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끝
윌리엄 트레버 지음, 민은영 옮김 / 한겨레출판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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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엇은 안에 들어가고 싶지 않아 정원과 포도밭을 거닌다.
신발은 흠뻑 젖었다. 시내에서 종소리가 들린다.

산타 파비올라에서는 6시에, 다른 어떤 곳에서는 6시에서 1분이 지난 뒤에.

물이 뚝뚝 듣는 포도나무 사이에 홀로 선 그녀는 뭔가가 분명히 연결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도무지 잡아낼 수가 없다.
그녀의 생각 속에는 텅 빈 곳도 있고,
동시에 빽빽하게 엉켜 혼란처럼 느껴지는 곳도 있다.

러다 마침내 깨닫는다. 수태고지는 비 온 뒤에 그린 것이다.

아치들 사이로 흘끗 보이던 그 먼 풍경은 그녀가 지금 보고 있는 이 순간의 표정을 짓고 있다.
천사가 온 것은 비 온 뒤였다.

그 첫 서늘한 순간을 택한 것이다.

 

-윌리엄 트레버 <비 온 뒤> 139쪽 

 

 

 

 

 

 

연인과 막 헤어진 해리엇은 열 살 무렵 부모님과 함께 여행을 왔던 산타 파비올라를 다시 찾는다. 
그녀는 그 뜨겁던 사랑이 어떻게 그렇게 갑자기 끝나버릴 수 있는지 그 이유를 알고 싶다. 



연애가 끝나면 생각은 늘 혼란스럽고 진실은 안개에 싸여 있다. 진실은 아예 없다, 종종 그렇게 보인다. 사랑이 기대를 저버렸다. 관계가 또다시 부서져 사라졌을 때 그녀는 그렇게 느꼈다.(p124)


 

여기까지 읽었을 때, 어디선가 빗속을 구르는 바퀴소리가 들려왔다. 
밤새 내리던 비는 어느덧 그쳤고, 이른 아침의 고요함을 뚫고 종소리가 멀어져 갔다. 

해리엇에게 '비 온 뒤' 깨달음이 찾아왔듯, 나에게도 깨달음이 찾아온 걸까?  
 

             
우연히 읽은 <여름의 끝>은 작가의 다른 작품들을 외면하고 싶을 만큼 좋고 또 좋았다. 
'첫작품의 감동을 능가하는 후속작은 없다'거나 '한계효용의 법칙' 따위의 그럴 듯한 이유 때문이 아니라 소위 '개인적 취향'에 저격당했다고나 할까. 
한 단락... 한 단락... 한 문장... 한 문장...
모두 나만 간직하고 싶은 그런 느낌을 품게 만들었다.  

이미 고인이 된 윌리엄 트레버는 글로써 표현되어질 수 없는 것들을 표현하려는 무모한 시도 대신 표현되어질 수 없음 그 자체를 표현한다. 그래서 그의 문장들은 처음 읽으면 아무런 느낌이 없다가 잊을 만하면 들려오는 빗소리처럼 서서히 마음을 적신다. 


그는 떠날 것이고, 매일 아침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그가 떠났다는 사실이 될 것이다. 지금 아침에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이 그가 있다는 사실인 것처럼. 눈을 뜨면 분홍색으로 칠한 벽과 빈 벽난로 위의 성화, 그리고 창가에 놓아둔 자신의 옷이 지금처럼 보일 것이다. 그는 사라질 것이다. 죽은 사람들이 사라지는 것처럼. 그가 떠났다는 사실은 부엌에서도, 마당에서도, 하루 종일 머릿속을 맴돌 테고, 레이번 스토브에 넣을 무연탄을 부엌으로 옮길 때도, 교유기를 끓일 때도, 암탉에게 모이를 줄 때나 토탄을 쌓을 때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들판에서도, 달걀을 들고 사제관 문이 열리길 기다릴 때도, 코널티 양이 동전을 세는 동안에도, 보청기를 낀 남자가 단열용 전기제품 보호구나 소젖 패드 등을 찾을 때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남편 옆에 누워 있을 때도, 그를 위해 음식을 만들고 빵을 자를 때도, 올드타임 춤곡이 흘러나올 때도.     -윌리엄 트레버 <여름의 끝> 185~186쪽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을 떠날 것임을 직감하고 약속과는 달리 결국 자신은 그를 따라나서지 않을 것임을 예감하는 슬픔이, 옮겨지는 시선을 따라 차곡차곡 차오른다. 처음엔 벽난로 위의 성화와 창가에 놓아둔 옷에, 그 다음엔 마당과 외양간과 부엌에, 그리고 집밖의 들판과 사제관에, 결국은 일상 전체로 이어지고 심지어는 행복해야 할 미래의 어느 순간조차도 슬픔으로 뒤덮힐 것임을 암시한다.  

 

 

 

그가 길을 잃지 않았다면 그들은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루시는 그 사실을, 그들이 만나지도 않았고 레이프의 존재를 알지도 못하는 상황을 생각해보려 했다. 그녀에게는 그가 난데 없이 나타난 것 같았기에 그가 라하단을 떠나면 난데없는 곳으로 돌아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것은 아닌지 궁금했다. 그녀는 절대 그를 잊지 못할 터였다. 평생 그간의 수요일 오후들, 그리고 지금 흐르고 있는 시간을 기억할 터였다. 자신이 나이가 들어, 레이프가 꾸며낸 존재였고 이 여름도 마찬가지였다고 믿게 되는 날이 온다 해도 상관없었다. 시간은 어차피 기억을 꾸며낸 일로 바꾸어놓기 때문이었다.   -윌리엄 트레버<루시 골트 이야기> 187쪽

"너는 네 만족스러운 삶으로 돌아가야 돼. 내 삶의 손님이 되는 게 아니라, 너는 내 삶에서는 손님밖에 될 수 없기 때문이야. 레이프, 내가 너를 사랑하기는 하지만, 우리가 서로 사랑할 때 우리는 우리에게 속하지 않은 것, 우리 몫이 아닌 걸 훔치고 있는 거야. 달링 레이프, 우리는 기억으로 만족해야 돼." (...)
"우리가 그렇게 하겠다고 마음먹기만 하면 기억이 모든 것이 될 수도 있어. 하지만 네 말이 맞아. 너는 그러면 안 돼. 그건 나에게 해당하는 말이고 나는 그렇게 할 거야. 나는 우리 사랑의 기억이 전부인 삶을 살 거야. 나는 눈을 감고 내 입술 위에 네 입술을 다시 느낄 거고 매일 파도를 보듯 또렷하게 네 웃는 얼굴을 볼 거야. 우리는 놀라운 친구였어. 레이프! 이 여름이 끝나지 않기를 우리가 얼마나 바랐는지! 앞으로 오는 여름은 다를 거야. 우리 둘 다 그걸 알아." -윌리엄 트레버 <루시 골트 이야기> 203~205쪽             

                                                                                             



만약 아름다운 미래를 꿈꾸며 불만족스러운 현재를 견뎌낼 수 있다면 아직 젊거나  여전히 젊다고 생각하는 거다.  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 미래를 위해 현재를 기꺼이 내놓을 수 있다는 건, 가진 거라곤 시간밖에 없는 사람들에게나 가능하기 때문이다. 반면, 남겨진 시간이 터무니 없이 짧다고 느끼는 사람일수록 미래에 대한 기대 대신 과거로부터 소환된 추억을 현재의 거울로 삼는다. 미래의 어느날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오늘이 부끄럽지 않도록 애쓴다. 이것이 곧 영원히  돌고 도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우리가 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이다. 시간은 보내는 것이 아니라 채우는 것이다. 반성과 속죄로, 추억과 연민으로, 그리고 한없는 그리움으로...


