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고 굵게 읽는 러시아 역사
마크 갈레오티 지음, 이상원 옮김 / 미래의창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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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우크라이나를 침공 중인 푸틴 덕분에(?) '러시아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러시아 정부가 인정하는 공식 역사책은 너무 두꺼운 반면 실제 러시아 역사는 천년 밖에 되지 않아 놀랐다.

그나마도 북방 민족이 남하하여 우크라이나 키예프(키이우)을 중심으로 들어선 '루시'가 그 시초란다.




류리크공이 라도가 호숫가에 도착하는 모습을 그린 빅토르 바스네초프의 그림은 고전으로 인정받는 작품이다. 12세기 당시를 기록한 유일한 문헌인 <원초연대기>는 스칸디나비아 바이킹(원문에서는 이들을 '바랑기아인들'이라고 표기하고 러시아어로는 '바랴그'라는 명칭이 있다. 이 책에서는 우리에게 더 익숙한 바이킹으로 통일한다-옮긴이)을 몰아내기 위해 슬라브 민족들이 수차례 전투를 벌였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추드, 메리아, 라디미크, 크리비크 등 무수히 많은 토착 부족들의 자치 시도는 또 다른 전쟁으로 귀결될 뿐이었다. 법과 서열, 영토에 대한 합의를 이루지 못한 이들은 바이킹에게 가서 통치자를 청했다. "저희 땅은 드넓고 비옥합니다만 질서가 없습니다. 와서 우리를 통치해주십시오."

그리하여 류리크(862?~879)의 통치가 시작되었다. 류리크 왕조는 17세기까지 러시아를 지배했다. 바스네초프의 그림을 보면 용 머리가 특징적인 바이킹 배를 타고 온 류리크가 형제와 수행원들을 이끌고 라도가 호숫가에 내려선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손에 든 도끼는 그가 전사공후라는 것을 강조한다. 새로 지배를 받게 된 슬라브족 대표단이 예의를 갖추고 이들을 환영한다.

이 그림은 바이킹의 뾰족한 투구며 슬라브족의 옷에 놓인 전통적 자수에 이르기까지 매우 구체적으로 충실하게 당시를 재현한다. 새로운 지배자에게 새로운 신민들이 공물을 바치는 장면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하지만 동시에 이는 명백한, 매우 명백한 거짓이기도 하다. -20~21쪽




당황스러웠다.

첫 페이지부터 '거짓의 역사'라고 선언하고 시작하는 역사책이라니....

시차만 11시간이 나고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있는 거대한 영토를 보유한 러시아만큼 이해하기 어려운 나라도 다시 없을 것 같다.


'강대국인가?' 하면 국제 무대에서 늘 조연이고, '선진공업국인가?' 하면 무기를 제외하곤 'Made in Russia'는 눈씻고 찾아도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고 '땅만 큰 대국인가?' 하면 세계 최초로 달착륙에 성공했고, '문명의 후발주자인가?'하면, 톨스토이와 <백조의 호수>의 나라다. 그만큼 러시아는 땅크기만큼이나 다면적일 뿐만 아니라 다층적이기도 하다.

거칠고 야성적이면서도 섬세하고 정이 넘치는 이들은 도대체 누구이며 이들의 역사는 언제부터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류리크는 도레스타드의 로릭, 즉 프랑크 왕국의 루도비쿠스 경건왕에게 미움을 사서 860년에 추방된 덴마크의 야심가로 추정된다. 류리크의 도착 시기(860~862)가 서구 연대기에서 그가 사라진 시기와 딱 들어맞기 때문이다. 스칸디나비아의 침략자 겸 상인들은 오래전부터 슬라브 땅을 알고 있었다. (...) 고향을 떠나야 했던 도레스타드의 로릭이 슬라브 지역을 새로운 공국으로 삼으려 했으리라는 점은 쉽게 짐작 가능하다. 그는 우선 라도가에 성채를 지어 정착했고 내륙의 교역 거점을 차지해 홀름가르드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곳이 바로 고대 러시아의 중심지 중 하나인 노브고로드('새로운 도시'라는 뜻)가 된다. 하지만 그가 슬라브인들의 초청을 받았다는 증거는 나온 적 없다. 류리크의 여정은 스칸디나비아인들이 남쪽과 동쪽으로 이주한 큰 흐름의 일부일 뿐이다. -22쪽

류리크가 노브고로드에 정착할 즈음 아스콜드와 디르라는 바이킹 모험가 두 사람이 부하들을 이끌고 남서쪽 슬라브 도시인 키예프를 점령했다. 이곳을 근거지로 삼아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한다는 야심한 계획은 결국 실패로 끝났다. 이보다 반세기쯤 앞서 남쪽의 흑해변을 약탈한 스칸디나비아 출신 모험가들도 이미 시도했던 일이었다. 슬라브인들은 이들 바이킹 정복자들을 '루시'라 불렀고(스웨덴 인을 뜻하는 핀란드어 단어 '루오치(Ruotsi)'에서 나온 것 같다), 그래서 루시의 땅이 탄생했다. -24쪽




지도를 찾아보니, 노브고로드는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 중간 쯤에 위치해 있었고, 키예프는 현재 우크라이나 수도인 키이우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표트르 대제가 18세기 초 유럽식 도시로 건설한 새로운 도시였고, 모스크바는 사냥꾼들의 움막 몇 채가 모여있던 작은 촌에 불과했으나 13세기 몽골 지배기에 킵차크 한국의 중심지(사라이)로 공물을 보내는 중계지역 역할을 수행하게 되면서 그후 제국의 수도로 성장하게 된다.



러시아 민담에 계속 등장하는 것이 삼형제 이야기다. 형제들은 레크, 체크, 루스인데 폴란드(레히트인들이라고도 불렸다), 체코, 루시라는 슬라브 세 민족의 시조를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삼형제가 등장하는 대부분의 민담에서 한 명은 강하고 공정한 이로, 또 다른 한 명은 영리한 모험가로, 그리고 막내는 아주 나쁜 놈이나 신심 깊은 바보로 등장한다.

이와 연결시켜 보자. 옛날 옛적에 세 도시가 있었다. 이 세 도시는 러시아가 택할 수 있었던 각기 다른 세 가지 길을 대표했다. 키예프는 가장 위대한 도시인 동시에 가장 전통적인 봉건적 중심지였다. 그 권력은 가문의 혈통을 통해, 그리고 키예프가 루시의 심장이자 영혼이라는 믿음을 통해 표현되었다. (...) 노브고로드는 북쪽에 위치한 교역 동시로 발트해의 부유한 국제항구들에까지 영향력을 떨쳤다. 돈 많은 시민 대표들, 그리고 과두제 민주주의가 큰 힘을 발휘했다. (...)

키에프와 노브고로드의 전성기 시절 셋째이자 막내인 모스크바는 도시라 부르기도 어려운 형편이었다. 모스크바에 대한 첫 기록은 유리 돌고루키('긴 팔의 유리'라는 뜻)가 키예프 대공이 되기 전인 1147년, 거기서 한차례 모임을 주재했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몽골인들이 몰려오자 키예프는 파괴되고 노브고로드는 몰락하면서 모스크바가 번성기를 맞이했다. 루시 전체의 주인이 되었을 뿐 아니라 러시아 전통, 몽골 관행, 모스크바 특유의 실용주의가 결합된 정치 문화의 본거지가 된 것이다. -44~51쪽 중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역사적으로 피를 나눈 형제이기 때문에 분리될 수 없다'라는 푸틴의 주장은 맞다. 그렇지만 이 주장은 동시에 러시아의 시조는 키예프, 즉 우크라이나고 우크라이나는 바이킹에 의해 세워졌다는 말과 이어진다. 러시아만의 전통을 내세우며 러시아 민족주의를 내걸고 있는 푸틴에게, '러시아의 전통이 무엇인가?' '과연 독립적인 러시아의 전통이라는 게 있는 걸까?'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블라디미르의 케르소네소스 정복은 러시아의 2014년 크림합병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크림반도를 러시아 정교의 품에 다시 넣어야 한다는 것이다. 돈바스 지역에서 전투가 한창이던 와중, 모스크바와 키예프 역사학자들 사이에도 전쟁이 벌어졌다. 블라디미르 대공을 어느 쪽 선조로 볼 것인가를 둘러싼 논란이었다. 키예프 대공이라 한다면 오늘날 러시아의 정신적 조상이 우크라이나인이 되어 버린다. 다른 한편 류리크 왕가 혈통을 강조한다면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절반만 피를 나눈 관계가 될 것이었다. 이처럼 고대 역사, 민족 신화, 현대 전쟁은 생각보다 훨씬 더 밀접할 수 있다. 루시의 땅에서는 특히나 그렇다. -44쪽




안타깝게도 러시아는 자신만의 정체성을 강조하면 할수록 정체성 자체가 흐릿해지는 딜레마에 빠져버린다. 그래서 그들은 끊임없이 역사 위에 역사를 덧씌워 재생산해냈다. 하지만, 감추고 싶고 지우고 싶은 과거일수록 끈질기에 오래 살아 남는다. 역사란 바로 그런 흔적의 기록이다.



이 짧디 짧은 책을 읽으면서 마음은 여러 차례 답답해졌다. 마치 '아비를 아버지라 부를 수 없는 홍길동'을 보는 것 같다고나 할까. 분명 유럽을 기원으로 뒀고 유럽의 일원임을 내심 바라지만 유럽을 적으로 삼고 존재감을 과시하려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이 바로 오늘날 역사와 전통을 강조하는 민족주의국가 러시아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진심은 언제나 유럽 속에 있어왔고 지금도 그렇다는 걸 감안한다면 러시아의 타자화는 서양에 의한 동양의 뿌리 깊은 차별의식이 얼마나 단단하게 고착되어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이른 바 '몽골 멍에' 시기는 러시아 스스로 상상하는, 또한 많은 외부인들이 바라보는 러시아 모습의 핵심을 이룬다. 몽골의 압제가 러시아를 유럽과 단절시켜 당시 진행되던 르네상스와 초기 종교개혁에서 소외되었다고들 한다. 당대의 문화, 사회, 경제, 종교적 변화를 경험하는 대신 불쌍한 러시아인들은 '몽골의 노예라는 피투성이 늪'(칼 마르크스의 표현이다)에 빠져 허우적대야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아시아적'통치 형태, 즉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최상층이 극단적인 잔혹함을 무기로 하위층에 절대 복종을 요구하는 무자비한 형태를 내면화했다. 몽골 제국과 가장 긴밀히 연결되었던 모스크바는 가장 열정적으로 그 정치 문화를 수용했고 러시아 땅을 통일하는 과정에서 같은 방식을 적용했다.

