는 부족하다. 문제의식 즉 주제의식을 갖고 있어야 좋은 글이 탄생한다. 잊지말자! 소설의 3요소는 주제, 구성(플롯), 문체임을...


흔히, 사람들은 자신이 살아온 삶을 책으로 엮으면 대하소설이 될 것이라는 말들을 종종 한다. 그렇지만 매우 진귀하고 독특한 체험을 한 사람들이 모두 책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는 소재의 부재가 아닌 주제 의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주제의식은 어떻게 갖을 수 있을까? 세상과 사람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와 애정이 아닐까 싶다. 나에게 가장 부족한 것 역시 주제 의식의 부제를 들 수 있겠다. 


장르나 신춘문예 등과 같은 결과에 집착하지 말고, 글쓰는 과정 자체를 즐겨야 한다.


저자는 솔직히 고백한다. 글쓰기를 가르치면서 '염불보다는 젯밥에 관심이 있는 이들'을 많이 만나게 되노라고. 그런데 젯밥에 관심을 기울이면 기울일수록 염불 외는 실력은 형편없어 지고, 실력이 없으니 좋은 결과를 얻기란 불가능하다. 열심히 온마음 다해 좋을 글을 쓰기 위해 노력하다보면 그 과정의 끝에 등단이나, 문예지 당선 및 출판 등등이 자리하고 있는 법이다.


겉으로는 열심히 치열하게 읽고 쓰고 고민하는 듯하지만, 그것이 결코 열심히 치열하게 읽고 쓰고 고민한 것이 아닌 경우가 얼마든지 많다. 열심히 읽은 것이 아니라 조급하게 읽었거나, 많이 읽은 것이 아니라 방만하게 읽었거나, 성의껏 쓴 것이 아니라 욕심껏 쓴 것이거나, 자기 도약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자기 도취에 빠져쓴 것이거나, 치열하게 고민한 것이 아니라 치졸하게 고민한 것이거나, 다양하게 고민한 것이 아니라 산만하게 고민한 것이거나, 혼자만의 시잔을 가진 것이 아니라 혼자뿐인 시간을 가진 경우, 그러한 노력은 허사다. (...) 경험으로 미루어 보건대, 참으로 많은 학생들이, 그리고 나 자신조차도 참으로 자주, '열심히'와 '조급히'를 혼동하고, '최선을 다해'와 '욕심을 다해'를 혼동한다. '자기만의 생각'과 '자기만의 고집'을 혼동하고 '독창적인 글쓰기'와 '독선적인 글쓰기'를 혼동한다. '고독한 창작생활'과 '고립된 창작생활'을 혼동한다.

-이만교, <나를 바꾸는 글쓰기공작소>中-


나 역시 사유하기 위한 책읽기가 아닌, 그저 바삐 기록하고 자랑하기 위한 자아도취적 책읽기를 해온 건 아니었는가? 분명 그런 마음이 조금도 없다고는 대답하지 못하겠다. 남의 지식을 소화시키지도 못하면서 너무 욕심껏 섭취한 것은 아니었는지... 알량한 글쓰기 솜씨를 자기자신에게라도 뽐내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는 속물이자, 염불보다는 젯밥에 관심이 많이 어중이에 불과했던 스스로를 깊이 반성해본다. 벌써, 오늘 아침에도 블로그에 독후감을 남기기 위해 얼마 남기 않은 책장을 쏜살같이 달려가지 않았던가. 눈과 마음으로 읽지 않고 쓰지 않은 문장들은 오롯히 '내'것이 아닌 '남'것임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하고 있으니 아직 가야할 길이 멀고도 멀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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