'모든 인연은 언젠가 끝이 나겠지만, 기억 속에 영원히 살아있다.' 

윌리엄  트레버는 설명할 수는 없지만 느낄 수 있는 등장인물들을 통해 설명할 수는 없지만 느낄 수 있는 것들을 그려낸다. 
나는 작가에게 이보다 더 필요한 덕목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솔직히 고백하면,
나는 윌리엄 트레버의 문장들 덕분에 예정된 이별에 대한 직감들과 다가올 슬픔에 대한 예감들을 견뎌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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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키스패너
프리모 레비 지음, 김운찬 옮김 / 돌베개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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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프리모 레비를 알게 된 건 지금으로부터 일 년 전 쯤이다.

그는 이탈리아 출신 유대인으로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돌아온 후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몇 권의 책들을 썼다. 특히『이것이 인간인가』는 출판 당시에는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하다가 뒤늦게 주목받아 증언문학으로는 드물게 각종 문학상을 수상하면서 그를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하지만 프리모 레비는 꾸준히 글을 쓰고 발표하면서도 페인트 공장에서 신제품을 개발하고 품질을 관리하는 화공학자인 자신의 본업을 끝까지 고수한 것으로 유명하다. 『멍키스패너』는 그가 회사을 퇴직하고 본격적으로 작가의 길로 들어서서 쓴 첫작품이다. 하지만 이 작품 역시 그의 전작들처럼 보고 듣고 겪은 '경험의 기록'이라는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멍키스패너』의 주인공은 두명이다. 한명은 작중 화자인 '나'이고, 다른 한명은 '파우소네'다. '나'의 직업은 화학자로 이탈리아의 한 리스공장에서 근무하고 있다. 한편 파우소네는 조립공으로 러시아, 알래스카, 인도 등지를 떠돌면서 산 위에 송전탑을 세우는 작업에 투입되는가 하면 악어가 득실거리는 강 위에 현수교를 연결하기도 하고 빙하가 떠다니는 북극해에 원유시추시설 설치작업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한다. 두 사람은 우연히 볼가강 근처 작업장의 외국인 노동자를 위한 숙소에서 만난다. 사실, 파우소네는 과묵하고 말하기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이상하게 화자 앞에서만큼은 수다쟁이로 돌변해서 단 한번도 꺼낸 적 없는 이야기들을 쏟아낸다. 물론, 작품 속 화자는 작가인  프리모 레비라는 건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나는 고용주와 많이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그는 언제나 바빴고 나도 바빴으니까요. 하지만 우리는 곧바로 마음이 맞았어요. 그도 허풍 부리지 않고, 자기 일을 알고, 다른 사람보다 크게 말하지 않으면서도 지휘할 줄 알고, 자신이 주는 돈을 일일이 세어보게 만들지 않고, 누가 실수해도 크게 화내지 않지만 자신이 실수하면 곰곰이 생각해보고 용서를 구하는 그런 타입이었기 때문이지요. 그도 이곳 출신으로 당신처럼 자그마하고, 다만 약간 더 젊어요. - 22쪽


"하지만 당신도 알다시피 우리는 자신의 영혼을 모든 작업에, 아주 이상한 작업에도 쏟아붓지요. 아니, 이상한 작업일수록 더 많은 영혼을 쏟아부어요, 나에게는 내가 하는 모든 작업이 첫사랑 같아요." -62쪽


"그런데 당신은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게 만든 멋진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요? 당신 외에는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 67쪽


"만약 당신이 나름대로 신중함을 갖고 있지 않으면 조만간 좋지 않게 끝나요. 신중함은 직업보다 더 배우기 어려운 것이에요. 대부분 나중에 배우게 되는데, 곤경을 통과하지 않고 배우기는 힘들어요. 조그마한 곤경을 곧바로 통과하는 사람은 행운아예요." -194쪽


" 전혀 어려운 것 없고 모든 것이 언제나 똑바로 이루어지는 일을 하는 건 분명히 정말 지겨울 것이고, 결국에는 사람들을 멍청이로 만들 거예요. (...) 만족스럽게 살기 위해서는 당연히 무엇인가 해야 할 일이 있어야 하지만 너무 쉽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아니면 무엇인가 원하는 것이 있어야 하지만 그렇게 무분별한 욕망이 아니라 도달할 희망이 있는 것이어야 해요. " - 215~216쪽



 

아무 생각없이 내뱉는 것 같은 파우소네의 말들은 마치 진흙 속의 진주처럼 의미심장하게 반짝거린다. 


자신의 일에 대해 여러 말 하지 않으면서도 명확히 알고 있고, 타인의 실수에 대해서는 관대하면서도 자신의 실수는 쉽게 잊지 않으며, 목청 높이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의견을 정확히 표현하고, 신경쓰지 않아도 될만큼 돈계산이 깔끔한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게다가 심지어 자신이 하는 모든 일들을  첫사랑처럼 대하는 사람이 있다면?



 

만약 운명이 우리에게 선물할 수 있는 개별적이고 경이로운 순간들을 제외하면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것은(불행히도 그건 소수의 특권이다) 지상의 행복에 구체적으로 가장 훌륭하게 다가가는 것이 된다. 하지만 그것은 소수만이 알고 있는 진리이다. 그 무한한 영역, 직업의 영역, 간단히 말해 일상적인 일의 영역은 남극 대륙보다 덜 알려져 있다. -121쪽


분명 행복할 것이다. 