그랬을 수도 있다. 어느 정도는 사실에 부합하나 전체 그림에서는 일부분일 뿐이다. 무엇보다도 몽골의 정복이 러시아를 외부와 차단시키지는 않았다. 상인과 사절단, 망명객과 선교사들은 여전히 오갔다. 노브고로드는 발트해에서 확고한 지위를 유지했고 모스크바 공후들은 콘스탄티노플, 리투아니아 양쪽과 정략 결혼을 했다. 러시아가 고립되었다면 이는 울창한 산림을 동서로 통과하는 강의 수로가 없었다는 점, 그리고 러시아가 상대적으로 빈곤했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몽골 지배를 벗어난 후 러시아에 르네상스의 기미가 조금이라도 있었을까? 이탈리아와 네덜란드 도시들에서 시작된 르네상스는 농작물의 생산 증대, 그리고 상인 계층 및 도시 인구의 급성장이 낳은 결과물이었다. 몽골 침략은 분명 러시아의 도시화나 도시 중심의 장인 경제를 후퇴시켰다. 공물 부담이 커지면서 교역이나 농경 확대도 힘들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러시아의 깊은 산중에서 르네상스를 기대하기란 어려웠다. -65~66쪽




13세기 몽골의 유럽 침략은 공포 그 자체였다.

듣도 보도 못한 말발굽들이 돌풍처럼 나타나 살아 숨쉬는 모든 것들을 멸절시키더니 어느날 돌연히 사라져버렸다.

정확한 공포의 실체를 알지 못했기에 유럽은 오랫동안 심지어 현재까지도 몽골 침략에 대한 트라우마가 남아 있다. 그리고 그 후유증에서 동반된 신경증은 유럽의 동쪽 끝에서 방패막이 역할을 했던 러시아로 향했다.


어찌됐든 러시아는 비잔티제국 멸망 후 제3의 로마로 자처하면서 고대 그리스와 유럽의 정통성을 계승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러시아 정교회 속에는 슬라브, 바이킹, 타타르 뿐만 아니라 다양한 북방의 소수민족의 전통까지 녹아들어가 있다. 러시아는 이 자체로 충분히 가치있고 존중받아 마땅하며 스스로 자랑스러워할만 하다. 그러나 이후 펼쳐진 유럽의 근대산업화에 러시아가 뒤처지면서 이에 따른 질투와 선망이 교차하면서 유럽의 대 아시아 신경증은 이제 러시아 자신에 전염되어 종종 히스테리를 동반한 고질병이 되고 만다.



오스트리아 외교관 지그문트 폰 헤르베르슈타인이 이반 4세에 대해 쓴 글을 보면 대귀족들이 "그 찬란한 위업에 압도되거나 공포에 질려서 복종했다"고 나온다. 아마 후자의 경우가 더 많았을 테지만 한 개인의 권력이 공포에 기반한 것이라면 그 권력은 유지하기 어렵다. 이반 3세와 4세는 신이 권리를 부여한 전제군주정의 이념적, 제도적, 더 나아가 미학적 기반을 만들었다. 그러나 농민에서 대귀족에 이르는 러시아인들이 이런 통치자를 혼란과 굶주림, 외적 침략에 대한 대안으로 감사히 받아들이기까지는 '동란의 시대'라는 총체적 위기가 필요했다.

결국 1613년 젬스키 소보르(전국회의)가 16세의 미하일 로마노프에게 통치권을 주었다. 차르를 원하고 필요로 한 끝에 마침내 차르를 만들어낸 것이다. 미하일 로마노프는 키예프 루시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유서 깊은 가문 출신에 강력한 총주교 필라레트의 아들이라는 점에 이르기까지 손색 없는 인물이기는 했다. 하지만 진실은 지친 러시아가 안정된 미래를 원했다는 데 있었고 미하일은 바로 그 안정을 줄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1645년까지 통치했으며 그의 왕조는 1917년까지 지속된다. -92쪽




레닌과 스탈린 그리고 옐친과 푸틴도 모두 위와 같은 '동란의 시대'에 등장했던 어린 미하일처럼 러시아인들에게 받아들여진 통치자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의 집권으로 혼란은 가라앉았지만 그만큼 사회적 역동성과 발전 가능성은 사라졌다. 러시아와 러시아인의 비애는 바로 이와같은 양극단을 역사적으로 반복하고 있다는 데서 기인하는 건 아닐까.


러시아는 유럽을 향한 애정과 질투를 멈춰본 적이 없다.

표트르 대제는 수염을 깎지 않는 사람들에게 수염세를 매기겠다고 엄포하면서까지 유럽을 따라했지만 전근대적인 농노제에 대한 고민은 없었다. 예카테리나2세는 독일계로 러시아 왕가에 시집을 와 남편 암살 후 왕위에 올랐던 인물로, 통치 자체보다는 볼테르 등 유럽의 지식인과 나눈 서신 등으로 유명하다. 비록 여왕은 충분히 근대적인 교육을 받은 유럽혈통임에는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그녀의 통치로 러시아가 근대화되거나 유럽을 따라갈 수 있었던 건 아니었다.


19세기와 20세기의 러시아 역사는 침략과 전쟁의 역사로 이어졌다. 피해는 엄청났지만 승리로 끝나는 이상한 희비극이 연달아 일어나면서 러시아인들의 정신 세계 또한 분열되었다. 과거와 단절하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지도, 영광의 역사 위에 새로운 역사를 쌓아올릴 수도 없는 어정쩡한 상태에 빠져버린 것이다.



나폴레옹과 싸워 거둔 승리는 러시아 체제의 근본적 유효성을 중명하는 편리한 신화로 자리 잡았다. 보로지노 전투 이후 나폴레옹은 "프랑스는 승리할 자격이 충분함을 보인 반면 러시아는 아무도 꺾을 수 없는 존재임을 보였다"라고 썼다. 독이 든 찬사가 아닐 수 없다. 아무도 꺾을 수 없는 존재라고 스스로 확신하는 체제는 위험에 빠지는 법이다.

그 체제의 가장 젊고 총명한 이들이 정반대의 결론을 내는 상황이라면 두 배로 더 위험하다. 예카테리나 시대 이후 프랑스어, 프랑스 문학과 사상은 교양의 핵심이었다. 교육받은 엘리트 출신 젊은 장교들은 혁명 시대의 사상에 열광했고 프랑스에서 직접 이를 경험했다. 게다가 알렉산드르 1세 통치 초기에는 러시아에도 곧 변화가 찾아와 보수적 반동이 척결되리라는 희망이 가득했다. 질서정연한 표면 아래에서 비밀 결사체, 급진 정치세력, 모반 세력이 활발히 움직였고 입헌군주제를 옹호하는 이들도, 곧장 공화제로 가야 한다는 이들도 나왔다. 1820년대가 되자 무장 봉기만이 변화를 일으킬 유일한 희망이라는 결론이 도출되었다. 심지어 1825년 12월로 거사 날짜까지 잡혔다. 이 때 신은 알렉산드르 1세에게 죽음이라는 자비를 베풀었다. 예정된 봉기 한 달 전에 티푸스로 사망한 것이다. -152쪽




근대를 향해 달려가던 유럽은 내부 모순으로 구체제가 무너져내리고 있었는데, 이때 러시아의 니콜라이 1세는 유럽의 수호자 역할을 자임한다. 대포와 함대를 보유하고 있는 나라의 내전을 정리해주겠답시고 갑옷을 입고 창을 둔 중세 기사가 등장한 형국이 아닐 수 없다.

당시의 러시아는 풍차를 보고 달려드는 돈키호테의 모습에 다름 아니었다.



니콜라이 1세는 재위 기간 대부분에 걸쳐 성공적인 전사-차르였다. 그는 러시아군에 열정과 시간, 그리고 어마어마한 돈을 쏟아 부었다. 전체 인구가 6~7천만 명인 가운데 군 규모는 백만 명에 육박했다. 하지만 외양 꾸미기를 진짜 전투 능력 효율화로 착각하고 있었다는 점이 곧 드러났다. 알렉산드르 1세가 그랬듯 니콜라이 1세도 전 세계의 전통 질서를 수호해야 한다는 책무를 느꼈다. 그리하여 러시아는 동료 군주들이 혁명의 불씨를 짓밟아 끌 수 있도록 도와주러 달려가는 '유럽의 헌병'으로 불리게 되었다. 1831년에는 폴란드 반란을 진압했다. 러시아가 폴란드인들의 헌법적 권리를 짓밟은 탓에 일어난 반란이었다. 한때 자기 의회까지 갖춘 왕국이던 폴란드가 임명된 러시아 총독이 다스리는 지역으로 격하되어 버렸던 것이다. 1848년, 유럽 각지에서 혁명이 일어났을 때도 러시아는 내부적으로 최악의 흉작으로 기아에 시달리고 콜레라가 유행하는 상황이었음에도 과거 질서 수호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군대를 파견했다. 1846년, 오스트리아를 도와 크라코프 자유 도시 봉기를 진압한 니콜라이 1세는 1848년에 몰다비아 민족 운동을 분쇄하고, 1849년에는 합스부르크 제국에 러시아 군을 보내 헝가리 혁명을 지지했다.

다시 한 번 쌍두 독수리는 양쪽을 바라보았다. 니콜라이는 신의 뜻에 거스르는 불법적 자유주의로부터 유럽을 구해내는 동시에 유럽 사상으로부터 러시아을 보호하고자 했다. 서구 과학 기술의 발전상을 알고 있었으므로 유용한 것들은 도입하고자 했지만 그 유용한 것을 낳은 사회적, 정치적, 법적 맥락은 외면했다. 투자 자본을 만들 상인 계층이 번성하지 못한 상황, 대학과 교육계에서 자유로운 토론으로 아이디어를 만들지 못하는 상황, 그리고 혁신가와 회의론자가 새로이 등장할 사회적 이동성이 확보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러시아는 영원히 뒤처진 채 남들의 발명품을 도입하고 적응하려 애써야 할 형편이었다. -157~158쪽




러시아의 역사는 최소 500년 뒤늦게 시작되었다. 이건 아마도 지리적으로 외지고 척박한 자연환경 때문에 지역간 교류와 인구증가가 미흡했고 곡물생산도 뒤떨어져서 국가의 기틀이 뒤늦게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거친 환경에서 살아남은 러시아인들은 기질적으로는 유럽인에 비해 자부심이 대단했다. 물론, 신체적으로도 부족하긴 커녕 우월할 확률이 높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에 어울릴 만한 국가 체제는 갖추지 못했고 경제적으로도 여전히 후진적이었다. 또래 집단에 체구만 큰 미숙한 아이가 한 명 있는 셈이다. 뭔가 불안하고 조마조마하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었다. 그리고 때마침 바로 이때 한 인물이 나타난다.



1917년에 권력을 잡은 인물은 '실용주의자 레닌'이었다. 그는 러시아가 정치적으로 성숙한 거대한 노동계급을 갖추지 못했고, 아직 사회주의를 건설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마르크스가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준비 안 된 나라에 사회주의를 억지로 도입했다가는 보수적인 성향에 혁명 에너지만 넘치는 정권을 낳는 역효과가 나타난다고 경고했음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이 경고가 옳다는 것은 스탈린이 증명했다.) 레닌은 기회를 포착했고 이데올로기를 동원해 권력 획득을 정당화했다. 어차피 세계 혁명이 곧 일어날 테니 모든 일이 순조롭게 귀결되리라 생각한 것이다. -182쪽




러시아 혁명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앞의 몇 권의 책에서 차고 넘치도록 읽고 적었으므로 여기서 또다시 반복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레닌의 희망은 희망으로 그쳤고 소비에트민주공화국연방은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 체제로 돌아선다. 일당독재를 넘어 일인독재는 2차세계대전(러시아식으론 '대조국전쟁'이라고 부른다)의 승리로 면죄부를 받는다. 또다시 승리는 러시아 편이었고, '절대 지지 않는 나라'라는 명성은 공인되었고, 이런 뜻밖의 전쟁과 승리의 역사가 오늘날 러시아인에게 어떤 유전인자를 물려줬을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으리라.