그런데 위 인용문에서처럼 자신의 직업을 사랑하고 그 일에 전적으로 몰입하며 이를 통해 완전한 기쁨을 누리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대다수 사람들은 어쩔 수없이 일을 하는 '노동하는 인간'일 뿐이다. 영혼없는 노동은 형벌에 가까워서 아무리 오래 종사해도 숙련(熟練)되지 않고 정통(精通) 할 수 없다. 정통이란 억지로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이르는 경지를 말한다. 마치 몸에 밴 습관처럼 정통하면 실수도 예외도 있을 수 없다. 만약 이와같은 일들이 발생한다면 그건 더 나은 향상과 성장을 위한 밑거름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완전으로 향하는 과정의 일부일 뿐이다. 유능하다는 건 자신의 작업(직업)에 완전히 숙달되었다는 뜻이고, 숙달이란 곧 습관을 통해 완전함에 이르는 것이므로 완전함이란 습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직업적으로 이런 경지에 도달한 사람을 마주하면 놀라움과 함께 경외심을 느끼곤 한다. 비록 그 직업은 흔하고 미천할지언정 그 작업은 특별하고 숭고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파우소네가 엄청난 일을 했다거나 특별난 경험을 한 것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무미건조하고 다소 지겹기까지 하다. 왜 아니겠는가. 설계 도면대로 볼트를 너트에 끼우고 적당한 힘으로 멍키스패너를 돌려 뭔가를 조립하는 일은 솔직히 단순단복에 가까운 일이라서 뭔가 새롭고 창의적인 기술이나 재능의 발휘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수십 수백 미터에 달하는 철교와 철탑을 떠올리면 얘기는 달라진다. 간단한 볼트와 너트의 연결로 이루어진 그 거대한 조립물들은 더이상 단순한 구조물이 아니라 그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절대성과 웅장함을 갖춘 완전체로써 기능하고 존립하기 때문이다. 단어와 단어가 결합하여 한 문장이 되고 문장들이 모여 문단을 이루어 마침내 한 권으로 만들어진 책이 '작품'으로써 영원히 존재하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가 공통으로 갖고 있는 것에 동의했다. 스스로를 측정할 수 있고, 측정에 있어 다른 사람들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작품 안에서 자기 모습을 비춰볼 수 있다는 장점에 대해서 말이다. 당신의 창조물이, 빔 위에 빔이 올라가고, 볼트가 하나하나 조여지면서 확고하고, 필연적이고, 대칭적이고, 목적에 합당하게 자라나는 것을 바라보는 즐거움, 그리고 작업이 끝난 뒤에 바라보면서 아마 당신보다 더 오래 지속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아마 당신이 모르고 또 당신을 모르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즐거움에 대해서 말이다. 아마 당신은 나이를 먹은 뒤에 다시 당신의 창조물을 찾아갈 수도 있고, 아마 그것은 아름다워 보일 것이다. 물론 그것이 오직 당신에게만 아름답게 보이더라도 상관없을 것이며, 당신 자신에게 '아마 다른 사람은 해낼 수 없을 거야"하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 79쪽



 

내 기준에 비춰 볼때, 프리모 레비는 균형잡힌 인물에 가깝다.

일과 가정 그리고 취미 등 모든 방면에서 최선을 다했고 또 최고의 결과를 얻었다. 그는 적당한 운과 재능을 타고났고 또 남못지 않은 불행을 겪기도 했지만, 그의 정신과 몸은 그로인해 망가지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 굳건해졌다. 안정된 삶을 지키고 누릴 수 있는 겸손과 여유를 가지고 있었으며, 타인의 평가와 인정보다는 자기만의 삶의 기조를 유지하고 지키는 쪽을 택했다. 그리고 그 어떤 업적이나 명성을 추구하지 않았으며 소박하고 조용히 삶을 마무리하고 싶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프리모 레비야말로 진정한 '공작인(Homo Faber)'이라고 할 수 있겠다.  

공작인, 즉 호모 파베르는 호모 사피엔스와 호모 하빌리스 그리고 호모 루덴스를 하나로 결합한 인간 유형으로, 단순히 도구를 사용할 줄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창의적으로 작업하며 일 자체를 즐길 줄 아는 인간이다.


 

『멍키스패너』는 프리모 레비가 파우소네라는 또 한명의 호모 파베르를 내세워서 '진정한 호모 파베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대해 정직하게 써내려간 모범답안같은 작품이다.  요즘처럼 '워라벨'이 중시되는 시대에 호모 에코노미쿠스(경제적인 인간)도 호모 폴리티쿠스(정치적인 인간)도 아닌, 호모 파베르로 사는 것이 답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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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
마이클 커닝햄 지음, 정명진 옮김 / 생각의나무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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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늘 꿈꿔왔던 작품이다. 

좋아하는 작가나 작품을 모티브로 삼아 전혀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내면서도 독자로 하여금 깜짝 놀랄만큼의 기시감(旣視感)을 불러일으킨다. 



 

그녀는 집을 나서서 길을 재촉하고 있다. 날씨에 비해 지나치게 두터운 코트를 걸치고서, 때는 1941년, 또 다른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녀는 레너드 앞으로 짤막한 편지 하나를 남겼다. 바네사 앞으로 쪽지를 남기는 일도 잊지 않았다. 그녀는 결단을 내고야 말겠다는 표정으로, 자신이 무슨 짓을 하게 될지 너무도 잘 안다는 표정으로, 강을 향해 가고 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그녀는 언덕진 풀밭과 교회, 그리고 점점 어둑어둑해지는 하늘 아래 여기저기 흩어져 풀을 뜯고 있는, 황록색이 연하게 묻어날 듯한 흰색으로 더욱 눈에 두드러져 보이는 양 떼에 거의 넋을 놓고 있다. - 마이클 커닝햄 『세월』 9쪽-


버지니아 울프의 자살 장면으로 시작하는 이 작품은, 잘 알려져있다시피 그녀의『댈러웨이 부인』을 모티브로 삼고 있다.

 


 

꽃은 자기가 사오겠다고 댈러웨이 부인은 말했다. 문을 열고 나서자 신선한 대기 속으로 뛰어드는 것 같았다. 아침 공기가 몸을 감쌌다. 빅벤이 시종을 쳤다. 종소리가 묵직한 원을 그리며 퍼졌다. 거리는 생명력이 넘치고 모든 것이 매력적으로 보였다. (...)

사람들의 시선 속에, 활개치며 성큼성큼 뚜벅뚜벅 걸어가는 사람들 가운데, 울부짖는 아우성 속에, 마차, 자동차, 버스, 짐차, 그리고 허청허청 발을 질질 끌면서 춤추는 샌드위치맨(sandwich man) 속에, 악대와 손풍금 속에, 환성과 종소리와 그리고 머리 위를 나는 비행기의 기묘하게 찢어지는 듯한 폭음 속에, 이러한 것들 속에 그녀가 사랑하는 것이 있었다. 그리고 인생이 있었다. 그리고 런던이 있었고, 6월의 이 순간이 있었다. - 버지니아 울프 『댈러웨이 부인』7~12쪽-


 

저녁 파티에 쓸 꽃을 사러나가는 장면으로 시작하는『댈러웨이 부인』은 마르셀 프루스트의『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으로 유명하다. 버지니아 울프는 '소설의 극치'로 불리는 이 작품을 읽고 나서,  '이제 나보고 도대체 무엇을 쓰란 말인가?' 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나 또한 탄식하고 말았다.

버지니아 울프에 대한 이 완벽한 이해와 존경심이라니...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와 작품에 대해 가질 수 있는 '궁극의 극치'가 아닐까 싶다.


마이클 커닝햄은 열 일곱 살 때 『댈러웨이 부인』을 읽고서 받았던 깊은 충격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있다가 『세월』이라는 작품 속에 고스란히 쏟아놓았다. 작품의 구조와 문체뿐만 아니라 주제까지도 완벽하게 구현해냈다. 