레닌 사후 러시아는 국가사회주의체제로 이행해 빠른 경제성장에 올인했고 '또다시' 성공한다. 이 역시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성공이었다.


스탈린의 뒤를 이은 흐르시초프와 브레즈네프까지 30여 년 동안 러시아는 마치 스스로 이룬 성취가 외부 세계로부터 오염되는 걸 막기라도 하려는 듯 스스로 크렘린이라는 요새에 갇혔다.


자체적인 봉쇄와 고립이 성공적으로 장기간 지속될 수 있었던 데에는 당시 국제 상황이라는 운도 따랐다. 1970년 대 중동 위기로 러시아의 천연가스 가격이 고공 행진을 하면서 국민들을 충분히 먹여 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경제는 성장을 멈췄지만 등 따뜻하고 배부른 국민들을 러시아 관영TV 앞으로 끌어모으기는 쉬웠다.

하지만 이런 가식적인 평화도 오래가지 못했다. 러시아의 고질병이 도진 것이다. 또다시 경찰 역할을 자임하고 나서면서 다른 나라의 분쟁에 개입한 게 화근이었다.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폭발 등은 전세계의 이목이 순식간에 소련에 향하도록 만들었음과 동시에 견고했던 크렘린이라는 요새에 수많은 금이 가있다는 것도 노출시켰다.


고르바초프는 소련을 좀더 현대적인 나라로 만들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선 개혁 개방이 필요했는데, 개혁 개방은 오히려 그동안 감춰뒀던 러시아라는 국가의 단점들을 낱낱이 공개하는 계기가 되어 버렸고, 결국 소비에트연방은 해체된다.



1990년대는 '제2의 동란의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배고프고 지친 인민들을 이끌어줄 새로운 지도자, 모욕받은 러시아인의 자존심을 일으켜 세워줄 강력한 차르가 또다시 필요한 순간이 도래한 것이다. 그리고 혁명이 필요한 순간에 레닌이 있었듯, 바로 이때 적임자가 나타난다.



물론 푸틴과 관련해서 이야기할 것은 훨씬 더 많다. 때로 지나치게 남성성을 드러내는 성향에 대해, 반대 세력을 극단적으로 (더 나아가 치명적으로) 억누르는 동시에 다른 이들에게는 너그럽고 심지어는 조력하기까지 하는 이중성에 대해, 네 번째 대통령 임기가 끝나는 2024년 이후 또 다른 집권 가능성을 모색할지, 은퇴할 것인지 등에 대해 말이다. 러시아의 남다른 역사에 남겨진 큰 흔적으로 볼 때 푸틴은 차르나 서기장보다 더 많은 분량을 할당 받아야 마땅하지 않겠는가는 의문도 가능하다. 물론 국가를 안정시키고 세계 무대에서의 적대적인 역할, 더 나아가 심통 부리는 역할을 되살렸다는 면에서 그는 충분히 인정받을 만하다. 그러면서도 이반 뇌제나 (그보다 한층 더했던) 스탈린처럼 사람을 많이 죽이지 않았고 표트르 대제처럼 실제 모습보다 과장되지 않았다. 레닌이나 안드로포프처럼 냉정한 지성을 지니지 않았고, 예카테리나 여제나 드미트릴 돈스코이처럼 예민한 정치 본능을 갖지도 않았다. 이는 푸틴을 깎아내리려는 것이 아니라 제 자리에 세우려는 것이다. 그가 러시아 역사를 새로 만들고자 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승리를 극대화하고 비극은 최소화하는 공식판 역사를 초중등교과서와 대학 강좌들은 점점 더 수용하게 될 것이다. 스탈린은 꼭 필요했던 산업화를 이룬 전시의 지도자가 되고 굴라크 이야기는 밀려나게 될 것이다. 푸틴은 이 새로운 공식 역사가 "내부 모순이나 이중 해석의 여지를 없애야"한다고 요구했다. 진정한 역사란 그처럼 말끔한 모습이어야 한다는 듯이 말이다.

푸틴이 러시아의 이미지와 역사 기록을 통제하려 한 첫 번째 인물은 아니다. 드미트리 돈스코이도 말 잘 듣는 연대기 기록가들을 두었고, 예카테리나 여제는 유럽에 비친 러시아의 모습을 신중하게 관리했으며 알렉산드르 3세 치세 때의 '관제 민족주의' 열풍은 이의를 제기하는 골칫거리 학자들이 입 다물고 따르도록 만드는 조치를 동반했다. 가장 충격적인 사례는 스탈린이 편집해 1938년에 출판한 <모든 연합 공산당(볼셰비키)의 역사: 속성과정>이다. 살아있는 사람들이 기억하는 역사를 뒤바꾸려는 시도였기 때문이다. 이후 20년에 걸쳐 67개 언어로 4백만 부 넘게 인쇄 배포된 이 책은 아마 성경 다음으로 가장 널리 읽힌 책일 것이다. -220쪽





과거를 꾸미고 가꾸는 건 비난 권력자만의 전매특허는 아니다. 개인도 지나간 과거는 예쁘게 미하시켜 기억한다.

그리고 러시아만 역사를 치장하고 왜곡한 것도 아니다. 오늘날 강대국일수록 악취나는 과거를 갖고 있는 경우가 더 많다는 건 굳이 여러 말이 필요없다. 그러나 똑같은 행동이지만 전혀 다른 평가가 내려질 수 있고, 그 기준은 결국 국가(조국) 내부가 아니라 인류 전체에 얼마나 유익한가?에 달려 있다는 점이다.


역사를 미화하고 왜곡했지만 그 나라가 특히 잘못된 역사를 통해 인류 전체의 발전에 조금이라도 이바지했다면 과오는 용서받을 수 있다.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코티드부아르와 니제르를 방문해서 과거 식민통치와 노예제에 대해 사과했을 때 노예제는 아프리카인들 스스로에게도 잘못이 있다는 말로 사과를 받아주고 잘못된 과거를 스스로 인정했던 건 인상적이다. 노예를 얻기 위해 아프리카인들이 서로 싸우고 전투에서 진 부족을 노예로 팔아넘겼던 역사적 사실을 언급한 것이다.




'과거를 지배한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말이다.

미래를 위해 역사를 왜곡한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현재를 지배하기 위해 과거를 왜곡하기 때문이다. 역사를 왜곡하고 왜곡시킬 수 있다고 믿는 자들일수록 미래의 역사에는 관심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미래는 과거를 왜곡하는 현재의 야만까지도 잊지 않고 새긴다'는 사실을 너무도 쉽게 잊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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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H. 카 러시아 혁명 - 1917-1929
에드워드 H. 카 지음, 유강은 옮김 / 이데아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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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무엇인가>로 너무나 유명한 E.H. 카는 역사학자라기보다는 외교관으로 오랜 기간 일을 했다.

그를 두고, 일본의 역사가인 가토 요고는 '이상한 역사가'라고 했고, <코뮤니스트>의 저자는 '포스트19세기의 리버럴리스트에서 유사코뮤니스트로 변신했다'고 했다.


내가 E.H. 카에 다시 관심을 갖고 이 책을 읽게 된 계기였다. 하지만 내눈에 비친 E.H. 카는 이상하지도 유사코뮤니스트도 아니었다. 그는 러시아 담당 외교팀에서 근무하면서 러시아 혁명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퇴직 후 1944년부터 1977년까지 30년여 년 동안 기념비적 저서인 <소비에트 러시아의 역사>를 썼다. 이 책은 열네 권짜리로 일반인이 읽기엔 너무 방대한 양이기 때문에 30분의 1로 요약한 책이 바로 <러시아 혁명: 1917-1929>다. 300쪽도 되지 않는 얇은 책이지만 저자의 바람과는 달리 일반인이 읽기엔 쉽지 않다.


일단, 무엇보다도 1991년 소련이 해체된 후 공산주의에 대한 관심 자체가 사라진 게 주원인인 것 같다. 암튼, 이 책은 1917년 러시아에서 2월 혁명으로 임시정부가 들어서고 같은 해 10월 레닌이 주도한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한 후, 러시아가 어떻게 인류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사회주의 체제로 나아가게 되는지를 자세히 보여준다.



1905년 1차 러시아 혁명은 혼합된 성격을 띠었다. 이 혁명은 독단적이고 낡아빠진 전제정에 맞선 부르주아 자유주의자와 입헌주의자의 반란이었다. 그것은 '피의 일요일'이라는 잔혹한 학살에 의해 점화되어 최초의 페테르스부르크 노동자대표소비에트(노동자대표평의회) 선출로 이어진 노동자의 반란이었다. 그리고 자연발생적이고 조정되지 않은, 종종 대단히 가혹하고 폭력적인 광범한 농민 반란이었다. 이 세 개의 실은 결코 하나로 엮이지 않았고, 혁명은 몇 가지 비현실적인 헌법상의 양보를 얻은 채 쉽게 진압됐다. 1917년 2월 혁명에서도 동일한 요인들이 작용했지만, 이번에는 전쟁에 따른 피로와 전쟁 수행에 대한 광범한 불만 때문에 이 요인들이 더욱 강화되고 두드러졌다. 차르가 물러나지 않는 한, 반란의 물결을 막을 길은 없었다. 전제정은 의회 두마의 권위에 바탕을 두는 민주적 임시정부 선포로 대체됐다. 하지만 혁명의 혼합된 성격은 곧바로 다시 한 번 분명하게 드러났다. 임시정부와 나란히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ㅡ수도는 1914년에 페테르스부르크에서 페트로그라드로 이름이 바뀌었다ㅡ가 1905년의 선례에 따라 재건됐다. -15쪽




1918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체결로 1차 세계대전에서 빠져나온 러시아는 백군과의 내전에 본격적으로 돌입한다. 트로츠키의 주도로 붉은 군대(적군)가 만들어지는데, 트로츠키는 이때 차르 시대의 훈련받은 장교들을 대거 받아들인다. 적군이 백군을 이길 수 있었던 건 아이러니하게도 구체제가 쌓아놓은 탄탄한 군대조직이었던 셈이다. 적폐 세력을 이용했다는 점에서 트로츠키는 레닌보다 현실적이었다.