그는 여기에 멈추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버지니아 울프의 남편 레너드 울프의 목소리를 빌어 그녀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그는 지금도 가끔 그녀 때문에 깜짝 놀랄 때가 있다. 그는 그녀가 아마 영국에서 가장 지적인 여성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녀의 책들은 몇 세기를 두고 읽힐 것이다. 그는 다른 누구보다도 더 열렬히 그것을 믿는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아내가 아닌가. 그녀는 20년 전 케임브리지에 있던 그녀의 남동생 방에 하얀 드레스를 입고 나타나 램브란트나 벨라스케스의 작품만큼이나 그를 놀라게 만들었던, 키가 훤칠하고 창백한 버지니아 스티븐이었고, 지금 이 순간 그의 앞에 서 있는 그녀는 버지니아 울프이다. - 마이클 커닝햄『세월』54쪽 -


나 역시 동감하는 바이다.

그녀는 20세기 초 영국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지적인 여성일지도 모른다. 지성과 감성을 갖춘 수많은 현대 여성들은 버지니아 울프에게 저마다 크고 작은 빚을 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남여 차이에 따른 구분을 뛰어넘는 그녀의 페미니즘은 여성주의에 국한되지 않고 범인류애로 확대되었으며, 그녀가 생전에 보여준 행동과 결단력은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수단으로 삶을 마감했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퇴색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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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커닝햄의  『세월(The Hours)』 에는 세 명의 여자가 등장한다.

1923년 『댈러웨이 부인』을 집필 중인 버지니아 울프와 1951년 『댈러웨이 부인』을 읽기 위해 가출(?)을 감행하는 로라 브라운, 그리고 2001년 뉴욕에 살고 있는 클라리사 보건이다. 이들은 모두 각기 다른 시공간 속에서 전혀 다른 삶을 사는 것 같지만 결국은 모두 똑같이 흐르는 시간 속에 놓여 있을 따름이다.  마치 회전목마처럼 눈에 비치는 배경이 바뀜에 따라 전혀 다른 세상에서 전혀 다른 세계를 경험한다고 생각하지만 결국은 일정한 궤도와 속도로 움직이는 회전판 위에 서있는 것처럼 말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일찌감치 이 점을 간파했으리라. 

결국 삶이란 흐르는 시간 위에 위태롭게 서있는 것이라는 걸...

자신에게 할당된 시간을 끝까지 잘 견뎌내면서 매순간 떠오르는 의식들 속에서 생의 기쁨과 고통을 오롯이 느끼는 것이라는 걸...

 


 

지금 이 순간에는, 앞에 펼쳐질 시간들로 인해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 그녀의 마음은 흥얼흥얼 노래를 읊조린다. 오늘 아침, 그녀는 혼미를, 말하자면 막힌 파이프를 관통하여 황금에 닿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녀는 자신의 내부에서 그것을, 형언하기 어려운 제2의 자아를, 아니면 약간 더 순수한 자아를 느낄 수 있다.

만약 그녀가 신앙심이 깊다면 그녀는 그것을 영혼이라고 부를 것이다. 그것은 그녀의 모든 지성과 감정 이상의 것이고, 모든 경험을 초월하는 것이다. 비록 그것이 눈부신 금속으로 만든 동맥처럼 세 가지 모두를 관통하고 있지만 말이다.  - 56쪽 -


고통은 그녀를 정복하고, 그때까지 버지니아의 것이었던 모든 것을 재빨리 고통 그 자체로 바꿔 버린다. 그 진척 과정이 너무도 위압적이고 들쭉날쭉한 윤곽선이 너무도 선명하여, 그녀는 고통을 그 자체 생명력을 지닌 실체로 상상하지 않을 수가 없다.

래너드와 함께 광장을 거닐 때도 그녀는 그것을, 조약돌 위로 반짝이는 은빛 덩어리를,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대못을 박아 해파리처럼 흐느적거리면서도 완전한 하나의 덩어리로 남는 그 고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 110~111쪽 -



죽는 순간까지 생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고통조차 외면하지 않았던 그녀는, 마이클 커닝햄의 안내로 다시 한번 로라 브라운의 마음 속으로 걸어들어온다.




창에서 몸을 돌린다. 신발을 벗는다. 『댈러웨이 부인』을 유리가 덮힌 침실용 탁자에 올려놓고 침대에 눕는다. 방 안은 호텔에서 흔히 느껴지는 기이한 고요로, 삐걱거리는 소리와 꼴꼴거리는 소리, 그리고 카펫 위를 구르는 바퀴 소리를 짓누르는 너무나 부자연스런 고요로 가득하다.

그녀는 지금 자신의 삶에서 너무나 멀리 벗어나 있다. 그것은 참으로 쉬운 일이었다. 왠지 그녀는 자신의 세계를 벗어나서 책의 영역으로 들어선 것 같다. 물론 하늘빛의 이 호텔 방만큼 댈러웨이 부인의 런던과 더 동떨어진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물에 빠져 죽은 그 천재 여인 버지니아 울프도 죽어서는 이 방과 다르지 않은 곳에 살지도 모른다고 상상해 본다.  - 229쪽-



다섯 살 아들을 두었고 뱃 속엔 둘째 아이를 임신한 평범한 가정주부 로라 브라운은 견딜 수 없는 삶의 마지막 순간에 『댈러웨이 부인』을 마저 읽기 위해 호텔을 찾는다. 그녀는 울프처럼 죽을 것인가? 아니면 울프의 분신과 같은 댈러웨이 부인처럼 살 것인가? 하는 생사의 갈림길에서 버지니아 울프를 만난다.




그녀는 버지니아 울프를, 순결하고 착란적이며 일상의 삶과 예술의 불가능한 요구 사이에서 좌절감을 느낀 울프를 상상해 본다. 버지니아 울프가 주머니에 돌을 넣고서 강물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걸음걸이를 상상해 본다. 로라는 계속해서 자신의 배를 문지르고 있다. 그것은 아마 호텔에 투숙하는 일 만큼이나 단순할 수도 있어, 라고 그녀는 생각한다. 사실 그것은 호텔 투숙보다 더 간단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 233쪽 -


로라는 시간을 놓치지 않고 매순간을 읽는다. 여기 한순간이 있고, 저기 한순간이 흘러가네, 라고 그녀는 생각한다. 한 페이지가 막 넘어가려 한다.

그녀는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아들을 향해 침착하게 미소를 지어 보인다. 아이도 웃음으로 화답한다. 녀석은 타버린 초 끄트머리를 핥고 있다. 그 아이는 또 다른 소망을 품는다.  - 321쪽 -



자살 충동을 느끼는 엄마를 보면서 어린 아들 리처드는 무얼 느꼈을까?

리처드의 미소가 한 생명을 구원했듯, 그의 마지막 순간에 클라리사가 미소를 지어보였더라면 그도 구원받았을까?




그렇게 로라 브라운은, 목숨을 끊으려고 했다가 결국에는 실패했던 그 여인은, 가정을 뛰쳐 나갔던 그 여인은 그녀를 본따서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을 쳤던 사람들이 모두 이 세상을 하직했는데도 여전히 살아 남아 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의 전 남편이 간암에 걸려 저 세상으로 훌쩍 떠난 후에도, 자기 딸이 음주 운전자에 의해 죽임을 당한 후에도 이렇게 살아 있다. 그녀는 리처드가 창문을 미끄러져 산산조각 난 유리 위로 떨어져 내린 뒤에도 이렇게 살아 있다.