전시공산주의는 두 개의 주요 요소로 이루어져 있었다. 한편에는 중앙집중적인 통제와 관리, 소규모 생산 단위의 대규모 단위로의 대체, 통일된 계획 조처 등 경제적 권한과 권력의 집중이 있었다. 다른 한편에는 상업적 금전적 형태의 분배로부터 이탈, 무상이나 고정 가격의 기본 재화와 서비스 공급 도입, 배급, 현물 지급, 가정된 시장이 아닌 직접 사용을 위한 생산 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 두 요소 사이에 아주 뚜렷한 구분선을 그을 수 있었다. 집적과 집중 과정은 비록 전시공산주의라는 속성 재배 온실에서 지나치게 번성했지만, 혁명의 첫 번째 시기와 유럽 전쟁 중에 이미 작동하고 있었던 과정의 연속이었다.

(...)

집적과 집중 정책은 산업에 거의 배타적으로 적용됐고, 이 정책을 농업에도 적용하려는 시도는 아무 성과도 내지 못했다. (...) 화폐에서 이탈하고 '자연' 경제로 대체하는 정책은 사전에 구상된 어떤 계획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인구의 8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는 농민의 후진적인 농업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기에 나온 정책이었다. 이 정책은 프티부르주아의 열망을 품은 농민의 반봉건주의 혁명과 공장 프롤레타리아트의 반부르주아 반자본주의 혁명을 결합하려는 시도, 그리고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따르는 도시와 농촌의 갈등에 대처하려는 시도가 갖는 근본적인 난점의 표현이었다. 이 정책은 결국 전시공산주의에 대한 반란을 일으켜 그것을 파괴한 모순이었다. -54~55쪽 중




전시공산주의 체제를 끝내자 식량 위기가 찾아왔다. 자급자족을 일차적 목표로 삼고 있었던 농촌에서 잉여 생산물을 도시로 이동시키는 과정에서 농민의 희생을 강요한 게 원인이었다. 이에 대한 레닌의 처방은 신경제정책(NEP)이었다. 즉, 농민이 잉영 생산물을 자율적으로 암시장에서 판매할 수 있도록 하자, 이들이 필요로 하는 소비재를 만드는 공업과 상업도 덩달아 발전했다. 한마디로, 신경제는 레닌이 공산주의에서 한 발 물러난 타협의 소산이자 일정 부분 구체제로의 회귀에 다름 아니었다.




신경제정책은 농민을 재난에서 구해 준 반면, 산업과 노동시장을 혼돈 직전의 상황으로 몰아넣었다. 신경제정책은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 착취"의 약자라고 선언하며 '노동자그룹'을 자처한 당내의 한 지하 반대파 그룹은 4월 당대회에서 비난을 받았다. 신경제정책이 농민에 대한 양보 정책이라고 가볍게 설명됐을 때 아무도 묻지 않았던 질문은 이 양보의 대가를 누가 치르는가 하는 점이었다. 혁명의 영웅적 기수인 프롤레타리아트는 내전과 산업 혼란의 영향 속에서 분산과 해체, 극적인 감소를 겪었다. 산업 노동자는 이미 신경제정책의 의붓자식이 됐다. -88쪽




레닌이 주도한 신경제정책은 농촌에 이익을 가져다주면서 식량 부족 문제를 일시적으로 해결했지만 이에 따른 대가는 산업화의 부진과 도시 노동자들의 불만이었다. 계속 이 방향으로 나아갈 수는 없었다.

1924년 레닌이 사망하자 트로츠키에 대한 반대 기류가 형성되었는데 이는 이상한 일이었다. 트로츠키는 백군과의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레닌과는 달리 농촌의 잉여생산물로 산업화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고 줄기차게 요구했기 때문이다. 비록 과거 반대파(멘세비키)였던 전력과 노동의 군사화를 주창했기 때문에 노동조합 진영에서 의심을 사고 있었지만 트로츠키만큼 당시 러시아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혁명가도 전무했다. 그러나 현실은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스탈린이 연합해서 反트로츠키 대열을 주도하면서 트로츠키는 서서히 고립되어갔다.




카메네프는 인격의 힘보다는 지성이 더 많았다. 허약하고 허영심과 야심이 많은 지노비예프는 빈 왕좌를 차지하려는 열망이 지나칠 정도로 충만했다. 그는 부재한 지도자의 권위에 지나칠 정도로 굴종하는 언사로 당대회를 주재하고 발언하면서 동시에 자신이 레닌의 지혜를 해설하는 권위자인 양 행세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스탈린은 의도적으로 겸손한 역할을 맡았다. 그는 자기 몫으로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으면서 레닌을 '스승'이라고 거듭 칭했다. 레닌의 한 마디 한 마디를 연구해서 바르게 해석하려 한다는 것이다. 스탈린은 조직에 관해 말할 때면 관료제에 대한 레닌의 비난을 되풀이하면서, 이런 가시 돋힌 말이 대부분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위선적이게도 무시했다. 민족 문제에 관한 보고에서 스탈린은 '대러시아 국수주의'에 대한 레닌의 비판을 단호하게 지지했으며, 자신에게 가해진 '조급하다'는 비난에서 조용히 빠져나왔다. -101쪽




레닌이 말년에 스탈린의 권력욕과 교활함을 꿰뚫어보고 멀리하려 했다는 사실은 뒤늦게 알려졌다. 스탈린은 소수민족인 그루지아(조지아) 출신으로 심지어 슬라브족도 아니었다. 全세계 공산화를 지향했기에 민족주의적 성향을 보이지 않았던 다른 공산주의자들에 비해 스탈린은 민족주의 색체가 내면화되어 있었고, 그의 이런 성향은 향후 소비에트가 국가주의와 일당독재로 기우는 계기가 되었다.



제국주의 지배하에 놓여 있던 많은 식민 지역에서는 '자본주의=제국주의, 공산주의=민족독립'이라는 등식이 손쉽게 성립되었고, 이는 러시아 공산주의자들을 당혹스럽게 했다.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은 처음부터 민족주의 성향이 강했기 때문에 부르주아에 의한 반제국주의 혁명에는 동의했지만 그 뒤에 일어나야할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반자본주의 혁명은 애초 시도할 마음 자체가 없었다.




1921년 창건된 중국 공산당은 당시 당원이 1000명 남짓으로 주로 마르크스주의 지식인이었다. 보로딘이 도착하기 전에, 명백히 코민테른의 선동에 따라 중국 공산당 당원들이 국민당에도 가입하기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분명, 공산당원 다수가 이중으로 노동당원 자격도 갖고 있던 영국을 본보기로 삼았다. 입당 조치의 의도는 규율 있고 헌신적인 집단이 더 크고 느슨한 조직을 강화하기 위한 자극제가 되는 것이었다. 이 모든 조정은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쑨원의 '삼민주의(민족, 민권, 민생)'의 불일치를 은폐했다. 다른 모든 것들이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민족 혁명에 종속되는 한 어려운 일은 없었다. 보로딘이 국민당 강령에 지주의 토지 몰수를 포함시키라고 재촉하고 나서야 쑨원은 완고하게 저항했고, 결국 보로딘은 양보할 수 밖에 없었다. -150쪽


위기는 국민당 자체의 분열을 통해 발생했다. 국민당 좌파를 대변하고 보로딘의 영향을 강하게 받던 우한 정부는 민족 혁명에 대한 지지를 사회혁명의 목표에 대한 말뿐인 동의와 결합했다. 우한의 남쪽에 있는 후한 성에서 농민 반란이 발생했는데, 이때가 마오쩌둥이 처음으로 농민의 옹호자로 이름을 날린 순간이었다. 난창에서는 장제스와 그의 장군들이 우파로 급격히 변신하면서 자신의 민족주의적 야심에 사사건건 끼어드는, 다루기 힘든 농민과 노동자의 요구와 공산당에 대해 공공연히 적대감을 표현했다. 영국 정부의 바뀐 태도도 이런 상황 전개를 부추겼다. -155쪽




1920년대 초, 내전이 마무리되자 러시아는 대외 외교에 치중하지만 러시아에 호의적인 나라는 독일 정도였다. 특히, 레닌은 독일의 전시 경제의 일환인 중앙집권적 통제와 계획에 깊은 인상을 받는다.

전쟁 전에 자본주의가 자체의 내적 발전에 의해 향하고 있던 최종 단계는 독점 자본주의였다. 레닌이 "역사의 변증법"이라고 지칭한 과정에 따라 전쟁은 독점 자본주의가 '국가독점 자본주의'로 전환되는 과정을 촉진하고 있었다. 국가독점 자본주의는 "사회주의를 달성하기 위한 가장 완전한 물질적인 준비"를 구성했다. 레닌은 1917년 9월에 "대규모 은행 없이는 사회주의를 실현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독일 모델을 러시아에 적용하는 것은 후진적 경제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과정에 내재한 온갖 어려움을 제기했다. 러시아에서 최근 산업 성장이 매우 집중되고 국가에 직간접으로 의존했지만, 여전히 산업은 원시적인 조직 단계에 있었고 사회주의 계획가들에게 제공할 만한 이론적 실천적 원조나 지침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계획경제라는 원칙에는 어떤 저항도 없었다. 1919년 당 강령은 경제에 관한 "하나의 일반적인 국가 계획"을 요구했으며, 이때부터 경제 문제에 관한 당과 소비에트의 결의안에는 항상 "단일한 경제 계획"의 요구가 포함됐다. -163쪽




소비에트는 진정한 공산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주변 다른 나라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나야만 가능하다고 생각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국내 선전용이었고 국제적으로는 이미 全세계 공산화를 포기한 상태였다. 그렇지 않으면 그 어떤 나라도 러시아와 접촉하거나 외교 관계를 맺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1924년 레닌이 사망한 후 공산당에 입당하는 당원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레닌은 마르크스 이론에 충실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읽고 쓰는 능력을 갖춘 자만을 당원으로 받아들여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레닌과는 달리 누구나 마음(열정)만 있으면 공산당원이 될 수 있어야 한다고 고집했다. 신규 공산당원들을 장악한 인물은 당연하지만 다름 아닌 스탈린이었다. 스탈린은 이렇게 레닌 사후 공산당을 아래서부터 서서히 장악해 나가는 한편, 트로츠키에 대한 비난을 멈추지 않았고 다른 소수 반대파들에 대해서도 '편향'과 '반당'이라는 굴레를 씌워 몰아낸다.




당과 국가의 최고 권위는 하나의 기관ㅡ당 정치국ㅡ에 집중됐고 이 권위는 절대적이었다. 트로츠키가 이끄는 반대파가 공식적으로 그런 이름이 붙여진 마지막 사례였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서구 민주주의의 관행에서 익숙한 반대파라는 단어는 집권당에 대한 반대당, 즉 야당을 의미했고 국가에 대한 충성과 양립이 불가능하지 않았다. 다음 단계에서 소수 반대파는 "편향"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정치적 차이가 아니라 이론상의 이단을 가리키는 언어였다. 결국 소수 반대파 그룹은 단순하게 '반당(反黨)'이라는 낙인이 찍혔는데, 당에 대한 적대는 국가에 대한 적대와 무조건 동일시됐다. -181쪽




이렇게 해서, '공산당=국가'라는 등식이 성립된다.

그러나 스탈린식 통치는 소비에트 사회에 씻을 수 없는 폐해를 남기게 된다.