클라리사는 늙은 부인의 손을 꼭 잡는다. 그 외에 그녀가 어떤 행동을 할 수 있겠는가? - 339~340쪽-



그래,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손을 잡아주는 일 말고, 미소를 지어주는 일 말고,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때가 되어 사그라드는 저녁 햇살 앞에서...

철이 되어 떨어지는 나뭇잎 앞에서...

무심히 흘러가는 강물 앞에서...

흐릿해지는 옛사랑의 추억 앞에서...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버지니아 울프가 로라 브라운이 그리고 클라리사 로건이 그랬듯이, 삶이란 끝없이 이어지는 시간 위에 펼쳐진 기억의 조각일 뿐이라는 자각말고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버지니아 울프의  『세월(The Years)』처럼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써내려간 이 작품을 읽다보면 나도 모르게 딴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의식의 흐름'을 직접 체험한다고 생각하고 긴 호흡으로 천천히 읽어내려갔다. 마이클 커닝햄도  『댈러웨이 부인』을 읽으면서 이런저런 의식의 흐름 속을 헤매다가 이런 작품을 구상하지 않았을까? 상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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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끝의 아이들
나카와키 하쓰에 지음, 서수지 옮김 / 사람과나무사이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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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 내내, 고대사와 중세사는 그렇게 열심히 가르치고 배웠으면서도 근현대사로 넘어올수록 특히 광복 이후 현대사에 대해서는 주마간산식으로 넘어갔던 것같다.  4.19 학생의거와 5.16 혁명 및 5개년 경제개발계획과 무장공비 침투 등에 대해 배운 기억밖에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 나는 4.3 제주사건도 전태일열사 분신도 광주민주화운동도 모른 채 어른이 되어버렸다.  

비교적 자유롭게 책을 접할 수 있게 되면서, 나는 현기영의 <순이삼촌>을 통해 4.3 제주사건을,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읽고나서는 광복후 좌우이념대립과 갈등을 알게 되었고,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과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등을 읽으면서는 도시 철거민과 소록도에 유폐된 한센병 환자들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이들 소설속에 담겨 있는 내용들은 때론 스물살 청춘이 받아들이기엔 너무 끔찍해서 머릿속으로 '이건 소설일 뿐'이라고 스스로를 일깨우곤 했지만, 실제 현실은 소설보다 훨씬 더 참담했을 거라는 걸 내 마음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역사가는 소설가가 될 수 없지만 소설가는 훌륭한 역사가가 될 수 있다'는 이 말을 믿는다.

 

나카와키 하쓰에의『세상 끝의 아이들』은 소설가가 어떻게 훌륭한 역사가가 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작가는 무려 20여 년에 걸쳐 역사적 사실들을 하나 하나 확인해가면서 고쳐쓰고 또 고쳐써서 이 한편의 소설을 완성했다고 한다.  



전기도 전화도 없는 일본 센하타 마을에 사는 다마코네 가족은 이장의 감언이설과 마을 사람들의 강요에 못이겨 만주 개척촌인 다이카주돈으로 이주해 온다. 이곳에는 일본인뿐 아니라 조선에서 건너온 사람들도 살고 있었는데, 미자네 역시 평안남도 평화리라는 곳에서 왔다.



 

예닐곱 살에 불과한 다마코와 미자는 그저 서로의 말투가 조금 이상하고 옷차림이 달라도 금방 친구가 될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요코하마에 사는 마리가 아빠 손을 잡고 만주로 여행을 왔다가 개척촌에 며칠 머물게 된다. 또래였던 세 아이는 허물없이 친하게 놀다가 평소 자기들이 잘 알고 있는 세계보다 조금 더 멀리 떨어져 있는 사찰을 찾아갔다가 그만 갑자기 쏟아진 빗물에 계곡물이 불어나 텅빈 사찰에 고립되고 만다. 그곳에서 아이들은 미자가 싸온 주먹밥을 나눠 먹으면서 긴긴 밤을 서로 의지하며 지새우고 이튿날 구조된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세 아이는 뿔뿔이 흩어져 각자의 운명을 짊어지고 살아간다.

다마코는 일본이 전쟁에 져서 고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만 유괴되어 중국인에게 팔려가 중국인 메이주로서 문화대혁명을 겪는다. 가족도 이름도 심지어 일본말도 잊어버렸지만 이상하게 빗속에서 나눠 먹던 주먹밥의 온기만큼은 칠십여 년이 지나도록 다마코의 기억에 오롯이 남아 있다. 어렵고 힘들 때마다 자신이 먹기에도 부족했을 주먹밥을 기꺼이 나눠줬던 미자(욧짱)를 떠올리면서 버텨낸다. 



 

한편, 조국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미자네는 일본으로 건너간다.

피지배민족이라는 신분때문에 차별당하고 신변의 위협을 느낄 때마다, 미자는 주먹밥을 나눠 먹으면서 '예쁜 옷을 입은 것처럼 언제나 가슴을 쭉 펴고 걸어야 해'라던 마리의 말을 떠올린다. 비록 김미자 대신 도미타 요시코(富田美子)로 살아가고 있지만,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한순간도 잊지 않고 가슴을 쭉 펴고 당당하게 행동하려고 노력한다. 마치, 먼 발치에서 친구 마리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미국과 소련의 냉전 구도 아래에서 남북으로 분단된 한반도에서는 남과 북 대립의 골이 깊어졌다. 같은 반도에 사는 조선인들끼리 정치체제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으르렁거렸지만 대다수 조선인들은 그 차이조차 이해하지 못했다. 남한 각지에서 공산주의자 색출과 소탕이 시작되며 많은 사람이 체포되었다. 글을 읽고 쓸 줄 안다거나 북한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간첩 취급을 받았다. 제주도에서 일어난 4.3사건에서는 아무 근거 없이 무차별적으로 양민이 학살당했다.

힘들게 일본에서 돌아온 조선인 중에는 과거 일본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목숨이 위태로워지는 상황에 부닥치자 밀항까지 해서 일본으로 도망쳐 돌아오는 사람도 있었다. 미자 부모님은 밀항한 동포를 집에 숨겨주었다. 그중에는 광복 전에 일본 공장에서 일본군 강제위안부로 일했던 여성도 있었다. 갖은 고생을 하고 고국으로 돌아가 시집까지 갔지만 전쟁 중에 일본에서 일했다며 시댁에서 종군위안부였다는 의심을 받아 소박맞고 쫓겨났다고 했다.