스탈린의 권력 장악 방식은 결국 관료화를 불러왔고, 관료화는 부패와 통제를 일삼게 된다.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얻은 권력은 절대권력을 지향하게 되고 절대권력은 통제와 독재가 필수 조건이기 때문이다.

스탈린의 권력이 강화될수록 소비에트 사회는 점점 더 혁명으로부터 멀어지고 만다.



1928년 12월 당 중앙위원회는 모든 출판을 당과 국가의 통제 아래 둔다는 법령을 공표했다. 이 통제는 사실상 전러시아프롤레타리아작가협회가 행사했다. 이런 결말을 중앙위원회나 더군다나 스탈린이 계획한 것은 아니었고, 아마 바라지도 않았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타락은 위에서부터 확산됐다. 하급의 소규모 독재자들은 상급의 권력자를 구워삶거나 아첨하고, 위의 독재자가 사용하는 방법을 모방하는 방식으로 경쟁자를 제거했다.

권력을 강화하고 집중하는 움직임은 특히 법의 영역에서 두드러졌다. -182쪽




한편, 신경제체제로 굴락(부농)과 중농들 위시한 농촌이 혜택을 본 반면, 도시 노동자들은 식량난과 낮은 임금에 시달렸다. 빠른 산업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농민을 위한 정책은 더이상 지속될 수 없었다.

스탈린의 대표적인 경제 정책이 기획 시도된다. 바로, 5개년계획이다.



1차 5개년 계획의 채택은 소련의 역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신경제정책의 본질은 농민 경제에 일정한 자유를 양보하는 것이었다. 농민 경제의 종언을 선언하는 것은 무분별한 처사였을 것이다. 스탈린은 신경제정책이 "사적 상업에 어느 정도의 자유"를 제공하면서도 "시장에 대한 국가의 통제 역할"을 보중했다고 주장했다. 신경제정책의 목표는 "사회주의의 승리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공식 당국은 신경제정책이 폐지됐다는 사실을 부인했다. 소규모 사적 산업의 생산물과 무엇보다도 농산물을 거래하는 자유시장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하지만 모든 주요한 경제 활동이 계획의 지시에 종속되고 농민에게 점차 가혹한 압력이 가해지자, 신경제정책의 생존은 이례적인 동시에 불안정한 현상이 됐다. -225쪽




공산주의 혁명은 분명 레닌의 작품이었지만, 혁명 이후의 소비에트 사회는 스탈린에 의해 구상되고 구축되었다.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진 두 인물을 떼어놓고는 러시아의 1917~1929년을 제대로 이해하거나 설명할 수 없을 터인데, E.H 카 역시 두 인물 특히 스탈린에 대한 개인적인 평가를 빼먹지 않고 기록으로 남겼다.



스탈린은 대중을 경멸하는 태도로 바라보았고, 자유와 평등에 무관심했으며, 소련 이외의 어떤 나라에서든 혁명의 전망에 대해 비웃음으로 일관했다. 그는 일찍이 1918년 1월에 당 중앙위원으로는 유일하게 레닌에 반대해 "서구에는 혁명 운동이 전무하다."고 주장했었다.

일국사회주의는 스탈린의 작품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에게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일국사회주의 덕분에 스탈린은 사회주의에 관한 주장들을, 어쨌든 본인을 깊이 감동시킨 유일한 정치 신조인 러시아 민족주의와 조화시킬 수 있었다. 소수민족이나 작은 나라에 대한 스탈린의 처리 방식에서 민족주의는 쉽게 국수주의로 변질됐다.

레닌과 초기 볼셰비키에게 준엄하게 비난받았던, 러시아의 오랜 反유대주의의 가락이 들렸다. 공식적으로는 반유대주의가 계속 비난을 받았지만 어조의 단호함은 점점 약해지기 시작했다. 미술과 문학에서 혁명 초기의 열정적인 실험주의가 포기되고, 그 대신 점점 더 엄격해진 검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러시아 전통 양식으로 회귀해야했다. 마르크스주의의 역사학파와 법학파는 빛을 잃었고, 과거 러시아와의 연속성을 찾는 일은 이제 질책의 이유가 되지 않았다. 일국사회주의는 레닌뿐 아니라 마르크스도 거부했던 과거 러시아의 민족적 배타성으로 복귀하는 신호였다. 이것은 스탈린 체제를 러시아 역사의 맥락 속에 자리매김하는 것과 결코 모순되지 않았다. -251~252쪽




E.H 카의 러시아 혁명사는 1929년에 끝난다.

하지만 그 이후 소비에트 사회는 피비린내 나는 숙청의 시대를 거쳐 2차세계대전의 참화 속으로 말려 들어갔다가 간신히 살아남는다. 유일한 위안이라면 승자의 편에 섰다는 점이다.

만약 러시아가 2차세계대전에서 히틀러의 공격에 무너졌거나 싸움을 포기한 채 무기력한 방관자로 남았더라면 혁명 이후의 역사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소비에트의 손을 들어줬고 그 반향은 뜻밖의 형태로 멀리 퍼져나갔다. 마르크스와 레닌의 예측과 바람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선진 자본주의 세계에서는 러시아 혁명으로 생겨난 흥분 상태가 대체로 파괴적인 수준에 머물면서 혁명적 행동을 위한 어떤 건설적 본보기도 제시하지 못한 반면, 후진적인 비자본주의 나라에서는 흥분 상태가 더욱 널리 퍼지고 생산적인 효과를 발휘했다. 아무 도움도 받지 않고 거의 자신만의 노력을 통해 주요 산업 강대국의 지위에 오른 혁명 체제의 위신 덕분에, 자연스럽게 소련은 1914년 이전에 사실상 이론의 여지가 없었던 서구 자본주의의 세계 지배에 대항하는 후진국 반란을 이끄는 지도자가 됐다. 이런 상황에서 보면, 서구의 눈에 소련의 자격을 의문시하게 만든 오점도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러시아 혁명은 후진적인 비자본주의 세계의 반란을 통해 자본주의 열강에 새로운 도전을 제기했으며, 그 잠재력은 아직 소모되지 않았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은 스스로 정한 목표와 그것이 만들어낸 희망에 한참 미치지 못했다. 혁명의 기록은 결함과 모호함으로 점철됐다. 하지만 혁명은 현대의 다른 어떤 역사적 사건보다도 세계 전체에 걸쳐 더 심대하고 지속적인 반향을 미치는 원천이었다. -280쪽




<러시아 혁명사>라는 대작을 남겼음에도 E.H 카는 합당한 대접을 받지 못했다. 대접은 커녕 공산주의자, 친소련학자라는 꼬리표가 평생 따라다녔다. 그는 역사학계에서도 철저하게 외면받았는데 이에 대한 반론으로 쓴 책이 다름아닌 <역사란 무엇인가>다.


E.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는 유독 일본과 우리나라에서만 유명한데, 일본인들은 그의 주장이 전범국인 일본의 항변을 암암리에 대변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선 어째서 E.H 카의 유명세는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걸까? 도대체 E.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읽고 제대로 이해한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역사란,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다'라는 E.H 카의 말은 참으로 옳다.

러시아 혁명을 냉전이 한창이던 1960~70년대에 바라본 것과 소련이 해체된 후인 1990년대 그리고 다시 한 세대가 더 흐른 현시점에서 바라볼 때 그 의미와 평가는 결코 같을 수 없다.

E.H 카는 당시 냉전의 프레임으로 러시아 혁명을 바라보고 평가했던 보편적 역사관을 기꺼이 외면했기에 외면당했다.

그가 30여 년에 걸쳐 냉철한 언어로 기록한 <소비에트 러시아의 역사>는 앞으로 19세기 초반의 역사를 배우고 연구하려는 후세들에게 바이블같은 존재가 될 것이다.

E.H 카의 대표작은 <역사란 무엇인가> 대신 <소비에트 러시아의 역사> 혹은 그 요약본인 <러시아 혁명: 1917-1929>가 되어야 마땅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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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혁명가의 회고록 빅토르 세르주 선집 1
빅토르 세르주 지음, 정병선 옮김 / 오월의봄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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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1890년에 태어난 빅토르 세르주라는 낯선(?) 인물이 1906년부터 1941년까지 겪었던 내용을 기록한 회고록이다.

그는 벨기에에 망명한 러시아 혁명가 부부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나이부터 노동과 독서로 세상을 배웠다.

자연 과학이나 인문적 기초 교육이 부족한 상태에서 무차별적 독서와 자유분방한 토론은 혁명가를 탄생시키기에 최적의 조건이었으리라.

아나톨 프랑스와 알베르 리베르타드에 열광하고, 장 조레스의 <위마니테>를 읽던 저자는 자연스럽게 아나키스트가 된다. 참고로, <위마니테>는 공산당 중앙기관지다. 



우리는 아나키즘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아나키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요구했고, 동시에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었다. 아나키즘이 밝힐 수 없는 삶의 측면이란 있을 수 없었다. 적어도 우리한테는 그렇게 보였다. 사람은 가톨릭교도일 수도 있고, 신교도일 수도 있으며, 자유주의자, 급진파, 사회주의자, 심지어 생디칼리스트일 수도 있다. 이런 것들은 자신의 인생, 나아가 전반적인 삶을 전혀 바꾸지 않고도 가능한 일이다. 요컨대, 적당한 신문을 골라 읽는 것으로 충분했다. 만약 그 또는 그녀가 더 엄격하다면 충성과 헌신을 요구하는 경향과 조류를 지지하는 카페에 자주 드나들기만 하면 된다. 아나키즘은 모순으로 점철되었고, 각양각색으로 산산이 분열돼 있었지만 다른 무엇보다 말과 행동의 통일을 요구했다. (기실 말과 행동의 통일은 모든 이상주의자가 요구하는 바다, 하지만 현실에 안주하면서 다 잊는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당시에) 가장 극단적일 수밖에 없는 조류를 택했다. 우리가 채택한 아니키즘은 자체의 혁명 논리를 통해 혁명의 필요성을 폐기해버렸고, 거기에는 변증법의 논리가 단호하게 동원됐다. 우리는 온건하고 학술적인 아나키즘을 혐오했고, 어느 정도는 그 때문에도 언행일치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60~62쪽





벨기에의 아나키스트는 이제 파리로 향한다.

예술과 자유의 도시 파리에 도착한 저자는 뭐라도 이룰 수 있을 것 같고 뭐라도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달콤했던 첫키스는 어느덧 끈적거리는 숨막힘으로 바뀌고 만다.