관동대지진 후에 벌어진 조선인  학살 당시, 똥장군에 숨어 목숨을 부지했다는 아저씨도 4.3사건에 쫓겨 딸네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동네 사람들과 뒷산으로 도망가 살 수 있었지만 군인들에게 아기 울음소리를 들킬까 두려워 도망치던 중에 계곡에 아기를 던지고 온 부모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평화리에서 도망쳐온 젊은이도 숨겨주었다. 그 청년에게서 미자네 가족이 고향을 떠난 후 벌어진 일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결국, 연락이 끊어진 미자네 외삼촌 일가는 광복 후 바로 일본에 협력한 친일파라는 꼬리표를 달고 외삼촌과 외사촌이 죽임당했다고 한다. 그 후 집도 땅도 빼앗기고 남은 가족들끼리 마을을 떠났단다. 미자 어머니는 구슬피 울더니 제사를 지낼 때마다 외삼촌 가족의 명복을 빌어주었다. -273~274쪽 

 

외면했거나 잘 몰랐던 우리 역사와 모습을 이방인의 시선으로 접하게 되면 여러가지 감정이 솟구치곤 한다. 타국의 역사를 자세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경외감이 들면 들수록 우리 자신의 모습에 화가 나고 부끄러워진다. 그리고 만약 그 이방인이 일본인이라면, 고마운 마음도 함께 생겨나는건 비단 나 혼자만의 경험은 아니리라. 

 

 

자신이 일본인 학교에 본명으로 다니던 때의 이야기와 한국전쟁으로 친척들이 몰살당한 일, 조선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 통학 도중에 불한당 같은 사람들에게 괴롭힘당한 일, 통명이라 부르는 일본 이름을 대고 출신을 숨기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재일교포에 대한 이야기....

그중에서도 붕수가 조선학교의 수학여행으로 북한에 다녀온 이야기가 기억에 남았다.

"재일교포는 동포의 과거를 간직한 사람들이야."

동포란 현재 북한과 남한, 두 개의 나라로 분단된 한민족을 뭉뚱그려 부를 수 있는 편리한 말이었다.

"일본 식민지 시절의 기억을 그대로 간직하고 새 기억을 덮어씌우지 않고 있거든. 일본에 살며 순수 배양된 언어와 문화, 한반도에 사는 동포들이 이미 버린 것까지 그대로 사용하지. 북한에 가서 절실하게 깨달았어. 사실, 한반도 동포들은 재일교포의 존재를 알지 못해. 타향살이하는 재일교포는 고향을 그리워하며 고향에서와 같은 삶을 살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지만 정작 고향 사람들은 재일교포의 존재를 모르고 옛것에도 흥미가 없어."

붕수는 쓸쓸하게 웃었다.

"북한도 남한도 자꾸자꾸 변화해가. 하지만 우리 재일교포는 변하지 않아. 그래서 동포는 동포라도 같은 동포가 아니야. 재일교포는 북한사람도 남한사람도 아니야. 그냥 재일교포지. 일본에 살며 일본 문화를 흡수하면서도 동시에 동포의 옛 문화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 우리는 이제 일본사람도 북한사람도 남한사람도 아니야. 그리고 더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어."

미자는 놀랐지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일본에서 불고깃집 하는 자신이야말로 재일교포의 존재를 현실 세계에서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326쪽

 

잘 알려져 있다시피, 현재 일본에는 재일조선인, 오키나와인 그리고 아이누족 등 크게 세 개의 소수민족이 존재한다고 한다. 그렇지만 일본 정부는 소수민족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문제 해결은 문제 인식으로부터 출발한다.라는 명제에 비추어볼 때, 일본 정보의 태도는 문제 해결을 거부한다기보다는 문제 인식을 거부함으로써 문제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고 있는 셈이다. 이것이 바로 잘못된 역사에 대한 일본 정부의 그릇된 역사관이라 하겠다. 



끝으로,

세 명의 주인공 중 하나인 마리의 사연이야말로 이 소설의 주제와 직접 맞닿아 있으며 작가의 관점이 잘 드러나 있다. 전쟁의 참상과 함께 오늘날 일본인에게 기대되어지는 마음가짐과 자세를 가장 잘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에, 다소 길지만 인용해 본다. 

 

마리는 삼 년이나 이세자키초에서 일하며 로쿠초메 너머로는 가본 적이 없었다. 그 너머로 가면 기억이 되살아날 것 같아서였다. 지금 자신의 손을 잡은 가쓰시 오빠의 이 손을 잡고 미하루다이의 집에서 내려오던 언덕길. 공습으로 타죽은 사람들의 팔다리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수습해주는 사람도 없었다. 초여름의 뜨거운 태양 아래서 썩어들어 가던 팔다리.

마리는 속속들이 기억하고 있었다. 공습 날 아침, 새까맣게 타죽은 가족.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내 손을, 내 손가락을 하나하나 억지로 펴서 캐러멜을 빼앗아갔던 아주머니, 내 그릇의 감자를 날름 먹어버린 아저씨. 가쓰시 오빠가 찾아낼 때까지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았다. 시설에서는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았다.

나뿐만이 아니다. 길바닥에서 죽은 사람들의 주머니를 뒤져 지갑을 훔치던 사람. 공습으로 부모를 잃고 불구가 된 것도 모자라 사람들에게 천덕꾸러기 취급받던 전쟁고아들.

이런 일본인 따위 필요 없다. 이 세상에 증오스러운 일본인을 더는 늘리고 싶지 않다.

그리고, 마리는 알고 있었다.

일본인, 나 역시 일본인.

일장기를 흔들며 신이치 오빠를 필리핀으로 보냈다. 고철을 모으고, 총알 우표를 사고, 총탄을 보냈다. 싱가포르가 함락되었을 때는 등불을 들고 축하했다. '함락'된 싱가포르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리고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잊어버렸다. 일본인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였는지, 일본인이 얼마나 많이 죽어갔는지, 옥쇄를 각오하고 적을 쳐부수자, 한 사람이 한 명씩 죽이자며 학교에서 죽창을 들고 짚 인형을 찔렀다.

말살을 다짐했던 귀축미영을 받아들이고, 크리스마스를 축하하고, 징글벨 노래를 부른다. 헬로 아저씨들이랑 논다. 초코릿을 얻어먹는다. 헬로 아저씨는 우리 머리 위로 소이탄을 퍼붓고, 기관총을 난사하고, 원자폭탄까지 떨어트렸는데.

미군이 물러간 뒤 보도규제가 풀리며 원폭과 공습의 참상이 보도되었다. 헬로 아저씨들은 제정신으로는 할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한 짓을 광기에 휩싸여 저질렀다. 그런데도 모두 잊고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시치미를 뗀다.

마리는 하쿠라쿠의 할머니댁에 맡겨지고 나서 다닌 국민학교에서 교과서에 먹을 칠해 지웠던 것을 기억한다. 그때 시커멓게 먹을 칠해 지워야 했다. 먹칠하고 나서는 무엇이 적혀 있었는지 잊으라고 했다. 학교에서 선생님은 무엇을 가르쳤던가, 무엇을 가르치지 말아야 했던가. 제대로 공부할 수 없었다.

같은 일이 또다시 반복된다.

일본은 한국전쟁 특수로 경기가 살아났다. 군대를 갖지 말아야 할 일본이 경찰예비대라는 이름으로 군대나 다름없는 조직을 창설하고, 미군은 일본에서 한반도로 진군했다. 가족사진을 보여주며 눈물을 글썽이던 헬로 아저씨는 이번에는 한국에 폭탄을 떨어트린다.