파리는 "탈출구가 없는" 도시였다. 파리는 엄청난 정글이었다. 그곳에서는 원시적 개인주의가 모든 관계를 지배했다. 우리의 것과는 방식이 달랐고, 그래서 위험천만했다. 우리의 개인주의는 긍정적 의미의 다원주의적 생존 투쟁이었다. 우리는 빈곤의 굴욕에 작별을 고했지만 다시금 그것과 싸우고 있었다. 스스로에 충일하라는 계명은 소중했고, 아마도 그게 가능했다면 고귀한 성취였을 것이다. 인간의 가장 절박한 욕구가 충족되어야만 비로소 스스로에 충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욕구가 절박하면 다른 사람들에 공감하기보다는 짐승처럼 바뀐다. 우리는 음식과 거처와 입을 옷을 혼신의 힘을 다해 마련해야 했다. 그런 다음에는 또 읽고, 생각할 시간도 여투어야 했다. 집도 절도 없이 뿌리가 뽑혔거나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이상주의로 "몸이 달은"(우리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무일푼의 젊은이인 우리로서는 이 문제를 사실상 해결할 수가 없었다. 다수의 동지가 이내 '불법 행위'에 빠졌다. 사회의 주변부가 아니라 도덕성의 주변부에서 살아갔던 것이다. 그들은 "착취하지도, 착취당하지도 않겠다"고 선언했지만, 자기들이 계속해서 그 둘 다임을 깨닫지 못했다. 게다가 그들은 이제 쫓기게 된다. 그들은 게임이 끝났다는 걸 깨달았을 때 감옥에 가기보다는 자살을 택했다. -64쪽




"목숨을 잃는 게 나쁘다거나 빼앗는 것이 범죄일 만큼 삶이 그렇게 대단한 은전이나 혜택인 것은 아니다.(아나톨 프랑스)"

자유는 곧 무질서요 퇴폐였다.

감옥에서의 5년에 관해서는 '피정'이라는 말로 간략하게 표현한다. 사람은 자신을 무너뜨릴 만큼의 고통과 직면해서 무너지지 않으면 더한층 강해지듯, 감옥은 그의 정신을 순화시키기보단 되려 강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우리는 스스로의 활동과 노력만으로 살지 않는다. 우리는 스스로를 위해서만 살지도 않는다. 우리의 가장 내밀한, 가장 사적인 사유도 세상 사람들의 생각과 수천 가지 방식으로 연결돼 있다.

당신은 스스로에만 좌우되지 않는다. 스스로를 위해서만 살지도 않는다. 당신은 우리 대다수가 하는 가장 내밀한 생각이 수천 가지 방식으로 세상 사람들의 생각과 결부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더구나 발언하는 사람, 글을 쓰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대변자가 없는 사람들을 위해 말하는 사람이다. 다만 우리들 각자는 자신의 문제를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한다. 내게는 아나키즘의 패배가 아주 분명하게 이해됐다. 개인주의자들의 일탈은 누가 보더라도 명확했다. 하지만 나는 탈출구를 찾을 수가 없었다. -109쪽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인 상황에서 맑스의 예측과는 달리 농업국이었던 유럽의 변방 러시아에서 혁명이 성공한다. 러시아계 이방인의 마음을 이보다 더 곧추시키는 일은 또다시 없었으리라.

베를린을 거쳐 1919년 1월 마침내 꿈에 그리던 페트르부르크(레닌그라드)에 당도한다.

그토록 기대했던 혁명의 나라 러시아에 대한 저자의 첫인상이 참으로 인상적이다.




우리는 얼어 죽은 세계로 들어섰다. 눈이 반짝이는 핀란드 역은 사람이 없었다. 레닌이 장갑차 위로 올라가 군중 연설을 한 광장은 황량한 설원일 뿐이었다. 주변 가옥들도 사람이 안 살았다. 넓고 곧게 뻗은 간선 도로들과 얼음장 위로 눈을 이고 있는 네바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들을 보자 하니, 버려진 도시 같았다. 우리가 맨 처음 목격한 사람은 회색 외투를 걸친 수척한 군인이었다. 그러고도 한참 후에야 숄을 두른 여자를 만났다. 그녀는 부들부들 떨면서 유령처럼 지나갔다. 우리는 안중에 없다는 듯 조용한 채였다.

우리는 시내로 향했고, 유령 같은 삶의 흔적들이 서서히 드러났다. 지붕 없는 썰매를 굶주린 말이 끌었다. 눈밭 위를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었다. 자동차는 거의 한 대도 안 보였다. 행인은 드물었고, 있다고 해도 추위와 굶주림에 지친 표정이었다. 얼굴들이 섬뜩할 정도로 창백했다. 넝마를 걸친 군인들은 밧줄을 단 총을 어깨에 메고 있었다. 그런 부대가 단위 부대를 상징하는 적기를 들고 저벅저벅 걸어갔다. 탁 트인 시야의 끝 얼어붙은 운하들 앞으로 버티고 선 제정 시대의 궁전들은 활기가 없었다. 더 육중한 다른 궁전들도 볼 수 있었는데, 그 옛날 열병식과 행진이 이루어진 광장들 위에 군림하고 있었다. 왕실 처소의 세련된 바로크 풍 파사드는 거무칙칙하고 진한 빨강으로 칠해져 있었다. 극장, 군 사령부, 옛 부처 건물들은 전부 제정 양식이었는데, 오랫동안 빈 채로 방치되었음에도 열주 덕분인지 웅장하다는 느낌이었다. 성 이삭 성당의 도금 지붕도 보였다. 아치형의 지붕을 떠받친 붉은색 화강암 기둥들이 장대한 위용을 뽐냈다. 페트로그라드는 황폐한 도시였고, 높이 솟은 돔은 과거의 영광을 상징하는 듯했다. 우리는 표트르-파벨 요새의 총안과 노란 첨탑을 바라보았다. 바쿠닌과 네차예프 이래로 투쟁을 거듭하다가 거기서 스러져간 온갖 혁명가가 우리의 뇌리를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 세계가 이제 우리의 것이 될 수도 있었다. 페트로그라드는 추위의, 굶주림의, 증오의, 그리고 인내의 메트로폴리스였다. 주민이 불과 1년 만에 100만 명에서 겨우 70만 명으로 쪼그라들었다.

우리는 수용 시설에 도착했고, 흑빵과 말린 생선을 기본 식량으로 배급받았다. 우리 가운데서 그때까지 그렇게 참담한 음식을 먹어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53쪽




이곳이 고골과 푸시킨과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크의 나라란 말인가.

그토록 열망했던 혁명이 성공했건만 빈곤은 더한층 심해졌을 뿐만 아니라 제정 러시아 시절의 소박한 활력마저 잃어버렸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을까?'



신흥 관료를 간단히 언급한 편지에는 "소비에트의 쓰레기"라고 적혀 있었다. 그런 분위기가 줄곧 악화된 것은 공안통치가 지속되면서 참을 수 없는 잔혹 행위가 보태졌기 때문이다. 볼셰비키 투사들이 감탄이 나올 만큼 올곧고 객관적이고 사심이 없지 않았다면, 그들이 과업을 성취하기 위해 그 어떤 장애물도 극복하겠다고 단호히 결의하지 않았다면 희장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도덕적으로 위대하고, 지적으로 탁월하다는 점이 무한한 자신감이라는 악습으로 부상했다. 이중의 책무라는 개념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그때 깨달았다. 결코 잊을 수 없는, 잊어서는 안 되는 교훈이었다. 사회주의는 적과 구체제에 맞서 싸우는 것만이 아니다. 사회주의는 자체의 내부 반동과도 싸워야만 한다. 혁명은 멀리서 보면 하나의 암괴처럼 보일 뿐이다. 허나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관찰하면, 최선의 요소와 최악의 요소가 격렬하게 휘몰아치는 급류와 같다. 반혁명의 흐름이 실재한다는 것도 불가피한 현실이다. 혁명은 구체제의 낡은 무기를 쓰도록 강요받는다. 그런데 그 무기는 양날의 검이라고 할 수 있다. 혁명이 성공하려면 자체의 폐해, 월권, 범죄, 반동의 순간들을 경계해야 한다. 혁명을 수행하는 사람들의 비판, 반대, 시민적 용이가 사활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이 점을 염두에 둔다면, 우리는 1920년에 그런 요소가 크게 부족했다.

레닌이 자주한 유명한 말이 내 마음을 떠나지 않았다.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을 시작하는 영예가 유럽에서 가장 후진적인 민족에게 닥치다니 참으로 불운하다" -225~226쪽




볼셰비키는 구질서를 무너뜨리는 혁명엔 성공했지만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는 데엔 실패했다. 당연하다. 볼셰니즘은 혁명을 위해 특화되었을 뿐 사회 조직과 운영을 위한 정치 철학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공한 혁명가가 저절로 훌륭한 정치가가 되는 건 아니었다.

저자는 교조주의에 빠진 스탈린주의와 멘세비키에 대한 볼셰비키의 숙청과 독재를 비판했지만 만민의 평등과 행복은 볼셰비키만이 달성할 수 있다고 고집하면서 끝까지 볼셰비키 당원으로 남았다.




어느 누구도 각자의 지분이 악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반혁명이 일어나 관료들이 권력을 장악했고, 바로 우리 손에서 새로운 전제 국가가 출현해 우리를 분쇄하고 있으며, 결국 온 나라가 끽 소리도 하지 못하는 침묵을 강요받고 있다는 생각에 관해서 말하자면, 어느 누구도, 우리 대오의 그 어느 누구도 그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알마아타 유배지에서 침잠 중이던 트로츠키도 소련 체제가 여전히 우리의 것이라고 단언했다. 비록 병들기도 했어도 여전히 프롤레타리아적이고, 여전히 사회주의라는 것이었다. 당이 우리를 제명하고, 투옥하고, 살해했지만, 그 당은 여전히 우리의 당이었다. 우리의 모든 것이 당 덕택이었다. 우리는 당을 위해 살아야 했다. 왜냐하면 당을 통해서만 혁명에 봉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당을 사랑하다가 침몰하고 말았다. 우리는 당을 사랑해서 반란에 나섰고, 그러다가 우리 자신의 손발을 묶어버렸다. -444쪽





1920년 백군과의 내전이 끝나기 전부터 전시 독재를 이어가던 볼셰비키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끝낼 생각도 방법도 잊어버렸다.

농촌 인구의 50%는 집단농장 안에서 각종 직함을 가진 비농민이 되어 있었다. 거대한 관료주의의 탄생이었다. 농업에 종사하는 인구가 절대적으로 줄고 군인을 포함하여 농민의 노동에 무임승차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이들은 하나같이 볼셰비키 당원들이었고 배급 라인을 장악하고 배급품을 착복했다.

이들이야말로 혁명을 가로막는 반혁명 분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중앙에서 반혁명 세력 척결을 위해 가동한 조직(체카)은 오히려 볼셰비키를 비판하는 정치 세력만을 잡아들였다.

자신의 부정부패를 가리고 자리를 보전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희생양을 찾는 것이고 최적의 희생양은 다름아닌 최고 권력자의 경쟁자와 다른 정치 세력이었다. 건전한 토론과 비판으로 쇄신을 거듭해오던 볼셰비키는 이런 식으로 급속하게 타락해 간다.


여러 번의 수색과 구금을 겪고 재판도 없이 볼가강 유역으로 쫒겨난 저자는 어린 아들과 함께 비참한 생존을 위한 투쟁에 돌입한다. 사람들은 굶주림에 인간의 존엄마저 잃어갔고 작은 설탕 한 조각을 두고도 아귀다툼을 벌였다. 자급자족을 중시하는 농촌의 생산 구조를 무시한 채 콜호스(집단농장)로 만들고 헐값에 곡물을 강제 징발해버린 결과였다.



저자는 운이 좋았다.

여러 잡지들에 끊임없이 글을 투고하고 책들을 내서 외부 세계에 이름이 알려질 수 있었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의 도움으로 마침내 소비에트를 떠나 망명길에 오른다.

17년 전 소비에트에 처음 진입했을 때의 첫인상과 소비에트를 떠나 서구 세계에 진입한 순간 받았던 인상이 너무나도 대조적이다. 특히, 서구에서의 삶을 모르는 그의 아들이 받았을 충격이라니...




폴란드 국경을 넘어서자 예쁜 집들이 보였다. 파리, 베를린, 런던, 뉴욕에서 발행된 신문과 잡지가 가판대에서 팔리고 있었고, 철도원들의 복장이 말쑥했으며, 사람들의 표정은 느긋하고 여유가 있었다. 밤이 깃들자 조명이 켜졌고, 바르샤바는 장대한 위용을 뽐냈다. 간간히 박힌 파랑색 전등이 아취를 더했다. 마르잘코프스카 가를 걷는 사람들이 걸친 옷은 우아해 보였다. 번화가의 분주함에서는 무심함과 번영이 느껴졌다. 상점에는 사람들이 꿈꾸는 모든 게 있었다. 무엇보다 우리의 변변찮은 협동조합과 비교해, 단연 돋보였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고, 마음이 아팠다. 나치가 장악한 독일을 횡단할 때는 기차 밖으로 나올 수 없었다. 나만 한 돌출 교각에서 어떤 광장을 잠깐 볼 수 있었다. 베를린의 슐레지엔 역 인근이었던 그 광장을 나는 알고 있었다. 독일은 하나도 변한 것 같지 않았다. 모든 곳이 효율적으로 운영되었으며 깔끔했다. 건물들은 사생활을 지향하거나 순전히 크기에 몰두했고, 정원은 공들여 조성돼 있었다. 나는 유대인 여행자 몇과 대화를 나누었고, 그들은 삶이 두렵다고 대꾸했다. 독일에서는 테러가 아주 비밀스럽게 행해졌고, 나라도 아주 컸다. 그런 나라에서 자신의 운을 시험 중이던 사람들이었으니, 체제의 어두운 면을 거의 모른다는 게 내가 받은 인상이었다. 아무튼 내가 러시아인이었고, 그래서인지 그 별것 없는 내용조차도 그들은 나와 나누는 걸 저어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소련을 영광스런 나라도 인식했다.

우리는 브뤼셀에 도착했고, 니콜라스 라제레비치의 집에 임시 거처를 마련했다. 라제레비치는 부모가 러시아인인 생디칼리스트 투사로, 수즈달에 투옥되었다가 소련에서 쫓겨난 친구였다. 그는 실업수당으로 먹고살았다. 시청에 가서 실업자들에게 최소 가격으로 제공되는 식사를 받아먹었다. 그가 내게 나눠준 식사는 진한 스프, 스튜, 감자였고, 나는 탄성을 내질렀다. "러시아에선 당 고위 관료들만 이렇게 먹을 수 있는데!" 그의 집은 방이 세 개였고, 자전거와 축음기도 있었다. 그 벨기에인 실업자는 소련에서 보수가 괜찮은 기술자만큼 쾌적하게 살고 있었다. -579쪽





1937년 당시 유럽은 대공황을 겪고 서서히 회복기에 있었으며, 새로운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한편으론, 러시아의 눈부신 경제성장에 놀라움과 함께 부러움을 보이고 있었다. 저자가 열차 안에서 만났던 독일인처럼 말이다.

그러나 러시아인들의 실제 삶은 혁명 전에 비해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고, 예술이나 사상 방면에선 더한층 악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방에서는 이를 눈치채는 사람들이 드물었는데 여기에는 볼세비키의 외교전술이 주효했다.

볼셰비키의 최대 목표라 할 수 있는 전세계 공산화를 위해선 볼셰비키의 타락상과 소비에트의 빈곤과 독재가 외부에 들어나선 안 되었다. 소비에트 볼셰비키는 다른 나라의 공산당 조직에 보조금을 지급함과 동시에 유명 인사들을 초청해서 선전전을 펼친다.


버나드 쇼는 너무 나이가 든 나머지 소비에트의 실상을 보고도 보지 못한다. 웨버 부부는 찬양 일색이었고 유명 작가인 존 스타인 벡은 긴가민가 의심했으며, 버트런드 러셀만은 소비에트의 허상을 폭로한다.

그 많은 지식인들이 어떻게 그렇게 감쪽같이 속아넘어갈 수 있었는지 믿을 수 없지만 사실이었다.

일단, 자신이 지지했던 공산주의 혁명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지식인은 일단 사고와 검증을 통해 확정된 것에 대해선 철회하거나 오류가 발생해도 쉽게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내가 틀렸다고? 그럴 리가 없다.'가 바로 지식인이 자주 빠지는 함정이다. 이들의 독단과 이기심이 얼마나 많은 이들의 삶을 지옥으로 떨어뜨리고 생명을 잃게 만들지에 대해선 '내 알 바 아닌 것'인 셈이다.

그렇게나 많은 인문 철학서들을 읽고 자기 희생과 인류애로 똘똘 뭉친 사람들이 종교의 원리와 공산주의의 공통점을 분별해내지 못했는지 의아할 따름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볼셰비키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지 않은 볼셰비키 당원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저자와 같은 이들의 양심 선언이나 폭로에 대해서까지 귀를 닫았다는 점이다.



빅토르 세르주는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을 꾸며 살았고 그 꿈을 품고 죽었다는 점에서 골수까지 혁명가였다. 그는 정말 볼셰비키가 만민의 평등과 행복을 이룰 수 있다고 믿었을까?

일단, 평등과 행복 사이에는 등식이 성립할 수 없다.

'모두가 평등해지면 다같이 행복해진다'는 말은 타고난 신분을 결코 벗어날 수 없었던 사회에서 내세를 약속하면서 민중을 달래고 안심시키던 성직자들의 전용 멘트에 불과하다.

사람들은 남들과 같지 않을 때 불안해하고 같아지려고 노력하지만, 막상 남들과 같아지면 그 순간부터 남들과 달라지려고 노력하는 존재라는 걸 공산주의자들은 인식하지 못했거나 무시했다.

이런 점에서 봤을 때, 공산주의는 자본주의에 패배한 게 아니라 개인주의에 패배한 셈이다.



이 책을 읽는 과정은 인내의 연속이었다.

듣도 보도 못한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들과 잘 알려지지 않은 크고 작은 사건들의 실타래 속을 헤맸다.

'공인된 러시아 혁명사가 아니라 한 개인의 체험담을 읽는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라는 질문이 떠나질 않았다. 솔직히 지금도 이 질문에 대해 스스로 납득할 만한 답은 찾지 못했다. 다만, 개인의 삶은 역사와 사회 속에서 조형된다는 점이다. 당연한 말인데 이게 참 실감되지가 않는다. 현재 나의 하루 하루가 사회 구조에 의해 만들어지고 이 사회 구조는 다시 과거와 미래를 잇는 역사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결정된다는 걸 쉽게 느낄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반을 살았던 빅토르 세르주라는 인물의 삶을 통해 19세기와 결별하고 20세기를 맞이했던 유럽의 일부분을 보고 나니, 자연스럽게 당시 우리나라 조선인의 삶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국제적으론 테러리스트로 알려진 안중근 의사와 이봉창 열사며, 가두시위 주모자들 중 한 명이라고 소개되었을 뿐인 유관순 열사 등등... 개개인의 삶을 자세히 살펴보는 과정은 몇월 며칠 무슨 일이 발생했다는 식으로 기록되어 전해지는 역사적 사건을 아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분명 지어낸 이야기지만 또한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드라마 <파친코>가 그 어떤 역사다큐멘터리보다도 더 당시 조선인들이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를 실증하는 것처럼....



삶은 언제나 역사보다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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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1 - 윌슨에서 케네디까지 PEACE by PEACE
올리버 스톤.피터 커즈닉 지음, 이광일 옮김 / 들녘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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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20세기 특히 중,후반의 역사는 미국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그들은 '보통 사람의 세기'를 만들 수도 있었지만 결국 '미국의 세기'를 만들고야 말았고, 결과는 냉전은 종식되고 적은 사라졌지만 새로운 적을 스스로 만들어 내면서 전쟁의 시대를 연장시켰다.  


역사에서 '만약'이라는 가정만큼 무의미한 건 없다지만 아니할 수가 없다.


만약, 2차 대전을 종식시켰던 루스밸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대통령 자리에 올랐던 부통령 트루먼 대신 월리스가 부통령이 되었더라면?


만약, 흐루시초프 소련 서기장과 함께 쿠바 미사일 위기를 계기로 핵무기의 위험을 깨달은 케네디가 저격당하지만 않았더라면?


만약, 라틴아메리카가 하나의 국가라고만 알고 있던 무식한 배우 출신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지만 않았더라면?


만약, 플로리다주 선거인단이 공화당 지지자의 폭력시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재검표를 강행했더라면?




미국은 양차 대전을 통해 19세기식 유럽의 식민주의 체제를 비판했지만 자신들은 라틴아메리카에서 친미독재정권을 지원하는 식으로 간접 통치를 강화해나갔다. 인권, 자유, 평화 등등 보편적 인류 가치는 언제나 립서비스에만 국한되어 있었다. 국제적인 상호 협정을 깨는 건 언제나 그들이었고, 심지어 그 원인을 상대편에게 돌리기 일수였다.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개인적 이익을 위해 전세계인을 상대로 대량살상무기로 공격하겠다는 협박을 수시로 했고, 실제로 치명적일 뿐만 아니라 비인간적인 방식으로 생명을 빼앗아왔다.


미국은 탄생 자체가 폭력이었다.

지난 200년 동안 미국은 인디언과 흑인 및 라틴아메리카인들을 희생시켜 성장의 발단을 닦았고, 이를 영구히하기 위해 전세계뿐만 아니라 심지어 지구와 우주까지도 공격과 지배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결국 누군가는 나서야 하고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라고 면죄부를 부여한다면, 인류의 역사는 마녀 사냥과 종교 전쟁으로 얼룩졌던 중세에서 단 한 발자국도 진보하지 못했음을 인정하는 셈이다. 


이 책은 언론과 증언 및 위키리크스 등을 통해 공개된 자료와 내용들을 바탕으로 엮여졌다. 

덕분에 현장감과 사실성은 높지만 올바른 역사관과 세계관이 부족한 상태에선 공포와 분노만 키울 뿐 문제의 핵심을 파악하는데는 다소 어려움이 따른다. 우리가 이 책으로부터 배워야 할 가장 큰 교훈은 폭력은 공포와 분노를 먹고 산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평화를 폭력으로 얻겠다는 미국의 발상과 주장은 새빨간 거짓말에 불과하다. 



끝으로, 빌 클린턴 대통령만 누락되어 있다.