어쩌면 '나는 조선인'이라고 말했던 욧짱의 머리 위로도. 나에게 주먹밥을 나누어주었던 욧짱의 머리 위로.

(...)

다들 행복하게 살 생각이었다. 전쟁해서 행복하게 살 생각이었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주려고 전쟁터에 가서 다른 누군가를 죽였다. 누군가를 행복하게 하고자 다들 공장에서 무기를 만들고 먹고 싶은 음식도 먹지 못하고 참아야 했다.

다른 사람을 불행하게 할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도 누군가의 행복을 위해 수많은 사람이 불행해졌다.

마리는 당황한 가쓰시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나는 행복해지지 못해도 괜찮아!"

약속을 지켜주었다. 나를 잊지 않아주었다. 이 다정한 사람을 위해, 내 행복을 위해 누군가를 불행하게 하고 싶지 않다. -338~342쪽

 

 

 

작가는 일본인으로서 마리의 입을 통해 일본인에게 묻고 있다.

'나 혼자 잘 살려고 전쟁을 한 게 아니었다. 다른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다들 전쟁터에 나갔고 공습에 가족을 잃었다. 그런데 국가는 전쟁터에서 죽은 사람만 용사 대우를 해주고, 공습으로 죽은 이들에 대해선 아무런 구제도 해주지 않았다. 개죽음일 뿐이라면서...'


공습으로 가족 전부를 잃은 마리에게 이들의 죽음은 결코 '개죽음'이 아니다. 개죽음일수가 없다.

그렇다면, 누구를 위해서? 무엇을 위해서?

'개죽음'이 아니라면, 이들의 죽음은 또한 뭘까?  

 

첫 선거로 선출된 의원들이 제19회 제국 의회를 열었고, 제국 헌법 개정안은 압도적인 다수로 가결되어 일본 헌법이 탄생했다.

그날 아침, 고다마 선생님은 교단에 서서 볼에 홍조를 띠고 말했다.

"이제 두 번 다시..."

혼잣말하듯 다시 한 번 반복하고는 칠판 쪽으로 빙글 몸을 돌아 아이들에게 등을 돌렸다. 선생님의 등이 부들부들 떨렸다.

마리는 가슴이 아팠다. 마리에게 두 번 다시 전쟁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제 두 번 다시 어머니와 아버지가 불에 타죽지 않음을 의미했다. 이제 두 번 다시. -237쪽

 

'유엔평화유지군'이라는 명목 하에 자위대의 행동 반경이 넓어지고 있다. 이제 일본은 아시아 1,2위를 다투는 군사력을 마음만 먹으면 자국 영토를 넘어 전 세계 어느 지역으로까지 파견할 수 있게 되었다. 평화헌법을 수정하려는 시도 역시 줄기차게 이루어지고 있다. 북한의 핵위협에 한국보다 더 호들갑을 떨면서 불안감을 조성하는 것 역시 일본인들의 평화헌법 수호 의지를 약화시키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잘못된 역사 교육을 받은 일본의 전후 세대들은 침략국으로서의 일본, 전범국으로서의 일본이 아니라, 세계 최초의 피폭국이라는 일본만을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들의 잠재의식 속에 내재되어 있는 집단적인 피해의식이 보복으로 표출되어 다시 전쟁이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그 누가 보장할 수 있겠는가.


 

우리 역시 힘이 없어 짓밟혔던 가슴 아픈 역사일수록, 어리석게 되풀해했던 기막힌 역사일수록, 잊지 말아야 한다.

역사는 특히 잘못된 역사는 그 어떤 협상의 조건도 타협의 대상도 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사과도 그 어떤 책임 인정도 합당한 배상금 청구 노력도 없이, 그저 위로금 몇 푼 받고 위안부 문제를 없었던 걸로 하자며, 앞으로는 두번 다시 언급하지 않겠다고 약속까지 해준 한국인이 있다는 사실 역시 잊지 말자. 그 사람이 한때 우리를 대표하는 민선 대통령직을 수행했었다는 사실 또한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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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와 수잔 버티고 시리즈
오스틴 라이트 지음, 박산호 옮김 / 오픈하우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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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진 거라곤 사랑밖에 없는 남자에게서 그 사랑마저 빼앗아간 여자는 죽어 마땅하다."

 

 

이 책을 다 읽고나서 제일 먼저 떠오른 문장이다. 

어디서 주워 읽었는지 이젠 기억조차 나지 않지만, 모골이 송연해지면서도 왠지 모르게 카타르시스가 느껴진다. 배신과 분노와 복수의 감정을 이보다 더 자극하는 문장이 또 있을까?

 

이제 남자의 복수는 피할 수 없는 임무가 되었고, 그 수단은 폭력일 것이며, 그의 모든 행위에는 정당성이 부여되리라. 왜 폭력이 동원되어야만 하는지, 어째서 선악의 분별보다 성별의 차이가 더 부각되는지 등에 대한 질문은 설자리를 잃는다.

 

 

오늘날 문화 상품의 흥행여부는 이성적 판단이나 윤리적 규범이 아니라 원초적으로 자극시킬 수 있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는 것 같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녹터널 애니멀스>는 인간 대뇌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있다는 '파충류의 뇌'를 정확하게 명중시킨다. 만약 이 소설이 출판된다면 실패한 소설가 지망생이자 수잔의 전남편이었던 에드워드는 어쩌면 돈방석에 앉고 하루아침에 유명인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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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아이의 엄마이자 심장수술 전문의를 남편으로 둔 수잔에게 어느날 전남편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가 도착한다. 그녀의 전남편이었던 에드워드는 로스쿨을 다니다가 전업작가가 되려고 공부를 그만두었지만 결국 소설가가 되지 못한 채 보험 영업으로 전향한 인물이다. 그는 20여 년 만에 전처인 수잔에게 자신이 쓴  소설 원고를 보내온다. 소설의 제목은 <녹터널 애니멀스>. 성공한 대학교수('토니')가 아내('로라')와 십대 딸('헬렌')을 데리고 여름 휴가를 떠났다가 고속도로에서 만난 3인조 강도에게 아내와 딸을 잃고 혼자 살아남아 복수한다는 내용이다. 

 

 

진부한 내용이지만 이야기는 제법 흥미진진하게 펼쳐지고, 읽기를 주저하던 수잔은 서서히 물 속으로 잠영해 들어가듯 책 속으로 빠져 든다. 전남편 에드워드가 창조한 가상의 세계는 그녀를 과거 속으로 이끈다. 마치 바닷속처럼 나른함과 동시에 불안감이 엄습한다.