아마도 그 이유는 다음 둘 중 하나이리라. 

너무 완벽해서 흠잡을 게 없거나 아니면 한통속이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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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 마르크스에서 카스트로까지, 공산주의 승리와 실패의 세계사
로버트 서비스 지음, 김남섭 옮김 / 교양인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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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는 어느 불운한 철학자의 기록에서 발췌되어 무분별하게 편집되고 적용되어 계급 투쟁과 권력의 도구로 쓰였다가 폐기처분된 이론이다.

'공산주의'라는 단어부터 부정확하고 자의적으로 통용될 정도로 미숙하고 오류 투성이인 사상이 체계적인 연구나 검증을 거치지도 않고 한 세기에 걸쳐 인류 사회에 돌이킬 수 없는 폐해를 끼쳤다는 게 놀라울 정도다.



레닌의 권고는 앞뒤가 맞지 않았고 모호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공산주의 정책을 요청하는 한편으로 사회주의 개혁과 '유럽 사회주의 혁명'도 요구했다. 극좌 진영에서는 오직 좀 더 지적 수준이 높은 활동가들만 이 레닌의 이론에 담긴 의미를 파악했다.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는 항상 사상과 방법이 다양하게 존재했다. 공산주의, 사회주의, 사회민주주의, 그리고 심지어 아나키즘 같은 용어들이 어느 정도 겹치지 않은 때가 한 번도 없었다. 레닌은 자신의 정당과 사상을 나머지 정치적 좌파와 구분하기 위해 공산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는 특히 마르크스주의 논쟁을 독점하고자 했다. -111쪽


볼셰비키는 1917년에 스스로 '러시아공산당'으로 이름을 바꿈으로써 다른 사회주의자들과 차이를 강조했다. 레닌의 이론적 논설은 이 분열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레닌과 볼셰비키에게 '사회주의'란 미래의 인류 발전에서 '공산주의'의 하위 단계였다. 그러나 볼셰비키는 여전히 자신들을 공산주의자일 뿐 아니라 사회주의자라고도 불렀다. 그 결과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들은 자기 나라의 사회당을 공산당과 구별할 수 없는 당으로 색칠할 수 있었다. 그것은 수십 년 동안 계속된 혼란이었다. -174쪽


마오쩌둥은 자신의 국가를 '프롤레타리아 독재'도 아니고 '인민민주주의'도 아닌 '인민민주주의 독재'라고 규정했다. 소련의 정치 사전에는 없는 용어였다. 조용히 그는 소련의 정신적 보호와 감독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마오쩌둥은 농민들이 주요 혁명 계급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지주들을 파멸시킬 의향은 있지만 자본가 계급 일반과는 싸우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마오쩌둥은 자신이 사용하는 수단이 독재적이긴 해도 그것이 자신의 뒤에 인민들ㅡ또는 그 구성 분자들의 대부분ㅡ을 단결시키고 있다고 역설했다. -446쪽




자연의 법칙이란, 말그대로 '자연히 되는 것(自然)'이다. '자본주의의 멸망ㅡ>프롤레타리아 혁명ㅡ>공산주의 사회'가 자연의 법칙이라면 굳이 애쓰지 않아도 그렇게 되는 것이지 않겠는가.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연의 법칙처럼 인류의 역사 발전에도 일정한 법칙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내놓은 가정은 불완전했고 모호했는데 사상적으로 완전해지기도 전에 불안정한 세기말이라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야심가들에 의해 재해석되면서 왜곡, 확산되었다.



레닌은 무장 봉기와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의해 '부르주아 국가'가 산산이 부서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부서진 자리에 완전히 새로운 국가가 창설되어야 했다. 그는 이 새로운 국가가 1905년과 1917년에 러시아에서 목격했던 토대, 즉 소비에트 위에 건설되기를 기대했다. 소비에트는 노동자와 병사들이 스스로 선출하고 조직했기 때문에, 레닌에 따르면 마르크스주의적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중핵으로 전환될 수 있을 것이었다.

레닌은 그것은 무조건 독재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그외의 다른 어떤 것도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보장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중간 계급과 상층 계급은 필연적으로 반혁명을 지지할 것이며 그들이 머리를 쳐들 때마다 억압되어야 할 것이다. 그들의 시민권은 철회되어야 했다. 레닌은 독재가 국가 터러를 사용하게 될 것이라고 무심결에 말을 흘렸다. 그러나 레닌은 이 말을 일단 소비에트가 권력을 잡으면 '인민들'의 권력이 반혁명 세력에 단호히 맞설 것이라는 예측과 결합시켰다. 혁명은 꽤 쉬운 일이 될 것이다. 내전이 발발하더라도 곧 종결될 것이다.

<국가와 혁명>은 좌파 정치의 담론을 영구히 변화시켰다. 1917년 이후 모든 사회주의 그룹이 반박 대상으로라도 레닌주의를 고려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사상을 형성할 수 없었다. 신성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텍스트에 끊임없이 의존하면서 레닌은 자본주의 통치를 전복한 후에는 두 개의 역사적 단계를 통과해야 한다고 상정했다. 제1단계는 사회주의 단계이며 제2단계는 공산주의 단계일 것이라고 마르크스주의는 가르치는 것 같았다. 첫 번째 단계 자체는 중간 계급의 권리를 억압하고, '능력에 따라 각자로부터, 노동한 만큼 각자에게로'라는 원리를 시행하면서 급진적인 사회, 경제적 개혁을 도입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시작할 것이었다. 사람들은 사회의 이익에 기여한 만큼 보상받을 것이다. 당국의 강제적 요구 사항이 축소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아득한 기억이 되면서, 두 번째 단계가 시작될 것이다. 이것은 공산주의 그 자체일 것이다. 가정부도 자신에게 맡겨진 행정 업무를 처리할 것이다. 역사는 종말로 다가갈 것이다. 그리하여 공산주의 체제의 작동 원리는 최종적으로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능력에 따라 각자로부터 필요에 따라 각자에게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예언은 실현될 것이다.

이 담론은 마르크스주의를 성급하고 특이하게 해석한 것이었다. 레닌은 평화적인 사회주의 전략은 결코 실행 불가능하며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뒤따를 폭력적 봉기만이 유일하고 가능한 발전 경로라고 절대적으로 고집했기 때문에 공격받기 쉬웠다. 이에 못지않게 논쟁적인 점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가르침'에 대한 자신의 이해만이 유일하게 옳다는 주장이었다. 레닌은 그들의 '제자'로서 부끄럼 없이 앞장섰다. -109~110쪽




루터의 종교 개혁이 중세를 끝장내고 새로운 사상(프로테스탄트)을 탄생시켰지만 마녀사냥과 신대륙 침략이라는 비극을 초래했던 것처럼, 근대가 끝나갈 무렵인 19세기 말 공산주의는 만인이 평등한 공동체 즉 종교에서 주장하던 천년왕국 건설을 기치로 내걸고 기존 질서를 무너뜨렸지만 (일당, 일인) 독재로 귀결되고 말았다. 차이가 없는 만인평등은 개인차를 무시하는 전제에서만 가능하다는 것과 인간은 개개인의 차이와 능력을 인정받는 사회에서 더한층 성장할 수 있음을 이보다 더 여실히 증명할 수는 없었다.



똑같이 만민평등과 천년왕국을 주장했지만 공산주의 혁명에선 종교에서는 배제되었던 '폭력'이라는 조건을 포함시켰다. 육체적인 고달픔을 마음의 평화에서 찾아왔던 신앙심 깊은 인간은 더이상 찾아 볼 수 없었다. 신이 죽은 자리엔 이성과 과학 대신 혁명(독재)과 폭력이 자리잡으면서 인간성이 말살되어 갔다. 다시 야만의 시대로 되돌아간 것이다.



또 다른 요인은 혼란스런 변화의 시기에 필요한 정신적 위안을 소비에트 체제가 대부분의 국민들에게서 빼앗았기 때문이었다. 마르크스-레닌주의는 항상 먼 미래의 낙원을 예언했다. 종교 집단은 인민위원의 강압에 신음했다. 억압하지 않았더라면 없어졌을지도 모를 관습적인 믿음들이 새로운 열풍을 맞았고 주의에는 미신이 비이성적이라고 알려줄 사제나 이맘, 랍비가 거의 없었다. 이 추세는 도시화가 급속히 진전되면서 더욱 심해졌다. 그것은 1970년 대 중반 캄보디아에 폴 포트 정권이 들어설 때까지 세상 모든 곳의 공산주의 지도자들에게 기분 좋은 추세였다. 농민들은 집단 농장을 떠나 유급 일자리를 구하고자 도시로 흘러들었다. 농촌에서 지배적이던 태도도 따라서 도시로 옮겨왔고 그 태도는 제거하기 힘들었다. 종교의 자리를 비운 공산주의 관리들은 러시아에 기독교가 확산되기 전에 존재했던 관념들로 그 자리가 채워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259쪽


너무 합리적이어서 레닌의 계획과 함께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저 당을 떠날 뿐이었다. 옛날에, 그러나 그리 멀지 않은 옛날에 천년왕국 운동들이 있었고 볼셰비키는 이 운동들 가운데 일부를 찬양했다. 그들은 16세기 독일 뮌스터의 제세례파를 찬양했다. 또 프랑스혁명의 자코뱅 테러리스트들을 찬미했다. 톰마소 캄파넬라와 토머스 모어는 그들의 독서 목록에서 두드러진 인물들이었다. 볼셰비키는 거의 마르크스와 엥겔스에게 영향을 받은 만큼이나 완벽한 사회에 대한 이들의 오랜 꿈으로부터도 영감을 얻었다. 볼셰비키는 이 꿈을 실현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114쪽




인류의 목표는 종교에서 위안을 얻지 않아도 충분히 괜찮은 세상을 만드는 데에 있지 종교적 소망을 실현시키는 데에 둬서는 안된다. '병들고 가난한 자'들은 마땅히 보호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들이 사회의 주인공이 될 수는 없다. 그런 사회는 당연히 발전할 수 없고 오래 존속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민주-자본주의사회는 능력에 따른 개인차를 존중하되 그 과정과 결과가 공정해야 한다.



과거 신분사회에서 신분이 세습되었듯이 현대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자본의 세습을 당연시 하고 있는데, 이것이 불평등의 또다른 기원이 되고 있다. 왕의 아들로 태어나 왕이 되는 것이 부당하다고 여겼다면 부자의 아들로 태어나 부자가 되는 것 또한 부당한 것이어야 한다. 모든 불평등을 없애고 완전 평등 사회를 구현하기 위한 일련의 노력들이 전부 실패로 판명난 지금, 인류 사회에서 불평등 자체는 영원히 소거될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며, 그 불평등이란 세습이 아닌 개인의 능력과 노력의 차이에서 발생해야함을 분명히 해야 한다.



지난 두 세기가 수 천 년 인류사회를 지배해온 신분의 세습을 철폐하는 과정이었다면, 앞으로의 세기는 자본의 세습을 막는 시대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천년왕국을 부르짓는 사이비 종교가 그렇듯이 공산주의는 언제든지 되살아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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