 

 

 

수잔이 처음에 에드워드의 책을 읽기로 동의했을 때 그 책이 그녀에게 이런 영향력을 발휘하리라는 걸 알았어야 했다. 지난 20년이란 시간이 하나도 흘러가지 않은 것처럼 에드워드가 부활하리란 점을 예측했어야 했다. 그리고 그가 살아나면서 이혼과 초기의 아놀드와 그녀가 생각하고 싶지 않은 다른 질문들도 떠오를 것이란 점을 예견했어야 했다. 하지만 이렇게 불안스런 흥분을 느낄 거라는 미래를 내다볼 수 있었을까? 그녀는 지금의 이 불안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 불안은 그 원인에 비해 터무니없이 심각하다. 그녀는 이 소설 속 토니의 이야기가 에드워드를 그녀의 마음속에서 부활시켰다는 점을 제외하고도,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그녀에게 또 다른 영향을 미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토니의 이야기 어딘가에 위협이 도사리고 있었지만 그게 뭔지 혹은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집안일을 하는 동안 기억을 뒤져 그걸 찾아보려고 애썼다.  -292쪽

 

 

 

"이 퍼즐에서 빠진 조각을 찾아봐."

에드워드의 요청대로 그의 소설 속에서 빠진 걸 찾아보려던 수잔은 어느덧 자신의 인생에서 빠진 게 무엇인지 골똘히 생각하게 된다. 

 

 

 

토니의 세계는 수잔의 세계와 닮았다. 그 한가운데에 있는 폭력만 빼면. 그런데 그 폭력 때문에 둘의 이야기는 전적으로 다르다. 이런 불운을 목격하도록 유도돼서 내가 얻는 게 뭘까? 수잔은 궁금했다. 이 소설은 토니의 인생과 내 인생 사이의 차이를 확대시키는 걸까, 아니면 우리 둘을 합치는 걸까? 이건 날 위협하는 걸까, 아니면 달래주는 걸까? 그런 질문들이 그녀의 머리를 스쳐갔지만 잠시 독서를 중단했는데도 아무 답도 떠오르지 않았다. -333쪽

 

 

 

수잔은 에드워드가 자신에게 소설을 읽게 만든 진짜 의도가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에드워드는 소설속 인물인 토니를 내세워 자신을 버리고 다른 남자('아놀드')에게 가버린 수잔에게 복수하려는 걸까?

소설속 주인공 토니와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수잔이 정신적으로 고통받고 스스로 자책하면서 아놀드와의 위태로운 결혼생활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게 목적일까?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녹터널 애니멀스>를 본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마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토니와 수잔>을 읽은 독자라면, 특히 이 작품을 쓴 오스틴 라이트가 무려 40여 년 간이나 대학에서 소설작법을 가르쳤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독자라면, 고개를 가로 저을지도 모른다. 에드워드 즉 오스틴 라이트는 [녹터널 애니멀스]에서 토니와 동료 교수 프란체스카 후턴의 대화를 통해, 복수야말로 가장 저열하고 원시적인 방식임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녹터널 애미널스17]

 

토니는 점심을 먹으며 프란체스카 후턴에게 말했다. "우리가 두 놈을 잡았어요. 내가 한 놈의 신원을 확인했고 경찰이 다른 놈을 죽였죠."

(....)

"당신은 놈이 얼마나 나쁜 놈인지 알기를 원하는 게 아니에요. 거기엔 눈곱만큼도 관심 없어요. 당신은 놈이 당신을 그런 식으로 다치게 해놓고 그냥 빠져나갈 순 없다는 걸 알리고 싶은 거예요. 당신의 자존심 때문에 그런 거라고요."

"놈이 내게 그런 짓을 해놓고 그냥 빠져나갈 순 없어요."

"이제야 솔직해지는군요."

그녀가 손에 얼굴을 기대자 금발 머리가 얼굴 한쪽으로 흘러내렸다. 그의 생각을 대변해주고 있는 그녀의 눈이 진지하면서도 아름다웠다.

"헬렌이 로라와 나에게 복수가 얼마나 원시적인 감정인지 설교하던 기억이 나요. 우린 복수와 정의를 아주 아슬아슬하게 구분했죠. 그때 나는 우리가 얼마나 문명인인가, 라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나요."

"당신은 문명인이에요. 문명인이 아닌 건 레이예요."

"그건 나에게 부담되는 말이에요." 토니가 말했다.

"당신이 부담이 된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되는 거예요."  -247~250쪽 中-

 

 

 

결국 토니는 자신이 받은 상처를 똑같은 방식으로 되갚아준다. 에드워드 역시 수잔에게 자신이 받은 수모와 모멸감을 똑같이 되돌려준다. 이보다 더 공평하고 통쾌한 복수극은 없으리라.  

 

그런데 오스틴 라이트는?

그도 정말 독자들이 자신의 작품을 '치명적이고 세련된 복수극'으로만 읽고, 즐기고, 기억하길 바랄까?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 작품이 단순히 치명적이고 세련된 복수극으로만 읽혀지지 않는다. 

오스틴 라이트는 '이야기 속 이야기'라는 구조를 통해, 작가와 독자의 관계에 대해 (자신의 학생들에게) 설명을 시도하고 있는 건 아닐까?

 

 

소설은 '쓰는 자(작가)'와 '읽는 자(독자)' 둘 다 존재해야 마침내 완성되지만, 작가와 독자는 같은 시공간 속에 존재해서는 안된다는 철칙이 있다. 쉽게 말하면, 작가는 글쓰기 과정에서는 철저히 독자를 무시(?)해야 한다. 독자를 의식한 순간, 더 이상 내가 쓰지만 내 글이 아닌 (그들의) 글이 되어버릴 개연성이 크기 때문이다.

 

 

 

수잔 또한 에드워드처럼 자신도 글을 쓰고 싶어했었다는 걸 안다. 그렇지만 글쓰기 자체보다는 누군가에게 보여진다는 걸 스스로 의식함으로써 자신의 글을 자가검열하게 될까봐 두려워했다는 사실도 떠올린다.

 

 

 

 

 

 

 

글을 쓰는 대신, 그녀는 독자로써 남편 에드워드의 글들을 비평했다. 최대한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면서 순수하고 헌신적인 마음가짐으로 남편의 글을 대했다.(고 생각했다.)

 

'도대체 뭐가 문제였을까?'

 

 

에드워드가 말한다. 그러니까 말해봐. 내 책에 빠진 게 뭐지? 그녀는 대답한다. 그걸 몰라, 에드워드? 당신 눈엔 보이지 않아? 그 생각에 그녀는 잠시 옆길로 빠진다. 그녀의 삶에 빠진 건 뭘까? 그녀는 살아생전 다시 아놀드를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보게 될지 궁금했다. 설사 그게 증오가 아니더라도. 그녀는 아주 오랜 세월 그랬던 것처럼 습관의 힘이 그녀를 다시 잡아당기는 걸 느낀다. 지저분한 갈색 흙더미가 올라오는 겨울 잔디밭을 내다보면서, 아직도 에드워드를 용서하고 칭찬하고 비판하는 편지를 쓸 거라고 생각하거나, 아니면 어떻게 아놀드를 좀 더 강하게 대할 수 있는지, 좀 더 스스로를 존중할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하다가 수잔 모로는 꿈을 꾸기 시작한다. -481쪽

 

 

 

작품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그리고,

오스틴 라이트는 우리에게 묻는다.

 

"그러니까 말해봐. 당신 인생에서 빠진 게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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